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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쐐기문자 점토판, 기록의 땅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 초승달처럼 생긴 지역을 말한다. 두 강에서 일어나는 홍수로 비옥해진 토지는 기원전 약 6000년 인간이 정착해서 살아온 이래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발전했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어에서 온 말로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시대 이후 이 지역을 표현하는 명칭으로 사용해 왔다. 그리스말로 ‘두 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문명이 도시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메소포타미 지방은 지형적으로 개방적이어서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여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사회와 문화를 보여준다. 또한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토목사업이 꾸준히 필요했으며 잉여농산물의 처리와 부족한 물자의 공급을 위해 교역이 활발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1<수로에 관한 기록, 기원전 약 2600~2350년, 초기 왕조 시대 후기, 닙푸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이라크 남부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강수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농부들은 수로와 저수리를 만들어 인근의 강에서 경작지로 물을 끌어왔다. 인안나 신전에서 발굴된 이 점토판에는 슈메르의 종교도시 납푸르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보수하고 수로가 성공적으로 기능하기를 인안나 여신에게 기원하는 내용이 슈메르어로 적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우루크(Uruk)은 유프라테스 강 동쪽 습지에 위치한 수메르계 도시국가이다. 전성기 인구는 5~8만명, 성벽 내 도시의 크기는 6 ㎢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규모로 세계 최초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또한 관리, 군인 등으로 계층화된 사회를 이루며 도시국가 시대를 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인 길가메시가 다스리던 도시국가로 <성경>의 <창세기>에도 표현되어 있다. 우르크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봉헌 상(像), 벽을 장식한 부조, 원통형 인장. 제의 용품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2<여인들과 그릇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륵~젬대트 나쯔르 시대 닙푸르 출토, 자연 역청이 섞인 석회암,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네 명의 여성을 둘씩 짝을 지어 조각한 원통형 인장이다. 여성들이 큰 원 하나와 그 위쪽에 원 두 개로 이루어진 물건을 잡으려고 팔을 뻗은 모습으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이 장면은 여성들이 고리 손잡이가 달린 토기 그릇을 만드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도시가 생기고 이처럼 노동이 분업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는 물건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교역을 시작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3<황소 장식 그릇 조각,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륵~잼데트 나쯔르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녹니석이 섞인 동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동석(凍石)으로 만든 그릇의 조각으로 황소 형상을 장식해 멋을 더했다. 황소들이 줄지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가축으로 길든 동물의 질서 정연함을 넌지시 드러내는 듯하다. 황소의 몸은 다양한 높낮이의 부조로 표현했고, 머리는 황소를 보는 사람을 향하도록 한껏 각도를 틀어 아주 입체적으로 조각했다. 이런 모양의 그릇은 주로 신성한 장소에 봉헌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4<테두리가 비스듬한 그릇, 기원전 약3300~3100년, 후기 우륵시대, 토기,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틀에 찍어 만든 이러한 형태의 그릇은 기원전 3000년대 말에 메소포타미아 남부 전역에서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크기다 대체로 일정하여 계량에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곡물을 분배하면서 메소포타미아 경제활동의 중심 기관 역할을 했던 신전에서 생산했다. 쐐기문자, 원통형 인장과 더불어 도시 문화를 이루는 근본적 요소들이 널리 퍼졌음을 뜻하는 중요한 물건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5<황소 머리 장식, 기원전 약 2100~2000년, 신-슈메르 시대, 동석 또는 사문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야생의 황소와 가축화된 황소는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 조각, 인장 등 다양한 장르에서 힘과 생색력을 상징한다. 황소 머리 장식은 그릇, 가구, 악기부터 건축과 기둥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장식하는데 쓰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최초의 도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기원전 3500~3000년 사이에 일어났던 중대한 사회문화적 변화는 ‘도시 혁명’으로 이어졌다.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물을 재분배하는 경제체제가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는 물품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경제 활동과 지적 활동의 도구로 문자를 만들어 활용하면서 인간과 지식과의 관계 역시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고대 도시 우륵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 고대 서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소원 성취를 기원하며 봉헌한 상, 궁전 벽을 장식하는 거대한 부조, 원통형 인장, 제의에 사용되는 물품 등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거대한 건축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6<맥아와 보릿가루 수령 내역을 적은 장부, 기원전 약3100~2900년, 잼데트 나쯔르 시대, 우륵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베개 모양의 점토판 앞뒷면에 초기 수메르 쐐기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점토판에는 양조업자로 보이는 쿠심이라는 사람이 수령한 보릿가루와 맥아의 수량이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기록은 경제활동과 관련된 것이 많은데, 숫자 기호와 그림 문자를 조합해 간단한 거래 내역을 적었다. 그림 문자는 그림의 대상만을 지칭하는 방식으로 형용사나 부사 같은 문법적 요소가 없는 문자 발전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점토판(Clay tablet)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쐐기문자(설형문자楔形文字)로 쓰기 위한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점토에 갈대펜으로 글자를 기록하였다. 내용으로는 계약서, 회계자료, 연대기, 왕명표, 법전, 외교문서, 종교문서, 문학작품, 사전류, 천체 관측표, 수표 등 오늘날까지 문서로 기록되는 거의 모든 내용들이 포함된다. 발굴되는 점토판은 오랜 세월 동안 작성되었으며 그 수량도 비교적 많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 사회상 등은 비교적 자세하게 밝혀지고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7<파종 축제 때 바칠 동물의 수를 적은 장부, 기원전 2043년경, 우르 제3왕조 시대, 드레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기원전 2043년경 바빌리에서 열린 아키투 파종 축제에 참여한 40여 명이 신에게 제물로 올린 동물이 종류와 수를 정하여 그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한 장부이다. 동물의 종류는 살찐 황소, 살찐 양, 양, 다 자란 염소로 구분되어 있다. 지금도 회계분야에서 사용되는 일람표의 아주 이른 사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8<구누라 여신의 옥좌를 위한 물품 목록, 기원전 약 2122~2004년, 우르 제3왕조 시대, 닙푸르 출토, 점토, 메트로폴린박물관>

