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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사막에 핀 신앙의 꽃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유물은 투루판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초 일본 교토 니시혼간지의 주지승인 오타니 고즈이라는 사람이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을 동원하여 3차에 걸쳐서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나 무려 5천여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집했으며 이를 ‘오타니 컬렉션’이라 한다. 이를 일본 자본가 구하라가 구입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면서 중앙박물관에 유물들이 남아 있다. 오타니 컬렉션은 전체 유물의 1/3은 한국에, 1/3은 중국뤼순에, 1/3은 일본에 남아 있다고 한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9<중앙아시아, 동서문명이 통하는 길>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아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아시아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루크메니스탄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지역을 ‘투푸키스타(투르크인의 나라)’ 또는 ‘서역(西域)’이라고 부른다. 중앙아시아 역사와 문화에서 유라시아를 여러 갈래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려는 주변 여러 세력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교역로는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가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중요한 통로로 작용했다. 그 결과 이곳의 문화는 고대 지중해, 인도, 서아시아, 중국 문화의 요소가 복합된 독특한 모습을 띤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소장품은 대부분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동투르키스탄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은 텐산산맥 이북의 초원지대에서 전개된 유목세계와 그 남측의 타클라마칸사막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타클라마타사막의 남단과 북단을 지나는 서역남도와 서역북도를 통해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인도, 서아시아, 중국 간의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그 길목에는 여러 오아시스 도시가 세워져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세계문화관에서 중앙아시아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 입구에는 아프로시압 벽화(복제품)를 전시하고 있다.  벽화는 사마르칸트 옛 중심시였던 아프로시압 도성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7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벽화에는 한반도인으로 추정되는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차고 있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어, 당시 한반도와 중앙아시아 사이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1<아프라시아브 벽화(Afrasiab), 서쪽 벽화>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41<서쪽벽화 앞부분>

서쪽 벽화
서벽은 입구에 들어설 때 마주 보게 되는 벽으로, 가장 중요한 벽화가 그려진 곳이다. 현존하는 벽화를 보면 여러 사신과 무사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이 향하고 있는 벽의 윗부분에 누가 그려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가운데 부분에 바르후만왕, 돌궐왕, 또는 소그드의 신이 그려져 있었다고 보는 견해와, 벽의 양측에 바르후만왕과 돌궐 왕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오른쪽 끝에는 조우관을 쓴 고대 한국인이 등장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2<조우관을 쓴 인물>

벽화 속의 한국인
서벽에 그려진 벽화에는 새의 깃털로 장식된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위서>> <고구려전>에 “머리에 절품건(折風巾)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고 두건의 모서리에 새의 깃을 꽂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 고구려 고분벽화,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린 <양직공도>, 신라, 백제, 가야 고분의 출토품으로 볼 때 새의 깃털이나 모형을 모자에 부착하는 장식법이 고대 한반도에서 보편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40<아프라시아브 도성유적>

벽화의 시기
서벽 왼편에 그려진 한 인물의 옷자락에 남아 있는 소그드 명문은 벽화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명문에는 차가니안(Chaganian, 사마르칸트 남부의 작은 나라)과 차치(Chach, 타슈켄트 지역)의 사신이 사마르칸트에 와서 이곳의 왕인 바르후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르후만왕은 중국 역사서에 ‘불호만(拂呼縵)’으로 언급되는 인물로, 658년 당 고종에 의해 강거도독부(康居都督府)의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아프라시아브 벽화의 연대는 7세기 중엽으로 추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아프라시아브 벽화의 발견
사마르칸트의 옛 중심지인 아프라시아브 도성지 유적에서 1965년 도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견된 지점은 제23구역 제1호실에 해당하는 방으로, 왕이나 상류층 저택의 접견실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추정된다. 방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한 변의 길이가 11m에 달한다. 방의 윗부분이 공사 중에 파괴되어 내부 벽면을 장식했던 벽화는 현재 2m 정도의 높이까지만 보존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석굴사원은 수도자들이 더위와 비를 피하여 명상을 하기 위해 벼랑에 동굴을 파서 만들었다.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소카왕때 처음 생겼으며,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에도 전해졌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앙아시아의 키질, 투루판 베제클릭, 둔황석굴, 중국의 윈강 석굴 등이 규모도 크고 잘 알려진 석굴들이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석 석재로 인공적으로 조성은 석굴암이 대표적이다. 특히, 둔황 석굴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 이후 4세기부터 원나라때까지 끊임없이 조성되었다. 막고굴에는 불상들과 벽화로 꾸며져 있으며, 불경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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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화(誓願畵),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10~12세기/흙벽에 채색, 복제품>

투루판 지역의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제15굴에 그려진 서원화의 일부분이다.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종교 유적이다. 제15굴에는 열다섯 가지 주제의 서원화가 회랑 양측 벽에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가시왕으로 태어났을 때 당시 부처였던 크세맘카라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 내용을 묘사한 제1주제 서원화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크세맘카라 부처를 향해 공양물이 가득 담긴 쟁반을 두 손에 들고 서 있는 두 인물은 왕으로 태어난 전생의 석가모니와 왕비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석굴사원과 벽화
중앙아시아의 종교 유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석굴사원은 서역북도에 집중되어 있다. 투루판 지역의 베제클리크, 토유크, 야르호, 셍김-아기즈와 쿠차 지역의 키질, 쿰트라, 키질 가하와 같은 유적이 유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앙아시아 벽화 가운데 대부분은 투루판의 석굴사원에서 가져온 것이며, 쿠차 지역의 벽화도 일부 소장되어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서원화(誓願畵)는 석가모니가 각기 다른 전생에서 당시의 부처(현재의 시점에서 볼  과거불)로 부터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 이야기가 한 화면에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3<비슈반타라 왕자 본생도, Visvantar Jataka, 미란 제5사원지/3세기/흙벽에 채색>

이 벽화는 미란 제5사원지 회랑 벽에 그려진 본생도의 일부분이다. 영국 탐험대를 이끈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년)의 보고서에 수록된 사진을 통해 본생도의 전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본생도의 주인공은 비슈반타라 왕자로, 석가모니의 여러 전생 중 하나이다. 비슈반타라 왕자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하얀 코끼리를 비롯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보시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사막에 핀 신앙의 꽃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러 교역로를 통해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와 같은 다양한 종교가 중앙아시아로 전해졌다. 종교 활동을 위해 세워진 많은 사원은 여러 신의 모습과 종교적 설화, 이상향, 신도 등을 표현한 그림과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인 10세기경 동투르키스탄 지역에서는 불교가 특히 성행했다. 이곳의 여러 불교 사원에는 헬레니즘 미술과 인도, 페르시아, 중국의 다양한 요소가 섞인 불상과 벽화가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4<1. 서원화,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10~12세기/흙벽에 채색>

