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회화

허목 초상 (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허목 초상(보물)이다. 조선후기 정조가 허목을 그의 초상화를 얻고자하여 채재공을 중심으로 그의 집에 82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화가 이명기가 보고 그린 그림이다. 생시에 그린 초상화는 아니지만 17세기 사대부 초상화의 형식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당대의 이름난 화가의 솜씨를 잘 보여주는 초상화이다. 오른쪽에 채제공이 쓴 표제가 있다.

허목 초상 (보물)20230809_00
<허목 초상, 보물, 조선 1794, 복제품>

허목 초상 (보물)20230809_01<그림 부분>

허목 초상, 복제품, 이명기 (1756~?), 조선 1794년
미수 허목(1595~1682년)은 현종 1년 (1660)에 삼척부사로 임명받아 그해 10월에 부임해서 현종 2년(1662) 8월까지 재임했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임명된 것은 기해예송(己亥禮訟)으로 인한 좌천성 인사였지만, 허목은 60대 후반에 2년 남짓 삼척부사로 재임하면서 삼척 최초의 사찬(私撰) 읍지인 <척주지(陟州誌)>를 발간했다. 또한 풍수해를 자주 입는 지역 상황을 보고 <동해송>을 지어 정라도에 척주동해비를 세웠다. 유학자였던 허목은 삼척 주민들에게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고 100호 단위마다 마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허목의 초상화는 초상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화가 이명기가 본래 있었던 허목의 82세 초상화를 옮겨 그린 그림이다. 그림 장황 윗단에 있는 번암 채제공의 발문에는 정조 18년(1794) 정조가 허목을 오랫동안 흠모하여 초상화를 구해보기를 원하여 이명기에게 모사하여 올리도록 했다는 사실이 쓰여 있다. 검은 색 사모에 엷은 분홍색 포 소뿔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한 반신상으로 흰 눈썹과 수염이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안내문, 국립춘천박물관, 2023년)

<출처>

  1. 안내문, 국립춘천박물관, 2023년
  2. “보물 허목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국보)

충남 청양군 대치면 칠갑산 장곡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미륵불 괘불탱(長谷寺 彌勒佛 掛佛幀, 국보)이다. 전체 897.6 x 585.7 cm의 큰 괘불로 조선후기 현종 때(1673년) 철학을 비롯한 승려화가 5명이 참여하여 그린 작품이다. 미륵불을 중심에 두고 6대 여래, 6대 보살 등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미륵불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풍만하고 살찐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고 녹색, 연록색, 주황 등의 색조를 사용하여 밝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미륵불을 본존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광경을 표현한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등장인물과 배치구도를 하고 있다.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국보) 20231006_01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국보)>

머리에는 4구의 작은 불상이 있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윗쪽에 석가여래, 양쪽에 아미타여래와 노사나불이 배치되어 있다.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미륵불 양쪽에 다시 크게 그려져 있다.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국보) 20231006_11<얼굴 부분>

오른쪽 위에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다보여래, 약사여래, 문수보살, 관음보살, 대묘상보살과 가섭존자, 사천왕 등이 배치되어 있다.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국보) 20231006_04
<다보여래, 약사여래, 문수보살, 관음보살, 노사나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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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묘상보살, 가섭존자, 다문천왕, 동방지국천왕, 상방대법천왕>

왼쪽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 석가문불,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법림보살, 아난존사, 사천왕 등이 배치되어 있다.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국보) 20231006_03
<아미타불, 석가문불,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비로자나>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국보) 20231006_02
<법림보살, 아난존자, 광목천왕, 증자천왕, 제석천왕>

 <출처>

  1. “국보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2.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서궐도안(보물), 경희궁을 그린 그림

서울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궐도안(보물)>이다. 경희궁의 건축과 주변의 자연경관을 한눈에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다. <동궐도(국보)>와는 달리 채색되지 않은 먹만을 사용해서 표현한 밑그림이다. 기록이나 낙관이 없어서 화가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그려진 것을 추청하고 있다. 경희궁 전각 대부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다. 옛 경희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외규장각과 의궤 20230308_29<서궐도안,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고려대학교박물관, 보물>

경희궁은 임진왜란 창덕궁이 공식적인 궁궐인 법궁(法宮)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이궁(離宮)으로 자리잡으면서 서궐(西闕)로 불렸다. 법궁으로 세워진 경복궁과는 달리 경희궁은 인왕산 자락 아래 경사진 지형에 맞추어 전각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였다. 정전인 숭전전이 인왕산 자락 아래 서쪽편에 치우쳐 있고, 정문인 흥화문은 종로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궐내각사와 동궁전 흥화문 주변에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국왕과 가족들이 거처하는 편전과 내전들이 들어서 있었다. 숭정전 서쪽 인왕산 자락에는 국왕이 도심 풍경을 감상하면서 쉴 수 있도록 영취정과 춘화정 같은 정자들과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외규장각과 의궤 20230308_30<정전인 인 숭전전과 내전이 있는 영역>

법궁과는 달리 정전위주의 공간배치가 아닌 왕실가족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궐내각사의 규모 또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궁궐 규모는 동궐보다 작지만,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지대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도성 안팎의 경치를 조망하기에 좋은 장점이 있었다. 특히, 숙종과 영조, 정조는 서궐에 머물면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외규장각과 의궤 20230308_31<동쪽편>

