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비석/금석문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경주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이다. 고려중기 명종 때(1182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유교적 사회체제를 보여주는 정려비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유물이다. 당시 동경유수가 손시양의 효행을 국왕께 보고하여 마을 정문에 정려비를 세우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비석은 글자가 새겨진 비몸만 있고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다. 사각기둥형태의 화강석 돌기둥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고 크게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손시양의 효행내용과 비석을 세운 경위를 글자로 새겨놓았다. 비문은 당시 동경유수였던 채정이 지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효자리(孝子里)’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앞면>

경주황남리효자손시양정려비
<효행 내력과 비를 세운 경위를 적은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세워진 황남동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골목길>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 (孝子孫時揚族間磚, 보물), 경북 경주시 황남동 240-3번지
정려비란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 명종 12년 (1182)에 세워진 정려비이다. 화강암을 네모기둥 모양으로 치석한 것인데, 비몸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은 없다.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 쓰고, 뒷면에는 5행 130자로 손시양(孫時揚)의 효행 내용과 비를 세운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손시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돌아 가시자 3년씩 초막을 짓고 묘소를 지킴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사실을 동경유수(東京留守)가 국가에 보고하자, 왕이 그 효행을 기쁘게 여겨 정문(雄門)을 만들어 주고 포상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 달리 네모기둥 모양으로, 고려시대에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백률사 이차돈 순교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는 이차돈 순교비(異次頓殉敎碑)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 공인에 큰 역할을 한 이차돈을 기리는 비석으로 통일신라 헌덕왕 때(817년) 세워졌다. 비석은 높이 106 cm 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육면 기둥형태이다. 비석위에 지붕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가운데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자를 새겼다. 글자는 마모되어 절반 정도만 판독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글자를 목판에 새긴 법첩이 전래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
<이차돈 순교비>

OLYMPUS DIGITAL CAMERA
<이차돈 순교장면을 묘사한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
<그림에 대한 설명>

이때에 이르러 왕[법흥왕]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러쿵저러쿵하며 불평을 늘어놓았으므로 왕이 난감해하였다. 〔왕의〕 가까운 신하[近臣]註 016인 이차돈(異次頓) 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아뢰기를, “바라건대 소신(小臣)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인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만약 도(道)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註 018 왕이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물으니 모두 다 말하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박박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떳떳한 도리[常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에 〔승려들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중죄(重罪)를 받더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홀로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특별한 사람[非常之人]이 있은 연후에야 특별한 일[非常之事]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아마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다.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을 다 따를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관리[下吏]가 장차 〔이차돈의〕 목을 베려고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장(刑場)에 나아가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을 베자, 피가 〔목이〕 잘린 곳에서 솟구쳤는데 〔피의〕 색깔이 우윳빛처럼 희었다. 여러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에서 행하는 일[佛事]에 대해 헐뜯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비석에는 3cm 크기로 글자를 새겼는데 대부분 마모되어 절반 정도만 판독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내용인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
<글자가 새겨진 부분>

판독이 가능한 일부 글자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글자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글자 중 절반 정도는 판독이 가능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순교비가 있었던 경주 백률사>

이차돈 순교비(異次頓殉敎碑),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통일신라 817년
370년대 불교를 공인한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이 되서야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공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차돈입니다. <삼국유사> 원종홍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 조(條)에는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하던 22살 난 박염촉(朴脈觸, 506-527)의 순교가 묘사되어 있는데, 박염촉이 바로 이차돈입니다. 그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고, 그 머리는 금강산(소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헌덕왕 9년(817)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비석이 바로 백률사에 있던 이차돈 순교비입니다. 그런데 왜 백률사에 이 비석을 세웠을까요? 다시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신라 사람들은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절을 세우고 자추사(刺楸寺)라 했다고 합니다.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는 곧 밤(栗)이니, 자추사가 곧 백률사(柏栗寺)를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즉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운 것이지요. 비석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였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3cm 크기의 글자를 새겼습니다. 글자는 마멸이 심하여 아쉽게도 판독이 쉽지 않지만, 용케도 이 내용을 목판에 새긴 <흥인군신각김생서>, <원화첩>이 남아 있어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이다.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백제와의 경쟁을 이기고 한강유역을 장악한 후 북한산을 방문하면서 그 내용을 새겨 놓은 것으로 황초령, 마운령, 창녕에 세운 비석과 함께 4개의 순수비(巡狩碑) 중 하나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활약과 강력한 왕권, 당시의 관직제도와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북한산 비봉에 있었는데 현재는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창녕 척경비가 건립된 561년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569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보3호01-20200212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삼국시대(신라) 진흥왕 16년(555), 서울 북한산 비봉>

북한산에 순행하다 ( 555년 10월(음) )
〔16년(555)〕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히고 경계를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비는 직사각형의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들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 m, 너비 69 cm이다.

국보3호02-20200212
<옆쪽에서 본 모습>

국보3호03-20200212
<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뒤에서 본 모습>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후기 순조 때(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여 그 내용을 판독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비에는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의 글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운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다.

