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지역박물관

[상주박물관] 상주의 근대

조선시대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 중심지에 위치했던 상주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로에서 소외되면서 지방 소도시로 바뀌었다. 구한말 동학에서 분리된 경천교과 상주 지역에 자리잡기도 했으며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근대 농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근.현대사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평등 존중의 정신을 알리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 부패한 정치와 봉건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자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 실패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이후 3대 교주 손병희는 천도교로 개칭하여 교세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남.북접의 내부적 갈등으로 공주에서 활동하던 김주희는 보은에서 경천교라 하고 1915년에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동학교라 개칭하였다. 1918년 상주 은척면에 동학교당을 창건하고 1922년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받아 동학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하였다. 또한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여 교세가 경북을 중심으로 충청도까지 미쳤으나,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상주 동학교당은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자주적인 발전을 하여 동학 본래의 취지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동학교당 전시관에는 동학가사 및 책판, 생활용품, 인쇄도구 등 2,000여 점에 달하는 기록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동경대전,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궁을경, 근대, 상주 동학교주인 김주희가 궁을과 동학의 의미, 천도 회복의 원리, 유도와의 관계, 포덕천하 보국안민 등에 대해 문답식으로 풀이한 동학 경전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행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내기

OLYMPUS DIGITAL CAMERA오룡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외기

OLYMPUS DIGITAL CAMERA동학가사, 근대

근대의 상주
1895년 상주목은 상주군, 함창현은 함창군으로 바뀌어 안동부에 속하였다. 1905년 전국을 8도로 정비하였는데, 상주군은 31면에서 22면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31면에서 의성군에 4면, 문경시에 5면을 넘겨주면서 21면이 되었다. 1914년 상주와 함창이 통합되었으며, 1917년 상주역이 설치되어 여객 및 화물운송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상주장터 만세운동에서부터 3월 29일 이안면 소암리 만세운동, 4월 9일 화북면 운흥리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전후 4회에 걸쳐 일어났다. 이후 민족실력양성운동인 청년운동은 물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였다.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잠업 등 근대 농업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1931년 읍면제 실시에 따라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이후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다른 지역으로 나게 된다. 1980년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상주시와 군이 분리된다. 1995년 상주시와 군이 합하여 도농통합의 상주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중심, 갖지로 연결되는 편리한 도로망은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상주를 잇는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호적부, 상주군 외서면의 1960년 호적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식산은행 상주지점 문서, 1921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농잠학교 졸업증서, 1940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보통학교 가정통신문,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농잠학교 1회 졸업사진첩, 1924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상주박물관] 상주의 유학

조선시대 상주에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향교, 서원, 서당 등이 있었다. 경상도를 대표하는 큰 고을인 상주목의 위상에 걸맞게 상주향교는 규모가 크고 교육기능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서원은 안동이나 경주 등 다른 지역에 비해 많지 않은편이다. 상주의 유학은 조선중기 노수신이 학문적 위상이나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아 그 영향이 많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전후 상주목사를 역임했던 류성룡과 교류하면서 정경세, 조정, 이전 등 많은 인물들이 지역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는 등 사화적으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상주의 교육기관
조선시대 상주지역이 교육기관은 서당.향교.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향교와 서원은 유교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컸다. 1580년 지역내 유림들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과 학문적 연원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유림들은 서당.향교.서원 등을 통하여 세력의 근거지를 갖추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수선서당 심원록, 수선서당록, 조선시대

1542년(중종 37) 상주목사 신잠에 의해 관내 17개의 서당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상주 최초의 서당인 수선서당이 세워졌다. 1580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은 각 면에 훈장을 두어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황희초상, 조선시대,

조선 세종 떄의 재상인 황희의 초상화이다. 옥동서원 소장 자료에 따르면 황희 생전인 62세(1424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단에 채색된 형태이며, 초상화의 표현이나 묘사 등을 고려했을 떄 전체적으로 고식을 따르고 있다. 황희.전식.황효헌.황뉴를 모신 사액서원이자 미훼철 서원인 옥동서원(사적 532호)에는 이 밖에 황희 초상 모사본 3본이 전해져 내려온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현판, 조선시대

