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역사시대

상주 임란북천전적지, 임진왜란 때 중앙 관군이 왜군과 첫 전투를 벌렸던 곳

경북 상주시 만산동에 있는 임란북천전적지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 관군이 의병과 함께 왜군 주력부대와 최초로 전투를 벌렸던 곳이다. 당시 조성에서는 북방에서 전투경험이 많았던 이일을 경상도에 순변사로 파견하여 왜군과 맞서도록 하였다. 당시 상주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지방관리들은 왜군을 피해 숨어버렸는데 상주에서는 판관 권길, 종사관 윤섬 등이 의병장 김준신 등과 함께 이곳에서 왜군을 맞서 싸우다 800여 명이 전사하였다. 1990년 대 이곳에 순국한 이들을 모시는 사당인 충렬사가 세워 사적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또한 옛 상주목 객사였던 상산관을 비롯하여 여러 관아 건물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주 임란북천 전적지. 상주 북천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당시 전투에서 순국했던 상주 판관 권길 등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을 중심으로 앞 마당에는 기념관, 제실, 비석을 모신 비각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주전투에서 순국한 권길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

OLYMPUS DIGITAL CAMERA비각에는  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와 의병장 김준신, 김일을 기리는 「충신의사단비」 복제본과 권길의 충절을 새겨 둔 「판관권길사의비」가 있다.

이 비각에는 임진왜란(1592년) 떄 이곳 북천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3충신(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과 2의사(의병장 김준신, 김일)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신의사단비」 복제본과 상주목판관으로 봉직 중 순국한 권길의 충절을 새겨 둔 「판관권길사의비」가 보호되고 있다. 「충신의사단비」 는 1793년(정조 17)에 사액 받아 충이단에 비를 세웠는데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충의단에 있는 비와 똑같이 복제한 것이며, 「판관권길사의비」는 창석 이준 선생이 찬하여 1698년(숙종 24)에 건립된 충렬사에 세웠는데 충렬사가 훼철되면서 자산 아래로 1991년에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OLYMPUS DIGITAL CAMERA마당에 있는 재실

OLYMPUS DIGITAL CAMERA전적지 앞을 흐르는 북천과 상주읍치.

OLYMPUS DIGITAL CAMERA상주전투와 관련된 기록 등을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

OLYMPUS DIGITAL CAMERA 윤섬 교지, 윤섬(1561~1592년)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으로 파견되어 상주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교리로서 비교적 직위가 높은 문신이었지만 종사관으로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순국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정 임란일기. 조정(1555 ~ 1636년)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참전했으며 당시 기록을 적은 많은 「남행록」 등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행록과 문견록

OLYMPUS DIGITAL CAMERA이전의 형제급난도. 정경세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이준(1560 ~ 1635년)이 전투에서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형 이전(1558 ~ 1648년)이 동생을 업고 빠져나와 생명을 건지게 한 일화를 그린 그림이다.

상주전투
왜군들의 침략 사실을 접한 조선 조성에서는 4월 17일,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고, 성응길, 조경을 각각 좌우방어사로 삼아 영남으로 급파하였다. 이에 이일이 군사를 모아 명령을 받은지 3일 만에 출정하였고, 경상감사 김수도 열읍에 공문을 보내 수령들로 하여금 각자 소속군사를 이끌고 정해진 지역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고을 수령들은 각기 군졸들을 이끌고 대구 냇가에 순변사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수일이 지나도 순변사가 오지 않고 왜군의 북상 소문이 들리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비가 내리는데다 군량미마저 끊기자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일은 문경을 거쳐 4월 23일에 상주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상주목사 김해가 이미 적을 피해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판관 권길 만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이일이 판관을 시켜 관아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모으고, 흩어진 군졸과 무기를 수습하게 하여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조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급히 상주 북방 북천에 진을 치고 대오를 편성하여 서울에서 내려온 장졸 등과 함께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중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이일 휘하의 장졸들은 산을 의지하고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크게 패하여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900여 명이 순국하였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 중앙에 패보를 전한 다음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으나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OLYMPUS DIGITAL CAMERA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온 옛 상주목 객사건물이 상산관.

OLYMPUS DIGITAL CAMERA상주목 관아 동헌 문루였던 태평관.

