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사찰

의성 등운산 고운사(高雲寺)

경북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에 있는 사찰인 고운사(高雲寺)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자신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통일신라말 도선이 크게 중창했다고 그 후의 사찰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중기 이후에 지역 중심 사찰로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영조 때 기로소에 입소한 역대왕의 이름을 적은 어첩을 봉안하기 위한 ‘어첩봉안각’이 세워졌으며 고종때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연수전을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경북지역을 대표하는 5개 사찰 중 하나였다. 소장 유물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연수전(보물)가운루,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1<의성 등운산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02<고운사 편액 조선말 ~ 근대, 의성 고운사>

의성 등운산 고운사<고운사 가람배치>

들어가는 길

고운사는 의성에서 안동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동 도심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사실상 안동 생활권에 포함되어 있다. 등운산은 해발 624m로 의성군 북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해발 550~600m의 산들이 연결되고 있으며 서쪽 계곡을 따라 안망천이 흘러 내려간다. 고운사는 안망천 발원지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들어가는 길이 깨끗하고 경치가 좋은 편이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7<고운사 일주문>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9<고운사 계곡>

고운사 출입문으로는 일주문, 천왕문이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작은 불전인 고불전이 있다. 고불전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2층 누각 건물이 가운루가 있다. 계곡 왼쪽에 주요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오른쪽 언덕에는 최근 지은 주불전인 있는 공간이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30<안쪽에서 본 일주문>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8<사천왕문>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31<고불전>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32<고불전 내부>

가운루(駕雲樓)는 사찰 입구 계곡에 세워진 누각 형태의 강당 건물이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는 여려 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는 누각 아래를 지나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 출입문 기능도 있었는데 지금은 앞쪽에 세워진 다리를 통해 출입한다.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 역할을 했던 건물인데 지금은 사찰을 방문한 신도나 탐방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2<가운루>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6<안쪽에서 본 가운루>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4<가운루 앞 계곡을 건너는 다리>

극락전이 있는 공간

다리를 건너면 지금은 까페로 사용되고 있는 강당건물처럼 보이는 우화루가 있고 그 안쪽으로 극락전을 중심으로 만덕당, 종무소, 무설전, 고운대암, 연수전 등이 모여있다. 불전을 중심으로 요사채, 강당건물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6<우화루>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05 <우화루 편액, 조선 1809년, 의성 고운사>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8<극락전>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0<극락전 내부>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10<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선 1695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 좌상의 주존이다. 신유한의 고운사사적비(1729)에는 1695년(숙종21)에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각승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상의 형식적 특징, 팔각 대좌 내부 천인상의 표 현으로 보아 탁밀 스님의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추정된다.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던 시기의 상이기 때문에 조각승의선정 및 불사 전반에 깊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53
<아미타불회도, 조선 1701년, 삼베에 채색, 의성 고운사>

고운사 극락전 아미타불회도로 소영 신경 스님이 증명하고 혜명 스님과 도문 스님이 조성하였다. 이 그림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6위의 보살이 시립해 있고, 두광 주변에는 2위의 타방불,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포함한 19대 제자, 북방다문천왕와 서방광목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고운사의 아미타불회도를 조성한 혜명스님과 도문스님은 17세말부터 18세기 초까지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소용돌이 형태의 금니문양과 오색화문의 표현은 같은 시기에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해웅, 상린, 의균 스님의 특징으로 화풍의 굘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16<사십이수관음보살도, 조선 1828년,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천수천안관음보살은 모든 병과 악업, 중죄를 없애주고 안락과 수명, 부귀를 주는 관음으로 널리 신앙된다. 경전에서는 ‘서수천안’의 형상에 대해 규정하지 않았으나 42개의손으로 표현되며 각 손마다 한 개의 눈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 앞의 손으 ㄴ수인을 결하고 있고, 18쌍의 손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각각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의 양쪽 허리 부근에는 촉지인과 설법인을 취한 화불이 표현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퇴운 신겸 스님은 경상북도 문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불산화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하였다. 활동 후반기에는 고운사에 주석하며 고운사의 불화 전반을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7<만덕당>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9<우화루>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1<고운대암>

연수전(延壽殿)

연수전(보물)은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고 기로소에 입소한 역대 왕의 이름을 적은 어첩을 봉안하기 위해 ‘어첩봉안각’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이후 고종의 기로소를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건물을 중수하면서 고종으로 부터 ‘연수전’이라는 이름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내 기로소 건물을 순천 송광사와 의성 고운사 2곳에 있었는데 현재는 고운사 연수전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왕실의 어첩은 남아 있지 않으나 건립과 운영에 관련된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5<연수전 만세문>

건물은 서울 경복궁 부근에 위치한 기로소 영수각을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정자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가운데 1칸만 어첩을 봉안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4면이 개방된 마루로 되어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2<연수전(보물)>