구누라 여신의 옥좌에 사용할 벽돌 틀과 또 다른 물품을 축성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적은 점토판이다. 아교, 완두콩 가루, 석류 주스 등을 섞고 기름을 바르는데 재료 하나하나가 무엇인지 모두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벽돌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의식으로 여기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09<5단 곱셈표, 기원전 약 20~16세기, 고-바빌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수학과 회계는 아주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의 필기 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후기 우륵시대(기원전 약3500~3100년)에는 60진법과 10진법을 같이 쓰는 중량 측정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이 계산법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이용되었다. 이 점토판에는 1×5-5, 2×5=10으로 이어지는 5단 곱셈포가 적혀 있는데, 이와 같은 곱셈표는 매일 계산을 해야하는 필경사에게 유용한 도구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10<판사들이 판결문, 기원전 약 20~19세기, 중기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의 퀼테페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고대 앗슈르의 무역 식민지였던 카룸 카네쉬에서 발견된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판결이 앗슈르어로 기록되어 있다. “쿠룹-이쉬타르는 은 1/3마나와 2 1/2 긴 때문에 샤마쉬-타파이를 고소하려고 한다. 난니야, 까타툼, 우쭙-이쉬쿰이 이 사건의 판사이다.”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류 최초의 법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변호사는 존재하지 않아 당사자들이 자신의 소송을 왕이나 그 측근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11<마르둑 찬가, 기원전 약 1000~1년, 신-바빌리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바빌리의 수호신 마르둑을 찬양하는 노래를 새긴 점토판이다. 단정한 글자체로 오래전에 사라진 슈메르어와 당시에 쓰던 악카드어 문자로 번역한 찬가를 한 줄 한 줄 번갈아 가며 적었다. 이 점토판은 애가(哀歌)를 부르는 가수의 서재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애가 가수는 고대의 문학과 과학 문헌을 필사하고 설명을 덧붙이는 의례 전문가이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12<슈메르어-악카드어 가축 용어 목록, 기원전 약500~1년,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세분화된 가축의 명칭을 슈메르어와 악카드어로 나란히 열거한 용어 목록이다. 무려 380줄에 걸쳐 양, 염소, 소, 말의 수십가지 이름을 어형 변화표처럼 적은 점토판의 일부이다. 이 같은 용어 목록이 행정, 갈대, 고기 부위 등 주제별로 24종류가 있는데, 이를 자세히 보면 고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지식을 체계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13<처방전, 기원전 약 9~7세기, 신-앗수르 시대,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악카드어로 적은 신-앗수르 시대의 의료 기록이다. 가로선으로 내용이 구분되어 있는데 첫 번째 칸은 파손이 심해 내용을 판독할 수 없지만 두 번째 칸은 귀 치료를 위한 처방전이, 세 번째는 ‘유령의 손’ 증세, 즉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처방전이 쓰여 있다. 쐐기문자로 기록된 의료관련 문서에는 의학.약리학 용어, 식물, 무기물, 동물에서 추출한 원료를 이용한 치료 방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 20220803_14<승계와 상속에 관한 대화를 기록한 문서, 기원전 547년경, 신-바빌리 시대, 바빌리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승계와 상속에 관한 부자의 대화가 바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가장인 나디누는 아들 벨-카찌르가 그의 아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입양하겠다고 요청하는 것을 거절한다. 나디누는 입양한 아이가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안된다며, 오직 벨-카찌르의 생물학적 자녀와 자신의 핏줄만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유산 상속은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쐐기문자와 기록문화
