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국립박물관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땅, 전라도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2018년 가을 전라도 정도 1000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고대 이래로 전라도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와 역사시대 전라도를 이끌었단 인물들을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엄선하여 전시를 구성하였다. 첫번째는 역사속에 ‘전라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보여주는 조선시대 고지도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려사 권57, 조선 17세기 전반(광해연간, 1608~1623), 계명대학교 도서관

조선 세종대에 완성된 기전체의 역사서, 세가 46권, 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의 총 139권으로 구성되며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도 함께 편찬되었다. 전시된 책은 광해 연간에 간행된 목판본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땅, 전라도
『고려사』에 의하면, 1018년에 본래 백제의 영역이었던 강남도와 해양도 일대가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전주를 도청소재지로 한 전라북도와 광주광역시.나주 일대의 전라남도를 합쳐 부르는 ‘전라도’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의 기록입니다. ‘전주’와 ‘나주’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군과 현을 묶어 ‘전라’도라 부르는 행정적 명칭은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 생겨났지만, 이 지역은 이미 온갖 물산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온화하며 아름다운, 글자 그대로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땅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호남지도, 조선 18세기 중엽,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보물 1588호

영조 연간의 1739년부터 1759년까지 잠시 사용된 남원의 명칭인 ‘일신’이 보여 제작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비변사에서 제작한 지도로, 총 7책 중 마지막 전라전도 부분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해동지도, 조선 19세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상기(1678~1752)가 제작한 <동국지도>를 해동 정씨 가문에서 1803년 이후 팔사한 것 중 전라도 부분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전라남북도여지도, 조선 18세기 후반, 영남대학교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전라남북도여지도 중 진산현. 진산현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에 있던 옛 지명으로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진산현이었다.

“전라천년”, 전라도 천년을 지켜온 사람들
국립광주박물관은 전라도 정도 1000년을 기념하여 특별전 <전라천년-전라도 천년을 지켜온 사람들>을 개최합니다.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사용된 행정구역 명칭으로 『고려사』 속 현종 9년(1018)의 기록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라도에는 ‘전라도’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을 일구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개방적이며 진보적이어서 다른 문명을 흡수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우리 역사를 뒤흔든 여러 개혁 사상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위기 때마다 충의의 저력을 발휘하여 이 땅을 넘어 한반도를 수호하였습니다. 이제,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라도에서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광주박물관] 회화와 서예

광주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조선후기 전남지방을 대표하는 문인화가들의 그림과 서예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와 진도출신 문인화가 허련, 화순 출신 송수면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작품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예작품으로는 선조대왕의 글씨와 조선후기 문인 임장원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먹으로 그리다
현대의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의 기기를 손에서 놓지 않듯이, 옛 문인들은 붓과 먹, 벼루와 종이의 문방사우를 늘 주위에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우리 전통예술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물을 더해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그린 수묵화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고요하고 단정한 그림입니다. 남도의 전통회화를 대표하는 해남 윤씨 가문의 윤덕희(1685~1766), 조선후기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문인화의 맥을 이어간 소치 허련(1808~1893) 등도 먹으로 마음을 그린 그림, 수묵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의 수묵화는 현대미술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르로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색과 현란한 기교 없이도 우리의 내면을 보여주는 ‘수묵’의 현대적 의미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지금, 남도의 전통회화 속에서 수묵화의 정수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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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림, 윤덕희, 조선 1742년, 종이에 먹

