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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금관가야의 국제성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가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파도가 거센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해 잠시 쉬었다 가야하는 곳이다. 초기에는 남해안 사천의 늑도, 고성 지역의 소가야를 비롯하여 마산항과 가까운 아라가야, 창원 다호리지역 등이 교역의 중심지였으나 점차 낙동강 하구의 넓은 평야와 낙동강 뱃길을 배경으로 한 금관가야가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김해 대성동,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중국과 교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청동솥,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일본과 관련된 폭넓은 창, 방울 형태의 창끝 꾸미개, 방패장식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1<배모양 토제품,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번영, 가야는 한 번도 빛나지 않았나요? – 4세기 가락국(금관가야)의 국제성
1~4세기 동북아시아는 중국-한반도-왜를 잇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바닷길을 따라서 사신과 상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가락국은 철과 여러 특산품이 모이는 당대 최고의 국제시장으로 번영하였습니다. 가락국의 번영은 김해 양동리와 대성동의 지배자 무덤에 타임캡슐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가락국은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주변 소국을 통합하지 않았습니다. 왜 가락국은 통합보다는 공존을 추구했을까요?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 배모양 토제품은 가야사람들이 실제로 교류했던 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작은 규모의 배를 표현하고 있지만 거친 파도를 헤치기 위해 배의 선수를 높게 만들고 있어 기본적으로 대한해협을 건너는 선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2<배모양 토제품, 5세기, 창원 현동 387호묘, 삼한문회재연구원>

가야의 항구에서 볼 수 있었을 선박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토기입니다. 멀리 중국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을 항해하던 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입니다. 배의 구조를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여 해상왕국 가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토기입니다. 배모양 토제품은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본떠 만들기도 했지만, 창원 현동. 함안 말이산 45호 무덤에서 출토된 것처럼 많은 교역품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대형 선박을 형상화한 것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가야에서 배모양 토제품이 많이 출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야 사람은 그들의 이념을 담고자 여러 형상을 본뜬 토기를 만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남해안에서 무역을 근간으로 하여 성장한 가야에서 배는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망자의 영혼이 큰 배를 타고 안전하게 극락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배나 등잔에 수레바퀴를 붙인 것도 같은 의미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가야의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배모양 토제품은 가야가 철을 매개로 중국 군현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3세기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인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는 일본 규슈지역의 청동거울과 청동창, 중국의 청동거울과 청동솥,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 금박구슬 등이 발견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3<배모양 토제품, 5세기, 출토지 모름, 리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4<배모양 토제품, 5세기, 창원 현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북아시아의 기항지
가락국 시장에서는 한(韓).예(濊).왜(倭)의 사신들과 상인들이 가져온 화려한 물품들이 철을 매개로 거래하였고, 정치적인 이유로 교환되거나 바쳐졌습니다. 이때 거래된 물품 중에는 중국 서진의 청동용기와 허리띠를 비롯하여 서역에서 생산된 유리그릇, 북방의 선비족이 사용하는 말갖춤, 왜의 청동기 등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품목을 자랑합니다. 이를 통해 철을 매개로 항구로서 성장한 가야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400년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가락국은 쇠락하며, 고자국 등이 새롭게 무역항으로 부각되지만 예전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5<쇠도끼, 1~3세기, 1. 창원 다호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6 <2.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4세기 이전에는 얇은 판 모양으로 만든 쇠도끼가 화폐와 같은 기능을 하면서 경제력을 과시하는 지표와 같았습니다. 4세기 이후부터는 덩이쇠가 역할을 대신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7<중국거울과 본뜬 거울,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3세기 1. 이체자명대경, 창원 다호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2. 조문박물견, 김해 내덕리유적, 동의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8 <3. 본뜬 거울,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09 <3. 본뜬 거울,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0<중국동전, 기원전 2~1세기, 오수전, 여수 삼산면 서도리(거문도), 사천늑도 C지구 패총, 창원 다호리 1호묘, 국립광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2. 반량전, 사천 늑도 C지구 패총,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화천, 김해 회현리 패총, 국립 회현리 패총, 국립중앙박물관>

인천-해남-여수-제주-김해 등 서남 해안을 따라서 다양한 중국 동전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중국 동전은 교류를 위해 바닷길을 오가던 이들이 남긴 중요한 흔적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1<청동 꺽창과 투겁창, 2~4세기, 1.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내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2<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발견되며, 제사와 의례 행위를 하기 위해 무기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의 심장부인 기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제사와 의례용으로 청동 방울을 제작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5<청동 화살촉,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3세기, 사천 늑도유적, 창원 삼동동유적, 동아대학교 박물관, 신라대학교 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3<금박유리구슬, 3세기, 1. 김해 양동리 46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4<2. 천안 청당동 2호묘, 국립중앙박물관, 3.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16호묘, 국립공주박물관>

유리 사이에 금박을 끼워 넣어 만든 것입니다.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역에서 제작하여 한반도에까지 유통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삼천포항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 늑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대 한.중.일간의 해상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1980년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패총, 무덤, 주거유적 등과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가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고 있다. 그중 일본 야요이시대 토기, 중국계 유물인 낙랑토기, 중국 진나라 화폐인 반량전도 발견되고 있어 당시의 국제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천 늑도(사적)>

창원 다호리 유적은 낙동강이 만든 습지와 그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 생활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다. 가야 초기의 널무덤 70여기와 삼국시대의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발굴조사 되었다. 다호리 유적지는 물과 흙이 섞여 있어서 유물이 잘 훼손되지 않는 주남저수지 부근 논바닥에서 발견되어 유적지 전체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로변 논에서 발견된 다호리 1호무덤과 널무덤이 대표적이며, 평지와 구릉지역에 고분과 생활유적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창원 다호리유적(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창원 다호리 1호 무덤(나무널 무덤), 기원전 1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6<창원 다호리 1호 무덤(나무널 무덤), 기원전 1세기, 국립김해박물관, 1. 쇠도끼>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7<1.쇠도끼>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61
<2. 한국식동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62
<3. 청동 투겁창,>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8<4. 손칼과 붓>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19<붓글씨 재현품>