건물의 벽과 기둥, 천장 등에는 왕의 권위와 무병장수, 부귀영화 등을 상징하는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다. 단청과 벽화는 매우 수준 높으며,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다양한 그림들이 반영되어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4 <연수전 현판과 단청 그림>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3<왼쪽 벽면의 그림>

주불전(대웅보전)이 있는 공간

고운사 계곡 오른쪽에는 큰 규모의 주불전인 대웅보전이 있고, 앞쪽 언덕에 나한전과 요사채 등이 있다. 나한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건물 배치가 조화로운 편은 아니고 주불전이 웅장함이 강조되고 있다. 대웅보전은 1990년대에 크게 지어진 불전이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05<대웅보전>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03<대웅전 편액,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3<대웅전 내부>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5<나한전과 삼층석탑이 있는 언덕>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09<석가불좌상, 조선 전기, 의성 고운사>

고운사 나한전에 봉안된 불상이다. 고운사 나한전은 원래 모니전(牟尼殿)이였으나 1990년대 현재의 대웅보전이 건립되며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참잠한 상호나, 무릎이 낮고 상체가 긴 상의 비례 등으로 보아 조선 전기인 15~16세기 사이에 조성된 상으로 보인다. 석조불좌상과 삼층석탑을 제외하고 17세기 이전의 성보를 찾아보기 힘든 고운사에서 나한전의 석가불좌상은 조선 전기 사찰의 연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찰령 개정에 따른 고운사 재산대장>에는 높이 3자(약 90cm)로 1482년의 제작시기가 남아 있는 석가불좌상 1구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나한전 상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약사전이 있는 공간

고운사 안쪽에는 도선국사가 조성한 석조여래좌상(보물)을 모신 약사전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공간에 크고 작은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약사전 앞쪽에는 연지암이, 안쪽으로는 적묵당과 아거각,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으며 뒷편에 삼성각이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1<약사전>

약사전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이 모셔져 있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8세기 불좌상을 모델하여 조성된 지방양식의 불상이다. 대좌와 광배를 제대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얼굴에 눈.코.입을 작게 표현했으며 허리가 작고 약간 치켜 올라간 어꺠로 불안전상 자세를 하고 있다. 광배는 배모양을 하고 있는데 연꽃과 덩굴무늬,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좌 중대석이 8각형 기둥모양으로 장색했으며 상.하대석은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9세기 불상으로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과 함께 경주와는 다른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7<약사전 내부, 석조여래좌상(보물)>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8<연지암>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19<수리중인 명부전>

불교박물관특별전-의성고운사-20221116_13<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조선 1670년, 의성 고운사>

신유한의 고운사중수기(1729)에는 1670년(현종11)에 명부전과 존상들이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장보살상이 두 손을 낮게 두고 있는 점, 정방형의 얼굴에 기다란 귀와 매부리코로 대표되는 상호 표현 등에서 단응 스님의 특징을 보여 조각승을 추정해 볼 수 있다.이 시기는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며 불사를 관장하던 시기로 명부존상의 조성과 신경 스님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시왕상의 착의나 의습선 표현이 화려하며, 의복과 의자 내부에 다양한 인물상이 표현되어 있어 독특하다. 최근 이운 과정에서 지장보살좌상 대좌 하단 좌복의 명문에 1725년(영조1) 지장보살을 중수한 기록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2<적묵당과 아거각>

의성 등운산 고운사 20230830_20<삼성각>

고운사 연혁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681)에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그후 고운 최치원이 여지, 여사 두 대사와 함께 중건하였다. 임진왜란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석학으로 이름 난 함홍선사가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할때는 무려 500명의 대중스님이 수행한 도량으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14개군의 사찰을 관장하며 암사와 전각이 366칸에 달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유물과 유적으로는 도선국사가 조성한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과 가운루.삼층석탑.연수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경내에는 28동의 고건물이 유존하고 있다. 송림이 우거진 등운산에 위치한 고운사는 속세에서 저만치 있는 듯한 청정 수행도량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서 5개군에 걸쳐 60여 말사를 관장하는 거찰이다. (안내문, 의성 고운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의성 고운사, 2023년
  2.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3. ‘고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이다. 갑사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대전과 가까운 동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으며 삼성각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들은 최근에 중수된 것이다. 통일신라 때 회의화상이 상원조사가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곳에 청량사라는 절을 짓고 남매탑을 세웠다. 현재의 사찰은 고려초에 도선이 절을 중창하면서 고려 태조를 모시는 원당을 세웠다. 사찰 옆에 신라 시조와 박제상을 모시는 사당인 동학사가 세워지면서 절의 이름도 동학사로 바뀌었다.남매탑의 전설이 있는 사찰답게 청도 운문사와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과 삼성각이 있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1<공주 계룡산 동학사>