문자의 발명은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최초의 문자가 기원전 3400년 무렵 이라크 남부에서 발명되었다. 초기에 작성된 문서들을 보면 문자가 주로 회계에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용어 목록’과 같은 다른 용도의 문서가 발견되면서 경제적 목적으로만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주장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후 의료와 과학 관련 문서를 비롯하여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충적토로 만든 점토판에 갈대 줄기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글자를 썼기 때문에 이들의 문자는 특징적인 쐐기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문자는 원래 슈메르어를 적으려고 고안되었지만 곧 악카드어를 쓰는 데도 차용되었고, 마침내 서아시아 전역에서 통용되던 여러 언어를 기록하는데에도 쐐기문자를 사용하기에 이르었다. 따라서 필경사들은 대부분 번역에 능통했고 여러 언어를 동시에 쓰는 문화가 번성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문화혁신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정착 촌락들이 확대되고 노동분업화로 생산력이 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신전이 중심이 된 도시 공동체와 이를 운영할 권력이 생겼다. 이러한 변화로 사람들이 주변 환경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또한 쐐기문자 체계를 창안하여 교역과 거래의 내용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복합 사회의 모습이 최초로 나타난 도시가 이라크 남부의 우륵이다. 그 이름을 딴 우륵시대(기원전 약 4200~300년)에는 지금의 시리아, 터키 남부, 이란 서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고대 서아시아 전 지역에 이러한 변화가 퍼져 나갔다. 초기 왕조시대(기원전 약2900~ 2350년)에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등장하였다. 슈메르어로 점토판 문서와 왕들이 남긴 명문이 작성되었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건축이 나타났다. 신전에 물건을 봉헌하여 신심을 표현하는 풍습이 있어 일상용품부터 정교한 상까지 다양한 물품을 신전에 바쳤다. 전형적인 신전 건축의 모습이 확립되었고 더불어 건축과 관련된 의례가 생겨났다. 원통형 인장은 행정업무를 위한 도구이자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질 이전에 등장했던 도장형 인장을 빠르게 대체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2<사자 모양이 인장 부적, 기원전 약 3300~2900년, 후기 우룩~젬데트 나쯔르 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출토,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대리석으로 만든 사자 머리 형태의 인장으로 도장면에도 사자로 생각되는 동물 세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 같은 도장형 인장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였으며 기원전 5000년대부터 사용되었다. 인장은 문서를 인증하는 용도로도 쓰였지만, 재료의 속성이나 인장에 새긴 내용에 깃든 보호 의미 때문에 부적처럼 인식되어 사용자가 늘 가까이 지니거나 착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3<채무 변재 증서과 보관함, 기원전 약 20~19세기 중기 청동기시대, 아나톨리아의 퀼테페 출토 추정, 점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앗슈르-나다가 카리야에게 빌린 은 9 2/3 마나를 갚아 채무가 없어졌음을 기록한 채무 변제 증서로, 함께 전시된 보관함은 점토판을 담는 봉투 역할을 한다. 세 개는 상환을 확인한 증인 세명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은 9 2/3 마나를 돌려받은 카리야의 아들 앗슈르-타브의 것이다. 실제로 계약에 인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4<상자를 나르는 사람들과 여신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2600~2500년, 초기 왕조시대 후기, 대리석, 메트로폴리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51
<인장>