상주 임란북천 전적지, 경부 상주시 만산동
이곳 북천변 자산 기슭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시 왜군에 대항하여 우리 관군과 의병들이 격전한 전적지이다. 이 전투에서 순변사 이일이 인솔한 관군과 상주지방에서 창의한 의병들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서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과 상주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수 많은 군사들이 순절하고 패전하였으나 임란사상 중앙 관군과 의병들이 뜻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첫 전투라는데 큰 뜻을 지니고 있다. 1990년부터 사당, 전시관, 사적비 등을 세우고 원래 있었던 박걸 단소 및 권길 사의비를 이건하여 사적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출처>

  1. 안내문, 상주시청,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상주 복룡동 유적(사적 477호), 읍치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 이후 생활유적

경북 상주시 도심에 있는 복룡동 유적(사적 477호)이다. 옛 상주목 읍치였던 상주읍성 외곽에 있는 생활유적이다. 2004년 택지개발을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건물터, 연못, 수혈유구, 구상유구 등이 확인되었으며 도기류, 기와, 자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건물터와 생활유구들은 읍성 외곽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면 통일신라 이후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 도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상주 복룡동 유적 사적477호 20100911-11
상주 복룡동 유적(사적 477호). 옛 상주목 읍치 동쪽편 외관에 위치하고 있는 통일신라 이후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유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에서 확인된 연못 유구. 조선시대 기와와 자기류 등이 이곳에서 출토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물 유구. 조선시대 기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상주 복룡동 유적 (연못과 우물), 조선시대
본 유구는 상주 복룡동 중앙로 확장 공사 중에 조사된 것으로,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상주시 복룡동 371번지에 해당한다. 연못은 기반층인 황갈색사질층과 자갈모래층 위에 축조되었는데, 축조 당시에는 더 깊게 만들었으나, 현재는 1~2단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연못의 규모는 길이 830 cm, 폭 550 cm, 깊이 50 cm이며, 벽면은 길이 100 cm, 폭 50 cm의 할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벽석에 이용된 석재 중에는 건축지의 주춧돌을 재사용한 경우도 있다. 연못 중앙에는 길이 370 cm, 폭 180 cm 규모의 수혈이 나타나는데 수혈에는 20 cm 정도의 천석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연못 내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편과 다수의 자기류가 출토되었다. 또한 우물의 축조는 70 ~ 90 cm 크기의 냇돌과 할석을 쌓아 만들었고, 우물의 가장 아래에는 목재를 결구하여 축조하였다. 우물의 규모는 깊이 70 cm 이고, 직경 70 cm이다. 우물 내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러한 유적은 조선시대 정원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경상도 감영이 설치되었던 상주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남석제 호(복룡동 256), 병(복룡동 230-3), 벼루(복룡동 256),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암키와(복룡동 256), 수막새(복룡동 397-5), 수키와(복롱동 256),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수막새(복룡동 10-4), 고려시대, 수막새(복룡동 256), 암키아(복룡동 10-4),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암막새(복룡동 256), 통일신라, 암막새(복룡동 256),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명문 납석제품(복룡동 256), 통일신라

상주 복룡동 256번지 유적에서 출토된 납석제 유물로 표면에 한자가 새겨져 있다. 한자의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벌주희”라는 여성 인명을 중심으로 모자 또는 모녀 관계로 추정되는 남자 인명 “萬(?)韓公”. “~리랑(~里娘)”라고 하는 6명의 여성 인명으로 보인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가 매병(복룡동 230-3), 유개호(복룡동 256),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매병(복룡동 256), 고려시대

상주 복룡동 유적
복룡동 유적은 상주시역에서 처음 발굴 조사된 대규모의 취락 유적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중다양한 유구들이 동일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상주지역의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대구.경산의 영남 내륙 지역과 충주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과의 문화상의 연관성이나 연속성을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송국리형 주거지가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도 확인됨에 따라 청동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며, 그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복룡동 유적의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초창되어 이후 그 터를 이용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동일 지역에 지속적으로 폐기와 건립이 반복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판단되어 이 지역에서 생활하던 당시 사람들의 주거 공간의 분할과 규모 등 지방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복룡동유적이 상주읍성지의 북동편 외곽에 위치하며, 우물과 다양한 기능의 수혈 유구들이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의 서민 생활상을 복원.연구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복룡동유적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유구들과 함께 다양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상주 시가지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상주 사람들의 사회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보물 119호). 유적지 인근 마을에 있던 고려시대 불상으로 지금은 상주 도심 왕산공원으로 옮겨졌다.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남원 만인의총(사적 272호),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이 함께 묻힌 곳

