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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숭의전(사적), 고려 왕조의 종묘 역할을 하는 곳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에 있는 숭의전(崇義殿, 사적)이다. 고려 태조를 비롯한 4왕과 16 공신들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고려왕조의 종묘(宗廟) 역할을 하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고려 왕조 종묘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 왕조 종묘를 세웠다. 이후 고려왕조 대한 예우와 민심을 고려하여 태조 왕건을의 원찰이었던 이곳에 태조 왕건을 모시는 사당(廟殿)을 세웠다. 이후 정종 때(1399년) 고려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 충렬왕, 공민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문종 때(1452년) 건물을 고쳐지으면서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와 고려 공신 16명을 함께 모시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왕씨 후손으로 하여금 전각의 수호와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복구하였다.

연천 숭의전 (사적) 10-20220726<연천 숭의전(사적)>

숭의전이 있는 이곳은 태조 왕건이 기도를 올리던 앙암사(仰庵寺)가 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고려 왕조 종묘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면서 전조에 대한 예우를 한다는 명분과 개경에서 고려왕조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숭의전 주변은 임진강변 단애절벽(斷崖絶壁)이 있는 명승지로, 수목이 울창한 곳이다. 숭의전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늑하고 풍치좋은 곳에 강변 언덕 위에 자리잡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헐고, 그자리에 새 종묘를 짓도록 하다
고려 왕조의 종묘(宗廟)를 헐어버리고 그 땅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3일 신유 3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의정부에서 왕씨의 후사가 봉사하는 조건을 의논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봉사(奉祀)하는 조건을 의논하기를,
“1. 건국 초기에 왕씨(王氏)를 마전(麻田)의 앙암사(仰庵寺)에서 제사지냈는데, 사우(祠宇)가 좁고 누추하여, 신묘(神廟)에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기사년312) 에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고쳐 건축하도록 하였으나, 지금까지 성취되지 못하여 빗물이 새어 무너졌으니, 선대(先代)를 존숭(尊崇)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기지(基地)를 살펴 정하고 묘사(廟祠)를 고쳐 세우게 하소서.  — < 중략 > —-

하니, 그대로 따라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법을 제정하게 하였다.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3월 18일 신해 2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SANYO DIGITAL CAMERA<연천 당포성에서 보이는 숭의전 주변 임진강>

SANYO DIGITAL CAMERA<숭의전 입구 홍살문>

연천 숭의전 (사적) 03-20220726<숭의전 들어가는 길>

 왜 연천의 마전에 숭의전을 세웠을까?
연산군의 폭정에 조강에 몸을 던진 당대의 뛰어난 시인 정희량이 마전의 한 객관에 머물며 남긴 시를 보면 당시까지만 하여도 마전은 매웅 궁벽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임을 알 수 있다. 왜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임진강변의 외딴 시골마을에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을 세웠을까? 이는 마전의 앙암사가 고려 태조 왕건이 자주 들러 기도를 드리던 기도처(원찰)이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개경에서 철원 궁성으로 가는 길은 180리로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마전에 이르면 날이 저물어 하루를 쉬어가야 했다. 임진강변의 잠두봉 중턱에 자리잡은 앙암사는 개경에서 딱 90리 지경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한적하여 기도처로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조 왕건은 하루를 쉬어가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종묘를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마천군의 앙암사에 두게 함으로써 전조를 예우한다는 명분과 개경 밖으로 전조의 흔적을 지워 유폐시킴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예방하는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숭의전은 임진강변 절벽에 세워져 있어 경치가 좋다. 앞쪽에는 조선 문종 때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를 볼 수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02-20220726<연천 숭의전>

연천 숭의전 (사적) 23-20220726<숭의전 앞 느티나무과 임진강>

고려 왕실을 지키는 나무(느티나무)
이 느티나무(550년)는 조선 문종 2년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으로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들이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숭의전은 고려의 왕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종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일반적인 문중 사당과는 격을 달리하지만, 실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건물은 고려 태조를 비롯한 4왕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과 공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 위패를 임시로 모실 수 있는 이안청(移安廳),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앙암재와 전사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의전에 비해서 공신들을 모신 배신청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이는 공신들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도 크게 번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천 숭의전 (사적) 01-20220726<연천 숭의전>

연천 숭의전 (사적) 05-20220726<숭의전 삼문>

숭의전 정전은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규모이다. 서원에 모셔신 인물들의 사당과 비슷한 규모로 멸망한 왕조의 비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22-20220726<숭의전 정전>

연천 숭의전 (사적) 15-20220726<정전 툇간>

조선초 태조 때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와 동상과 함께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세종 때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고려 왕조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안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는 4왕의 위패만 모셔져 있다. 31대 공민왕의 위패는 서울 종묘에 별도로 모시고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14-20220726<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신 곳>

