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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404호), 영산강 이북 백제 토착세력 무덤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토착세력의 무덤이다. 이곳에는 4개의 큰 봉분이 남아 있으며 발굴.조사결과 32기의 다양한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독무덤, 굴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으로 다양하며 4세기부터 7세기초까지 오랜 세월동안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제신발, 관모, 고리자루큰칼 등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려주는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나주 복암리는 현 나주시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영산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확인된 무덤형태나 유물 등으로 볼 때 영산강 유역으로 진출한 백제세력이 토착세력을 점차 지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404호). 현재 이곳에는 4기의 큰 봉분을 볼 수 있는 옹관묘부터 굴식돌방무덤까지 여러시대의 무덤이 하나의 봉분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1호분.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2호분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3호분. 옹관묘, 횡혈식석실묘, 석곽옹관묘 등 7종류의 묘제는 물론 금동신발과 은제관식.큰칼.금귀고리 등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 799점이 출토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복암리 4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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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암리 출토 옹관묘

OLYMPUS DIGITAL CAMERA신, 금동, 삼국시대(백제) 6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병,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접시, 삼국시대(백제) 6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칼, 금동.은,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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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복암리 5호분 출토품, 6세기 중엽, 1. 은제 관꾸미개,

OLYMPUS DIGITAL CAMERA2. 은제 허리띠 꾸미개

나주 복암리 고분, 사적 404호,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에는 4기의 고분이 있다. 이 지역은 영산강의 본류를 낀 구릉지대로서 원래 3기 정도가 더 있었으나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3호분에서는 영산강유역에서 확인되는 옹관묘, 횡혈식석실묘, 석곽옹관묘 등 7종류의 묘제는 물론 금동신발과 은제관식.큰칼.금귀고리 등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 799점이 출토되었다. 이와같이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것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복암리 3호분은 옹관(토기 항아리관) 중에서 이른 시기(3세기)에 해당하는 옹관묘를 비롯하여 횡혈식석실분(굴식 돌방무덤) 중에는 7세기 전반끼지 내려오는 묘제가 한분구 안에서 확인되고 있어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까지 400여년간 동일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집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한분구 안에서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는 복합묘제고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이다. 이를 통해서 영산강유역에서 나타나는 다장과 대형분구의 성토방법.과정.각 묘제간의 관계, 옹관묘와 석실분의 변천과정.매장방법 및 부장유물, 일본과의 관계, 영산강유역 토착세력과 백제와의 관계 등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영산강유역 고대사 연구와 규명에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고분이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4. 안내문, 국립중앙박물관

나주 반남고분군(사적 513호), 영산강유역 백제 토착세력 무덤

전남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남아 있는 반남고분군(사적 513호)이다. 영산강 하류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 비교적 넓은 지역에 40여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에는 다른지역에서는 없는 대형옹관을 비롯하여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른 시기의 것은 땅을 파서 옹관을 안치한 후 봉분을 쌓았으나 후대에는 봉분을 쌓고 정상부에 옹관을 안치하였다. 옹관고분은 영산강 유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매장방식으로 지역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형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영산강유역 토착세력일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나주국립박물관에 세워졌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에서 내려다 본 반남면 일대(신촌리, 덕산리). 반남고분군은 삼한시대 마한과 삼국시대 백제의 지역 토착세력의 무덤들이다.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평지에 옹관을 묻고 봉분을 조성한 형태이다. 현재까지 약 40여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고분 분포도(안내문, 나주시청, 2009).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동쪽 신촌리에 9기, 덕산리에 14기 이상, 서쪽 대안리에 1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자미산성.

SANYO DIGITAL CAMERA나주 신촌리고분군과 덕산리고분군. 반남초등학교 주변 평지에 여러기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9호분 등이 발굴되었으며 금동관(국보 295호)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금반지, 고리자루칼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분들은 5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종되고 있으며 삼국시대 백제 지방세력의 무덤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신촌리 1호분.

SANYO DIGITAL CAMERA신촌리 2호분, 3호분. 평지에 봉분을 크고 웅장하게 쌓은 것으로 봉분을 먼저 쌓고 그 윗부분에 옹관을 묻었다고 한다.

