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비석/금석문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보물 1301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부속암자인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 석장비(보물 1301호)이다. 홍제암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선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명대사가 머물다 입적한 유서깊은 곳이다. 사명대사탑은 홍제암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승탑 양식을 계승한 석종양식을 하고 있다.

석장비는 사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홍제암 옆 공간에 여러 승탑, 탑비들과 함께 있다.비석은 광해군 때 세워졌는데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군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은 문장이 빼어나며 사명대사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렸던 것을 수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합천 해인사 홍제암 옆 마당에 세워져 있는 사명대사 석장비.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당나라 전통 비석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4조각으로 깨졌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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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몸. 허균이 비문을 지었는데 문장이 뛰어나며 행적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용과 구름을 입체감있게 조각해 놓은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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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사명대사 석장비와 함께 있는 승탑과 비석들.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 10-20180205사명대사 사리를 모신 승탑은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명대사가 머물다 입적했던 홍제암. 건물은 그가 죽은 후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보물 1301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과 사리를 봉안한 부도이다. 해인사의 부속암자인 홍제암 경내에 있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1608년에 선조의 하사로 창건하여 말년까지 수도하다 입적한 곳이다. 부도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1610년에 만들어졌고, 비석은 1612년에 건립되었다가 1943년에 일본인이 깨트린 것을 1958년에 복원한 것이다. 부도는 고려의 승탑 형식을 계승하여 3단의 연화대좌와 종모양의 탑신, 둔중한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안내문, 합천 해인사, 2017년)

<출처>

  1. 안내문, 합천 해인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보물 128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반야사지 원경왕사비(보물 128호)이다. 고려초승려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인근 반야사 절터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옯겼다. 비석은 거북받침돌, 비몸,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얇고 조각수법도 약간 떨어지는 등 고려중기 비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원경왕사는 고려초에 활동했던 승려로 대각국사와 함께 송나라를 다녀왔으며, 예종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했는데 ‘원경(元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OLYMPUS DIGITAL CAMERA해인사 입구에 있는 원경왕사비. 인근 반야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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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몸과 머릿돌. 비몸을 얇게 만들었으며, 머릿돌인 용과 구름을 조각했던 이전의 탑비와는 달리 단순한 지붕모양을 하고 있다. 고려중기 비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씨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 단순하면서 형식적인 면을 보인다.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거북받임돌.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고려시대의 고승 원경왕사(1045~1114년)를 기리고자 인종 3년(1125)에 세운 비다.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던 것을 1961년 해인사 경내로 옮겨왔다. 거북받침돌, 비몸, 지봉돌을 갖추었다고,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1104)에 승통이 되었다. 예종 때 왕사가 된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안내문, 해인사, 2017년)

<출처>

  1. 안내문, 합천 해인사, 2017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인양사 조성비(보물 227호), 인근 지역 사찰 조성 내력을 기록한 통일신라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에 있는 인양사 조성비(보물 227호)이다. 이 비석은 통일신라 때 인양사를 비롯하여 부근의 여러 사찰에서 일어난 범종, 탑, 금당 등의 불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인양종을 만든때부터 비석을 세운 때까지 약 40여 년동안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형태는 바닥돌과 비몸,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의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인근 사찰 조성에 큰 역할을 했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군 소재지 부근 농경지 한 가운데에 남아 있는 인양사 조성비(보물 227호)

SANYO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비석 앞면. 통일신라 때 주변지역 사찰 조성 내력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은 뒷면에는 특이하게 스님의 모습을 새겨놓고 있다. 주변 사찰 조성에 큰 역할을 했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비석에 새겨진 스님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비몸에 비해 크게 만들어 어색하게 보이는데 원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 보물 227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동
9세기 초 통일신라시대의 절의 건립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비석이다. 탑에 새겨진 글에는 인양사 등 여러 사찰의 범종, 탑, 불상, 금당, 요사 등의 조성연대와 이에 소요되었던 양식 등이 담겨 있다. 인양사 종을 주조한 771년에서 이 비석이 세워진 810년까지의 40년 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 뒷면에는 승려의 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 비석에 담긴 일과 관련된 당시의 고승을 기려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된 상은 어린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인데, 인체를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비석 위에 이례적으로 지붕과 같은 머릿돌이 얹혀 있는데, 크기가 비신에 비해 지나치게 커 원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비의 높이는 150 cm, 폭은 45 cm이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4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척화비, 구한말 서양세력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만옥정공원 내에 있는 척화비(斥和碑)이다. 구한말 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서양세력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이다. 창녕읍내 다른 곳에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 비석을 세운지 백년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전국에 남아 있는 척화비가 많지 않아 역사적 의미는 큰 비석이다. 척화비에는 ”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져 있는 창녕 척화비. 당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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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에 새겨진 글자.

SANYO DIGITAL CAMERA창녕 척화비가 있는 만옥정공원에는 신라 진흥왕이 창녕지역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인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가 있다.

창녕 척화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1866년(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 8) 신미양요에서 미군을 물리친 정부가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내용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원래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이 광복 후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비화가야 점령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이다. 신라가 창녕지역을 편입한 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은 자연석 앞면에 비문을 새겨두고 있다. 앞부분은 닳아서 잃을 수 없지만 뒷부분은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순수비처럼 이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통치이념 등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반부에는 수행하던 신하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문 내용중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단양 적성비와 함께 척경비로 일컫고 있으나, 비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의 순수비와 동일한 성격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척경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기 1년 전으로 대가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도심 만옥정공원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영토에 편입시킨후 이 지역을 다녀간 후 기념으로 남긴 비석이다. 원래 화왕산성 아래 산기슭에 있던 비석을 발견한 후 이곳으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은 높이 1.8 m 정도의 큰 돌에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글자를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SANYO DIGITAL CAMERA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 진흥왕을 수행했던 인물들의 관직과 이름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등을 밝혀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 창녕 만옥정공원. 화왕산 등산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심공원으로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때 만든 삼층석탑, 창녕객사, 창녕 척화비 등 문화재가 공원내에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1일 입”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이 없고 인명과 관등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 비석 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준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 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 부분은 관련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 줄은 3자이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8 cm, 폭 175 cm, 두께 약 30 cm이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 발견하였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