전북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만인의총(사적 272호)이다. 이곳은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이 전투에서 만여명의 조.명연합군과 백성들이 희생되었는데 임진왜란 직후 시신을 한곳에 묻었으며 광해군 때 (1612년) 충렬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무덤은 원래 남원역 부근에 있었는데 196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성역화하였다. 유적지에는 시신을 묻은 봉분, 죽은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세운 조형물, 기념관 등이 있다.

남원전투는 1957년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였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양원을 비롯한 명군 3000 여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관군 1000여명이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왜군은 고니시를 중심으로 56000여명의 대병력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성으로 집결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만여명의 민.관.군이 희생되었다. 남원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를 무혈입성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했으나 명랑해전으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 만인의총(사적 272호).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희생된 만여명이 함께 묻힌 무덤이다. 원래 주택가에 있었는데 1964년 사당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성역화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전투에서 희생된 8충신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처음 세워졌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내부

SANYO DIGITAL CAMERA만인의총 무덤.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만여명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SANYO DIGITAL CAMERA1964년에 세워진 ‘만인의총’ 비석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앞 기념 조형물

SANYO DIGITAL CAMERA만인의총 기념 비석

SANYO DIGITAL CAMERA전투가 벌어졌던 남원읍성(사적 298호).

만인의총, 사적 272호, 전북 남원시 향교동
이곳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을 합장한 무덤이다. 남원은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선조 30년(1597) 8월 오만 육천의 왜군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안에서는 정기원.이복남의 지휘 아래 민.관.군이 굳게 뭉쳐 성을 방어 하였다. 결국 성이 함락되어 거의 만명에 달하는 주민과 관.군이 죽음을 맞았다. 파괴 또한 극심하여 성안에는 겨우 민가 17가구만이 남았다. 난이 끝난 뛰에 순절한 이들을 한곳에 묻고 그들을 추무하는 사당을 지었다. 광해군이 이 사당을 충렬사라고 이름지었다. 근래에 무덤과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였다.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한 의로운 선조의 강직한 절개가 새삼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4. 위키백과, 2019년

김제 벽골제(사적 111호), 삼국시대 수리시설 유적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있는 벽골제(사적 111호)이다. 제천 의림지, 밀량 수산제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농업용 저수지로 금산사가 모악산에서 흘러 내려온 원평천이 동진강과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약 7 km 정도 떨어진 넓은 평야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비류왕 때(330)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 원성왕 때(790), 고려 현종과 인종 (1143)에 고쳐 쌓았으며, 조선 초 태종 때인 1415에 다시 쌓은 이후 무너져 사용하지 않고 있다.

현재 벽골제 유적지에는 약 3 km 정도의 제방과 수문 흔적 2곳이 남아 있다. 제방은 일제강점기에 농사에 필요한 수로를 만들때 고쳐 사용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 제방을 쌓은 이래 여러차례 수리를 하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 사용해 왔던 유서깊은 곳으로 당시의 높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 벽골제(사적 111호).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중 하나로 지금은 그 모습이 일부 바뀌기는 했지만 당시에 쌓은 토축의 일부가 잘 남아 있는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내문. 벽골제는 장생거가 있는 현위치 부근에서 남쪽 월승리 명승산까지 약 3.3 km에 이르는 큰 규모 제방을 쌓고 조성한 저수지였다. 장생거, 경장거를 비롯하여 5개의 수문이 있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제방. 흙으로 쌓은 토축으로 높이 3.3 ~ 4.3 m이며 상단폭은 10 m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절단하여 수로를 조성하면서 그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바깥쪽 제방을 쌓은 토축은 삼국시대에 조성한 것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5곳의 수문 중 남아 있는 수문 흔적인 장생거. 나머지 한곳 경장거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문은 길이 5.5 m 돌기둥을 4.2 간격으로 세우고 돌기둥 안쪽에 홈을파서 목제 둑판을 넣어 수위를 조절하는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수문 모형. 양쪽 제방 위에 올라 동시에 물레를 돌리면 수문이 열린다.