초기 왕조 시대의 인장에는 신전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꾸준히 나타난다. 화면 오른쪽에 여신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상자를 나르는 사람들이 있다. 상자 하나는 제단 위에 놓여 있다. 이들 중 여신은 메소포타미아 신들이 쓰는 전형적인 뿔장식 관을 쓰고 있으며 다른 인물보다 크게 표현하였다. 여신이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앞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클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5<결투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2700~2600년, 초기 왕조 시대 전기,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52
<인장>

인장에 새기는 도상과 양식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달라졌다. 결투 장면은 초기 왕조 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주제이다. 주로 원통형 인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인장을 굴리는 대로 화면이 끝없이 연장되면서 생동감이 더 살아나기 때문이다. 보통 맹수를 제압한 자가 앞다리나 뒷다리만으로 선 두 짐승 사이에 서서 뿔이나 다리를 잡아 꼼짝 못하게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6<결투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2250~2150년, 악카드 왕조 시대, 조장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53
<인장>

결투 장면을 새긴 원통형 인장으로 특별히 근육의 세부를 공들여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메소포타미아의 결투 장면에는 사자, 황소 인간, 나체 영웅이 흔히 등장하는데 비해 이처럼 인더스 계곡에 서식하는 물소가 등장하는 경우는 드문데, 이는 악카드 제국과 하라파 문명(인더스 문명)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악카드어 명문에 따르면 이 인장을 소유했던 이는 이쉬리-일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7<경배하는 인물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16~15세기, 카슈 시대, 옥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54
<인장>

카슈 왕조는 기원전 16세기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다스린 왜래 민족이 세운 나라로, 인장에 긴 명문을 넣는 것이 카슈 시대의 특징이다. 수염 기른 남자가 스핑크스 아래에서 경배의 표시로 오는손을 들고 있다. 파리의 아들이자 인장의 주인 투나미삭이 마르둑 신에게 드리는 기도문 8줄이 새겨져 있다. 카슈 시대 인장에는 일반적으로 악카드어를 썼는데, 이 인장은 슈메르어로 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8<신과 정령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12세기경, 중-앗슈르시대, 벽옥, 대리석,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55
<인장>

물이 나오는 병을 든 신관과 새 머리를 한 정령을 새긴 중-앗슈르 시대의 원통형 인장이다. 신의 모습은 앞 시대의 짐리림 궁전 분수 조각과 비슷한 데 반해, 새 머리를 한 정령의 모습은 약 300년 뒤 님루드에 지어진 궁전을 장식한 석판 부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이는 원통형 인장에 조각된 이미지는 크기와 무관하게 다른 예술 분야와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알려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9<날씨를 관장하는 신과 정령 등을 새긴 원통형 인장, 기원전 약 1720~1650년, 고-시라아 시대, 시리아 출토, 적철광,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56
<인장>

날씨를 관장하는 두 신 사이에 새 머리를 한 정령 한 쌍을 두고 그 위로 나무와 산양 두마리, 날개 달린 태양을 새긴 원통형 인장이다. 개별 구성 요소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라고 해석될 수 있지만, 이러한 요소들을 조합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것은 오히려 레바트 지역(소아시아와 고대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지방)의 인장이나 상아제 조각에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인장과 날인
실감개 모양을 한 원통형 인장에는 다양한 도안과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젖은 점토판에 인장을 굴리면 도안이 반전된 모습으로 찍혀 나온다. 원통형 인장은 쐐기문자가 발명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 등장했으며, 기원전 500년 이후에 아람어 문자를 파피루스에 쓰고 줄로 묶은 뒤 점토 덩어리에 도장을 찍어서 봉인하는 관습이 널리 퍼질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하였다. 원통형 인장은 문서를 인증하려는 행정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아주 사적인 물건이기도 해서 때로는 장신구처럼 착용하거나 몸에 부적으로 지니기도 했다. 원통형 인장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지 않는 보석이나 준보석으로 만든 것은 원거리 무역망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원통형 인장은 작고 휴대하기 편리하여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도상을 전하는 자연스러운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협조를 받아 2024년까지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를 개최하였다. 교과서와 책자, 매체 등을 통해 보아왔던 점토판이나 쐐기문자 등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20220803_41<”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중앙박물관, 2022년>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금의 이라크가 있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지대에 자리했다. 기원전 3400~3000년 무렵 최초의 도시들이 탄생하였고, 쐐기문자를 발명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예술과 건축이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중대한 문화 혁신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신전이 있었다. 신전은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공간인 동시에 생산물이 모이고 재분배되는 경제 활동의 공간이었다. 복잡해지는 경제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 쐐기문자 점토판과 인장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관심사와 세계관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전시에서 소개하는 기원전 3500년대에서 기원전 500년대 사이에 만들어진 전시품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창의성과 높은 기술력을 보여준다. 원통형 인장과 장신구, 통치자의 상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은 복잡하고 세심하게 발전했다. 금곡, 보석용 원석, 원목과 같은 휘귀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주변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세계문화관 ‘메소포타미아실’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하였으며, 2024년 1월 28일까지 운영된다. 이번 전시가 인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화적 혁신과 뛰어난 기술,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2. “메소포타미아”, 위키백과, 2023년
  3. “Clay tablet”, “Uruk”, Wikipedia, 2023년

