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절터

경주 흥륜사지(사적), 경주에서 처음 세워진 사찰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지(興輪寺址, 사적)이다.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경주 오릉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추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 (天鏡林)에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법흥왕 때(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면서 절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때(533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흥륜사는 이차돈 순교 이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대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진흥왕이 말년이 스스로 주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사찰이다. 흥륜사 금당에는 선덕여왕때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졌으며 벽에는 아도, 이차돈 등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경주를 대표하는 큰 절이었으며,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화재로 소실된뒤 폐사되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석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륜사지(사적)>

절터에는 높이 1.77 m, 너비 3.92 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석조가 남아 있었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규모나 조형미가 상당히 뛰어난 유물이다. 바깥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흥륜사 절터에 있던 것을 경주읍성 안 금학헌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석조유물이 많았던 경주에서도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흥륜사지 출토 석조, 8~9세기, 흥륜사지>

OLYMPUS DIGITAL CAMERA<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3년이 지났을 때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의(巫醫)도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의원을 구하게 하였다. 스님이 급히 대궐로 들어가서 마침내 그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소원을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빈도(貧道)는 백에 [하나도] 구할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일 뿐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착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지붕을 이었는데, [아도는 여기에] 머물면서 강연하니 가끔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절 이름을 흥륜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3 > 제3흥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절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이 곳에서 ‘흥’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흥륜사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이 곳은 선덕여왕때 세운 영묘사 절터이고 실제 흥륜사는 영흥사가 있었던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무늬 수막새, ‘사(寺)’가 새겨진 암키와, ‘흥(興)’이 새겨진 수키와, 연꽃무늬 수막새, 경주 흥륜사터, 통일신라,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연꽃무늬 수막새, 경주 흥륜사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냥무늬전돌, 경주 전 흥륜사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8~9세기, 토제, 중앙박물관>

흥륜사는 신라왕실과 관계가 깊은 아주 큰 절이었지만, 지금은 절터 일부만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는 흥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동경 흥륜사 금당십성
동쪽 벽에 앉아 경방(庚方)을 향한 진흙상은 아도(我道), 염촉(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이고 서쪽 벽에 앉아 갑방(甲方)을 향한 진흙상은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다. (삼국유사 권 제3 > 제3흥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OLYMPUS DIGITAL CAMERA<흥륜사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

이 곳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뒤 544년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흥륜사의 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온 고구려의 승려 아도 (阿道)가 미추왕의 딸인 성국공주의 병을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낫게 하고자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 (天鏡林)에 이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절의 금당(金堂)에 선덕여왕때의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타삼존상과 아도를 비롯한 신라 십성(新羅十聖)의 상을 흙으로 빚어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 때 처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를 흥륜 사터로 보기도 한다. 절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와 배례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고선사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사찰

경북 경주시 암곡동에 있었던 고선사(高仙寺) 절터 출토유물들이다. 고선사의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원효가 머물렀던 곳으로 신라 29대 무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1913년 절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조각이 발견되었다. 절터에는 신라를 대표하는 석탑 중 하나인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거북받침돌 석등대석 등이 있었다. 1975년 덕동댐 공사로 절터가 수몰되면서 유물들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삼국유사 권 제4 > 제5의해(義解第五) 사복불언 (蛇福不言 ), 사복과 원효의 만남
하루는 그 어머니가 돌아가니, 이때 원효(元曉)는 고선사(高仙寺)註 273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원효가 그를 보고 예를 갖춰 맞이하였다. 사복은 답배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經)을 실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함께 장사지냄이 어떻겠소?”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4 > 제5의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서당화상비는 고선사 절터 출토된 원효대사를 기르는 비석이다. 9세기초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당화상비, 경주 고선사지, 통일신라>

신라 출신의 위대한 승려이자 사상가였던 원효대사를 기리며 세운 비석으로 서당화상은 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효대사는 지금의 경산 지방인 압량군 남쪽 불지촌에서 태어나 15세 무렵에 출가하였습니다. 그는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 유학을 가던 도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발걸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이후 수행과 저술에 힘쓰는 한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하층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비석은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애장왕 때 세운 것입니다. 그 뒤에 어느 때인가 파손되었으나, 1914년 고선사 터에서 아랫부분이, 1960년대에 경주시내 민가에서 윗부분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석을 받쳤던 귀부는 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의 고선사 터 삼층석탑 옆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비문은 33줄이며 한 줄에 61개의 글자가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의 내용은 ‘십문화쟁론’을 비롯한 대표적인 저술서의 성격, 수학과정과 행적, 입적한 장소와 시기, 비석의 건립과 추모사업등을 담고 있어서 원효대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경주박물관에는 고선사지에서 출토된 거북받침돌을 볼 수 있다. 서당화상비가 있던 거북받침돌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비석의 규모에 비해 크기가 작아 다른 비석의 받침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선사지 출토 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 <금동 문 장식, 7세기, 고선사터>

문에 달린 빗장의 일부였습니다. 덕동댐 건설로 1975년 수몰된 경주 고선사터의 금당터 서북회랑 바깥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끝부분은 세 잎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중간에 수직으로 돌출된 부분은 연꽃처럼 만들어 구멍을 뚫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고선사 건물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지대석>

