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고택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고택인 소대헌.호연재이다. 조선후기 유학자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지은 고택으로, 그의 아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조선중기 대전지역 대저택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앞쪽에 큰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를 나란히 배치하고 작은사랑채 안쪽에 ‘ㄱ’자형 안채를 두고 있다. 안채 뒷뜰에는 사당이 있다. 17세기에 지은 고택의 안채와 큰사랑채, 작은사랑채, 사당 등이 온전히 남아 있어 당시 유력 양반가 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대전 솓대헌.호연재 고택 20230727_03<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

대전 솓대헌.호연재 고택 20230727_02<큰사랑채>

대전 솓대헌.호연재 고택 20230727_04<작은 사랑채>

대전_소대헌·호연재_고택<안채>

대전 솓대헌.호연재 고택 20230727_01<바깥에서 본 모습>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
이 고택은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인 수오재 송병하가 1674년 분가하여 건립한 것을 그의 아들인 소대헌 송요화가 1714년 현 위치로 옮겨 지은 것이다. 송요화의 부인 호연재 김씨는 17~18세기의 여류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한시 130여 수를 남겼다. 기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 사랑채(소대헌)와 오른쪽에 작은 사랑채(오숙재)를 별채로 지었다. 작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옆에는 양반가에서도 보기 드문 서고(書庫)가 있다. 기호 지역 양반가의 특징이 잘 보이는 건물이다. (안내문, 대전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대전시청, 2023년
  2. ‘국가민속문화재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대전 동춘당 종택, 조선후기 유학자 송준길의 종택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동춘당 종택이다. 조선후기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송준길(1606~1672)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집은 15세기 후반에 처음 지어졌으며 여러차례 이전과 중건을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1835년에 중건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충청지역 대저택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6칸 규모의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사랑채는 ‘-’자형으로 평면으로 큰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별도의 마루를 두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담장을 두어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상당히 큰 규모의 대저택으로 공간을 넓게 쓰는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6<대전 동춘당 종택>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8<들어가는 길>

 

안채_전면_전경
<안채>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3<사랑채>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5<사랑방>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4<사랑방 너머로 보이는 담장>

뒷편에는 일반적인 가묘와 함께 송준길을 모시는 별묘를 따로 두고 있다. 앞쪽에 별채인 동춘당(보물)이 있다.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7<뒷편 사당이 있는 공간>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1<별묘>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2<가묘>

동춘당(同春堂, 보물)은 별당 건물로 규모는 크지 않고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로,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에는 굴뚝을 별도로 두지 않고 작은 연기구멍을 두어 소박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춘당’이라 적힌 현판은 송준길 사후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쓴 것이다.

대전 동춘당 종택 20230727_09<동춘당(보물)>

대전 동춘당 종택
동춘당 종택은 송준길의 5대조 송요년이 15세기 후반에 지었다고 전하며, 이후 몇 차례 옮겨 지었다. 현재의 고택은 1835년에 중건한 모습이다. 종택은 사랑채, 안채, 별당, 별묘, 가묘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규모가 크고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에 따로 마루방이 있다. 안채는 ‘ㄷ’자 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부엌.안방.골방을 배치하였고, 동쪽에는 안쪽부터 건넌방.부엌.행랑방이 있다. 안마당과 사랑채 사이에 내외담을 두어 내외를 구분하였다. 별묘에는 송준길의 신위를 묘시었고, 가묘에는 제사를 받드는 4대의 신위를 모시었다. 동춘당 종택은 호화롭지 않고 검소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공간 배치가 넉넉한 기호지방 양반 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대전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대전시청, 2023년
  2. ‘국가민속문화재 대전 동춘당 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대전 회덕 동춘당(보물)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고택인 회덕 동춘당(同春堂, 보물)이다. 조선 효종 때 병조판서 등을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1672년)이 살았던 저택 별당 건물이다. 규모는 크지 않고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로,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에는 굴뚝을 별도로 두지 않고 작은 연기구멍을 두어 소박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춘당’이라 적힌 현판은 송준길 사후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쓴 것이다.