창건 당시 정경세는 원호의 제정 등 제반사항을 유성룡에게 품의하여 정했는데, 그 바탕에는 상주를 영남유학이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려는 큰 뜻이 있었다. 서원 명칭인 ‘도남’은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내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상량문,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팔도서원록, 도남 강학계안 상하,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금록,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시권, 조선시대

상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서원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605년 정경세, 조정, 송량, 이전, 이준 등의 발의로 1606년 상주 최초의 서원인 도남서원이 세워졌다. 이후 옥동서원, 흥암서원 등 사액서원 3곳을 비롯한 여러 서원들이 상주에 지어졌고,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 유학의 융성
16세기 중반 노수신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아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관직생활과 유배생활로 인해 정작 상주에서의 활동은 미약하였다. 당대 다른 인물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해 하나의 학문적 계통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부족하였다. 16 ~ 17세기에 이르러 유성룡.김성일 등 동인 집권 세력과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유학이 크게 번성한다. 임진왜란 전후 상주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강응철.정경세.조정.이전.이준.전식 등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과 학문적 관계를 맺는다. 이들 중 정경세는 「영남인물고」에서 상주의 대표적인 학자라 소개할 만큼 이황에서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도통을 전수받았다. 17 ~ 18세기에 성리학과 예학이 주류였던 학품이 점차 실학으로 바뀐다. 이만부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앞서 연구된 실학의 체계를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상주의 학문적인 면모는 정치성향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강세응은 평소 강직한 성품 탓에 직언으로 명성이 매우 높았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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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회도,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기로서에서 베푼 기로연에 참석한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연회 참석자와 춤추는 시녀 증 부수적인 인물이 다양한 동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산보략,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초를 잡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 노씨 집안의 족보 초본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집본초,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직접 작성한 문집의 초본입니다. 집필연대는 명종초이며, 유배생활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청일기,정사수로그, 조선시대, 복제품. 

정청일기. 의정부에 재임하면서 정청관계를 기록한 일기입니다. 상권은 노수신이 이조판서에서 좌의정에 이르는 시절을, 하권은 영의정 시절에 겪은 정청관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사수록, 노수신이 영의정과 좌의정을 재임하면서 사직을 원하는 서장과 정사가 실려 있으며, 선조 중엽에 작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노수신 증시교지, 조선시대. 노수신 사후 숙종 연간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명하고 문의였던 시호를 ‘문간’으로 고쳐 내리는 교지입니다.

소재 노수신(1515 ~ 1590년)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 호는 소재이다. 그의 장인인 탄수 이연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3년(중종 38) 대과에 급제하여 3장의 장원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이후 이조좌랑의 자리에 올랐다. 1545년(명종 1) 을사사화로 인해 파직당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다시 유배됨으로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도 이황, 김인후 등 유학자들과 끊임없이 학문을 논하였다. 1567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교리로 서용되어 대사간.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거쳤다. 1573년에 우의정, 1585년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라 동서붕당의 분쟁으로 시끄러울 때 중립을 지키며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현재 상주 도남서원과 봉산서원, 충주의 팔봉서원, 괴산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임오사마방회지도, 조선시대, 복제품

선조 15년(1582)의 사마시 합격자들이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이준을 전별하기 위해 동방회를 가진 다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성한 계첩입니다. 계회 개최와 작성 시기는 인조 8년(1630)이고 계회도 부분은 견본채색이고 나머지는 견본묵서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우복당수간, 조선시대, 복제품

정경세가 여러 아우를 비롯하여 아들, 사위, 손자 등 가족에게 보낸 서간을 모은 첩, 수신자는 아우 경열.경식.경화, 아들 정심.정학.정력, 손자 정도응, 생질 노직 등이다. 안부늘 묻고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주인데, 부형으로서 근엄함과 자애로움이 물씬 풍겨나다. 정경세의 큰아들 심과 작은 아들 학의 이름에는 심학을 강조하던 우복가의 학문적 지향이 담겨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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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묵 금관, 조선시대

