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광주박물관은 광주/전남지역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삼한시대 마한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된 대표적인 박물관이었으나 최근에 국립나주박물관이 개관되면서 나주지역 고분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관된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 마한의 생활유적인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광주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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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임진왜란의 극복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은 전라도 방어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충무공과 함께 전라도 사람들 다양한 방식으로 국난극복을 위해 힘썼다. 전주 경기전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올 수 있도록 한 안의와 손흥록의 업적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고경명을 비롯하여 많은 의병들이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많은 관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승려들 또한 의승군을 조직하여 많은 역할을 했으며 이후 여수 흥국사는 전라좌수영을 도와 남해안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승군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의명분을 따라
1592년 4월, 왜적은 부산 동래로 상륙하여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로질러 바로 한양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라도 방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충무공 이순신은 전라도 해안선 수호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전라도의 수많은 유생들은 왕을 지키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왜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당장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지키고자 하는 대의가 있었기에 스스로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안의와 손흥록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전주 경기전에는, 조선 왕조의 모든 역사를 기록한 실록과 역대 왕들의 초상인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의 관리였던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00)은 실록과 어진이 불에 타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모두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기고 매일 불침번을 서며 지켰습니다. 조선 왕조의 역사와 기록을 전쟁의 피해로부터 지켜낸 것은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간 것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실록상자, 조선, 선조실록(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조선 국보 51-3호
흑장통, 19세기말 ~ 20세기초, 흑장통은 유사시에 어진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유사시에 어깨 등에 매고 이동할 수 있는 헝겊 게이스가 별도로 있다.
임계기사, 1592~1593년, 임진년(1592) 왜적이 침입하자 전주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과 어진을 내장산으로 피난시켜 보관한 안의와 손홍록 등의 당직 보고 기록이다. 기사는 이듬해인 계사년 1월까지 이어진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충무공 이순신과 호남방어
1593년 7월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의 관리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는 바다에 접하고 물길이 좋은 전라도 땅이 왜적에게 넘어갈 경우 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호남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이순신 장군은 옥포, 한산, 노량, 명량 등 수많은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여 전라도를 지켜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1594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받은 사부유서이다. 유서란 군사지휘권을 가진 이가 함부로 군대를 움직여 역모를 꾀할 수 없도록 국왕이 직접 내리는 군사명령서이다. 함께 발급되는 밀부의 절반은 조정에 남겨두고 나머지 절반은 군사 책임자가 항상 소지해야 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화면 우측에 ‘충무공 이순신의 상’이라 적혀 있으나 앞섶으로 이어지는 둥근 깃이 달린 웃옷은 16세기 말 조선의 복식이 아니고, 매서운 눈매와 수염은 북방 유목민족의 무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화제가 달린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용맹한 무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선무공신교서, 1604년, 보물 1564-1호. 선조37년(1604) 임진왜란에서 무공을 세운 이들 중 총 18명을 ‘선무공신’으로 포상하였는데, 이순신은 권율, 원균과 함께 가장 높은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채 한 달이 못되어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왕은 북쪽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7월에 묘향산에 있던 휴정을 불러 승려를 모집하여 군사를 꾸리도록 명하였습니다. 당시 서산대사 휴정은 이미 73세의 노인이었기에 전국의 제자들을 불러 중대한 임무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관동지방의 사명당 유정이 있었고, 전라도의 뇌묵당 처영이 있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선조대왕이 하사한 숟가락, 조선, 청동, 선조대왕이 하사한 발우, 조선, 옥
청허당 휴정
서산(묘향산)에 오래 주석하여 ‘서산대사’로 익숙한 청허당 휴정(1520~1604)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승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이후 조선의 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당대 최고의 선(禪)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초상을 보아도 승장보다는 일생을 선 수행에 힘쓴 선사의 이미지가 보입니다. 그러한 선사 휴정이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불교의 기본적이 ㄴ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빠진 나라와 불교계를 구하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설 떄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뇌묵당 처영의 초상화, 조선, 영인본. 처영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과 함께 유명한 행주대첩에도 참전하였던 승장이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행주대첩 이후 다시 남원산성으로 내려와 교룡산성을 지어 주변을 정비하는데 힘쓰며 전라도 땅에서 활동하였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전장에 나서 불살계를 법하였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누구보다 충실히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전라도를 지켜낸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임진왜란 이후 전라도 의승군
임진왜란 때 휴정과 처영이 조직한 전라도의 의승군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요역과 경비를 담당하여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승군의 전통은 조선후기 승군제도의 상설화로 연결되어 전라도 각지에 의승군의 주둔지가 생겨났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고려 명종 26년(1196)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여수 흥국사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완문 흥국사, 1890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게 내린 완문을 현판으로 만든 것으로 승군에 대한 기본 권리와 처우가 적혀 있다.