무덤 주인공이 문자를 사용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붓은 나무판에 글을 쓰고, 칼은 나무를 깎아 지우는 용도로 썼을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0<1. 청동 허리띠 부속구>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1<2. 청동 방울, 3. 청동거울(성운문경)>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2<4. 칠그릇>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3<1. 유리구슬,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4<2. 칠부채>

창원 다호리집단의 성장
가야가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2세기 경, 남해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교역항은 사천 늑도 유적입니다. 이곳에서는 일본 야오이 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낙랑토기와 한문화, 중국 동북 지역의 토기 등 다양한 문화가 확인됩니다. 한편 내륙지역에서는 창원 다호리 집단이 두각을 드러내어 변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현재까지 100기 이상의 널무덤이 조사되었으며, 중국 한대의 청동거울과 동전, 철기, 칠기, 왜계토기 등 국제적인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2세기 이후에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이후 이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김해 양동리고분(사적)은 기원전 2세기부터 5세기까지의 무덤 500여기가 산재해 있는 곳으로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모여 있다. 가야 고분 중에서 가장 많은 5천여점의 유물의 발굴된 유적지이다. 한식청동거울과 폭이 넓은 투겁창 등 중국 및 일본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제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는 양동리 고분군이 금관가야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세력의 집단무덤이었음을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양동리고분(사적)>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6<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2세기, 동의대학교 박물관>

김해 양동리 162호묘(2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2세기 후반 무렵에 한(韓)과 예(濊)가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강성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동리 162호 무덤은 이 시기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나무덧널무덤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8<청동거울과 칼>

이념을 나타낸 청동거울
주인공의 가슴에는 중국거울 2점이, 머리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만든 거울 8점이 놓여 있습니다. 이 시기 거울은 용모를 다듬는 화장용구가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특히 2점은 더욱 귀해서 가슴에 놓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신분을 나타낸 칼
주인공의 오른쪽 허리춤에는 여섯 점이 넘는 칼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의 칼을 소유해도 대단한 사람인데, 이렇게 칼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주 높은 신분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7<무기와 도끼>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29<무기와 쇠도끼>

무력을 나타낸 무기
주인공의 머리맡에는 다량의 투겁창과 화살이 있습니다. 무기는 그가 가진 무력을 나타낸 것으로 수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강했음을 의미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부유함을 보여주는 쇠도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이 곳 사람들이 철을 돈처럼 썼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철을 녹여 만든 쇠도끼가 무덤에 다발로 놓여 있는 것은 주인공이 엄청난 부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김해 대성동고분(사적)은 길이 약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가야고분군들과는 달리 거대한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 금관가야 건국설화와 관련된 구지봉, 대성동고분군, 수로왕릉, 봉황동유적지가 하천을 따라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1~5세기에 걸친 오랜 시기에 걸쳐서 조성된 무덤군으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중국제 거울, 북방계 말갖춤, 방패형동기, 호랑이모양 띠고리, 청동솥 등이 있으며, 당시 한.중.일 문화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가야의 대외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대성동고분(사적)>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0<김해 대성동 29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3세기,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대성동 29호묘(3세기)
김해 양동리 고분이 2세기 가락국(구야국)의 중심이었다면 3세기에는 김해 대성동으로 중심이 이동합니다. 대성동에서 확인된 첫 번째 왕의 무덤이 29호묘입니다. 내부에서는 북방의 오르도스동복,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등이 처음으로 확인이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3<큰칼과 무기, 쇠도끼>

신분을 나타낸 큰칼
주인공의 허리 부근에는 여러 자루의 큰칼이 놓여 있었을 것이지만, 무덤이 파괴되어 3자루가 확인이 됩니다. 이전에 신분을 나타내던 검은 큰칼로 바뀌었습니다. 찌르는데 특성화된 검과 달리 칼은 베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아마도 큰칼로 적장을 베었을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부유함을 보여주는 쇠도끼
주인공이 누운 자리의 바닥에는 90여점의 쇠도끼가 깔려 있습니다. 이전의 양동리 162호에서 40여 점을 부장한 것에 비하면 훨씬 부유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쇠도끼의 무게를 따지면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2<무기>

무력을 나타낸 무기
주인공의 다리와 머리쪽에는 많은 양의 투겁창과 화살이 있었을 것이지만, 무덤이 파괴되어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쇠도끼의 양이 크게 증가한 점에서 볼 때 무기류의 수량도 꽤 많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1<목단지>

이념을 나타낸 저장의례
주인공의 발치에는 이전의 무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짧은 목단지가 열을 지어 있습니다. 지금은 토기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그 안에 다양한 음식물을 가득 담아놨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무덤을 만드는 의례가 새로워졌음을 의미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락국(금관가야)이 이은 세계
가락국은 동북아시아를 바다로 잇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가야의 유적에서 나온 많은 배모양 토기는 철을 매개로 군현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3세기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인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는 일본 규슈지역이 청동거울과 청동창, 중국의 청동거울과 청동솥,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금박구슬 등이 나왔습니다. 4세기에는 교역의 폭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이 시기 대성동 고분에서는 왜이 중심부 기나이(畿內) 지역의 바람개비 모양 동기와 통모양 동기, 중국 서진의 허리띠장식, 북방 선비계통의 말갖춤, 서역의 유리그릇 등이 출토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4<검, 2세기, 1.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5<검, 2세기, 2.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6
<사신격자 무늬 거울, 1세기, 3. 전 김해 양동리, 부산박물관>

