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관아

경상도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운봉관(雲鳳館)과 누각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는 경북 청송군 일대를 관할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현재의 청송읍, 주왕산면, 부남면 등을 관할하였다. 경북 내륙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고을의 규모가 크지 않은 고려 때 까지 청부현(靑鳧縣)이 있었는데 세종 때 왕비 소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인근 진보현(眞寶縣)과 통합하여 청보군(靑寶郡)이 설치되었다. 이후 지리적인 이유로 진보현이 분리되고 인근 송생현(松生縣)을 합쳐 청송군이라 했다. 이후 세조는 어머니의 관향인 청송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규모에 비해 위상이 높았던 고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읍치에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청송도호부 01-20201204<청송도호부 관아가 있는 소현공원>

청송도호부 10-20201204<역대 청송도호부사 공덕비>

청송도호부 읍치(邑治)였던 청송읍 일대는 고을의 중심지이기는 하나 주변에 농경지와 인구가 많지 않으며 진보면소재지와는 약 15 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읍성(邑城)이나 산성(山城)이 없으며 군사조직인 진보(鎭堡)도 없었다. 관아 건물로는 객사(客舍)인 운봉관(雲鳳館),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누각인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운봉관과 찬경루만이 남아 있다.

청송도호부 06-20201204<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은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건물이다. 건물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정당(正堂)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를 두고 있다. 정당은 앞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동.서익사는 각각 앞면 5칸으로 넓은 마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정당과 서익사는 철거되고 동익사만 남았으나 최근에 고증을 통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청송도호부 04-20201204<국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

청송도호부 12-20201204<일제강점기 이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던 동익사>

청송도호부 11-20201204<복원된 서익사>

청송도호부 07-20201204<서익사 마루>

청송도호부 08-20201204<온돌방>

청송도호부 09-20201204<동쪽에서 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
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로 사용하였다. 선조(宣祖) 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成)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휘옥(革)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尹顯岐) 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中堂)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堂)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 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 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눈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청송도호부 15-20201204<찬경루>

청송도호부 05-20201204<객사에서 본 찬경루>

청송도호부 03-20201204<찬경루 옆 작은 부속건물>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청송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 관아에 운영했던 누각

경북 청송군 청송읍에 있는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이다. 조선초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청송군이 세종의 비 소현왕후의 관향임을 들어 당시 관찰사가 찬경루(讚慶樓)라 이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1-20201204<청송 찬경루(보물 2049호)>

건물을 앞면 4칸, 옆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강변 경치가 좋은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경치좋은 용전천 주변 풍경과 멀리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보이는 방향으로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뒷편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2-20201204<정면에서 본 모습.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을 >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1-20201204<찬경루 현판>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2-20201204<자연 암반 위에 올려놓은 건물 기둥>

건물 내부 뒷편에는 2칸 정도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온돌방 앞에는 국왕이 앉을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주변보다 한단 높게 만들어 놓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 누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찬경루만의 특징이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6-20201204<찬경루 내부>

건물 내부에는 안평대군이 쓴 송백강릉(松栢岡陵) 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나 화재로 불타서 없어지고 정조 때 (1792) 한철유가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유명인사였던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홍성민 등이 시문을 남겼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5-20201204 < ’송백강릉(松栢岡陵)’이라 적힌 현판>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8-20201204<뒷편에서 본 모습>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0-20201204<동쪽에서 본 모습>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7-20201204<서쪽에서 본 모습>