순천부영취산흥국사봉황대루중창상량문, 1729년. 임진왜란 때 불탄 흥국사 봉황대루 중창 당시의 상량문이다. 연화질에서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 일원, 도승통 겸 승대장 찬민 등 직위별 승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순천부영취산흥국사선당수집상량기, 1780년. 수군절도사 이문혁과 함께 승군 300명이 시주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문혁은 정조 2년(1778)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내려와 곧 흥국사 선당 중창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호남절의록 속 의병들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이어진 정유재란과 두 번의 호란을 겪는 동안, 전라도에서는 수 많은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고경명의 7대손 고정헌이 1800년에 간행한 『호남절의록』 속에는 무려 1470여 명의 의병들이 등장합니다. 전라도의 선비들은 벼슬에서 물러난 이들이 많았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나아갔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1604년 이순신을 비롯한 18명을 선무공신으로 포상한 이듬해, 다시 약 9000여명에게 선무원종공신의 칭호를 내렸다. 선조는 선무공신도감을 설치하고, 임진왜란 때 직접 전장에 나아가거나 병사들에게 식량을 대어주는 등 군수물자의 보급에 기여한 인물들의 공을 치하하여 선무원종공신녹권을 간행하여 하사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영광에서 읍성을 수호한 향촌민들의 기록이다. 1592년 10월 영광군수 남궁견이 부재한 상황에서 지역의 선비들이 읍성방위 및 행정업무를 자치적으로 수행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대동세상을 꿈꾸며
조선사회에서 전라도는 변혁을 추구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 조선중기 율곡의 제자였던 정여립은 당쟁에 휘말려 낙향하여 대동계를 만들어 변화를 추구하다 반역으로 몰려 많은 희생을 내었다. 이후 구한말에는 동학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변화를 꿈꾸는 많은 신흥종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반면 임진왜란에는 국가적인 위기에 맞서 적극적으로 의병활동 등에 참여했으며, 일제강점기 직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최익현과 전라도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외세에 대항하였다.
대동세상을 꿈꾸며
조선은 윤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이에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제도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사회 속에서 중국의 『예기』에 등장하는 이상사회인 대동세상의 실현을 꿈꾸는 이가 전라도에서 등장하였습니다. 대동의 의미는 해석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신분질서를 부정하였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전라도는 ‘반역향’의 이미지를 버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기축록, 조선후기. 『대동야승』에 실린 「기축록」을 참고하여 필사한 책으로, 기축옥사 및 이와 관련된 일려는 사건을 기록하여 광해군에서 인조 연간에 이르는 당쟁 분열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송시열이 지은 정철의 청화백자 묘지명이다. 고인을 애도하고 공덕을 기리는 것 이외에 정여립의 모반으로 인해 일어난 기축옥사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철의 일생뿐만 아니라 16세기 말 사림 붕당 간의 갈등 양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정여립과 기축옥사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1546~1589)은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 벼슬길에 나섰으나 갖은 당파의 분쟁에 휘말려 결국은 낙향하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진안의 죽도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얽매이지 않는 모임인 대동계를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여기에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한 것이 모반으로 여겨져 반역자로 쫓기다 자결하였습니다. 그의 모반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인 기축옥사를 불러왔고, 3년 넘는 세월 동안 1000여 명이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군
1894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에는 전봉준 외에도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 각지의 접주들이 이끄는 무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나열할 때, 누구의 이름도 앞서지 않도록 사발을 대고 원을 그려 둥글게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책임자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었겠지만, 그들 누구도 다른 이의 위에 서지 않는, 평등한 사람들의 무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이고 본명은 명숙인데 1862년에 간행된 『천안전씨세보』에는 ‘철로’로 명기되어 있다. 사진은 1895년 2월 27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후 서울로 압송될 때, 일본의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손화중(1861~1895)은 본관은 밀양이고 본명은 정식이다. 그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에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의 배꼽에서 신라 검단대사의 비밀 문서를 꺼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어서 그의 밑으로 더욱 많은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김개남(1853~1894)은 전봉준과 함께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로, 본관은 도강이고 본명은 영주이며 태인 출신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다시 사람이 하늘인 세상
