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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가야시대 지방세력 무덤들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에 있는 복천동 고분군(사적)이다. 동래읍성 북문 안쪽 구릉에 위치하고 가야시대 무덤들이다. 1969년 주택공사 중 우연히 무덤이 확인되어 여러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 땅속에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 땅속에 시신을 바로 묻는 널무덤 등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형식의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토기들, 철제갑옷과 투구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구한말까지 부산지역의 중심지였던 동래지역이 고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유적지 뒷편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복천박물관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1-20211125<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3-20211125<복천동 고분군(아래쪽)>

무덤들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구름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가며 만들어졌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8차에 걸쳐서 발굴,조사되었는데 191기의 무덤과 토기, 철기 등 12,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복천동 고분군 무덤 배치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9-20211125<복천동 고분군 입구>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0-20211125<무덤들이 있는 능선으로 들어가는 길>

복척동 고분군 능선 중앙에 위치한 전시관을 기준으로 위쪽에 위치한 무덤들이 먼저 발굴, 조사되었다. 1969년 처음 발견된 1호 무덤을 비롯하여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보물)이 출토된 7호분, 금동관(보물)이 출토된 10, 11호분, 청동칠두령이 출토된 21, 22호분, 많은 양의 철제갑옷(보물)이 출토된 38호 분 등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1-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4-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1-20211125<전시관 위쪽 능선에 있는 무덤들(1~40호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1-20211125<금동관,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2-20211125<금동관,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1-20211125<말띠드리개, 5세기, 36호,15호, 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3-20211125<신발모양토기, 5세기, 3호, 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4호분>

이 금동관은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에 비해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出’자 모양을 하고 있는 신라 금관과는 달리 나뭇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판재를 잘라서 모양을 만들고 정으로 두드려 문양을 만드는 단순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5-20200212
<금동관, 보물, 10.11호 무덤,>

11호 무덤은 토기와 장식대도 등에서 신라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금동관은 신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와 가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가 모두 있다. 또한 당시 부산 지역은 대체적으로 5세기 이후 신라의 영향이 크게 미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8-20211125<고리자루 칼, 5세기 11호 무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4세기부터 대형무덤을 중심으로 말갖춤새의 모든 종류가 출토되고 있다.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신라의 영향으로 장식적인 금동제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9-20211125<가야 무사, 출토유물 형태로 복원한 모습>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6-20211125<투구,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7-20211125<목가리개,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2-20211125<갑옷, 5세기 10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9-20211125<팔뚝가리개, 5세기, 1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2-20211125<말안장, 5세기, 10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3-20211125<발걸이, 5세기, 10호, 22호,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4-20211125 <재갈, 5세기, 10호, 69호, 111호 무덤>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는 1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가야시대 토기로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없어 보전상태가 양호하다. 그릇받침 가운데에는 거북모양 토우 한마리가 붙어 있는데 삼국시대 토기 중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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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 보물, 김해박물관 소장>

복천동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21.22호분은 돌덧널무덤으로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의 수량이 다른 무덤에 비해 상당히 많다. 청동제 칠두령(보물)을 비롯하여 고리자루큰칼, 철모, 목가리개, 말갖춤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5세기 전반 부산 동래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9-20211125<21호, 22호 무덤 내부(모형)>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6-20200212<청동 칠두령, 보물, 5세기, 22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5-20211125<투구,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8-20211125<목가리개,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0-20211125<허리가리개, 5세기, 21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3-20211125<화살통, 22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3-20211125<복숭아모양 토기, 22호, 134호 무덤>

