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목조건축

원주 강원감영 포정루, 관아 출입문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에 있는 강원감영 포정루이다. 조선시대 원주에 설치되었던 강원감영을 출입하는 문루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전형적인 2층 문루 건물이다. 1층 가운데 칸에 널문을 달았으며 2층은 난간을 두르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선화당과 함께 17세기에 지은 건물로 선화당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옛 강원감영 건물이다.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5<원주 강원감영 포정루>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4<출입문과 기둥이 있는 1층>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3<포정루 현판>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7<안쪽에서 본 모습>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1<바깥쪽에서 본 모습>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2<옆에서 본 모습>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6<옆에서 본 모습>

포정루(布政樓)
포정루는 강원감영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출입문이다. ‘포정’이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로 중국 명나라의 지방관청이 포정사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된 이후, 원주 진위대가 강원감영을 사용했을 때는 ‘선위루’라 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라고 하였다.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근거하여, 1995년 조선시대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로 편액을 바뀌 달았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2. ‘원주 강원감영 포정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아 건물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에 있는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이다.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강원감영 정당(正堂) 건물로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664년 경에 건립된 보인다. 현재 위치에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실물이 그대로 계승되어 왔으며 조선시대 감영 선화당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1<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선화당은 앞면 7칸, 옆면 4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관아 건물이다. 평면구조는 앞뒤와 양쪽 1칸씩이 복도로 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집무공간이 있다. 이런 평면배치는 지방관아 동헌 건물에서는 볼 수 없으며 중앙부처 정청 건물과 같은 형태이다. 관찰사의 정치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건물 형태이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13<정면에서 본 모습>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14<앞과 옆에서 본 모습>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12<옆과 뒤에서 본 모습>

건물은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올려져 있으며 사방이 문으로 둘러져 있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11<건물 기단>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4<선화당 현판과 출입문>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7<앞면 복도>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8<뒷면 복도>

내부는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온돌시설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1칸씩은 누마루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부공간 배치로 볼 때 판결 업무가 많았던 지방관아 동헌과는 달리 관찰사는 감영에 속한 지방관 등과 회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부처 정청과 비슷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5<관찰사 집무공간>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9<옆에서 본 모습>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3<누마루 기능을 겸하고 있는 오른쪽 공간>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10<내부 모습>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6<왼쪽 공간>

선화당(宣化堂)
선화당은 강원감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관찰사가 강원도의 정무를 보던 집무실인 정청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농정.조세.민원.군사.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선화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현종 6년(1665) 이만영 관찰사가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67년 이후산 관찰사 때 완공되었다. 선화당은 한때 일본군수비대, 원성군청, 강원도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곳 선화당을 거쳐 간 관찰사는 500여명으로, 황희, 정철 등도 이 선화당에서 백성을 살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원주시청, 2023년
  2.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원주 구룡사 보광루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있는 구룡사 보광루이다. 구룡사 경내를 출입하는 문루이자 강당 역할을 했던 건물이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2층 문루 건물이다. 강당 역할을 하고 있는 2층 누각은 대웅전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후기 숙종 때(1707년) 다시 지은 건물이라 한다.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01<원주 구룡사 보광루>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03<앞쪽에서 본 모습>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04<반대편에서 본 모습>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05<옆에서 본 모습>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09<대웅전에서 본 모습>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10<건물 내부>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08<내부에서 본 대웅전>

구룡사는 사찰로 삼국시대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강원도 치악산과 영서지방을 대표하는 사찰이지만 내력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현재의 사찰 건무들을 조선후기 이후에 중건된 것이라 한다.

