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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경북 경주시 보문동 절터에 남아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보물)이다.  이 당간지주는 보문사 금당터가 있는 중심영역에서 북쪽으로  5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 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특히 지주 윗부분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연꽃잎을 새겨 놓고 있다. 이런 형태의 당간지는 다른 사찰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보문사 절터에는 현재 2개의 당간지주가 남이 있어 별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연화문>

보문동 일대는 신라를 건국한 경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명활산 고야촌이 있던 지역이다.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비부가 되었으며 설(薛)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설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총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 마을에 남아 있다. 설씨 집안이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보문사지 절터>

경주 보문사지(普門寺址) 연화문(蓮華文) 당간지주(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752-1
당간(幢竿)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 한다.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는 146cm이다. 기둥의 아랫부분이 상당히 매몰되어 있어 간대나 기단부의 구조를 확인 할 수 없다.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동서로 62cm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기둥의 안쪽 윗부분에 있는 너비 13cm의 큼직한 구멍은 당간을 고정시켰던 장치이다. 특히 이 당간지주의 윗부분 바깥 측면에 설정된 방형구획 안에는 지름 47cm의 팔엽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의 원래 소속사원이 동남쪽에 터가 남아 있는 보문사 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제작연대는 8세기 중엽 이후로 생각되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 중에서 가장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주목 되는 작품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위키백과, 2021년

경주 명활성(사적), 신라 경주를 방어하는 주요 산성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명활성(明活城, 사적)이다. 이 성은 경주 동쪽 명활산에 있는 둘레 약 6 km의 신라 산성이다.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이다. 성을 쌓은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405년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처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선덕여왕 때 비담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명활성은 경주에서 동해안 감포와 연결되는 도로와 불국사를 통해 울산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지나가는 주요 교통로에 있다. 동쪽에서 신라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았던 오래된 신라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명활성(사적)>

명활산은 신라 6촌 중 명활산고야촌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높지 않은 산이나 북쪽 악산과 함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북천이 흐르고 있다. 교통로를 지나가는 군사들을 제압하기 용이한 곳에 산성을 쌓고 있다. 동해안을 통해 경주를 공격하는 왜(倭)를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의 압력이 심했던 5세기에는 궁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주 명활성 (사적)
<경주 명활성 위치>

경주는 월성 남쪽의 남천, 서쪽의 형산강, 북쪽의 알천이 자연스럽게 해자를 형성하고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쉬운 지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과 북천(알천)>

성벽은 6세기 이전에 처음 쌓았으며 후대 여러차례 보수를 하면서 견고한 신라 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방어가 용이한 능선에는 초기 성벽 형태인 토성을 그대로 두고 계곡이나 방어에 취약한 곳을 석축으로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  계곡에 있는 성벽(복원)>

명활성은 성벽을 쌓은 석축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남아 있던 일부성벽을 보완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석축은 꽤 큰 자연석을 다듬어서 2층으로 쌓았는데, 석성과 토성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성 석축>

2012년 당시 명활성은 복원이 진행중이었는데 주변에 석축을 쌓은 많은 석재들을 볼 수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이 진행중인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옛 모습을 복하고 있는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복원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구역, 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능선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도 석축을 쌓고 있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이어지는 명활성 성벽에는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초기에 쌓았던 토축을 계속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으로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토축으로 보이는 경사진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에서 보이는 명활산>

명활성은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확장되어다. 진흥왕 때(544년) 다시 쌓았으며 진평왕 때(593년) 성벽을 확장했다. 진흥왕 때 성벽을 다시 쌓으면서 그 내역을 기록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으며 안압지에서 ‘명활산성비’로 추정되는 비석조각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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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산성비, 551년, 경주 명활산성>

551년 11월 중에 명활산성을 쌓고, 거기에 관여한 지방관, 역부를 동원한 지방의 촌주, 공사의 실무자와 공사내용, 비의 위치, 공사기간, 비문을 작성한 사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비는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나오는 최초의 것으로 군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통일기 이전 신라의 신분제와 관등제, 역역동원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삼국시대(신라) 551년, 경주 안압지>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산 334
이 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하는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토성(5km)과 석성(4.5km)이 함께 있다. 신라 실성왕(實聖王) 4년(405)에 왜병(倭兵)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산성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자비왕(慈悲王) 18년(475)에는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가 소지왕(昭知王) 1년(479)부터 월성(月城) 으로 다시 옮겼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는 비담(硏)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金碩信)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1988년 성 주변에서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만든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를 발견하여 당시의 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통일신라 절터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천군동 사지(사적)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으며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 강당, 중문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남북 79 m, 동서 61 m이다. 발굴당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기와이며 절터에서는 화강석 건축자재 일부를 볼 수 있다.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지만 다른 사찰과는 달리 금당 좌우에 회랑을 두고 있지 않다. 석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 이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절터에는 2기의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데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특징인 ‘두개의 탑’이 세워진 형태를 하고 있다. 마을 들판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9년에 복원하였다. 동탑은 기단과 탑신만 남아 있고, 서탑에는 머리돌 장식이 일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서탑>

