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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죽서루(보물), 삼척도호부 관아 누각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죽서루(竹西樓, 보물)이다. 삼척도호부 관아에서 경치좋은 곳에 세워손님접대 등에 사용하였던 누각 건물로 관동팔경으로 손꼽혔던 명소이다. 창건연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동안거사집>에 고려 원종 때(1266년)에 이승휴가 이곳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조선초 태종 때(1403년) 삼척부사가 건물을 디시 지었으며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유명인사들이 쓴 글이 걸려 있으며 ‘제일계정(第一溪亭)’이라 적힌 현판은 조선후기 남인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쓴 글씨라고 한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세워져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01-20220710<삼척 죽서루(보물)>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원래는 5칸이었는데 수리하는 과정에서 7칸으로 바뀌었으며 지붕도 원래는 다른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양식을 하고 있어 조선초기 건물형태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12-20220710<남동쪽에서 본 모습>

삼척 죽서루(보물) 14-20220710<북동쪽에서 본 모습>

삼척 죽서루(보물) 04-20220710<옆쪽에서 본 모습>

기둥은 원래 있던 자연 암반위에 올려 놓고 있으며, 일부는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자연환경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은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13-20220710<건물을 받치는 기둥>

건물은 사방이 뚫려 있는 2층 누각 건물이다.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지만 양쪽에는 일부 우물천장도 있어 여러차례 수리과정에서 다양한 양식이 섞여 있다. 내부에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글씨를 쓴 ‘제일계정’ 현판을 비롯하여 역대 삼척부사와 숙종, 율곡, 정조 등 유명인사들이 쓴 글들이 걸려 있다.

삼척 죽서루(보물) 11-20220710<죽서루 내부>

삼척 죽서루(보물) 07-20220710<허목이 쓴 ‘제일계정’ 현판>

삼척 죽서루(보물) 08-20220710<삼척부사를 지낸 이규헌이 쓴 ‘해선유희지소’ 현판>

삼척 죽서루(보물) 06-20220710<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

삼척 죽서루(보물) 09-20220710<양쪽 끝 우물천장>

<죽서루와 오십천>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소개된 명소로 관동팔경 중 하나이다. 오십천은 삼척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든 하천이다. 죽서루가 있는 곳은 오십천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빼어난 경치로 손꼽혔던 곳이다.

삼척 죽서루(보물) 05-20220710<죽서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십천>

삼척 죽서루(보물) 02-20220710<오십천 절벽 위에 세워진 죽서루>

삼척 죽서루(보물) 03-20220710<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오십천>

삼척 죽서루를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누각의 아래쪽으로 관아의 부속 건물들을 표현하고 있으며 절벽 아래로 배 한 척을 배치하였다. 실경보다는 이상향을 담은 그림처럼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죽서루도, 엄치옥, 조선 19세기>

죽서루가 있는 이곳은 옛 삼척도호부 관아가 있던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삼척읍성 남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삼척 죽서루(보물) 10-20220710<죽서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옛 삼척도호부 관아터>

삼척 죽서루(竹西樓), 보물
이 누각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가 쓴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403년(태종3) 당시 삼척 부사 김효손이 고쳐 지었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개의 기둥은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제일루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누각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1662년 (현종3)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는 171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는 1837년(현종 3)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정조, 율곡 이이 선생 등 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안내문, 삼척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삼척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부산 수영성, 경상좌수영 군영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경상좌수영성 옛터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좌수 수군 총책임자가 머물던 진영(鎭營)이다. 원래는 부산포에 있었는데 세조 때(1459년)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직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후 인조 때 수영만 일대가 홍수로 매몰되면서 부산항 부근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고 하여 효종 때(1652년) 다시 옮겨져 구한말 군사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벽 대부문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고 남문 홍예와 성벽 남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아 있다. 1995년 수영구가 분리되면서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곰솔과 푸조나무 등 오래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 수영성  02-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하마비>

옛 수영성 성벽은 공원 남서쪽 언덕에 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석은 현재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성벽은 조선후기 숙종 때 감만이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은 당시 축성방식이 적용되어 잘다듬은 큰 돌로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약 2,785m 높이는 4m 정도이며 4개의 성문과 4개의 수구, 3곳의 옹성과 여러 치성을 두고 있었다. 동문 바깥쪽 수영만에 군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었다.