대전 회덕 동춘당(보물) 20230727_02<대전 회덕 동춘당(보물)>

대전 회덕 동춘당(보물) 20230727_01<오른쪽에서 본 모습>

대전 회덕 동춘당(보물) 20230727_03<왼쪽에서 본 모습>

대전 회덕 동춘당(보물) 20230727_05<뒷편>

대전 회덕 동춘당(보물) 20230727_06<동춘당 담장>

대전 회덕 동춘당(同春堂), 보물
동춘당은 송이창이 세웠던 건물을 아들인 동춘당 송준길이 38세 되던 해(164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별당이다. 건물 앞에 걸려 있는 ‘동춘당’ 현판은 송준길의 사후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동춘이란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동춘당은 단아하면서도 균형감이 좋고, 우아한 지붕의 곡선 등에서 조선 시대의 별당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었다. 온돌방 측면에 구멍을 내어 굴뚝을 대신한 것은 ‘따뜻함’이라는 본래의 기능보다는 어려운 백성을 의식한 ‘겸양’의 덕목을 지키려 한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안내문, 대전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대전시청, 2023년
  2. ‘보물 대전 회덕 동춘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예천 금당실마을 반송재 고택

경북 예천군 용문면 삼금곡리 금당실마을에 있는 반송재(伴松齋) 고택이다. 조선 숙종 때 문신 김빈이 낙향하여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구한말 때 원래 살던집이 팔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앞쪽에 ‘-’자형 사랑채가, 뒷편에 ‘ㄷ’자형 안채가 있는 튼 ‘ㅁ’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영남 북부지역 고위직을 지낸 상류층의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주인이 살고 있지 않고 비어 있어 금당실마을을 찾은 탐방객이 마을 고택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0<예천 반송재 고택>

대문채는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크지 않은 건물이다. 대문 양쪽에는 작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3<대문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1<안쪽에서 본 모습>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2<사랑채 앞 마당>

사랑채는 ‘-’자형 건물로 앞면 5칸반 규모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앞에는 문짝을 달아 마루방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왼쪽 온돌방 앞에 작은 마루를 두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1<사랑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2<왼쪽 온돌방>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8<뒷편에서 본 사랑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3<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양쪽에 날개채를 달아내어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4<안채>

안채는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은 온돌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 날개채는 온돌방을, 왼쪽 날개채는 온돌방과 부엌으로 되어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5<안채와 안마당>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7<대청마루>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6<부엌이 있는 날개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9<중문 안쪽에 있는 곳간채>

반송재 고택
반송재(伴松齋) 고택은 조선시대 문신 갈천 김빈(1621~1694)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선 숙종 6년(1680) 경에 처음 세웠다. 210여년 뒤 구한말의 대신 이유인이 99칸 대저택을 지으려고 2,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할 때 그 땅에 있던 갈천 고택도 함께 사들였다. 갈천 고택은 고종 36년(189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고, 이유인의 동생인 이유직이 살았다. 그 후 1940년 김빈의 아우인 반송헌 김정의 10대 주손 김환명이 이를 되찾아 반송헌의 종가로 삼으면서 ‘반송재’라 이름 붙였다. 고택의 전체적인 구조는 튼 ‘ㅁ’자형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자형 사랑채를 남쪽으로 두고 곳간채는 동쪽으로 두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사랑채는 정면 5칸반,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 가운데 있는 2칸의 대청은 앞에 장지문 네짝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다. 각 방의 여러 종류의 창호 형식, 창문틀의 구조 수법 등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반송재 고택은 영남 북부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와 평면 구성법을 지니고 있어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예천 춘우재 고택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에 있는 춘우재(春雨齋) 고택이다. 이집은 야옹 권의의 손자인 권진이 17세기초에 세운 고택이 19세기에 화재로 소실되면서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7칸 규모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 앞면에 사랑채와 중문채가 있으며 안채는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며 건물구성이나 배치가 19세기 상류층이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천 춘우재고택 20221130_01<예천 춘우재 고택>

안채_정면<안채>

춘우재 고택
춘우재(春雨齋) 고택은 안동 권씨 제곡리 입향조인 야옹 권의의 손자인 춘우재 권진(1566 ~ 1620년)이 세운 가옥이다. 1600년대 초에 처음 세웠다가 불터 무너진 것을 1800년대에 다시 세웠다. 고택의 이름인 춘우재는 권진의 호에서 따 온 것으로, ‘봄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고택은 작약산 기슭 평탄한 곳에 터를 잡고 있으며, 내성천 건너 학가산 아래 문전의 들판을 내려다보는 동남향 건물이다. 건물 구조는 ‘ㅁ’자형으로 전면에 ‘-’자형의 중문간채를 두고, 안쪽으로 ‘ㄷ’자형 안채를 배치하여 정면 5칸, 측면 7칸을 이루고 있다. 본채의 왼쪽 뒤편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 지역 중상류층의 전형적인 민가 유형이다. 중문간채 좌우의 마루방.사랑방.안방 등의 평면 구성과 특히 기둥을 다루는 고급 기법이 19세기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