SANYO DIGITAL CAMERA<문이 열린 모습, 위패와 영정사진이 내부에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12-20220726<8대 현종의 위패를 모신 곳>

연천 숭의전 (사적) 13-20220726<11대 문종, 24대 원종의 위패를 모신 곳>

숭의전 연혁
역성혁명를 통해 왕조를 찬탈하였지만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이 개국하자 후대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대사헌 민개의 주청으로 개경 내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의 왕족들은 개경에서 쫒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 두번째 항목에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며 공양왕의 아우 왕우와 두 아들 조와 관에게 경기도의 마전을 주고 귀의군에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개경에서 고려태조의 위패와 동상을 마전으로 옮긴 후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함으로써 고려조 8대왕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중시했던 태조 이성계가 죽자 전조에 대한 신하들의 예우는 점전 더 소흘해져 갔다. 심지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에는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안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고 봄, 가을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52년 문종 대에 이르러 허물어가는 사당을 고쳐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함께 사당 내에 배향하도록 하니 비로서 역대시조제의 하나인 숭의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정전 옆에 있는 이안청(移安廳)은 정전 건물을 수리할 때 위패를 임시로 모시는 공간이다.

연천 숭의전 (사적) 18-20220726<위패를 임시로 모시는 공간인 이안청>

배신청(陪臣廳)은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공신 중에는 고려 종묘에 개별 국왕의 배향공신으로 모셔졌던 인물도 있지만 일부는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국난극복에 큰 역할을 했던 점을 인정받아 배신청에 모셔진 인물도 있다.  후손들은 조선시대에도 대부분 크게 번창하여, 종묘 공신당과 마찬가지로 배신청의 존재가 후손들에게 크게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천 숭의전 (사적) 17-20220726<배신청>

배신청에 모셔진 인물 중 복지겸, 홍유,신숭겸, 배현경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개국공신이다. 서희/강감찬/윤관/김취려/조충은 거란을 비롯한 북방민족의 침입을 물리친 인물이며   안우, 이방실,김득배는 공민왕 때 홍건적과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그리고 김부식/김방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연천 숭의전 (사적) 21-20220726<복지겸, 홍유신, 신숭겸, 유금필>

연천 숭의전 (사적) 20-20220726<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연천 숭의전 (사적) 19-20220726<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SANYO DIGITAL CAMERA<위패>

숭의전 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과 앙암재(仰巖齋)가 있다. 앙암재는 재실 건물로 향, 축문, 폐백, 제복 등을 보관하고 제례 전반에 대한 준비를 하는 곳이다.

연천 숭의전 (사적) 06-20220726<앙암재>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보통 양반 집안의 재실에 비해서도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연천 숭의전 (사적) 07-20220726<앙암재>

고려 종묘의 제사를 숭의전으로 옮겨오면서 종묘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세종 때 동상과 진영(초상화)를 위패로 대신하게 되면서 동상은 개경의 현능 옆에 매장되었다. 최근 북한에서는 현틍 정비공사 과정에 태조 왕건 동상이 발견되었다.

연천 숭의전 (사적) 08-20220726<앙암재에서 볼 수 있는 태조 왕건 동상과 현릉 사진>

숭의전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
왕건의 동상은 본래 고려의 도읍인 개경에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개경의 고려 종묘를 헐고 연천의 마전 앙암사에서 전조의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대에 이르러 주자가례에 입각한 제례법의 개혁으로 동상과 진영(초상화)를 목주(위패)로 대신하게 되자 잠시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세종 11년 현능 곁에 매장하였다. 최근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능 정비 공사때 발견되었으나 처음에는 북한 학자들이 금동불상으로 잘못 판단하여 개성박물관에 보관해 오다 1997년 개성박물관을 방문한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왕건의 동상임을 알아내어 현재는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아내문, 연천군청, 2022년)

 

전사청은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숭의전은 종묘와 마찬가지로 생식제례를 올리기때문에 전사청에는 굴뚝이 없다.

연천 숭의전 (사적) 09-20220726<전사청>

연천 숭의전, 사적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나라를 부흥시킨 4명의 왕들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조선 초기 처음 사당이 건립되어, 1451년(문종1)에 숭의전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후로 숭의전의 관리와 절례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겨졌다. 숭의전의 설치 배경에는 조선이 유교국가로서 역대 시제의 의례체계를 정비한 과정과 더불어 고려 왕족 및 고려 유민 등에 대한 회유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숭의전 건립 이래 수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가 이우어져 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숭의전의 복원은 1972년부터 1986년 까지 수번에 걸쳐 이루어져 오늘에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숭의전 대제가 이어지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시대 옛 왕조의 영광과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재청,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산청 목면시배 유지(사적),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곳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목면시배 유지(사적)이다. 고려 공민왕 때(1363년) 중국 원나라를 사신으로 방문했던 문익점이 목화 씨앗을 붓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온 후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이 태어난 이곳 마을에는 목화를 처음 심었다고 알려진 백여평 밭에는 지금도 그의 업적을 기려 목화를 재배해 오고 있다. 유적지에는 문익점을 기리는 부민각이라는 건물과 그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가 남아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1-20220222<산청 목면시배 유지(사적)>