이 청동거울은 꼭지 주위에 12지의 글과, 무늬의 가장자리에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글의 내용은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63
<수정 목걸이, 3세기 1. 김해 양동리 27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수정 목걸이는 당시 가락국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구슬입니다. 그중에서도 이 목걸이는 가장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64
<목걸이, 2~3세기, 2.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65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66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7<1. 청동 세발솥, 3세기, 김해 양동리 32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입술부분에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다. “서0궁에서 사용하는 솥으로 용량은 1말이며, 무게는 17근 7량 7″으로 풀이됩니다. 제작 시기는 1세기로 추정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8<1. 쇠솥, 2~3세기, 김해 양동리 31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변한의 지배자 ‘신지’
1.3세기 한반도 남해안에는 여러 작은 나라가 있었으며, 각 나라에는 여러 명의 우두머리가 있었습니다. 우두머리는 세력의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살해(殺奚), 읍차(邑借)로 나뉘었습니다. 가야 이전 변한 최고의 지배자인 신지는 철을 바탕으로 교역을 하며 부를 축적한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이런 교역을 통해 중국과 일본 등지의 다양한 사치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은 중국 한나라 환제(桓帝, 재위 146~167년)와 영제(靈帝, 재위 168~189년) 때 중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으로 한과 예가 강성했다는 역사적 기록과 부합하여, 거대한 덧널무덤을 한반도 남부에서 처음으로 만든 사례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39<금동관, 보물, 1. 부선 복천동 1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부산 복천동 11호 무덤은 토기와 장식대도 등에서 신라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금동관은 신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와 가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가 모두 있습니다. 당시 부산지역은 대체적으로 5세기 이후 신라의 영향이 크게 미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0<청동칠두령, 4~5세기, 보물 2. 부산 복천동 22호묘, 복천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1<유리목걸이, 4세기, 3,5. 김해 대성동 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2<4. 김해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3<청동그릇, 4세기, 1. 김해 대성동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국 서진의 청동그릇입니다. 유사한 것들이 삼연을 비롯한 북방에서도 확인되어, 서진과의 직접 교류, 삼연을 통한 유입 등 유입경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4
<청동솥, 4세기, 대성동 4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67
<사신 격자무늬 거울, 4세기, 2. 김해 대성동 23호묘, 김해 양동리 44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5
<재갈, 4세기, 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6<말방울, 4세기, 5.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삿갓모양 말방울은 대성동유적에서만 출토되었습니다. 중국 조양(朝陽) 원대자 벽화 무덤, 안양(安陽) 효민둔 154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 북방의 유목국가(모용선비)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7<허리띠 꾸미개, 4세기, 1. 김해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에 부장한 중국식(서진) 허리띠 꾸미개입니다. 중국에서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한 허리띠 꾸미개는 황제나 왕족이 착용한 최고급 위세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8<금동말띠 꾸미개, 4세기, 2,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말머리 꾸미개, 4세기, 3.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49<유리잔, 4~5세기, 1. 김해 대성동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경주 금관총, 국립경주박물관(비교자료)>

바람개비 모양으로 나무나 가죽으로 된 방패에 붙인 것이다. 뒷면에는 방패에 매달기 위한 고리가 있다. 일본과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50<바람개비모양 동기, 4세기, 1.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김해 대성동 1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일본 고분시대의 문물로 방패나 화살통에 붙인 청동 꾸미개로 추정됩니다. 일본 기나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가나가와현 오즈카 고분, 서로는 후쿠오카현 마루쿠야마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속이 빈 둥근 통 속에 청동 또는 철로 된 작은 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장대에 꽂아 사용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다양한 지역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51<3. 통모양 동기,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39호묘, 88호묘, 9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일본의 경우 44기의 무덤에서 59점이 출토되었습니다. 기나이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사이타마현 구마노신사 고분, 남으로는 구마모토현 시미즈 고분에서 출토되는 등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52<왜계무기, 3~4세기, 김해 양동리, 대성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4. 창, 5. 돌화살촉, 6. 청동촉>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53 <7. 화살촉>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548. 가락바퀴모양 석제품, 4세기, 대성동 18호묘, 8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가야의 지배자
3~4세기에 이르러 변한은 가야로 성장합니다. 가야는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가야의 지배자는 많은 제사음식을 담은 토기를 발치에 늘어놓고, 무력을 의미하는 갑옷과 무기를 다량으로 부장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사후세계에서 함께할 시종을 순장했습니다.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은 명실상부한 가야 최고 지배자의 무덤입니다. 이 무덤에서는 회청색의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오르도스형 청동솥 등이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확인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금관가야 20200212_55<뚜껑, 6세기, 1. 동해 추암동 43호묘, 국립춘천박물관, 2. 고령 지산동 72호묘, 국립경주박물관>

 경북 고령에서 200km 이상 떨어진 강원도 동해 추암동 이곳에서 발견된 가라국의 토기
526년 싸움에 져서 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가야금은 신라 천년의 악기가 되었고 오늘의 선율이 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락국(금관가야)이 이은 세계
가락국은 동북아시아를 바다로 잇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가야의 유적에서 나온 많은 배모양 토기는 철을 매개로 군현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3세기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인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는 일본 규슈지역이 청동거울과 청동창, 중국의 청동거울과 청동솥,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금박구슬 등이 나왔습니다. 4세기에는 교역의 폭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이 시기 대성동 고분에서는 왜이 중심부 기나이(畿內) 지역의 바람개비 모양 동기와 통모양 동기, 중국 서진의 허리띠장식, 북방 선비계통의 말갖춤, 서역의 유리그릇 등이 출토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가야의 무기

삼한시대 가야지역은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점차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금관가아와 아라가야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5세기와 6세기에는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다. 가야 고분에서는 칼.창 같은 철제 무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특히 용과 봉황 등을 장식한 고리자루칼은 지배자의 신분과 내부 결속을 다지는 상징물로 추정된다. 가야는 풍부한 철자원과 우수한 철기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6<철기 만드는 도구, 4세기, 1. 끌,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7<2. 집게, 김해 퇴래리 소업I-1호묘, 6호묘, II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8<3. 망치, 김해 퇴래리 소업I-1호묘, 6호묘, II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9<3. 망치>