나주 반남 고분군 사적513호 21-20191011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보 295호).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과정에서 신촌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지역토착세력이 제작한 것인지, 백제에서 지역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인지는 알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1호분. 신촌리 1호분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에 따라서 분류하기는 했지만 동일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2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3호분. 봉분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으로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4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5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6호분

 

SANYO DIGITAL CAMERA덕산리 1호분에서 남쪽으로 700 m 정도 떨어진 곳에 7~11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나주 덕산리 고분군, 전남 나주시 반남면 덕산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 덕산리에 남아 있는 고분들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대의 무덤 가운데 일부가 1930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이 때 무덤의 형태와 성격이 밝혀졌다. 당시 발굴된 고분은 바깥 모습이 하나의 봉토를 이루고 있으면서 내부에는 3개의 옹관(토기 항아리 관)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무덤 가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도랑이 있었다. 당시 출토된 장신구 등의 유물과 옹관묘는 일본 규수지방의 옹관묘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비교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서북쪽에 위치한 대안리 1~3호분. 자미산성 서쪽편에 위치한 대안리 일대에는 1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안리 1, 2호분

SANYO DIGITAL CAMERA봉분의 규모가 큰 3호분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서쪽편 언덕 아래에는 4~9호분이 있는데 그 중 3기만 현재 봉분을 볼 수 있다. 그 중 9호분은 반남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반남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인 9분과 그 앞에 있는 작은 8호분. 9호분에서는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등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대안리 7호분.  그 너머로 4~6호분이 있는데 봉분은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나주 대안리 고분군,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의 고분군은 삼국시대의 것이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바닥이 둥근 원형고분과 사각형인 방대형고분으로 나뉜다. 방대형 고분인 9호분에는 간단한 도랑이 둘려져 있다. 이 고분들의 관을 들여다보면, 도기 항아리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어 묻는 무덤형식으로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관묘이다. 옹관묘는 이 지역의 토착적인 묘제이다. 특이한 것은 원형 고분인 5호분을 발굴한 결과 현실(관을 안치하는 공간)의 4벽과 천상을 판석으로 짠 석실분이라는 것이다. 석실분은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통합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백제 지배계층의 묘제가 일반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여겨진다. 6호분은 인멸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시굴조사를 통해 정비하였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반남고분군
이곳 반남 고분군에는 대형옹관고분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다. 대형옹관고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 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항아리)을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 고분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구별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고분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은 AD 3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3세기동안 영산강유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3세기경에는 옹관절반을 지하에 묻는 반지하식이었으나 4세기 붕반부터는 지상식으로 발전하며 이때에는 분구의 규모가 훨씬 대형화되어 그 규모가 40~50 m에 이른다. 대형옹관고분은 나주 반남 일대는 물론 영암, 함평, 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형성되고 있으며, 이 지역 고대 세력의 묘제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 옹관고분의 밀집도로 보아 이곳 반남 지역이 고대 지배세력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옹관고분의 출토유물은 영산강유역 계통의 유물이 주를 이루나 후기에는 백제계, 일본계의 유물이 섞이게 되며 가야계의 특징도 일부 보이고 있다. 당시 사회가 백제,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산강의 고대 수로 조건을 이용한 해상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5세기 말경에는 대형옹관고분이 쇠퇴하고 횡혈식석실분, 전방후원형고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석실은 토착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지역의 고대세력이 능동적으로 횡혈식석실분을 채용하면서 사회발전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는 6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관제에 본격적으로 편입하게 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자미산성, 삼한시대 마한 유력세력 근거지에 남아 있는 산성

전남 나주시 반남면 소재지에 있는 산성인 자미산성이다. 영산강 일대 나주평야 중심부에 있는 낮은 야산인 자미봉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둘레는 약 740 m이고 흙으로 다져 쌓은 토축식 산성을 후에 돌로 쌓아 보강하였다. 성안에는 건물터와 샘터, 3곳의 문터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지방세력이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고려,조선시대 기와조각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부근에 삼한과 백제의 무덤유적인 반남고분군(사적 513호)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지역 유력한 세력들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자미산성. 나주시 반남면 소재지에 위치한 나즈막한 야산에 쌓은 작은 산성이다. 낮은 나주평야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어 넓은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요지로 삼한시대부터 지역 유력세력의 근거지였다.

