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관아

서울 우정총국(사적), 구한말 우편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 사적)이다. 구한말 근대적인 우편업무를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1884년 갑신정변의 현장이었던 이유로 폐쇄되었다가 1893년 이후 전우총국이라는 이름으로 우편업무는 재개되었다. 옛 사진을 참고하여 건물을 복원하였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 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옛 관아 건물 중에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현재 우정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갑신정변은  근대적인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그 업무를 담당하기 위한 우정총국을 설립하면서 그 기념식에서 김옥균을 위시한 개혁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사건을 말한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2<서울 우정총국(사적)>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4<’우정총국’ 현판>

이곳에는 도화서, 전의감 등 기술과 관련된 관청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도로에 있다. 건물은 구한말의 전형적인 관청의 모습을 하고 있어 당시 관청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1<정면에서 본 모습>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50<옆에서 본 모습>

내부는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 원래 업무를 보던 모습은 살펴볼 수 없다. 현재 우정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표와 문헌,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5<체전부, 전선부의 의복, 모자, 모표>

한국 최초 집배원과 집배원이 착용한 의상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6<옛 집배원 모습>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7<괘판>

1900년대 우체사에서 사용된 사무용 서식자를 인쇄하던 나무판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09<날짜 도장>

1900년대 경상북도 안동, 전라북도 남원, 충청남도 홍주, 전라북도 전주, 경상남도 진주 우체사에서 사용한 날짜 도장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0<저울과 자>

1900년대 우편물의 중량고 규격 측정을 위해 사용되던 도구이다.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1<우체요금표>

1900년도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제정한 국내외 우체요금표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3<고종황제 즉위 40주년 우표><태극우표>

태극우표
1895년 우정사업 재개와 함께 사용된 4종의 우표로, 5푼, 1돈, 2돈 5푼, 5돈 등의 단위로 발행되었다. 미국 워싱턴 앤드류 비그래이엄 조폐창에서 인쇄되었으며, 태극기 문양이 들어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4<이화우표>

1900년 대한제국 농상공부 인쇄국에서 발행한 14종의 우표로, 최초의 국산 우표이다.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 문양이 들어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5<매우표>

1903년 프랑스 정부 체신청 인쇄국에서 발행된 13종의 우표로, 근대 한국의 우표 중 가장 큰 크기의 우표이다. 대한제국이 본격적인 국제우편 업무 실시에 대비하여 프랑스에 발주, 위탁 제조한 우표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51
<우전선로도본>

대한제국기 전국의 우체사, 전보사의 위치와 선로가 표기된 지도이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시 우편물의 배송 경로와 소요시간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통신권이 일본에 넘어가기 전인 1905년까지의 철로, 전보선로, 전화선로, 수로 상황도 함께 표기되어, 당시 대한제국이 주도적으로 이룩한 근대화 정책의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18<우체사 관인>

서울 영등포, 경남 창원, 진주, 전북 옥구, 충남 은진 등 다섯 곳의 우체사에서 사용했던 관인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한걸음의 의미
조선의 개화정책은 갑신정변으로 잠시 위기를 맞고, 우정사업 역시 중단된다. 하지만 우정총국의 개설과 근대 우정사업의 실현은 그 자체로 조선이 이룩한 최초의 개화 성과로서 의미가 있다. 더불어 조선이 전세계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발자취이다. 이후로도 조선은 세계 속의 조선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갔다. 그 결과 우정사업 창설 초기부터 목표했던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여, 당당한 독립국으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바람을 이루어 낸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0<만국 우편연합 위임장 및 여권>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 총회에 참석한 전권위원 민상호의 위임장과 여권이다. 만국우편연합의 가입은 조선 최초의 국제기구 가입이며, 이를 통해 조선은 독립국으로서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1<만국우편연합 상징조형물>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2<문위우표 5종>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다섯 종으로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의 단위로 발행되었다. 특히 국제우편에 필요한 100문의 고가 우표를 통해 국제우편 업무가 우정사업 개시 당시부터 계획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4<코리안 포스탈 가이드>