철기를 만드는 도구는 왕을 포함한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무덤에서 나옵니다. 이는 철기 제작 기술을 보유한 집단의 성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술은 요즘의 첨단기술에 해당하여 특정 집단이 보안을 유지하며 전승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0<덩이쇠, 5세기, 고령 지산동 75호묘, 대가야박물관>

덩이쇠는 다른 용도의 철기로 만들어 쓰기도 하고, 화폐로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가야의 지배자는 무덤 바닥에 덩이쇠를 깔아서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가야는 여러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덩이쇠의 모양이나 규격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1<덩이쇠, 4~5세기, 김해 대성동 94, 95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2<함안 도항리 1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3<덩이쇠를 활용한 철기류의 재현품>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4<화살통 꾸미개, 5세기, 고령 지산동고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71
<봉황장식 큰칼, 합천 옥전 M3호묘, 5세기,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5<봉황장식>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6<종장판 투구, 5세기, 옥전 M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7<말머리 가리개, 5세기, 합천 옥전 M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새를 장식한 미늘쇠는 아라가야와 대가야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미늘쇠의 용도에 대해서는 특정 집단의 군사적 상징물이라는 설과 장례용구의 하나라는 설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72
<미늘쇠, 4~6세기, 합천 옥전 M6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함안 도항리 1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가야의 철
고대사회에서 철을 다루는 기술은 군사력과 직결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첨단기술이 군사기술에 먼저 사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철은 동(銅)과 달리 두드려서 얇게 펼 수 있고 두들겨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락국은 철 수출의 중심지로, 일정한 크기로 만든 도끼와 덩이쇠는 지금의 돈처럼 쓰였습니다. 김해 퇴래리 소업 유적에서는 철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중 1호 무덤에서 고리자루 큰칼이 출토되어 당시 철기를 만드는 장인의 신분이 높았음을 말해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원료인 철광석을 녹여 철을 뽑아낸 후 생산된 철로 도구를 만들어야 한는데 상당한 수준의 전문지식과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김해에는 제철기술을 갖춘 장인들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생전에 사용했던 망치와 큰못 등을 같이 묻었다. 부장품으로 고리자루 큰칼이 같이 묻혀 있어 이들이 상당히 높은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8<제사토기, 4세기, 김해 퇴래리 소업유적 I-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19<제사토기>

철 제작 장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그릇입니다. 그릇받침과 굽다리 접시 등이 가락국의 양식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0고리자루 큰칼, 4세기, 김해 퇴래리 소업유적 I-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주인공의 신분을 나타내는 정치적 상징물입니다. 큰칼을 소유한 자는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1<1.쇠투겁창, 화살촉, 도끼, 낫>

높은 신분을 가진 자가 사망하면 기본 조합으로 구성된 부장품을 넣었습니다. 기본 조합 철기류는 쇠투겁창, 화살촉, 도끼, 낫입니다. 이 철기류를 소유한 자는 높은 신분이었음을 나타낸 듯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2<철기 만드는 도구, 4세기, 김해 퇴래리 소업유적I-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무덤 주인공의 직능을 말해주는 부장품입니다. 삼국시대에 철을 다루는 장인은 요즘의 첨단 기술을 취급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의 제철장인
철의 생산은 광석의 채취에서 제련 및 정련에 이르는 모든 제철기술을 갖춘 전문 집단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제철작업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문지식과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김해 퇴래리 소업 유적은 가락국에서 제철기술을 갖춘 전문 장인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이 무덤에는 장인이 생전에 사용한 망치와 큰못 등을 부장했습니다. 이 중 1호 무덤의 주인공은 신분을 보여주는 고리자루 큰칼과 철기를 제작하던 도구를 모두 소유하고 있어 비교적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 장인의 신분이 높은 것은 제철기술이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관리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는 초기에 쇠단검, 쇠투겁창, 쇠꺽창 등을 사용했으며, 2세기 후반부터 쇠장검, 고리자루큰, 슴베있는 쇠화살촉 등이 추가되었다. 3세기 후반부터 관통력이 향상된 단면 마름모꼴 쇠투겁창과 목 있는 쇠화살촉이 무기의 주류로 자리잡았으며 5~6세기에는 금은으로 장식한 큰칼이나 화살통 등이 유행하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5
<화살촉 다발, 5세기, 합천 옥전 M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6<화살통 꾸미개, 5세기, 합천 옥전 28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7<화살통 재현품, 고령 지산동 고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9<큰칼, 4~6세기, 1. 함안 도항리 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합천 옥전 28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3,7. 부산 복천동 28호묘, 복천박물관, 4. 함안 도항리 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5. 고령 지산동 73호묘,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50<6. 고성 송학동 1C호분,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73
<쇠투겁창, 4~6세기, 1. 고성 내산리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2.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고령 지산동 75호묘, 대가야박물관, 5. 합천 옥전 28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6. 남원 월산리 M1-A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51<3. 김해 여래리 II지구 4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52<화살촉, 4~6세기, 7. 고성 내산리 21-1호묘,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53 <8. 고령 지산동 30호묘 주변 I지구 3호묘, 국립대구박물관, 11. 함안 도항리 8호묘, 54호묘, 마산 현동 6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54<10. 부산 복천동 38호묘, 복천박물관,>

가야의 무기
가야의 무기는 다양합니다. 백병전에 사용하는 칼, 검 그리고 철창이 대표적입니다. 칼은 무기이지만, 화려한 장식으로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창은 가야를 대표하는 주요한 무기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가야의 갑옷과 투구

가야의 철갑옷은 대체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판갑옷이며 이외에 삼각형의 철판을 이어 만든 판갑이나 작은 철판 조각을 비늘갑옷 등이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갑옷은 큰 철판 20~30매를 이어서 만든 판갑옷이다.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가야을 정벌하면서 금관가야가 쇠퇴하게 되었으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비늘갑옷 등 다양한 형태의 갑옷과 말에도 갑옷을 입힌 중장기병이 도입되었다. 4~5세기에 조성된 가야 고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갑옷들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무사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1<가야의 갑옷과 투구>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2<가야의 갑옷과 투구>