꽃을 들고 있는 우아한 자태의 손을 묘사한 서원화 단편이다. 단편의 왼쪽에 과거불의 광배 일부가 남아 있다. 광배 가장자리에 흰색 띠를 둘렀고, 안쪽에는 붉은 색 바탕에 흰색과 적갈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손과 광배 사이로 상상의 꽃이 공중에 떠 있다. 벽화의 바탕색은 현재 흐린 갈색으로 보이지만, 제15굴의 다른 서원화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바탕색은 푸른색이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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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원화, 투루판 베제클리크 제33굴/10~12세기/흙벽에 채색>

제33굴 우측 벽에 배치된 서원화의 일부이다. 서원화는 석가모니가 각기 다른 전생에서 당시의 부처, 즉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과거불을 만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이 벽화에는 두 명의 상인이 나란히 앉아 공양물이 담긴 화려한 쟁반을 들고 있고 왼쪽에 공양의 대상이 되는 과거불의 광배, 발, 옷자락 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상인의 얼굴에 각기 다른 개성이 잘 표현되었다. 왼쪽 상인은 약간 넓은 얼굴에 코가 높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검은색이다. 이에 비해 오른쪽 상인은 매부리코에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적갈색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베제클리크’은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이라는 뜻이다.  화려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는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서역북도에 위치한 투루판 일대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군이다. 원래 80기 이상의 불교와 마니교 석굴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50기 정도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베제클리크(伯孜克里克, Bezekllik) 석굴사원,  2010년>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투루판시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무르투크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석굴사원에는 83기의 석굴이 확인되며, 그중 40기에 벽화가 남아 있다.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6세기 국씨고창국(麴氏高昌國) 시기부터 13세기까지 만들어졋으며, 10세기 위구르 지배기에는 왕실의 종교적 성지로 번영했다.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서원화’가 많이 그려졌다. 서원화는 ‘공양화供養畵’ 또는 ‘본행경변本行經變’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서원’은 바라는 바를 이루겠다는 맹세를 뜻한다.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서하어(西夏語), 위구르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불교 경전과 여러 시기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있는 중요한 불교유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6<마혜수라천(Maheshvara), 투루판/10~12세기/흙벽에 채색>

힌두교의 신 시바가 불교에 포섭되어 등장한 신으로 다면다비(多面多臂)에 3개의 눈을 가진 점이 특징이다. 마혜수라천은 일반적으로 위로 올린 손에 해와 달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위로 올린 오른손에 해처럼 보이는 둥근 원반을 들고 있다. 나머지 손은 합장하거나 밧줄을 잡고 있다. 머리 위의 작은 인물은 바람이 가득 찬 주머니를 들고 있어 풍신(風神)을 연상시킨다. 손바닥과 얼굴은 살구색으로, 나머지는 녹색을 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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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상,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10~12세기/흙벽에 채색>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 중당(中堂)의 네 모퉁이에는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안쪽 좌측벽에 그려진 사천왕 앞에 앉아 있는 악귀 부분이다. 악귀는 겁에 질린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 화살 2개를 쥐고 있다. 오른쪽에는 사찬왕의 오른쪽 발과 코끼리 머리 장식을 한 오른쪽 다리 일부가 보인다. 악귀의 과장된 표정과 근육, 화려한 채색 등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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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도, 투루반 베제클리크 석굴 제18굴/6~7세기/흙벽에 채색>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제18굴에서 가져온 천불도의 일부이다. 제18굴은 석굴 중앙에 큰 기둥을 배치한 중심 주굴(柱窟)이며, 천불도는 석굴의 회랑을 장식했다. 천불도에 표현된 각 부처는 가는 흰색 선으로 구획된 사각형 안에 통견(通肩)의 법의를 입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부처의 눈은 비교적 크고 콧날이 뚜렸하다. 얼굴과 목, 손의 윤곽선에 붉은색을 더해 음영을 주고, 배경에는 짙은 색을 칠했다. 음영의 표현, 어두운 배경색, 라피스 라줄리 안료를 사용한 푸른색은 무두 쿠차 지역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0<제15굴 서원화 장막>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7<1. 서원화 장막, 투푸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10~12세기/흙벽에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8<서원화 장막>

제15굴 회랑에 그려진 서원화의 가장 윗부분에는 화려한 장막이 묘사되었다. 상하로 배치된 두 단편은 장막의 상단에 짧은 회색천을 내렸고, 그 아래로 그물 문양의 붉은 천을 늘어뜨렸다. 붉은 천 위로 흰색, 초록색 구슬을 엮은 장식물이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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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구르어 명문,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10~12세기/흙벽에 채색>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6세기부터 개착되었으며 위구르 세력이 이 지역을 지배하던 9~13세기까지 조상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석굴의 벽화는 대체로 위구르가 이 지역을 지배하던 9세기 이후의 것이다. 위구르인들은 원래 마니교를 믿었으나, 10세기 후반부터 투루판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불교로 개종했다. 위구르어 명문은 대체로 공양자의 이름과 공양을 한 연월일에 관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위 단편에 서툰 글씨로 한자가 기록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 기층문화였던 한인(漢人) 문화의 영향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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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을 그린 번(菩薩幡), 둔황/10세기/비단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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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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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10
<오른쪽 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09
<오른쪽 아래>

