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역사시대

김해 구지봉(사적), 금관가야 건국 설화가 있는 곳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사적)이다. 김해박물관 뒷편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가야 건국 설화가 있는 곳이자 우리나라 최초 서사시인 <구지가(龜旨歌)>의 무대이다. 구지봉은 뒷편에 있는 산과 함께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목부분에 수로왕비릉(사적)이 자리잡고 있다. 구지봉 정상에는 청동기시대 남방식 고인돌이 있어 오랜세월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 상석에는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해 구지봉(사적)>

금관가야<위성사진>

구지봉은 낮은 봉우리로 김해박물관 마당이나, 수로왕비릉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정상부에 올라가면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남근석과 한석봉 글씨가 있는 고인돌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왕왕비릉 옆에서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릉(사적)>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정상 아래>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고인돌>

구지봉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지하에 깬 돌로 쌓거나 돌판을 상자를 짠 무덤칸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작은 받침돌로 큰돌을 지탱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구지봉 정상부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규모는 240 x 210 x 100 cm 로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 수 없으나, 주변엔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 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에 새겨진 구지봉석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구지봉은 김해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 옆에 자리잡고 있다. 지배층 무덤인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군, 주거 유적인 봉황대가 해반천을 따라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박물관에서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해반천 옆에서 멀리 보이는 구지봉>

가락국기(駕洛國記)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이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身長)은 아홉 자나 되었으니 은(殷)의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처럼 생겼으니 한(漢)의 고조(高祖)와 같고, 눈썹에는 팔채(八彩)가 있으니 당(唐)의 요(堯)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으니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한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 <생략> –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가락국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김해구지봉, 사적, 경남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龜首峯), 구봉(龜峰) 등으로도 불리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 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개의 알을 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지 10여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을 세운 분으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경주 포석정지(사적), 신라인이 유상곡수연을 하던 곳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이다. 중국 동진시대 명필 왕희지가 즐겼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정원에서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시를 읊던 연회로, 동양의 선비나 귀족들이 즐겼다. 유상곡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알려진 것은 4세기 경에 쓰인 왕희지의 난정서로, 문인들을 모아 굽이진 물줄기에 줄서 앉아 시를 지으며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귀족사회에 유행했던 유상곡수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포석정지(사적)>

포석정에는 정자를 비롯하여 별궁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석조구조물만이 남아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는 길이 약 22 m이며, 높낮이 차는 5.9 cm이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며, 그 아래 있던 물을 받는 원형석조가 남아 있다. 수로는 전체적으로 곡선이 강조된 타원형이며 수로의 폭은 30 cm, 깊이는 20 cm 정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포석지에 남아 있는 수로>

OLYMPUS DIGITAL CAMERA<포석정 수로가 시작하는 지점에 있는 물받이>

OLYMPUS DIGITAL CAMERA<물이 흐르는 수로>

<삼국사기>에 경애왕 4년(927) 왕이 포석정에 잔치를 하다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왕과 신하들이 죽음을 당한 역사적인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49대 헌강왕 때 왕이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포석정지(사적)>

OLYMPUS DIGITAL CAMERA<포석정 정원에 있는 고목>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 927년 09월(음) )
〔4년(927)〕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습격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0,000명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 가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애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이 홀로 보았다. 어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 스스로가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처용랑 망해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포석정지>

OLYMPUS DIGITAL CAMERA<포석정지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포석정지 뒷편 경주남산 해목령 일대>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454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는데,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水路)의 길이는 약 22m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景哀王) 4년(927) 왕이 후백제 견훤(甄萱)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6.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나정(사적),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곳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 사적)이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왕의 탄생설화가 있는 우물 유적이다. 2012년 경에 발굴, 조사 및 유적지 정비가 진행 중이었으며 지금도 최근에 빈터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 순조대에 세워진 유허비가 남아 있으며 출토된 건물석재들도 볼 수 있다. 발굴조사 결과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우물 유적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는 제사 등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나정(사적)>

경주 나정은 2002년부터 3년간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 8각건물지, 우물지, 기와와, 토기, 철재류, 담장지 등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 조사 당시 모습>

박혁거세(재위 기원전 57~ 기원후 4년)는 경주 일대에 있던 6부촌 중 남산 북쪽 고허촌 촌장이 나정에서 가져온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13세 되던해 6부촌 촌장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고 하였다. 부인인 알영부인 또한 경주 오릉에 있는 알영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무덤이 있는 경주 오릉(사적)은 경주 서남쪽 고허촌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나정에는 조선 순조 때(1803)에 세워진 유허비가 남아 있다.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 일설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1 시조 혁거세 거서간,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유허비 및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담장터로 보이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나정 유적과 경주 남산>

이곳은 남산 북서쪽 자락 아래에 돌산고허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주변에는 남간사지, 창림사지 절터가 있으며, 남쪽으로 경주 포석정과 경주 오릉을 비롯하여 경주 박씨와 관련된 왕릉들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남산과 창림사지 절터>