정경세의 11세손인 정의묵(1847 ~ 1906년)이 조복을 입을 때 썼던 금관입니다. 금관은 국가의 대사.경축일.원단.동지 및 조칙을 반포할 때 조복과 함께 착용하며 품계에 따라 형태와 재질이 구분됩니다. 이 금관은 1품관이 사용하는 오량관인데, 앞뒤 외관을 꽃,넝쿨,쌍학 무늬로 꾸며 금박을 입혔습니다. ‘랑’은 말종으로 만든 검은 내관의 앞쪽에서 뒤쪽까지 걸쳐 있는 세로 대를 말하는데, 개수에 따라 품위를 구별합니다. 각부의 형식과 문양, 술끈 등이 조선 말기 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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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 증시교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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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 벼루, 명. 정경세가 광해군 1년 중국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복선생문집, 조선시대

우산서원에서 발행한 정경세의 시문집 중간본이다. 1657년 초간본과 판식이 다를 뿐 내용과 편차는 같다. 초간본은 합천의 심장에 의해 산정되었는데 적은 분량만 취했기 때문에 사위 송준길과 손자 정도응 등이 증보하여 편찬하였다. 그뒤 1821년 별집 8권 4책이 초간되고 1899년 12권 6책으로 중간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우복 정경세(1563 ~ 1633년)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 호는 우복이다. 유성룡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춘추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군의 소모관으로 활약해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정언.교리.정랑.사간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어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지춘추관사로서 「광해군일기」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에 있어 이황의 설을 계승하고 이이의 설을 수용하였다.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김장생 등과 함께 예학파로 불렸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이다. 상주의 도남서원, 대구의 연경서원, 강릉의 퇴곡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재기, 조선시대. 명종 9년(1544) 11월 27일에 재주인 고 찰방 홍윤최의 처 홍씨가 집안 전래의 노비와 논 일부를 외손자 물단개(조정_에게 별급하는 문서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행록, 조선시대, 보물 1003호. 1592년 8월25일부터 9월23일까지 28일간의 일기로써 검간 조정이 당시 거창에 주재한 순찰사 김성일에게 토적 등에 관한 것들을 논의하기 위해 왕래하면서 기록한 일기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검간 조정의 임난일기, 조선 1592년, 보물 1003호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임진년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어 임진일기로도 불립니다. 상권에는 1592년 4월 14일부터 6월 6일까지 52일간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권은 1592년 6월 7일에서 12월 27일까지 190간의 일기입니다. 모두 242일간의 기록으로 6월7일에서 6월 16일까지 10일간의 기록은 누락되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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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문과급제교지,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풍양조씨세보, 조선시대

검간 조정(1555 ~ 1636년)
본관은 풍양, 자는 안중, 호는 검간이다. 정구와 김성일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 떄 은척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며, 1596년에는 왜군과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정유재란 떄는 두 아들을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후 1599년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싱 합격했다. 1609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청도군수, 형조정랑, 춘추관편수관, 사섬시정, 봉상시정을 거쳐 정묘호란 때 강도로 호종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술과 문장에 뛰어났다. 1642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의성 속수서원과 상주 장천서원에 봉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월간창석형제급난도, 조선 1604년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 형제의 우애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형제가 머물던 항병소에 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곽란으로 몸이 불편한 이준이 형에게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으로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1604년 주청사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간 이준에기 이 이야기를 들은 어느 중국인이 감동하여 명나라 화공에게 시켜 그린 그림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독서록, 조선시대. 월간 이전이 스승인 서애 유성룡에게 전수받은 「주자서절요」에서 잊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명언을 엮어 만든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이준 벼루,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이준 증시교지, 조선시대, 창석 이준을 정2품 자헌대부 문간공으로 시호를 내리는 증시교지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준 추증교지, 조선시대, 창석 이준을 종2품 가선대부 이조참판에서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향상지결, 조선시대, 월간 이전이 스승인 서애 유성룡에게 전수받은 「주자서절요」에서 함양, 거경, 궁리, 성찰에 연관이 깊은 일을 발췌하여 엮어 만든 책이다.

