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금속공예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충북 청주시 상당군 남문로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국보)이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당간지주, 철당간이 온전히 남아 있어 오래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당간지주의 옛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기둥은 원통모양의 철동 20개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했으며 당간지주 윗부분에는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를 잡아매고 있다. 철통은 원래 30개였는다고 한다. 3번째 철통에는 이 철당간을 세우게 된 내력을 글로 적어놓고 있다.

철당간이 있는 이곳은 고려시대 용두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흥덕사나 많은 금속공예 유물들이 출토된 사뇌사 절터가 인근에 있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금속공예가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면서 이곳에 관아가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청주 도심 중심지로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있었다. 절터는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철당간만이 절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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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당간은 사찰입구 또는 불전 앞에 괘불이나 깃발을 거는 곳을 말한다. 많은 사찰 입구에는 철당간을 세웠던 당간지주가 남이 있지만 철당간은 이곳 청주를 비롯하여 계룡산 갑사, 안성 칠장사에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당간지주에 철당간이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과 당간지주>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을 받치고 있는 바닥돌>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당간지주>

철당간은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현재도 20개의 철통이 남아 있다. 철동은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

OLYMPUS DIGITAL CAMERA<철당간(아래쪽)>

밑에서 세 번째의 철통에 <용두사철당기>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962년 청주 호족 김예종이 병에 걸리자 철당간을 바쳐 절을 장엄할 것을 맹세하며 사촌형 희임 등과 함께 철통 20단을 주조하여 높이 60척의 철당을 세운다.”라 적혀 있다.  ‘준풍3년’이라는 광종의 독자적인 연호와 함께 청주호족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 고려초기 지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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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용주사지 철당간이 있는 이곳은 지금도 청주지역의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 오가는 사람들로 번화한 지역이다. 청주지역에서는 돛대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 홍수를 예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설화가 있어서 도심에 있지만 오늘날까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용주사지 철당간이 있는 청주 도심>

OLYMPUS DIGITAL CAMERA<반대편에서 본 모습>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당간은 사찰 앞에 세워 사찰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사찰의 건립과 함께 많은 수의 당간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대부분 당간을 받치고 있던 지주만이 남아 있다. 철당간이 서 있는 곳은 고려시대 청주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던 용두사가 있던 자리이다. 이 당간은 화강석으로 지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둥근 철통 30여개를 연결하여 세운 것인데, 현재는 20개만이 남아 있다. 이 중 밑에서 세 번째의 철통에 <용두사철당기>가 새겨져 있다. 명문이 새겨진 철당간으로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철당기에는 당간을 세우게 된 내력과 건립연대, 그리고 건립에 관여한 사람들의 관직명이 적혀 있다. 당시 지방경영과 관련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철당기의 끝에는 ‘준풍 3년’(962년)에 주성하였다고 하여, 고려 광종 때 사용했던 독자 연호를 실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청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청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일상 속 청동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서 천자를 중심으로 한 신분질서는 느슨해지고 신분에 따른 사용을 규정한 열정제도도 지켜지지 않으면서 청동예기의 제작이 크게 줄어든다. 또한 철기가 대량생산되면서 무기나 공구 등은 철기로 대체된다. 반면에 일상 생활용품은 여전히 청동기로 제작되었다.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향로나 등잔, 사치품으로 사용된 거울이나 허리띠 등이 새로이 청동기로 만들어진다. 예기로 사용되었던 세발솥(鼎)이나 술통(壺) 등 여러 기물들도 일상생활 용품으로 사용되면서 화려한 장식 등은 간소화되고 실용성을 중시하게 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1<52. 고기 삶는 세발솥(용문정龍文鼎, Ding), 춘추 중기 기원전 7세기 전반 ~ 6세기 전반>

춘추시대가 되면 청동기는 의례보다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해 많이 만듭니다. 이런 실생활 청동기는 화려함보다는 기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용무늬는 가장 중요한 무늬 중 하나입니다. 이 세발솥에 장식한 용무늬는 사방으로 연속되면서 겹칩니다. 혀를 내밀고 있는 용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2<53. 곡식 담는 그릇(반룡문보蟠龍文盙, Fu),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기원전 476년>

여러 기록에 따르면 기장, 벼, 조 등의 곡식을 담는 그릇 보(簠)는 서주 전기에 출현하였습니다. 뚜껑과 몸체는 모양이 같아 서로 뒤집어도 될 정도입니다. 몸체에 뚜껑을 닫으면 직육면체와 비슷한 모습이 됩니다. 뚜껑의 네 변에는 동물머리 모양의 작은 고리가 달려있고 경사진 벽에는 사방으로 연속하는 용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 예기의 변화
청동예기는 춘추시대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많은 종류의 그릇이 사라지거나 형태가 변하고 새로운 예기가 등장하였습니다. 음식물을 담는 그릇인 대(敦)는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곡물 담는 그릇인 보(盙)의 특징이 결합된 새로운 그릇입니다. 술병인 호(壺) 역시 몸통이 납작한 모양이 유행합니다. 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면 대부분의 청동예기가 사라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8<54. 사슴 모양 돗자리 문진(녹형진鹿形鎭, Zhen),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9<54. 사슴 모양 돗자리 문진(녹형진鹿形鎭, Zhen),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한나라 때까지 사람들은 대개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고 앉을 때 돗자리 모서리가 말리거나 옷이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리의 네 모서리를 누르는 돗자리 문진이 발달합니다. 이 사슴 모양 문진은 청동을 도금한 것입니다. 사슴의 등에는 조개껍질을 끼워 넣었으며, 흰색과 옅은 노란색 바탕에 크기가 다른 흑갈색 반점이 있어 열대나 아열대 바다의 조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겁게 하기 위해 문진 속에 납을 가득 채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0<55. 술단지(쌍룡락문령雙龍絡文령_Ling),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몸통에는 끈무늬로 네모 칸을 두었는데, 서로 연결되는 곳에는 매듭을 만들었습니다. 네모 칸 안은 용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모든 용무늬는 작은 원점무늬를 바탕으로 하여 배열이 가지런합니다. 이런 장식은 진(晉)나라와 연나라 청동기에 많이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등잔은 음식을 담는 용도의 예기인 두(豆)에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이후에 제례의 용도 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한나라 때 다양한 형태의 등잔들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서역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의미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1<56. 새모양 등잔(주작등朱雀燈, Deng),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한나라 때에는 동물 모양 등잔이 유행했습니다. 이 등은 주작 모양으로, 머리를 들고 꼬리는 세운 채 날개를 펴서 막 날아오르려는 모습입니다. 주작은 신령스러운 새로 상서로움을 나타냅니다. 청룡, 백호, 현무와 함께 사방을 지키는 신을 상징합니다. 비슷한 주작 모양 등잔이 허베이성의 유승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2<57. 기러기 다리 모양 등잔(양신가안족등 陽身家雁足燈, Deng), 서한 기원전 36년>