목화를 재배했던 밭 옆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처럼 보이는 ‘부민각’이라는 현판이 있는 한옥이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그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7-20220222<부민각>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8-20220222<부민각에 모셔진 초상화>

부민각과 목화밭 사에는 ‘문익점 효자비’를 볼 수 있다. 문익점은 모친이 돌아가신 후 묘곁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이곳을 침범했던 왜적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 알려져 고려 우왕 때(1383) 그에게 표창을 내리고 마을을 ‘효자리’라 이름하도록 하였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9-20220222<효자비 비각>

유적지에는 이곳이 목면시배 유지임을 알려주는 2기의 비석과 그의 업적을 알려주는 기념관이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4-20220222<유적지 출입문>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5-20220222<2기의 비석>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2-20220222<전시관>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3-20220222<전시관 내부>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이곳은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면화 씨앗을 구해왔다. 그 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면화재배에 성공하였다. 면화로부터 얻어지는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을 향상시켜 백성들의 의생활에 혁명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읍성(사적), 경주부 읍치

경북 경주시 북부동에 있는 경주 읍성(사적)이다. 조선시대 경주부 읍치가 있던 읍성으로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나 고려말 우왕 떄(1378)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해 해안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빼앗긴 경주읍성을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다시 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경주읍성은 조선초부터 여러차례 수리를 했으며 그 내용이 기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향일문(동문) 남쪽 성벽 일부와 치성 2곳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일부 복원되어 읍성을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읍성 (사적)>

<문종실록>에 따르면 읍성은 둘레 1,904 m, 높이 약 5.4 m 정도였다고 한다. 읍성 성문으로는 징례문(남문), 향일문(동문), 망미문(서문), 공진문(북문)이 있었으며 징례문 문루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벽 앞으로 돌출되어 성문을 호위할 수 있는 치성(雉城)과 성벽 바깥에는 물이 있는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 남쪽 약 50 m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쪽 성벽과 향일문을 복원하였다.

경주읍성<경주 읍성>

OLYMPUS DIGITAL CAMERA<50 m 정도 남은 동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2번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치성과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주택가로 바뀐 2번째 치성 남쪽편 성벽터>

DCIM103MEDIADJI_0914.JPG<복원된 동문과 동쪽 성벽>

경주읍성
이 성은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축읍성으로 둘레는 2,409 m이며,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이래 역대 고려왕들은 경주를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하고 994년에는 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성은 고려 현종 3년(1012년) 축성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3.6 m 정도이나 시가지 확장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고 90 m 가량의 성벽만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금관총, 일제강점기 신라 금관이 처음 발견된 곳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경주 대릉원 128호 무덤인 금관총(金冠塚)이다. 1921년 경주 도심에서 주택공사를 하던 중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어 신라고분의 존재를 알렸던 곳이다. 금관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길이 48 m, 높이 13 m 규모로 대릉원 고분 중 중간 정도이다.  금관 및 금제관식(국보)과 금제 허리띠(국보)를 귀걸이.팔찌 등 장신구와 토기류 등 다양한 종류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2015년에는 금관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다시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금관총>

금관총은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부터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봉분은 원형이 파괴되어 있었다.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금관총임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고 단순한 공원 조경으로 보인다. 현재는 봉분의 일부만 남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금관총은 내부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목관을 안치 했다. 목관은 옻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관 주위에는 덩이쇠가 열을 지어 있 큰칼 등의 무기가, 안쪽에는 신발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많은 유무들이 출토되었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목걸이, 금제 허리띠, 팔찌, 금반지 등으로 치장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작성한 조사보고서에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금관총 목관 내 출토된 유물>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목관(棺) 내 유물 배치>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에서 작성된 보고서 자료>

금관총 금관은 신라 금관 중 가장 먼저 발견된 유물이다. 가운데에 ‘出’자(또는 나뭇가지 모양)과 양쪽에 사슴뿔모양의 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 장식의 앞면에는 133개의 달개와 57개의 곱은옥이 달려 있다. 세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한 주의 연속 점무늬, 관테에는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슴뿔과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시베리아 샤먼의 관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금관(국보)>

