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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안국사지 절터

충남 당진군 정미면 안국산 중턱에 있는 안국사지 절터이다. 창건연대나 사찰의 내력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으나 출터유물이나 남아 있는 석탑과 불상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석가여래삼존입상(보물), 석탑(보물), 매향암각 등이 남아 있다. 절터의 규모나 남아 있는 유물 등으로 볼 때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1<당진 안국사지 절터>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보살이 배치된 삼존석불이다. 본존물은 머리에 커다란 사각형 갓을 쓰로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이 신체에 비해 큰 편이며 몸체는 조형미가 없는 편이며 신체만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옆에 있는 보살상도 본존불과 비슷한 형태이다. 고려시대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조성했던 거대 석조불상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9<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2<옆에서 본 모습>

석탑(보물)은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투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기단부는 통일신라 석탑에 비해 간단하며 탑신 몸돌은 1층만 남아 있고 2층부터는 지붕돌만 있다. 탑신 몸돌에는 1면에는 출입문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을 새겨놓고 있다. 조각수법이나 전체적인 세부적인 조각수법이나 전체적인 조형미는 떨어지는 편으로 고려중기 석탑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10<당진 안국사지 석탑(보물)>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3<뒷편에서 본 석탑>

석가여래삼존입상 뒷편에는 고려시대 매향의식을 했던 내용이 적혀 있는 큰 바위가 있다.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4<안국사지 매향암각>

안국사지 매향암각
불상 후면에 있는 매향암각은 모양이 배(舟)같이 생겨서 ‘배바위’, 고래모양이라 하여 ‘고래바위’ 또는 베틀에 딸린 북모양ㅇ이라 하여 ‘북바위’ 등으로 불린다. 바위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을 치른 내용을 담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매향은 향나무를 땅에 묻는 민간 불교의식으로 향나무를 통해 소원을 비는 자와 미륵불을 연결되길 바라는 신앙의 한 형태이다. 이런 매향활동을 통해 고려시대 몽고와 왜구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지역민들이 불안한 민심을 달래고자 미륵신앙의 안식처로써 안국사를 선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6<안국사지 절터에서 내려다 보이는 계곡>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7<사찰 전각으로 보이는 건물>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41<사찰 전각>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42<연못>

당진 안국사지 20230316_08<당진 안국사지 절터>

<출처>

  1.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년
  4. 홈페이지, 당진시청, 2023년

서산 보원사지(사적), 통일신라 화엄십찰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지(사적) 절터이다. 보원사(普願寺)는 삼국시대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멀지 않은 곳에 마애여래삼존상(국보)이 있다.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에 따르면 부석사 등과 함께 통일신라 화엄종을 대표하는 10대 사찰인 화엄십찰 중 한곳이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 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7<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사적), 2009년>

가람배치는 석교를 지나 중문, 석등,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과 강당 좌우로 회랑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례 화엄사나 영주 부석사처럼  가람배치가 해가 따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금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여래좌상도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 형태도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것으로 볼 때 동시대 화엄종 사찰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서산 보원사지(사적)>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5<동쪽을 향하고 있는 보원사 가람배치>

절터에서는 대형 철조불상 2구가 출토되었으며 삼국시대 백제 시기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오층석탑(보물), 통돌을 파서 만는 석조(보물), 975년 이곳에서 입적한 법인국사의 승탑(보물), 탑비(보물), 사찰 입구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보물) 둥이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1<멀리서 보이는 보원사지 절터>

절터 앞으로는 가야협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이 불전이 있는 신성한 영역과 바깥 세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해 준다. 개울 동쪽으로는 사찰입구입을 알리는 당간지주과 신도들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마련된 석조(보물)이 배치되어 있다. 서산과 홍성, 예산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사찰 바깥에는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고려시대 원(院)과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3<당간지주가 있는 입구에서 보이는 모습>

당간지주(보물)는 절터 동쪽 개울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2개의 기둥이 70cm 정도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다. 기둥 안쪽에는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 넓은 띠를 새겼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지만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웅장한 멋을 지니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5<당간지주(보물)>

당간지주 오른편으로 석조가 있고, 그 사이에 넓은 공터가 있다. 아마도 이곳에 여행객을 위한 시설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8<당간 지주 오른 쪽으로 보이는 석조(보물)>