윤덕희는 해남윤씨 가문 어초은공파의 8대손으로, 국보 240호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장남이다. 갑술환국으로 정치계의 판도가 바뀌자 윤덕희는 일찍부터 벼슬을 포기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그림을 그렸다. 그 화업은 아들인 윤용에게까지 이어져 3대에 걸쳐 문인화로 일가를 이루었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용트림하는 소나무와 언덕을 배경으로 한 필의 살찐 말이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다. 소나무는 문인의 절개와 장수를 상징하며, 준마는 재사의 인품과 등용을 뜻한다. 윤덕희는 다양한 주제에 능하였지만 특히 이러한 말 그림을 자주 그렸다. 18세기의 한 기록에 의하면, 윤두서는 마르고 날쌔 보이는 말을 그리고 그의 아들은 살찌고 둔해 보이는 말을 그렸는데, 중국인들은 살이 올라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아들의 말그림을 선호하여 비단을 주고 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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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산의 아홉굽이 경치, 허련, 조선 1878년

허련은 19세기 호남이 배출한 주요 화가 중의 한명이다. 진도에서 태어난 그는 늦은 나이에 추사 김정희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헌종을 모시고 그림을 그려 보이는 영예를 누렸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당하였을 때에는 그를 따라 제주도에 머무르며 그림과 글씨를 익히기도 하였다. 추사의 사후에는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경영하였다. 이 병풍은 무이구곡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무이구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노닐던 중국 무이산 구곡계를 가리킨다. 주자는 그 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무이구곡시를 남겼다. 성리학을 숭상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현인이 거주할 만한 이상향으로 무이구곡을 꼽았고, 그림으로나마 그려 갈 수 없는 그 곳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였다. 각 폭 상단에는 주자의 무이구곡시가 적혀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여덟 군자의 모습, 허련 (1808 ~ 1893),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조선후기 문인화가 소치 허련이 그린 팔군자를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팔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의 상징성을 의인화하여 그린 사군자를 변형, 확대시킨 것으로 연꽃, 소나무, 모란, 파초, 비자 등을 더한다. 이른 봄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는 난초, 늦은 가을 추위를 견디는 국화, 그리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하는 대나무는 절개와 덕, 학식을 갖춘 군자의 정신세계를 함축하여 상징하지만, 여기에 다시 더해진 네 가지 식물은 길상적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 특히 모란에는 부귀와 행운, 소나무에는 장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허련이 그린 팔군자에는 오동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말기에 이르면 길상적 의미가 담긴 팔군자를 일반 서민들까지 애호하게 되어 그 그림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대나무, 송수면(1847~1916), 19세기말 ~ 20세기초, 종이에 먹

사호 송수면은 조선말기 문인화가이다.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서 나고 자란 송수면은 사평리 앞에 흐르는 천에서 그의 호 ‘사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을 사평에 머물렀지만 집안 일가들이 벼슬을 하며 거주하던 한양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현재도 서울에 전하며, 생존 당시 이미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될 만큼 이름이 있었다. 송수면의 그림 중 묵매와 함께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묵죽이다. 오세황의 『근역서화징』에도 대 그림을 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수면은 조선중기의 대나무 그림을 충실히 따라 그리면서 연습하였다. 그의 대나무 그림이 예스러운 방식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까닭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다양한 형체의 대나무를 그린 6폭 병풍이다. 각 폭에 두 그루의 대나무를 앞뒤로 배치하였으며, 먹의 농담을 달리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곧게 뻗거나 바람에 흔들려 휘어진 모습, 또는 굵고 가는 줄기를 대비시키는 등 대나무의 형태에 변화를 주어 그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먹으로 쓰다.
먹으로 쓴 글씨를 소재로 하는 ‘서예’는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한 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뿐입니다. 한자는 의미에 따라 수없이 많은 형태의 글자가 존재하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양의 ‘미술’ 속에는 ‘글씨’를 예술로 하는 장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미술공모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본래 동양화, 서양화에 이어 제3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서예’는 오랜 논쟁 끝에 동양화 부문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한 글씨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 특히 한자를 사용해 온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때 부정되었던 서예가 추상미술의 한 부분으로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본래 먹으로 쓴 글씨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선조대왕의 글씨, 조선 1632년

