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서원/향교

산청 덕천서원(사적), 남명 조식을 모신 서원

경남 산청군 사천면 원리에 있는 덕천서원(德川書院)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1501 ~ 1572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선 선조 때(1576년)에 제자들이 처음 건립하였으며 광해군 때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을 국가로부터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평가받았으며 덕천서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북인세력으로 광해군 집권시 주도세력으로 인조반정 때 대부분 실각했으며 그 영향이 구한말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01-20220222<산청 덕천서원(사적)>

산청 덕천서원<산청 덕천서원 공간배치>

덕천서원은 앞쪽에 강당인 경의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진덕재와 수업재가 배치되어 있으며 뒷편에 사당인 숭덕사가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강당공간 건물들의 크고 공간을 넓게 배치하고 있어 조선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의 학품을 따르는 교육 중심의 서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18-20220222<시정문>

경의당은 앞면 5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강당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교육 중심의 서원 강당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05-20220222<강당인 경의당>

산청 덕천서원(사적) 07-20220222<대청마루>

산청 덕천서원(사적) 08-20220222<왼쪽 온돌방>

산청 덕천서원(사적) 09-20220222<오른쪽 온돌방>

강당공간 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생활공간인 진덕재(進德齋), 수업재(修業齋)가 위치하고 있다. 두 건물은 그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각각 앞면 5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중심지 역할을 했던 덕천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03-20220222<동재인 진덕재>

산청 덕천서원(사적) 02-20220222<서재인 수업재>

산청 덕천서원(사적) 04-20220222<수업재 마루>

산청 덕천서원(사적) 15-20220222<강학공간 마당>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는 강당 뒷편에 배치되어 있는데 소박하면서도 간소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덕천서원은 광해군 때(1609년) ‘덕천’이라는 이름을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남명 조식(1501 ~ 1572년)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상도 삼가현 출신으로 명종과 선조 때 여러차레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주로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제자들로는곽재우, 정인홍,정구 등이 있으며 광해군 때 집권세력인 북인 정파를 형성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11-20220222<사당 내삼문>

산청 덕천서원(사적) 12-20220222<숭덕사>

산청 덕천서원(사적) 14-20220222<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직사>

산청 덕천서원(사적) 10-20220222<장판각으로 보이는 건물>

남명 조식 유적(사적)으로는 덕천서원과 세심정, 산천재 등이 있다. 덕천서원은 지리산 중산리 계곡에서 발원한 사천이 덕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산청 덕천서원(사적) 16-20220222<덕천서원 앞을 흐르는 사천>

산청 덕천서원(사적) 17-20220222<덕천서원 홍살문과 은행나무>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조선시대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산청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남명 조식(1501 ~ 1572)의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덕천’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를 국가로부터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서원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을 중심으로 그 앞에 유생들이 생활공간인 진덕재(進德齋), 수업재(修業齋)가 있고 뒤편에 제례를 지내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은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경’과 그것을 실천하는 ‘의’를 중요시하였던 남명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경의당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현재도 봄, 가을에 두 차례의 향례를 올리고 있으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를 지내고 있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대한민국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2년

산청 단성향교, 조선시대 단성현 중등 교육기관

경남 산청군 단성면 누강리에 있는 단성향교이다. 옛 단성현 중등교육기롼으로 고려전기 인종 때 처음 창건되었다. 조선초 세종 때 강누리 인근으로 옮겨졌다가 조선후기 영조 때 현위치로 옮겨졌다.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능보다는 공자와 선현에 제사를 올리는 제향기능 위주로 운영되었던 지방의 작은 향교이다. 단성향교에는 <단성현 호적장부>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선후기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산청 단성향교 01-20220222<산청 단성향교>

경사진 지형에 건물이 세워져 있는 명륜장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을 앞쪽에, 대성전을 비롯한 제향공간을 뒷편에 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일반적이 향교와 공간배치는 비슷하지만 누각형태의 명륜당을 두고 내삼문 양쪽에 출입문을 두고 있는 독특한 건물구조와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산청 단성향교<단성향교 공간배치>

산청 단성향교 04-20220222<홍살문>

외삼문은 솟을대문을 하고 있으며 양쪽에 행랑채를 두고 있다.