힘, 가야는 힘이 없었나요? – 철의 무사
42년부터 562년까지, 520년간 가야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가야의 힘은 문화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철에 있었습니다. 당시 철을 최고의 첨단 소재로서 철을 다루는 기술은 곧 나라의 국력과도 직결되었습니다. 장군들은 철로 만든 갑옷과 칼을 사용했고, 말도 철로 만든 갑옷과 투구를 썼습니다. 4세기 가야는 새와 고사리무늬 등을 장식한 종장판갑옷이라는 독창적인 갑옷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의 갑옷 대부분은 가야에서 만든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판갑옷은 큰 철판 20~30매를 이어서 만든 것으로 초기부터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판갑옷은 오른쪽 앞 몸통, 왼쪽 앞 몸통과 뒷몸통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뒷몸통과 앞몸통은 분리할 수 있도록 하거나 가죽, 경첩 등으로 연결하여 갑옷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하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1
<갑옷, 어깨가리개, 투구, 5세기, 고령 지산동 32호묘, 국립대구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2
<삼각판 갑옷과 차양주, 5세기, 김해 두곡 43호묘, 부경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3
<갑옷과 투구, 합천 옥전 28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5
<갑옷,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6
<갑옷, 부산 복천동 86호묘, 복천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7
<갑옷, 4세기, 김해 퇴래리고분, 국립김해박물관>

가락국의 판갑옷은 삼국시대 갑옷 중에서 가장 화려합니다. 판갑 표면에 특정 문양을 덧대는 것은 물론이고, 목을 둘러싸는 테두리에 동물의 털을 붙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8
<투구와 삼각판 갑옷, 5세기, 함안 도항리 13호묘,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9
<갑옷, 목가리개, 투구, 4세기, 보물, 부산 복천동 38호묘, 복천박물관>

가락국 초기 철갑옷으로, 갑옷을 구성한 개별 철판의 크기가 크고 이를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이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70
<갑옷과 투구, 4세기, 김해 양동리 7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여러장의 긴 철판을 연결하고, 고사리 문양을 붙여 만든 갑옷과 투구입니다. 갑옷에 고사리 문양이나 새 문양을 붙이는 것은 가락국 갑옷의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비늘 갑옷은 작은 비늘 모양의 철판 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판갑옷에 비해 움직임이 용이하여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많이 사용했다.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사무라이 갑옷으로 애용되었다. 비늘갑옷은 구조가 복잡하고 출토상태가 좋지 않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가야의 다양한 지역에서 비늘갑옷이 출토되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64
<비늘갑옷, 목가리개, 투구, 남원 월산리 M5묘 M1-A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운봉고원에 자리잡은 기문의 최고 지배자가 소유한 독특한 형태의 투구와 비늘갑옷입니다. 투구는 정수리 부분을 막은 복발이 마치 관모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마 부분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챙이 달려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8<비늘갑옷, 5세기, 김해 열래리 II지구 4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비늘갑옷은 4세기 후엽부터 확산되기 시작하여 5세기 이후에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비늘갑옷이 유행하면서 종래의 종장판 갑옷은 점차 사라지는 대신 왜계 판갑옷의 수량이 늘어났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종장판 갑옷은 긴 철판을 세로로 두고 연결한 것이다. 판갑옷을 개량한 것으로 보이며 광개토대왕 정벌 이후 비늘갑옷으로 바뀌는 전단계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남원 월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전환기 갑옷과 투구의 보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3
<종장판 투구, 남원 월산리 M1-A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4
<목가리개, 5세기, 남원 월산리 M5호묘, 국립전주박물관>

말 탄 무사모양 뿔잔(국보)은 갑옷으로 튼튼하게 무장을 한 가야 기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높이 23.2 cm 크기의 인물형 도기로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의 형상을 올려놓고 있다. 표현방법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가야무사의 복식과 무기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뒤쪽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각배가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4<말 탄 무사모양 뿔잔, 5~6세기, 국보, 전 김해 덕산리, 국립경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5<정면에서 본 모습>

무사는 갑옷을 입었고, 손에는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류와 방패를 들고 있습니다. 갑옷은 투구와 목가리개 등이 잘 표현되어 있고, 말에도 무사와 마찬가지로 몸 둘레에 갑옷을 걸쳤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03<가야 무사를 재현한 모습>

철갑옷과 중장기병
문헌 기록이 많지 않은 가야는 다양한 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함안 마갑총과 고령 지산동 유적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철제 말갑옷이 실물로 출토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가야의 여러 무덤에서는 판갑옷과 비늘갑옷이 다양하게 확인되어 당시 가야무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철갑으로 두른 말을 다루기 위한 말갖춤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중국 북방 선비족의 영향을 받으며 가야의 말갖춤은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국보 말탄무사모양 뿔잔은 가야 중장기병의 실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0<말갑옷, 5세기, 함안 마갑총,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41<반대편에서 본 모습>