가슴걸이는 금관과 같이 출토되고 있는데 구슬로 가슴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걸이>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는 금관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유물이다. 원래 천이나 가죽에 덧대었던 것인데 금속제 장식만 남아 있으며, 드리개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허리띠는 길이 109 cm로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리개는 17개로 옥(玉)같은 장식품과 칼, 향낭, 물고기 등을 표현하고 있다. 드리개는 유목민들이 이동할 때 허리띠에 매고 다녔던 생활도구들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OLYMPUS DIGITAL CAMERA<굵은고리 귀걸이, 금>

OLYMPUS DIGITAL CAMERA<팔찌, 금>

OLYMPUS DIGITAL CAMERA<팔찌와 반지, 금>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신발>

OLYMPUS DIGITAL CAMERA<곱은옥>

머리 윗쪽에 부장품 상자 속에는 각종 그릇,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이 껴묻거리로 묻어두고 있다. 중요 출토유물로는 새모양 관꾸미개와 관모(국보), 초두, ‘尒斯智王(이사지왕)’ 글자가 새겨진 큰칼, 유리잔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장품 상자 속에서 출토된 유물>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으며 모자 위로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관모(국보)>

금제관식(국보)은 관모 위에 꽂아서 사용한 새날개 모양 장식이다. 이 장식은 삼국시대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제관식(국보)>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큰칼>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금관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던 중 고리자루 큰칼의 칼집 끝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 쓴 글자를 확인하였다. 판독결과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였다. 또 칼 손잡이 부근에서 ‘尒(이)’자와 이사지왕이 새겨진 칼집 끝 뒷면에서도 ‘十(십)’자가 드러났다. 금관총의 또 다른 칼에서도 ‘八’, ‘十’, ‘尒’라는 글자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칼에 글자가 새겨진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초두(鐎斗),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뿔잔>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신발>

OLYMPUS DIGITAL CAMERA<청동제 방울>

OLYMPUS DIGITAL CAMERA<투구 복발, 방울, 팔가리개 비갑(臂甲)>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장식구, 금동제 장식구>

OLYMPUS DIGITAL CAMERA<솟을장식, 말띠꾸미개>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고배, 금동제 합, 유리제 용기, 금제 완>

OLYMPUS DIGITAL CAMERA<가는 고리귀걸이, 금>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잔>

OLYMPUS DIGITAL CAMERA<장군>

네귀달린 청동항아리는 고구려에서 보내온 것을 추정되는 유물로 무덤 주인이 고구려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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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귀달린 항아리,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청동완>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접시, 토제>

OLYMPUS DIGITAL CAMERA<짧은목 항아리, 토제>

금관총의 발견과 신라 고분 조사
우리나라에서 근대 고고학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인 연구자는 신라 고분을 여러 번 조사하였으나 돌무지덧널무덤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공사도중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으로 인해 신라고분에는 화려한 유물이 묻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연속해서 금령총(1924), 식리총(1924), 서봉총(1926) 등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조사와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였고 일본인이 담당했다. 당시 금관총의 조사와 연구는 교토제국대학 하마다 고사쿠 교수가 주도하고 우메하라 스에지, 고이즈미 아키오, 사와 슌이치 등이 참여했다.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 보관중인 보고서 원고와 사진 자료는 당시 금관총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4년)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발굴 보고서, 일본 교토대학교, 1924년, 1927년>

OLYMPUS DIGITAL CAMERA<발굴당시 금관총 금관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발굴당시 금관총>

봉황대에서 금관총을 바라보다’, 일제강점기(1924년)에 일본이 그린 금관총과 주변 풍경이다. 금관총이 위치한 노서동 일대는 경주 도심 주택가로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 금관총을 그린 그림>

금관총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에 가옥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고분이 노출되어 긴급하게 수습 조사가 이루어졌다. 수습 조사 결과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화려한 금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되어 ‘금관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201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지상식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무덤구조가 새롭게 확인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이 있는 경주 노서동 고분군>

경주-대릉원-호우총-09-20220129<경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주요 무덤들>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경주 교촌마을 요석궁,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고택

경북 경주시 교동 교촌마을에 있는 고택인 요석궁이다. 최부자댁 12대 최준의 동생인 최윤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밭가운데 댁’으로 불린다. ‘ㄷ’자형 안채, 중문채, 사랑채가 붙어 있는 형태로 종가인 최부자댁과 거의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지금은 경주를 대표하는 식당인 ‘요석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식당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부엌이나 광을 온돌방으로 바꾼 것 외에는 원래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식구가 많지 않은 일반적인 고택과는 달리 꾸준히 사용하고 있어 고택의 화려했던 시절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

OLYMPUS DIGITAL CAMERA<마당에서 본 대문채와 문간방>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뒷편 정원>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왼쪽 날개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OLYMPUS DIGITAL CAMERA<사무실로 개조한 중문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날개채>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와 연결되는 왼쪽 날개채>

<출처>

  1. 경주 교촌마을 홈페이지,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