원주 구룡사 보광루 20230511_06<원주 치악산 구룡사>

원주 구룡사 보광루
구룡사는 치악산 능선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산지에 건립한 서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구룡사는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를 지나 대웅전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경사진 지형의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보광루는 구룡사의 사찰 배치에서 본당에 들어가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의 성격을 가진 건물로, 공간의 위계를 구분함과 동시에 누각 아래를 통한 진입으로 공간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인 668년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가 전해지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원래 지금의 절터 일대는 깊은 연못이었는데, 거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대사가 절을 지르려 하자,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해 비를 내려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대사가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연못물이 말라서 그 자리에 구룡사를 세웠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이후 절 입구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때문에 절 이름의 ‘아홉 구(九)’를 ‘거북 구(龜)’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고 한다. 2008년 보광루 해체 보수공사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숙종 33년(1707)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석경의 <삽교집>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대승암과 백련당, 월봉암 등 선승들이 살았던 암자 등 구룡사 주변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안내문, 원주 구룡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원주 구룡사, 2023년
  2. ‘원주구룡사보광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구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보물)

세종시 전의면 비암사에 있는 불전인 극락보전(보물)이다. 조선후기 17세기에 지어진 불전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일반적인 불전 건물과는 달리 옆면 2칸을 하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 형식적으로 간략화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는데 옆면을 1칸 줄였기때문에 내부는 협소한 편이다. 앞면 창호는 문설주 기둥이 있는 조선중기 이전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조선후기 불전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10<세종 비암사 극락보전(보물)>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8<2칸으로 된 옆면>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4<극락보전 현판>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3<지붕을 받치는 공포>

앞면 양쪽 창호는 조선중기 이전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문은 4분할하여 가운데 2짝은 여닫이가 있는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양쪽 1짝은 창문처럼 사용하고 있다. 문짝 사이에 문설주가 있는데 조선중기 이전 건축물(맹씨행단, 도산서원 강당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2<문설주가 있는 오른쪽 창호>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21<가운데 창호>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7<왼쪽 창호>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5<정면에서 본 모습>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6<왼쪽 아래에서 본 모습>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01<오른쪽에서 본 모습>

비암사는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졌으나 1960년 이곳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에 쓰여진 내용으로 삼국통일 후 백제 유민들을 위해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11<세종 비암사>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보물) 20230406_12<비암사 극락보전과 삼층석탑>

비암사 극락보전, 보물
비암사는 통일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처음 지은 절이라고 전한다. 그 이후의 절의 역사는 확실하게 전하지 않는다. 비암사 극락보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여덟 팔(八)’자의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 위에 화려한 닫집을 마련하였다.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안내문, 세종 비암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세종 비암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공주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에 있는 심검당(尋劍堂)과 고방(庫房)이다.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 마당 동쪽편에 있는 ‘ㄷ’자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후기 상류층이 살았던 살림집을 연상시킨다. 마당을 향하고 있는 본채는 앞면 5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들이 있는 날개채가 달려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물 형태로 볼 때 거의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며 큰 사찰 요사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 마곡사 심검당과 고방 20230406_01<공주 마곡사 심검당, 2023년>

OLYMPUS DIGITAL CAMERA<공주 마곡사 심검당, 2011년>

심검당은 승려들이 생활하면서 수행하는 공간이다. 마곡사 심검당은 조선후기 부유층이 살았던 대저택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은 ‘ㄷ’자형으로 부엌과 마루,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뒤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북쪽편에서 본 모습>

고방은 2층으로 된 창고 건물로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마곡사 고방>

OLYMPUS DIGITAL CAMERA<윗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2층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에서 보이는 목판>

공주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심검당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스님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방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ㄷ’자형으로 온돌방과 부엌 및 마루를 만들어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기둥은 네모기둥과 둥근기둥을 혼합하여 세웠고, 마루 한편에는 효종 5년(1654) 충청도 대흥 안곡사에서 만들어진 마곡사 동종과 목어 등이 있다. 고방은 심검당 북쪽에 있는 2층으로 된 창고이며,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방 위층에는 조선시대 문신인 조익(1579~1655)과 그의 셋째아들인 송곡 조복양(1609~1671)의 문집 목판인 포저유서 및 송곡문집 판각 등이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에는 심검당 외에도 많은 요사채들을 두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나 사찰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많은 방들을 두고 있다. 심검당 앞 뒤로 작은 요사채가 있고 바깥쪽에 템플스테이를 위한 큰 건물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북쪽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입구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 템플스테이를 하는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큰 요사채 건물>

 <출처>

  1.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