공주 동학사<동학사 공간배치>

대웅전이 있는 중심영역

공주 동학사 20230727_03<동학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06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17세기 전반 활동한 조각승 석준(釋俊), 각민(覺敏) 등이 불상 조성에 참여했다고 한다. 삼세불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형식이다. 임진왜란 이후 비로자나삼불상과 함께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9<대웅전 내부,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삼층석탑은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통일신라 때 조성되었다고 전하나 탑의 형태나 조각수법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4<대웅전 앞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동학사 삼층석탑
동학사 삼층석탑은 계룡산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전설에는 신라 성덕왕 22년(723)에 동학사를 지을 때 함께 만들어졌다고 하나, 탑의 모습으로 볼 때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원래 탑의 1층과 2층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2008년에 기단부와 3층을 복원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층 한 면에 자물쇠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삼성각은 산신.칠성.독성을 모시는 곳으로 우리나라 전통신앙과 관련된 공간이다.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찰 삼성각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이다. 동학사 불전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그 내력을 알 수 없지만 구한말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7<동학사 삼성각>

공주 동학사 20230727_06<삼성각에 모셔진 불화 중 칠성(칠원성군)을 표현한 그림>

동학사 삼성각
삼성각은 우리나라의 전통 신앙과 불교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공간으로, 산신.칠성.독성을 일컫는 삼성을 모시는 곳이다. 삼성 중 가운데 칠성은 별들의 우두머리이다. 인간의 복과 수명을 맡은 신으로 여래와 보살이 함께 있다. 산신은 재물을 담당하는 우리 민족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령의 모습니다. 독성은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는 존재로 지팡이, 염주, 불로초를 들고 있거나 어린 동자가 곁에 있기도 하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동학사 전각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에 중건되었다. 불전이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운문사와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수행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05<승려들의 수행공간>

공주 동학사 20230727_02<종무소가 있는 수행공간, ‘육화료’라고 한다.

동학삼사(숙모전, 삼은각, 동계사)

동학삼사(東鶴三祀)는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지(招魂閣祉)에 세워진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를 말한다. 이곳은 고려가 망한 직후 길재가 고려 태조,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그후 매월당 김시습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을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 또한 신라 박제상의 충절을 기려 고려초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13<동학삼사>

공주 동학사 20230727_15<숙모전>

공주 동학사 20230727_16<삼은각과 동계사>

동학삼사(숙모전.삼은각.동계사)
동학삼사(東鶴三祀)는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지에 세워진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를 말한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이색, 길재, 그리고 조선의 단종과 사육신 등 신라, 고려, 조선 3왕조의 충절 인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특히 숙모전은 신분과 관계없이 국왕, 재상, 관료, 학자, 서민, 노비 등 충절인 351위를 기리면서 왕을 모신 ‘전(殿)이라는 명칭이 갖는 권위가 있으며 유교와 불교가 어울려 제사하는 특별한 전통을 지닌 곳이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들어가는 길

동학계곡은 입구에서 관음봉고개까지 약 3.5km의 계곡을 말한다. 계곡은 숲이 울창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봄 동학, 가을 갑사라하여 계룡 5경으로 손꼽힌다. 계곡에는 사찰 출입문인 일주문과 함께 사당 출입문인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계곡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암자인 <길상암>, <관음암>, <미타암>, <문수암>이 있다.

공주 동학사 20230727_25<동학사 입구 계곡>

공주 동학사 20230727_23<홍살문>

공주 동학사 20230727_22<동학사 일주문>

공주 동학사 20230727_21<일주문을 지나 동학사 들어가는 길>

공주 동학사 20230727_20<동학사 계곡>

공주 동학사 20230727_19<관음암>

공주 동학사 20230727_18<길상암>

공주 동학사 20230727_17<동학사와 동학삼사>

공주 동학사 20230727_12<동학사 앞 계곡>

동학계곡 신록
학바위 앞에서 관음봉고개에 이르기까지 약 3.5km의 동학계곡은 푸른숲에 둘러싸여 맑은 물소리, 새소리가 청량하다. 계곡의 입구 노거수속을 신선처럼 걷노라면 비구니의 강원이 있는 동학사에 이르고 바로 그 아래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충의 절신을 모신 삼은가, 숙모전, 동계사가 자리하고 있다. 동학사 앞에 눈을 높이면 멀리 쌀개능선과 서북능선이 시계에 다가서며, 계곡을 1.5km쯤 거슬러 오르면 산수의 조화미를 자랑하는 은선폭포에 이른다. 은선폭포를 지나 관음봉 고개까지 다소 가파르나 신록이 피어나는 봄의 계곡이 으뜸이며, 예로부터 봄 동학, 가을 갑사로 널리 알려져 있어 계룡산의 제 5경으로 일컫는다.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동학사(東鶴寺)
동학사는 713년 당나라 스님 상원조사가 지은 상원암(上院庵)에 연원을 두고있다. 상원암은 은혜를 갚으려는 호랑이 덕분에 여인을 만난 상원조사가 여인과 의남매를 맺고 함께 도를 닦았던 곳이다. 성덕왕 23년(724) 회의화상이 두 분을 기리기 위해 쌓은 탑이 현재 상원사지에 남아 있는 남매탑(보물)이다. 고려 태조 3년(920)에 도선국사가 지금의 동학사 자리에 사찰을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이 되었다. 고려 태조 19년(936), 신라가 망하자 류차달이 이곳에 신라의 시조와 박제상을 제사하기 위해 동학사(東鶴祀)를 건축하였고, 이후 사찰이 번창하자 절 이름도 동학사로 바꾸었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영조 4년(1728) 신천영의 난으로 사찰과 사당 모두가 소실된 것을, 순조 14년(1814) 월인선사가 신축하였으며, 고종 원년(1864) 만화 보선선사가 중창하였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2. 안내문, 공주시청, 2023년
  3. ‘동학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동학사;, 위키백과, 2023년