1897년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배포한 영문 우체업무설명서이다. 우정사무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외국인에게 홍보와 안내 작업을 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6<일안(日案)>

1884년 11월 우정 업무를 개시하면서 일본 공사관에 통지한 공문이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28<미안(美案)>

1884년 11월 우정 업무를 개시하면서 미국공사관에 보낸 공문이다. 조선 정부는 각국 공사관에 ‘우정규칙’을 송부하고 우정사무 개시를 통지하였으며, 미국 공사관측은 업무 개시에 대한 축하 인사를 답변으로 보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1<한성순보>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2<대조선국 우정국사무장정>

1884년 우정국 설치 당시 제정한 사무장정이다. 우정국은 서울 본국과 인천분국이 함께 설치되었으며, 서울 본국에는 관리사무를 관장하는 규획과 중앙우정국의 업무를 담당하는 발착과,, 경리사무를 담당하는 게산과 등 세 개의과를 두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3<대조선국 우정규칙, 우정규칙적요>

우정국 개설과 함께 마련된 우정사업 관련 규칙이다. 우편물의 종류와 요금 등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5<경성내 우정집신분전 구역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6<승정원일기>

1884년 4월 국왕 고종이 우정총국 창설 교서를 반포하고 그 취지를 밝힌 기사이다. 우정총국의 설치는 공사 간 이득을 취한 것임을 명시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근대 우정제도가 조선에 도입되다
1880년대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 속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각종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아간다. 새로운 근대제도와 문물을 하루 빨리 도입하고자 하는 활발한 움직임 중에서도 우정사무의 개시는 그 핵심사업이었다. 이에 1882년 본격적인 우정사무의 개시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한편, 근대 신문물에 낯선 반응을 보이는 백성을 설득하기 위한 홍보 작업도 진행한다. 마침내 1884년 4월 우정총국을 창설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조선에 근대 우정제도가 실시된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39<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장정>

1882년 개화정책 담당기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반포한 우정사 업무규정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우정업무의 개시가 공식적으로 선언된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0<우정총국 옛 전경(1906년경)>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2<우정총국 초대총판 홍영식>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4<보빙사>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조선사절단 보빙사의 모습이다. 보빙사 시찰을 통해 조선은 서양의 근대제도와 문물을 직접 확인하였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6<조미조약>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서구 사회와 직접 교류하는 첫 걸음을 내디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7<홍영식복명문답기>

홍영식이 보빙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국왕 고종에게 올린 귀국보고이다. 이 자리에서 홍영식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우정과 전신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장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8<일본문견사건>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보고서 중 일본의 근대 우정에 대한 탐방 기록이다. 근대화된 일본의 변화상 중 우정 분야에 대한 조선의 관심을 볼 수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서울 우정총국 20221116_49<일본공부성>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보고서 중 일본의 근대 전신에 대한 탐방 기록이다. 우정과 함께 전신 분야에 대한 조선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우정기념관, 2022년
  2. ‘사적 우정총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강원도 강원감영(사적),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

강원 원주시 일산동에 남아 있는 강원감영(사적)이다. 강원도 26개 부,목, 군현을 관할하던 강원감영이 있던 곳이다. 조선 태조 때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감영을 설치하였다. 건물들은 임진왜란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1634년 원주목사가 재건하기 시작하였으며, 1895년에는 55동에 이르는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청 등 관공서 건물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강원감영 정청 건물이었던 선화당과 살림집인 내아, 출입문인 포정루가 남아 있다. 2000년대 이후 우체국이 들어섰던 후원에 건물과 연못 등을 복원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1<원주 강원감영(사적)>

