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역사시대

정읍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과 만석보 옛터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와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만석보 옛터이다.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1894년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거한 후 백산으로 진출하였는데 전라감사가 보낸 관군과 이곳 황토현에서 대치하였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은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국내 및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적지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사당과 기념관, 기념물 등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읍 황토현전적(사적 295호).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황토현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고부읍치 북쪽 넓은 들판을 내려보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기념관과 사당 등이 전적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사당.

SANYO DIGITAL CAMERA동학농민운동 기념관

황토현 전적지, 사적 295호,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 곳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농민군은 1894년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응징했다. 그러나 사태 진정시키러 온 정부관리는 모든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리며 그들을 탄압했다. 이에 수만 명의 농민군은 고부 북쪽의 백산에 집결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한다는 기치 아래 번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농민군은 1894년 5월 11일 새벽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이곳은 동학 농민군이 남긴 정신과 함께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참뜻을 전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8년)

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었던 보가 있던 곳이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보를 쌓고 물세를 거두어 들였다. 당시 고부군수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만석보를 때려 부수고 조병갑을 응징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류쪽에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었는데 조병갑이 수세를 걷기 위해 이곳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쌓았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상류쪽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조감도.

SANYO DIGITAL CAMERA동진강 제방

SANYO DIGITAL CAMERA제방 바깥쪽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호남평야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

만석보터,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1893)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水稅)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에서 서쪽으로 4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봉준 고택(사적 293호)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강진 다산초당과 정약용 유적(사적 107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적(사적 107호)이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유서깊은 곳으로 그가 이곳에서 초가를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다산초당’이라 부른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은 후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윤두서의 손자 윤단의 정자가 있던 곳으로 정약용의 외가 해남윤씨 집안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저술활동과 후학양성을 할 수 있었다.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를 여유당전서라 부르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술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머물렀던 다산초당은 무너져서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그 양쪽에 제자들과 손님이 머물렀던 동암과 서암이 있다. 유적지에는 그가 직접깎은 ‘정석(丁石)’이라 적힌 각석이, 차를 달여 마셨던 ‘청석’과 작은 샘물인 ‘약천’, 그가 잉어를 길렀다는 작은 연못 등이 있다. 천일각이라 적힌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가 태어나 살았던 여유당 고택 뒷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 경치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고려중기 백련결사운동의 중심 사찰이었던 백련사가 초당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는 백련사를 찾아 차를 마시며 교류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정약용 유적지를 대표하는 다산초당. 원래 초가건물이 있었던 건물터에 해방 이후 전형적인 목조건물로 다시 지었다. 향후 초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다산 정약용 유적지 입구에 있는 귤동마을.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입구. 이곳에서 숲길을 따라 300 m 정도 걸으면 다산초당을 찾을 수 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약 500 m 정도 떨어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을 오르는 숲길.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다산 초당. 원래 초가건물이 있던 곳에 새로지은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암. 윤종기 등 정약용을 따르던 18명의 제자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다산초당과 서암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암(東庵).  저술에 필요한 책을 보관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뒷편 바위에 새겨진 ‘정석’이라 적힌 각석. 유배생활동안 그가 직접 새겼다고 한다. 필체에서 단정하고 간결한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옆 작은 연못.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이 잘 구현된 연못이다.

연지석가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하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OLYMPUS DIGITAL CAMERA약천,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촉촉히 젖어 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했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앞 마당에 있는 청석. 그가 차를 끓여 마셨던 곳이라 한다.

옛부터 있던 돌을 부뚜막으로 삼아 청동의 화로에 약천의 물을 붓고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반석으로 저술로 침침해진 눈과 피로한 몸을 돌보던 곳.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있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 실학이 구상되던 도량이요 산실이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다산초당 근처 강진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천일각.

SANYO DIGITAL CAMERA천일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생가터가 있는 남양주 여유당 고택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고향과 가족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한 벗 혜장이 있었고 다산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서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 보자. 제자들은 스승으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자료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서각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천일각에서 백련사로 가는 약 1 km에 이르는 길. 울창한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백련사. 고려중기 불교개혁 백련결사가 일어났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정약용은 이곳을 자주 찾아 혜장선사와 차를 마시며 교류했다고 한다.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길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설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백련사 동백나무숲 입구.

SANYO DIGITAL CAMERA동백나무 숲길.