복천동 21.22호분
복천동 고분 구릉의 남쪽 정상부에 위치하는 21.22호분은 딸린덧널이 있는 돌덧널무덤으로, 복천동고분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규모나 부장품의 양이 다른 분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으뜸덧널은 길이 680cm, 너비 640cm, 깊이 290cm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475x160x160cm 가량의 석곽을 쌓아 4매의 뚜껑돌로 덮고 밀폐한 구조이다. 무덤구덩이와 석곽 사이를 흙과 활석으로 채워 보강해 나가면서 네 벽을 동시에 쌓아 올렸고, 바닥에 조그마한 깬돌을 깔고 가운데 부분에 나무로 만든 덧널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이 있었던 자리에는 20매의 대형 덩이쇠와 함께 3점의 고리자루큰칼, 목걸이, 귀걸이, 청동제 칠두령과 토기, 철모, 곡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남쪽에서는 굽다리접시, 항아리받침대, 복숭아모양토기 등 각종 토기류, 호록금구, 철촉군, 마구류, 목가리개, 전복, 명주개량조개 등이, 북쪽에서는 각종 토기류와 함께 철촉군, 도끼,낫, 보습 등의 농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 주인공 발치 아래에서 순장된 3명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에서 약 50cm 가량 북쪽에 만들어졌으며, 길이 630cm, 폭 420cm, 깊이 270cm 가량의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나무로 만든 곽을 설치한 구조이다. 북쪽에서는 대형의 발형 그릇받침과 밑이 둥근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토기류가 남쪽에서는 낫, 창, 손칼 등 철기류, 동쪽에서는 철제 투구와 목가리개, 허리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복천동 21.22호분은 다량으로 출토된 부장풍과 그 성격으로 볼 때, 5세기 전반 무렵 동래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무덤이다. (안내문, 복천박물관, 2021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5-20211125<귀때토기, 5세기, 34호 무덤>

38호 무덤은 복천동고분군 중 최초의 딸린덧널이 있는 무덤이자 바닥을 갖추고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 무덤이다. 철로 만든 판갑옷, 비늘갑옷, 투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철제 갑옷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유물로 볼 때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전환기 무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68-20211125<38호 무덤 내부(모형)>

부산 복천동 38호분 철제갑옷은 가야 초기인 4세기에 만들어진 철제 갑옷이다. 투구, 목가리개, 갑옷으로 구성되어 있다. 갑옷을 구성하고 있는 철판들을 두드려 얇게 만들었으며 철판들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였다. 철제갑옷 구성품이 온전이 남아 있으며 철제품임에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1-20211125<복천동 38호분 출토 철제갑옷, 보물>

철제갑옷 일괄은 복천동고분군 제5차 발굴조사(1993~1995년)시 복천동 38호분의 으뜸덧널에서 출토되었다. 판갑옷은 세로로 긴 철판을 가죽끈으로 연결하였고, 목가리개 역시 긴 철판을 연결한 형태이며 가죽끈 흔적으로 보아 판갑옷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투구는 ‘S’자형으로 긴 철판 20매를 엮어 만들었으며 그 위에 작은 복발을 얹었다. 아랫부분에는 각각 2매의 철판을 엮어 볼가리개를 만들었다. 갑옷의 몸통 앞쪽에는 보수를 위해 작은 철판을 덧댄 흔적이 있어 판갑옷이 실전용 갑옷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복천동 38호 갑옷은 일괄로 확인되어 삼국시대 갑옷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기준이 된다. 또한 철제 방어구의 가장 빠른 사례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판갑 중 가장 가깝게 복원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야의 뛰어난 금속제련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복천박물관, 2021년)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80-20211125<통형동기, 5세기, 38호, 60호 무덤>

