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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윤양계 고택, 19세기 중부지방 양반가옥

충북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있는 윤양계 고택이다. 이 가옥은 병마절제도위를 지낸 윤양계가 1873년에 건립되었다. 건물은  ‘-’자형 안채를 중심으로 서쪽에 사랑채를 동쪽에 별채를 두고 있다.  각 건물들은 대부분 ‘-’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앞쪽에 사랑채를 두고 안쪽에 안채를 두어 ‘ㅁ’자형을 이루는 전통적인 양반가옥과는 달리 여러동의 건물을 넓은 공간에 배치하고 있는 등 19세기 중엽 중부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윤양계 고택. 널은 공간에 안채, 사랑채, 별채 등의 넓게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앞 마당과 안채 마당 사이는 담장이 없는데 원래부터 그러지는 알 수 없다. 마당을 넓게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문간채. 바깥쪽을 향해 창문을 두고 있는 도시형 한옥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문간채. 문간방과 외양간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고 안채 앞 마당으로는 출입로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는 ‘ㄱ’자형 건물로 여러개의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는 앞면 3칸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과 누마루를 두고있다. 사랑채 뒷편으로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안채에 딸린 건물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을 향하고 있는 별채. 독립된 살림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안마당을 향해 방문과 툇마루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에서 보이는 모습. 상당히 큰 규모의 대저택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입구에 있는 고목

중원 윤민걸가옥, 충북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우리나라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형태는 사랑채가 있어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데 남자는 집밖의 사회적 일을, 여자는 집안의 생활과 살림살이를 맡아하는 생활방식에서 연유하고 있다. 마당은 주요 생활의 무대가 되는 중심 공간이며,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 통합이 이루어지게 하는 곳이라는 점을 이 가옥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가옥은 조선말기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형태로 집 뒤로 낮은 동산이 있고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형이다. ‘ㄱ’자형의 안채를 중심으로 왼쪽에 행랑채, 오른쪽에는 별당이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었지만 현재 행랑채는 없어졌고 사랑채는 조선중기 건축에 주로 썼던 사각뿔형 주춧돌을 사용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

충주 백운암, 구한말에 창건된 작은 암자.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백운산에 있는 작은 암자인 백운암이다. 구한말인 1886년 무당이었던 진령군 파평윤씨가 창건한 사찰이었다. 윤씨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으로 충청도로 피난왔을 때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예언했다가 임오군란 이후 진령군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원래는 요사채과 불당이 한 건물에 있는 작은 암자였는데 최근에 요사채와 삼성각을 세우면서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여래좌상(보물 1527호)를 모시고 있는데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작은 암자인 백운암. 고려시대 큰 사찰이었던 억정사지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주불인 대웅보전. 원래는 불전과 요사채를 겸했던 건물이지만 지금은 불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주청되는 철조여래좌상(보물 1527호)를 모시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1527호).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따르고 있는 철조불상으로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근 지역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삼성각.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1527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는 작은 암자인 백운암에 있는 철조여래좌상(보물 1527호)이다. 높이 87 cm 정도의 크지 않은 철조불상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불상은 8세기 통일신라 불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양감이 풍부하지 하지 않는등 후대인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있던 불상은 아니고 인근 사찰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고려시대 큰 사찰이었던 억정사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1527호).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따르고 있는 통일신라 철조불상이다. 최근에 보존처리하여 철조불상 본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보물1527호 04-20191208
보존처리하기 전 모습. 일반적인 불상처럼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상이 있는 충주 백운암. 구한말 무당의 신분으로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은 여자 윤씨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보물 1527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본존상 이래로 유행한 편단우견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이다. 얼굴은 몸 전체에 비해 작은 편이나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고 근엄한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고 어깨가 넓으며 가슴이 융기되었고, 결가부좌한 다리의 폭이 넓어서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양감있게 표현되었고 대의 자락에서 부분적으로 번파식 옷주름을 볼 수 있어 이 불상이 통일신라 8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상임을 알 수 있으나 양감이 8세기 불상만큼 풍부한 것은 아니며 항마촉지인의 수인도 전형적인 형식이 아니어서 시대가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엣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충주지역의 철불 중에서도 연대가 가장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호가 원만하며 조각양식도 좋은 편으로, 통일신라시대 이래 철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상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보물 16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옛 억정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대지국사탑비(보물 16호)이다. 이 비석은 고려말 활동한 승려 대지국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승탑과 함께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머릿돌은 없고 단순한 형태의 몸돌과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에는 해서체로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글씨가 온전히 잘 남아 있다. 근처 청룡사지에 남아 있는 보각국사탑비와 그 형태가 비슷하다.