조선전기 관찰사는 관할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근무하는 순력이 중심이어서 감영 건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조선후기에는 지방을 통치하는 상설기관으로 바뀌면서 많은 건물들이 필요하였다. 감영에 설치된 건물로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객사가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관찰사가 집무공간인 선화당, 숙소인 내아가 있었고 감영에 소속된 관리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등과 호적 등 서류를 보관하던 창고 등 설치되었다. 감영은 대도시에 소재했기 때문에 상업지역이나 관공서로 바뀌어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전라감영 전주객사, 공주 충청감영 선화당,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등이 대표적인 감영 관아 건물들이다.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2<강원감영 읍성 및 관아 건물 배치>

원주 강원감영<강원감영 건물배치, 위성사진>

강원 원주목(여지도)
<원주목지도, 여지도, 18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8<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강원감영의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총 17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과 원주목 관아에서 관찰사와 목사로 재잭하였던 관인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선정비는 관찰사와 목사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나 목사를 경계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었다. 원주지역 곳곳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원주목사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사라져 찾기가 어렵고 강원감영을 복원하면서 일부 남아있던 선정비를 옮겨왔다. 이 중 2기의 비석은 후원 권역에 있던 원주우체국을 철거하면서 찾은 것이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은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공간으로 일반적인 지방 관아에서는 동헌이 있는 영역이다. 옛 건물로는 관찰사 집무공간인 선화당(보물), 포정루가 남아 있다. 2000년대 이후 강원감영(사적)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내아를 비롯하여 중삼문, 내삼문, 행각, 책방 등의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이외에도 보선고, 비방청, 호적고, 약방 등 실무관리들이 근무하던 사무실과 창고 등이 선화당 권역에 있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4<선화당 권역 출입문인 포정루>

포정루는 강원감영 선화당을 출입하는 문루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전형적인 2층 문루 건물이다. 1층 가운데 칸에 널문을 달았으며 2층은 난간을 두르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6<안쪽에서 본 포정루>

포정루(布政樓)
포정루는 강원감영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출입문이다. ‘포정’이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로 중국 명나라의 지방관청이 포정사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된 이후, 원주 진위대가 강원감영을 사용했을 때는 ‘선위루’라 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라고 하였다.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근거하여, 1995년 조선시대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로 편액을 바뀌 달았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포정루를 지나면 두번째 출입문인 중삼문이 있다. 건물터만 있던 것을 복원한 건물이다. 주변의 담장과 부속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은 앞면 5칸 규모로 양쪽에 작은 문간방이 있다. ’관동관찰사영(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이름이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5<중삼문>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20<안쪽에서 본 모습>

중삼문(中三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루.중삼문.내삼문이 있다. 중삼문은 진입공간의 배치상 가운데 위치한 문으로 포정루를 지나온 사람들이 중삼문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중삼문은 ‘관동관찰사영(關東觀察使營門)’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안내문, 2023년, 원주시청)

내삼문은 선화당 마당을 출입하는 문으로 ‘징청문’이라는 이름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강원도 관찰사가 근무하는 공간인 선화당 건물이 보인다. 내삼문에서 선화당까지는 박석이 깔린 길이 연결되어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9<내삼문>

내삼문(內三門)
내삼문의 고유한 이름은 징청문(澄淸門)으로, 포정루.중삼문을 지나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직접 연결되는 문이다. 내삼문은 강원감영의 진입공간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문자는 이곳에서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절차를 거쳤다. 징청문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방문자는 문을 들어서면서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관찰사를 만나러 온 방문객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하여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들이 새겨야 할 덕목이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선화당(보물)은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강원감영 정당(正堂) 건물이다.  1664년 경에 건립된 건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 위치에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실물이 그대로 계승되어 왔으며 조선시대 감영 선화당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21<강원감영 선화당(보물)>

내부는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온돌시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1칸씩은 누마루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부공간 배치로 볼 때 판결 업무가 많았던 지방관아 동헌과는 달리 관찰사는 감영에 속한 지방관 등과 회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부처 정청과 비슷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3<선화당 내부>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2<선화당 앞 측우대(복원품)>