다리 모양 등잔은 한나라의 궁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등잔의 하나였습니다. 이 등잔의 접시 중심에는 원통형의 삽입구가 있어 기름으로 불을 붙여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를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등잔에는 서한 원제(元帝) 때인 기원전 36년 궁궐에서 사용한 뒤, 기원전 24년 성제(成帝)가 양평가(楊平家)에게 하사했던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3<58. ‘림광궁’ 글자가 있는 등잔(림광궁등林光宮燈, Deng), 서한 기원전 38년>

이 등잔은 원래 행등(行燈)이라 부르던 것입니다. 긴 손잡이가 붙어 있어 들고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등 접시의 벽이 곧고 깊이는 얕으며 중심에는 심지 고정 못이 있습니다. 2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림광궁은 서한 시기의 이궁(離宮)으로, 건소(建昭) 원년(기원전 38년)에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등잔과 마찬가지로 향을 피우는 향로는 주나라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나라 때에는 박산향로가 크게 유행하였다. 향로는 인도에 성행했는데 불교의 전래와 함께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4<59. 향로(훈로薰爐, Lu),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향로는 받침, 몸통, 뚜껑으로 구성됩니다. 일부 받침은 쟁반으로 제작되어 물을 담아 윤기 나게 하고 청결을 유지하였습니다. 이 향로는 ‘豆’와 닮았는데, 모양이 우아하고 곡선이 아름답습니다. 뚜껑의 정중앙은 불무늬를 표현하였고, 그 주위에 투조한 세 개의 양 머리를 장식했습니다. 얇고 짧은 손잡이 아래의 받침에는 용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거울(銅鏡)은 중국 상왕조부터 만들어졌는데 제사, 주술 등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상이나 동물문양으로 장식하여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청동예기가 쇠퇴하면서 얼굴을 비치는 치장용으로 청동거울이 만들어졌으며 전국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6<60. ‘대락부귀’ 글자가 있는 거울(대락부귀반룡문경大樂富貴蟠龍文鏡, Jing),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청동거울은 한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어진 청동기로, 당시 일상용 청동기가 점차 칠기와 도자기로 대체될 때 청동거울은 오히려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뒷면에 3개의 꼭지를 만들고 주위에 용무늬를 두었습니다. 그 바깥에는 “大樂富貴, 千秋萬歲, 宜酒食”이라는 글을 둘렀습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5<61. 거울 (사호문경四虎文鏡, Jing), 전국 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 허난성 뤄양 진춘>

이 거울의 뒷면 가운데 다리 모양의 꼭지가 있습니다. 뒷면을 가득 채운 네 마리 호랑이의 머리는 가운데 꼭지 주위를 깨무는 모습입니다. 이런 호랑이무늬는 진(晉)나라 특유의 청동기 장식으로, 산시성 허우마 청동기 생산 유적에서 출토된 거푸집의 무늬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대구(帶鉤)는 고대 귀족과 군인 등이 고대에는 ‘서비(犀比)’라고도 불렀다. 주로 청동을 주조하여 만들었는데 금, 은, 철, 옥 등으로 만들기도 했다. 대구는 서주 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진나라와 한나라 때 크게 유행했다. 대구는 허리를 매는 일상적인 용도뿐 아니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용, 동물, 새 등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다양한 가공기술을 적용하여 예술적으로 수준이 높은 유물이 많다. 한반도에서도 호랑이나 말 형태를 하고 있는 허리띠고리가 출토되고 있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21<62. 허리띠 고리(용문대구龍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허리띠 고리는 허리띠에 달아 옷의 매무새를 다듬는 것으로 춘추시대에 출현하였습니다. 이 허리띠 고리는 전체적으로 삽 또는 숟가락 모양입니다. 머리는 길고 뾰족한 부리를 가진 새머리 모양이며 긴 목으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삽날과 비슷한 형태의 몸통에는 두 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있으며 한 마리의 머리는 위를 향하고 다른 한 마리의 머리는 아래쪽을 향하여 몸통을 휘감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20<63. 허리띠 고리(조문대구鳥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는 물새 모양으로, 고리의 머리는 새의 머리 모양이고 몸통은 새의 몸통 모양입니다. 이처럼 날개를 편 물새 모양 허리띠 고리는 전국시대의 초나라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며, 대개 허리띠 위에 끼워 검을 차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전국시대와 서한시대의허리띠 고리는 물새 모양이 가장 많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9<64. 허리띠 고리(은상감기하문대구銀象嵌幾何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는 머리는 짧고 작으며 목은 가늘고 깁니다. 몸통은 좁은 비파 모양입니다. 이런 형태의 허리띠 고리는 주로 전국시대에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에서 유행합니다. 전체적으로 금박과 은박을 상감하여 구성한 기하무늬는 화려하고 눈부십니다. 인체의 허리 부분과 딱 맞는 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8<65. 허리띠 고리(도금녹송석용문대구鍍金綠松石龍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의 몸통은 용모양이며 꼬리는 용의 머리입니다. 구불구불한 용 몸통 위에 터키석을 상감하였으며, 용의 발톱을 정교하게 새긴 뒤, 전체를 도금하였습니다. 이런 허리띠 고리는 전국 전기에 출현하며 전국 후기에 유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7<66.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호문대구虎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

사람 또는 동물 모양을 본떠 만든 허리띠 고리는 대칭을 이루지 않아 한 방향으로 걸 수밖에 없습니다. 고리의 머리는 짧고 작으며 목은 비교적 길고 몸통은 머리를 돌린 호랑이 모양입니다. 이런 허리띠 고리는 허난성과 산시성에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생활 청동기의 발달
전국시대 이후에는 춘추시대에 등장한 철기와 함께 칠기가 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만, 황실과 귀족층에서는 여전히 청동기를 사용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청동기의 제작 방식 역시 변모합니다.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술통인 호(壺)와 같은 전통적인 청동기는 예기로서의 특징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청동기에 있는 명문은 이전과 달리 무게나 용량 같은 실용적인 용도로 변하고 무늬가 없는 청동기의 제작수량도 늘어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는 다양한 장식이 더해진 청동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용, 새, 호랑이,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과 연꽃 같은 식물 등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거나 상감기법과 도금, 투조 등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여 장식성을 극대화하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3<67. 상감 납작 술병(상감반사문편호 象嵌蟠蛇文編戶, Hu), 전국 후기 기원전 3세기 전반 ~ 221년>