 

원주 치악산 구룡사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위치한 사찰인 구룡사(龜龍寺)이다. 치악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영서지방을 대표하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하며 도선, 무학 등 이름있는 고승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석탑이나 불전 등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조선후기 숙종 때 대웅전과 보광루 등을 중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사찰 계곡 입구에는 조선시대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어 예로부터 울창한 숲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1<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아홉마리 용이 사는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상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용들과 도술시합을 하여 사는 용들을 물리치고 절을 지었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구룡사(九龍寺)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 사찰이 퇴락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찾아와 절 입구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진 것이라 하여 바위를 깨 버렸으나, 이후 절은 더욱 쇠약해져 갔습니다. 이때 한 도승이 나타나 절이 쇠약해진 것은 거북바위를 깨서 혈맥이 끊겼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그때부터 거북바위를 살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지금의 구룡사(龜龍寺)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안내문, 국립공원공단, 2023년)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은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과 보광루가 마주 보고 있으며 아래쪽에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사천왕문이 자리잡고 있다. 마당 서쪽에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으며 대웅전 양쪽으로 관음전, 응진전, 지장전 등 불전들이 자리잡고 있다.

원주 구룡사<구룡사 가람배치>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8<계곡에서 보이는 구룡사>

들어가는길/치악산 계곡

치악산은 16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으로 비로봉(1,288m)를 중심으로  많은  봉우리들과 가파른 계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는 비교적 험한편이며 계곡의 수량은 풍부하다. 구룡사가 있는 계곡은 비로봉 북쪽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숲이 울창하고 맑고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6<주차장에서 구룡사로 들어가는 입구>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5<구룡사 계곡>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4<일주문>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3<국사단>

구룡사는 출입문은 사천왕문이다. 앞면 3칸의 2층 건물로 상당히 큰 편이다. 대형 사찰에서도 보기 힘든 규모로 최근에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1<사천왕문>

보광루는 구룡사 경내를 출입하는 문루이자 강당 역할을 했던 건물이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2층 문루 건물이다. 강당 역할을 하고 있는 2층 누각은 대웅전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후기 숙종 때(1707년) 다시 지은 건물이라 한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10<사천왕문에서 보이는 보광루>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1<보광루>

구룡사 중심영역

중심영역에는 대웅전과 보광루가 마주보고 있으며, 대웅전 양쪽으로 관음전 등 여려 불전들을 두고 있다.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들은 주로 마당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3<구룡사 중심영역>

주불전인 대웅전은 앞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후기 중건할 때 지었던 옛 건물은 2003년 화재로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원형에 맞게 복원한 것이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5<대웅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7<대웅전 내부>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8<대웅전에서 보이는 보광루>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6<보광루에서 보이는 대웅전>

대웅전 오른편에는 관음전, 응진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뒤로 독립된 형태의 요사채가 있다. 왼편에는 지장전과 삼성각이 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2<관음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7<관음전 내부>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6<응진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4<지장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9<삼성각>

대웅전 앞 마당 오른쪽에는 심검당, 설선당, 적묵당 등 요사채들이 자리집고 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8<마당 왼쪽 요사채들>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03<마당 오른쪽 요사채>

원주 치악산 구룡사 20230511_25<관음전 뒷편 요사채>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는 원주 8경중 제1경으로 유서깊은 사찰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이 668년(문무왕 8년) 창건하였다고 하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 절터의 깊은 연못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의상이 못을 메우고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비를 내려 온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물이 말라버리고 용 아홉 마리는 도망쳤다고 한다. 의상은 철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청건 이후 도선.무학.휴정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으뜸 사찰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우러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며,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06년(숙종 32년) 중수되었고, 여지도서 원주목조에는 ‘구룡사는 85칸이다. 치악산 북쪽에 있다. 절 앞에 용연이 있는데 홍순 가뭄이 들 때마다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구룡사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안석경의 삽교집에는 지금은 볼 없는 대승암과백련당, 월봉암 등 선승들이 살았던 암자와 호랑이를 만난일 등 구룡사 주변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절의 지정문화재는 강원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던 대웅전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보광루가 있다. 대웅전은 2003년 화재로 불에 타고 지금 대웅전은 2004년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그밖의 건물은 삼성각.심검당.설선당.적묵당.천왕문.종루.일주문.국사단 등 모두 19동이 있다. 구룡사에 이르는 길에는 곧게 자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와 관련이 있다. 매표소 부근에 있는 황장금표는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지하는 표시로, 구룡마을 입구와 치악산 정상 부근에 황장외금표가 함께 남아 있는데 이러한 예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안내문, 원주 구룡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원주 구룡사, 2023년
  2. ‘원주구룡사’, 위키백과, 2023년
  3. ‘구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세종 비암사, 통일신라 불비상 3점이 있던 사찰