월간 이전(1558 ~ 1648년)
본관은 흥양, 자는 숙재, 호는 월간이다.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제학 이준의 형이며, 1580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에 참여하여 구국 운동에 동참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전이 왜적을 피해 병든 아우 이준을 업고 화를 면한 일화를 담은 그림 「형제급난도」는 이들 형제의 지극한 우애를 엿볼 수 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지례현감에 나아가 백성들의 폐해를 덜어 주었으며, 이후 고향 상주로 돌아와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 아우 이준과 함꼐 상주의 옥성서원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창석 이준(1560 ~ 1635년)
본관은 흥양, 자는 숙평, 호는 창석이다. 형 이전과 함께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고, 이후 단양군수, 수찬,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17년 상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인 「상산지」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시호는 문간이며, 상주의 도남서원과 옥성서원, 풍기의 우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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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식 영정,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사서집, 조선시대

사서 전식(1563 ~ 1642년)
본관은 옥천, 자는 정원, 호는 사서이다.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603년 식년시 문과.병과에 급제해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에 전라도 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경세, 이준과 함께 학문 연구에 힘썼다. 1623년 (인조1) 인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며, 1625년 조경사가 되어 바닷길을 통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대치로 인해 국제 정세가 매우 예민한 상황에서도 사신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아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이다. 상주 옥동서원과 옥천 목담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0

OLYMPUS DIGITAL CAMERA식산시필, 18세기, 흑지에 금니로 기록한 식산 이만부의 친필 시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조식산선생 독서법, 조선시대, 복제품. 이만부가 정주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소개한 독서법을 후손이 편찬하였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호 이익 간찰, 조선시대, 이익이 이만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대학과 중용의 성경에 관한 의문점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만부 호적단자, 조선시대, 호적단자는 3년마다 호구식에 따라 작성하여 호적색에게 제출하던 서류입니다. 이만부 호적단자는 식산 세계, 가족, 노비의 명단 등을 적은 것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호 이익 간찰, 조선시대, 이익이 이만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지난해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뒤의 소감을 밝히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강주창지서첩, 조선시대, 이만부의 부친인 박천 이옥의 서첩입니다. 이옥과 이만부를 포함한 형제들이 낙동강 경치를 읊은 시를 묶은 것인데, 특히 박천의 자천대(현 경천대)에 대한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동편, 조선시대, 이만부의 성리학에 관한 저술입니다. 1권은 퇴계의 천명도설.성학십도설을 논변하고, 2~3권은 동방성현, 10 ~ 12권은 학문, 13 ~ 15권은 치도, 16권은 중국인물론, 17권은 한국인물론, 18권은 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산 이만부(1664 ~ 1732년)
본관은 연안, 자는 중서, 호는 식산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697년 상주에서 노곡으로 이주하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18세기 때 남인이지만 북인.소론.노론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학문적 자유를 고수한 학자이다. 이기론에서는 이황과 이이의 이론을 절충하고 중국과 동국 제가의 설에서 미진함을 보완하여 자가설을 수립하였다. 실학관에서는 물질적인 이용후생에 앞서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실심실학을 강조함으로서 윤휴와 박세당에서 싹튼 실학의 체계를 잡아 이익을 거쳐 정약용으로 이어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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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응 문과급제교지, 조선시대, 진주 강씨 강세응의 문과급제교지이다. 1780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호패, 조선시대, 강세응, 강춘희, 강인영, 강희영, 강문형, 강충영, 강명희의 호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어정육주약선, 1852년, 정조 21년에 왕명으로 간행한 것으로 당나라 떄 육지가 지은 주의 중에서 내용이 뛰어난 29편을 발췌하여 수록한 책이다. 강문형이 21세 때 향시에 차상으로 합격하여 부상으로 받은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세응 상소문,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강세응 고신, 1808년, 고신은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이다. 강세응을 경성도호부판관에 임명하는 칙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세응 고신, 1800년, 고신은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이다. 강세응을 사헌부장령에 임명하는 칙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애선생 문집, 조선후기