청송 대전사 보광전 보물1570호 21-20201205<주왕산 대전사>

찬경루(讚慶樓), 보물 제2049호
찬경루는 세종 10년(1428)에 운봉관과 함께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2층 16칸 으로 세운 누각이다. 조선시대 때 누각은 객사와 이웃하여 있으면서, 사신들을 위한 연회나 지방 유생들을 위한 백일장 장소로 사용되었다. 숙종 14년(1688)에 손보고 고쳤으며, 화재로 인해 불타서 없어진 것을 정조 16년(1792)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등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008년에 건물을 다시 고치고 단청(丹靑)도 새로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홍여방이 찬경루에 대해 쓴 문서에는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끊이지 않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이 누(樓)에 올라 그 묘(墓)를 바라보면 저절로 우러러 찬미하게 되어 찬경(讚慶樓)이라 이름 지었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찬경루’ 라는 이름은, 청송 심씨 가문에서 소헌왕후가 탄생하였고 이 누각이 청송 심씨 시조 묘소를 바라보고 있음에 따라, ‘우러러 찬미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건물 내 사분합문 위쪽에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송백강릉(松栢岡陵) 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나 화재로 불타서 없어졌다. 지금은 정조 16년(1792)에 부사 한광근(韓光)의 아들 한철유(裕)가 쓴 송백강릉(松岡陵)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건물 안에 조선시대 때 명성을 떨치던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홍성민 등이 남긴 시문이 보관되어 있다.(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상도 청도군 관아, 객사인 도주관과 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청도군 관아 건물들이다. 청도군 읍치였던 청도읍성내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도주관, 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얼음창고인 석빙고(보물 323호)가 남아 있다. “도주관(道州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객사는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가운데 정청과 우익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좌익헌을 다시 지어 옛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동헌은 객사 뒷편 초동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데 학교건물로 사용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최근에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읍치였던 화양읍 일대가 원래 청도군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청도역이 있는 청도읍이 중심지로 바뀌었다.

청도군은 대구 남쪽, 경주 서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던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을이었다. 경주로 가는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가 건국하면서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지금의 청도군을 형성하였다. 고려초 현급인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고려 충햬왕 때 청도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말 이후 큰 성씨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졌으며 김일손, 김대유 등 사림파 문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주변에 운문산, 가지산, 천왕산 등 큰 산들이 많으며, 동창천.청도천 등 큰 하천이 밀양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청도군 관아 중심건물이었던 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궐패를 두고 양쪽에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동.서익헌을 두고 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7-20200106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 “도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도주는 청도의 다른 이름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5-20200106정청 내부. 일제강점기 이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청도 청도군 관아 21-20200106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동익헌. 앞면 6칸 규모로 상당히 큰 편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2-20200106옆에서 본 모습.

청도 청도군 관아 20-20200106서익헌. 앞면 6칸 규모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청도 청도군 관아 06-20200106서익헌 앞 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03-20200106객사 뒷편.

청도 청도군 관아 19-20200106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청도 청도군 관아 08-20200106객사 마당 한쪽편에 남아 있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

도주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조주는 청도의 옛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어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동.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는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 38년(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집이며, 동.서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하여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준다. 도주관 앞에는 고종 8년(1871) 병인.신미양요를 치른 뒤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옮겨져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3-20200106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동헌. 앞면 7칸 규모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16-20200106청도군수가 공식 업무를 보던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15-20200106동헌 뒷편으로 2칸 정도 누마루를 달아내어 정자처럼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4-20200106옆에서 본 청도동헌.

청도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관찰사.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1917년 군 청사를 고수동으로 신축 이전함에 따라 동헌건물은 도주학원 및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앞쪽 칸은 퇴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역사성과 관아건축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1-20200106읍성 동문 안쪽에 복원해 놓은 옛 관아 건물인 고마청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ㅇㄹ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도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군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 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0

청도 청도군 관아 10-20200106청도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청도 청도군 관아 09-20200106읍성 동문 밖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전국에 남아 있는 6곳의 석빙고 중 하나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31-20200106읍성 앞에 모아놓은 청도군수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청도 청도군 관아 18-20200106객사 앞으로 옮겨 놓은 구한말에 세운 척화비

청도 청도군 관아 12-20200106옛지도에 나타난 청도군

청도군의 연혁
청도군은 선시시대 유적 중 바위그늘과 지석묘, 석관묘 등의 유적이 각지에서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 12국 중 우유국의 위치가 청도라고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이서국이 청도에 존재했던 초기국가이다. 이서국은 유리왕 19년(42)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나, 유례왕 14년(297) 이서국이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지배체제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솔이산성, 오도산성, 가산성으로 신라에 편입되었고 경덕왕 16년(757) 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으로 개명하고 밀성군(지금의 밀양)의 속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이 되고 – 일명 도주 – 직급이 낮은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곳이었다. 1342년(충혜왕 3) 이곳 출신인 김선장의 공로에 의해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다음해 강등되었으나 김한귀의 청원으로 1366(공민왕 15) 다시 지군사가 되어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의 읍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왔다. 1896년 도제의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고 1900년대 초 대구에 속했던 풍각, 각북, 각초면이 청도군에 편입되고, 외서면은 밀양군에 속하게 되는 등 여러 번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2읍 7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경상도 상주목 관아, 경상감영이 있었던 큰 고장