여덟 폭 폭으로 이루어진 이 병풍은 선조의 글씨를 새겨 찍어낸 판본을 보고 다시 찍은 것이다. 각 폭은 선조가 당시 가운데 좋아하던 시구를 적어 놓은 것으로, 위응물, 맹호연, 장적, 한악 등이 지은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초서의 각 글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서 쓰는 연면초로 쓰여져 있다. 마지막 폭에는 의장군의 집에 보관되었던 어필의 판본을 다시 찍어내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스스로를 훈계하고 맹세하는 글, 임장원(1734~1804), 조선 1800년, 종이에 먹

1800년에 임장원이 지은 잠을 행초로 쓴 여덟 폭 병풍이다. 잠이란 한문 문체의 하나로, 경계하는 뜻을 서술한 글이다. 이는 임장원이 자신을 반성하고 후손에게 교훈을 전하기 위하여 쓴 글을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규암 임장원은 전라남도 보성 옥평 출신으로 40세에 이르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지방에서 급제하는 선비들이 드물었던 사실과 이후 그가 몸담았던 중요 직책을 감안하면 그의 학식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20년 가까이 직접 임금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간관으로 활동하면서 정조를 보필하였다. 이 병풍을 포함하여 그의 기개와 철학이 담긴 <규암집>, <규암만경>, <삼도선생행장> 등은 장흥 임씨 문중에 의해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광주박물관] 도자공예

전남지방에는 한국 도자기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적들이 여러곳 있다. 남해안에 위치한 강진군에는 용운리 가마 등 고려시대 청자를 생산하였으며, 고려말 왜구가 남해안을 휩쓸자 도자기에 생산지가 내륙으로 이동하였으며 광주 충효동은 고려말, 조선초기 분청사기의 중요한 생산지가 되었다. 당시 생산된 도자기들은 조운선을 통해 중앙으로 공급되었는데 해안지역에 침몰한 선박에서 당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광주박물관에서는 가마터와 침몰선 등에서 출토된 청자와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박물관에서 입수한 다량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화넝쿨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고려시대 청자
고려(918~1392)의 청자는 고려인의 사상과 빼어나 안목이 반영되어 창조적이면서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유려한 곡선의 조화가 이루어낸 세련된 매무새, 검고 희게 수놓은 상감무늬, 비 갠 후의 맑은 하늘빛을 담아낸 비취색 유약 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고려 인종 1년(1123)에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도기의 색은 푸른데 고려인은 비색이라 부른다”라고 청자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송의 태평노인은 『수중금』에서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의 품목에 넣었다. 고려청자는 용과 기린같은 상상의 동물 형상에서부터 표주박과 참외 등 자연에서 따온 소재를 고려 특유의 단아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장식된 연꽃 넝쿨무늬 등은 불교를 숭상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또한 연못가 동자무늬, 물가풍경무늬, 구름 속 학 등은 고려인의 서정적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고려는 물론 중국에까지 우아한 멋을 떨치던 고려청자는 강진을 중심으로 생산되었고, 지금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어 전남지역은 고려청자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앵무새 무늬접시, 청자 모란 줄기 무늬 병,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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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꽃무늬 잔, 강진국 대구면 용운리 출토, 「尙」이 새겨진 청자 합,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향로, 청자 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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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포도무늬 병,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출토

강진 청자가마
고려의 청자가마가 가장 많이 발견된 강진의 청자 가마터는 사적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굴 조사된 대표적 가마인 용운리 가마는 10세기 후반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음.양각청자를 비롯한 상감청자 등 고려 최고의 청자를 만들었다. 삼흥리 가마에서는 청자와 함께 도기도 생산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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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버드나무무늬 정병,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잔과 받침,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모란무늬 주자,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버드나무 학 동자무늬 매병,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포도동자무늬 주전자와 받침,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넝쿨무늬 유병, 고려 12세기, 청자 국화넝쿨무늬 유병,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뚜껑있는 그릇,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동물모양 인장,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넝쿨무늬 그릇,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연꽃무늬 대접,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꽃모양 접시,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물가풍경과 연꽃무늬 대접,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파도무늬접시,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물가풍경과 물고기무늬 접시,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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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꽃잎무늬 병, 고려 11세기, 완도 어두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연꽃넝쿨무늬 장구, 고려 10세기, 완도 어두리 해저