뇌암 강세응(1746 ~ 1821년)
본관은 진주, 자는 양로, 호는 뇌암이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평소 성품이 엄준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 하였으며 직언으로 명성이 매우 높았다. 1788년부터 1821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감찰, 지평, 장령, 정언, 사간과 이조좌랑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등조한지 10년 만인 1797년 성환도찰방에 임명되어 우정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8조목의 성환찰방소를 올려 종조의 비답이 내려졌으며, 또한 1809년 경성도호부판관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경성지방에서 일어난 12조목의 민폐를 조리있게 열겨한 구폐소를 올림으로서 조정과 민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상주박물관] 조선시대 지방통치

상주는 조선초 태종 때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할 때 경상도 감영과 상주목이 설치되었다. 읍치에는 읍성을 쌓았으며 조선시대 작성된 여러 고문서나 지도 등에 그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읍치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상산관, 동헌 문루인 태평관 등이 남아 있으나 일제강점기 도시화 과정에서 읍성은 허물어지고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지방통치의 전성기를 맞다.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경기.충청.경상.강원.황해.함경.평안도)로 나누는 지방 행정체제가 갖추어지고, 지방통치기구인 군현제가 정비되었다. 속현과 향소부곡을 왕이 임명한 수령이 다스리게 된 것이다. 상주목은 경상감사의 본영이자 영남의 중심지로 경상남도의 일부 군현과 세개의 부곡, 속현 등을 다스리는 거점역할을 하였다. 수령과 그를 보좌하는 향리 그리고 재지사족으로 구성된 향청은 군현 통치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상주는 영남대로의 중요한 요충지로써 도로 교통이 발달하였다. 유곡역과 낙동역 등의 역원은 조선시대 들어와 낙동강과 강창을 연결하면서 그 역할이 부각되었다. 경상도 도선생안과 상주목 목선생안은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기하려는 목적을 가지며, 상주 향리의 삶을 담은 연조귀감을 통해 당대 지방통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목선생안, 조선시대

상주목사로 부임한 목민관들의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상주목제명록이던 것이 새로 개장할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조선 1604년(선조 37)에 부임한 김상용 목사가 체계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 누대 수백 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상주지역의 지방행정 통치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편병, 복룡동 유적,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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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치 벼루, 고려시대,

김선치(1318 ~ 1398년)는 고려시대 무신으로 1363년 홍건적을 평정시킨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382년에 상주로 은퇴하였습니다. 이 벼루는 김선치가 당대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명선치년십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상감사도임 순력행차 (모형)

관찰사는 조선시대 8도에 파견된 지방 통치의 책임자이다. 감사.도선생.도백.방백 등으으로 불렸으며, 행정.군사.감찰.관원임명 등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임기는 1년을 원칙으로 각종 재원의 수세, 권농, 진재, 형옥, 교육과 주민의 교화, 서적의 출판, 수령에 대한 감찰과 군 지휘관인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역할을 겸하였다. 또한 도내를 다니며 수령을 비롯한 지방직 관원들의 성적을 평가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자기 관할 내의 고을을 살피기 위해 순력하는 행영체제에서 이후 유영체제로 바뀌었다. 관찰의 순력 행차 시 그 행렬의 수가 수백에 달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상도칠십이관 채색필사지도, 조선시대

경상도 72관이 채색된 오방색 필사지도이다. 좌도 39관, 우도 33관이 표기되어 있으며, 각 지역들이 붉은 선으로 이어져 있다. 다른 지도들에 비해 산줄기보다 물줄기가 굵게 표시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연조귀감, 조선시대