부산 수영성<경상좌수영성 공간배치>

부산 수영성  09-20211125<공원 서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

부산 수영성  10-20211125<성벽>

수영성 공원 서쪽편 입구에는 옛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성문 앞에는 성을 수호하는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부산 수영성  01-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홍예기석>

부산 수영성  03-20211125<안쪽에서 본 모습>

경상좌수영성 남문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을 지휘하는 본부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성’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이다. 이 남문은 숙종 18년(1692)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동에 있는 옛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용되었고 1962년 6월 수영초등학교가 광안동으로 이전한 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현재 앞뒤에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또한 좌우 1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해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조선개 ‘박견’을 성문 앞에 둔 것으로 보아 경상좌수영성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남문 안쪽에는 이곳에 경상좌사영 관아가 있었던 옛터였음을 보여주는 좌수영성지곰솔(천연기념물)
좌수영성지푸조나무(천연기념물) 등의 고목들이 남아 있다.

부산 수영성  21-20211125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천연기념물)>

부산 수영성  04-20211125<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공원 안쪽에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각각 하나의 건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부산 수영성  15-20211125<수영고당이 있던 자리>

부산 수영성  12-20211125<독신묘와 수영산신당>

이곳에는 2017년까지 수영고당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고당은 임진왜란 대 왜병에 항거한 송씨할매를 기리는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독신묘와 산신당을 각각 하나의 건축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공원 서쪽에 있는 25의용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저항하다 죽은 수영성 성민을 기리는 곳이다. 당시 경상좌수사는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성민 25명과 수군이 왜군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산 수영성  11-20211125<25의용단>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동래 출신 어민으로 경상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다시 침범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부산 수영성  07-20211125<안용복 장군 사당>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하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수영성이 있던 곳을 199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부산 수영성  08-20211125<수영사적공원>

부산 수영성  05-20211125<공원 내부>

부산 수영성  14-20211125<뒷편 산책로>

좌수영성지, 부산시 수영구
이 성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던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좌수영이란 서울에서 보아 낙동강의 좌측을 담당하는 수군의 주진을 말한다.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본래 감만이포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고,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3)에 사천(수영천)의 범람으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1652년(효종 3)에 이곳은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또다시 옮겨왔다. 그 후 1852년(고종 32)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될 때까지 243년간 이곳에 있었다. 경상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그 관할하에 1개의 첨사영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덜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되었으며,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좌수영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의 총책을 맡고 있었다. 이 성의 초기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것은 165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 동원된 인력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돌에 언양,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지방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 같다. 성의 둘래는 양 2,784m, 성벽의 높이는 4m였으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리소흘로 대부분 폐허화되고, 지금은 성벽과 남문, 홍예,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최근에 시립박물관에서 부분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부산 동래읍성, 동래부 읍치

부산시 동래구 옛 동래부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동래읍성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말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일본과 교류하는 관문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원래 규모는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1km 정도의 일반적인 읍성이었는데 조선후기 영조 때(1731년)에 현재의 규모로 크게 증축하면서 평산성 형태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치 주변 도심의 성벽과 성문은 없어졌으며 마인산 주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북문과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의 시설과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부산 동래읍성 01-20211125<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06-20211125<서장대 부근 옛 성벽>

동래읍치 주산인 마안산을 중심으로 동서쪽 구릉과 읍치가 있는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다. 전체 규모는 둘레 약 3.8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읍성으로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를, 성문으로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을 두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19-20211125<북장대가 있는 마안산>

부산 동래읍성 18-20211125<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편 구릉>

부산 동래읍성 41-20211125
<동래읍성 축성비>

성문은 현재 북문과 북장대와 동장대 사이 언덕에 있는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은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한 조선후기 성문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앞쪽과 뒷쪽에 별도로 성문이 있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부산 동래읍성 20-20211125<북문(안쪽)>

북문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성문이라기보다는 비상시 퇴각하기 위한 암문 성격이지만 옹성과 문루를 갖추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부산 동래읍성 24-20211125<북문 바깥 옹성>

부산 동래읍성 23-20211125<옹성 내부>

부산 동래읍성 25-20211125<북문 바깥쪽 길>

부산 동래읍성 22-20211125<복원된 북문 동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5-20211125<북문 문루 옆에서 보이는 북문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26-20211125<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길>

부산 동래읍성 29-20211125<북문과 북장대 사이 성벽>

부산 동래읍성 28-20211125<북장대 아래 치성>

부산 동래읍성 30-20211125<치성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31-20211125<북장대 오르는 길>