물산에 부족함이 없던 비옥한 땅, 전라도는 예로부터 지배층의 수탈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습니다. 19세기말, 외세의 침입이 잦아지며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자 전라도에 대한 수탈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폐악에 불만을 품은 전라도 농민들은, 1894년 동학의 접주 전봉준의 깃발 아래 모여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인내천’, 즉 사람이 하늘인 세상에서 살고자 꿈꾼 전라도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조선전기 호남사림과 하서 김인후
하서 긴인후(1510~1560)는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유학자입니다. 그는 인종의 세자시절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한 필암서원의 많은 문서가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하피첩, 정약용, 조선, 보물 제1683-2호,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중이던 1810년에 부인 홍혜완이 보내온 붉은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전할 글귀를 적어 서첩으로 만든 것으로, 본래 4첩이었으나 지금은 3첩만 전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운해(초고본), 개합사장(초고본), 신경준, 1750년 이전
다산 정약용과 호남의 실학자들
16세기 두번의 큰 전쟁이 끝나고 나자 대의명분과 절의는 유학자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돌볼 수 있는 실용적인 사상, 실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라도에서 활약한 실학자로는 강진에 오랫동안 유배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 이전에 반계 유형원(1622~1836)과 호남 4대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 존재 위백규(1729~1798), 이재 황윤석(1729~1791), 규남 하백원(1781~1844) 등이 있었습니다.
동경대전, 최제우, 1883년,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가 저술하기 시작하여 2대 최시형이 1880년에 완성.간행한 한문경전이다. 동학은 이밖에도 한글경전인 용담유사를 기본 경전으로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보천교 교포, 1950년, 대순전경, 1929년, 이사전선, 1885년
신종교의 창시자들
동학농민운동은 본래 1894년 새로운 종교의 교조였던 최제우(1824~1864)의 신원운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종교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이어 혁명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동학이 그러하였듯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 많았던 전라도에서는 그만큼 새로운 종교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동학에서 파생한 손병희의 천도교, 강일순의 증산교, 그리고 지금도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박중빈의 원불교 등이 대표적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면암집, 최익현, 1908년, 면암 최익현의 시문집으로 최익현이 일본 쓰시마 섬에서 순국한 뒤에 간행되었다.
최익현과 임병찬(1851~1916)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체결과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태인에서 1천여 명 규모의 의병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대마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순절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그들의 깃발 아래로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든 1천여 명의 전라도 사람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결국 이땅을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결집된 전라도 사람들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의병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특히 최익현 등이 전라도 유생들을 이끌고 항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의병들은 이제 독립군이 되어 싸웠습니다. 농민혁명군에서 의병으로, 다시 독립군으로 변하는 동안, 그들이 지켜낸 것은 결국 그들의 삶의 터전인 이 땅 전라도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심춘순례, 최남선, 유서석록, 고경명(1533~1592)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사람들
전라도 천년의 역사동안 이 땅을 지켜왔던 사람들은 지난 세기 동안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로서, 혹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민주주의를 위한 열사로서 살아왔습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거친 전장으로 나아간 이들이지만, ‘기쁘게 늙은 매화.서끈 대나무.아름다운 난초가 있고, 귤과 유자가 익는 가을, 비자나무와 동백이 푸른 겨울’이 장관인 전라도에서 살아온 그들은 이땅을 닮아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부처의 가르침을 새롭게
지리산 일대와 전남 남해안 등 호남지방에는 유서깊은 사찰이 많이 남아 있다. 지방호족세력을 바탕을 불교개혁을 이끌었던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사찰 중 남원 실상사(실상산문), 곡성 태안사(동리산문), 장흥 보림사(가지산문)이 호남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중기 무인집권기에 기존 불교에 대한 비판과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국사 지눌이 순천 송광사에서 수선결사 운동을 이끌었으며, 원묘국사 요세가 강진 백련사에서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었다. 수선결사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조계종이 주류세력을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조국사 지눌의 초상, 1780년, 비단에 채색, 순천 송광사
부처의 가르침을 새롭게
통일신라에 이어 고려에서도 불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이자 지배층의 신앙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고려의 지배층이 귀족에서 무인으로 바뀌면서 불교의 위상도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의 전통이 살아있는 전라도 땅에서 지눌과 요세는 기존 불교에 대한 비판과 개혁을 위한 불교결사운동을 일으켜 부처의 가르침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권수정혜결사문, 보조국사 지눌, 1608년, 순천 송광사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488년, 불교천태중앙박물관, 보물 1222-2호,