 

 

[이집트 기자(Giza)] 쿠푸의 배(Khufu Ship), 온전한 모습이 남아 있는 ‘태양의 배’

이집트 기자 대피라미드 동쪽에서 발견된 ‘쿠푸의 배(Khufu Ship)’이다. 1954년 구덩이에서 묻혔던 나무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1968년 재조립되어 피라미드 옆 ‘태양의 배’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태양의 신 라(La)가 우주를 여행할 때 태양의 배를 이용한다는 신화에 따라 만들어진 배이다. 배가 발굴된 구덩이 외에 2개의 구덩를 대피라미드 옆에서 볼 수 있다.  ‘쿠푸의 배’는 2021년 이집트 대박물관으로 옮겨졌다.

SANYO DIGITAL CAMERA<쿠푸의 배(Khufu Ship)>

‘태양의 배(ancient Egyptian solar ship)’로 불리는 선박과 구덩이는 고대 이집트 유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중 유명한 것이 ‘쿠푸의 배’이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배로 당시 나일강을 운행하던 선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배는 물에서 사용된 흔적이 있어 시신을 운반하는데 사용하거나 쿠푸가 직접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쿠푸의 배>

배는 주로 레바논 삼나무 널판지로 만들었으며 예루살렘가시Paliurus spina-christi )나무도 사용되었다. 길이는 43.4m, 너비는 5.9m이다.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항해용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SANYO DIGITAL CAMERA<노가 있는 뒷부분>

SANYO DIGITAL CAMERA<끝부분>

SANYO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모습>

대피라미드 동쪽에는 3개의 배모양 구덩이가 있다. 이 배는 대피라미드 옆 기반암을 깎아 만든 구덩이에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가 사후세계를 여행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태양의 배’를 묻었는데 여러 곳에서 이런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다슈르 보트와 아비도스 보트가 유명하다.

SANYO DIGITAL CAMERA<전시된 ‘쿠푸의 배’가 발견된 구덩이>

SANYO DIGITAL CAMERA<’쿠푸의 배’가 발견된 대피라미드 동쪽 공간>

SANYO DIGITAL CAMERA<다른 구덩이(북쪽)>

SANYO DIGITAL CAMERA<다른 구덩이(남쪽)>

‘태양의 배’는 대피라미드 남쪽에 박물관을 지어 배와 함께 발견된 로프를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을 전시했었다. 2021년 8월 그랜드 이집트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대피라미드와 ‘태양의 배’ 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카프레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배’ 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쿠푸의 배’ 모형>

SANYO DIGITAL CAMERA<쿠푸의 배>

SANYO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배와 함께 발견된 로프>

SANYO DIGITAL CAMERA<로프의 사용모습>

SANYO DIGITAL CAMERA<연결에 사용된 나무>

SANYO DIGITAL CAMERA<돌망치>

<출처>

  1. Khufu ship”,  Wikipedia, 2023년
  2. “Solar barque”, Wikipedia, 2023년

[이집트 기자(Giza)] 멘카우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Menkaure)