복천동 38호분
복천동 38호분은 고분의 남쪽 구릉에 위치하는 부곽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으로 복천동고분군에서 묘광의 길이가 가장 길다. 봉분의 규모는 자세하지 않으나 토층상태로 보아 덧널 위에 점토와 모래, 파낸 흙을 얇게 깔아 층층이 쌓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으뜸덧널은 길이 750cm, 너비 150cm 정도 크기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두께 10cm 가량의 나무판 수십매를 사용하여 535x250cm의 목곽을 만든 구조이다. 또 긴 벽을 따라 너비가 25cm 가량 되는 사각기둥을 세워 목곽을 튼튼하게 보강하였다. 곽과 구덩이 사이의 공간은 모래가 섞인 흙과 점토를 번갈아 가면서 채웠다. 무덤 바닥에는 점년에 크고 작은 깬돌을 깔고 길이방향으로 큰 돌을 놓아 단면 형태가 凹자형이다. 돌을 놓은 가운데 부분에는 멍석을 깔고 400점 가량의 화살촉을 나란히 엮어 5열로 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북쪽 모서리에 돌이 깔리지 않은 공간에는 순장자가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천동 38호분은 복천동고분군 최초의 딸린덧널무덤이자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바닥시설을 갖추고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 무덤이다. 또 가죽이나 나무가 아니 철로 만든 판갑옷, 비늘갑옷, 투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철제 방어용 무구를 갖추고 있다. 뿌리가 없는 화살촉과 함께 단면 삼각형의 화살촉이, 단면 마름모꼴의 짧은 창과 함께 고사리장식이 달린 긴 창 등, 이 고분에는 구식무기와 신식 무기가 함께 부장되었다. 즉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를 부장하고 있는 것이다. 복천동 38호분은 무덤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과거의 요소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등장하는 전환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부산지역의 고대사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안내문, 복천동박물관, 2021년)

무덤들이 있는 능선 중앙 53, 54호분 무덤 자리에는 전시관을 설치하여 무덤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전시관 아래는 43~51호 무덤이 확인되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2-20211125<무덤 내부를 볼 수 있는 전시관>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4-20211125<특이한 모양의 항아리 받침대, 5세기, 53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77-20211125<등잔모양토기,5세기, 53호 무덤>

능선 아래쪽은 대부분 1990년대 이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총 28기의 묘가 추가 확인되었다. 정상부에 있는 무덤들은 부곽이 대형묘가, 옆쪽으로는작은 규모의 무덤들이 배치되어 있다. 무덤이 주요 지점에는 화양목을 심어 그 위치를 표시해 놓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8-20211125<전시관 아래 43 ~ 51호 무덤 무덤이 확인된 자리>

아래쪽으로 73호, 69호, 71호, 78호 무덤 등이 표시되어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7-20211125<아래쪽에 있는 무덤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42-20211125<아래쪽에 있는 무덤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8-20211125<능선 아래 탐방로(동쪽)>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21-20211125<아래쪽 끝부분, 83호, 84호 무덤이 확인된 자리>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7-20211125<56호, 57호, 64호, 65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2-20211125<능선 아래 탐방로(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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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57호B>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4-20211125<투구, 5세기, 93호 무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사적)_53-20211125<판갑, 5세기, 112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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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삼국, 부산 복천동 164호분>

복천동 고분군은 옛 동래읍의 주산인 마안선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동래부 읍치가 있던곳으로 동래읍성이 고분군을 둘러싸고 있다. 고대 이래로 지역의 중심지였으며 부산항에서 울산을 거쳐 경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는 거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5-20211125<능선 뒷편으로 보이는 동래읍성>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6-20211125<동래읍성 북문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04-20211125<동래읍성 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 고분군과 동래부 읍치>

1996년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이 개관되어 이곳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사적) 16-20211125<복천박물관>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옛 동래읍의 주산인 마안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낮은 구릉 위에 있다. 6.25 전쟁 이후 복천동 고분군이 위치한 구릉에는 판잣집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는데 1969년 주택 개량공사 중 우연히 무덤이 확인되어 긴급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수차례의 수습 및 시굴조사와 8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2세기 전반부터 7세기 초에 해당하는 200여 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구릉의 정상부에는 주로 4~5세기에 속하는 딸린덧널을 갖춘 대형의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 10,000여 점에 이르며 철제 유물이 많다. 특히, 단일 유적으로는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의 철제 갑옷이 출토되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잘 보여준다. 주요 유물로는 복천동 7호분 출토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보물), 10.11호분 출토 금동관(보물), 21.22호분 출토 청동칠두령(보물), 38호분 출토 철제갑옷 일괄(보물), 10.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보물) 등이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안내문, 부산 복천박물관, 2021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

경주 신무왕릉, 신라 45대 신무왕

경북 경주시 동방동에 있는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 김우징)의 능이다. 신무왕은 원성왕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무덤이 신무왕릉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신무왕릉(사적)>