내아는 관찰사가 기거하는 살림집이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가족없이 단신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고 임기도 짧으며 관할지역을 돌아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화당에 비해 건물규모가 상당히 작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3<내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22<내아 툇마루>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6<뒷편에서 본 모습>

내아(內衙)
내아는 관찰사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건물로, 오랫동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대은당’으로, <관동지>에 실린 강원감영지 기록에는 ‘내아’로 기록되어 있다. 내아는 17세기 후반에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살펴보던 유영(留營)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선화당 뒷편에는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책방이 있다. 조선시대 감영에서는 산하 고을에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는 기능과 함께 도서의 수집과 보급, 인쇄와 출판의 기능이 있었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5<책방>

책방(冊房)
책방은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책방에는 감영에서 수집한 도서자료 외에,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온라온 인구.세금.날씨 등에 대한 보고자료, 분쟁.갈등에 대한 소송관계 문서 등이 보관되었다. 대구 경상감영의 사례로 볼 때, 강원감영에서도 도서의 수집.보급, 인쇄.출판 등이 책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관찰사의 수행비서격인 책사가 선화당과 가까운 거리인 책방에 근무하면서 관찰사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강원감영 선화당 영역에서 실무관리들이 근무했던 여러 행각 건물들이 있었다. 확인된 건물로는 보선고(補繕庫), 공고(工庫) 등이 있다.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1<행각>

행각
행각은 궁궐의 중심건물인 정당(正堂)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보조 건물을 말한다. 강원감영도에는 선화당 왼편으로 세 채의 건물이 확인되는데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행각, 보선고(補繕庫), 공고(工庫)가 자리해 있다. 2000년 강원감영터 발굴 당시에는 행각의 건물 흔적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몇개의 건물구조가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행각 자리와 좌측의 공방고지 일대는 옛 지도 기록에서 보이는 행각, 보선고, 공방고지의 여러 건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행각의 건물 복원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이루어졌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7<공방고 터>

공방고터(工房庫 址)
조선시대 강원감영에는 행정업무를 수행하던 육방(六房)이 있었다. 그중 공방은 공용지를 관리하고, 건축물을 짓거나 보수하는 역할을 했다. 공방고 터는 공방이 있던 자리로 고(庫)는 창고보다는 기관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강원감영은 원주목과 같은 관아를 사용했는데, 공방고 또한 원주목과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당시, 바닥에서 온돌시설 일부가 드러나 공방고에 난방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은 감영의 업무가 이루어지던 공간이다. 선화당 권역 안에는 중심건물인 선화당, 진입공간에 해당하는 포정루.중상문.내삼문, 그밖에 내아.공방고 터.행각.책방 등이 있다. 감영의 본청인 선화당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선화당 권역은 진입 공간과 집무 공간으로 나뉘는데, 강원감영의 진입 공간은 포정루에서 시작해서 중상문.내삼문으로 연결되는 삼문(三門)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강원감영을 찾아온 손님들은 각 문을 지날 때마다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중삼문에서 꺾어서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선화당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방식은 경기.전라.황해감영에서도 볼 수 있다. 집무공간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농정.조세.민원.군사.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고, 17세기 중반부터 선화당을 비롯하여 관찰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3년)

객사 권역

감영 동쪽편에는 객사를 중심으로 강원감영에 속했던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군사시설인 중영(中營), 화약고(火藥庫), 군기고(軍器庫), 군향고(軍餉庫) 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羅將)이 일하는 군뇌방(軍牢房),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司倉)이 이 객사 앞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원주의 대표적인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심 상업지구에서 볼 수 있는 옛지도를 표현한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상업지구로 변한 객사 주변 지역>

후원 권역

강원감영 선화당 뒷편에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인 후원이 있다. 후원에는 큰 연못을 조성하고 3개의 섬을 조성하여 삼신산을 구현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후원에는 원주우체국이 자리하였는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끝나면 옛 후원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7<강원감영 후원 권역>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8<영주관>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0<봉래각>