SANYO DIGITAL CAMERA<둔황 막고굴, 2010년>

번(幡)은 불교 건축물을 꾸미거나 의식을 진행할 때 사용하던 걸개그림이다. 둔황 지역에서는 8세기경부터 번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의 번에는 3m가 넘는 감색 비단 바탕에 정면을 향해 선 보살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였다. 보살은 채색 없이 노란 선으로만 그려졌다. 신체의 굴곡을 나타내는 선과 장신구, 가슴을 가로지르는 옷차림은 당 말기 보살사의 특징과 유사하다. 오른쪽의 번에는 2명의 보살이 그려져 있다. 위쪽의 보살은 가사를 걸친 채 왼쪽을 향하고 있고, 아래쪽 보살은 군의를 입고 천의를 걸친 채 정면을 향해 서 있다. 붉은색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음영을 가해 입체감을 주었다. 보살 옆에는 보살의 이름을 써 넣은 방제가 있는데, 아래 보살의 경우 “나무불휴식보살”이라는 글씨가 확인된다. 둔황 발견 자료 중에는 전문적으로 경전을 베껴쓰는 사경생(寫經生) 이외에 번을 만드는 사람(書幡人)이 언급되어 있어 당시 번의 제작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호탄(和田)은 타림분지 남서쪽에 위치한 고대의 왕국이다. 옥(玉) 생산지였던 대월지(大月氏)가 있었던 곳으로 고대 동.서교역로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다. 한무제때 실크로드가 개척된 이후 서역문화와, 불교의 전파에 큰 역할을 했던 곳이다. 투루판은 한나라 때 한인들이 거주한 이래로 당나라때 고창국을 비롯한 한족의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지역중심지였던 교하고성, 고창고성을 비롯하여 주변 계곡 등에 많은 불교 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이 대부분이며, 그 형태는 인도와 중동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이 많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29<부처의 머리, 호탄/4~5세기/흙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된 호탄 출토의 소조상 중에서 크기가 가장 큰 예이다. 얼굴의 전반적인 형태와 반쯤 감고 있는 눈의 형식적인 표현이 호탄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인 라와크(Rawak) 스투파에서 발견된 불상과 유사하다. 머리 부분에는 물결치는 듯한 머리카락이 표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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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투루판 무르투크/6~7세기/흙에 채색>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불교 조각은 헬레니즘과 로마 조각의 특징을 수용한 간다라 조각의 영향을 바탕으로 하면서, 이를 보다 추상화하고 형식화한 모습으로 재창조되었다. 이 여인상의 둥근 얼굴, 눈썹, 눈, 콧날 등은 간략하고 도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가슴 부분의 소용돌이 무늬는 갑옷을 연상시킨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0<1. 광배조각, 호탄/6~7세기/스투코에 채색, 흙>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1
<2. 부처, 호탄/5~6세기/스투코에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2
<3. 세라피스, 호탄/2~3세기/테라코타>

세라피스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 새롭게 탄생한 신으로, 그리스의 제우스와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대좌에 앉아 있는 세라피스는 왼손에는 풍요의 뿔을 들고, 오른손은 나체의 소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있다. 오른편에 서 있는 소년은 침묵의 신 하포크라테스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3<4. 코끼리, 쿠파 쿰투라 석굴사원/8세기/흙>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4<1. 연꽃 위의 부처, 호탄/6~7세기/스투코에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5<2. 연꽃에서 태어나는 모습, 호탄/6~7세기/스투코에 채색>

몇 겹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연꽃 가운데에서 인물이 화생하는 순간을 묘사한 스투코로 만든 조각이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세계인 정토에서 태어날 때 연꽃에서 태어난다고 하는데, 연꽃은 청정함과 깨달음의 상징으로 불교 미술에 자주 이용되는 모티프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6<3. 명상하는 승려, 둔황/10세기/흙에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7<4. 무사의 머리, 카라샤르/6~7세기/흙>

서역북도에 위치한 카라샤르는 중국 문헌에 언기국 또는 오이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의 불교 유적은 불교사찰과 석굴사원으로 이루어졌으며, 5~8세기로 편년되는 다양한 불상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11
<5. 천부의 머리, 투루판/6~7세기/흙에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12
<5. 천부의 머리, 투루판/6~7세기/흙에 채색>

불교 조각
중앙아시아의 불교 조각은 미란, 호탄, 쿠차, 투루판 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의 불교 조각은 소조상이 대부분이며, 양식과 도상은 간다라의 영향을 기반으로 하면서 지역적인 특징을 발전시킨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교 조각은 주로 서역 남도의 대표적인 불교 중심지인 호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외에 서역 북도의 투루판과 옛 언기국에 속하는 카라샤르 지역의 문화재도 소장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38<회화 단편, 투루판 토유크 석굴/10~11세기/면에 채색>

화면 왼쪽에 있는 반쯤 열린 문을 향해 세 명의 인물이 나란히 서 있다. 문의 왼쪽에도 또 다른 인물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 배경은 붉은색이며 오른쪽 윗부분은 여러 개의 검은 점으로 덮여 있다. 흰 옷을 입은 세 명의 인물을 마니교도로 보는 견해도 이다. 다만 이들이 쓰고 있는 모자가 투루판 지역에서 출토된 자료에 등장하는 마니교도의 모자와 다른 모양이어서 앞으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과학적 조사를 통해 그림이 그려진 천은 면으로 밝혀졌으며, 이 그림 아래에 다른 밑그림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가운데 관음보살이 있으며, 그 주위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예배하는 보살과 인물이 여럿 그려져 있다. 관음보살이 쓰고 있는 높은 모자의 정면에는 관음보살이 모시는 부처인 아미타여래가 작게 표현되어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불교문화 20220125_13
<관음보살이 그려진 번, 투루판 토유크 석굴/9~10세기/면에 채색>

토유크 석굴사원은 고창고성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화염산 골짜기로 천산산맥의 눈이 녹아내린 물이 투루판분지로 흘러드는 계곡이다. 여기에 있는 46기의 석굴은 5세기 말과 7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문서와 불화도 다수 발견되었다. 지금은 위구르 전통 마을이 남아 있는 외진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막과 황무지로 이루어진 투루판지역에서 그나마 사람의 통행이 많은 교통로에 위치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토유크(Toyuk, 吐浴溝) 석굴사원, 2010년>