가야가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중장기병은 북방의 고구려와 삼연(三燕) 등 정주화한 유목국가가 널리 활용하였습니다. 가야의 말갑옷은 제철기술과 국력이 주변 나라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3<말머리 가리개, 4~5세기. 1. 김해 대성동 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4<2. 함안 말이산 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5<재갈, 4~5세기, 3.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6<5. 고령 지산동 73호묘,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7<6. 남원 월산리 M5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8<7. 말안장 꾸미개,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29<발걸이, 5~6세기, 8. 함안 도항리 5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9. 고성 송학동 1A-1호묘, 10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0<10. 고성 송학동 1A-1호묘, 10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1<11. 고령 지산동 75호묘, 대가야박물관, 12. 합천 옥전 M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2<말띠 드리개, 5~6세기, 13. 함안 도항리 4호묘, 8호묘, 5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5<13. 말띠 드리개>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4<14. 고령 지산동 45호묘, 73호묘, 7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3<15. 말띠꾸미개, 6세기, 함안 도항리 4호, 2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7<15. 말띠꾸미개>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8<말방울, 5세기, 16. 함안 도항리 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1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9<17. 합천 옥전 M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무사 20200212_36<19. 기꽂이, 5세기, 합천 옥전 M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의 중장기병
중장기병은 말과 말탄 사람 모두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전사를 말합니다. 중장기병의 역할은 주로 적진을 향하여 돌진하여 보병의 대열을 흩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중장기병은 발걸이에 발을 올리고 안장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달렸습니다. 특히 발걸이는 안정된 자세로 활을 쏘거나 장이나 칼을 휘두를 때, 튼튼한 지지대와 같았습니다. 가야에서 중장기병의 존재를 보여주는 자료는 함안 마갑총, 고령 지산동 75호, 함천 옥전 M3호 무덤 등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왕이나 왕족과 같은 높은 신분에 해당하므로, 중장기병의 말갖춤이 소유자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전장을 누볐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어쨌든 가야 무덤에서 나온 말갑옷과 비늘갑옷은 국력에 직결되었던 제철기술과 군사력이 다른 삼국에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5.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대외 교류

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풍부한 철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가야 유적지에서는 당시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 지리적,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국 북조와 남조를 비롯하여 멀리 서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도 보인다. 청동솥, 거울, 방패꾸미개, 적갈색토기 등은 가야와 주변국가와의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들이다. 또한 신라, 백제, 고구려와는 정치, 외교적 상황에 따라 적절히 교류했는 백제로부터 받은 금동관모와 쇠자루솥, 신라로부터 받은 유리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31
<갑옷과 투구, 5세기, 지산동 30호 주변 1~3호묘, 함양 상백리고분, 국립대구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가야연맹체가 있었던 경남지역은 고대 이래 한,중,일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삼한시대 이전부터 왜(倭)의 대외교류 창구이기도 했다. 삼한시대 이후 교류는 김해지역 금관가야가 주도했으며 백제가 왜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 광개토대왕의 정벌 이후 급격히 약해졌다. 이후에는 고성 지역의 소가야와  섬진강유역을 장악했던 대가야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남해안 일대 주요 거점에서는 왜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2<녹각장식 철검, 5세기, 4. 함안 말이산 3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32
<유리구슬, 5세기, 거제 장목고분,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3<왜의 청동거울, 6세기, 6. 산청 생초 9호묘, 진주 중안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5<뚜껑접시(스에키계 토기), 5세기, 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7<왜계토기(스에키계 토기), 6세기, 9. 산청 생초 9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6<왜계토기(스에키계 토기), 6세기, 9. 산청 생초 9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왜
가야와 왜의 교류는 지리적인 이유로 일찍부터 있었지만, 4세기 이후 백제가 급부상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왜와의 교류를 주도하던 가락국은 366년 왜가 백제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 400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남쪽을 정벌한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가락국이 연결한 왜와의 교류는 5세기 이후, 남해의 해상왕국 고자국과 섬진강 일대를 다스리던 가라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남해안 일대 연안항로의 요충지를 따라서 왜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가라국의 귀걸이가 여러곳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백제는 왜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가야를 적절히 지원하면서 신라를 견제했다. 대가야 고분에서는 백제 금동관모과 귀걸이가 출토되었으며, 여러 지역에서는 백제와 관계를 보여주는 큰칼과 청동그릇 등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8<금동모관, 4~5세기, 1. 경기도 화성 요리1호묘(비교자료), 화성시 향토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9<금동모관, 4~5세기, 2.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0<금동모관, 4~5세기, 3. 합천 옥전23호묘(복제품), 경상대학교 박물관>

백제에서 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귀걸이가 다라국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 묻혔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1<금귀걸이, 4~6세기, 4.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5. 합천 옥전 M1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허리띠고리, 6세기, 6. 합천 옥전 M1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청동그릇은 여러 가야가 백제와 각기 자율적으로 추진한 외교의 결과로 추정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3<쇠자루솥, 5~6세기, 1. 서산부장리 5호묘, 국립공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4<쇠자루솥, 5~6세기, 2. 남원 월산리 M5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2<청동그릇, 5~6세기, 3. 합천 옥전 M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4. 의령 경산리 2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5<청동 굽다리접시, 6세기, 5. 고성 송학동 1C호묘, 고성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6<고리자루 큰칼, 4~6세기, 1. 봉황장식, 고령 지산동 73호묘,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7
<2. 상감장식, 함안 마갑총, 국립김해박물관, 4. 봉황장식, 산청 중촌리 3호묘 북토광, 신라대학교 박물관, 5. 천안 용원리 1호묘, 국립공주박물관, 비교자료>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8<3. 상감장식, 남원 월산리 M1-A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9<6. 은장식, 함천 옥전 28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백제
4세기 무렵 백제와 고구려 같은 강대국의 출현은 가야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백제는 가야를 적절히 지원하여 신라의 팽창을 억제하기도 하고, 여러 가야 중 어느 한 나라가 커지는 것도 경계하였습니다. 4세기 후엽 백제는 강성한 가락국보다는 가라국과 다라국을 돕기도 합니다. 고령 지산동 73호 무덤에서는 백제에서 만든 금동관모와 귀걸이가 출토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아라국과 고자국 등 여러 가야의 지배자가 소유한 큰칼과 청동그릇 등은 제작기 백제와 정치적 관계를 맺었음을 말해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경남 창녕지역에 있었던 비화가야는 비교적 이른시기부터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 교동 등 주요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공품이나 마구, 칼 등은 신라식이 많지만 토기문화는 여전히 지역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이는 큰칼이나 토기, 유리잔 등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0<세잎장식 큰칼, 1. 의성 학미리 1호묘(비교자료), 국립대구박물관, 3. 용장식 큰칼, 6세기, 경주 호우총,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1<세잎장식 큰칼, 2.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세잎장식 큰칼은 신라가 제작하여 가라국에 전해 준 것으로, 가라국과 신라 왕실이 맺은 정치적 관계를 보여준다. 용머리장식 큰칼은 가라국이 신라 왕실에 선물한 장식대도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2<말띠드리개, 6세기, 1.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3
<유리그릇, 5세기, 2. 옥전 M1호분, 경상대학교 박물관>