바다에서 건진 청자
고려시대에는 내륙엣 거두어들인 세금을 해안 부근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다시 배를 싣고 연안 항로를 따라 수도인 개경까지 운반하였다. 이러한 배를 조운선이라 부르는데, 당시 조운선들은 풍랑에 휩쓸리거나 해적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최근 완도 어두리와 무안 도리포, 군산의 비안도, 태안 대섬 등의 앞바다에서 수많은 고려청자를 실은 채로 침몰한 조운선이 발견되었다. 완도 어두리에서 발견된 침몰선 안에서는 도자기 3만여 점을 비롯하여 선상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재질의 제품이 발굴되었다. 도자기는 녹청색 혹은 녹갈색을 띠는 조질청자로 대접, 접시가 대부분이고 이 가운데 철화안료를 사용한 병과 장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부안 도리포에서는 대접과 접시가 주로 발견되었는데, 간지가 있는 다른 청자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고려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연꽃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조선시대 분청사기
‘분청사기’란 옛 기록에는 없는 용어이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미술사학자인 고유섭(1905~1944)선생이 회청색 바탕흙에 흰흙을 바르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어 구워낸 조선 초기의 도자기를 ‘분장회청사기’라 짓고 이를 줄인 말이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분청사기는 고려말 상감청자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으나 세종 연간(1418~1450)을 전후하여 그 질이나 형태,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 등이 크게 발전하여 절정을 이룬다. 특히 그릇에 흰 눈꽃이 핀 듯한 문양를 찍어 넣은 인화기법에서 세련된 멋과 셈세한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분청사기도 제작되었다. 특히 광주 충효동 가마터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넓고 시원한 붓질과 장인의 손맛대로 선을 새기거나 면을 깎아 만든 해학적인 표현으로 조선인의 감성을 느끼게 한다. 분청사기는 1466년과 1469년 사이 왕실과 중앙관청에 백자를 공급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부터 주요 소비층이 점차 지방 관아 및 민간으로 바뀌면서 질도 떨어지게 된다. 결국 백자의 수요 증가로 인하여 15세기 말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16세기 후반에는 소멸하게 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내섬’이 새겨진 대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잔,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뚜껑있는 그릇,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연적,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세잎무늬 병, 분청사기 풀무늬 병, 조선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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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덤벙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덤벙무늬는 분장문이라고도 하는데, 초벌한 사기를 백토물에 담글 때 나는 ‘덤벙’소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백토물의 흔적이 색다른 장식효과를 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모란무늬 자라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제기, 분청사기 꽃무늬 장군,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광」이 새겨진 분청사기, 「광별」이 새겨진 분청사기, 「광정사」가 새겨진 분청사기,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광주 충효동가마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효동 가마는 경사를 이용한 오름가마로 사적 제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자가 제작되었다. 인화분청사기는 주로 중앙 관청에 공납하는 것들이다. 충효동 가마에서는 그릇 뿐만 아니라 벼루.제기.묘지 등도 생산하였다. 한편 모란.불고기.게 등을 활달한 필치에 해학적으로 표현한 분청사기 박지무늬는 충효동 가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조선시대 백자
백자는 분청사기와 더불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제작되었다. 아무런 문양장식 없이 절제미가 돋보이는 순백색 백자는 유교 이념 구현을 이상향으로 하는 신 왕조와 사대부층의 사상을 담아내기에 가장 알맞은 그릇이었다. 이러한 백자는 전국에서 제작되었는데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백자는 왕실과 중앙 관청에 납품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무늬에 자토를 넣어 검게 장식한 상감백자가 일시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순백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푸른색 문양이 화려한 청화백자는 초기에는 중국적인 화풍으로 표현되었으나, 곧 한국의 정취와 격조를 보여주는 회화적인 문양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백자의 색과 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대부분 회백색을 띠었다. 그림이 그려진 백자에는 값비싼 청화안료를 대신하여 값이 싸고 구하기 쉬운 철화안료가 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전반부터는 백자의 색이 순백색으로 다시 밝아지며,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청화백자의 제작도 새롭게 증가한다. 조선 후기에는 청화, 동화, 철화, 음각, 양각, 투각 등 여러가지 장식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하였으며, 제기와 문방구류 등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항아리, 조선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연꽃넝쿨무늬 그릇,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병, 조선 15~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발,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뚜껑있는 항아리,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천’이 새겨진 접시,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뚜껑있는 그릇, 조선 15세기, 경기도 광주 관요