북장대는 동래읍치 주산인 마인산 정상부에 있는 군사지휘소인 장대이다. 이곳에서는 동래읍치와 주변지역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부산 동래읍성 33-20211125<북장대>

부산 동래읍성 32-20211125<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래부 읍치>

부산 동래읍성 21-20211125<북문 서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4-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6-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5-20211125<북문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02-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로 연결되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4-20211125<북문 서쪽 구릉 정상부>

부산 동래읍성 03-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 성벽과 치성>

북문 서쪽 정상부에서 서장대 사이에는 조선후기에 쌓은 복원전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산 동래읍성 07-20211125<옛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8-20211125<허물어진 모습의 치성>

부산 동래읍성 09-20211125<치성 아래 복원된 성벽>

부산 동래읍성 10-20211125<서장대와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12-20211125<서장대>

부산 동래읍성 11-20211125<서장대 아래 성벽>

동래지역에는 삼한시대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가야 고분인 복천동고분군(사적)이 북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 14-20211125<서쪽 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고분군(사적)>

동래 읍성지 (東萊 邑城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 (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 (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 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藝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

경남 김해시 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이다. 삼국시대 가야 무덤인 부산 복천동고분군(사적)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없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통형 그릇받침 위에 목이 낮은 도기 항아리가 놓여져 있다. 그릇받침과 항아리의 규모가 크고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그릇받침 표면에 유약이 발라져 있다. 그릇받침은 11단으로 나누어 투창을 새겨 놓고 있으며 가운데 거북모양의 토우가 붙어 있다. 삼국시대 가야를 대표하는 도기로 손꼽을 수 있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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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

부산-복천동-고분군사적-01-20211125<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출처>

  1.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가야시대 지방세력 무덤들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에 있는 복천동 고분군(사적)이다. 동래읍성 북문 안쪽 구릉에 위치하고 가야시대 무덤들이다. 1969년 주택공사 중 우연히 무덤이 확인되어 여러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 땅속에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 땅속에 시신을 바로 묻는 널무덤 등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형식의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토기들, 철제갑옷과 투구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구한말까지 부산지역의 중심지였던 동래지역이 고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유적지 뒷편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복천박물관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1-20211125<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3-20211125<복천동 고분군(아래쪽)>

무덤들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구름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가며 만들어졌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8차에 걸쳐서 발굴,조사되었는데 191기의 무덤과 토기, 철기 등 12,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복천동 고분군 무덤 배치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9-20211125<복천동 고분군 입구>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0-20211125<무덤들이 있는 능선으로 들어가는 길>

복척동 고분군 능선 중앙에 위치한 전시관을 기준으로 위쪽에 위치한 무덤들이 먼저 발굴, 조사되었다. 1969년 처음 발견된 1호 무덤을 비롯하여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보물)이 출토된 7호분, 금동관(보물)이 출토된 10, 11호분, 청동칠두령이 출토된 21, 22호분, 많은 양의 철제갑옷(보물)이 출토된 38호 분 등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1-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4-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1-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1-20211125<금동관,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2-20211125<금동관,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1-20211125<말띠드리개, 5세기, 36호,15호,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3-20211125<신발모양토기, 5세기, 3호, 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4호분>

이 금동관은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에 비해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出’자 모양을 하고 있는 신라 금관과는 달리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판재를 잘라서 모양을 만들고 정으로 두드려 문양을 만드는 단순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5-20200212
<금동관, 보물, 10.11호 무덤,>

11호 무덤은 토기와 장식대도 등에서 신라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금동관은 신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와 가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가 모두 있다. 또한 당시 부산 지역은 대체적으로 5세기 이후 신라의 영향이 크게 미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8-20211125<고리자루 칼, 5세기 11호 무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4세기부터 대형무덤을 중심으로 말갖춤새의 모든 종류가 출토되고 있다.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신라의 영향으로 장식적인 금동제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9-20211125<가야 무사, 출토유물 형태로 복원한 모습>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6-20211125<투구,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7-20211125<목가리개,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2-20211125<갑옷, 5세기 10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9-20211125<팔뚝가리개,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2-20211125<말안장, 5세기, 10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3-20211125<발걸이, 5세기, 10호, 22호,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4-20211125 <재갈, 5세기, 10호, 69호, 111호 무덤>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는 1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가야시대 토기로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없어 보전상태가 양호하다. 그릇받침 가운데에는 거북모양 토우 한마리가 붙어 있는데 삼국시대 토기 중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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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 보물, 김해박물관 소장>