다라국의 지배자가 가진 유리잔은 신라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인 대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허리띠는 신라나 백제로부터 받은 허리띠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4<관꾸미개, 5세기, 3. 경산 임당 7A호묘(비교자료), 영남대학교 박물관,허리띠, 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5<관꾸미개, 5세기, 4. 고령 지산동 73호묘 서순장관,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6<신라토기, 1. 고성 송학동 1B-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합천 옥전 3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7<신라토기, 2. 고성 내산리 8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8
<신라토기, 4. 김해 대성동 73호묘, 성동고분박물관, 5.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신라
가야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가야를 포섭하거나 회유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습니다. 가령 합천 옥전 M1호 무덤에서 나온 다라국의 지배자가 가진 유리잔은 신라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인 대가였을 것입니다.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 무덤의 주인공이 가진 큰칼은 가라국과 신라 왕실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한편 고성 송학동 고분군에서 나온 신라 토기는 고자국의 지배자가 사망했을 때, 정치적 협력관계를 이끌어내기 위해 신라의 조문 사절단이 들고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 독자외교 – 자율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독자적으로 대외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듯 가야의 고분군에서는 중국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왜, 신라, 백제, 고구려 등과 교류한 증거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다라국이 백제로부터 받은 금동관모, 신라로부터 받은 유리그릇, 고자국이 받은 왜와 신라의 토기, 기문(己汶)이 받은 백제의 쇠자루솥과 가라국의 귀걸이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대로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 풍납토성에서는 고자국의 토기가, 신라의 식리총에서는 가라국의 큰칼이 출토되었습니다. 왜에서는 가라국의 귀걸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야의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여러 가야들은 각기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주변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외교적 관계를 맺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가야의 토기

가야 토기는 같은 시기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어떤 토기보다 단단하며 형태적으로도 아름답다.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높은 온도의 밀폐가마, 고속 회전 물레 등 발달된 토기 제작기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회청색의 아주 단단한 토기를 만들었다. 가야의 토기는 곡선적인 다리를 가진 굽다리접시, 짧은 목항아리, 다양한 형태의 그릇받침이 특징적인데 연맹체 국가답게 지역별로 다양한 특징을 보여준다. 높은 기술수준과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지역별로 다양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01<가야의 토기>

가야토기 – 다양성
토기는 가야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가장 귀한 유물입니다. 비슷한 형태의 토기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추어 다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굽다리접시만 보더라도 바깥으로 벌어진 입을 가진 가락국, 불꽃무늬의 구멍으로 장식한 아라국, 삼각형으로 구멍을 낸 고자국 등 작은 차이지만 제각기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가야토기는 굽다리접시, 짧은 목항아리, 그릇받침 등 여러 형태를 제각기 개성있게 만드는 제작기술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아라국의 항아리는 흡사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연상케 합니다. 크고 둥근 이 토기는 지금 우리의 미감에도 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가야연맹체 주요 유적지(고분) 분포>

가야의 공존
높다란 언덕 위에 봉긋이 솟은 고분들은 가야의 존재방식인 공존을 잘 보여줍니다. 낙동강과 섬진강 일원, 지리산 너머의 지역을 아우르는 곳에서 가야의 고분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무덤의 크기와 형태는 제각기 다르고, 토기와 철기 등은 자신들이 가진 고유한 문화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가야 고분군은 가야의 존재방식인 ‘공존’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 토기의 종류로는 굽다리접시, 항아리, 그릇받침 등이 있다. 신라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직선적이고 창은 사각형이며 상하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곡선적이며 창의 형태가 다양해 불꽃모양이나 작은 원형도 있다. 이와 더불어 신라나 백제에 비해 다양한 형태와 무늬를 가진 그릇받침은 가야 토기 중 가장 특징적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2<1. 가야의 뚜껑접시, 2. 가야의 여러토기, 3. 가야의 짧은 목항아리, 5~6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1<4. 가라국의 긴 목항아리, 5~6세기>

창녕 지역에 있었던 비화가야(비사벌국)은 초기에는 가야의 특징을 갖춘 토기를 생산했으나 점차 신라 토기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화가야의 토기는 가야와 신라 토기의 특징들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0<5. 비사벌국토기, 창녕 계성리 1호묘,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09<5,6. 비사벌국토기, 창녕 계성리 1호묘,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20200212_43<비사벌국 토기의 특징>

비사벌은 낙동강의 본류를 낀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힘에 눌려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4세기에는 가야를 대표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비사벌이 언제부터 신라에 예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대략 5세기 후반부터는 신라의 영향력이 높아집니다. 비사벌은 처음에 가야의 특징을 갖춘 토기를 생산하다가 점차 신라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습니다. 굽다리접시는 부드러운 곡선의 다리에 상하 일렬의 창을 배치했습니다. 그 후 직선적인 모양으로 바뀌고, 뚜껑의 꼭지는 단추 모양에서 창을 뚫은 다리 형태로 변합니다. 나머지 토기도 굽다리접시와 마찬가지로 가야와 신라토기의 요소가 공존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소가야(고자국)는 경남 진주, 사천과 고성 반도의 남해안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해로와 육로를 이어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교역으로 발전하였다. 소가야 특유의 토기로는 키가 작고 네모 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위가 벌어진 항아리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6 <고자국토기(古自國), 5~6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4 <고자국토기(古自國), 5~6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3<고자국토기(古自國), 5~6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20200212_42<고자국(소가야) 토기의 특징>