산산현에 위치한 토유크 석굴은 46기의 석굴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문서와 불화도 다수 발견되었다. 화면의 중앙에 앉아 있는 보살은 보관에 작은 불좌상이 있어 일찍부터 관음보살로 판ㅁ여되었다. 보살은 머리 좌우에 원형 장식을 부착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오른손을 가슴 앞에서 들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지물을 받치고 있다. 중앙의 관음보살을 둘러싸고 있는 보살은 원래 3단에 각 2명씩, 모두 6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거의 동일한 크기와 구성을 지닌 그림이 베를린 아시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아시아실 전시품은 대부분 20세기 초 오타니 고즈이(1876~1948년) 탐험대가 수집한 것이다. 오타니 고즈이는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모두 3차에 걸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탐험대를 보냈고, 이후 탐험대 수집푸의 상당수가 오타니의 별장이었던 고베의 니라쿠소에 보관되었다. 1916년 1월, 당시 상인이었던 구하라 후사노스케가 니라쿠소와 문화재를 함께 구입했다. 구하라는 1916년 5월 조선총독부에 오타니 수집품을 기증하였고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관리했다. 이후 오타니 수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중국 국립뤼순박물관, 중국국가도서관, 일본 류코쿠대학, 도쿄국립박물관, 교토국립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7년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충북 청주시 상당군 남문로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국보)이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당간지주, 철당간이 온전히 남아 있어 오래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당간지주의 옛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기둥은 원통모양의 철동 20개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했으며 당간지주 윗부분에는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를 잡아매고 있다. 철통은 원래 30개였는다고 한다. 3번째 철통에는 이 철당간을 세우게 된 내력을 글로 적어놓고 있다.

철당간이 있는 이곳은 고려시대 용두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흥덕사나 많은 금속공예 유물들이 출토된 사뇌사 절터가 인근에 있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금속공예가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면서 이곳에 관아가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청주 도심 중심지로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있었다. 절터는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철당간만이 절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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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당간은 사찰입구 또는 불전 앞에 괘불이나 깃발을 거는 곳을 말한다. 많은 사찰 입구에는 철당간을 세웠던 당간지주가 남이 있지만 철당간은 이곳 청주를 비롯하여 계룡산 갑사, 안성 칠장사에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당간지주에 철당간이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과 당간지주>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을 받치고 있는 바닥돌>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당간지주>

철당간은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현재도 20개의 철통이 남아 있다. 철동은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아래쪽)>

밑에서 세 번째의 철통에 <용두사철당기>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962년 청주 호족 김예종이 병에 걸리자 철당간을 바쳐 절을 장엄할 것을 맹세하며 사촌형 희임 등과 함께 철통 20단을 주조하여 높이 60척의 철당을 세운다.”라 적혀 있다.  ‘준풍3년’이라는 광종의 독자적인 연호와 함께 청주호족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 고려초기 지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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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용주사지 철당간이 있는 이곳은 지금도 청주지역의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 오가는 사람들로 번화한 지역이다. 청주지역에서는 돛대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 홍수를 예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설화가 있어서 도심에 있지만 오늘날까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용주사지 철당간이 있는 청주 도심>

OLYMPUS DIGITAL CAMERA<반대편에서 본 모습>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당간은 사찰 앞에 세워 사찰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사찰의 건립과 함께 많은 수의 당간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대부분 당간을 받치고 있던 지주만이 남아 있다. 철당간이 서 있는 곳은 고려시대 청주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던 용두사가 있던 자리이다. 이 당간은 화강석으로 지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둥근 철통 30여개를 연결하여 세운 것인데, 현재는 20개만이 남아 있다. 이 중 밑에서 세 번째의 철통에 <용두사철당기>가 새겨져 있다. 명문이 새겨진 철당간으로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철당기에는 당간을 세우게 된 내력과 건립연대, 그리고 건립에 관여한 사람들의 관직명이 적혀 있다. 당시 지방경영과 관련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철당기의 끝에는 ‘준풍 3년’(962년)에 주성하였다고 하여, 고려 광종 때 사용했던 독자 연호를 실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청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청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안동 봉정사 대웅전(국보)

경북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봉정사 주불전인 대웅전(국보)이다.  1962년 수리과정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조선전기 이전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다포계 공포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다포계 공포의 구성이나 건물의 형태 등에서 조선초기 이전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건물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내부에는 조선초기에 칠한 단청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동 봉정사 대웅전(국보)>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현판과 지붕을 받치는 공포>

SANYO DIGITAL CAMERA<옆면 공포>

SANYO DIGITAL CAMERA<팔작지붕>

봉정사대웅전(내관)<내부>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안동 봉정사 대웅전, 국보
이 건물은 봉정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건물 앞에는 축대를 높이 쌓고 그 뒷면에는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세웠으며 내부도 마루를 깔았다. 중앙 뒷면에 높은 기둥 2개를 세워 그것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만들었다. 기둥 사이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건립된 이후 변경되었으나 공포의 구성에서 힘있고 단순한 수법은 초기의 다포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단청은 건립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퇴락하여 2000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안내문, 안동 봉정사, 2009년)

<출처>

  1. 안내문, 안동 봉정사,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복장물, 생명력을 불어넣다.

복장(服裝)이란 불상과 불화에 안치하는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 물목으로 생명력과 신성성을 갖게 해 준다. 복장물의 핵심은 후령통으로 사리를 비롯해 오보병, 오곡, 오보, 오약, 오향 등 오방과 진귀한 물품이 들어간다. 이외에도 각종 다라니를 적은 진언과 경전, 비단천을 비롯한 복식 등이 들어간다. 복장을 안치하는 방식은 고려시대에 정립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간행된 <조상경(造像經)>에 그 절차와 품목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2<60. 조각승 해심이 만든 불상과 닮은 여래좌상, 목조석가여래좌상, 조선 17세기 중반, 국립중앙박물관>

귀가 크고 턱이 발달했으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상체가 길고 가슴과 배가 적당히 부푼 신체 표현이 특징입니다. 이 여래좌상의 정확한 제작 연대와 원래 봉안되었던 사찰은 알 수 없으나, 이와 비슷한 불상으로 전라북도 고창 <문수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이나 고창 <상원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습니다. 17세기에 활동한 조가승 무염 밑에서 배운 해심이 이 불상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시에 출품된 이 여래좌상도 1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상 안에서는 후령통과 직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 경전과 다라니가 수습되었습니다. 수습 당시 후령통 안은 비어 있었습니다. 복장물이 완전한 형태로 전하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 복장물의 형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3<61. 석가여래좌상 몸 안에 있었던 신성한 물건, 목조석가여래좌상 복장물, 조선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1. 후령통(핵심적인 복장을 넣는 통), 2. 원경(둥근거울), 3. 진언(불교의 주문)>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4<4. 다라니(신비한 힘을 가진 주문)>