복천동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21.22호분은 돌덧널무덤으로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의 수량이 다른 무덤에 비해 상당히 많다. 청동제 칠두령(보물)을 비롯하여 고리자루큰칼, 철모, 목가리개, 말갖춤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5세기 전반 부산 동래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9-20211125<21호, 22호 무덤 내부(모형)>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6-20200212<청동 칠두령, 보물, 5세기, 22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5-20211125<투구,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8-20211125<목가리개,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0-20211125<허리가리개,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3-20211125<화살통, 22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3-20211125<복숭아모양 토기, 22호, 134호 무덤>

복천동 21.22호분
복천동 고분 구릉의 남쪽 정상부에 위치하는 21.22호분은 딸린덧널이 있는 돌덧널무덤으로, 복천동고분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규모나 부장품의 양이 다른 분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으뜸덧널은 길이 680cm, 너비 640cm, 깊이 290cm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475x160x160cm 가량의 석곽을 쌓아 4매의 뚜껑돌로 덮고 밀폐한 구조이다. 무덤구덩이와 석곽 사이를 흙과 활석으로 채워 보강해 나가면서 네 벽을 동시에 쌓아 올렸고, 바닥에 조그마한 깬돌을 깔고 가운데 부분에 나무로 만든 덧널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이 있었던 자리에는 20매의 대형 덩이쇠와 함께 3점의 고리자루큰칼, 목걸이, 귀걸이, 청동제 칠두령과 토기, 철모, 곡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남쪽에서는 굽다리접시, 항아리받침대, 복숭아모양토기 등 각종 토기류, 호록금구, 철촉군, 마구류, 목가리개, 전복, 명주개량조개 등이, 북쪽에서는 각종 토기류와 함께 철촉군, 도끼,낫, 보습 등의 농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 주인공 발치 아래에서 순장된 3명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에서 약 50cm 가량 북쪽에 만들어졌으며, 길이 630cm, 폭 420cm, 깊이 270cm 가량의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나무로 만든 곽을 설치한 구조이다. 북쪽에서는 대형의 발형 그릇받침과 밑이 둥근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토기류가 남쪽에서는 낫, 창, 손칼 등 철기류, 동쪽에서는 철제 투구와 목가리개, 허리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복천동 21.22호분은 다량으로 출토된 부장풍과 그 성격으로 볼 때, 5세기 전반 무렵 동래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무덤이다. (안내문, 복천박물관, 2021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5-20211125<귀때토기, 5세기, 34호 무덤>

38호 무덤은 복천동고분군 중 최초의 딸린덧널이 있는 무덤이자 바닥을 갖추고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 무덤이다. 철로 만든 판갑옷, 비늘갑옷, 투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철제 갑옷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유물로 볼 때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전환기 무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8-20211125<38호 무덤 내부(모형)>

부산 복천동 38호분 철제갑옷은 가야 초기인 4세기에 만들어진 철제 갑옷이다. 투구, 목가리개, 갑옷으로 구성되어 있다. 갑옷을 구성하고 있는 철판들을 두드려 얇게 만들었으며 철판들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였다. 철제갑옷 구성품이 온전이 남아 있으며 철제품임에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1-20211125<복천동 38호분 출토 철제갑옷, 보물>

철제갑옷 일괄은 복천동고분군 제5차 발굴조사(1993~1995년)시 복천동 38호분의 으뜸덧널에서 출토되었다. 판갑옷은 세로로 긴 철판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였고, 목가리개 역시 긴 철판을 연결한 형태이며 가죽끈 흔적으로 보아 판갑옷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투구는 ‘S’자형으로 긴 철판 20매를 엮어 만들었으며 그 위에 작은 복발을 얹었다. 아랫부분에는 각각 2매의 철판을 엮어 볼가리개를 만들었다. 갑옷의 몸통 앞쪽에는 보수를 위해 작은 철판을 덧댄 흔적이 있어 판갑옷이 실전용 갑옷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복천동 38호 갑옷은 일괄로 확인되어 삼국시대 갑옷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기준이 된다. 또한 철제 방어구의 가장 빠른 사례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판갑 중 가장 가깝게 복원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야의 뛰어난 금속제련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복천박물관, 2021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0-20211125<통형동기, 5세기, 38호, 60호 무덤>