이집트 카이로 기자 지구에 있는 멘카우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Menkaure)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중 가장 작은 규모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 피라미드에 비해 작은 규모이지만 건축양식이나 자재 등은 거의 비슷하여 이 피라미드를 통해 다른 피라미드의 건축방식이나 내부 형태 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내부에서 사람뼈가 있는 나무관과 현무암을 만든 석관 등이, 피라미드 앞 신전 유적에서는 조각상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멘카우레는 이집트 4왕조 파라오로 카프레의 아들이자, 쿠푸의 손자이다. 약 22년 정도 통치했으며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성들을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쿠푸나 카프레의 피라미드에 비해 상당히 작게 건설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는 국력이 약해져 이전처럼 크게 지을 수 없는 당시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멘카우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Menkaure)>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는 원래 높이가 65.5m(현재는 61m)이며 밑면은 108.5m이다. 부피는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이 10%정도입니다. 크기는 작지만 세개의 피라이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조형미를 만들고 있다. 석회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외장재로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과 투라 채석장에서 가져온 흰색 석회암을 사용했다. 바닥면에서 외장재로 사용한 아스완 화강암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쪽면에는 큰 수직홈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196년 이집트 술탄이 피라미드 철거를 시도했던 흔적이다. 피라미드의 철거는 건설만큼 어려운 일이어서 작은 흔적을 남기고 그만두어야 했다.

SANYO DIGITAL CAMERA<멘카우레의 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아랫부분에 남아 있는 화강석 외장재>

SANYO DIGITAL CAMERA<피리미드 북쪽면>

640px-Menkaure_pyramid_scheme.svg<피라미드 내부, 위키백과, 2023년>

다른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앞에는 장제전이 있으며, 동쪽 방향으로 돌로 포장된 경사로가 있다. 멘카우레 계곡 사원은 1908년에 발굴되었는데 멘카우레 조각상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피라미드 남쪽에는 3기의 여왕의 피라미드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피라미드 앞 장제전>

SANYO DIGITAL CAMERA<장제전 앞 경사로>

SANYO DIGITAL CAMERA<멘카우레의 피라미드와 여왕의 피라미드>

기자 피라미드군(Giza necropolis라고도 함)에는 고왕국 제4왕조(BC2613~BC2494)시기 파라오였던 쿠푸(Khufu), 카프레(Khafre), 멘카우레(Menkaure)의 무덤으로 알려진 3기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 인류가 남긴 가장 크고 위대한 구조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와 함께 입구에는 대스핑크스(Great Sphinx)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이집트 기자 지구>

SANYO DIGITAL CAMERA<대스핑크스 부근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카프레의 피라미드 옆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카프레의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모습>

<출처>

  1. “멘카우레”, 위키백과, 2023년
  2. “Pyramid of Menkaure”,  Wikipedia, 2023년

[이집트 기자(Giza)] 카프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Khafre)

이집트 카이로 기자 지구에 있는 카프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Khafre)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중 2번째로 큰 규모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꼭대기에 흰색 석회암으로 만든 외장재(casing stones)가 남아 있다. 기자 지구 정문에서 볼 수 있는 장면으로 대스핑크스와 함께 기념촬영에 많이 등장한다. 피라미드 앞에는 제단과 스핑크스로부터 오르는 길도 남아 있어 웅장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기록이 있는 쿠푸의 피라미드와는 달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쿠푸의 후계자인 카프레의 피라미드로 짐작할 뿐이다.

카프레(Khafre, 재위 기원전 2558 ~ 2532년)는 이집트 제4왕조의 4번째 파라오이다. 쿠푸의 아들이자 제테프레(Djedefre)의 후계자 였다. 그의 뒤를 멘카우레가 계승했다고 한다. 그의 생애는 알려진 내용이 별로 없다.

SANYO DIGITAL CAMERA<기자 카프레의 피라미드(Pyramid of Khafre)>

피라미드는 제1중간기(기원전 2181–2055년)에 열렸을 가능성이 있으며, 19왕조(기원전 1292~1189년) 때 람세스2세의 명령에 따라 사원을 짓기 위해 흰색 석회암 외장재를 가져갔다. 1372년 아랍세력에 의해 열렸으며 1837년에 탐사가 이루어졌다.