보조국사 지눌이 당나라 종밀 『법집별행록』을 요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제자인 혜심이 간행한 초판본은 전하지 않고, 성종 17년(1486) 광주 무등산 규봉암에서 간행한 이 판본이 가장 이른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수선사형지기, 1221~1226년, 순천 송광사, 보물 572호, 13세기 전반 수선사의 실태를 조사 기록한 것이다. 수선사의 가람 배치 등 사찰의 규모를 자세히 적고, 보조국사 지눌의 비명과 수선사중창기를 함께 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보조국사 지눌과 수선사
본래 개경에서 수행하던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1190년 팔공산에서 법회를 열고,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정혜결사문』에 담아 널리 퍼뜨렸습니다. 이에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자 순천 송광산 길상사(지금의 송광사)로 옮겨와 수선사를 열었는데, 이때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 각지의 사람들이 시주하여 도움을 준 것이 수선사중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눌의 새로운 생각은 그의 제작인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더욱 발전시켜, 이후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인 무인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만덕사지, 조선후기 19세기, 19세기 강진으로 유배온 정약용이 『동문선』에 실린 고려시대 백련사 결사운동에 관한 고려 국사들의 기록을 인용하여 편찬한 대둔사(만덕사)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원묘국사 요세와 백련사
원묘국사 요세(1163~1245)는 본래 지눌의 수선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지눌의 수행 방식에 동의하지 못하여 스스로 강진 만덕산에서 백련사 결사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지눌은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지향하며 정혜쌍수의 실천적 수행을 강조하였는데, 요세는 법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참회를 중시하였습니다. 요세는 대중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였고, 백련사도 전라도 지방 향리층의 지지를 받아 성장하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1250년 강진 월남사에 세워졌던 지눌의 제자 진각국사 혜심의 비편이다. 1235년 이규보가 지은 비문 내용은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조선 전기 전라도의 불교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억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조선전기의 불교는 여전히 왕실과 민중의 정서적 의지처로 종교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라도 송광사에서는 대규모 불서 간행 사업이 이어져 불교 사상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맥도 끊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인천안목 목판, 1529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1호
송광사에서는 1529~1531년 사이에 4종류의 목판을 제작하여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판본은 그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인천안목』은 중국 송나라의 선종 승려 지소가 저술한 것으로, ‘인간과 천상의 일체가 중생의 안목이 된다’는 의미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종경촬요 목판, 1529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2호
『종경촬요』는 대승불교의 여러 경론과 중국, 인도 성현과 선사의 저서 등을 모은 책인 『종경록』의 요약본이다. 13세기 이전에 이미 고려에 들어와 있었으나 당시의 판본은 남아있지 않고, 송광사 은적암에서 다시 찍은 이 판본이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계초심학인문(언해) 목판, 1577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0호
보조국사 지눌이 불교수행의 초보자들이 경계해야 하는 내용을 담아 서술한 책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언해본(한글본) 등 다양한 판본이 유행하였다. 송광사에서 간행한 언해본은 전라도 지방 언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 전기 국어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천지명양수륙잡문 목판, 1531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4호
『천지명양수륙잡문』은 여러 불교의식과 관련된 내용을 수록한 책이다. 목판은 1531년 5월 송광사에서 간행한 것이지만 이 책은 조선후기에 다시 찍은 것이다. 이 목판을 제작한 이들은 『종경촬요』와 『천지명양수륙잡문』의 제작에도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전라도에서 새 세상을 꿈꾼 사람들
천년 전라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라도에는 왕조의 수도가 자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이 땅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보조국사 지눌과 원묘국사 요세가 타락한 정치계와 결탁한 기존 불교의 개혁을 외치며 순천과 강진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예기』에 등장하는 ‘대동’사상에 주목하여 새로운 신분 질서의 정립을 꿈꾸는 전주의 유학자도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정읍의 녹두장군은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전라도’ 이전의 전라도를 일군 사람들