경희궁은 국왕이 임시로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세워졌기때문에 주변지형이나 환경에 적절히 맞추어 전각들을 배치하였다. 법궁과는 달리 국왕 일상적으로 머무는 편전과 내전, 왕실가족이 거처하는 전각 위주로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정전인 숭정전이 서쪽편에 치우쳐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외규장각과 의궤 20230308_32<서쪽편>

지금의 경희궁 전경을 그린 초본입니다. 12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서 경희궁의 여러 전각과 주변 언덕의 자연 경관을 담았습니다. 경희궁은 1620년에 건립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불렀고, 별칭으로 ‘서궐(西闕)’이라고 했습니다. 1693년에 쇠락한 건물들을 전반적으로 수리하였고, 1829년에 큰 불이 나자 이듬해부터 2년에 걸쳐 주요 전각들을 새로 지었습니다. 두 차례의 공사 내용이 <경덕궁수리소의궤>와 <서궐영건도감의구>로 남아 있습니다. <서궐도안>은 숙종 때의 공사와 순조 때의 공사 사이 기간에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궁궐 전체 규모와 구체적인 전각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위의 두 의궤와 이 <서궐도안>을 통해서 경희궁의 원래 모습을 추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2. ‘보물 서궐도안’,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조영복 초상(보물)

경기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영복 초상(보물)’이다. 조선중기 때 문신 조영복을 그린 초상화 2점이다. 도포를 입은 초상화는 동생 조영석이 그린 작품으로 유학자의 기품이 잘 드러난 사대부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른 초상화는 당대 유명화가인 진재해가 그린 것으로 조선후기 공신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같은 시기에 동일한 인물을 두고 다른 성격을 표현하고 있어 그림의 성격과 특성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조영복 초상(보물) 20230308_01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의 초상화, 1724년(경종 4), 비단에 채색, 경기도박물관, 보물>

조영복 초상(보물) 20230308_02<얼굴부분>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의 초상화, 1725년(영조1), 비단에 채색, 경기도박물관, 보물
사대부 출신 화가 조영석(1686~1761)이 자신의 맏형 조영복의 54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1724년(경종 4) 조영복이 충청도 영춘(단양)으로 귀양을 가자 그를 찾아가 초본을 그렸고, 조영복이 귀양에서 풀려난 이듬해에 채색한 것입니다. 1713년(숙종 39) 도사(圖寫)한 숙종의 어진을 1748년(영조 24)에 다시 그릴 때, 영조가 이 그림이 실제 조영복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고 칭찬하면서 조영석에게 숙종 어진을 맡아 그려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영석은 기예(技藝)로 왕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의 예가 아니라며 거부하였습니다. 영조는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따로 책임을 묻지는 않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조영복_초상(공복입은_모습)
<조영복의 초상화(공복입은 모습), 1725년(영조1), 비단에 채색, 경기도박물관, 보물>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2. ‘보물 조영복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축서사 괘불탱(보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축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괘불탱(보물)이다. 모시바탕에 채색을 한 그림으로 화면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독존 형색의 괘불이지만 광배 위로 화불과 보살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 형태가 원만하고 사용된 색채는 선명하면서도 화려하여 밝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조성 내력을 적은 기록에 따르면 영조 때(1768년) 정일 스님 등 10명의 승려가 참여하여 조성한 것이라 한다. 복장주머니에서 후령통을 비롯하여 사리와 씨앗류, 다리니, 괘불원문 등이 발견되었다.

봉화 축서사 괘불(보물) 20221116_01
<축서사 괘불, 조선 1768년, 봉화 축서사, 보물>

봉화 축서사 괘불(보물) 20221116_02<얼굴 부분>

봉화 축서사 괘불(보물) 20221116_03<아랫 부분>

복장품<복장 유물>

봉화 축서사 괘불(보물) 20221116_04<불교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축서사 괘불, 조선 1768년, 봉화 축서사, 보물
괘불은 사찰 야외에서 설행되는 의식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대형 화폭에 제작되었으며 당시의 신앙 양상을 비롯한 종교문화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축서사 괘불은 화면 중앙에 입상의 석가모니불이 강림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주변을 가득 메운 채운(彩雲)은 법석에 상서로운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다. 축서사 괘불은 석가모니불 독존 형식의 괘불이지만, 광배 위로는 화불과 보살을 표현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이전에 조성된 석가모니불 독존 괘불에는 보이지 않는 새롭게 나타난 도상이다. 다만 축서사 괘불 이후에 조성된 <서산 개심사 영산회 괘불>을 조성한 유성 스님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포항 보경사 팔상도>(18세기)를 조성하는데 함께 참여하였다. 축서사 괘불은 정일 스님과 낙선, 일성 스님 등 10명의 스님들이 1768년 3월 14일에 시작하여 25일간 작업하였으며, 4월에 축서사 대적광전에 점안 및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불화 조성에는 환성 지인 스님의 3세손이자 1769년 봉정사의 경판 조성 불사를 증명하였던 벽허 명찬 스님이 증명으로 참여하고 있어, 당시 영남 북부지역 문중 불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2. ‘보물 축서사 괘불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