석조(보물)는 물을 담는 그릇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 사원, 사찰 입구에 놓여 있다. 석조에 담긴 물로 손을 씻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석조는 화강석 내부를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 석조 양식을 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23<보원사지 석조(보물)>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고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다. 원래 돌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 사찰 경내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36<당간지주에서 보이는 보원사지 절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0<사찰 앞을 흐르는 개천과 가야협 계곡>

개울을 건너면 주불전이 있는 중심영역을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중심영역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경주 불국사와 비슷한 공간배치이다.  약 1m 정도의 석축을 쌓아 공간을 조성하였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2<보원사 중문을 오르는 계단>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3<남쪽편 석축>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4<북쪽편 석축>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9<주불전이 있는 공간>

오층석탑(보물)은  고려초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9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석탑이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사자상을, 윗층 기단에는 팔부중상을 새겨놓고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게 만들었다.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백제 석탑의 특징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8<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1<뒷편에서 본 모습>

오층석탑 뒷편으로 철조불상을 모셨던 금당터가 있다. 금당터에는 불상이 모셔졌던 자리와 건물 기둥이 놓였던 주춧돌, 기단석 등이 남아 있다. 금당 좌우에는 회랑으로 연결된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 뒷편에는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54<보원사지 금당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3<기단을 쌓았던 석재>

금당지
오층석탑에서 서쪽으로 9.2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2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루어졌고 근래까지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금당의 규모는 남북 18.0m, 동서 16.0m의 장방형으로 확인되었다. 기단 구조는 할석을 각 기단의 바깥면에 맞추고 4~5단으로 축조하였다. 내부에는 불상대좌의 보호각인 닷집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초석 4기가 확인되며, 금당지 하부에는 남북 18.0m, 동서 2.1m만 남아 있는 기단이 확인된다. 기단에서 서쪽으로 90cm 내에는 할석을 2~3줄로 정연하게 만든 뒷채움시설이 확인되고, 연화문수막새, 당초문암막새, 무문전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년)

금당터 가운데에는 불상이 모셔졌던 닫집을 받치는  건물초석을 볼 수 있다. 절터에서는 2구이 철조불상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통일신라 때, 다른 하나는 고려초에 조성된 불상이다. 어떤 불상이 이곳에서 모셔졌는지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때 조성된 불상이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52<불상이 모셔졌던 닫집을 받치는 초석>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2<뒤에서 본 모습>

금당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된 철조여래좌상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형태나 양식적으로 거의 유사한 불상이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상으로 현재 출토된 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부처. 철조불좌상, 통일신라 8세기,서산 운산면)>

두 손은 없어졌지만 손목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보인다. 몸에 비해 큰 머리, 부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투박하면서, 호족세력의 힘을 과시하는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철불 20220803_01<서산 보원사지 철조여래좌상, 고려 11세기, 2022년>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0<금당터 뒷편 강당과 회랑이 있던 자리>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46<앞쪽 회랑터>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4<보원사지 절터>

강당 뒷편에는 축대로 약간 높게 공간을 조성되어 있다. 고려초 국사와 왕사를 지냈으며 이곳에서 입적했던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신 승탑과 탑비가 모셔져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북한산 장의사에서 불경 등을 배웠으며, 고려 광종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 때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광종은 ‘법인(法印)’이라 시호와, ‘보승(寶乘)’이라는 탑이름을 내렸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2<법인국사탑과 탑비>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6<보원사지 법인국사탑(보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08<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보물)>

보원사지 절터는 2006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절터에서는 발굴,조사결과 출토된 건물 주춧돌 등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5<절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20<주춧돌과 기단 석재>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8<주춧돌>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6<건물 기단 석재 등>

서산  보원사지(사적) 20230316_19<기와 조각>

SANYO DIGITAL CAMERA<발굴당시 모습(당간지주 부근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중문 주변>

SANYO DIGITAL CAMERA<중문 안 회랑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북쪽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금당터 남쪽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남쪽 건물터>

서산 보원사지 불상 20220803_01<금동불입상, 서산 보원사터 출토, 삼국시대 6세기 중엽, 국립중앙박물관>

서산 보원사지, 사적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조,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백제 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의 철조여래좌상도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안내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9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5. 위키백과, 2023년