납작 술병은 전국시대에 출현한 새로운 형태입니다. 앞면과 뒷면은 구리선으로 네모 칸을 만들고 그 안을 당시 유행하던 인모법(印模法)으로 만든 날개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인모’란 흙을 구워 만든 무늬본입니다. 각종 무늬를 진흙판에 새겨 구워 무늬본을 만듭니다. 이런 무늬본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어 청동기 제작 시간을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의 큰 발전으로서 청동기 장식에 예술성보다 효율성에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4<68. 상감네모술병(상감기하문방호 象嵌幾何文方壺, Hu), 전국 후기 기원전 3세기 전반 ~ 221년)>

이 술병은 가로 단면이 네모 모양으로 입술이 작고 목이 곧습니다. 곡선인 양쪽 어깨에는 짐승 얼굴에 연결된 고리를 붙였습니다. 몸통은 우아한 곡선을 이룹니다. 전체 무늬는 마름모무늬가 서로 교차하여 겹치는데 위아래로 맞물려 복잡한 구조를 이룹니다. 굵은 무늬와 가는 무늬 모두 구리로 상감했는데 일부는 탈락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5<69. 물고기 모양 술병(어형호 魚形壺), 서한 기원전 202년 ~ 2022년>

이 술병은 입이 작고 목은 가늘며, 둥글게 부푼 몸통에는 비늘 무늬를 두었습니다. 밖으로 벌어진 굽다리는 꼬리지느러미를 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전국시대에 청동기의 표면에 끌과 정 같은 금속공구를 사용하여 점과 선을 새기거나 면을 파내어, 인물이나 동물 또는 생활 장면을 묘사하는 기법이 출현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장식 기술로 서한시대에 유행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6<70. 거북이와 봉황받침 박산향로(龜鳳座博山爐, Lu), 동한 25년 ~ 2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7<옆에서 본 모습>

뚜껑은 전설 속의 박산이고, 기둥은 날개를 펼친 봉황입니다. 봉황은 머리를 위로 들고 부리로 향로의 받침을 받치고 있습니다. 발로 머리를 든 거북이를 밟고 있으며 쟁반으로 연결됩니다. 봉황으로 만든 기둥은 진한 무덤에서도 보이는데, 기둥 아래에 연결된 거북이 받침은 전설 속 바다에 있는 산을 거북이가 등에 이고 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한나라 사람들의 신선사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장식 청동기의 유행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 유행한 일상용 청동기에는 다양한 장식이 더해집니다. 청동기 장식의 특징은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화려한 무늬를 장식하는 것으로 용, 새, 호랑이,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과 연꽃 같은 식물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감기법과 도금, 투조 등 새로운 기법을 채택하여 청동기의 장식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거푸집 제작에 밀랍을 사용하는 실랍법(失蠟法)의 등장으로 가속화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4. 일상 속 청동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약해지고 대량으로 철기도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신분 질서를 유지하고자 만들었던 청동기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옵니다. 춘추시대 중기가 되면 서주의 봉건제가 약해집니다. 이에 따른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 질서 역시 느슨해집니다. 신분에 따른 청동기 사용 규칙인 열정제도 역시 엄격하게 유지되지 않아, 전통적인 청동예기의 제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또한 새롭게 철기가 등장하여 청동기 문화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가 되면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무기나 공구 등은 급속히 철기로 대체됩니다. 무기나 공구가 아닌 일상 생활용품은 청동기로 제작되었습니다. 향로나 등잔 등 연회용구가 새롭게 등장하였고, 개인의 치장에 사용한 거울이나 허리띠 고리도 만들어집니다. 철기와 함께 청동기 제작기술도 발달하여 전국시대는 상나라 이후 가장 수준 높은 청동기가 제작되었습니다.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청동기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3. 위키백과, 2023년
  4. 바이두백과(https://baike.baidu.com), 2023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청동 예기의 변화
청동예기는 춘추시대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많은 종류의 그릇이 사라지거나 형태가 변하고 새로운 예기가 등장하였습니다. 음식물을 담는 그릇인 대(敦)는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곡물 담는 그릇인 보(盙)의 특징이 결합된 새로운 그릇입니다. 술병인 호(壺) 역시 몸통이 납작한 모양이 유행합니다. 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면 대부분의 청동예기가 사라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청동 예기, 신을 위한 그릇

예기(禮器)는 고대 중국에서 제사, 연회, 전쟁 등의 의례적 행위에 사용되는 기물로 사용자의 신분, 권력 등을 나타내기 위해 엄격한 위계적 제한을 두고 있다. 주례(周禮)에서 예기는 종교와 정치의 결합체였다. 초기에는 옥(玉)이 주술적 효과 등의 이유로 중요시 되었으며 상나라와 주나라 때에는 정치와 종교가 발달하면서 옥은 왕권의 상징으로 발전했으며 점점 더 많은 예기들이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진한(秦漢) 이후 청동기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1<10. ‘ _부정’글자가 있는 고기 삷는 세발솥(_부정정_父丁鼎 Ding), 서주 전기 기원전 11세기 ~ 10세기 전반>

새 모양 다리가 몸통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세발솥입니다. 내부에 “_父丁”글자가 있습니다. “_”라는 사람의 아버지(父)가 정(丁)일에 사망하였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상나라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예기(禮器)는 사용하는 경우에 따라 종기(宗器), 여기(旅器), 잉기(媵器)로 나눈다. 종기는 제사를 올릴 떄 사용하는 것을, 여기는 전쟁을 위해 원정을 떠날 떄, 잉기는 혼례를 올릴 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종류롸 기능면에서 청동 예기는 조리하는 그릇(취기炊器), 음식담는 그릇(식기食器), 술담는 그릇(주기酒器), 물을 담는 그릇(수기水器),악기(樂器)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중국 고대 청동기의 종류
모양도, 이름도 다양한 청동기 어디에 썼을까요? 중국의 고대 청동기는 쓰임새에 따라 종류가 다양합니다 술그릇, 음식그릇도 있고 물그릇도 있습니다. 그릇을 가열해야 하는 술 데우는 그릇과 음식을 만드는 그릇은 밑에서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바닥에 다리가 붙어 있습니다. 술잔은 손으로 들기 쉽게 손잡이를 달거나 입을 대기 편하게 주둥이를 만들었습니다. 물 따르는 그릇은 주둥이와 손잡이를 만들어 물을 쉽게 따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2<술그릇의 종류>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3<음식그릇, 물그릇>

음식을 바취는 그릇에는 조리하는 그릇(취기炊器)와 음식담는 그릇(식기食器)가 있다. 조리하는 그릇으로는 세발달린 솥인 정(鼎, Ding)과 력(鬲, Li), 찜기인 언(甗, yǎn),  네발달린 솥인 방정(方鼎, Fang Ding), 굽다리솥(복鍑, Fu)가 있으며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는 수(盨, Xu),  궤(簋, Gui), 보(簠, Fu),  두(豆), 돈(敦, Dui), 화(盂), 조(俎, Zu),  포(鋪, Pu) 등이 있다.