후백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기 전까지 호남지방을 수도로 삼은 국가는 없었지만, 삼한 중 마한이 이 지방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위만에 쫓겨난 고조선 준왕의 세력이 내려왔으며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익산에 별궁을 세우는 등 호남지방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 후삼국시대 견훤이 호남지방에 자리를 잡고 삼국이 세력을 다투면서 지역이 결집하고 정체성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제사리외호,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전라도’ 이전의 전라도를 일군 사람들
전라도에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동기.초기철기 시대에 들어서면 삼한 중 마한의 세력이 이 지역까지 미쳤고, 같은 시기 고조선의 준왕이 내려와 새로운 문명을 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백제의 무왕이 전라도 경영에 관심을 가지면서 또 한번 새로운 문명이 유입되어 이 지역 문화는 더욱 다채로워졌습니다. 오랜 세월 왕조의 수도가 번창한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10세기 초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이 지역에도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문화적 공동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가장 오래된 전라도 사람
천년전, 이 땅이 ‘전라도’라 불리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전라도’를 일구어 왔습니다. 전라도 각지의 발굴 현장에서 종종 발견되는 인골들이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여수 안도패총에서 출토된 부부의 인골, 기원전 1세기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여성의 인골 등은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전라도 사람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익산 평장리의 널무덤에서 한국식동검 2점과 청동꺾창 1점 청동투겁창 1점과 함께 발견되었다. 거울은 초엽문과 반리문이 중심이 된 ‘운문지사엽사리문경’으로 전국말에서 한나라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금제사리봉영기,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 가운데, 기해년(639)에 백제 왕실의 후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내용이 기록된 금제사리봉영기이다. 백제 무왕의 세력이 전북 익산까지 남하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금제구슬, 유리구슬, 금제 꽃모양구슬,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은제관꾸미개,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금제사리내호,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백제 무왕(재위 600~ 640)의 궁궐터로 알려진 왕궁리 유적의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함이다. 이외에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긴 은제도금금강경판이 함께 발견되었다. (안내문,광주박물관, 2018년)
흙으로 만든 손, 흙으로 만든 악귀 머리, 백제, 익산 제석사지,
흙으로 만든 천부상 머리, 백제, 익산 제석사지, 백제 무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 제석사 터에서 발견된 소조천부상의 머리 부분이다. 절반정도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마한의 진왕, 고조선의 준왕 그리고 백제의 무왕
넓은 물길이 바다로 이어지고, 낮은 언덕과 평야가 펼쳐져 농사 짓기에 적합한 전라도에는, 다양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북쪽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던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도 전라도 땅이었습니다. 또한 영산강 주변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는 진왕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이 세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옹관고분이라는 독특한 매장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제의 초기 정치 권력은 한강 유역과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영역까지의 확장을 노렸던 무왕은 전라도로 눈을 돌려 익산에 별도를 경영하였습니다. (앤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봉림사지에서는 전주 동고산성 등 후백제 유적지로 알려진 곳과 유사한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10세기 초 선해무리굽청자완과 중국식해무리굽완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진안 도통리 가마는 봉림사지에서 출토된 자기면과 유사한 자기의 생산이 확인되어 후백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익산 미륵사지 「금마저」명 기와, 9세기말 ~ 10세기 초, 후백제는 ‘금마저’와 같은 백제의 옛 지명을 사용하여 백제 계층의식을 나타내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전주 동고산성 「전주성」명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900년 견훤이 후백제의 새로운 도읍으로 삼은 전주 동고산성에서 발견된 기와이다.
부처, 9세기말 ~ 10세기 초, 익산 왕궁리 석탑, 국보 123호
봉림사지 삼존불 중 협시보살상, 10세기, 석재.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의 좌.우협시보살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불입상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거나, 6세기 후반 보살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x자 천의를 걸치는 등 복고적 요소가 눈에 띄어 ‘의자왕의 숙분을 풀겠다’고 천명한 후백제 정권의 제작이라 판단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후백제의 견훤
7세기 중반 이후 전라도는 통일신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통일신라의 세력이 완전히 기운 9세기 말, 반란 세력을 일으킨 견훤은 광주에서 스스로 후백제의 왕을 칭하고 이어 효공왕 4년(900)에는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이처럼 견훤은 매우 짧은 기간에 백제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이는 오랜 세월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전라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을 것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