OLYMPUS DIGITAL CAMERA태항아리와 태지, 조선 1624~1625년, 광주 중흥동 발굴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묘지명 접시, 조선 1708년경,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명기, 조선 1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풀무늬병, 백자 풀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연꽃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꽃나비무늬 병,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산수무늬 삼층합,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구름 학무늬 접시,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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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풍경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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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무늬 사발,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대나무모양 병,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매화무늬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사자모양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넝쿨무늬 연적, 산수무늬 연적, 부채모양 산수무늬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복숭아모양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용무늬 필통, 백자 매화무늬 필통, 조선 19세기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광주박물관] 전남지역 불교문화

전남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불교 역사에 큰 흔적들을 남겨 놓고 있다. 통일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화엄종을 대표하는 구례 화엄사를 비롯하여 수행을 중시하는선종 구산선문 중 사찰들이 지리산과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를 비롯하여 화순 쌍봉사, 구례 연곡사 등이 전남 지역에 자리잡았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개혁 수선결사를 이끌었던 송광사,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백련사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큰 역할을 했던 해남 대흥사, 여수 흥국사 등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주 신룡동 오층석탑 사리갖춤, 고려, 광주 신룡동 오층석탑

광주 신룡동 옛 절터에는 고려 전기로 추정되는 오층석탑과 돌부처가 남아 있다. 1981년 오층석탑의 기단부 헤체.보수 중 1층 몸돌 위쪽의 사리 봉안장소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직사각형의 금동사리함 속에 연꽃장식을 넣고, 그 위에 금동사리병을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나무탑은 통일신라시대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전통에 따라 상징적으로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함꼐 출토된 대나무편은 다른 출토 예가 없어 아직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사리엄장구
사리는 범어의 ‘Sarira’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으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말한다. 사리를 부처의 상징으로 여겨 여러 가지 장엄으로 꾸미고 탑속에 봉안한 것을 사리장엄구라 한다. 사라장엄구의 가장 안쪽에는 사리를 담는 사리병이 놓이는데, 사리병은 다시 귀금속으로 만든 여러 겹의 상자 속에 봉안된다. 사리장엄구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과 사자를 비롯하여 극락정토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 보살과 스님 등이 표현되어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려한 가마에 보장이나 영장이라고 부르는 장막을 씌운 사리장엄구가 유행하였다. 사리신앙이 유행하면서 부처의 말씀을 적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같은 법사리와 탑을 만들어 공덕을 쌓는 신앙의 유행으로 소형 탑을 사리와 함께 봉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승의 사리는 승사리라고 부른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화려한 사리장엄보다는 부처의 상징성을 강조하여 집모양 사리장엄구에 아미타삼존불상이 안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함께 봉안된 불상의 몸 속에 경전이나 발원과 관련된 기록물을 넣는 복장도 유행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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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사’ 종, 여수시 쌍봉동, 고려 10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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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종, 강진군 사당리,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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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병,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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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병, 곡성군 설옥리,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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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령, 고려,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금강저, 광주 산정동 출토, 고려,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향로, 고려,