후령통(喉領筒)은 복장물의 핵심으로 그 안에는 사리를 비롯해 오보병, 오곡, 오보, 오약, 오향 등 오방과 진귀한 물품들이 들어간다. 동(청색), 남(적색), 서(백색), 북(흑색), 중앙(황색)으로 방위와 색을 규정한 <조상경(彫像經)>을 절차를 따르고 있다. 다섯가지 보물인 종자(씨앗), 금강저, 채번(깃발), 산개(양산), 보병(병)을 직물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5 <5. 오보병(다섯가지 보물을 담는 병)>

불상 조성이 끝난 다음 종교적 예배 대상이 되려면 또 다른 의식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불사리나 경전처럼 종교적 상징이 담긴 물건과 조성 기록을 적은 발원문을 내부에 넣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불상 내부에 성스럽게 넣은 물건을 복장물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목조석가여래좌상 몸 안에 넣었던 복장물의 일부입니다. 불상의 복장물로 빈 후령통과 오보병의 일부 그리고 내부 공간을 채우는 용도 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경전과 다리니가 발견되었습니다. 오보병은 제 병이 아니라 다섯 가지 색깔의 직물로 만들었습니다. 동(청색), 남(적색), 서(백색), 북(흑색), 중앙(황색)으로 방위와 색을 규정한 <조상경(彫像經)>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색깔별로 종자, 금강저, 채번, 산개, 보병의 형태를 한 세트로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인조 때 일가족이 거의 몰살당할 때 살아남은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을 모셨던 궁중 나인들이 발원한 보살상에 모셔졌던 복장물이다. 경안군이 오랜 귀향살이를 끝내고 결혼하게 되자 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바램이 담겨 있다. 이 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반영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6<62. 소현세자의 아들을 위해 궁중 나인이 발원한 보살상 복장물, 송광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물, 조선 1662년, 비단 등, 송광사 성보박물관, 보물, 1.저고리>

낡은 남색 저고리와 녹색 배자, 붉은색 비단 등은 모두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 내부에서 나온 복장물입니다. 복장물의 중심은 갖가지 성물을 담은 후령통이지만, 함께 발견된 남색 저고리와 초록색 배자, 목숨 ‘수(壽)’자와 영지무늬를 화려한 금실로 수놓은 붉은색 비단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저고리 안쪽에는 1662년 정월 궁중 나인이었던 노예성이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부부 등의 장수를 기원하며 관음보살상을 발원했다는 내용이 정성스레 적혀 있습니다. 녹색 배자 안쪽에는 시주자 유씨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글도적혀 있습니다. 저고리와 같은 옷을 복장물에 넣는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입니다. 이 옷들은 시주자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동시에 핵심적인 복장을 넣은 후령통 같은 복장물을 고정하고 보호하며 공간을 채우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7<2.저고리 위에 덧입는 배자, 3. 발원문>

성품을 돌이켜 들으시고 원통을 깨우치셨네. 관음불이 관음의 이름 주시고 위로는 자비의 힘을 갖추고 아래로는 자애를 갖추게 하니 32응신(應身)이 온 누리에 두루 미치네. 경안군 이씨와 부인 허씨 두 분의 수명장원을, 경자생 박씨와 노씨의 수명장원을, 윤씨의 수명장원을 기원합니다. 신축생 나인 노예성이 발원하여 1662년 정월에 관음보살상을 삼가 조성하니 이로써 공덕이 두루 미치고 나를 비롯한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하기를 기원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8 <4. 후령통>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9<5. ‘수’자와 영지무늬가 있는 비단>

장수를 의미하는 ‘수(壽)’자 직물을 넣은 까닭
경안군의 아버지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떴고, 어머니 강씨도 인조 독살 시도라는 누명을 쓰고 사사되었습니다. 1647년 네살이었던 경안군은 제주로 유배를 가고 이듬해 두 형마저 죽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659년 그가 경안군으로 복권되고 1661년 허씨와 혼인한 점을 고려하면, 1662년 완성된 보살상에서 나온 장수를 상징하는 ‘수(壽)’자가 수놓아진 직물은 더욱 특별합니다. 한 많은 삶을 뒤로하고 혼인한 경안군의 평온한 미래와 무병장수를 간절히 바란 나인들의 염원이 깃든 복장물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0<63. 조각승 여찬 등이 불상을 만들며 넣은 바람이 담긴 글, 문경 쌍계사 불상 조성 발원문, 조선 1723년, 종이에 붉은 먹,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문경 쌍계사에서 아미타여래삼존상을 조성하며 마련한 발원문입니다. 현재 이 절과 불상은 모두 확인되지 않고 발원문만 전합니다. 상을 만든 승려 장인은 여찬과 삼인, 신찰, 지찰, 성현입니다.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여찬은 강원도 고성 유점사 대종을 고쳐 만들떄는 화원으로, 경남 고성 <옥천사 시오아도>(1744년)와 서울 <봉은사 목조사천왕상>(1746년)을 조성할 때는 복장물 시주자로 참여하며 다양한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불상은 전하지 않으나, 이 발원문은 불상 조성에 관여한 이들의 정보와 발원문 구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1<65. 화승 신겸이 그린 시왕도의 복장물, 시왕도 복장물, 조선 1829년, 국립중앙박물관, 1. 발원문, 2. 후렴통>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2 <3. 열금강지방지도, 4. 진언>