봉래각(蓬萊閣)
봉래각은 강원감영 후원의 건물들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1684년 관찰사 신완이 연못 북쪽에 처음으로 봉래각을 세웠다. 그러나 물이 넘쳐 누각이 여러 차례 허물어지자, 1704년에 관찰사 홍만조가 기존 봉래각을 헐어내고 섬을 견고하게 만들어 그 위에 봉래각을 새로 지었다. 봉래각을 처음 건립한 관찰사 신원은 <봉래각상량문>에 ‘봉래’가 강원도에 있으므로 강원도를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1<채약오>

채약오(採藥塢)
채약오는 신선이 먹는 불로초를 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봉래산을 비롯한 삼신산에는 영험한 약인 불로초가 있다는 신선세계의 전설을 따른 것이다. 1771년 관찰사 서명선이 연못 속에 6개의 기둥을 세워 건립하였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12<뒷편에서 본 후원>

원주 강원감영(사적)_20230511_09<후원에서 보이는 선화당 권역>

강원감영 후원 권역
강원감영의 후원 권역은 관찰사의 사적인 공간으로, 후원에는 연못을 조성하여 봉래.영주관 등을 건립하고 손님 접대와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못 가운데와 한쪽 끝에는 정자를 세워 연못을 내려다보며 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원감영의 후원에서는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산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전각을 짓고, 모두 신선 세계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봉래산’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의 후원에 이에 어울리는 신선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관찰사들은 후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봉래주인’, 즉 신선세계의 주인이라 칭했다. 강원감영의 후원은 일제강점기까지는 유지되었으나 이후 후원 자리에는 한때 원주우체국이 자리했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아름다운 후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적,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원주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으로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왕조는 태조4년(1395)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강원감영을 설치하여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원주가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지리적으로 수도인 한양과 가까워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찰사는 행정과 군사의 최고 책임자로, 왕의 명령으로 파견되어 각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을 올바르게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감영에 잠시 머물면서 강원도 각 지역을 돌아보는 순력(巡歷) 체제로 업무가 이루어졌다.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게 되고, 관찰사는 강원감영에 머물면서 때때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돌아보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留營)이라고 한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원이 다시 짓기 시작한 이후 여러 목사와 관찰사들이 계속하여 다시 지었다. 강원감영은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보선고.내아.비장청.호적고 등 40여 동에 달하는 웅장한 모습으로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역할을 수행했으나, 1895년에 8도 제도가 23부 제도로 바뀜에 따라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1900년 이후 강원감영은 원주의 지방군대인 진위대 본부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한때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강원감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2023년, 원주시청)

<출처>

  1. ‘사적 원주 강원감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2.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3. 안내문, 원주 강원감영사료관, 2023년

충청도 면천군 관아

충남 당진시 면천면에 있는 옛 충청도 면천군(沔川郡) 관아터이다.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서 허물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2007년 옛 동헌 출입문인 풍락루를 복원했으며, 면천초등학교가 사용했던 객사터는 2016년 학교가 이전하면서 객사건물을 복원하였다.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 성벽과 객사터에 남아 있는 수령 1,100년의 면천 은행나무, 객사터 앞 오래된 낡은 주택들과 상점들이 읍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18<충청도 면천군 관아터>

면천군은 종4품 군수가 고을수령인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을로 아산만 연안수로를 지키는 해상교통의 거점이었다. 군사조직은 홍주진관에 속했으며 종4품 동첨절제사를, 산하에 수군(선군,船軍)을 두고 있었다. 조선초에는 충청지역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면천지역으로 운송하여 창고에 두었으나 성종 때 공세곶으로 창고로 옮기면서 그 기능이 약해졌다. 경기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해산물과 소금의 산지이기도 했다. 읍치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읍성이 세워졌다.