불교의식구
범종은 사찰에서 시간으 ㄹ알리거나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종이다. 범은 우주만물과 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범종의 소리른 불교의 진리를 의미한다. 금강령과 금강저는 밀교의식에서 사용되는 의식구이다. 금강령은 의식 때 여러 불.보살들을 기쁘게 해주고, 중생들을 성불의 길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금강령은 손잡이 윗부분이 금강저 모양이며, 몸체는 종의 형태로 불법을 수호하는 범천.제석천, 사천왕, 불부종과 같은 호법신장상 등이 표현된다. 금강저는 원래 제석천이 아수라를 물리치는 무기이다. 불교에서는 금강과 같은 지혜로 번뇌를 없애기 위해 수행자가 금강저를 휴대한다. 발우는 승려의 그릇을 말한다. 스님들은 공양을 하기 전에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꺠달음을 얻고자 합니다.”라는 오관계를 외운다. 공양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하고 음식을 먹으며,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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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탑, 장흥군 연지리,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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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여래, 고려 12~13세기

이 불상은 서방의 극락정토에 계시는 아미타여래의 모습을 금동으로 만든 것이다.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붙인 채 오른손은 가슴 앞에, 왼손은 가슴 아래 둔 손갖춤을 하여싿. 이는 모든 중생을 사후에 극락세계로 맞아들이는 아미타여래의 손갖춤 중 하품중생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죽음 뒤의 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는 수많은 부처 가운데에서도 특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처럼 값비싼 재료인 동을 충분히 사용해야 하는 커다란 크기의 불상도 제작 가능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무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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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고려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맺은 여래의 모습을 철로 만든 것이다. 항마촉지인이란 무릎 위의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갖춤으로, 석가모니가 오랜 수행 끝에 꺠달음을 얻으려 하였을 때 이를 방해하려는 악마들을 물리치고, 깨달음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땅을 눌러 지신을 불러낸 순간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는 금동불상을 많이 만들었으나,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 동의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이와같은 철불의 제작이 늘어났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고려시대 불교문화
통일신라 말 전남지역에는 훌륭한 고승이 많았다. 태안사 적인대사 혜철(785~861), 쌍봉사 철감선사 도윤(798~868), 보림사 보조선사 체징(804~880), 도갑사 선각국사 도선(827~898), 무위사 선각대사 형미(864~917), 태안사 광자대사 윤다 (864~945), 옥룡사 동진대사 경보(869~948)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우리 고장의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건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외에도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 개성에서 활동한 전남 출신의 승려들이 많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이로 화엄사를 근거지로 활동한 대각국가 의천(1055~1101)과 그의 제자 정인왕사를 들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불교계의 모순과 타락을 비판한 결사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전남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지금의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선결사, 그리고 강진 백련사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 등, 당시 가장 큰 규모의 결사가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송광사와 백련사의 결사 운동은 지방의 향리층과 백성들의 지원을 받았고, 이후 두 사찰은 불교 개혁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며 여러 대에 걸쳐 국사를 배출하여 고려의 불교문화를 선도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발원문, 복제품, 순천 대곡동 석탑, 조선 1468년

OLYMPUS DIGITAL CAMERA보림사 삼층석탑의 내력을 새긴 돌(북탑),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870년*1478년 중수)

OLYMPUS DIGITAL CAMERA보림사 삼층석탑의 내력을 새긴 돌(남탑),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870년(1684년 중수)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있는 그릇, 보림사 삼층석탑 사리구,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후반

OLYMPUS DIGITAL CAMERA사리단지, 보림사 삼층석탑 사리구,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후반, 납석

OLYMPUS DIGITAL CAMERA명문이 새겨진 기와, 화순 쌍봉사 출토, 조선 17361795년 입수

OLYMPUS DIGITAL CAMERA수막새, 화순 쌍봉사 출토, 조선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명문이 새겨진 기와, 화순 쌍봉사 출토, 조선 1727년