세종시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사찰인 비암사(碑岩寺)이다. 1960년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에 계유년에 국왕 및 대신, 칠세부모를 위하여 절을 짓고 아미타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비롯한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적혀 있어 삼국통일 직후 백제유민들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도선(道詵)이 중창했으며 그 이후에도 크게 번창하지는 않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지도인 <여지도>에도 비암사(碑岩寺)가 표시되어 있다. 발견된 3점의 불비상은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경내에는 극락보전(보전), 삼층석탑,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세종 비암사 20230406_01<세종 비암사>

비암사는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마당을 조성한 후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삼층석탑과 극락보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요사채와 함께 주불전이 있는 영역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서쪽편에 축대를 높게 쌓고 극락보전과 명부전을 배치하였다. 산 정상부 아래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교적 마당이 넓은 편이다. 축대를 쌓은 사찰 입구에는 수령 10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어 사찰의 오랜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세종 비암사<비암사 가람배치(위성사진)>

세종 비암사 20230406_02<비임사 오르는 길과 느티나무>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 20230406_08<비암사 전경>

삼층석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고려시대 석탑이다. 몸돌 모서리에 기둥을 새긴 것 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등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통일신라 때 백제유민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3점의 불비상이 발견되었다.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 20230406_05<비암사 삼층석탑>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은 4각의 긴 돌 각면에 불상과 글씨를 새겨 놓고 이다. 정면에는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했다. 본존물은 부처가 설법할 때 손모양을 강조하고 있어 삼국시대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시보살상은 얼굴에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으나 머리에 둥근 광배가 남아 있다. 주위에 나한상, 인왕상, 작은부처, 비천상 등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유명전씨아마타불비상(국보)>

옆면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앉아 있는 작은 부처의 모습을 조각했으며 불상 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이 불비상을 조성하게 된 경위가 새겨져 있는데 계유년에 국왕 및 대신, 칠세부모를 위하여 절을 짓고 아미타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비롯한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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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새겨진 옆면>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정면에 새긴 불상은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반가상을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하고 있는 보살상을 표현하고 있는데 뒷면에 보탑을 크게 새긴 것으로 볼 때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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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 보물, 통일신라(7세기), 연기 비암사>

기축명아미타불비상(보물)은 앞면에 본존불인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고, 주변에 여러 자세의 불상들이 나열되어 있다. 본존불 좌우에는 보살상이 있고 나한상, 인왕상, 야차상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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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이 새겨진 아마타불과 보살, 보물, 통일신라(689년), 연기 비암사>

극락보전(보물)은 조선후기 17세기에 지어진 불전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일반적인 불전 건물과는 달리 옆면 2칸을 하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 형식적으로 간략화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는데 옆면을 1칸 줄였기때문에 내부는 협소한 편이다. 앞면 창호는 문설주 기둥이 있는 조선중기 이전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조선후기 불전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 비암사 20230406_11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보물)>

 세종 비암사 20230406_06<극락보전에서 본 마당>

세종 비암사 20230406_03<극락보전 앞 요사채>

대웅보전은 1996년에 새로 지어진 불전으로 주불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옆에는 명부전이 있으며, 뒷편에는 산신각이, 앞마당에는 큰 요사채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극락보전이 있는 마당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마당을 넓게 쓰고 있다.

세종 비암사 20230406_09<대웅보전이 있는 공간>

세종 비암사 20230406_05<대웅보전>

세종 비암사 20230406_10<명부전>

세종 비암사 20230406_07<대웅보전 앞 마당>

세종 비암사 20230406_08<요사채>

<출처>

  1. 안내문, 세종 비암사, 2023년
  2. “비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비암사”,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세종시, 2023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공주 태화산 마곡사, 충남지역 중심 사찰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있는 사찰인 마곡사(麻谷寺)이다.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고려중기 보조국사가 크게 중건했다고 한다. 국사당에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을 열었던 승려 범일을 모시고 있어 선종 사찰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세조가 이곳을 다녀가 ‘영산전’ 현판 글씨를 남겼으며, 임진왜란 이후 공주 충청감영의 지원을 받아 크게 중건하였다.  오늘날 수덕사와 함께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조계종 사찰로 약 70여개의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7곳의 사찰 중 하나이다.