경주 장항리 사지(사적)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장항리 사지(사적)이다. 불국사에서 감은사지와 대왕암으로 연결되는 도로변에서 볼 수 있는 절터이다. 절터에는 서오층석탑(국보)와 동탑의 석재들,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토함산 동남쪽 계곡에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좁은 공간에 2개의 탑을 세우고 동쪽에 금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이나 회랑 건물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형적인 쌍탑, 1금당의 가람배치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석조대좌 위에 놓여 있던 불상은 상반신만 남아 있는데 현재는 경주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절의 이름이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장항리사지(사적)>

절터 동쪽에는 불상을 모셨던 석조대좌가 남아 있는 금당터가 있다. 석조대좌에는 안상에 신장상과 동물상이 새겨져 있으며 위에는 불상을 꽂았던 큰 구멍이 있다. 불상은 절터에 흩어져 있었는데 복원하여 경주박물관 마당에 전시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

OLYMPUS DIGITAL CAMERA<경주박물관에 전시된 불상>

OLYMPUS DIGITAL CAMERA<석조대좌>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에서 볼 수 있는 주춧돌>

절터는 동.서 2개의 오층석탑이 세워진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서탑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동탑은 계곡에 남아 있던 1층 몸돌과 머리돌들을 모아서 쌓아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서 오층석탑>

탑은 2층 기단위에 5층 탑신을 올려놓은 오층석탑이다. 탑을 구성하는 각 부분의 비례가 안정적이며, 돌을 다듬은 조각수법도 뛰어나다. 경주에서는 흔치 않은 오층석탑 형식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국보)>

OLYMPUS DIGITAL CAMERA<동오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1층 몸돌에 새겨진 문짝과 인왕상(남쪽)>

OLYMPUS DIGITAL CAMERA<인왕상 (동쪽)>

OLYMPUS DIGITAL CAMERA<인왕상 (북쪽)>

OLYMPUS DIGITAL CAMERA<인왕상 (서쪽)>

절터는 경주에서 감은사지와 대왕암이 있는 감포해변으로 가는 도로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곳에 절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장항리사지(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절터가 있는 토함산 동쪽 계곡>

경주 장항리 사지, 사적,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1
이 절터는 토함산(吐含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두 계곡과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계곡 물은 대종천(大鐘川)을 따라 흘러 감은사지(感恩寺址)를 지나 대왕암(大王岩) 근처에서 동해에 이른다. 계곡의 높은 절벽 위에 터를 닦고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마련하였다. 잘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만들고 위에 덮개돌을 얹었던 흔적이 있으며 건물의 앞쪽으로 계단을 마련 하였다. 불상을 놓았던 대좌(臺座)가 남아 있는데 아래·위 두개로 되어 있다. 아래 돌은 여덟 방향에 창 모양의 안상 (眼象)을 만들어 네 곳에는 동물을, 다른 네 곳에는 신장(神將)을 조각하였다. 위에 얹은 돌은 아래·위로 붙은 연꽃을 16송이씩 조각하였다. 이 곳에 깨어진 불상이 있었는데 1932년 서탑을 복원하면서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옮겨 일부를 붙여 세웠다.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절 배치에서 보이는 금당 앞의 중문이나 뒤의 강당, 회랑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이 절터에 있는 동·서 5층석탑은 1923년에 도굴꾼들이 무너뜨린 것을 9년 뒤인 1932년에 복원·정비한 것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영묘사, 신라 칠처가람 사천미

영묘사(靈廟寺)는 신라 칠처가람 중 사천미(沙川尾)에 세워진 사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창건되었다. 이절에서 개구리가 3,4일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있었음 감지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유명한 예술가인 양지스님이 작품이 많았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삼존불, 천왕상과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출토유물 중 도깨비얼굴기와에서 화려한 조각수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를 대표하는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이곳에서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국보)을 이곳에 옮겨 왔었다고 전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륜사지(사적)>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지(사적)에서는  ‘흥’자가 적힌 기와와 ‘영묘사’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에 있던 사찰이 ‘영묘사’인지 ‘흥륜사’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묘사’가 새겨진 암키와, 8~9세기, 경주박물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만(万)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즉위하여 나라 다스리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 생략 ~ 둘째는 영묘사(靈廟寺)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은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角干 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삼국유사 권 제1 > 제1기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얼굴무늬 수막새는 경주 영묘사 터 출토된 기와에 사용된 수막새로 사람얼굴을 하고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신라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이 수막새는 경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무늬수막새, 경주 영묘사터, 신라 7세기 전반>