OLYMPUS DIGITAL CAMERA수막새, 영암 천황사 출토,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수막새, 영암 천황사 출토,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여래좌상, 석조보살좌상, 석조나한좌상, 담양 서봉사터,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나한상

OLYMPUS DIGITAL CAMERA나한상

나한은 산스크리트어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존재를 뜻하는 ‘Arhat’을 한자로 옮긴 ‘아라한’의 줄임말로, ‘웅진’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십육나한, 오백나한 등으로 표현한 나한상은 나한전이나 응진전에 모신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나한 신앙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편안암을 비는 나한재가 자주 열렸다. 조선시대에는 나한의 신통력에 기대어 죽은 자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빌기도 하였다. 전시된 상은 조선시대 교종의 수사찰인 담양 서봉사 터에서 나온 것이다. 여래와 보살의 상을 포함한 나한상들은 모두 흰색을 띠는 무른 돌에 새겼다. 나한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거나 눈을 반쯤 감아 명상에 잠겨 있는 승려의 모습이다. 옷은 대부분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는데 일부 붉은 선이 남아 있어 채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조선시대 불교문화
조선은 성리학에 바탕을 든 유교국가로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칙되었다. 태종 1407년 불교 정비작업으로 광주 전남의 사찰 중에 7개 종파, 17개 사찰이 왕실의 명복과 고을의 안녕을 비는 자복사로 지정되었다. 세종 1424년 불교의 통합에 따라 전라도의 선종은 구례 화엄사를 수사찰로 하고, 교종은 창평의 서봉사를 수사찰로 지정하였다. 세조는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로 하여금 도갑사를 중창케 하고 약사여래상을 안치하였다. 1457년에는 화순 쌍봉사를 원당으로 삼고 5결의 토지를 지금하고 조세를 면제하기도 하였다. 1550년에는 인종의 비인 공의왕대비가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자실로 하여금 『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을 그리게 하여 도갑사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에는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의 흥국사를 비롯하여 내륙 경략의 거점인 순천의 송광사와 구례 화엄사 등을 중심으로 의승병이 일어나 왜군을 물리친다. 특히 흥국사의 의승 수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설군으로 편제되어 훗날 병자호란 등에 나아가 활약하였다. 선산대사 휴정(1520~1604)의 의발을 보관한 대흥사는 13명의 대종사를 배출하며 불교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광주박물관] 광주 신창동유적, 농경의례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동시대 한반도 다른 지역 유적과 마찬가지로 의례를 행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점을 치던 행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점뼈를 비롯하여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토제품 등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는 그 연대가 가장 오래된 악기들이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당시에 사용된 악기로는 나무로 만든 현악기와 토기로 만든 북 등이 있는 고대 역사서에 기록된 악기들을 실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점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고대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점을 치는 방법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동물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농사의 풍요, 집단의 단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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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기검집, 초기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집은 검을 넣어 보관하는 것으로 석검을 비롯한 모든 검의 부속구로 딸려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나무껍질 등을 이용하다가 차츰 가죽이나 나무, 칠제품 등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북,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한반도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이다.

바닥면이 좁고 아가리가 넓은 대접과 비슷한 형태로 북으로 추정된다. 아가리를 따라 가죽을 덮고, 구멍을 통해 가죽을 고정하였다고 판단되며 장고의 한쪽 부분과 유사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북,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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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현을 타거나 켜서 소리를 내는 현악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경산 임당 무덤에서 유사한 형태의 칠흔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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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음악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마찰봉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긴 나무막대의 한쪽 부분은 손잡이로 하고 다른 쪽은 여러 개의 홈을 판 형태로 만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찰음악기, 복원품