상주(尙州)는 경북 서북부에 있는 고장으로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낙강강 본류가 상주시 동쪽을 흐르고 있으며 북.서쪽을 백두대간이 막고 있다. 삼한시대 사벌국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고려 성종 (982년) 때 전국 12목 중 상주목이 설치되었다. 조선초 전국 8도체제가 확립되면서 경상도 감영이 이곳에 설치되면서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경상도의 어원이 상주에 유래할 정도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요한 고장이었다.

읍치였던 상주읍성에는 고을 규모에 걸맞게 많은 관아 건물들이 있었다. 주산인 왕산 앞에는 상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과 내아, 그리고 관리들이 근무하던 이향청 등 크고 작은 관청 건물이 있었고, 동쪽편에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객사인 상산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읍성이 허물어지고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없어졌다. 현존하는 옛 관아 건물들인 상산관, 태평루, 침천청 등은 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졌으며 향청만이 옛 관아터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상주목 관아 객사 건물인 상산관. 관아 객사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의 중 하나이다. 가운데 궐패를 모신 정청을 두고 앞면 7칸 규모 동익헌과 앞면 5칸 규모 서익헌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궐패를 모신 정청

OLYMPUS DIGITAL CAMERA정청 내부에 재현해 놓은 망궐례 모습. 상주목사가 국왕에 예를 올리는 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출입문 문루로 사용되었던 태평루

OLYMPUS DIGITAL CAMERA태평루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북천전적지 태평루 앞에 있는 공덕비

태평루
이 누각은 조선시대 1808년(순조 8)에 상주목사 정동교가 건립했다. 건축양식은 조선시대 성행한 다포식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당시는 왕산을 중심으로 쌓은 상주읍성 관아문의 내삼문 밖에 있었고 동헌의 문루로 사용되었다. 그후 1920년 상주향교 동편에 있는 동산으로 옮겨 남산중학교 교사로 사용하다가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1992년 현재 위치에 옮겨왔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옛 상주목 관아터에 남아 있는 부속건물인 향청. 지역 유력인사들과 함께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장소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천전적지로 옮겨 놓은 정자인 침천정. 상주읍성 남문 밖에 있던 관아에서 설치한 작은 정자이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기 보다는 지역 유력인사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읍치내 향청과 비슷한 성격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침천정
이 정자는 조선시대 1577년(선조 10)에 상주목사 정곤수가 상주읍성 남문 밖에 건립하고 연당이라 이름지어 선비들의 휴식처나 글 짓는 곳으로 사용하던 관정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상주목사 한술이 중건하고 1614년(광해군 4) 상주목사 강복성이 천향정으로 개칭하였으며, 1693년(숙종 19)에 목사 이항이 연지를 홍백연당으로 고치고 이향정이라고 하였다. 그후 일제시대인 1914년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상주읍성이 헐릴 때 지방의 뜻있는 유지 여러 명이 정자를 사서 현 위치로 옮기고 군수 심환진이 침천정이란 이름으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OLYMPUS DIGITAL CAMERA옛 상주목 동헌 뒷편에 있는 왕산공원에 있는 송덕비들.

OLYMPUS DIGITAL CAMERA상주성도.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읍내 반경 5리 이내의 관아 등 공공시설을 그린 지도이다. 동헌건물이 청유당(1827년), 서산서원(1713~1870년)이 그려져 있어 제작시기는 1827년에서 187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그림에서 볼 수 있는 옛 상주목 관아 건물 배치도.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객사와 주변 부속 건물 옛사진

OLYMPUS DIGITAL CAMERA객사가 있던 자리에는 상주경찰서를 비롯하여 여러 공공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과 왕산공원 모습을 볼 수 있는 옛 사진. 일제강점기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과 태평루가 있던 자리에는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초가지붕을 하고 있던 상가들이 있던 남문으로 연결되는 거리.