국보3호07-20200212<비에 새겨진 글씨, 윗부분>

국보3호06-20200212<비에 새겨진 글씨, 아랫부분>

국보3호05-20200212
<비에 적혀 있는 글씨>

국보3호04-20200212
<비석 옆면에는 추사 김정희가 이 비석을 조사했다는 내용이 그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던 북한산 비봉>

OLYMPUS DIGITAL CAMERA<2014년 전시 모습>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순수의 목적, 순수에 참여한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북한산 비봉에 서 있었으나 현재는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여기에 전시되고 있다. 비가 있던 원래 자리에는 원형을 본뜬 모형이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비봉에 올라 조사한 결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후에도 김정희는 다시 이 비를 찾아 조사하였는데 옆면에 그런 사실이 그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시안 천복사 중수비

시안 천복사(薦福寺)는 당나라 즉천무후가 당고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제 저택이 있던 곳에 처음 세워졌다. 당나라 화엄종 중심 사찰이었으며 대자은사와 함께 장안(長安)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 번창하였다. 북송 이후 천복사는 소안탑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는데 그 내력과 당시 가람배치 등을 기록한 중수비가 사찰 곳곳에 남아 있다. 사찰 입구 옛 천왕전터 앞에 있는 북송 때 세운 중수비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소안탑 뒷편 후문에는 1811년에 세워진 것이 있다. 또한 지금은 비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글씨가 남아 있는 <다보탑감응비>가 천복사에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천복사 전경>

천복사 남산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불전이자 출입문인 천왕문 앞에는 천복사를 대표하는 2기의 중수비가 세워져 있다. 그 중  <대천복사중수탑기>비는 북송 때 (1116년) 세워진 것으로 소안탑을 중수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하였다. 현존하는 천복사 중수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문에는 당나라 때 천복사에 소안탑을 세웠다는 것과 북송 때 신도들의 시주로 수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옆에는 <칙사천복선사중수기>비가 세워져 있다. 명나라 때(1472년) 세워졌다. 앞면에는 천복사를 중건한 내용을, 뒷면에 중건을 위해 시주한 관리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복사 천왕전터 앞에 세워져 있는 2기의 중수비>

OLYMPUS DIGITAL CAMERA
<대천복사중수탑기비 (<大薦福寺重修塔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restoration of the Pagoda of the Grand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대천복사중수탑기비 탁본, 당대 천복사 중수비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수기비 (<勅賜薦福禪寺重修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Imperial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수기비 뒷면>

천복사 주불전인 대웅보전 앞에는 4기의 비석들을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명.청대에 천복사를 중건하면서 세웠던 비석들이다. <칙사천복선사중건기>비, <예부차부.천복전당도> 비, <중수천복사사비기> 비,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보전 앞 마당에 세워진 4기의 비석>

<칙사천복선사중건기> 비는 명나라 때(1458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비문에는 천복사 중건과 소안탑 수리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뒷면에는 천복사 중건과 소안탑 수리에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예부차부.천복전당도> 비는 명나라 때 (1449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예부로부터 받은 공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천복사 중건과 관련된 내용이다. 뒷면에는 당시 천복사 가람배치를 그림으로 새겨 놓고 있다. 윗부분에 당시 소안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건기비 (<勅賜薦福禪寺重建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Imperial Jia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칙사천복선사중건기비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
<예부차부.천복전당도비 (<禮部箚付.薦福殿堂圖>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n Instructional letter from the Ministry of RItes & a Drawing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예부차부.천복전당도비 뒷면>

<중수천복사사비기> 비는 청나라 때 (1684년) 세워진 중수비이다. 비문에는 심오법사(心奧法師)와 자곡선사(紫谷禪師)가 천복사를 중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는 청나라 때(1692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중수기는 천복사 창건과 중수 내력을 기록하고 있으며 윗부분에 천복사 가람배치와 영역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사비기> 비 (<重修薦福寺碑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사비기비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 (<重修薦福寺碑記.薦福殿堂圖.薦福地粮記> 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novation of the Jianfu Temple & a Drawing of the Jianfu Temple & a Record of the Territory and Properties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천복전당도.천복지량기비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청대 비석 조각>

소안탑 앞에는 청대에 소안탑을 수리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2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보수천복사보탑기>비는 청나라 때(1683년) 세워진 비석이다. 청나라 때 소안탑을 수리한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다. <천복사래원> 비는 청나라 때(1734년) 세워진 비석이다. 비문에는 청나라 때(1677년) 천복사를 중건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소안탑 앞에 세워진 2기의 비석>

OLYMPUS DIGITAL CAMERA
<보수천복사보탑기비(<补修薦福寺寶塔記>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pairs of the Pagoda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천복사래원비 (薦福寺來源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the Origin of the Jiafu Temple)>

소안탑 뒷편에는 청나라 말에 천복사(1811년) 를 수리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해 놓은 중수비와 명나라 때 지장전을 중수하면서 세워놓은 비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복사 후문에 세워져 있는 2기의 비석>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지장왕전비(重修薦福寺地藏王殿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novation of the Ksitigarbha Hall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지장왕전비>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비 (重修薦福寺碑記碑, A Stone Stele inscribed with a record of the repair of the Jianfu Temple.)>

OLYMPUS DIGITAL CAMERA
<중수천복사비기비>

당나라 명필 안진경(顏眞卿, 709 ~ 785년)의 대표작으로 서예 교본으로 사용되었던 다보탑감응비(多寶塔感應碑, Stele of Abundant Trearsure Pagoda)이다.  천복사(薦福寺)에 세워졌던 것으로 북송 때 비림이 조성되면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
<다보탑감응비>

<출처>

  1. 안내문, 시안 천복사,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시안(Xi'an) 비림박물관] 가성호조비, 공자께 시호를 올린 사실을 알리는 비석

시안 비림박물관에 있는 가성호조비(加聖號詔碑, Stele of an Imperial Edict)이다. 원나라 성종 때(1307년) 공자께 “대성지성문성왕(大成至聖文宣王)”란 시호를 올린 이후 이를 전국적으로 공포하는 칙령 성격의 비석으로 1313년에 세워졌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릿돌을 올려놓은 전통적인 당나라 비석 양식을 따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가성호조비(加聖號詔碑), 원 1313년, 조세연 서예 발문>

OLYMPUS DIGITAL CAMERA<머릿돌>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
<뒷면>

<출처>

  1. 안내문, 시안 비림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