음식 바치는 그릇
음식 바치는 그릇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라 말기부터 등장한 고기 삶는 세발솥(정鼎)입니다. 이 세발솥은 거의 2000년 가까이 제작된 중국의 대표 청동예기입니다. 이외에도 곡식 담는 그릇(궤簋)이나 굽다리 접시(두豆) 등이 상나라 때 등장하여 서주시대까지 유행합니다. 한편 수량은 적지만 춘추시대 제후국 중에는 북방 유목문화의 영향으로,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한 굽다리 솥(복鍑)을 만든 나라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2<11. ‘려왕’ 글자가 있는 세발솥(려왕력呂王鬲 Li), 서주 후기, 기원전 9세기 전반 ~ 기원전 771년>

서주 중기부터 아가리의 입술부분이 넓어지고 몸통의 깊이가 얕아진 세발솥은 전국시대 전기까지 사용됩니다. 이 세발솥(鬲)은 춘추전국시대 열정제도에서 곡식 담는 그릇(궤簋)를 대신하여 고기 삶는 세발솥(鼎)과 함께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몸통에 장식된 새무늬는 도식화되는 과도기 양식으로 새의 머리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안쪽에 “呂王作尊鬲, 子子孫孫永寶用亭” 글자가 있습니다. “려왕이 만들었고 자손들이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라는 뜻입니다. 려나라는 강(姜)씨 성을 가진 염제(炎帝) 후예의 제후국으로 허난성 남양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3<12. 굽다리 솥(파곡문복波曲文鍑, Fu), Mounted Cauldron, 춘추전기, 기원전 770년 ~ 7세기 전반>

북방초원지역에서 유행하던 대표적인 조리기가 황화유역의 청동기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입니다. 외벽 중앙에 불로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어 실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통에는 용무늬가 변형된 절곡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 파도무늬가 있습니다. 춘추 전기 샨시(陝西)성의 진라라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4<13. 곡식 담는 그릇(와신수문궤 蝸身獸文簋 Gui), Steamed Food Serving Vessel, 서주 전기 기원전 11 ~ 10세기 전반>

상나라 후기부터 손잡이가 달린 그릇이 출현합니다. 몸을 말고 뿔이 달린 특이한 형태의 동물이 대칭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주둥이 윗부분은 길게 말려 있으며 아래 부분은 짧고 뾰족한데 그 사이에 이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무늬는 샨시성 일대에서 서주 전기 이후 일정한 시기에만 유행한 무늬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5<14. ‘시_’ 글자가 있는 곡식담는 그릇(시_궤是_簋 Gui), 서주 중기 기원전 10세기 후반 ~ 9세기 전반>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6<글자가 있는 안쪽>

받침대를 붙인 곡식 담는 그릇은 서주의 대표적인 양식입니다. 바닥에 놓기 편리하고 기물을 높여 장엄하고 중후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뚜껑은 이미 사라졌고 목 부분 양쪽에 손잡이를 붙여 놓았습니다. 받침대의 구멍과 몸통의 줄무늬는 주나라가 상나라의 풍습을 바꿔 스스로의 격조를 높이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입니다. 바닥 내부에 글자가 있습니다. “시_가 부친 을공(乙公)을 위해 궤를 만들었고 자손들이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라는 내영입니다. 만든 사람인 시_는 정(鼎)족 출신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7<15. ‘괵강’ 글자가 있는 굽다리 접시(괵강포虢姜鋪 Pu), Mounted Dish, 서주 후기 기원전 9세기 전반 ~ 기원전 77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8<글자가 있는 윗면>

말린 과일, 육포 등을 담았던 그릇입니다. 접시 바닥에 “虢姜作旅, 永寶用”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괵강은 괵나라에 시집 온 강씨 성의 여자로, “괵강이 이 그릇을 만들었고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괵나라는 희(姬)씨 성으로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아들, 즉 주나라 문왕 동생의 제후국으로 전해집니다. 희씨 성과 강씨 성의 제후국 간에 혼인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09<16. ‘아화부정’ 글자가 있는 찜통(아화부정언亞盉父丁甗, ,Yan), Steamer, 상후기 기원전 13~11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0<그릇 안쪽>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1<동물얼굴이 장식된 다리>

시루와 솥을 위아래로 연결하여 벼와 조 등 음식을 찔 때 사용한 청동기입니다. 다리에 소뿔을 가진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내부에 “亞盉父丁”글자가 있습니다. 화盉는 만든 사람의 성씨이고 아亞는 무관임을 나타냅니다. 부정은 아버지가 정丁일에 사망하였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4<17. ‘과’글자가 있는 손잡이 술통(과유戈卣, You), Wine Vessel,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2<뒤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3<옆에서 본 모습>

올빼미 두 마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모양의 손잡이 술통입니다. 몸통의 봉황무늬와 다리의 용무늬가 매우 섬세합니다. 목에 대칭으로 장식된 뱀과 몸통의 용무늬는 올빼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표현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몸통 안쪽에 고리를 달아 밧줄 형태의 손잡이를 끼워 놓았습니다. 내부 바닥에 있는 “戈” 글자는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상나라 때 귀족들은 술을 즐겨 마셨다. 서조 초기에는 술을 엄격히 금하면서 서주 중기 이후 청동 술잔이 크게 줄어들었다. 작(爵)은 중요한 의례용 술잔으로 춘추시대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상나라 떄 귀족들은 청동작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시 무덤에서는 많을 작(爵)이 출토되고 있다. 고(觚,  Gu)는 술잔과 예기로 사용되었는데 상나라와 주나라 때 인기가 낳았다. 차(觯, Zhi)는 의례용 술잔을로 작아 보인다. 가(斝, Jia)는 술통 또는 의례용 용기로 상나라와 서주 초기에 유횅했다. 준(尊, Zun)은 중대형 술잔으로 상나라부터 춘추 후기까지 유횅하였다. 호(壺)는 술통으로 한나라 때까지 유행하였다. 원형, 네모 등 다양한 모양이 있다. 뢰(罍, Lei)는 큰 술통으로 예기로 사용되었다. 춘추 중기까지 유행했다. 유(㔽, You)늘 향이나 술을 담는 예기이다. 상나라에서 서조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굉(觥, Gong)은 술을 마시는 그릇이다. 상나라 말부터 서주 초기까지 유행하였다.