OLYMPUS DIGITAL CAMERA임란북천전적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주읍치

<출처>

  1.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2.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충청도 충주목 관아, 청녕헌과 제금당

충북 충주시 성내동에 옛 충주목 관아터이다. 충주시 도심에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충주관아공원’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옛 동헌 건물인 청녕헌과 별관이었던 제금당, 산고수청각, 충청감영문, 축성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관아 마당에는 수백년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이 옛 관아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령헌과 제금당은 구한말인 1870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지었는데 지방 관아 건물로는 큰 편이다. 동쪽에 위치한 제금당은 별관 건물로 충주를 방문한 주요 인사들이 묵을 수 있도록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살림집인 내아와 가장 중요한 객사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충주목(忠州牧)은 조선시대 충주지방에 있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정3품 목사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읍치는 현 충주시 성내동 일대이다. 충주목와 관할 범위는 현 충주시와 충주시와 접하고 있는 괴산군, 음성군, 제천시의 주요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고려초 전국에 12목이 설치될 때 충주목이 되었으며 조선 세조 때에는 군영인 충주진(鎭)으로 바뀌었다가 인조 때 다시 충주목으로 복구되는 등 강등과 복구를 거듭하였다. 구한말 갑오개혁 때 관찰부로 승격되면서 충북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후 철도와 도로교통에서 소외되면서 지방 소도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충청도 청주목 관아터. 충주는 조선시대 남한강 수운과 육상교통로의 중심지로 국방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충주목 읍치는 관아가 있던 성내동 일대에 읍성내에 있었는데 충주읍성은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공원 입구로 사용되는 관아출입문. ‘충청감영문’이란 현판이 걸려 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목사가 근무했던 공간인 동헌.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양쪽에 방을 배치하였다. 왼쪽 1칸은 약간 높게 만든 누마루 형태의 ㅇ공간이다. 19세기에 새로 지은 관아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령헌’이라 적힌 현판. 지붕은 겹처마를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목사가 송사를  비롯한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 온돌방. 한쪽 끝에 누마루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청녕헌
1870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의 관찰사가 사용하였고, 이듬해 충청북도 관찰사의 집무실이 되었다. 1908년(순조 2) 5월 25일 도청이 청주로 이전되면서 충주 군수의 정청으로 이용었다. 한말 의병전쟁 때에는 호좌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군대가 충주성을 점령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던 곳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동쪽에 위치한 건물인 제금당.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충주를 찾았던 왕실 관련 인물들이 머물던 공간이라고 한다.  객사와는 별도로 손님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놓고 이다. 남한강 수운과 죽령, 조령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한 충주의 특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제금당
동헌의 동쪽에 위치한 제금당은 왕실과 관련된 인물이 왔을 때 머물던 별관으로 단청이 화려한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출입문인 내삼문은 1871년(고종8)에 솟을대문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예성별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어 제금당의 다른 이름으로 되었다. 뒤쪽에는 수직청으로 사용되던 산고수청각이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제금당에 딸린 공간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인 산고수청각. 실무자들이 사용하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산고수청각
제금당의 수직청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4칸, 측면 1.5칸인 맞배기와집이다. 구조는 방 2칸에 부엌 1칸이 딸렸으며 정남향을 하고 있다. 동헌인 청녕헌이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을 향하여 남서향을 하고 있는데, 별관인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정남향을 하고 있다. 이는 청녕헌은 지방관이 사용하는 아사이기 때문이나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은 왕부의 건물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제금당 출입문. 솟을삼문 형식을 하고 있어 왕실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성별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금당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고목

OLYMPUS DIGITAL CAMERA전국의 주요 관아터에서 볼 수 있는 구한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들을 기리기 위한 순교비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순교자 현양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건립된 순교자들의 현양비, 천주교 박해가 있을때마다 충주 부근의 천주교우들이 충주 동헌에 잡혀와 심문을 받았으므로, 이곳에 서린 순교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봉방당 무학당 주변(현 충주우체국 신축부지)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부자, 권아기련 등 많은 사람이 순교한 사실이 확인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관아공원 앞 골목길.

충주관아골
조선시대 충주읍성 내에 있던 충주목 관아터에 조성한 공원으로, 청녕헌과 제금당 등 옛 관아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 관아건물들은 1870년(고종 7) 8월 화재로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재건한 것이다. 그후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6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충주시에서 복원한 후 그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관아공원에는 청녕헌과 제금당 외에 충청감영문, 산고수청각, 축성사적비, 순교자헌양비 등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수목과 어우러져 있어 고색창연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