신무왕이 즉위하다 ( 839년 윤01월(음) )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우징(祐徵)으로,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사촌 동생이다. 예징(禮徵) 등이 왕궁 안을 깨끗이 한 후, 예를 갖추어 그를 맞이해 즉위케 하였다. 조부 이찬(伊湌) 예영(禮英)을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죽은 아버지를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眞矯夫人)을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추존하였다. 아들 경응(慶膺)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궁복(弓福)을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하고 식읍[食實封] 2,000호를 주었다. 이홍(利弘)이 두려워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산속 숲으로 도망갔으나, 왕이 기병[騎士]을 보내 쫓아가 잡아 죽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신무왕이 죽다 ( 839년 07월23일(음) )
〔원년(839)〕 왕이 큰 병으로 드러누웠다. 〔왕의〕 꿈에 이홍(利弘)이 화살을 쏘아 등에 맞았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등에 종기[瘡]가 났다. 이달 23일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봉분의 크기는 높이 3m, 지름 16m이며,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다. 능은 낭산 사천왕사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경주 신무왕릉, 사적
이 능은 신라 제45대 신무왕(839 재위)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무왕의 이름은 우징(祐徵)이고,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인 상대등 김균정(金均貞)의 아들이다. 흥덕왕(興德王) 사후에 왕위 쟁탈전에서 아버지를 도왔으나 패하여 청해진으로 도망하였다가 장보고(張保皐)의 군사를 빌려 민애왕(閔哀王)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왕경의 동남쪽인 동방동에 있는데 능이 있는 구릉 동남쪽 산의 이름이 형제산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효소왕릉, 신라 32대 효소왕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년)의 능이다.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20년 정도 재위했으나 대부분 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력을 확충했으며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제도를 받아들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황복사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어린나이 죽었으며 동생인 성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효소왕릉(사적)>

효소왕이 왕위에 오르다 ( 692년 07월(음) )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홍(洪)을〕 공(恭)이라고도 적는다.으로 신문왕(神文王)의 태자(太子)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신목왕후(神穆王后)로서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딸이다. 당(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사신을 보내 조문(弔問)·제사(祭祀)하고, 이어 왕을 신라왕(新羅王)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으로 책봉하였다.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를 고쳐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하였는데, 이(理)란 글자가 〔왕의〕 이름자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효소왕이 죽다 ( 702년 07월(음) )
11년(702)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봉분은 높이 4.3 m, 지름 10.3 m의 원형 봉토무덤이다.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았으나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성덕왕릉과는 달리 문인석, 사자장 같은 석물을 두지 않고 있으며 무덤 앞에 작은 혼유석만 있다. 봉분의 규모는 크지 않으며 특별한 장식이 없는 등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이기 이전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효소왕릉 봉분>

OLYMPUS DIGITAL CAMERA<성덕왕릉 거북받침돌 뒷편으로 보이는 효소왕릉>

OLYMPUS DIGITAL CAMERA<효소왕릉 앞 들판>

경주 효소왕릉, 사적,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김이공)이 모셔진 곳이다. 토함산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 서쪽에 있다. 능은 밑둘레 57 m, 지름 15.5 m, 높이 4.3 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인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몇 개만이 드러나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쪽 가까운 곳에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이 있다. 왕은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 등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성덕왕릉, 신라 33대 성덕왕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의 능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36년 동안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중국 선현들의 초상화를 태학에 두었다. 당의 균전제를 본떠 자영농에서 정전을 지븍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당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가 중단하기도했으며. 대동강 이남을 통일신라의 영토로 확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성덕왕릉(사적)>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다 ( 702년 07월(음) )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고쳤다 『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하고 이틀간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 조문·위로하고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형의 장군(將軍)·도독(都督) 칭호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성덕왕이 죽다 ( 737년 (음) )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밑둘레가 46 m, 높이 5 m로 조선 왕릉 봉분규모와 비슷한데 이는 신라가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정형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석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로 세워 받치고 있다. 둘레석 받침돌 사이에는 화강석을 입체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십이지신상이 세워져 있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을 둘러세웠다. 무덤 주위에는 사자상과 문인석을 배치하였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받침돌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과 삼각형 받침대>