SANYO DIGITAL CAMERA울창한 동백나무숲.

SANYO DIGITAL CAMERA해남 윤선도 종택 녹우당.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일대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 불린다.  윤선도와 자화상으로 유명한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윤두서 가 살았던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해남윤씨 집안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대지주집안이었다. 다산초당에서 1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외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유배지를 강진으로 정했던 곳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의 형 정약전은 연고가 거의 없었던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크게 고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남양주 여유당 고택. 경치가 아름다운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정다산 유적, 사적 107호
강진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 정유재란 말 조.명연합군 수군이 주둔했던 곳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있는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114호)이다. 이곳은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 충무공이 이끌었던 조선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진을 치고 머물렀던 곳으로 사실상 조.명연합군의 해군본부였다. 현재는 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인 충무사와 그가 죽은 후 잠시 묻혔던 가묘터가 남아 있다. 묘당도는 고금도 끝에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의 일부분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진린이 세웠던 관왕묘가 있었다. 정유재란 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진린은 그의 유해를 이곳에 모시시고 장례를 치렀다. 이후 17세기부터 관왕묘에 이순신장군과 진린장군을 같이 모시고 제사를 올려왔다.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없어지고 제사가 중단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사당을 세우고 충무공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 고금도 동쪽끝에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고금도의 일부부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무공 가묘 유허,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서 전사후 관음포에 올려졌고 남해 충렬사에 잠시 묻혔다가 이곳을 거쳐 충남 아산으로 옮겨졌다. 조.명연합군 수군 본영이 있었던 것으로 명나라 수군을 이끌었던 진린이 주도하여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가묘 유허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을 임시로 안장하였던 터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고금도에서 수군본영을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고 전선을 건조.수리하는 등 군비를 재정비하여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다.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본영이었던 이곳에 80여일간 안장한 후 이듬해에 충남 아산으로 옮겼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가묘 유허 아래에 있는 재실로 보이는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앞 바다. 앞쪽에 작은 섬들이 막고 있어 파도가 거의 없어 파도를 피하기 좋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북쪽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으로 보이는 바다. 사방이 섬으로 둘러 싸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충무사 외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충무공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원래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으며, 그 앞쪽에 충무공과 진린을 모신 동.서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없어지고 지금은 해방 이후 다시 세운 충무공만을 모신 사당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무사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에 딸린 건물.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관왕묘비. 이곳에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석은 숙종 39년(1713)에 세운 것으로, 관왕묘의 창건 이후의 내용을 기록한 비로, 명나라 수장이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여기서 경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53 cm, 폭 93 cm, 두께 20 cm이다. 비각은 정.측면 1칸의 팔작집으로 원형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충무사 사당 아래 해안. 울창한 상록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114호,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묘당도 일원은 본래 진린 장군이 건립한 ‘관왕묘’였으며, 관우 장군을 사당에 모시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던 곳이다.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이곳 (월송대)에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1666년, 동무에 진린 장군을 모셨으며, 1683년에 서무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 1791년 정조가 관왕묘에 ‘타보묘’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1792년 동무에 명나라 부총관 등자룡 장군을 함께 모셨다. 일제강점시기(1940년대 초)에 유물이 훼손되고 제사가 중단되었으며, 사당이 황폐화 되었다. 1947년 11월 19일 사당에 이신신 장군만을 모시고 다시 제향하기 시작했다. 1953년 사당을 증건하고, 사당 명칭을 ‘충무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당 내에는 숙종 39년 건립한 관왕묘비가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명나라 진린 장군이 혈서로 애도문을 쓰고 명나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제천 의림지와 제림(명승 20호), 삼한시대에 쌓은 오래된 수리시설

충북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의림지와 제림(명승 20호)이다. 의림지(義林池)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에 축조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로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각종 문헌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 유서깊은 유적지이기도 하다. 충청도를 호서(湖西)지방이라 부르는 것도 의림 서쪽에 있다는 뜻이며, 제천의 옛 이름인 (奈堤, 큰제방)도 큰 제방있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때 크게 수리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다시 쌓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제림(堤林)은 의림지 제방 위에 조성된 숲을 말하며,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졌으며, 옛 그림에도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영호정, 경호루같은 누각과 바위들이 있어 역사적 의미를 같은 의림지와 함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의림지(명승 20호). 삼한시대에 쌓은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중 한곳으로 예로부터 지역의 명승지로 손꼽히던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천 의림지 제방이 시작되는 지점. 제방 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다양한 나무들을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의림지와 함께 제방 위에 조성된 숲도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 제방위에 조성된 숲.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제방 위 울창한 소나무 숲.