농경의례와 악기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악기는 유럽의 구석기시대 뼈로 만든 피리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뼈피리가 최초의 실물 악기에 해당된다. 악기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나 뼈를 이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쉽게 부식되어 많이 확인되지 않지만, 청동제 악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청동방울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청동방울로 령과 탁의 종류가 있으며, 타악기인 북과 현악기인 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방울은 여러 유적에 확인되었지만, 슬과 같은 현악기와 북은 신창동 유적에서 처음 실물로 확인되었으며, 이와 함꼐 찰음악기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악기는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파종과 수확을 비롯한 다양한 의례활동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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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집,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집은 검을 넣어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나무껍질 등을 이용하다가 차츰 가죽이나, 나무, 칠제품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목검과 부속구,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 제품은 검집과 목검검 손잡이검 손잡이 끝장식 등으로 구성된다. 결합된 전체 형태는 청동검의 형태를 닮아 있는데, 이는 청동검을 대신하여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원판모양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토기편을 갈아 둥글게 만든 것이다. 정확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 이래 제사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의례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멧돼지모양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멧돼지의 형상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주둥이 일부만 남아 있다. 유아의 장난감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적의 성격, 점뼈와 함께 출토되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소형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굽다리접시, 뚜껑, 국자 등의 형태로 작게 만든 토제품이다. 저습지 주변에서 다양한 의례 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물을 대신하여 신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농경의례
“해마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으로 계속한다.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 섰다가 하면서 손발로는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이 마치 탁무와 같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면 또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고 국읍에 한사람씩을 받들어 천신의 제사를 주재토록 하였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각국에는 각각 별읍이 있는데 소도라 부른다. 방울과 북이 매달린 큰 나무를 세우고 귀신을 섬긴다. 그 가운데로 도망 오는 사람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븐 점은 다르다. ”
이 기록은 파종시기와 수확시기에 농경의례를 행하고, 농경의례와 관련된 소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도는 농경의례의 하나인 제천의식을 의미하거나 농경의례를 행하던 장소로 보기도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모양방울,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흙으로 만든 작은 크기의 방울과 그 위에 얼굴모양을 새긴 유물이다. 다양한 의례행위가 이루어질 때, 청동방울을 대신하여 신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점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동물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농사의 풍요, 집단의 단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바람개비문양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앞면 중앙에 회전하는 바람개비 문양, 가장자리를 따라 톱니날 문양을 배치하였다. 앞면에 옻칠을 한 뒤 문양 이외의 부분을 파내어 문양이 돋보이게 하는 박지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새모양목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나무를 깎아 새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저습지 주변의 농업과 관련된 의례 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농경의례
농경의례는 농작물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거나 수확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는 행위이다. 마을을 형성하게 되고,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작업이 반드시 요구되었기에 농경의례는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통합하는 주요 수단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농경의례는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이 시기 전국으로 확산되는 도작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농경의례 모습의 구체적인 유물로는 농경문청동기가 대표적이다. 이왜에 새문양청동기, 손잡이에 새가 장식된 청동검 등 농경의례 관련 자료에는 새가 많이 보인다. 초기 농경 단계에서 새는 지상계와 천상계를 넘나들며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의례와 관련된 유물로 새모양목제품과 바람개비문양칠기, 점뼈와 소형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새모양목제품과 바람개비문양칠기는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새와 태양을 표현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000년 전 동북아시아 교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대방에서 왜로 가는 길은 한반도 서해안의 연안물길로서 한의 나라를 경유하며 혹은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에 있는 구사한국(김해)에 도착한다. 여기까지가 칠천여리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과 대방에서 서해와 남해의 연안을 따라 김해에 이르고 다시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규슈에 이르는 당시 동방교역로를 알려주는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방교역로상에 위치한 영산강 하구와 영산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이어진 신창동 일대는 낙랑 및 중국, 한반도, 왜를 연결하는 중요 기착지로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남해안 도서 및 해안을 면한 지역에 분포하는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왜래유물들은 기록에서 보이는 중국(대방)-한-왜를 잇는 동방교역로를 실증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