경주 나정(蘿井, 사적), 경북 경주시 탑동 700-1
이 우물은 오릉(五陵)의 동남쪽 소나무 숲이 무성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 우물터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 (朴赫居世)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기원전 69년 어느 날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 말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13세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았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우물이 남아 있으며,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시조 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가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표암(瓢巖), 경주이씨 시조 탄생설화가 있는 곳

경북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경주표암 (慶州瓢巖)이다. 이곳은 신라를 건국한 6촌 중 알천 양산촌 촌장이자 경주이씨 시조인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 전해지는 곳이다. BC 69년 6촌장이 이곳에서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를 건국하였다. 유적지에는 이알평 탄생설화가 있는 광림대 석혈(石穴)과 조선 순조 때(1806년)에 세운 유허비, 재실, 사당 등이 있다. 표암 아래 신라 4대 탈해왕릉이 있어 알천 양산촌 세력과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표암>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마을 어른(村長)은 알평(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신라 시조 혁거세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표암은 사당과 재실 뒷편 바위산 전체를 말하며 ‘박바위’ 또는 ‘밝은바위’를 뜻한다. 윗쪽에 탄생설화가 있는 광림대 석혈이 있고 그 아래 순조 때 세운 유허비가 있다.

경주 표암 21-20211223
<경주 표암>

OLYMPUS DIGITAL CAMERA<1806년에 세워진 유허비>

OLYMPUS DIGITAL CAMERA<탄생설화가 있는 광림대 석혈>

보호각 속에 있는 석혈은 바위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경주이씨 시조인 알평공이 태어나서 몸을 씻은 곳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혈>

OLYMPUS DIGITAL CAMERA<석혈 앞 경주이씨시조유허비>

OLYMPUS DIGITAL CAMERA<광림대 석혈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광림대 남쪽으로 보이는 경주 도심>

경주표암 아래에는 신라 4대 탈해왕릉이 있다. 탈해왕와 알천 양산촌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라 4대 탈해왕릉(사적)>

표암 아래에는 경주이씨 시조를 모시는 사당인 악강묘(嶽降廟)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표암재(瓢巖齋)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표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표암재>

OLYMPUS DIGITAL CAMERA<표암재 솟을삼문>

OLYMPUS DIGITAL CAMERA<표암재>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인 악강묘>

경주 표암(慶州 瓢巖), 경북 경주시 동천동 507-7
표암이라는 이 바위 이름은 ‘박바위’ 혹은 ‘밝은 바위’ 를 뜻하며, 신라 6촌 가운데 급량부 (及梁部)였던 알천(謁川) 양산촌(楊山村)의 시조 이알평공(李謁平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진한(辰韓) 땅에 여섯 촌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알천 양산촌이며 그곳의 촌장은 알평이었는데, 그는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巖峰)으로 내려와 급량부 이씨(李氏), 즉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은 급량부라고 하였으며,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는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치고 급잠(波潛) · 동산(東山)·피상(上)의 동촌(東村)을 이곳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또한 이 곳은 신라 화백회의의 연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표암은 경주 이씨의 근원지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로서도 중요한 역사적 유래를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재매정(사적), 김유신 장군 집터에 남아 있는 우물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재매정(財買井, 사적)이다.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이 살던 집터에 남아 있는 우물이다. 우물은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다. 우물 깊이는 5.7 m이며 넓은 부분의 너비가 1.8 m정도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남아 있는 유서깊은 우물이다. 우물 옆에는 구한말에 세워진 유허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재매정(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 우물과 유허비>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 우물>

김유신이 살았던 집터는 신라 왕궁이었던 월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5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통일신라 최고 교육기관이 있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경주향교가 있으며 최부자집이라 불렸던 집을 비롯하여 부유층들이 살았던 마을이 있다. 통일신라 때 귀족층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집터는 1993년에 재매정을 중심으로 주변 집터를 발굴,조사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집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 동쪽편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 서쪽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재매정>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 동쪽편으로 보이는 경주 월성과 교촌마을>

OLYMPUS DIGITAL CAMERA<집터 앞을 흐르는 경주 남천>

OLYMPUS DIGITAL CAMERA<집터 남쪽 5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유신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천산사 절터(사적)>

재매정(財買井),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91
재매정(財買井)은 신라 명장 김유신(金碩信)이 살던 집터라고 전해지는 이곳에 남아 있는 우물이다. 월성(月城)에서 서쪽으로 약 400m 거리에 남천 (南川)을 바로 앞에 두고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김유신 장군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 오는 중에 백제군이 다시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장군이 쉴 사이도 없이 출전하는 길에 자기 집 앞을 지나게 되자, 병사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하여 마신 다음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하면서 떠났 다는 기록이 있다. 우물은 깊이 5.7m, 최대 지름 1.8m, 바닥 지름은 1.2m 내외이고, 판석이 덮여 있다. 옆에는 조선 고종(高宗) 9년(1872)에 세운 유허비가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