조선 정조 때 이진흥이 향리들의 사적을 모아 정리한 책으로 1777년(정조1)에 상주에서 간행하였다. 전국의 향리를 대상으로 고려사를 비롯한 문집.읍지 등을 참조하여 엮은 귀중한 자로이다. 특히 「이직명목해」는 향리에 관계되는 용어를 해설하였으며, 「관감록」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핵심 부분으로 「향리열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국난극복과 임진왜란
1592년 4월 25일 북천에서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중앙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의 선발부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592년 10월 20일 상주 가판관으로 부임한 정기룡장군은 용화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같은 해 11월 23일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정기룡장군은 의병들과 힘을 모아 왜군을 상주에서 몰아냈다. 정기룡장군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1592년 임닌왜란 때 별장이 ㅣ되어 경상우도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거창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고 금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였다. 상주목사 김해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을 맡았고, 1594년 상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1610년에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랐으며,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죽었다. 시호는 충의로 상주 충의사와 경남 하동 경충사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북천전투

1592년 4월 15일 부산에 왜군이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4월 17일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상주로 급히 파견하였다. 4월 25일 순변사 이일은 중앙에서 데려온 궁수 60명과 농민군 800여 명을 이끌고 상주 북천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상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의 민관군과 왜의 선봉주력부대가 공식적으로 마주한 최초의 전투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이축 추증교지, 조선시대

조선중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이축(1565 ~ 1647년)은 상주 함창 출신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습니다. 이 교지는 고종이 이축을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로 추증하는 내용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징비록, 조선시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이 원인, 전쟁상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의 “예기징이비역환”,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정기룡 증시교시, 조선시대, 정기룡장군에게 충의공 시호를 증시하는 교지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매헌실기 목판

정기룡의 사적을 집성한 실록 목판인데 1718년 후손 윤의 요청으로 채휴징이 연보를 편찬하였고 1746년 사적과 연보를 같이 편찬하였다. 목판의 내용은 정기룡 개인 전기 집성일 뿐 아니라 임진.정유 양란에 관한 귀중한 사료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매헌실기, 조선시대

조선중기 임진.정유 양란에서 전공을 세운 무신 정기룡(1562 ~ 1622년)의 사적을 집성한 기록이다. 정기룡은 임진왜란 때 거창.금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상주성을 탈환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매헌실기」 권1에는 “11월에 상주에 진치고 있던 왜적을 크게 부수고 상주 고을을 수복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돌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는 창의군, 충보군, 상의군 등으로 구성된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도처에 머무르고 있던 왜군을 습격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의병은 지역의 양반이나 유학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자기집 노비나 소작농민에게 무기를 들게 하였고, 흩어졌던 농민과 대오에서 이탈한 군인들을 설득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1592년 7월 30일 상주에서 결성된 창의군은 8월 1일 황령사에 의병소를 설치하였다. 청주에서 활동하던 이봉을 주장으로 하고 중위장에 이천두, 기록에 채천서, 홍경업, 조정을 지휘부로 하였다. 이외에도 신문숙, 신추백, 김경추, 권종경, 권여림, 이사확, 이사회 등 많은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였다.충보군은 1592년 8월 16일에 노대하, 임창원, 조익 등이 궁수 10여명을 모아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김홍민을 대장으로 하고 중위장에 이제경, 장서에 김홍미, 조익으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상의군은 1592년 9월 13일 경에 정경세, 이전, 이준, 송량 등이 백화산 고모담에 의병 진영을 마련하였다. 김각을 대장으로 하고 소모관에 정경세, 이준, 송량, 장서에 이준, 영병에 감사중, 노함, 김광복 등으로 조직을 이루었으며, 외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상주에는 이러한 세 개의 의병조직 외에도 이축을 선봉장으로 하는 의병 등 다양한 조직이 구성되었다. 1602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으로 인한 질병과 가난을 해결하고자 여러 문중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전국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을 설립한다. ‘존애’는 ‘존심애물’에서 나온 말로, ‘본심을 지키고 길러서 남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존애원에서는 의료활동을 비롯하여, 선비들의 모임인 낙사계와 경로잔치였던 백수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존애원 창설에 동참한 곳은 진양정씨, 홍양이씨, 여산송씨, 영산김씨, 월성손씨, 청주한씨, 상산김씨, 재령강씨, 단양우씨, 화산김씨, 무송윤씨, 창령성씨, 전주이씨 등 13개 문중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임진창의록,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상주지역의 의병인 ‘상의군’의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석천 김각(1536 ~ 1610년)의 활동상황을 여러 일기와 기타 기록에서 찾아 모아 기록한 책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선무원종공신녹권, 조선후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에게 발급한 문서로, 공신도감에서 발급한 공신 증서입니다. 1605년에 발급된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받은 사람은 9,060명이나 됩니다. 임진왜란 후 민심과 국정을 수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담겨 있는 문서로 공신들의 신분이나 직역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 증손향약, 조선 17세기