GM33496IL0006_058
<면천군지도, 여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년>

충청도 면천군<면천군 읍치 위성지도>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06<면천군 객사>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03<가운데 정청>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04<왼쪽 건물>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05<오른쪽 건물>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07<면천초등학교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교문>

객사 마당에는 수령 1,100년이 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남아 있다. 고려 개국공신인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나무이다.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02<면천은행나무(천연기념물)>

면천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년 정도 된 것으로, 면천두견주와 함께 면천의 명물로 손꼽힌다. 동남쪽에 서 있는 나무는 운동장을 정리할 때 1m 정도 흙을 덮었다고 하나 서장이 좋은 편이다. 운동장 안쪽에 서 있는 나무는 밑줄기가 썩어 커다란 구멍이 있었으나 치료한 후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 이들 은행나무에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복지겸이 면천에 귀향하여 병을 얻어 앓고 있었는데 모든 약이 효과가 없었다. 그의 딸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아미산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드렸더니 신령이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 꽃과 안샘물로 술을 빚어 드리고 집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정성을 드리면 나을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행하였더니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01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08<관아터에 남아 있는 고목>

동헌 건물은 복원되지 않고 빈터만 남아 있으며 문루인 풍락루만 2007년에 옛 사진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11<동헌 건물터>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15<동헌 문루인 풍락루>

풍락루(豊樂樓)
풍락루는 지금은 사라진 면천관아의 문루였던 누각으로 정확한 기록이 없어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반월루라 하였으나 1852년 당시 면천군수였던 이관영이 중수한 후 ‘풍락루’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걸었고 풍락루기를 남겼다고 한다. 풍락루라 한 것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노후와 붕괴될 위험이 있어 1943년 철거하였다가 2007년 철거 전의 사진자료를 토대로 하여 2층 누각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관아터 앞에는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옛 읍치에서 살았던 사람들 살고 있는 지역중심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낡은 상점들에서 옛 읍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17<관아터 앞 큰 길과 상점들>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10<낡은 2층 상점건물>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면천읍성은 초선초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종 때 읍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충청도 면천군 관아 20230316_14<면천읍성>

<출처>

  1.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면천군(沔川郡)”, sillokwiki, 2023년


 

 

충청도 해미현 관아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사적)에 잏는 해미현(海美縣) 관아이다. 해미현은 1407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설치하였다. 이 지역은 충남 서해안 연안 해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이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조선초에는 충청병영과 충청수영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후 충청병영은 청주로, 충청수영은 보령으로 이전하였다. 해미현 수령은 총6품 현감으로 무관을 임명하여 영장토포사(營將討捕使)를 겸하게 하여 주변 고을의 군사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1<서산 해미현 관아, 2023년>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과 해미현 관아>

SANYO DIGITAL CAMERA<해미현 관아,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서문 근처에 본 모습>

조선시대 객사는 관아의 중심건물이다. 특히, 병영이나 수영의 객사는 군사작전 등을 위해 건물규모가 상당히 큰 편인데 비해 해미현 객사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정청과 좌.우익랑의 구분없이 앞면 7칸 규모의 단일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정청이고 좌, 우에 2칸씩 익랑을 두고 있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3<해미현 객사>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1<옆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남문 문루에서 보이는 객사>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2<객사에서 보이는 읍치>

해미읍성 객사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식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해미읍성 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동헌 출입문으로 2층 문루를 두고 있다.  문루에는 ‘충청좌영’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헌 문루>

동헌은 해미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동헌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약간 큰 편이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2<동헌 마당>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7<동헌>

동헌 뒷편에 있는 건물은 책방 또는 책사라 불렀다고 한다.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이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5<동헌 뒷편 책방>

동헌 서쪽에는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부속건물이 있다. ‘ㄱ’자형 건물로 사무실 용도의 방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6<동헌 부속 건물>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경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동헌 옆에는 해미현감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인 내아가 있다. 앞면 5칸의 일자형 주택 건물로 부엌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8<내아 마당>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0<내아>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9<내아 앞 부속 건물>

해미읍성 내아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살림집이다. 해미읍성 내아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4<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미읍성>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6<청허정>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5<정자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