현재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절터 동쪽편으로는 경주 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는 세계문화엑스포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절터>

삼층석탑 주변에는 절터에서 출토된 석재들을 볼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기와조각같은 유물들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특별한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재들을 볼 수 있는 삼층석탑 옆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천군동사지가 있는 마을은 경주와 동해안 감포 등을 연결해 주는 4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또한 보문관광단지에서 불국사를 거쳐 울산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이 마을 부근에서 4번국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인근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찰인 고선사가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천군동 사지(사적)>

경주 천군리 사지(千軍里 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548-1
이 절터는 여기에 있던 절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동리이름을 따서 천군리 절터라고 부른다. 무너진 탑재와 주춧돌만 흩어져 있었는데, 1938년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의해 중문·금당 · 강당자리가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1금당식 (雙塔一金堂式)이다. 앞에는 중문이 있고 그 안쪽 동서에 두 탑이 있으며, 그 뒤로 금당터와 강당터가 자리하고 둘레에는 회랑터가 있다. 중문터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이고, 금당은 앞면과 옆면이 각각 5칸, 강당은 앞면 8칸에 옆면 3칸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남북 길이는 79m, 동서 길이는 61m정도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기와와 벽돌 종류로 지붕 맨 윗부분(용마루)의 양쪽 끝을 장식하였던 치미(尾)는 국립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쌍탑식 절 배치를 따랐지만 금당 좌우에 회랑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 절터는 현재 논밭으로 변하여 원래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동·서탑을 1939년에 다시 세워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천관사지(사적), 귀족 가문의 후원을 받아 세워졌던 도심 사찰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이다. 천관사는 통일신라 때 김유신이 인연이 있었던 기생 천관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건립 이후 그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중기 이곳을 지나던 이공승이라는 사람이 천관사 내력과 관련된 시를 남긴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 사찰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가 있는 곳은 통일신라 때 귀족층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가문의 후원을 받아 도심 주택가에 세워진 사찰의 입지조건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관사지(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절터는 오랜 세월 농경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00년 이후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출토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석재>

천관사 석탑을 장식했던 팔부중상 중 가루라상이 표현한 탑신 몸돌이 출토되었다. 가루라는 ‘상상의 새’를 말하는데 이를 이인화하여 입을 새부리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팔부중, 8세기, 경주 천관사지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2012년 발굴.조사 현장>

천관사는 경주 오릉 동쪽편 들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동남쪽 500 m, 김유신 집터인 재매정(사적)과는 4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북동쪽 경주 월성 일대>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에서 천관사 절터로 들어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재매정(사적),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집터>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서쪽 경주 오릉 부근 마을>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4
이 절터는 도당산 서꼭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전관 (天官)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南明大人)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갈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 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天官寺)라 하였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李公升)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국립 경주문화개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효공왕릉(사적), 신라 52대 신문왕

경북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692년)의 무덤이다. 효공의 이름은 요(嶢)이며 신라 49대 헌강왕의 서자이다. 신라 말 혼란기에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세워졌으며 신라의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고 국력은 쇠약해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자사’라는 절 북쪽에 묻혔다고 한다. 무덤은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규모가 크지 않으며 장식도 거의 없다.봉분 주위에 둘레석으로 사용되었는 돌이 몇개 남아 있다. 신라말 혼란기에 조성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효공왕릉(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에 남아 있는 둘레석으로 보이는 돌>

왕릉은 신라 전성기를 대표하는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이 있는 사천왕사 동쪽 5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한번 후삼국 혼란기를 수습하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릉 앞쪽에는 ‘사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낭산 동쪽 나즈막한 구릉에 위치한 효공왕릉>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앞 절터(?)>

신라 효공왕릉(孝恭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반동
이 능은 신라 제52대 효공왕(재위 897~912, 김요)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3m, 지름 22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은 타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효공왕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뒤를 이어 16년 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1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