SANYO DIGITAL CAMERA<남동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동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북동쪽에서 본 모습>

이 피라미드의 한변의 길이는 215.5m이고 높이는 136.4m이다. 쿠푸의 대피라미드에 3m 정도 낮으나 기울기는 가파르다. 바닥에 사용된 석회암 석재는 큰 편이지만 위로 갈 수록 크기자 작아진다. 하얀 석회암 외장석재가 상층부에 남아 있어 피라미드의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쿠푸의 대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석회암 석재는 인근 채석장에서 가져왔으며 외벽용 흰색 석회암은 동부 사막의 투라 채석장에서 나일강을 통해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면 근처 외장은 분홍색 화강암 석재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아랫부분>

SANYO DIGITAL CAMERA<하얀 석회암 외장재가 남아 있는 윗부분>

두개의 입구에서 무덤이 있는 묘실으로 연결된다. 하나는 높이 1.54m 위에 입구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바닥에서 지하로 통로가 연결된다. 묘실은 기반암의 구덩이를 깍아 만들었으며 그 위에 석회암 빔으로 만든 지붕이 있다.

624px-Chephren-Pyramide<카프레의 피라미드 내부, 위키백과, 2023년>

카프레의 피라미드는 동쪽 정문에서 대스핑크스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대스핑크스 옆에는 카프레의 계곡사원(Valley Temple)이 있으며, 피라미드까지는 경사로(Cause way)가 연결되어 있다. 피라미드 동쪽 앞에는 장제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장제전(Funerary Temple of Khafre) 유적>

SANYO DIGITAL CAMERA<앞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대스핑크스가 있는 곳으로 연결되는 길>

SANYO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카프레의 계곡 사원(Valley Temple)은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피라미드 계곡 사원을 대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집트 사원의 구성요소인 입구 홀, 기둥이 있는 안뜰, 파라오의 석상을 위한 다섯개의 벽감, 다섯개의 보관실 및 내부 성소를 잘 갖추고 있는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큰 돌을 블럭으로 석재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주로 석회암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석회암,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 등도 사용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카프레 계곡 사원(Valley Temple of Khafre)>

SANYO DIGITAL CAMERA<뒤에서 본 계곡 사원>

SANYO DIGITAL CAMERA<앞에서 본 카프레의 계곡 신전과 대스핑크스>

기자 피라미드군(Giza necropolis라고도 함)에는 고왕국 제4왕조(BC2613~BC2494)시기 파라오였던 쿠푸(Khufu), 카프레(Khafre), 멘카우레(Menkaure)의 무덤으로 알려진 3기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 인류가 남긴 가장 크고 위대한 구조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와 함께 입구에는 대스핑크스(Great Sphinx)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카프레의 피라미드와 대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대피라미드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카프레의 피라미드와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대스핑크스와 카프레의 피라미드>

<출처>

  1. “기자의 대피라미드”, 위키백과, 2023년
  2. “Great Pyramid of Giza”,  Wikipedia, 2023년

 

[이집트 기자(Giza)]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 쿠푸의 피라미드

이집트 카이로 기자지역에 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이다. 파라오 쿠푸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어 쿠푸의 피라미드(Pyramid of Khufu)라고도 불린다. 고대 그리스에서 언급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한 곳이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적이다. 기자(Giza) 지역에는 제4왕조 시기에 세워진 3기의 큰 피라미드가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6세기에 약 20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1311년 잉글랜드 링컨 대성당이 세워지기까지 가장  높은 인공구조물이었다.

쿠푸(Khufu, 재위 기원전 2598 ~ 기원전 2566년)는 이집트 제4왕조 파라오이다. 대피라미드를 건설했지만 그 외에 쿠푸와 관련된 유물은 거의 없다. 시나이 반도 원정에 나섰다는 기록과 아스완 엘레판티네섬에 그의 흔적을 보여주는 비석이 남아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평화로운 시기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기자의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 지구내의 언덕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20년 동안 연3만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어 지어졌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건축방법에 대해서 수많은 의견들이 있다. 높이는 약 146.5m였는데 현재는 돌들이 깎여나가 138.8m 정도이다. 아랫면의 길이는 모두 230.4m로 바닥 4면의 길이 차는 58mm 정도로 정밀하다. 바닥의 4면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어 거의 완벽한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하얀색 석회암 외벽으로 덮여 있었는데 바닥 부근에만 일부 남아 있고 안쪽에 쌓았던 돌들만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남서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남동쪽에서 본 모습>

대피라미드에는 약 230만개의 돌로 만든 블록으로 구성되었는데 약 550만톤의 석회석, 8000톤의 화강암, 50만톤의 모르타르가 사용되었다. 바위들은 대부분 피라미드 남쪽 기자의 채석장에서 끌고 왔다. 외벽용 흰색 석회암은 동부 사막의 투라 채석장에서 나일강을 통해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바위인 화강암은 왕의 방을 구성하는 것인데 무게가 약 20~80톤에 이른다. 멀리 아스완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는 약230만개의 석재들>