술 바치는 그릇
상나라 떄는 술바치는 의례에 사용한 술그릇이 발달했습니다. 세발 술잔(작爵), 나팔 모양 술잔(고觚), 술 데우는 세발 그릇(가斝) 등 다양한 술그릇을 만들어 썼습니다. 서주 중기 이후에는 상나라가 사용했던 술그릇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세발 술잔(각角)과 굽다리 술잔(치觶), 손잡이 술통(유卣) 및 술 단지 등이 등장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7<18. ‘_부정’글자가 있는 나팔 모양 술잔(_부정고_父丁觚, Gu), 상 후기 기원전 13~11세기>

상나라 후기 술잔이 길어지고 굽다리의 십자 구멍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굽다리의 구멍은 안쪽과 바깥 거푸집을 합칠 때 일정한 공간 유지를 위해 진흙 덩어리를 끼워 놓았던 흔적으로 청동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없어졌습니다. 돌대로 술잔의 몸통과 굽다리의 공간을 나누고 무늬를 장식하여 매우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굽다리 안쪽에 ‘_父丁’ 글자가 있습니다. _는 만든 사람의 성씨이고 부정은 아버지가 정(丁)일에 사망하였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들은 상대 산동 지역에 대규모로 거주하던 씨족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8<19. ‘가’ 글자가 있는 세발 술잔(가작家爵, Jue)>

이 세발 술잔은 초기의 편평한 바닥 형태가 아닌 둥근 바닥으로 제작되어 주조기술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통을 돌대로 나누고 동물얼굴무늬를 장식했습니다. 빈 공간에도 소용돌이 무늬를 가득 장식해 놓았는데 이것은 상나라 후기의 특징입니다. 손잡이 안쪽에 “家”글자가 있는데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9<20 ‘사’ 글자가 있는 굽다리 술잔(사치史觶, Zhi), Wine Cup, 상 후기, 기원전 13 ~11세기>

새무늬, 동물얼굴무늬, 용무늬가 얕은 새김으로 바탕무늬 없이 가득 장식되어 있습니다. 바탕무늬가 없어지는 것은 상나라 후기의 장식기법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부에 있는 글자 “史”는 기물을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0<21, 조롱박 모양 술병(인문호호鱗文瓠壺, Hu), Wine Bottle, 서주 후기 ~ 춘추전기 기원전 8~6세기>

어깨와 몸통의 고리에 사슬을 연결하여 들고 다녔던 조롱박 모양의 술병입니다. 사슬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뚜껑에 용무늬가 있고 몸통은 비늘무늬를 층층으로 겹쳐 장식하였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술병은 예기가 아닌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생활용기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1<22. ‘기백매망’ 글자가 있는 술병(기백매망호杞伯每亡壺, Hu), 춘추전기 기원전 770년 ~ 7세기 전반>

몸통을 여덟으로 나누고 테두리는 변형 동물무늬로 감쌌습니다. 목의 양쪽에는 고리가 달린 동물머리 장식이 있습니다. 매우 간결한 느낌으로 서주시기 새롭게 등장한 양식입니다. 그릇 안쪽에 글자가 있습니다. “기백매망이 주조(邾曺)를 위해 이 호를 제작하였고, 오랫동안 장수하고, 자손이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기(杞)나라는 성씨가 사(姒)이고, 주(邾)나라는 조(曺)씨로 주조는 매망의 어머니 또는 부인입니다. 이 글로 산동지역의 기나라와 주나라가 혼인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 산동성 신타이(新泰)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4<23. ‘백하보’ 글자가 있는 술단지(백하보령伯夏父_,Lei), 서주후기 기원전 9세기 전반 ~ 771년

어깨 양쪽의 손잡이는 몸을 말아 올린 작은 용의 모습입니다. 목에는 동물얼굴무늬가 변형된 절곡무늬가 있고 몸통에는 비늘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모두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무늬입니다. 어께에 글자가 있습니다. “백화보가 필희(畢姬)를 위해 령을 만들었고, 자손들이 오랫동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라는 내용입니다. 필희는 필지라는 땅을 하사받은 희씨 성의 여자로 기물을 만든 백하보의 어머니이거나 부인을 뜻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술의 봉헌
서주는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권력을 굳건히 하려는 목적으로 제사와 의례를 제도화했습니다. 제사와 의례는 고대 중국 사람들이 하늘의 절대자, 자연신이나 조상신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나 왕실의 안위, 개인의 행복 등을 기원하는 행사였습니다. 주나라 의례 중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술 바치는 의례인 관례(祼禮)였습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시부(示部)에 “祼, 灌祭也” 즉, “관은 땅에 술을 붓는 제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례의 목적은 정확하지 않지만 제사의 대상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예의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9<25. ‘아추’글자가 있는 나팔 모양 술잔(아추고亞醜觚, Gu),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나팔 모양 술잔은 막대 모양 옥기를 꽂아 술을 따르던 예기입니다. 어떤 옥기에는 위패와 비슷하게 제사 대상의 죽은 날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목의 파초잎무늬에는 추상적인 동물얼굴무늬가 있고 몸통과 굽다리에는 용무늬가 대칭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굽다리 안쪽에 “아추”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아추족은 상나라때 산둥지역의 씨족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7<26. ‘죽유’ 글자가 있는 손잡이 술통(죽유유竹斿卣, You),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두껍고 편평한 손잡이를 양쪽의 용머리와 함께 주조하였습니다. 뚜껑에서 굽다리까지 세로 돌대로 칸을 나눈 뒤, 뚜껑과 몸통에 뿔과 눈이 거대하고 입을 크게 벌린 동물얼굴무늬를 장식했습니다. 뚜껑의 가장자리와 목, 굽다리에 모두 작고 뿔을 가진 새무늬가 있습니다. 대표무늬는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는데, 다른 무늬와 높이 차이를 두어 매우 입체적입니다. 몸통과 뚜껑에 “죽유”라는 글자는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6<27. ‘부신’글자가 있는 술통(부신준父辛尊, Zun),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바깥으로 벌어진 아가리, 긴 목, 부푼 몽통과 높은 굽다리로 이루어져 있어 나팔 모양 술잔과 형태가 유사합니다. 몸통과 굽다리에 동물얼굴무늬가 있으며 돌출된 눈을 제외하면 모두 편평합니다. 그 옆에 등을 맞댄 새무늬가 있고 빈 공간은 소용돌이 무늬로 채웠습니다. 몽통 내부에 “부신”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아버지가 신辛일에 사망하였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5<28, ‘염’ 글자가 있는 세발 주전자(염화冉盉, He), Spouted Vessel, 서주 전기 기원전 11~10세기>

동물 머리 형태의 손잡이가 있고 고리 사슬로 뚜껑과 연결해 놓았습니다. 둥근 몸통 아래 3개의 원통모양 다리가 있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목에 2줄의 띠무늬가 있고 나머지 부분은 무늬가 없습니다. 손잡이와 뚜껑 안쪽에 각각 冉자가 있는데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28<29. 용무늬 국자(용문두龍文斗, Dou), Ladle,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술을 뜰 때 사용한 국자입니다. 주로 술통(尊), 술 단지(罍)나 동물 모양 술통(觚) 등 술을 담았던 그릇 안에서 발견됩니다. 용무늬와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허난성 안양 부호(婦好) 무덤에서 이와 비슷한 용무늬가 발견된 예가 있어 상나라 후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수기(水器)는 손을 씻기 위해 물을 담아 두는 물통을 말한다. 상주 시대 귀족들은 의례를 행하기 전후에 손을 씻고 몸을 깨끗이 하여 예의를 표시했다. 손을 씻는 것은 고대문명이 출현한 중동 지역의 신전이나 교회, 사찰 입구에 손을 씻는 수조가 있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나라 때 중요한 의례로 여겨진 것으로 볼 때 서역의 영향을 받은 부분으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물을 담는 대야와 같은 반(盤), 물 따르는 그릇인 이(匜, Yi)  등이 있다.

