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절터

경주 영흥사지, 경주 칠처가람 삼천기

경북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주변은 삼국시대 경주 칠처가람 중 삼천기(三川岐) 영흥사(永興寺)가 있던 곳이다. 영흥사는 신라 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년 ~ 540년)의 부인 보도부인이 건립한 사찰로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법흥왕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영흥사에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흥사는 경주 남천(문천), 서천(인천), 충효천(모량천) 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있어 삼천기(三川岐)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되는데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는 경주공업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어 옛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학교내 정원과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흥사지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註 001 애공사(哀公寺)註 002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흥사지 절터는 경주공업고등학교 건물을 세우면서 많은 석조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건물기둥을 세웠던 주춧돌이 많이 보이며 석탑을 구성하는 몸돌, 지붕돌 등 다양한 형태의 석조유물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흥사지 출토 석조유물 중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몸돌과 지붕돌로 보이는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다양한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유물>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이차돈은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기는 숲에 절을 지어서 귀족들이 반발했는데, 이후에 이들 천경림에 지은 숲을 칠처가람이라고 한다. 그 중 서쪽을 중요시해서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비롯하여 영흥사, 담엄사, 영묘사 등이 경주도심의 서쪽 형산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룡사와 분황사는 도심 중앙에, 사천왕사는 남쪽인 낭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주공업고등학교 주변 마을과 신라초등학교 일대는 형산강 범람을 막기 위한 삼천기 천경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공업고등학교와 신라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앞 마을,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천령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골목길>

OLYMPUS DIGITAL CAMERA<초등학교 옆 공터>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2.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사전/박물지시범개발, 한국콘텐츠진흥원, 2007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경북 경주시 보문동 절터에 남아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보물)이다.  이 당간지주는 보문사 금당터가 있는 중심영역에서 북쪽으로  5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 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특히 지주 윗부분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연꽃잎을 새겨 놓고 있다. 이런 형태의 당간지주는 다른 사찰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보문사 절터에는 현재 2개의 당간지주가 남이 있어 별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확인되지는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연화문>

보문동 일대는 신라를 건국한 경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명활산 고야촌이 있던 지역이다.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비부가 되었으며 설(薛)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설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설총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 마을에 남아 있다. 설씨 집안이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할 수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보문사지 절터>

경주 보문사지(普門寺址) 연화문(蓮華文) 당간지주(보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752-1
당간(幢竿)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 지주라 한다.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는 146cm이다. 기둥의 아랫부분이 상당히 매몰되어 있어 간대나 기단부의 구조를 확인 할 수 없다.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동서로 62cm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기둥의 안쪽 윗부분에 있는 너비 13cm의 큼직한 구멍은 당간을 고정시켰던 장치이다. 특히 이 당간지주의 윗부분 바깥 측면에 설정된 방형구획 안에는 지름 47cm의 팔엽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의 원래 소속사원이 동남쪽에 터가 남아 있는 보문사 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제작연대는 8세기 중엽 이후로 생각되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 중에서 가장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주목 되는 작품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통일신라 절터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천군동 사지(사적)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으며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 강당, 중문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남북 79 m, 동서 61 m이다. 발굴당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기와이며 절터에서는 화강석 건축자재 일부를 볼 수 있다.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지만 다른 사찰과는 달리 금당 좌우에 회랑을 두고 있지 않다. 석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 이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절터에는 2기의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데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특징인 ‘두개의 탑’이 세워진 형태를 하고 있다. 마을 들판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9년에 복원하였다. 동탑은 기단과 탑신만 남아 있고, 서탑에는 머리돌 장식이 일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서탑>

현재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절터 동쪽편으로는 경주 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는 세계문화엑스포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절터>

삼층석탑 주변에는 절터에서 출토된 석재들을 볼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기와조각같은 유물들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특별한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재들을 볼 수 있는 삼층석탑 옆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천군동사지가 있는 마을은 경주와 동해안 감포 등을 연결해 주는 4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또한 보문관광단지에서 불국사를 거쳐 울산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이 마을 부근에서 4번국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인근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찰인 고선사가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천군동 사지(사적)>

경주 천군리 사지(千軍里 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548-1
이 절터는 여기에 있던 절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동리이름을 따서 천군리 절터라고 부른다. 무너진 탑재와 주춧돌만 흩어져 있었는데, 1938년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의해 중문·금당 · 강당자리가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1금당식 (雙塔一金堂式)이다. 앞에는 중문이 있고 그 안쪽 동서에 두 탑이 있으며, 그 뒤로 금당터와 강당터가 자리하고 둘레에는 회랑터가 있다. 중문터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이고, 금당은 앞면과 옆면이 각각 5칸, 강당은 앞면 8칸에 옆면 3칸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남북 길이는 79m, 동서 길이는 61m정도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기와와 벽돌 종류로 지붕 맨 윗부분(용마루)의 양쪽 끝을 장식하였던 치미(尾)는 국립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쌍탑식 절 배치를 따랐지만 금당 좌우에 회랑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 절터는 현재 논밭으로 변하여 원래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동·서탑을 1939년에 다시 세워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천관사지(사적), 귀족 가문의 후원을 받아 세워졌던 도심 사찰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이다. 천관사는 통일신라 때 김유신이 인연이 있었던 기생 천관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건립 이후 그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중기 이곳을 지나던 이공승이라는 사람이 천관사 내력과 관련된 시를 남긴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 사찰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가 있는 곳은 통일신라 때 귀족층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가문의 후원을 받아 도심 주택가에 세워진 사찰의 입지조건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관사지(사적)>