용무늬 얼굴을 하고 있는 기와. 신라 최고 조각가였던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적이고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용얼굴무늬 기와, 경주 영묘사터, 통일신라 8~9세기>

양지사석 (良志使錫 )
석(釋) 양지(良志)의 조상과 고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덕왕(善德王) 때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놓으면 석장(錫杖)은 저절로 날아가 단월(檀越)의 집에 이르러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머무는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그의 신이함을 헤아리기 어려움이 모두 이와 같은 것들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또한 [그는]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의 장륙삼존상(丈六三尊)과 천왕상(天王像)과 전탑의 기와, 천왕사(天王寺) 탑 밑의 8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들이다. 영묘, 법림 두 절의 현판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3천 불상을 만들어 그 탑에 모시어 절 안에 두고 공경하였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는 스스로 입정(入定)하여 정수(正受)의 태도로 대하는 것을 법식(揉式)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성 안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삼국유사 권 제4 > 제5의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수막새, 경주 영묘사터, 중앙박물관>

성덕대왕신종(국보)은 조선 세조 때(1460년) 봉덕사에서 영묘사로 옮겨와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덕대왕신종(국보), 통일신라, 경주박물관>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흥륜사지(사적), 경주에서 처음 세워진 사찰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지(興輪寺址, 사적)이다.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경주 오릉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추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 (天鏡林)에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법흥왕 때(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면서 절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때(533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흥륜사는 이차돈 순교 이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대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진흥왕이 말년이 스스로 주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사찰이다. 흥륜사 금당에는 선덕여왕때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졌으며 벽에는 아도, 이차돈 등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경주를 대표하는 큰 절이었으며,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화재로 소실된뒤 폐사되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석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륜사지(사적)>

절터에는 높이 1.77 m, 너비 3.92 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석조가 남아 있었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규모나 조형미가 상당히 뛰어난 유물이다. 바깥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흥륜사 절터에 있던 것을 경주읍성 안 금학헌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석조유물이 많았던 경주에서도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흥륜사지 출토 석조, 8~9세기, 흥륜사지>

OLYMPUS DIGITAL CAMERA<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3년이 지났을 때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의(巫醫)도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의원을 구하게 하였다. 스님이 급히 대궐로 들어가서 마침내 그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소원을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빈도(貧道)는 백에 [하나도] 구할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일 뿐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착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지붕을 이었는데, [아도는 여기에] 머물면서 강연하니 가끔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절 이름을 흥륜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3 > 제3흥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절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이 곳에서 ‘흥’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흥륜사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이 곳은 선덕여왕때 세운 영묘사 절터이고 실제 흥륜사는 영흥사가 있었던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무늬 수막새, ‘사(寺)’가 새겨진 암키와, ‘흥(興)’이 새겨진 수키와, 연꽃무늬 수막새, 경주 흥륜사터, 통일신라,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연꽃무늬 수막새, 경주 흥륜사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냥무늬전돌, 경주 전 흥륜사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8~9세기, 토제, 중앙박물관>

흥륜사는 신라왕실과 관계가 깊은 아주 큰 절이었지만, 지금은 절터 일부만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는 흥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동경 흥륜사 금당십성
동쪽 벽에 앉아 경방(庚方)을 향한 진흙상은 아도(我道), 염촉(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이고 서쪽 벽에 앉아 갑방(甲方)을 향한 진흙상은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다. (삼국유사 권 제3 > 제3흥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OLYMPUS DIGITAL CAMERA<흥륜사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

이 곳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뒤 544년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흥륜사의 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온 고구려의 승려 아도 (阿道)가 미추왕의 딸인 성국공주의 병을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낫게 하고자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 (天鏡林)에 이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절의 금당(金堂)에 선덕여왕때의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타삼존상과 아도를 비롯한 신라 십성(新羅十聖)의 상을 흙으로 빚어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 때 처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를 흥륜 사터로 보기도 한다. 절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와 배례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