복천동 38호분
복천동 38호분은 고분의 남쪽 구릉에 위치하는 부곽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으로 복천동고분군에서 묘광의 길이가 가장 길다. 봉분의 규모는 자세하지 않으나 토층상태로 보아 덧널 위에 점토와 모래, 파낸 흙을 얇게 깔아 층층이 쌓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으뜸덧널은 길이 750cm, 너비 150cm 정도 크기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두께 10cm 가량의 나무판 수십매를 사용하여 535x250cm의 목곽을 만든 구조이다. 또 긴 벽을 따라 너비가 25cm 가량 되는 사각기둥을 세워 목곽을 튼튼하게 보강하였다. 곽과 구덩이 사이의 공간은 모래가 섞인 흙과 점토를 번갈아 가면서 채웠다. 무덤 바닥에는 점년에 크고 작은 깬돌을 깔고 길이방향으로 큰 돌을 놓아 단면 형태가 凹자형이다. 돌을 놓은 가운데 부분에는 멍석을 깔고 400점 가량의 화살촉을 나란히 엮어 5열로 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북쪽 모서리에 돌이 깔리지 않은 공간에는 순장자가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천동 38호분은 복천동고분군 최초의 딸린덧널무덤이자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바닥시설을 갖추고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 무덤이다. 또 가죽이나 나무가 아니 철로 만든 판갑옷, 비늘갑옷, 투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철제 방어용 무구를 갖추고 있다. 뿌리가 없는 화살촉과 함께 단면 삼각형의 화살촉이, 단면 마름모꼴의 짧은 창과 함께 고사리장식이 달린 긴 창 등, 이 고분에는 구식무기와 신식 무기가 함께 부장되었다. 즉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를 부장하고 있는 것이다. 복천동 38호분은 무덤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과거의 요소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전환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부산지역의 고대사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안내문, 복천동박물관, 2021년)

무덤들이 있는 능선 중앙 53, 54호분 무덤 자리에는 전시관을 설치하여 무덤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전시관 아래는 43~51호 무덤이 확인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2-20211125<무덤 내부를 볼 수 있는 전시관>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4-20211125<특이한 모양의 항아리 받침대, 5세기, 53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7-20211125<등잔모양토기,5세기, 53호 무덤>

능선 아래쪽은 대부분 1990년대 이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총 28기의 묘가 추가 확인되었다. 정상부에 있는 무덤들은 부곽이 대형묘가, 옆쪽으로는작은 규모의 무덤들이 배치되어 있다. 무덤이 주요 지점에는 화양목을 심어 그 위치를 표시해 놓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8-20211125<전시관 아래 43 ~ 51호 무덤 무덤이 확인된 자리>

아래쪽으로 73호, 69호, 71호, 78호 무덤 등이 표시되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7-20211125<아래쪽에 있는 무덤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2-20211125<아래쪽에 있는 무덤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8-20211125<능선 아래 탐방로(동쪽)>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21-20211125<아래쪽 끝부분, 83호, 84호 무덤이 확인된 자리>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7-20211125<56호, 57호, 64호, 65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2-20211125<능선 아래 탐방로(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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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57호B>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4-20211125<투구, 5세기, 93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3-20211125<판갑, 5세기, 112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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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164호분>

복천동 고분군은 옛 동래읍의 주산인 마안선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동래부 읍치가 있던곳으로 동래읍성이 고분군을 둘러싸고 있다. 고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지였으며 부산항에서 울산을 거쳐 경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는 거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5-20211125<능선 뒷편으로 보이는 동래읍성>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6-20211125<동래읍성 북문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4-20211125<동래읍성 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 고분군과 동래부 읍치>

1996년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이 개관되어 이곳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6-20211125<복천박물관>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옛 동래읍의 주산인 마안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낮은 구릉 위에 있다. 6.25 전쟁 이후 복천동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에는 판잣집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는데 1969년 주택 개량공사 중 우연히 무덤이 확인되어 긴급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수차례의 수습 및 시굴조사와 8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2세기 전반부터 7세기 초에 해당하는 200여 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구릉의 정상부에는 주로 4~5세기에 속하는 딸린덧널을 갖춘 대형의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 10,000여 점에 이르며 철제 유물이 많다. 특히, 단일 유적으로는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의 철제 갑옷이 출토되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잘 보여준다. 주요 유물로는 복천동 7호분 출토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보물), 10.11호분 출토 금동관(보물), 21.22호분 출토 청동칠두령(보물), 38호분 출토 철제갑옷 일괄(보물), 10.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 등이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안내문, 부산 복천박물관, 2021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