이찬 김주원(伊飡 金周元)은 처음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재상이 되었는데 꿈 중에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 생략 ~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대답하기를 “청컨대 은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자 [왕은] 이에 따랐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원성대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절터는 오랜 세월 농경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00년 이후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출토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석재>

천관사 석탑을 장식했던 팔부중상 중 가루라상이 표현한 탑신 몸돌이 출토되었다. 가루라는 ‘상상의 새’를 말하는데 이를 이인화하여 입을 새부리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팔부중, 8세기, 경주 천관사지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2012년 발굴.조사 현장>

천관사는 경주 오릉 동쪽편 들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동남쪽 500 m, 김유신 집터인 재매정(사적)과는 4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북동쪽 경주 월성 일대>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에서 천관사 절터로 들어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재매정(사적),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집터>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서쪽 경주 오릉 부근 마을>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4
이 절터는 도당산 서꼭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전관 (天官)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南明大人)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갈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 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天官寺)라 하였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李公升)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국립 경주문화개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분황사지(사적), 신라 경주 칠처가람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터인 분황사지(사적)이다. 분황사(芬皇寺)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 선덕여왕 때(634년) 창건되었는데 경주의 신성한 숲 7곳에 조성했던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하나이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계율종을 창시한 자장(慈藏, 590 ~ 658년)과 원효(元曉, 617 ~ 686년)가 머물면서 수행했다. 황룡사와 함께 선덕왕의 후원을 받았던 높은 위상의 사찰이었으며 원효가 창시했다고 여겨지는 불교 법성종(法性宗) 중심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이후 법성종이 번성하지 못하고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크게 쇠퇴하여 작은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분황사지(사적)>

분황사가 완성되다 ( 634년 (음) ), 〔3년(634)〕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선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분황사 관음보살상과 단속사 유마상, 또 경주의 분황사 관음보살과 진주의 단속사 유마상(維摩像)도 모두 그의 필적이다. 대대로 신화(神畵)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권 제48 열전 제8 솔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분황사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를 비롯하여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 웅장한 약사여래상이 모셔졌던 사찰이다. 분황사는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큰 사찰이었는데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각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원효대사비를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당간지주, 석정 등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칠처가람의 신성한 숲을 연상시키는 분황사 전경>

2008년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 석탑 남쪽에 중문터와 긴 회랑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앞쪽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건물은 석탑, 금당, 중문이 남북으로 일직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 황룡사와 담을 맞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발굴 현장 모습>

SANYO DIGITAL CAMERA<발굴, 조사 당시 남쪽 중문터와 회랑터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구황동 당간지주>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옛날 절에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 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cm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臺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 기둥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지 동쪽 건물터>

경북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절터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국보 30호)이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것으로 선덕왕 때  세워졌다.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등이 화강석을 이용해서 목탑처럼 쌓은 것이라면, 분황사 모전석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7세기 신라의 조각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왕상>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SANYO DIGITAL CAMERA<분황사 석탑을 쌓았던 석재들>

석탑에는 사리와 함께 수정.금바늘 등의 공양품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비교적 초기의 사리갖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집게 등이 있어 분황사의 발원자인 선덕왕과 이 사리갖춤을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 <수정, 향유병, 장신구>

OLYMPUS DIGITAL CAMERA <선덕여왕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쪽집게>

분황사에는 삼국시대 돌우물(石井)이 남아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바깥쪽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는 유서깊은 우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석정>

분황사 석정(芬皇寺石井)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응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인 사성체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 11년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통지, 청지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사신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어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넣어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분황사지석탑 옆에는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인 화쟁국사비 받침돌이 남아 있다. 고려 명종 때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추사 김정희가 절근처에서 발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쟁국사비 받침돌>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이 비부는 고려사에 세워진 원로 비 의 받침들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 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비는 없이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비신을 받쳤던 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비적’ 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비대는 직육면체이고, 상대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분황사는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북면 세곳에 불전을 배치한 품(品)자형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흘 하고 있는 신라 최초의 공간배치이다. 기록에 따르면 30만근 이상의 구리를 들여 약사여래상을 조성해 금당에 안치하였으며 화가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도 있었다고 한다.

경주 분황사지 03<분황사 가람배치>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출토 석조 유물>

SANYO DIGITAL CAMERA<불상과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자, 7~8세기, 분황사>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보상화무늬수막새, 새무늬암맥새, 분황사 출토>

현재의 분황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되었는데 약사여래를 모신 보광전이 옛 북금당터 한쪽편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보광전>

분황사(芬皇寺), 사적 548호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유서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주석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率居)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755)에 강고내말(强古乃木)이 구리 306,7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寺格)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중문.석탑.3금당·강당·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寺域)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 구황동 당간지주,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 등의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5.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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