산청 단성향교 05-20220222<외삼문>

산청 단성향교 17-20220222<외삼문과 행랑채>

강학공간은 누각형태의 명륜당이 앞쪽에, 마당과 동,서재가 뒷편에 배치되어 있다. 강당건물인 명륜당(明倫堂, 보물)은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고 누각형태로 지어진 건물로 공(工)형태의 지붕을 하고 있다. 독특한 지붕형태와 가구형식은 다른 향교나 서원 강당건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산청 단성향교 02-20220222<강학공간>

산청 단성향교 18-20220222<명륜당(보물)>

산청 단성향교 16-20220222<명륜당 내부>

산청 단성향교 10-20220222<내삼문 앞에서 본 명륜당과 강학공간>

산청 단성향교 08-20220222<동재>

산청 단성향교 07-20220222<서재>

제향공간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서무처럼 보이는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 앞 건물은 전사청과 제기고 역할을 하고 있다. 내삼문은 앞면 7칸 규모의 특이한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삼문을 달고 양쪽 끝에 1칸씩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문을 두고 있다.

산청 단성향교 09-20220222<내삼문>

산청 단성향교 12-20220222<대성전>

산청 단성향교 11-20220222<대성전 마당 동쪽 건물>

산청 단성향교 13-20220222<대성전 마당 서쪽 건물>

산청 단성향교 15-20220222<내삼문>

단성현(丹城縣)은 조선시대 산청군 단성면과 주변지역을 관장하던 지방행정 조직이다. 조선초 세종 때 단계현과 강성현을 합쳐서 단성현이 되었다. 1914년 행정개편 때 산청군에 병합되면서 단성, 도산, 생비량, 신등, 북동의 5개 면이 되었다. 단성향교에서는 옛 단성현에서 만든 <단선현 호적장부>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조선후기 숙종 때부터 고종 때가 단성현 주민들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산청 단성향교 06-20220222<단성현 호적장부를 보관하던 건물>

단성현호적장부<단성현 호적장부>

산청 단성현 호적장부
호적은 국가에서 인력을 모집하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만든 공문서이다. 조선시대에는 3년에 한번씩 각 군현에서 호적을 만들었는데 주소, 거주 인구, 신분, 연령, 소유 노비 등을 기록한 뒤 여러 권을 만들어 지방관청인 현청과 감영, 중앙관청인 호조에서 보관하였다. 산청 단성현 호적 장부에는 조선 숙종 4년(1678)부터 고종 25년(1888)까지 단성현(현재 산청군 남부) 주민들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단성향교에서 1678년부터 1789년까지 기록한 13책을 보관하다 현재 국립경상대학교 고문헌 도서관에서 보관중이며, 나머지 19세기의 호적 장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갔다. 산청 단성현 호적장부는 17~18세기 당시 단성현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인구, 신분, 재산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 단성현의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산청 단성향교 명륜당 (보물) 02-20220222<단성향교>

산청 단성향교 03-20220222<단성향교가 있는 마을>

단성향교, 경남 산청군 단성면 강루리
이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 지금의 강루리 구인동에 창건한 후 조선 세종 때 다른데로 옮겼다가 영조 28년(1752)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고 전한다. 경사지에 배치됨에 따라 외삼문 안에는 학당부인 명륜당을 두고, 내삼문 안에는 문묘부인 대성전을 배치하여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대성전 좌.우에는 동.서물, 명륜당 좌.우에는 동.서재를 두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 후기 이후의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명륜당 전면을 누 형식으로 꾸며 중앙칸 밑으로 들어가게 만던 동선처리와 지붕 구조 및 내삼문 좌.우에 편문을 둔 것은 특이한 수법이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단성현(丹城縣)은 조선시대 산청군 단성면과 주변지역을 관장하던 지방행정 조직이다. 조선초 세종 때 단계현과 강성현을 합쳐서 단성현이 되었다. 1914년 행정개편 때 산청군에 병합되면서 단성, 도산, 생비량, 신등, 북동의 5개 면이 되었다. 단성향교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거제 반곡서원

경남 거세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반곡서원이다. 우암 송시열을 모시기 위해 조선후기 숙종 때(1705년) 창건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문인이자 대표적인 노론 학자인 김진규, 김창집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거제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거제현 관아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성격이 강한 서원인 것으로 보인다.