SANYO DIGITAL CAMERA<피라미드 석재들>

SANYO DIGITAL CAMERA<피라미드 석재들>

SANYO DIGITAL CAMERA<피라미드를 찾았던 후대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씨들>

대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원래 흰색 석회석으로 덮여 있는 사각뿔이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걸어서 올라갈 수 없지만 옛날에는 걸어서 올라갔다가 떨어져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많다고 전해진다. 피라미드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오래된 자료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꼭대기와 모서리 사선>

SANYO DIGITAL CAMERA<바로 아래에서 본 모습>

대피라미드는 완공 당시 전체가 흰색 석회암으로 덮혀 있었다. 외벽은 1303년 대지진으로 일부가 허물어졌으며 그후 술탄들이 성과 요새, 사원 등을 짓기 위해 피라미드 외벽을 대거 벗겨갔다. 카이로에 있는 이슬람 사원에서 피라미드 외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흰색 석회암으로 덮힌 모습은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바닥면 부근에는 흰색 석회암이 일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바닥면 부근에 남아 있는 외장용 흰색 석회암>

SANYO DIGITAL CAMERA<외장용 흰색 석회암이 남아 있는 카프레의 피라미드 상층부 >

피라미드 내부에는 3개의 주요 방(왕실, 여왕실, 지하 방)을 비롯하여 대회랑 및 다양한 복도와 통로로 구성되어 있다. 피라미드 서쪽편에 내부로 들어가는 2개의 출입구가 있다. 하나는 원래 만들어졌던 통로 입구이며, 다른 하나는 ‘강도의 터널’이라 불리는 후대인들이 강제로 뚫은 통로이다. 관광객들은 ‘강도의 터널’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입장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아침 일찍 가야 들어갈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는 2개의 입구, 열을 지어 들어가는 관람객>

1029px-Great_Pyramid_Diagram.svg<피라미드의 구조, “기자의 대피라미드”, 위키백과, 2023년>

피라미드 동쪽에는 장제전(Funerary Temple), 경사로(Cause way), 계곡 신전(Valley Temple)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장제전 양쪽으로 ‘태양의 배’를 묻은 구덩이(Boat pit)가 있다. 주변에는 여왕의 피리미드, 신전, 귀족들의 무덤(Mastabas) 등이 배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쿠푸의 장제전 건물터 주변>

SANYO DIGITAL CAMERA<경사로(Cause way)>

동쪽편에는 4기의 작은 피라미드가 있는데 쿠푸왕 여왕의 피라미드라 불리고 있다. 대피라미드에 비교되어 왜소해 보이지만 작은 규모는 아니다.  하얀 석회암 외피는 남아 있지 않으며 훼손이 심한 편이다. 그중 하나는 심하게 파괴되어 인식할 수 없으나 관으로 사용했던 석재가 발견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대피라미드 동쪽 여왕의 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여왕의 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여왕의 피라미드>

대피라미드 동쪽에는 3개의 배모양 구덩이가 있다. ‘태양의 배’는 태양의 신 라(La)가 우주를 여행할 때 태양의 배를 이용한다는 전설에 따라 쿠푸왕이 하늘을 여행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배이다.

SANYO DIGITAL CAMERA<배모양 구덩이>

SANYO DIGITAL CAMERA<다른 구덩이>

SANYO DIGITAL CAMERA<복원된 ‘태양의 배’>

기자 피라미드군(Giza necropolis라고도 함)에는 고왕국 제4왕조(BC2613~BC2494)시기 파라오였던 쿠푸(Khufu), 카프레(Khafre), 멘카우레(Menkaure)의 무덤으로 알려진 3기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 인류가 남긴 가장 크고 위대한 구조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와 함께 입구에는 대스핑크스(Great Sphinx)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이집트 기자 지구>

SANYO DIGITAL CAMERA<기자 지구 입구에서 보이는 대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스핑크스와 대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카프레의 피라미드와 대피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대피라미드>

<출처>

  1. “기자의 대피라미드”, 위키백과, 2023년
  2. “Great Pyramid of Giza”,  Wikipedia,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