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관아

경상도 청도군 관아, 객사인 도주관과 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청도군 관아 건물들이다. 청도군 읍치였던 청도읍성내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도주관, 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얼음창고인 석빙고(보물 323호)가 남아 있다. “도주관(道州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객사는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가운데 정청과 우익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좌익헌을 다시 지어 옛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동헌은 객사 뒷편 초동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데 학교건물로 사용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최근에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읍치였던 화양읍 일대가 원래 청도군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청도역이 있는 청도읍이 중심지로 바뀌었다.

청도군은 대구 남쪽, 경주 서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던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을이었다. 경주로 가는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가 건국하면서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지금의 청도군을 형성하였다. 고려초 현급인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고려 충햬왕 때 청도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말 이후 큰 성씨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졌으며 김일손, 김대유 등 사림파 문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주변에 운문산, 가지산, 천왕산 등 큰 산들이 많으며, 동창천.청도천 등 큰 하천이 밀양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청도군 관아 중심건물이었던 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궐패를 두고 양쪽에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동.서익헌을 두고 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7-20200106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 “도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도주는 청도의 다른 이름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5-20200106정청 내부. 일제강점기 이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청도 청도군 관아 21-20200106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동익헌. 앞면 6칸 규모로 상당히 큰 편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2-20200106옆에서 본 모습.

청도 청도군 관아 20-20200106서익헌. 앞면 6칸 규모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청도 청도군 관아 06-20200106서익헌 앞 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03-20200106객사 뒷편.

청도 청도군 관아 19-20200106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청도 청도군 관아 08-20200106객사 마당 한쪽편에 남아 있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

도주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조주는 청도의 옛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어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동.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는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 38년(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집이며, 동.서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하여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준다. 도주관 앞에는 고종 8년(1871) 병인.신미양요를 치른 뒤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옮겨져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3-20200106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동헌. 앞면 7칸 규모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16-20200106청도군수가 공식 업무를 보던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15-20200106동헌 뒷편으로 2칸 정도 누마루를 달아내어 정자처럼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4-20200106옆에서 본 청도동헌.

청도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관찰사.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1917년 군 청사를 고수동으로 신축 이전함에 따라 동헌건물은 도주학원 및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앞쪽 칸은 퇴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역사성과 관아건축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1-20200106읍성 동문 안쪽에 복원해 놓은 옛 관아 건물인 고마청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ㅇㄹ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도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군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 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0

청도 청도군 관아 10-20200106청도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청도 청도군 관아 09-20200106읍성 동문 밖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전국에 남아 있는 6곳의 석빙고 중 하나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31-20200106읍성 앞에 모아놓은 청도군수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청도 청도군 관아 18-20200106객사 앞으로 옮겨 놓은 구한말에 세운 척화비

청도 청도군 관아 12-20200106옛지도에 나타난 청도군

청도군의 연혁
청도군은 선시시대 유적 중 바위그늘과 지석묘, 석관묘 등의 유적이 각지에서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 12국 중 우유국의 위치가 청도라고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이서국이 청도에 존재했던 초기국가이다. 이서국은 유리왕 19년(42)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나, 유례왕 14년(297) 이서국이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지배체제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솔이산성, 오도산성, 가산성으로 신라에 편입되었고 경덕왕 16년(757) 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으로 개명하고 밀성군(지금의 밀양)의 속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이 되고 – 일명 도주 – 직급이 낮은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곳이었다. 1342년(충혜왕 3) 이곳 출신인 김선장의 공로에 의해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다음해 강등되었으나 김한귀의 청원으로 1366(공민왕 15) 다시 지군사가 되어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의 읍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왔다. 1896년 도제의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고 1900년대 초 대구에 속했던 풍각, 각북, 각초면이 청도군에 편입되고, 외서면은 밀양군에 속하게 되는 등 여러 번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2읍 7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경상도 상주목 관아, 경상감영이 있었던 큰 고장

상주(尙州)는 경북 서북부에 있는 고장으로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낙강강 본류가 상주시 동쪽을 흐르고 있으며 북.서쪽을 백두대간이 막고 있다. 삼한시대 사벌국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고려 성종 (982년) 때 전국 12목 중 상주목이 설치되었다. 조선초 전국 8도체제가 확립되면서 경상도 감영이 이곳에 설치되면서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경상도의 어원이 상주에 유래할 정도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요한 고장이었다.