대지국사 찬영(1328~1390)경기도 양주 출신이다. 14세에 서울 삼각산 중흥사에서 출가하여 보우의 제자가 되었다. 중흥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말년에 충주 억정사에서 은둔하면서 수행하다가 입적하였다. 조선 태조는 대지국사라는 시호와 지감원명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비(보물 16호). 고려말에 활동한 대지국사의 행적일 기록한 비석이다. 단순한 형태의 조선 초기 비석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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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새겨진 비몸. 비교적 글씨가 잘 남아 있어 일반인도 읽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윗부분에 비석의 제목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씨. 해서체로 비문을 썼는데 글자가 선명하다. 비문은 박의중이 짓고, 승려 선진이 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서 내려다 본 들판. 충주와 원주를 연결하는 옛길이 지나가고 있다. 교통요지에 세워졌던 고려시대 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큰 길에서 보이는 절터.

억정사 대지국사비, 보물 16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고려말 고승인 대지국사의 비로 조선 태조 2년(1393)에 세워졌다. 비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비의 건립 연대 및 대지국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대지국사는 양주 한씨로 본명은 찬영이며, 고려 충숙왕 15년(1328) 충주에서 태어나, 14세에 중흥사에 들어가 32세부터 62세로 입적한 공양왕 2년(1390)까지 고려 왕실을 가까이서 섬겼다. 이 비는 거북모양 및 용머리가 없는 14세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와 모양이 같다. 주변에 기와조각이 많이 나오고 있고 석재 등이 흩어져 있어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대지국사의 부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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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 조선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크게 중창했던 사찰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는 옛 청룡사 절터이다. 청룡사는 고려말 활동했던 승려 보각국사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그가 입적하자 태조는 ‘보각국사’라는 시호와 ‘정혜원융’이라는 승탑 이름을 하사하고 청룡사를 크게 중창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실과 관련된 사찰로 조선후기 숙종 이후까지 큰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절터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빼어난 조형미와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를 비롯하여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절터 입구에는 조선후기 숙종 때 사찰을 크게 중건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위전비가 남아 있어 청룡사가 조선후기까지 명맥을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청룡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크게 중창하는 등 조선왕실과 관련이 있었던 사찰이지만 조선후기 폐사된 이후 보각국사와 관련된 유물 외에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절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위전비. 조선후기 숙종 때 지역민들이 청룡사를 중창하면서 그 경위를 기록해 놓고 있다.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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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전비에 새겨진 글. 청룡사를 중창할 때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등을 새겨놓고 있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
숙종 18년(1692)에 세워진 2 m가 넘는 크기의 4면비로 당시 청룡사의 창건 및 경영 등과 관련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이다. 청룡사는 고려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초기에는 보각국사가 머물면서 번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의 사실은 이 비로서 짐작할 수 있다. 비에는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으며 2~3차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어 절은 몇차례 걸쳐 보수.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받침돌은 거북모양이고, 머리부분은 탑의 옥개석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당시의 사찰경영을 위한 경제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승탑들.

SANYO DIGITAL CAMERA석종형 부도.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 부도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부분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쉽게 판독되지 않으나 ‘적운당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부도 주변에는 장대석을 방형으로 돌려 놓아 탑구를 형성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철터 안쪽에 있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탑이다.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년)는 고려말 활동한 승려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젊었을때는 청룡사에서 머물렀으며, 전국을 돌며 수도하다가 이곳 청룡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이름은 ‘정혜원륭(定慧圓融)’이다.

SANYO DIGITAL CAMERA보각국사탑(국보197호).  정식 명칭은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이다. 탑은 8각형평면을 기본으로 하고있는데, 기단 아랫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받침돌에는 사자상과 용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 몸돌에는 각면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탑신 몸돌에 새겨 넣은 신장상과 그 사이에 구름에 휩싸인 용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새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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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탑 앞에 세워진 석등(보물 656호). 높이 2.03 m로 받침돌과 화사석,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받침돌은 사자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가운데받침돌은 4각형이며,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화사석은 4각형 형태로 앞뒤로 창을 내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보각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보물 658호).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조선 태조의 명을 받아 승려 희달이 세운 것으로 개국공신 중 한명인 권근이 글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필체가 힘이 넘치며 격조를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뒷편에서 본 모습. 절터는 폐사된 후 울창한 숲으로 바뀌어 이곳이 절터임을 알기는 쉽지 않다.

충주 청룡사지 11-20110817고려말 청룡사에서 간행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보물 720-2호)』. 『금강반야경』의 주석서로서 발문에 따르면 1376년 보각국사의 설법을 듣고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