고선사(高仙寺)
고선사는 원래 알천 상류인 경주시 암곡동에 있던 절로, 현재 이 곳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문왕 때 원효대사(617~686)가 머무르던 곳이라고 합니다. 1914년 5월 원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어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 이전에 사찰의 면모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에는 ‘현종 12년(1021) 고선사의 금란가사와 불정골 등을 내전에 두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절의 법등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75년 이 절터를 발굴하였는데,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 터를 확인하였고, 금동불, 기와, 전돌 등 많은 문화재를 찾아냈습니다. 여기 있는 석탑과 금당 터, 비각터의 지대석과 비석받침은 절터에서 옮겨온 것들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2015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3. 삼국유사 권 제4  제5의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경주 임천사지

경북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임천사(林泉寺) 절터이다. 임천사는 경주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변에 있던 통일신라 때 사찰이다. <삼국사기>에 성덕왕 때 큰 가뭄이 들자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임천사 절터에 있던 석탑과 건축부재 등이 제방 안쪽에 있었는데 1991년 태풍 때 일부 유실되면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신라 41대 헌덕왕릉 남쪽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헌덕왕릉이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임천사와 천림사는 같은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천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헌덕왕릉 남쪽 제방 일대>

가물이 들어 거사 이효가 비가 내려주기를 빌게 하다 ( 715년 06월(음) ), 6월에 크게 가물었다.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에서 비가 내려주기를 빌게 하였더니, 곧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성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헌덕왕이 죽다 ( 826년 10월(음) ), 〔18년(826)〕 겨울 10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헌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기 전 석조유물들이 놓여 있던 곳>

가물이 들어 거사 이효가 비가 내려주기를 빌게 하다 ( 715년 06월(음) )
6월에 크게 가물었다.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에서 비가 내려주기를 빌게 하였더니, 곧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헌덕왕이 죽다 ( 826년 10월(음) )
〔18년(826)〕 겨울 10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OLYMPUS DIGITAL CAMERA<임천사지 출토 석탑 지붕돌>

OLYMPUS DIGITAL CAMERA<각종 석조유물들>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지붕돌과 기단 면석 등>

OLYMPUS DIGITAL CAMERA<지붕돌 등>

OLYMPUS DIGITAL CAMERA<석등 받침돌 등>

OLYMPUS DIGITAL CAMERA<건물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등>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유물들>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3.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경주 영흥사지, 경주 칠처가람 삼천기

경북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주변은 삼국시대 경주 칠처가람 중 삼천기(三川岐) 영흥사(永興寺)가 있던 곳이다. 영흥사는 신라 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년 ~ 540년)의 부인 보도부인이 건립한 사찰로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법흥왕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영흥사에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흥사는 경주 남천(문천), 서천(인천), 충효천(모량천) 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있어 삼천기(三川岐)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되는데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는 경주공업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어 옛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학교내 정원과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흥사지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註 001 애공사(哀公寺)註 002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흥사지 절터는 경주공업고등학교 건물을 세우면서 많은 석조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건물기둥을 세웠던 주춧돌이 많이 보이며 석탑을 구성하는 몸돌, 지붕돌 등 다양한 형태의 석조유물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흥사지 출토 석조유물 중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몸돌과 지붕돌로 보이는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다양한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유물>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이차돈은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기는 숲에 절을 지어서 귀족들이 반발했는데, 이후에 이들 천경림에 지은 숲을 칠처가람이라고 한다. 그 중 서쪽을 중요시해서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비롯하여 영흥사, 담엄사, 영묘사 등이 경주도심의 서쪽 형산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룡사와 분황사는 도심 중앙에, 사천왕사는 남쪽인 낭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주공업고등학교 주변 마을과 신라초등학교 일대는 형산강 범람을 막기 위한 삼천기 천경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공업고등학교와 신라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앞 마을,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천령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골목길>

OLYMPUS DIGITAL CAMERA<초등학교 옆 공터>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2.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사전/박물지시범개발, 한국콘텐츠진흥원, 2007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경북 경주시 보문동 절터에 남아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보물)이다.  이 당간지주는 보문사 금당터가 있는 중심영역에서 북쪽으로  5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 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특히 지주 윗부분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연꽃잎을 새겨 놓고 있다. 이런 형태의 당간지주는 다른 사찰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보문사 절터에는 현재 2개의 당간지주가 남이 있어 별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연화문>

보문동 일대는 신라를 건국한 경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명활산 고야촌이 있던 지역이다.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비부가 되었으며 설(薛)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설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총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 마을에 남아 있다. 설씨 집안이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보문사지 절터>

경주 보문사지(普門寺址) 연화문(蓮華文) 당간지주(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752-1
당간(幢竿)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 한다.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는 146cm이다. 기둥의 아랫부분이 상당히 매몰되어 있어 간대나 기단부의 구조를 확인 할 수 없다.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동서로 62cm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기둥의 안쪽 윗부분에 있는 너비 13cm의 큼직한 구멍은 당간을 고정시켰던 장치이다. 특히 이 당간지주의 윗부분 바깥 측면에 설정된 방형구획 안에는 지름 47cm의 팔엽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의 원래 소속사원이 동남쪽에 터가 남아 있는 보문사 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제작연대는 8세기 중엽 이후로 생각되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 중에서 가장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주목 되는 작품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