손씻는 그릇
주나라 때는 제사나 잔치 전에 두 손을 깨끗이 씻는 의례인 관례(盥禮)를 행하여 신과 참석한 사람들에게 청결로 존경을 나타냈습니다. 주나라에서 손 씻는 행위가 중요한 의례가 된 것입니다. <예기>에서 손 씻는 의례를 “젊은이가 쟁반을 들고 어른이 물을 받들어 손 씻기를 청한다. 손을 다 씻으면 수건을 드린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주나라 무덤에서는 손 씻을 때 사용한 대야와 주전자 또는 대야와 물 따르는 그릇이 종종 함께 발견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30<30. ‘경길’글자가 있는 대야(경길반京姞盤, Pan), 서주 후기 기원전 9세기 전반 ~ 기원전 771년>

물 따르는 그릇(匜)이나 세발 주전자(盉)와 함께 손씻는 의례에 사용한 대야입니다. 타원형의 몸통과 높은 굽다리에 손잡이가 양쪽에 달려 있습니다. 바닥에 글자가 있습니다. “정월 초, 길한 정해(丁亥)일에 경길이 대야를 제작하였고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길 기원한다,.”라는 내용입니다. 경나라는 영(贏)씨 성을 가진 동이족 소호(少昊)의 후예의 나라이고 경길은 경나라 사람고 결혼한 길씨 성의 여자를 뜻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31<31. 물 따르는 그릇 (용봉문이龍鳳文匜, Yi), 춘추전기, 기원전 770년 ~ 7세기 전반)>

깨끗한 물을 담아 손 씻는 의례에서 물을 따를 때 사용한 그릇으로 대야와 함께 종종 발견됩니다. 바가지 모양의 몸통에 손잡이가 달려 있어 물을 따르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바깥에는 용무늬와 봉황무늬가 있고 안에는 물고기 무늬가 있습니다. 이 그릇은 전형적인 주나라 양식이지만 물고기 무늬는 주로 장쑤성과 안후이성에서 제작된 손씻는 그릇(盥洗器)에 있는 특징으로 장강 지역에서 많이 출토됩니다. 이것은 중원지역의 양식에 지역양식이 더해져 현지화가 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예기의 기능은 하늘과 땅의 귀신과 신들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주대 후반에는 예기의 주된 기능이 “기(纪)”로 바뀌었다. “기”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든 기신물(纪神物)이다. 은나라 말기 청동기에는 이런 목적으로 미세한 구름과 천둥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표면에 틔어나온 복장한 장식은 동물얼굴무늬, 용무늬, 괴수무늬(기문夔纹), 봉황무늬, 매미무늬(선문蝉纹) 등이 있다. 두번째는 마땅함(의宜)에 있고 세번째는 덕(德)과 공(攻)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다.

중국 고대 청동기에 숨은 동물들
처음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기술이 완전하지 않아 청동 그릇에 간단한 선으로만 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기원전 16세기 이후 청동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무늬를 자유롭게 넣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상나라 사람들은 청동기에 동물얼굴, 용, 봉황 등 신화나 상상 속의 동물을 과장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청동예기의 위엄과 장엄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기괴함을 넘어 신비로운 모습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32<32. 동물 모양 술통 (봉문희굉鳳文牺觥, Gong),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상나라 후기에 주조기술이 발달하면서 동물 모양을 본 떠 만든 청동기가 등장합니다. 술통의 등에는 호랑이 한마리가 타고 있고 몸통은 봉황를 중심무늬로 사용한 것은 당시에 새를 신령한 동물로 생각하기 시작한 사회 풍조가 반영된 것입니다. 후난성에서 출토된 술통인 희굉과 형태가 흡사하여 장강유역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33<33. 동물얼굴무늬 술병(수면문호獸面文壺, Hu),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몽통이 아가리에 비해 큰 술명을 호(壺)라고 합니다. 중국 신석기시대에는 토기로 제작하였고 상나라 때 청동기로 제작하여 한나라 때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이후에는 도자기로 제작하여 가장 오랜 기간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되며 사용한 그릇 중에 하나입니다. 몸통에 동물 얼굴무늬가 있고 나머지 빈 공간은 소용돌이 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릇에 무늬를 가득 채워 넣은 것은 상나라 후기 때 유행한 장식기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51<동물 문양>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52<동물 문양>

조선시대에는 의례에 따라 각종 제사와 행사를 마련했다. 각종 의례에 사용된 그릇과 관련 물품들은 <예기(禮記)> <예기편(禮器篇)>에 언급된 내용에 따라 제작하였다. 제기는 대표적인 예기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차별된 모습을 하고 있다. 보(簠)·궤(簋)·변(籩)·두(豆)와 같이 고대 이래로 사용된 청동예기들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종묘 신실에 차려지는 제상(祭床)>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예기 20211013_16<신실기용 神室器用>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 <오향친제설찬도(五享親祭設饌圖), 19세기 후반>

조선시대 종묘제례에 사용한 제기
조선은 건국 초부터 국가의례를 정비하여 국왕이 유교윤리의 핵심인 효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고, 왕권의 정통성과 왕조의 영원한 안녕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특히 유교적 이상국가인 중국 하.상.주 삼대의 제도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은 종묘의 신실마낟 정성스레 제사상을 차렸는데 음식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제기에 담았다. 변(籩)은 마른 음식을 담는 제기이며, 두(豆)는 물기 있는 음식을 담는 제기이다. 변.두는 제사상의 양쪽에 짝을 맞우어 두었는데 종묘제례에는 12개씩 놓았다. 변과 두 사이에 등(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청동기 문화의 시작

고대 중국에서 지배층이 신분을 나타내거나 종묘와 궁궐 등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예기(禮器)라 한다. 청동으로 만든 예기로는 곡식 등을 담는 그릇, 술잔, 솥 등이 있으며 신분에 따라 사용이 제한되었다. 중국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종묘와 왕실 의식의 유물인 예기는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서도 고대국가에서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의 청동예기는 기원전 20세기 하나라 때부터 만들어지 시작한다. 이전에 사용했던 토기를 본 떠서 만들었는데 최초의 청동예기는 술을 데우는 세발 술잔인 가(斝, Jia)와 고(觚, Gu), 작(爵, Jue)와 고기를 삶는 그릇인 정(鼎, Ding), 력(鬲 Li) 등이다. 초기의 청동 예기는 형태와 문양이 단순했는데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릇의 종류와 무늬가 다양해진다.