고자국은 남해안의 해상 강국이었습니다. 대체로 4세기 무렵까지는 가락국의 기세에 눌려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5세기 이후에는 가라국 및 아라국과 함께 가야를 대표하는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고자국은 바닷길에 위치하여 왜와의 교류가 잦았으며, 이에 따라 왜계 토기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고자국도 가야의 다른 나라처럼 독자적인 모양의 토기를 생산하였습니다. 굽다리접시에는 길이가 길고 폭이 좁은 삼각형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마치 깔때기의 주둥이와 비슷하고 입술이 수평으로 크게 벌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신라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직선적이고 투창은 사각형이며 상하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곡선적이며 투창의 형태가 다양해 불꽃모양이나 작은 원형도 있다. 사각형의 투창은 상하 일렬로 뚫어 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0
<1,2. 신라지역에서 나온 토기, 6세기, 동해 추암동고분, 3. 신라토기, 비교자료, 5~6세기,4. 가야의 굽다리접시, 4~5세기>

가야 고분들에서는 많은 유물들을 묻혀 있었는데 그중 상형토기는  철제무기류와 함께 가야를 상징하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인물이나 기물 등을 본떠서 만든 토기인 상용토기는 가야와 신라지역에서만 주로 출토되는 유물로 수레.배.집 등의 토기에서는 당시 가야인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각종 동물모양의 토우에서는 그들의 사후관이나 정신세계를 추론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지금도 바퀴모양토기를 가야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각배라고도 하는 뿔모양의 잔에서는 중앙아시아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등 다양한 문화교류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진시황 무덤의 병마용, 당삼채를 비롯하여 중국 고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한,중,일 해상무역로를 통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9<5. 가야의 본뜬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0<새모양 토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1<새모양 토기>

각배로 말이 뿔모양 잔을 지고 있는 모이다. 낙동강 유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되며 남성적이고 신성한 말에 대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각배는 다양한 형태의 유물로 남아 있다. 중앙아시아 민족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제사 의식 등에 사용한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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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3<새모양 토기>

둥글고 큰 수레바퀴를 뿔잔의 양 옆에 붙여 만든 것으로 무덤에서 출토된다. 영혼을 나르는 의미로써 제사 등의 의례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4<바퀴모양 토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40<바퀴모양 토기>

사후세계에 불을 밝히는 등잔으로 보이는 토기이다. 등잔은 무덤을 구성하는 주요 껴묻거리 중 하나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6<등잔>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7<투호처럼 생긴 토기>

사슴이 붙은 구멍단지로 제사나 각종 행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들에게 사슴은 신령스러운 동물이었다. 사슴은 특히 시베리아 지역에서 신성시 여겨지는 동물로 샤머니즘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8<사슴모양이 있는 토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39<등잔>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연상케 한다. 크고 둥근 이 토기는 지금 우리의 미감에도 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18<6. 가야의 달항아리, 함안 말이산 4호묘>

아라가야(아라국)은 지금의 경남 함안 지역에 있었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아라가야는 편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발전하였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토기는 굽다리접시의 상하 폭이 같은 통모양의 것과 불꽃모양의 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가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3<아라국(阿羅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2 <아라국(阿羅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1<아라국(阿羅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20200212_44<아라국(아라가야) 토기의 특징>

아라국은 4세기 이전부터 강국이었던 만큼 독자적으로 토기를 생산했습니다. 아라국은 가락국의 뒤를 이어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구워냈습니다. 4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아라국은 돗자리무늬를 장식한 둥근 항아리를 생산하여 여러 지역에 유통시켰습니다. 아라국에서는 특히 불꽃무늬 구멍을 굽에 뚫은 굽다리접시가 유명한데, 아라국의 상징이라 할 수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토기입니다. 아라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토기입니다. 또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다리의 폭이 좁고 길며, 접시 부분은 마치 공을 반으로 쪼갠 듯 깊고 둥그스름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대가야(가라국)는 경북 고령 지역이 중심지였다. 철의 생산지인 합천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점차 주변의 전북 남원.장수, 경남 하동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다. 대가야의 특징적인 토기는 얕은 접시에 작은 네모 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잘록한 목항아리, 몸통에 세로로 띠를 붙여 장식한 원통모양 그릇받침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3<가라국(加羅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5<가라국(加羅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4<가라국(加羅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20200212_41<가라국(대가야) 토기의 특징>

가라국은 4세기 후엽 무렵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누린, 가야의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그 전성기에는 낙동강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가야의 여러 나라들을 규함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습니다. 가라국의 토기가 독창적인 모양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라 할 수 있으며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유통되었습니다. 가라국의 토기는 통모양의 그릇받침과 굽다리접시에서 가장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통모양 그릇받침은 뱀 또는 용의 형상을 띠 모양으로 길게 붙였고, 굽다리접시는 그릇의 두께가 두껍고 접시의 깊이가 낮아 납작해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금관가야(가락국)는 경남 김해와 부산지역에 있었다. 금관가야는 초기부터 철을 매개로 대외교역을 장악하면서 성장하여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체가 되었다. 금관가야의 토기는 물결무늬가 새겨진 화로모양의 그릇받침과 입술이 바깥으로 크게 꺾인 굽다리 접시가 주를 이룬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9<가락국(駕洛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8<가락국(駕洛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토기 20200212_27<가락국(駕洛國) 토기,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20200212_45<가락국(금관가야) 토기의 특징>

가락국은 3세기 후엽,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먼저 1200℃ 정도의 불에서 단단하게 구운 토기를 생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목을 가진 항아리에서 시작하여 점차 굽다리접시와 손잡이를 붙인 화로모양토기 등, 토기의 종류가 늘어났습니다. 화로모양토기는 몸체에 띠모양의 손잡이를 붙였습니다. 이 두 토기는 가락국 토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가락국은 가야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토기의 생산 기술이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토기의 모양은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높은 온도에서 흙 속의 광물이 녹아 표면에서 유리광택을 내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