거제 반곡서원 01-20220221<거제 반곡서원>

반곡서원은 거제현 관아 뒷편 옥산성 중턱 경사진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외삼문, 강학공간, 제향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거제 반곡서원 09-20220221<외삼문>

거제 반곡서원 05-20220221<강당>

거제 반곡서원 02-20220221<서재>

거제 반곡서원 03-20220221<동재>

거제 반곡서원 07-20220221<내삼문>

거제 반곡서원 08-20220221<사당>

거제 반곡서원 06-20220221<고직사>

반곡서원(盤谷書院)
이 서원은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헌, 김일채, 윤명한, 허유일, 신수오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에 창건하였다. 그 후 문청공 죽천 김진규, 충헌공 몽와 김창집, 부제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 정문공 김수근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06년 거제 유림에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반곡서원유허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에 단제를 치렀다. 1971년 거제 향교의 책임자 윤병재가 서원의 복원을 발의하고 유림총회의 찬성으로 1974년 우암사를 중건하였다. 또한 인접 지역 고택 세 채를 철거하여 나온 부재로 강당을 개축하는 과정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의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록당은 추사 김정희가 군자라 칭송했던 동록 정혼성을 배향한 곳이다. 반곡서원은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통영 충렬사(사적), 충무공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

경남 통영시 여황로에 있는 통영 충렬사(사적)이다.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선조 때(1606년) 왕명에 의해 7대 통제사 이운용이 창건했으며 현종 때(1663년)에 남해 충렬사와 함께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직접 운영했던 곳으로 교육중심의 서원과는 달리 제사를 올리는 제향 중심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산 현충사,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무공을 모시는 대표적인 사당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폐지되지 않았던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명조팔사품’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내리면서 직접 지어내린 제문 등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당이다.

통영 충렬사 (사적) 18-20220221<통영 충렬사>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사적
통영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 39년(1606)왕의 명령에 따라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세웠다. 현종 4년(1663)에 임금으로부터 ‘충렬사’ 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사당이 된 이래로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렬사는 정당, 내삼문, 동재, 서재, 중문, 숭무당, 경충재, 외삼문, 강한루, 유물전시관, 정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 졌다. 경내에는 숙종 7년(1681)에 세워진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와 충무공 후손 통제사 비각이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에는 정조의 명에 의해 발간한 <충무공전서>와 정조가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 8년 (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오고 있는 이충무공 사당으로는 통영충렬사가 유일하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으로 제사를 모시는 제향 중심의 공간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누각인 강한루, 외삼문, 제사를 준비하는 강당 성격의 숭무당과 경충재가 공간, 중문과 동,서재가 있는 공간, 내삼과 위패를 모신 정당이 있는 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과는 달리 동,서재와 강당 건물의 규모가 크지 않아 교육기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1-20220221<강한루와 충렬사 들어가는 길>

통영 충렬사 (사적) 02-20220221<강한루에어 내려다 보이는 모습>

외삼문 양쪽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항복이 비문을 지은 충렬공비이며 충무공 후손으로 통제사를 지낸 인물들을 기리는 비석 등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3-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05-20220221<오른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04-20220221<왼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19-20220221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은 광해군 6년(1614)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고, 비석의 위쪽에 ‘통제사 충무이공 충렬묘비명(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이라고 되어 있는 전서체의 글씨는 김수향이 썼다. 비문의 끝부분에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송시열이 기록한 것이다. 이후 숙종 7년(1581)에 제60대 통제사 민섬이 머릿돌과 거북받침대를 갖추어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공훈에 대한 칭송과 그에 대한 존경과 사몽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5-20220221<외삼문과 비각들>

외삼문을 들어서면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 있는 일반적인 서원이나 사당과는 달리 양쪽에 강당 성격 건물인 숭무당과 경충재가 자리잡고 있다. 통영 앞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경관을 고려한 공간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7-20220221<경충재>

통영 충렬사 (사적) 08-20220221<숭무당>

강당 건물들이 있는 공간을 지나면 안쪽에 일반적인 서원과 마찬가지로 양쪽에 기숙사 건물이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6-20220221<중문>