OLYMPUS DIGITAL CAMERA영호정(暎湖亭)은 의림지 남쪽 제방위에 있는 정자로 조선후기 순조 때 처음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새로 지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 제방 아래로 보이는 제천시.

OLYMPUS DIGITAL CAMERA제방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제방 중간에 세워진 의림지 표지석.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에서도 경치가 빼어난 작은 섬처럼 돌출된 곳.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는 의림치 경치를 감상하면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서 보이는 의림지 풍경.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 있는 정자인 경호루(鏡湖樓), 1948년에 지어진 정자로 영호정과 더불어 의림지를 찾는 대표적인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아름드리 노송사이에 서있는 정자 누각은 한폭의 그림과도 같다.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 서남쪽편 협곡을 막고 있는 수문.

OLYMPUS DIGITAL CAMERA수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계곡.

OLYMPUS DIGITAL CAMERA수문 안쪽으로는 뒷편 용두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하천이 보인다. 이 하천을 막아 저수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예로부터 둑을 쌓기에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문 부근에서 보이는 의림지 풍경.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 서쪽편에는 비교적 넓은 광장이 의림지를 바라보면서 조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 북쪽에서 바라본 풍경. 가운데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의림지 동쪽편.  2007년에 세워진 우륵정이란 정자가 있다. 근처에 우륵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우륵샘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륵정에서 보이는 의림지 풍경

제천 의림지와 제림, 명승 20호
제천 의림지(義林池)는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로 호반의 둘레는 1.8 km이고 수심은 8 m이다. 제방을 따라 소나무,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제림(堤林)이라 불린다. 물과 숲이 주변의 영호정 및 경호루 등과 함께 어루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호서(湖西)라는 충청도의 다른 이름은 의림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내제(奈堤, 큰제방)라는 제천의 옛 이름도 의림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림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쌓았다늕 설과 조선시대 현감인 박의림이 쌓았다는 설이 전해져 왔으며, 지명분석에 근거한 삼한시대 축조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림제라고 하고 정인지에 의해 두차례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항일운동기간인 1914~1918년까지 대대적으로 수축하였으며, 1972년의 장마에 둑이 무너진 것을 이듬해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설로는 거북바위를 돌려 놓아 부자집이 몰락하였다는 이야기와 탁발승을 홀대하여 부자집이 몰락하고 그 자리에 저수지가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그리고 의림지에 있는 큰 이무기가 가끔 나와사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일이 있었는데 어씨 오형제가 이무기를 잡은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놀 수 있게 되었다는 어장사참사가가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제천시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제천시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울진 평해황씨 시조단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평해황씨시조단이다. 관동팔경 중 한곳인 울진 월송정 소나무숲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평해황씨 시조인 황락의 제단비가 세워져 있으며, 주위에는 재실로 보여는 건물이 여러동 있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오래된 유적지는 아니고 평해황씨 문중에서 시조를 모시는 공간이다.

우리나라 황씨의 시조는 후한의 학사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평해지역으로 흘러들어 신라에 귀화한 황락이라는 인물이다. 실제 문헌 등으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황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제단비는 조선후기 숙종대에 조성되었으며, 시조단으로 문중에서 신성시 여겨지고 있어 출입을 할 수 없다. 실제 평해황씨 시조는 고려 때 금오위대장군을 역임한 황온인이라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울진 평해황씨 시조단. 조선후기 숙종 때 황씨 시조 황락를 기리는 제단이 세워진 곳이다. 문중 시조를 모시는 곳으로 성역화되어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이곳은 관동팔경 중 한곳인 월송정을 들어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이 울창한 송림을 자랑하고 있다. 앞쪽에 평해중학교 등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 수군만호가 주둔했던 월송진 관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시조단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연못과 울창한 소나무숲 등으로 깨끗하게 정원이 꾸며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재실로 보이는 건물.

SANYO DIGITAL CAMERA관리인이 머무는 건물.

<출처>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7년
  2. 위키백과,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