1692년(숙종 1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향약집입니다. 전래된 각종 향약을 집대성한 것으로 상주 남부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만든 향약입니다. 일명 남촌사면향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면은 상주 남쪽 지방의 청남, 청동, 공서, 공동으로 현재의 청리, 공성, 외남 일부가 이에 속합니다. 이 향약은 당시까지 전해오던 한중 여러 향약을 집대성함과 동시에 상주지방 특유의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증보하여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읍성
읍성은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다. 단순한 건축물이라기보다 오랜 기간 그곳에 터를 밪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그 안에 관아, 학교, 민가, 시장 등 삶의 터전이 있어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성에 대한 기록은 사벌에 주위가 1,109보인 성과 홍무 을축에 처음 읍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1380년 왜구 침입으로 1381년 읍성을 짓기 시작하여 1385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읍성의 규모는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데, 조선시대 제작된 여지도와 상주성도, 해동지도 등의 고지도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에는 읍성의 주요 시설이 그려져 있는데, 현존하는 유적으로 상산관, 태평루, 상주향청 등이 있다. 상주읍성은 1912년 상업 활동 편의와 상가요지를 확보하려는 일본 사람들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1929년 증보된 「상산지」 권3에 읍성 철거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실제 1910 ~ 1918년 사이에 측량된 상주지적도에도 읍성 철거 지역 땅 소유자의 대부분이 일본인들로 확인되고 있어 철거 시점의 근거를 뒷받침해 준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현무문 탁본, 상주읍성 북문 문루의 편액이다. 1920년 훼철될 떄 탁본한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태평루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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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성도, 조선시대,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읍내 반경 5리 이내의 관아 등 공공시설을 그린 지도이다. 동헌 건물인 청유당, 서산서원이 그려져 있어 제작시기는 1827년에서 1870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읍치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읍치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민지서 간찰, 1871년, 1871년 상주목사로 재직시 북문을 중수하는 등 읍성을 정비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산지, 1929년, 상산지는 1617년 이준에 의해 처음 편찬된 상주읍지이다.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편찬된 상산지 가운데 하나로, 1929년본이다. 임자년(1921)에 상주읍성이 철거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주;명 자기병, 복룡동유적,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상’자명 석편, 복룡동유적, 시대미상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상주박물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상주는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특징으로 삼국시대 이래 관리가 파견되었다. 고려초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할 때 경상도를 관할하는 절도사가,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상주읍치 동문 부근 복룡동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취락유적이 확인되었는데 다양한 시기의 주거흔적과 함께 토기, 도자기 등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통일신라 이래 남장사, 북장사 등 많은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다양한 시기의 불교유물들이 전해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무덤과 토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상주지역의 고분들은 이전의 돌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화하녀서 이전의 많은 양의 껴묻거리는 소박하게 변했다. 또한 화장묘가 유행하는 등 매장에 대한 관념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 돌방무덤은 지상에 깬돌이나 판돌로 방의 내벽처럼 쌓아 올려 널방을 만든 형식이다. 널방의 네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어지듯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천장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널방 바닥에는 주검받침대가 있고 한쪽 벽에는 통로인 널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무덤의 변화와 함께 토기에서도 변화상이 확인된다. 이전의 삼국시대 토기의 특징인 높은 굽이 퇴화되고 뚜껑과 그릇 표면에 무늬를 새긴 도장을 찍는 등 통일신라의 새로운 토기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병, 굽다리입큰토기, 사발 등 새로운 토기 종류가 나타났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에는 굽접시와 도장무늬가 사라지고, 목이 긴 병이나 네모진 병, 그리고 화장 후 뼈를 추려 담은 뼈단지가 유행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뚜껑굽다리접시, 청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짧은목항아리, 청리고분군, 통일신라시대, 굽다리긴목항아리, 신흥리고분군, 통일신라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병, 뚜껑합, 뚜껑굽다리접시, 청리고분군, 통일신라시대