읍치였던 상주읍성에는 고을 규모에 걸맞게 많은 관아 건물들이 있었다. 주산인 왕산 앞에는 상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과 내아, 그리고 관리들이 근무하던 이향청 등 크고 작은 관청 건물이 있었고, 동쪽편에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객사인 상산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읍성이 허물어지고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없어졌다. 현존하는 옛 관아 건물들인 상산관, 태평루, 침천청 등은 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졌으며 향청만이 옛 관아터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상주목 관아 객사 건물인 상산관. 관아 객사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의 중 하나이다. 가운데 궐패를 모신 정청을 두고 앞면 7칸 규모 동익헌과 앞면 5칸 규모 서익헌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궐패를 모신 정청

OLYMPUS DIGITAL CAMERA정청 내부에 재현해 놓은 망궐례 모습. 상주목사가 국왕에 예를 올리는 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출입문 문루로 사용되었던 태평루

OLYMPUS DIGITAL CAMERA태평루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북천전적지 태평루 앞에 있는 공덕비

태평루
이 누각은 조선시대 1808년(순조 8)에 상주목사 정동교가 건립했다. 건축양식은 조선시대 성행한 다포식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당시는 왕산을 중심으로 쌓은 상주읍성 관아문의 내삼문 밖에 있었고 동헌의 문루로 사용되었다. 그후 1920년 상주향교 동편에 있는 동산으로 옮겨 남산중학교 교사로 사용하다가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1992년 현재 위치에 옮겨왔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옛 상주목 관아터에 남아 있는 부속건물인 향청. 지역 유력인사들과 함께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장소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천전적지로 옮겨 놓은 정자인 침천정. 상주읍성 남문 밖에 있던 관아에서 설치한 작은 정자이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기 보다는 지역 유력인사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내 향청과 비슷한 성격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침천정
이 정자는 조선시대 1577년(선조 10)에 상주목사 정곤수가 상주읍성 남문 밖에 건립하고 연당이라 이름지어 선비들의 휴식처나 글 짓는 곳으로 사용하던 관정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상주목사 한술이 중건하고 1614년(광해군 4) 상주목사 강복성이 천향정으로 개칭하였으며, 1693년(숙종 19)에 목사 이항이 연지를 홍백연당으로 고치고 이향정이라고 하였다. 그후 일제시대인 1914년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상주읍성이 헐릴 때 지방의 뜻있는 유지 여러 명이 정자를 사서 현 위치로 옮기고 군수 심환진이 침천정이란 이름으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OLYMPUS DIGITAL CAMERA옛 상주목 동헌 뒷편에 있는 왕산공원에 있는 송덕비들.

OLYMPUS DIGITAL CAMERA상주성도.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읍내 반경 5리 이내의 관아 등 공공시설을 그린 지도이다. 동헌건물이 청유당(1827년), 서산서원(1713~1870년)이 그려져 있어 제작시기는 1827년에서 187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그림에서 볼 수 있는 옛 상주목 관아 건물 배치도.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객사와 주변 부속 건물 옛사진

OLYMPUS DIGITAL CAMERA객사가 있던 자리에는 상주경찰서를 비롯하여 여러 공공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과 왕산공원 모습을 볼 수 있는 옛 사진. 일제강점기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과 태평루가 있던 자리에는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초가지붕을 하고 있던 상가들이 있던 남문으로 연결되는 거리.

OLYMPUS DIGITAL CAMERA임란북천전적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주읍치

<출처>

  1.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2.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충청도 충주목 관아, 청녕헌과 제금당