장생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의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한다. 그 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 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 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 1980년데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벽골제중수비 기록에 지방의 단면과 수문구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처럼 바라 보였다. … 또 양쪽 석주심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 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분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 13년(1415)이다. …”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제방 윗부분. 너비 10 m 정도이다. 일제강점기에 반으로 잘라 수로를 조성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원래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쪽. 넓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안쪽 물을 가두어 두었던 저수지. 조선 초 세종 때 (1420년) 홍수로 무너진 후 복구하지 않고 농토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북쪽 끝 부분. 서해로 흘러드는 원평천과 만나는 지점이다. 현재 사용하는 있는 수문이 보인다.

김제 벽골제 사적111호21-20150807
벽골제 중수비. 조선초 벽골제를 다시 쌓으면서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지금은 닳아서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벽골제 앞에 조성된 공원. 옛 수시시설 모형들을 설치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평야지대 논에서 사용되는 관개시설인 무자위이다. 염전에서는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공원 광장에 옮겨놓은  월촌입석.

월촌입석
입석은 마을의 입구에 세우져 재앙을 막아주는 수문신이자,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겨진 큰돌 문화재이다. 입석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남녀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임석에 감아둔 동아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 하여 다음 제사 때까지 1년 동안 손을 대지 않는다. 이 입석은 사각기둥형 자연석이며 높이는 210 cm, 폭 62 cm, 두께 40 cm이다.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매년 지평선축제 때 이곳 벽골제에서 입석줄다리기를 재현하고 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공원에서 볼 수 있는 ‘아리랑 문학비’

김제 벽골제, 사적 111호,
김제를 옛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렀다. 이는 벼의 골이라는 뜻으로 도향의 이름이다. 이러한 지명의 연유로 벽골제는 우리 고어로 벼골의 둑이 한자로써 벽골제라 표기된 것에 기한한 듯 하다. 국내 최고최대의 저수지인 벽골제는 금만평야를 비롯하여 정읍시, 부안군 등 1만 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제방의 길이는 3.3 km, 둑의 높이는 5.7 m, 상단폭 10 m, 하단폭 21 m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 관련문헌에 따르면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 고려 현종 (1010 ~ 1031년), 고려 인종 21년(1143), 조선 태종 15년(1415) 등 4차례에 걸쳐 개축하였으나 조선 세종 2년(1420) 홍수로 무너졌다. 그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였던 벽골제는 1963년 사적 111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기에 이르렀고, 1991년부터 벽골제개발사업이 착수되어 2만여평의 부지에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 단야각, 단야루, 테마연못, 되배미 등을 조성하였고, 수문은 5개 중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두 곳의 수문 석주가 남아 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정읍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과 만석보 옛터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와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만석보 옛터이다.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1894년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거한 후 백산으로 진출하였는데 전라감사가 보낸 관군과 이곳 황토현에서 대치하였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은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국내 및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적지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사당과 기념관, 기념물 등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읍 황토현전적(사적 295호).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황토현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고부읍치 북쪽 넓은 들판을 내려보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기념관과 사당 등이 전적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사당.

SANYO DIGITAL CAMERA동학농민운동 기념관

황토현 전적지, 사적 295호,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 곳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농민군은 1894년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응징했다. 그러나 사태 진정시키러 온 정부관리는 모든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리며 그들을 탄압했다. 이에 수만 명의 농민군은 고부 북쪽의 백산에 집결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한다는 기치 아래 번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농민군은 1894년 5월 11일 새벽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이곳은 동학 농민군이 남긴 정신과 함께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참뜻을 전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8년)

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었던 보가 있던 곳이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보를 쌓고 물세를 거두어 들였다. 당시 고부군수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만석보를 때려 부수고 조병갑을 응징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류쪽에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었는데 조병갑이 수세를 걷기 위해 이곳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쌓았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상류쪽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조감도.

SANYO DIGITAL CAMERA동진강 제방

SANYO DIGITAL CAMERA제방 바깥쪽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호남평야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

만석보터,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1893)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水稅)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에서 서쪽으로 4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봉준 고택(사적 293호)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