공주 마곡사20230406_01<공주 마곡사>

마곡사는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 사찰로 가람의 배치에 형식적인 요소가 별로 없으며, 승려들의 수행을 위한 요사채 건물들을 많이 두고 있다.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대웅보전과 대광본이 있는 화엄신앙 공간을 북원이라고 하고, 남쪽의 영산전이 있는 선(禪) 수행 공간을 남원이라고 한다. 가람배치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비슷하다.

공주 마곡사<공주 마곡사 위성사진, 2023년>

들어가는 길

마곡사는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 온양과 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온양온천과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의 중간 지점 쯤에 있어 지역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마곡사를 하루정도 묵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입구 주차장에서 마곡천을 따라 연결되는 길은 중간에 일주문이 있어 사찰 경내를 오가는 길로 보이지만 원래는 공주와 온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2<마곡사 일주문>

공주 마곡사20230406_13<마곡천과 북원>

공주 마곡사20230406_14<남원>

마곡사는 출입문으로 해탈문과 천왕문을 두고 있다. 해탈문과 천왕문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해탈문 내부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동자상을 모시고 있는데, 이런 경우 보통 금강문이라고 부르는데 마곡사에서는 해탈문이라고 한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3<마곡사 입구>

공주 마곡사20230406_16<해탈문>

공주 마곡사 해탈문
마곡사의 정문으로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를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중앙 통로 양편에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 동자상을 모시고 있다. 고종 1년(1864)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공주 마곡사20230406_24<천왕문>

공주 마곡사 천왕문
천왕문은 해탈문에 이어 마곡사의 두번째 대문으로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안쪽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天上界)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할하는 신적 존재로,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이 불도를 따라 사는지 살피어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대웅보전과 석탑이 있는 북원 앞으로 마곡천이 흐르고, 그 위에 극락교라는 지나 북원으로 들어간다. 북원 입구에 누마루가 있는 강당을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별도 건물없이 넓게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5<마곡천과 극락교>

공주 마곡사20230406_26<계곡에서 보이는 남원>

공주 마곡사20230406_02<계곡에서 보이는 북원>

공주 마곡사20230406_04<북원 마당에서 보이는 극락교>

공주 마곡사20230406_40<대웅보전 아래 계곡>

공주 마곡사20230406_03<마곡사 극락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는 한반도 남쪽 지방에 위치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7개 산지승원을 일컫는 것이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창건된 이들 7개 사찰은 신앙과 수행,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 선불교의 특징인 자금자족이 가능한 사찰 관리, 승려 교육, 수행과 교리 학습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무형적, 역사적 측면도 확인할 수 있다. 경내에는 한국의 다양한 불교신앙이 수용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수의 구조물과 전각, 유물, 문서 등은 한국불교의 표용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산사는 조선시대 억압과 전란으로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성한 장소로서,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이 살아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북쪽 권역(북원), 교화공간

북원은 고려시대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에 응진당, 조사당 등 불전을, 동쪽에 요사채인 심검당 등을 두고 있다. 고려 때 중건한 전각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으며, 조선후기 효종 때 크게 중건하여 현재와 같은 가람배치를 이루었으며 그뒤 화재로 다시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0

공주 마곡사20230406_30<마곡사 북원>

마곡사 오층석탑(보물)은 2층 기단 위에 오층 탑신을 올려 놓은 오층석탑이지만 세부적으로는 기존 석탑과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탑신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고 있으며, 청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은 중국 원나라 또는 청나라에서 세운 라마교 불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고려말 원나라와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로서 의미가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7<마곡사 오층석탑(보물)>

대광보전(보물)은 마곡사의 주불전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화려한 다포계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내부 불단은 서쪽에 배치되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닫집을 꾸며 엄숙함을 더해주고 있다. 대광보전의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알 수 없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 순조 때(181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5<마곡사 대광보전(보물)>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단독으로 모시고 있는데 동쪽을 향하고 있다.  불상을 모시는 불단에는 닫집을 설치하였다. 전체적인 내부 모습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연상시킨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7<대광보전 내부>

대웅보전(보물)은 조선후기 효종 때(1651년) 각순대사가 마곡사 불전들을 중건할 때 다시 지은 건물이다. 불교 경전을 모시는 대장전으로 지은 건물인데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보시는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건물내부는 뚫려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넓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8<대웅보전(보물)>

공주 마곡사20230406_39<대웅보전 내부>

응진전은 선종 사찰을 성격을 잘 말해주는 수행을 하고 있는 승려들을 중요시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곡사는 크고 작은 암자들을 많이 두고 있으며, 다른 사찰에 비해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를 상당히 많이 두고 있다. 마곡사와 같은 선종 사굴산문 계열인 순천 송광사와 비슷하다. 응진전 현판은 강세황이 쓴 글씨라고 한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4<응진전과 조사당이 있는 공간>