둘레석이 돋을새김으로 한 다른 왕릉의 십이지산상과는 달리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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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받침돌 사이에 세워진 십이지산상1>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돌난간>

정면에는 상석을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큰 편이며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형태이다. 신라 왕릉의 완성된 형식을 보여주는 38대 원성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성덕왕릉부터 정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있는 상석>

성덕왕릉에는 무인석 1쌍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는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인석1>

OLYMPUS DIGITAL CAMERA<일부만 남은 무인석>

왕릉의 네모서리에는 4기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은 사자상, 문인상 등 석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1>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2>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3>

성덕왕릉비는 경덕왕 때(754년)에 세워졌다. 현재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이를 기준은 성덕왕릉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성덕왕비를 세우다 ( 754년 05월(음) )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9 신라본기 제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비를 세웠던 거북받침돌>

신라 성덕왕릉(新羅 聖德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의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 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 (孝昭王)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唐)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덤은 밑둘레가 46 m, 지름이 14.5 m, 높이가 5 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입체 (立體)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石獅子)와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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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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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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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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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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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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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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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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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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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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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산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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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2>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구정동 방형분(사적)

경북 경주시 구정동에 있는 방형분(方形墳, 사적)이다. 경주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9 km 떨어진 불국사 부근에 있는 통일신라 귀족층의 무덤이다. 봉분의 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방형분이라 불린다. 봉분의 한변이 9 m, 높이는 2.7 m로 바깥쪽에는 12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을 둘렀다, 무덤내부는 남쪽에 출입구가 있는 굴식돌방무덤이다. 모서리에는 서역인 얼굴을 하고 있는 무인상과 서역풍의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구정동 방형분(사적)>

무덤은 둘레석으로 정사각형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봉토을 올려 놓은 형태로 내부는 남쪽으로 널길이 나있고, 그 안에 돌문이 있다.  출입구에서 시신이 올려져 있던 내부까지는 석재로  쌓아 널길을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널길과 무덤 내부>

둘레석은 각 모서리 사이에 방향에 따라서 3개씩 십이지신상을 새겨 놓고 있다. 무인상과 사자상이 돋을 새김을 하고 있는 돌기둥이 모서리에 세워져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둘레석 모서리에는 서역인 얼굴을 하고 있는 무인상과 서역풍의 사자상이 입체감있게 돋을새김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모서리 석재>

기둥돌에 새겨진 인물상은 원성왕릉에서 볼 수 있는 서역인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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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상>

사자상은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는 표현이 돋보인다. 서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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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상>

구정동 방형분의 모서리에 세웠던 기둥돌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깥쪽 두 면에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처럼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서역풍의 호인(胡人)이 사자와 함께 얕게 새겨져 있습니다. 머리에 띠를 매었고, 장화같은 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폴로의 스틱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있습니다. 이 계통의 인물을 아랍인, 이란인, 소그드인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십이지신상 돼지, 쥐, 소>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십이지신상 호랑이, 토끼, 용>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십이지신상인 뱀, 말, 양>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십이지신상 원숭이, 닭, 개>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구정동 방형분(사적)>

경주 구정리 방형분, 사적, 경북 경주시 구정동 산 41
이 무덤은 경주시내에서 약 9 km 떨어진 대덕산(大德山) 남쪽 구릉 말단과 접하는 평지에 위치해 있으며, 네모나기 때문에 ‘방형분’ 이라 불린다. 남쪽으로 널길이 나 있고, 그 안에 쌍여닫이 돌문이 있는 돌방무덤(石室墳)이다. 한 변이 9 m, 높이는 2.7 m인 봉토로 되어 있다. 돌방 서쪽에는 주검과 널을 얹었던 돌받침대가 있다. 바깥 아래쪽은 다듬은 돌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모서리에 세웠던 돌기둥에는 무인상과 사자상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네모무덤으로 특이한 것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