충북 충주시 성내동에 옛 충주목 관아터이다. 충주시 도심에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충주관아공원’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옛 동헌 건물인 청녕헌과 별관이었던 제금당, 산고수청각, 충청감영문, 축성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관아 마당에는 수백년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이 옛 관아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령헌과 제금당은 구한말인 1870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지었는데 지방 관아 건물로는 큰 편이다. 동쪽에 위치한 제금당은 별관 건물로 충주를 방문한 주요 인사들이 묵을 수 있도록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살림집인 내아와 가장 중요한 객사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충주목(忠州牧)은 조선시대 충주지방에 있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정3품 목사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읍치는 현 충주시 성내동 일대이다. 충주목와 관할 범위는 현 충주시와 충주시와 접하고 있는 괴산군, 음성군, 제천시의 주요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고려초 전국에 12목이 설치될 때 충주목이 되었으며 조선 세조 때에는 군영인 충주진(鎭)으로 바뀌었다가 인조 때 다시 충주목으로 복구되는 등 강등과 복구를 거듭하였다. 구한말 갑오개혁 때 관찰부로 승격되면서 충북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후 철도와 도로교통에서 소외되면서 지방 소도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충청도 청주목 관아터. 충주는 조선시대 남한강 수운과 육상교통로의 중심지로 국방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충주목 읍치는 관아가 있던 성내동 일대에 읍성내에 있었는데 충주읍성은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공원 입구로 사용되는 관아출입문. ‘충청감영문’이란 현판이 걸려 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목사가 근무했던 공간인 동헌.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양쪽에 방을 배치하였다. 왼쪽 1칸은 약간 높게 만든 누마루 형태의 ㅇ공간이다. 19세기에 새로 지은 관아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령헌’이라 적힌 현판. 지붕은 겹처마를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목사가 송사를  비롯한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 온돌방. 한쪽 끝에 누마루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청녕헌
1870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의 관찰사가 사용하였고, 이듬해 충청북도 관찰사의 집무실이 되었다. 1908년(순조 2) 5월 25일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면서 충주 군수의 정청으로 이용었다. 한말 의병전쟁 때에는 호좌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군대가 충주성을 점령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던 곳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동쪽에 위치한 건물인 제금당.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충주를 찾았던 왕실 관련 인물들이 머물던 공간이라고 한다.  객사와는 별도로 손님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놓고 이다. 남한강 수운과 죽령, 조령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한 충주의 특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제금당
동헌의 동쪽에 위치한 제금당은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왔을 때 머물던 별관으로 단청이 화려한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출입문인 내삼문은 1871년(고종8)에 솟을대문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예성별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제금당의 다른 이름으로 되었다. 뒤쪽에는 수직청으로 사용되던 산고수청각이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제금당에 딸린 공간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인 산고수청각. 실무자들이 사용하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산고수청각
제금당의 수직청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4칸, 측면 1.5칸인 맞배기와집이다. 구조는 방 2칸에 부엌 1칸이 딸렸으며 정남향을 하고 있다. 동헌인 청녕헌이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을 향하여 남서향을 하고 있는데, 별관인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정남향을 하고 있다. 이는 청녕헌은 지방관이 사용하는 아사이기 때문이나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왕부의 건물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제금당 출입문. 솟을삼문 형식을 하고 있어 왕실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성별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금당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고목

OLYMPUS DIGITAL CAMERA전국의 주요 관아터에서 볼 수 있는 구한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들을 기리기 위한 순교비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순교자 현양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건립된 순교자들의 현양비, 천주교 박해가 있을때마다 충주 부근의 천주교우들이 충주 동헌에 잡혀와 심문을 받았으므로, 이곳에 서린 순교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봉방당 무학당 주변(현 충주우체국 신축부지)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부자, 권아기련 등 많은 사람이 순교한 사실이 확인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관아공원 앞 골목길.

충주관아골
조선시대 충주읍성 내에 있던 충주목 관아터에 조성한 공원으로, 청녕헌과 제금당 등 옛 관아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 관아건물들은 1870년(고종 7) 8월 화재로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재건한 것이다. 그후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6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충주시에서 복원한 후 그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관아공원에는 청녕헌과 제금당 외에 충청감영문, 산고수청각, 축성사적비, 순교자헌양비 등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수목과 어우러져 있어 고색창연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전라도 나주목 관아(사적 483호), 객사인 금성관과 내아

전남 나주시 금계동 일대에 남아 있는 옛 나주목 관아터(사적 483호)이다. 나주시 구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관아터에는 객사인 금성관, 내아인 금학헌,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등이 남아 있다. 객사인 금성관은 조선초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에 중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청사로 사용하면서 개조되어 정청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 망화루 등이 복원되었다. 내아인 금학헌은 구한말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되면서 일부 변형이 있었으나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부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지방관아 중 비교적 큰 규모였던 나주목 관아의 옛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서깊은 유적지이다.

나주는 전남지방을 흐르는 영산강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큰 고을로 고려시대부터 큰 규모의 지방행정 조직인 나주목(牧)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주와 함께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읍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지도 등 여러 문헌에 관아 건물들의 위치와 형태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현존하는 관아건물 등과 비교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출입문인 망화루. 객사인 금성관과 함께 조선초에 처음 세워졌다. 다른 지방 객사문과는 달리 문루 형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 중삼문과 내삼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금성관 중삼문.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통 객사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삼문형식을 하고 있으며 문루에서 거친 박석으로 삼도형식이 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인 금성관. 가운데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을 두고 양쪽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군청건물로 사용하면서 정청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다시 지어 원형을 복원하였다. 동.서익헌 건물의 규모가 다른 것이 특이하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정청. ‘금성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지방관아 객사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청 내부. 넓은 마루가 깔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정은 우물천장과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 섞여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앞면 6칸의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동익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이며 오른쪽에 넓은 마루가 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벽오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헌은 앞면 5칸으로 동익헌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현 앞쪽 툇마루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나주목 객사.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객사 앞 마당. 가운데 내삼문 터가 있다. 궁궐 정전 영역처럼 마당에 박석이 깔여 있으며 가운데 통로가 있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다.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이다. 특히 정청(나주목은 금성관)에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즉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4.12 ~ 1489 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임란때 피해를 입어 김개목사가 1617년 4월 21일 중수하고 1774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 1963년 보수를 거쳐 1876년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정비 사업을 통해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서익헌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객사 마당 한쪽편에 모아 놓은 공덕비들.

