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범종, 공양구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안동 광흥사에 전해오는 동종(보물)이다. 1583년에 만들어진 종으로 한국 범종을 전통적인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높이 60cm 정도의 작은 종이지만 매끄러운 곡선과 사실적인 용의 표현 등 조각수법이 우수하다. 세부 문양은 단순하지만 4면에 표현된 보살입상이 돋보인다. 기록된 명문에 따르면 인근 수암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사장과 승장의 협업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01<광흥사 동종, 조선 1583년, 안동 광흥사, 보물>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02<옆면>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03<뒷면>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04<옆면>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11
<보살상과 명문>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12
<보살상>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13
<보살상과 명문>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14
<보살상과 명문>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07<용뉴와 음통>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08<뒤에서 본 모습>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09<연곽과 연뢰>

안동 광흥사 동종(보물) 20221116_10<하대>

광흥사 동종, 조선 1583년, 안동 광흥사, 보물
광흥사 동종은 크기는 작지만 종신의 매끄러운 곡선과 사실적인 용의 표현 등에서 완성도를 보여준다. 종신에 점으로 새겨진 주종기가 남아 있어, 1583년 하가산 수암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종의 조성은 주장 김자산과 17세기 조각승인 원오 스님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사장과 승장의 협업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2. ‘보물 광흥사 동종,’,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봉업사명 청동향로(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봉업사명 청동향로(보물)’이다.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봉업사 절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몸체와 덮개, 세개의 발이 달린 기대(器臺)로 구성되어 있다. 향로의 중간 부분은 고려시대 향완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뚜껑에는 보주가 달려 있다. 전체적인 비례감과 형태에서 주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뚜껑에 ‘봉업사(奉業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고려초 봉업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업사명 청동향로(보물) 20220824_01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 고려 11~12세기,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봉업사명 청동향로(보물) 20220824_02<뚜껑에 달린 보주>

봉업사명 청동향로(보물) 20220824_03<세개의 발이 달린 몸체 받침>

봉업사지는 경기도와 충북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 절터이다. 고려 태조가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성 봉업사지 절터>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 고려 11~12세기,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청동은 본래 황색 광택이 있지만 표면에 청록색 녹이 잘 슬어서 ‘푸른 동’, 즉 ‘청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향로는 불교 의식에서 잡귀를 쫒고 잡념을 엀애려고 향을 피울 때 사용한 기물이다. 이 향로는 형태가 간결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고르게 핀 청동녹이 아름답다. 향로 표면에 새겨진 글씨로 고려 태조 어진을 모신 봉업사에서 제작된 향로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보물 봉업사명 청동향로’,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경주 흥륜사지 출토 석조

국립경주박물관 마다에 있는 흥륜사지 출토 석조(石槽)이다. 높이 1.77 m, 너비 3.92 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석조이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규모나 조형미가 상당히 뛰어난 유물이다. 바깥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흥륜사 절터에 있던 것을 경주읍성 안 금학헌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석조유물이 많았던 경주에서도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륜사지 출토 석조, 통일신라 8~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에 새겨진 “天光雲影(천광운영)”>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경주 흥륜사지(사적)>

석조, 경주 흥륜사터 출토, 통일신라 8~9세기
석조(石槽)는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 내부를 파내어, 절 등에서 물을 담았던 것입니다. 이 석조에는 많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조의 윗부분에는 경주 부윤(지금의 시장) 이필영이 조선 인조 16년(1638)에 이 석조를 흥륜사(興輪寺, 신라 최초의 절)에서 경주읍성 안 금학헌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 습니다. 이 내용이 새겨진 반대편에는 이교방이 무자년 유두날 이 석조를 보고 지은 칠언절구가 있습니다. 측면에는 석조에 담긴 물에 하늘이 비친 것을 표현한 “天光雲影(천광운영)”을 크게 새겨 넣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시안(Xi'an) 비림박물관] 당 경운종(景雲鐘), 시안 종루에 걸려 있던 종