시왕도에 봉안된 복장물입니다. 시왕도는 모두 열점으로 조성되었지만 복장물은 현재 다섯점만 남아 있습니다. 과학적 조사로 납작한 네모 형태의 종이 후령통 안에서 각종 곡물과 사리가 담긴 오보병, 불교의 주문인 진언과 여러 직물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함께 발견된 발원문으로 화승 신겸과 신선이 이 불화를 조성한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내부에 공간이 있어서 그 안에 복장물을 넣을 수 있는 불상과는 달리 불화는 낱장 형태여서 복장물을 넣기에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불화의 복장물은 주머니에 담아 그림 상단에 걸거나, 그림 뒷면에 쉽게 부착할 수 있는 납작한 종이 상자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공간과 재질에 맞춰 복장물을 제작했던 승려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1
<64. 화승 신겸과 신선이 그린 지옥 풍경, 시왕도, 신겸 등 2명, 조선 1829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신겸과 신선이 1829년 북한산성의 중심 사찰인 중흥사에 봉안하려고 조성한 시왕도입니다. 신겸은 1828년에 의성 고운사에서 시왕도를 그렸습니다. 이때 그린 밑그림을 사용하여 1829년 중흥사 시왕도를 제작했습니다. 이 불화는 사후 세계를 다스리는 열 명의 왕 중 두번째인 초강대왕과 지옥의 형벌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성곽으로 구획된 지옥 안에서는 죄를 지은 영혼이 뜨거운 가마솥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지옥문 바깥에는 그들을 구하려고 지장보살이 자리했습니다. 대부분 불화에 봉안된 복장물은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불화는 종이로 된 납작한 후령통과 복장물이 함께 전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생명력을 불어넣다
불상과 불화가 일반 미술과 다른 차이점의 하나는 제작을 마친 다음 종교적 예배 대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과 절차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불상과 불화는 각각 입체와 평면이라는 공간을 감안해 복장물을 넣었습니다. 복장물은 불상이나 불화를 예배대상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함께 봉안하는 여러 신성한 물건을 의미합니다. 불상과 불화에 복장물을 납입하고, 신비한 힘과 권위를 부여해 종교적 생명력을 불어 넣는 점안(點眼)의식이 거행되면 금빛 찬란한 불상과 화려한 색의 불화는 비로소 부처의 세계로 바뀝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3<67. 문수사 지장시왕도를 그리며 남긴 기록, 문수사 지장시왕도 발원문, 조선 1774년, 종이에 먹, 서산 문수사>

설훈과 화승 일곱 명을 비롯해 1774년 불사에 참여한 승려의 이름과 조성시기, 봉안될 공간을 적은 글입니다. 화승 설훈과 증명을 맡은 국밀은 불화 뒷면에서 나온 편지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4<문수사 지장시왕도에서 나온 편지, 문수사 지장시왕도 서신, 조선 1773~1774년, 종이에 먹, 서산 문수사>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5<문수사 지장시왕도에서 나온 편지>

<지장시왕도>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승려들이 주고받은 편지 여섯 통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서 화승 설훈과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서산 삼길암의 승려 광률이 불상에 금을 다시 입히는 작업을 비밀스럽게 부탁하는 편지가 있습니다. 또한 광률이 문수사 청련암의 최고 어른 스님께 불상에 넣을 복장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도 있습니다. 광률은 왜 비밀스럽게 요청했을까요? 어떤 이류로 불화 뒷면에 편지를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화가 완성되기 전 불사 현장의 이모저모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6<66. 설훈 등이 그린 지장시왕도, 문수사 지장시왕도, 설훈 등 8명, 조선 1774년, 비단에 색, 서산 문수사>

뛰어난 그림 솜씨로 승려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던 화승 설훈이 충청남도 서산 문수사 청련암에 봉안하려고 조성한 지장시왕도입니다. 설훈은 불화뿐 아니라 불상 제작과 개금에도 참여했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에는 불상 제작 수요가 줄어 들면서 화승이 불상 중수와 개금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에는 다채롭게 뻗어가는 신비로운 빛과 구름 가운데 지옥의 영혼을 구원하는 지장보살, 지옥에서 죄를 심판하는 시왕과 무리를 그렸습니다. 이 불화의 뒷면에서는 제작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승려들의 편지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과거 불사 현장의 생생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사 현장의 이모저모
사찰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일인 ‘불사(佛事)’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을까요? 우리는 이미 완성된 불상과 불화만 접하므로 과거의 불사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충청남도 서산 문수사 청련암에는 불화를 그릴 때 현장에서 승려들이 주고 받았던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는 18세기 후반 전문적인 화승 집단이 서로 어떻게 연락했는지, 불사 주문과 진행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려 주며, 재료 수급 과정과 인맥에 따른 개인적인 요청 등 작업 현장의 이모저모를 생생히 보여 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 서화관] 신선을 만나다.

신선도(神仙圖)는 신선들의 모습과 설화를 표현한 그림이다. 도교의 신선사상과 함께 발전하였다. 장수(長壽)와 무병(無病)과 같은 생에 대한 애착과 기복적인 바램을 위해 그려졌다. 그림에는 많은 신선들이 등장하지만 그중에 팔선(八仙)으로 불렸던 종리권, 여동빈, 장과로, 한상자, 이철괴, 조국구, 남채화, 하선고가 많이 그려졌으며 노자, 황초평, 마고선년, 하마선인, 동방삭, 서왕보, 장지화 등도 많이 보인다. 그림에 등창하는 신선들은 각자 관련된 설화에서 묘사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국에서 신도는 남북조시대에 등장하여 당대까지는 인물화로, 북송때에는 불교와 도교를 주제로 한 그림(도석인물화)으로 분류되었다. 남송대 선종(禪宗) 인물화법이 더해지면서 꾸준히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에도 신선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여 조선후기 17세기에 성행하였다. 선비화가인 심사정과 직업화가인 김홍도를 많은 화가들이 작품들을 남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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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리권과 여동빈,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2
<하선고와 이철괴,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3
<한상자와 조국구,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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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채화와 장과로,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도교에서 숭상되는 여덟명의 신선인 팔선을 한 폭에 두명씩 그린 4폭의 족자이다. 오른쪽 첫번째 폭부터 죽은 자를 살리는 부채를 든 종리권과 그의 제자 여동빈, 팔선 가운데 유일한 여선인 하선고, 자신의 몸을 찾지 못하고 걸인의 몸으로 살아간 이철괴, 퉁소를 잘부는 한상자, 하늘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한 조국구,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남채화, 불로장생의 비법을 깨달은 장과로를 그렸다. 섬세하면서도 개성적인 얼굴 묘사와 신선마다 특징적인 지물 표현, 예리하고 날카로운 철선묘(鐵線描)의 옷주름 표현은 당시 중국 화원화가들이 그리는 방식이다. 맹영광은 명말청초에 활동한 중국인 화가로, 병자호란 후 볼모로 잡혀있던 소현세자 일행이 1645년 심양에서 귀국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가 1648년 청으로 돌아갔다.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이징, 이명욱과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심사정(1707~1769년)은 조선중기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증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지만 과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그림을 그렸다. 어려서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진경산수뿐 아니라 중국 절파화풍과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강상야박도>, <파교심매도>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1<용을 마주한 여동빈, 전 심사정,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두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인물이 동굴 앞 벼랑에 앉아 상서로운 구름 속에서 나온 용과 마주하고 있다. 인물 뒤쪽 동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칼과 용으로 미루어 팔선 중 검사인 여동빈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동빈은 평화롭게 방석에 앉은 채 용을 바라볼 뿐 싸울 생각은 없어 보이며 한 쌍의 학과 동자의 모습에서도 별다른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에 심사정의 호 ‘현재玄齋’가 쓰여지고 인장 2과가 찍혔지만, 심사정의 인물화에 비해 공간 배치가 어색하고 인물의 자연스러운 멋이 덜하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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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리권, 작가 모름, 중국 명 15세기, 비단에 색>