SANYO DIGITAL CAMERA객사 서쪽편에는 나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와 내아인 금학헌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SANYO DIGITAL CAMERA정수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내아였던 금학헌이 남아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사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ㄷ’자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구한말 상류층 저택의 형태가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행랑채에 해당하는 부속건물

나주목사 내아. 금학헌
이곳은 조선시대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살림집을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안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객사 금성관과 동헌의 출입문 정수수와 함께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내아가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으나 안채 상량문에 1825년(순조 25) 7월 1일 주춧돌을 놓고 7월 20일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문간채는 1892년(고종 29)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9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최근에 모두 충실하게 복원하였다. 목사내아는 주변에 객사, 정수루가 함께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 양식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내아 부근에 남아 있는 의열각

나주목 관아.나주읍성
이곳은 천여년 동안 나주의 중심공간으로 금성관을 중심으로 하는 객사공간과 나주목사가 직접 정무를 보았던 나주목 동헌(정수루, 목사내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을 정점으로 동문(동점문), 서문(서성문), 남문(남고문), 북문(북망문)의 사대성문과 성벽을 쌓아 도시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현재 규모는 김계희목사(1457.811 ~ 1459.11.21 재임)가 완성하였다. 나주읍성은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 이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동부면(16개리) 서부면(24개리)이 편재되어 1,361호 4,662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이 378명이 많았다. 또한 남문밖에는 전라우영(현 나주초등학교)이, 서문밖에는 나주향교가 자리하고 동문밖에는 석장(석당간, 보물 49호)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읍성을 중심으로 석당간, 나주향교, 목사내아, 정수루, 주사청 등의 건물이 있다. 좌측의 나주목고지도는 영.정조 때 비변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지도로 나주읍성과 관아의 각 건물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주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전라도 김제군 관아, 동헌과 내아 (사적 482호)

전북 김제시 교동에 위치한 옛 김제군 관아이다. 관아터에는 김제군수가 근무하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 동헌에 딸린 작은 정자인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관아근처에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은 조선중기 숙종 때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으로 지방 관아 건물 중 비교적 큰 편이다. 살림집은 내아는 ‘ㄷ’자형 안채만 남아 있다. 피금각은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것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전남 담양에 있는 정철 후손들이 지은 송강정과 비슷하다.

김제는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특히 조선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다. 유력한 정치세력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파견된 지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관아 건물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내 서원이 많지 않아 향교도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시 도심에 남아 있는 옛 김제군 관아. 지방 관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군수 집무공간인 동헌.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헌 건물로 중앙부처나 감영 동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겹처마와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건축수법이나 자재가 고급스럽다. 농업생산력이 풍부했던 김제군 관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동헌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면. 한쪽에만 온돌방을 두고 있다.

김제동헌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맡아보던 청사로 동헌이라 하였다. 김제동헌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워 근민헌이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아 2007년 7월 3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근민헌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동헌 앞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피감각. 가운데 작은 온돌방을 두고 툇마루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군수로 재직할 때 지은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피금각.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편 김제군수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ㄷ’자형을 하고 있는 안채만 남아 있다. 가운데 중문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동헌 방향으로 방문과 툇마루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는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방관아 내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작은 부엌. 일반 주택에 비해 부엌이 작은 편이다.

김제 내아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관아는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이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이다. 김제 내아는 내동헌으로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문화재로서 현재는 동쪽이 트인 <ㄷ>자형 안채 건물 하나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내아로서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김제 관아에서 약 1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제향교. 중등교육기관을 담당하던 곳이다. 김제 지역에는 유력 양반세력이 없어 서원이 발달하지 않아 오랜 기간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제 옛 관아(동헌.내아), 사적 482호, 전북 김제시 교동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로서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현재 김제관에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실례가 되고 있다.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의 경우 1667년(현종 8) 김제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이라 칭하였으며,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1667년 이전에 이미 김제 동헌에 대한 시문이 전해지고 있어, 건립시기는 수령의 살림채인 내아(내동헌)과 함께 150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633년(인조 11)에 지어진 피금각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 재임 시 동헌에서 업무를 마친 후 가야금과 바둑, 서책을 읽으며 휴식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김제 관아는 현존하는 동헌, 내아, 피금각 이외에 외삼문과 내삼문, 호적고, 사령층 등이 김제지방도(1872년)에 보이며 외삼문의 경우 중층 문루형식에 상층엔 징벽루, 하층엔 벽지아문이라 편액하였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