청허정
정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청허정은 조선 성종 22년(1491) 충청도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세웠던 것을 다신 복원한 것으로 조선전기 대표학자 성현의 개인문집 <허백당짐>에 그 유래가 정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감사 조위는 청허정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의 문집 <수헌집>에 절도사와 수령이 일을 마치고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 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예터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 다시 정비하였다.(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읍성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옥사에서 투옥되어 문초를 받았다고 하며 옥사 앞 회화나무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해미읍성 옥사>

SANYO DIGITAL CAMERA<해미읍성 옥사>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 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혹이 있고, 각각 정면 3칸의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의 고목으로 이곳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던 곳 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
<해미읍성 회화나무>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09년,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실록위키,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강원도 영월부 관아(사적)

강원도 영월군 중앙로(영월읍)에 있는 영월부 관아(사적)이다. 영월부(寧越府)는 조선시대 영월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관청이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서 내성군을 서러치했으며 고려떄는 원주의 속현이었다가 고려말에 영월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후기 숙종 때(1698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승되고 장릉으로 천릉하면서 영월부로 승격하였다. 영월부 관아는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 청령포에 머물다 홍수가 나면서 관아 객사 동익헌(관풍헌)에 머물렀던 유서깊은 곳이다. 관아터에는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객사와 단종이 자주 올라서 시를 지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규루(子規樓)가 남아 있다.

영월부 관아 (사적) 01-20220822<영월부 관아(사적)>

보물_월중도(제7면_읍치)<영월부 관아 지도, 월중도(보물)>

영월을 부사로 승격하고 김시습에게 증직과 사제를 행하도록 명하다
“장릉(莊陵)의 헌관(獻官)은 의당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차정(差定)하여야 하니, 영월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사체(事體)를 높이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2월 10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월부 객사는 조선초 태조 때(1396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면 정조 때(1791년)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청은 앞면 3칸, 서익헌은 앞면 4칸 규모이며 단종이 머물렀다는 동익헌(관풍헌)은 앞면 5칸 규모이다. 다른 지방의 객사 건물과는 달리 동익헌은 온돌시설이 있어 단종이 머물렀던 숙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월중도(보물)에 그려진 객사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과 동일하여 조선후기 중수 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월 영월부 관아(사적) 11-20220822<영월부 객사>

영월부 관아 (사적) 03-20220822<관풍헌>

영월부 관아 (사적) 04-20220822<정청>

영월부 관아 (사적) 05-20220822<서익헌>

관풍헌(觀風軒)
영월객사의 동헌으로서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께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어하시어 머무르시다가 1457년(세조 3) 10월 24일 승하하셨다. 1997~1998년 드잡이 및 번와 등 전면보수를 하였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관아 앞쪽에 위치한 자규루(子規樓)는 조선초 세종 때(1428년) 처음 창건된 누각 건물이다. 단종이 청령포를 떠나 영월군 관아에 머물 때 자주 올르 자규시를 읊은 것을 계기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단종이 복위된 조선후기 이후에 다시 중건했다.

영월부 관아 (사적) 02-20220822<자규루>

자규루(子規樓)
이 누각은 세종 10년(1428)에 창건, 신숙근이 중근. 신숙근은 연산조에 영월군수를 역임하였다. 후에 단종께서 관풍헌으로 이어하시어 머무시는 동안 이 누각에 오르시어 자규사 및 자규시를 읊으신 것이 계시가 되어 자류루로 불리게 되었음. 그후 선조 36년(1605) 큰 홍수로 인하여 이 누각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과 영월부사 이동욱이 의논하여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영월부 관아(사적)<영월부 관아 위성사진>

영월부 관아(寧越府)
영월 객사와 관풍헌 및 자규로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이곳에 유배되어 노산군으로 강봉된 채 17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해진다. 세조 3년(1457)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홍수가 나게 되자 당시 영월부 객사의 동익헌이었던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침전으로 사용하였고, 자규로(당시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비통함과 애처로움이 배어 있는 시를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숙종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