정(鼎, Ding)은 청동예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원형의 용기에 세발이 붙은 형태로 음식을 조리할 때 사용하는 식기(食器)에 해당한다. 가장 많이 사용된 예기로 상(商)대부터 한(漢)대까지 사용되었으며 후대에는 향로로 많이 사용되었다. 궤(簋)와 함께 왕이나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예기로 여겨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1<1.고기 삶는 세발솥(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Tripod Cauldron, 서주 전기 기원전 11~10 세기 전반>

신비한 무늬로 가득 차 있는 이 청동기는 고기를 삶을 때 사용한 세발솥(鼎)입니다. 하나라 때 등장한 뒤, 제사나 의례에 빠지지 않고 사용되던 가장 중요한 청동기입니다. 몸통에는 온통 동물얼굴무늬가 가득한데, 도철(饕餮)무늬라고도 합니다. 도철은 무엇이든 먹어치워 결국 자신의 몸도 먹어버려 머리만 남았다는 전설 속에 나오는 괴수입니다. 도철을 장식한 청동기는 신비한 힘으로 악령을 퇴치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게 되어 왕이 사용하는 청동기에 장식되었습니다. 동물얼굴무늬는 상 중기부터 서주 전기까지 유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2<2. 술 데우는 세발 그릇(연주문가連珠文斝 Jia), Wine Vessel, 하 후기, 기원전 18 ~ 16세기>

의례 때 사용한 울창주(울금향과 검은 기장으로 빚어 만든 술)를 따뜻하게 데워 담았던 그릇입니다. 아가리에 있는 두 개의 짧은 기둥은 술에 남은 찌꺼기를 거르는 망을 걸 때 사용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다리의 빈 공간에 술이 고였습니다. 표면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고 내부에도 흰색 찌꺼기가 붙어 있어 당시 실제로 술을 데우는 데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슬무늬 장식은 하나라 청동기의 특징이며 상나라 때 점차 없어집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작(爵)은 중국 청동예기 중 하나로 술을 따르는 용도로는 사용되는 주기(酒器)이다. 손잡이와 발이 셋이 있는데 크기가 작고 참새를 닮았다고 하여 작(爵)이라 한다. 서주 중기까지 사용되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3<3. 세발 술잔(수면문작 獸面文爵 Jue), 상 전기 기원전 16~15세기 중엽>

상나라 때는 세발 술잔의 아가리에 짧은 기둥 두 개를 세우는데 이 술잔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두 개의 다리는 몸통 아래 양쪽으로 배치하고 한 개의 다리는 손잡이 아래에 배치하여 수평을 잡았습니다. 몸통 중간의 동물얼굴무늬 장식은 전형적인 상 전기의 양식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고(觚)는 작(爵)과 함께 술잔으로 사용되었던 나팔모양의 청동기이다. 오래된 예기(禮器) 중 하나로 어리터우(二里頭) 문화에서 도제(陶製)가 사용되었고, 상대에 청동제의 고가 유행하였다. 상부에는 파초문이, 중간과 하부에는 도철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바닥 안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4<4. 나팔 모양 술잔(수면문고 獸面文觚 Gu), Wine Beaker,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술을 마시거나 따르는 용도로 사용한 나팔 모양 술잔입니다. 원래 이름은 ‘동同’이고, 송나라 이후부터 ‘고觚’라고 불렀습니다. 이 술잔은 초기의 것으로 크기가 작고 굽다리에 십자형 구멍 3개가 있습니다. 굵은 선을 이용한 몸통의 동물얼굴무늬와 굽다리의 용무늬 장식 역시 이 시기의 특징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5<동물얼굴무늬(몸통) 용무늬(굽다리)>

가(斝)는 술을 데우는 비교적 큰 그릇으로 입 가장자리에 두 개의 삿갓 모양의 작은 기둥이 솟아 있고 측면에 하나의 손잡이가 있으며 다리가 셋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9<5. 술 데우는 세발 그릇(수면문가 獸面文斝 Jia),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기원전 13세기>

술을 데울 때 사용한 그릇입니다. 목과 몸통에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돌출된 눈을 제외하고 선의 굵기로 무늬의 차이를 표현하였습니다. 목에는 가는 선을, 몸통에는 굵은 선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표현 방법은 상 중기에 유행한 장식기법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6<6.고기 삶는 세발솥(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상 전기 기원전 16 ~ 15세기 중엽>

배다 부른 몸통에 바닥이 둥글고 그 아래로 납작하며 끝이 뾰족한 용 모양 다리 세 개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다리를 가진 세발솥은 신석기시대 토기를 본 떠 만들던 세발솥이 청동예기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통에는 동물얼굴무늬를 한 줄로 두르고 그 아래위에 각각 구슬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상 전기에 유행했던 무늬입니다. 솥의 바닥과 다리 안쪽에는 그을음이 있어 실제로 고기를 삶는데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다리 하나에는 용무늬가 없는데, 떨어져 나간 것을 뒤에 새로 붙이면서 용무늬가 생략된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7<7. 고기 삶는 세발솥, (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이 세발솥은 상 중기에 만들었지만 전기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두꺼운 두 귀와 몸체에 비해 비교적 길고 공간이 비어 있는 송곳 모양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귀와 다리를 일직선상에 배치하여 시각적으로 불안해 보입니다. 다리는 지면에 닿는 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어, 뾰족한 모양의 다리가 원기둥 모양으로 변하는 과도기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몸통에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위에 모두 구슬무늬가 있습니다. 허난성 은허 유적 무덤에서도 비슷한 모양의 세발솥이 발견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역(鬲)은 음식을 조리하는 식기(食器)에 해당한다. 고기를 삶는데 주로 쓰였으며 정(鼎)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서주때 조리기구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8<8. 세발솥(수면문력 獸面文鬲 Li), Tripod Cauldron),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음식을 끓일 때 사용하던 세발솥으로 신석기새대에는 토기로 제작하던 그릇입니다. 상 중기 청동기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늬의 면적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몸통에 한 줄의 띠로 무늬를 둘렀던 전기와 달리 중기부터는 몸통 전체에 장식하였습니다. 열을 가하지 않아 무늬와 색이 그대로 잘 남아 있습니다. 상 중기에는 이미 청동기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잘 보여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1. 청동기 문화의 시작
중국의 청동그릇은 기원전 2천년 무렵 하나라 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토기를 본떠 청동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청동 그릇은 세발 술잔과 고기 삶는 세발솥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첫번째 나라인 하나라 때부터 입니다. 전설처럼 알려지던 하나라는 1959년 허난(河南)성 옌스(偃师)현 얼리터우(二里頭)에서 궁전유적이 발견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하나라는 전설속의 우왕이 기원전 21세기에 세운 뒤 17대 걸왕에 이르기까지 500년 가까이 존속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라 사람들은 이 지역에 오랜 기간 계속되고 있었던 신석기시대 룽산(龍山)문화의 구리 가공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청동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석기시대 토기의 모양을 본뜬 단순한 무늬의 세발 술잔이나 고기 삶는 세발솥이었습니다. 뒤이은 상나라 때에는 그릇의 종류와 무늬가 다양해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우는 그제야 천자자리에 올라 …. 나라 이름은 하후, 성은 사씨라 하였다. <<사기>><하본기>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있다. <춘추좌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0<1. 굽다리 술잔 모양 토기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1<2. 바깥 거푸집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2<3. 바깥 거푸집에 무늬 추가, 4. 안쪽 거푸집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3<5. 거푸집 합치고 굽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4<6. 쇳물 부어 완성>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5<9. 청동기 주조 모형>