종리권은 중국 동한 무장 출신으로 대장군을 지냈다.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풍채가 당당했으며 푸른 눈에 긴 수염을 길렀다. 전쟁에서 패해 종남산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동화제군을 만나 도술을 전수받고 신선이 되었다. 그림에서 종리권은 파도 위에 서 있는데 왼손의 호리병을 가리키고 있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부채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 종리권의 신령스런 면모를 강조한 이 그림은 종교화일 가능성이 커서 단동상 혹은 팔선을 그린 여러 폭 중 한 점으로 생각된다. 15세기 명나라 궁중 화원인 유준은 이러한 단독 신선상을 많이 제작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최명룡(1567~1621년)은 조선중기에 활동한 문인화가이다. 역학에 깊고 수항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취로 그림을 그렸는데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는 그의 대표작인데 신선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화풍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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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 학과 함께 춤을 추는 네명의 선인, 최명룡, 조선 17세기 전반, 비단에 색>

깊은 산 속 커다란 바위 아래 네 명의 선인이 학을 둘러싸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고 있다. 네 사람 중 퉁소를 지닌 인물은 한상자, 박을 치는 인물은 조국구일 가능성이 있다. 오래 살아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함께 어우러진 선인들은 부드러우면서도 흥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흑백 대비가 심한 절벽 표현, 거칠게 그린 나뭇가지와 나뭇잎 처리, 인물을 강조한 구성, 굵고 진하게 표현한 옷 윤곽선 등은 당시 유행하던 절파 화풍의 영향이다. 오른쪽 위에 적힌 ‘석계 石溪’는 문인화 최명룡의 호인데 그는 역학, 음양학, 불교학 등에 능통했고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정선(1676~1759년)은 당시 인기였던 금강산, 관동팔경 등의 명승과 서울 주변 명소들, 지방관으로 근무했던 지역의 경치 등을 많이 그렸다. 초기에는 실경산수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으며 점차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재구성하여 독창적인 진경산수화로 발전시켰다. 산수화 뿐 아니라 신선을 그린 그림들도 작품으로 남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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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는 선인(仙人渡海圖), 정선, 조선 18세기 중반, 종이에 먹>

석장을 잡고 있는 선인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위로 구름에 살짝 가린 둥근 달이 떠 있어 서정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힘찬 필선으로 표현한 옷자락의 생동감, 선인의 인자한 표정, 흐르는 구름과 출렁이는 물결의 유연한 처리 등에서 정선의 뛰어난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의 시구는 중국 명대 철학자 왕수인(1472~1528)의 시 <범해 泛海>의 일부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2<하지장도(賀知章圖), 김홍도, 조선 1804년, 종이에 엷은 색>

당나라 시인 하지장(659~744)이 술에 취해 나귀를 탄 채로 졸고 있다. 그는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풍류를 즐겨 두보는 <음중팔선가 飮中八仙歌>에서 하지장을 술취한 팔선 중 첫번째 인물로 묘사했다. 앞쪽에서 시중드는 인물은 주인이 나귀에서 떨어질까 몸을 붙들고, 나귀는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다. 술동이를 메고 뒤따르는 이는 그 모습이 우스운지 미소를 머금고 앞사람과 눈빛을 주고 받는다. 김홍도는 물기 없는 간단한 붓질로 인물을 표현하고 두보의 시 중 하지장 부분을 행초서(行草書)로 썼는데 그림과 글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3<세발 두꺼비와 노는 유해섬, 심사정(1707~1769년),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유해섬(劉海蟾)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설적인 선인이다. 그는 재상 자리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 초월자이자 내단술(內丹術)인 연금술의 대가였다. 세발 달린 두꺼비는 유해섬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영물인데 특히 돈을 좋아해 유해섬이 종종 엽전으로 그를 꾀어 내곤 했다. 역적 가문의 자손으로 벼슬길이 막힌 심사정은 평생 그림 제작에 몰두했고 다양한 화목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은 붓 대신 손가락이나 손톱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로 누더기 옷을 걸치고 두꺼비와 천진하게 놀고 있는 유해섬의 거친 느낌을 잘 살렸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4<해금감, 전 정선,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가파른 바위 절벽이 절경인 해금강의 뱃놀이를 그렸다. 동해의 기기묘묘한 절벽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출렁이는 파도와 암석에 부딪치는 물결을 표현했다. 금강산 근처의 해금강은 18세기 이후 유람의 명소가 되어 많은 이들이 방문했고, 신비로운 대자연을 신선처럼 유람한 경험과 감흥은 시와 그림 제작으로 이어졌다. 절벽을 각지게 표현하고 죽죽 내려긋는 수직준과 파도 표현 등은 정선의 화법과 유사하지만 필세가 다소 떨어져 진작 여부를 검토하게 한다. 정선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바탕에 두고 남종화법을 써서 우리나라의 산천을 특징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를 확립했고, 이는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5<뱃놀이, 심사정, 조선 1764년, 종이에 엷은 색>

쪽배 한척이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유유히 가로지르고 있다. 온 힘을 다해 노를 젓고 있는 뱃사공과 달리 두 선비는 뱃머리에 몸을 기대어 휘몰아치는 풍랑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세상 모든 이치를 통달한 듯 느긋한 모습이다. 좁은 배 위에 놓인 서안과 책, 붉은 매화 가지를 꽂은 꽃병, 고목에 살포시 앉은 학은 이 그림이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신선들의 우아한 뱃놀이임을 암시한다. 58세의 심사정은 만년에 완성한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법으로 거친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결한 존재를 표현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8
<번개의 신(雷公圓), 김덕성, 조선 18세기 후반, 종이에 색>