통영 충렬사 (사적) 10-20220221<동재>

통영 충렬사 (사적) 11-20220221<서재>

위패를 모신 정당은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같이 모신 인물은 없다. 국가 주도로 세워진 충렬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당 내부에는 충무공 영정과 팔사품을 그린 병풍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9-20220221<내삼문>

내삼문(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 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神門)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향이 시작되기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 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唱:제 향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2-20220221<위패를 모신 정당>

통영 충렬사 (사적) 13-20220221<정당 내부>

정당(正當)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 (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단법인 통영충렬 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 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 여운형 · 신익희 등 많은 광복 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驚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 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麟:천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 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 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4-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16-20220221<충렬사 동백나무>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동백나무는 열대 및 아열대에서 자라는 차나뭇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일본, 중국, 한국 등지에서도 따뜻한 지역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꽃은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매우 아름답다. 대게 이른 봄에 피지만 가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개화시기에 따라 동백꽃을 춘백, 추백, 동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열매는 늦가을에 붉게 익는다. 열매의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머리에 바르거나 등잔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약으로도 쓰였다. 이 동백나무들은 충렬사 입구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본래 네 그루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나무들은 키와 둘레가 각각 6.3 m, 1m 이다. 또 사방으로 넓게 퍼진 가지는 지름이 7 m나 될 만큼 큰 나무이다. 나이는 4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곳 통영에서는 음력 3월이면 거세 바닷바람을 달래기 위해 풍신제인 ‘할만네’를 지냈다. 그때 동네 아낙들이 정한수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우는 풍습이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경주향교, 통일신라 국학이 있던 자리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향교이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682)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을 세웠던 곳이다. 경주향교의 창건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시대 향교가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향교는 조선 성종 때(1492)에 성균관을 본 떠서 다시 지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이 있는 제향공간을 앞쪽에, 명륜당이 있는 강학공간을 뒤에 배치한 전묘후학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종2품 부윤(府尹)이 고을수령인 경주부에서 설치한 중등교육기관으로 타지역 향교에 비해 규모가 크고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향교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신삼문이 문화재(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향교 외삼문>

경주향교 제향공간은 공자와 선현들을 모신 대성전(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서무(보물)를 배치하였다. 출입문으로 외삼문과 내삼문을 두고 있다.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한 건물들을 보수하면서 유지해 오고 있어 당시 향교 건물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향공간 대성전(보물)>

동무, 서무는 향교 제향공간을 구성하는 주요 건축물들로 1604년 중건된 이래 여러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12칸 규모의 건물로 향교 동,서무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무(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서무(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신삼문(보물)>

OLYMPUS DIGITAL CAMERA<흙담장>

강학공간은 대성전 뒷편에 배치되어 있다. 강당건물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명륜당(보물)은 1614년 중건된 후 여러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단일건물로는 향교 강당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학공간 명륜당(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국학을 설립하다 ( 682년 06월(음) )
6월에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경(卿) 1인을 두었다. (삼국사기 권제8 신라본기 제8 신문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해 있었는데 신문왕(神文王) 346 2년(682년)에 두었다. 경덕왕(景德王)이 태학감(大學監)으로 고쳐 삼았다가 혜공왕(惠恭王)이 본래대로 되돌렸다. (삼국사기 권제38 잡지 제7 직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부속건물로는 명륜당 뒷편에 서적 등을 보관하던 존경각, 동재 뒷편 관리이 머물던 고직사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존경각>

OLYMPUS DIGITAL CAMERA<관리인의 거처인 고직사>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앞 살림집>

OLYMPUS DIGITAL CAMERA<살림집 마당 우물>

경주향교 (慶州鄕校)
경주 향교(慶州 鄕校)는 본래 신라 신문왕 2년 (682)에 창설한 국학(國學)(지금의 국립대학)이 있던 곳이며, 고려 시대에는 향학(鄕學)으로, 조선시대에는 역시 향교로 이어져 지방 교육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해 왔다.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臨)·서무(西無)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며,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東齋)·서재(西齋)는 강학을 하는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성균관(成均館)을 본따 중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된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大成殿)과 전사청(典祀廳)을 중건하고, 선조 37년(1604)에 동무 · 서무를 광해군 |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