청동기의 제작
상주시대에는 청동예기를 만들 때 먼저 흙으로 만들고자하는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진흙을 발라 바깥 거푸집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처음 만든 토기의 포면을 깎아낸 뒤 바깥 거푸집과 합쳐 그 사이에 쇳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쇳물을 넣어 식힌 뒤, 바깥 거푸집을 부수고 청동기를 꺼내야 했기에 상주시대에 만든 청동기 중 똑깥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딱 하나만 존재합니다. 한편, 기원전 10세기 무렵 상나라의 분주법(分鑄法)은 복잡한 형태의 청동기 제작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분주법은 청동기의 손잡이나 다리 등 튀어 나온 부분을 먼저 주조한 뒤 이를 거푸집에 넣고 쇳물을 주입하여 몸통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로써 다양한 청동기의 제작이 가능해져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921년 가을 <중국고대청동기, 신에서 인간으로>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에서도 청동예기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상하이박물관과 협력하여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형태의 청동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할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여러 박물관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중국 고대 청동기들의 역사와 용도, 의미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6
<중국고대청동기, 신에서 인간으로>

전시를 열며
국립중앙박물관은 중국 청동기 대표 박물관인 상하이박물관과 협력하여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1928년 은허(殷墟) 유적에서 삼천 삼백여 년 전의 청동기가 대규모로 발굴되었습니다. 안개 속에 싸여 있던 상나라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황하문명을 세계에 알린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어진 발굴조사로 중국 청동기는 기원전 21세기경 하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전쟁과 같은 생사를 가르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 왕은 직접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의식에 사용하는 청동 그릇에 들이는 정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무서운 괴수 얼굴이 떠오르는 기괴한 무늬, 탄성을 자아내는 압도적인 크기와 형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례 도구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신을 위해 사용되던 청동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왕과 제후의 권력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철기가 사용되자 청동기는 일상용기로 쓰임새가 다시 한번 바뀝니다. 세계 다른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문화유산 중국 청동기, 이번 특별전에서 시대에 따른 중국 고대 청동기 문화의 변화상과 함께 청동기의 제작방법, 무늬,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중국 역사의 단면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웃나라 중국의 고대 역사를 담고 있는 그릇, 상하이박물관의 보물을 지금부터 만나 보십시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상하이박물관
1952년 개관한 상하이 박물관은 중국 동남부의 대표박물관으로 중국 국가박물관, 샨시역사박물관과 함께 중국 3대 청동기 박물관으로 세계 최고의 청동기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청동기 이외에도 도자기, 회화 및 서예 작품이 유명하며 14만여 점의 중요 고대 유물을 포함하여 약 102만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건물 외관은 ‘천원지방’, 즉 둥근 하늘과 네모진 땅이라는 중국의 세계관을 반영하였고 위쪽에 솟은 반원형 장식은 세발솥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외관으로 상하이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상하이박물관은 195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쇠붙이 모으기 운동’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항구가 있던 상하이에 가장 큰 제련소가 있었고 엄청나게 많은 청동기가 유입되었습니다. 이 중에 고대 청동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3만 여점의 청동기가 상하이박물관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청동기의 진위문제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후 중국 내 유적 발굴이 활발해지면서 상하이박물관 소장품 대부분이 진품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3. 위키백과, 2023년
  4. 미술사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2020년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칼(보물)

경남 김해시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칼(보물)이다. 함안 마갑총은 1992년 함안군 도심 아파트 신축 공사 과장에서 확인된 유적으로 온전한 상태의 온전한 형태의 말갑옷과 토기, 철기류 등이 확인되었다. 철제 말갑옷는 말머리를 가리는 투구, 목과 가습을 가리는 목가슴드리가,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身甲)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표현된 철제말갑옷의 형태와 중장기병의 모습을 확인해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고리자루큰칼은 손잡이 고리에 금상감한 거치문을 장식했으며 손잡이는 연호문을 타출한 도금은판으로 감싸고 있다. 가야의 뛰어난 제작기술과 조형적인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40 <말갑옷, 5세기, 함안 마갑총,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41<뒤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발굴 당시 사진>

가야가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중장기병은 북방의 고구려와 삼연(三燕) 등 정주화한 유목국가가 널리 활용하였습니다. 가야의 말갑옷은 제철기술과 국력이 주변 나라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OLYMPUS DIGITAL CAMERA<금상감고리자루칼, 가야, 함안 마갑총>

OLYMPUS DIGITAL CAMERA<손잡이 부분>

 상원하방형이며 환두 내 도상이 없는 소환두대도이다. 환의 앞뒷면에 금상감한 거치문을 새겨 넣었고 앞 뒷면에 배치한 거치문의 바깥쪽으로 은상감한 점문을 배치하였다. 칼등에도 59.9cm 가량을 금상감한 거치문으로 장식하였다. 손잡이는 연호문을 타출한 도금 은판으로 감싸고 각목문을 넣은 고리를 감아 고정하였다. (안내문, 공주박물관특별전, 2016년)

함안 말이산고분군(사적)은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넓은 평지에 있는 함안군청 뒷편 낮은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2 km 능선과 그 주변에 봉분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지배층 무덤으로 보이는 큰 봉분들은 정상부에, 그 아래에는 작은 무덤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가야를 대표하는 유물인 수레바퀴모양 토기, 고구려벽화에 그려져 있는 말갑옷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함안 말이산고분군(사적)>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안내문, 공주박물관특별전, 2016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