천둥소리를 내는 북과 망치를 짊어지고 칼을 쥔 번개의 신, 뇌공이다. 입을 쩍 벌리고 한쪽 다리를 길게 내려 뻗은 포즈는 마치 악인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순간을 보는 듯하다. 뇌신은 조선시대 불화에서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작게 등장하는데 이를 독립시켜 단독상으로 그린 점이 특이하다. 김덕성은 정조 대에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신장상(神將像)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뇌신의 우락부락한 근육과 송숭한 체모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강화하고, 근육에 표현된 음영은 조선 후기 서양화법의 수용을 보여준다. 화면 상단의 제발문은 여항문인이자 송석원시사(松石園試社)의 일원이었던 엄계응이 1804년에 쓴 것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9
<약초 캐고 사슴과 벗하기, 전 김홍도, 조선 18세기 말 ~ 19세기 초, 종이에 엷은 색>

지팡이를 든 선인이 뒷짐을 지고 아래쪽의 사슴 한 쌍을 가만히 굽어보고 있다. 곁에 선 동자의 바구니에는 영지와 약초가 가득하다. 험난한 계곡으로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그 위로 홀연히 나타난 인물에게서는 신선과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림 상단에는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도술에 능했던 귀곡자(鬼谷子)의 은둔 생활을 예찬한 당나라 시인 진자앙(661~701)의 <감우시(感遇詩)> 중 일부가 적혀 있다. 김홍도는 말년에 고사인물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귀곡자 혹은 속세를 피해 은거한 선인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20
<남극노인, 조석진, 20세기 초, 종이에 색>

소나무 아래에서 한 손에 복숭아를 든 수노인(壽老人, 남극노인)이 뿔이 길게 자란 흰 사슴 위에 걸터 앉아 있다. 수성(壽星), 즉 남극성(南極星)은 본래 도교에서 중시되는 별자리로, 장수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에 따라 의인화되어 노인으로 시각화되었다. 화면에 남극노인과 함께 등장하는 소나무, 복숭아, 사슴 역시 장수를 상징한다. 조석진의 고사인물화는 스승인 장승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동일한 도상을 반복적으로 활용해 많은 수의 작품을 제작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21
<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로, 작가모름, 조선 19세기, 비단에 엷은색>

장과로는 중국 당나라 7 ~8세기 무렵에 활동한 도사로, 호흡을 조절하는 내단(內丹) 수련을 쌓아 장수했다고 한다. 원나라 때부터 팔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팔선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다. 장과로는 종이 나귀를 타고 하루에 수만리를 갔다고 하는데 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을 읽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과로도기도>(보물)와 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여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가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6<바다를 건너는 신선들(海上群仙圖), 작가모름, 조선 18~ 19세기, 종이에 엷은색>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7<뒷부분>

여러 신선들이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바다를 건너는 환상적인 그림이다. 가장 오른쪽에는 악을 물리치는 보검을 등에 멘 여동빈, 그와 함께 다니는 버드나무 정령 유자선, 죽은 이를 살리는 부채를 든 종리권이 그려졌다. 술에 취해 나무 아래에 앉아 졸고 있는 이는 당나라의 은자 장지화이고, 약초가 담긴 소쿠리를 든 여성은 수명의 신 마고(麻姑)이다. 왼쪽 끝의 인물들은 방향을 달리하여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붓을 쥐고 있는 학문의 신 문창(文昌)과 그를 호종하며 두루마리를 든 시동들이다.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와 옷깃을 휘날리는 바람에도 개의치 않는 신선들의 못븡이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묘사되었다. 장수와 행복, 성공을 바랐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소망을 엿볼 수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1<꿈을 꾸는 여동빈, 백은백, 조선 1863년, 종이에 색>

검사(劍士)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눈을 감은 채 비스듬히 앉아 있다. 오른손에 쥔 칼과 도복으로 미루어 팔선 중 여동빈으로 생각된다. 당나라 사람인 여동빈은 질병이나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며 공덕을 쌓았다. 일반적으로 여동빈은 늠름한 관료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처럼 느슨하게 쉬고 있는 모습은 드물다. 이는 여동빈이 꿈을 꾸고 이생무상을 깨달은 뒤 종리권을 스승으로 모시는 황량몽(黃粱夢) 고사와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임당 백은배는 화원 가문 출신의 화원으로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하며 초상화, 고사인물화 등을 그렸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최북(1712~1760)은 조선 영조 때 활동환 화원출신 화가이다.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훼(花卉), 괴석(怪石), 고목(枯木)을 두루 잘 그렸다.  성질이 괴팍하여 기행이 많았으며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미법산수도>, <의룡도>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2<나무그늘에 누워, 최북,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13면 서화첩 중 제4면>

나무 그늘 아래에 노인이 팔을 괴고 편안하게 누워있다. 붉은 매화 나무 아래의 돌 탁자 위에는 술병과 술잔이 그려져 술을 마신 후 산바람과 계곡물 소리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선의 삶을 갈구했던 옛사람들은 잠시 세상일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명상을 하곤 했다. 최북은 18세기에 활동한 직업화가로, 붓으로 먹고 산다는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사용했다. 이 화첩은 심사정의 모란, 석류 그림 2점과 함께 최북의 소, 게, 파도, 꽃, 인물 그림 9점이 섞여 있는데 모두 대중들이 선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3<나무 그늘에서의 휴식, 최북, 조선 18세기>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4<나무 그늘에서의 휴식, 최북, 조선 18세기>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인물을 그렸다. 왼쪽 그림에서는 암석 위에 앉아 쉬고 있는 늙은 승려를 그렸다. 가사를 입고 염주 목걸이를 한 그는 대나무 지팡이에 팔을 걸친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그림에는 초립을 쓴 인물이 긴 지팡이를 쥐고 소나무 뿌리 근처에 앉아 있다. 운모가루를 바른 종이 위에 나무와 바위 등을 간략학게 그리고,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로 옆에 전시된 화첩 그림처럼,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는 인물 그림은 이해하기 쉬었다. 직업화가인 최북은 수용에 맞추어 이러한 그림을 다수 그렸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신선을 만나다.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인간의 오랜 소망입니다. 신선은 초월적인 신과는 달리, 역사적 인물로 수련이나 단약 복용을 통해 불로장생했습니다. 중국 원나라 때 대표적인 여덟명의 신선인 팔선(八仙)이 형성된 이후, 신선은 점점 많아지고 세속화되면서 사람들이 장수와 복을 비는 친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속세를 떠니지 못하지만 신선을 동경해 산수유람이나 명상을 하며 신선과 같은 풍류나 아취를 즐기고자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신령스럽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신선들을 그림으로 만나보시는 것은 어떨까요.(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