공주 마곡사20230406_32<응진전>

공주 마곡사 응진전
이 건물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16나한은 중생에게 복을 주며, 중생을 바른 법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성자를 말한다. 철종 3년(185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면에만 창호를 달아 출입하도록 하고, 나머지 삼면은 회사벽으로 마감한 특징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공주 마곡사20230406_33<응진옆 요사채인 백범당>

조사전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불전이다. 원래 국사당에 모셔던 자장, 범일, 도선, 보조국사 영정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36<조사전>

요사채 건물인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 마당 동쪽편에 있는 ‘ㄷ’자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후기 상류층이 살았던 살림집을 연상시킨다. 마당을 향하고 있는 본채는 앞면 5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들이 있는 날개채가 달려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물 형태로 볼 때 거의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며 큰 사찰 요사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8<심검당>

OLYMPUS DIGITAL CAMERA<뒤쪽에서 본 모습>

고방은 2층으로 된 창고 건물로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방>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안쪽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앞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템플스테이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 공간>

공주 마곡사 북쪽 권역(북원)
마곡사 북원은 대광보전과 오층석탑이 있는 교화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태화산 산골짜기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내에는 모두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는데, 그 위치에 따라 남원과 북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마곡사는 약 8000여 평의 면적에 경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마곡천 계곡을 사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어 마치 두 개의 사찰이 자리한 듯 보인다. 이 중 북쪽 권역인 북원에는 대웅보전, 대향각, 응진전, 범종각이 있고, 승려들의 생활하는 공간인 심검당, 고방, 요사 및 백범 김구의 자취가 남아 있는 백범당과 향나무 등이 있다. 마곡사의 가람이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배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을 보면, 1650년 각순 스님이 공주목사 이태연의 도움을 받아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지어 북쪽 구역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예산 안곡사에서 범종을 보내왔고, 1741년에 법당의 중종을 만들었다. 오층석탑의 북쪽에 대광보전을 짓고, 다시 축대 위에 대웅보전이 자라한 ‘일탑쌍금당’식의 배치는 매우 휘귀한 사례이다. 마곡사는 한때 승려가 천 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하였지만 1782년에 화재로 대법당을 비롯한 천여 칸의 건물이 불아 타는 사건이 있었다. 그 다음 해에도 화재가 일어나 대광보전도 소실된 채 탑과 불상, 대웅보전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제봉당 채규 스님이 중심이 되고 충청도관찰사 심풍지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785년에 대광보전을 다시 세우고 1788년에 표암 강세황이 쓴 ‘대광보전의 현판을 걸었다. 대웅보전은 본래 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전’이었는데 이 시기에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 1791년 응진전, 1789년에는 심검당도 지었다. 그 후 수차례의 보수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남쪽 권역(남원), 수행공간

마곡사 남원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강당들이 배치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주불전에 해당하는 영산전에는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맞은편에는 큰 규모의 강당인 흥성루가 있다. 마당 양쪽으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남쪽 건물은 수선사, 북쪽 건물을 매화당인데 북쪽 건물의 규모가 큰 편이다. 매화당 뒷편 마당에는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명부전이 있으며 그 뒷편 언덕에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계곡방향으로 열려 있는 북원과는 달리 담장이 둘러져 있다. 흥성루 아래 큰 길은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5<마곡사 남원>

영산전(보물)은 조선후기 효종 때(1651년) 각순대사가 마곡사를 중건할 때 다시 지은 불전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으로도 불린다. 마곡사 남원(남쪽영역)에서 주불전 역할을 하고 있다. 영산전에 모셔진 칠불좌상은 조선후기 단응과 열아홉명의 조각승의 제작한 작품으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8<공주 마곡사 영산전(보물)>

내부에는 칠불좌상과 천불상이 모셔져 있다. 칠불좌상은 수조각상 단응이 1681년 2월부터 6월까지 열아홉 명의 조각승을 이끌고 제작한 불상이다. 일곱 부처 중 석가모니로 불리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오른손을 무릎에 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크기도 다른 여섯구의 불상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더 크다.

공주 마곡사20230406_19<영산전 내부>

강당건물인 흥성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다. 보통 강당 건물은 법회가 열리는 공간이자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수행공간에 있는 마곡사 강당은 신도들보다는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주로 사용하는 장소로 보인다.  누각처럼 바깥 계곡과 큰 길을 내려다 볼 수 있지만 주로 판문으로 닫혀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2<마곡사 흥성루>

공주 마곡사20230406_17<바깥에서 본 모습>

매화당은 ‘ㄷ’형 건물로 앞면 6칸, 옆면 6칸의 상당히 규모이다. 승려들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0<매화당>

공주 마곡사20230406_06<뒷편에서 본 모습>

공주 마곡사20230406_09<바깥에서 본 매화당>

수선사는 마당 남쪽에 있는 요사채 건물로 ‘ㄱ’자형 한옥 형태를 하고 있다. 일반한옥과는 달리 부엌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공주 마곡사20230406_21<수선사>