시안 비림박물관 마당에 있는 경운종(景雲鐘, Jingyun Bell)이다. 황실 도교 관청인 경룡관(景龍觀)에서 만들어 ‘경룡관종’으로 불렸으며, 당 예종 경운 2년(711)에 만들어져 경운종이라 부른다. 명나라 때 시안 종루가 세워지면서 1953년까지 종로에 걸려 시간을 알려주었다. 통일신라 성덕대왕 신종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같은 역할을 했던 중국을 대표하는 종이다. 중국 국가1급문물에 지정된 중요한 문화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비림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져 있는 당 경운종.>

종은 높이 2.47 m, 무게는 6 톤으로 위에 짐승모양 고리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6각형을 이루고 있다. 몸체는 위, 중간 및 아래쪽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은 6 개의 사각형으로 나뉩니다. 아래 부분 가운데는 당 5대 황제 예종 이단(李旦) 쓴 글이 새겨져 있다. 글의 내용은 도교의 신비와 종에 예찬 등 이다. 다른 부분에는 봉황, 사자, 학, 소 등을 표현하고 있으며 322개의 상서로운 구름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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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경운종. 전체적으로 6각형을 이루고 있다.>

각면에는 글씨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양들이 조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당 예종이 직접 글을 짓고 글을 쓴 부분. 글자가 지금까지도 또렷히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각 면에는 봉황, 학, 사자 등을 새겨 놓고 있으며, 주위에 상스러운 구름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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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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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 봉황이 조각되어 있는데 중국의 전통적인 봉황문양과 약간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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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소가 새겨져 있다.>

용, 호랑이 등을 표현한 전통적인 문양과는 달리 서역 불교 등의 영향을 받아 사자, 소 등이 표현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종을 매다는 고리. 음통이 있는 신라 범종과는 다른 중국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운종이 걸려 있던 시안 종루.>

1953년 비림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지금은 복제품이 종루에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박물관에 걸려 있는 성덕대왕 신종(국보).>

경운종보다 60년 정도 늦은 771년에 만들어졌는데 경운종과 마찬가지로 성덕대왕을 칭송하는 글자가 비슷한 규모로 새겨져 있다.

경운종(景雲鐘, Jingyun Bell). 당 경운 2년(711), 당예종 이단 찬 및 서
This bell was cast in the 2nd year of Jingyun Period of the Tang Dynasty(711), hence its name. It weighs six tons, with beast button on its top. The rim of it is in the shape of hexagon. The body of the bell is divided into three sections, the upper, middle and the lower ones, each section is subdivided into six squares. The middle square in the lower section is engraved with inscriptions, which were composed and written by Emperor Riuzong (Li Dan) of Tang Dynasty. it tells us the mystery of the Taoism and some words of praise of the bell. The other sections are decorated with exquisite designs that include the representations of phoenix, lion, crane, and cow as well as auspicious clouds together with the 32 nipples that work both as decoration and rhythm adjustment. (안내문, 시안 비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 비림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석등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영암사지(사적) 절터에 남아 있는 쌍사자석등(보물)이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석등으로 금당터 앞 석축 위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2마리의 사자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2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마주선 모습인데 갈기와 꼬리, 근유 등을 사실적을 표현하고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고 4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와 비슷한 형태이며,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영암사지는 합천군 황매산 남쪽 자락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이다. 창건연대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 때 적연선사가 입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망이 아주 좋은 황매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축대를 쌓아 인공적으로 절터를 조성했는데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절터에는 쌍사자석등(보물 353호), 삼층석탑(보물 480호)와 거북받침돌(보물 489호) 2기가 남아 있으며, 금동여래입상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물과 건축부재 등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두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석등으로 생동감있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등을 8각을 기본 평면으로 하고 있다. 아래 받침돌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형태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조각해 놓았다. 사자의 갈퀴, 꼬리, 몸통의 근육 등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을 밝히는 화사석, 쌍사자에 비해 조각 수법이나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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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금당 앞에 별도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석등이 올려져 있다. 석축 옆에는 석등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계단이 있다. 석등 아래에 삼층석탑이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반대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황매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영암사지. 영주 부석사처럼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고 건물터를 조성했다. 절터는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353호,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을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 5호)과 견줄 수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합천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합천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