SANYO DIGITAL CAMERA반남면 소재지 마을에서 산성을 오르는 길 입구.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성벽과 성문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정상부 아래에 자미산성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표지석 옆 성벽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

SANYO DIGITAL CAMERA흙을 다져서 토축을 쌓았던 삼국시대 백제의 축성방법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정상부로 오르는 길. 주변지역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반남면 소재지가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남쪽으로 보이는 월출산

SANYO DIGITAL CAMERA동남쪽으로는 보이는 모습. 멀리 장흥군과 화순군의 높은 봉우리들이 보인다. 그 사이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쪽으로 보이는 모습. 멀리 광주까지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 아래 삼한시대 마한 유력세력의 무덤으로  고분들이 덕산리와 신촌리에 분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삼한시대 무덤이 덕산리 고분군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북서쪽 방향, 아래쪽에 대안리 고분군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서쪽. 아래에는 대안리 고분군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자미산성 정상부 표지석

나주 반남 자미산성,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덕산리
이 성은 영산강 유역에 펼쳐진 나주평야의 중심지에 위치한 98 m(높이)의 소형산성으로 주변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무등산, 금성산, 월출산, 영산강이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산성이다.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마안형의 산등성이를 600 m 정도 흙으로 쌓고 돌로 보강한 테뫼식의 소형산성이며 통일신라기에 축조된 산성으로 판단되며, 일부 기와의 문양이나 제작기법으로 미루어서는 삼국시기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성의 부속시설로는 남.북문지와 건물지 6개소, 북문밖의 샘터 1개소가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대안리 고분군, 덕산리 고분군, 신촌리 고분군 등이 있어서 이 지역의 중심세력이 거처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나주 영산포, 영산강 주변 물산의 집산지였던 옛포구

전남 나주시 영산동에 있는 옛포구인 영산포이다. 조선초 영산강 수운을 이용하여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저장했던 영산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조선중기 영산창의 기능이 영광 법성창으로 옮겨지면서 조운에 이용되었던 기능을 상실했지만 주변지역의 산물의 집산지로서 기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포는 일제강점기에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전남지역 물산의 집산지로 크게 번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호남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로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도시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지금도 당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960년대까지 항구의 기능을 유지했으나 교통의 발달 등으로 항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도 국도와 철도 등 주요 육상교통로가 이곳을 지나가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호남을 대표하는 홍어의 집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영산포. 영산강 중류에 위치한 옛 포구로 배가 드나들기 적합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역 물산의 집결지로 나주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던 중요한 포구였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와 영산포를 연결하는 옛 다리인 영산교와 그 아래를 흐르는 영산강. 지금은 수위가 낮아져 배가 드나들기 어려워 포구로서 기능을 상실했지만 1960년대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영산교 아래 배가 정박했던 영산포 옛 포구터. 홍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수산물들이 이곳까지 운송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영산강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쌀이 이곳에서 모여 목포를 통해 반출되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제방에는 이곳이 홍어로 유명한 고장임을 알려주는 글자가 적혀있다.

SANYO DIGITAL CAMERA제방너머로 일제강정기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형성되었던 도심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와 영산포를 연결하는 영산대교.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나주읍성(사적 337호), 전라도 나주목 읍치

전남 나주시 옛 나주목관아 읍치에 있는 나주읍성(사적 337호)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초 전국적으로 읍성을 정비할 때 현재의 규모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약 940 m 정도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2.7 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헐어졌으며 서문 주위에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문이 모두 있었으며 현재는 남문인 남고문과 동문인 동점문과 서문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남고문은 총루가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으며, 동점문은 옹성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성문은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나주목의 읍성으로 전주읍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옛 나주읍성 남문인 남고문. 석축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총을 사용할 수 있는 총안이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현종때 수리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남고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1-20190923남고문 석축 발굴 당시 모습. 바닥에 깔려 있던 석축이 확인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읍성 동점문. 남고문과 달리 앞쪽에 방어시설인 옹성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점문 문루. 총안을 두고 있는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옹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동점문.

나주읍성 동문터, 사적337호
나주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 성종 2년(983) 목(牧)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도시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태조의 나주경략, 현종 1년(1010) 거란의침입시 현종이 남순하여 10여 일간 머물다가 환도한 사실 등은 지방행정 중심도시로서 나주의 비중과 함께 나주읍성의 존재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김경손전이다. 고려 고종 24년(1237)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수중에 넣고 나주로 진출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하였다는 기록에 현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나주성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가 갖추어져 있었음은 정도전의 「등나주동루유무로서」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 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 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대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이 겹쳐 세조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후 나주목사 김계희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되었다. 한편 나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 7월23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나주인들이 남문의 보존을 희망하나 이미 성벽의 태반이 없어졌고 동문은 1912년에 붕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신문 1916년 10월 1일자에 도로공사 등의 영향으로 동.서.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문만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0년에 제작된 「속수나주지」에 남문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1916년 10월 ~ 1920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성벽은 잔돌끼움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재 성벽의 바깥부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이다. (동문 동점문, 서문 서성문, 남문 남고문, 북문 북망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2-20190923나주읍성 서문 부근에 남아 있는 석축. 약 100 m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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