공주 마곡사20230406_10<바깥에서 본 수선사>

매화당 뒷편 마당에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이 있으며 언덕에는 산신각이 있다. 명부전과 산신각은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매화당과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공주 마곡사20230406_05<명부전>

공주 마곡사 명부전
이 건물은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 곳으로 1939년에 건립되었다.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구원의 상징으로, 모든 인간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보살이다. 시왕은 인간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죄가 크고 작음을 가리는 10명의 왕으로 염라대왕은 그 중 다섯 번째 왕이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명부전 뒷편 언덕에는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자장, 범일, 도선, 보조국사를 모신 국사당이었는데 북원에 조사당을 지으면서 산신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주 마곡사20230406_08<마곡사 산신각>

공주 마곡사 국사당(산신각)
마곡사 국사당은 자장.범일.도선.보조(지눌) 등 신라~고려 시대 최고의 승려인 국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조선후기까지 ‘삼국사명당’이라 하여 세 분의 국사만 모시다 보조국사의 영정을 더하였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마곡사를 지은 후 도선이 보수하였으며 신라 말에 범일이 절을 다시 세웠다는 설화에도 나타나듯 모두 마곡사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고려 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은 폐허가 되어 도둑들이 숨어 지내던 마고사 터에 와 춤을 추며 “금방울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울린다.”라는 시를 읊고 절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마곡사의 승려들이 옛 고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개울 서남쪽에 작은 사당을 세운 것이 국사당의 기원이다. 지금의 건물은 1796년에 지은 것이며, 1868년에 ‘삼국사당’ 현판을 걸었다가 현대에 산신도를 두면서 ‘산신각’으로 바뀌었다. 국사당 옆에 천 년이 된 잣나무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바람에 쓰러져 그 나무를 영은암의 기둥으로 썼다고 한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공주 마곡사20230406_07<산신각에서 내려자 보이는 북원>

공주 마곡사 남쪽 권역(남원)
마곡사 남원은 영산전이 있는 수행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의 두 공간으로 나뉜다. 북원의 대광보전과 남원의 영산전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사찰이 두개인 것처럼 보인다. 북원과 남원 양쪽에 불전, 요사, 누각 등 사찰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건물이 각각 배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남원은 마곡사의 입구로 오른쪽은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연결되고 왼쪽은 영산전과 명부전,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가람 배치는 1920년에 발간된 <고적조사보고>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의 배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남원은 영산전을 주불전으로 삼고 있다. 영산전의 앞에는 ‘홍성루’가 있고 북쪽에는 매화당, 남쪽에는 연향각이 있다. 매화당과 연향각은 각각 건물을 담장으로 둘러싸서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현재와 비교해 보면 훨씬 동쪽에 있다. 즉, 현재의 종각 부근에 다리가 있어 천왕문을 지나면 동쪽으로 이동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은 높이 11m, 너비 7m에 이르는 대형 괘불로 17세기에 조성된 작품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대형 화면에 가득히 그려져 있다. 남아 있는 글에 따르면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했으며 석가탄신일과 수륙재, 49재에 쓰였던 그림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형태, 화려한 색채 등이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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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

마곡사의 연혁
마곡사는 100여 개에 이르는 충남.대전.세종 지역 조계종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개 사찰 중 하나이다. 태화산에 자리를 잡은 마곡사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곳은 산과 물이 ‘쌍태극’을 이루는 명당이라 전란이나 흉년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도 하고 신라의 보조선사 체징이 세웠다고도 한다. ‘마곡’이란 말의 유래는 보철화상이 설법할 때 계곡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치 삼밭을 이룬 것 같아 ‘삼골’, 즉 ‘마곡(麻谷)’이라 하였다는 설과 신라의 고승 무염이 중국 마곡사의 법을 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 시대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의 본존불이 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 불교는 힘을 잃었지만, 마곡사에는 왕실의 손길이 이어졌다. 1465년경 세조가 찾아와 직접 쓴 ‘영산전’이란 글을 내리며 타고 왔던 가마를 남겨 주었고, 공주목사와 충청감사는 재물을 지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의 집결지이기도 했는데 전란으로 절이 황폐해지자 1650년에 ‘각순’이란 스님이 절을 다시 세워 제 모습을 찾았다. 이때 승려들을 모아 놓고 종이를 생산해 나라에 진상하고 기와를 구워 살림을 꾸려갔다. 1782년 큰불이 나서 건물이 모두 탔지만 조정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제 모습을 찾았다. 1970년 정조의 아들 순조가 태어났을 때에는 마곡사에서 천일기도를 올린 덕분이라 하여 승려들을 힘들게 했던 종이를 진상하는 공역을 없애는 동시에 충청도의 으뜸 사찰로 지정하였다. 그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전국 31본산 중 하나가 되었다. 이곳 마곡사에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1898년에 23세의 백범 김구도 마곡사를 찾아와 자취를 남겼다. 마곡사에는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다. 마곡천 물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영산전 등 수행 공간이 있고 북쪽에는 대광보전 등 교화 공간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마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