상주 복룡동유적
복룡동유적은 상주지역에서 처음 발굴 조사된 대규모의 취락 유적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유구들이 동일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상주지역의 문화상을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대구.경산의 영남 내륙 지역과 충주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과의 문화상의 연관성이나 연속성을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송국리형 주거지가 낙동강 상류지역에서도 확인됨에 따라 청동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며, 그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돌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복룡동유적의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초창되어 이 지역에서 생활하던 당시 사람들의 주거 공간의 분할과 규모 등 지방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복룡동 유적이 상주읍성지의 북동편 외곽에 위치하며, 우물과 다양한 기능의 수혈 유구들이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의 서민 생활상을 복원.연구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복룡동 유적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유구들과 함께 다양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상주 시가지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상주 사람들의 사회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납석제 호, 병, 벼루, 복룡동유적,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명문 납석제품, 복룡동유적, 통일신라

상주 복룡동 256번지 유적에서 출토된 납석제 유물로 표면에 한자가 새겨져 있다. 한자의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벌주희”라는 여성 인명을 중심으로 모자 또는 모녀 관계로 추정되는 남자 인명과 6명의 여성인명으로 보인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암키와, 수키와, 수막새, 복룡동유적, 통일신라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암막새(통일신라), 수막새, 암막새(고려시대), 복룡동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암막새, 복룡동유적, 통일신라.고려

OLYMPUS DIGITAL CAMERA매병, 복룡동유적,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매병, 유개호, 복룡동유적, 조선시대

고려시대 도자기
청자는 고려시대에 중국의 도자기 생산기술에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이후 다양한 기종과 문양, 고급 유약의 개발로 독창적이고 맑은 비색의 청자를 완성하였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 청자는 중국 송나라의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에 ‘고려자기의 비색은 천하제일 중 하나’라고 꼽을 만큼 발전하였다. 청자는 장식기법에 의해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무늬가 없는 순청자, 고급청자의 최절정을 대표하는 상감청자, 인물 또는 동식물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 진사나 철회, 철채 등의기법으로 화려하게 무늬를 베푼 화청자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화려한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공예품인 청자는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상주지역에는 청자 가마터로 알려진 곳은 없으나, 무덤이나 사지에서 순청자와 상감청자가 출토된 사례가 있다. 특히 서곡동 폐사지에서 출토된 청백자은구대접은 중국 송나라로부터 수입된 유물로, 당시 상주지역의 높은 문화수준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완, 청자 철화물무늬매병, 상주 출토,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용무늬 매병, 청자 연꽃무늬 참외모양 주전자, 상주출토,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잔과 잔받침, 청자 꽃무늬 잔, 상주출토,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완, 상주 청리 출토,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물가풍경무늬대접, 청자 버드나무물새무늬 대접, 상주 출토,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대접, 청자 여지넝쿨무늬 대접, 상주 출토, 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팔각접시, 청자 국화무늬 팔각접시, 상주 출토, 고려시대

상주 상판리 자기가마 유적, 경북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상주박물관이 직접 수행한 최초의 학술발굴조사 유적으로 분청사기 가마 1기와 폐기장 1개소가 확인되었다. 가마는 후구부부터 연소실, 초벌구이칸까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었다. 초벌구이칸은 연통부와 겸하는 곳에 만들었으며, 접시와 대접, 잔탁 등이 중첩되어 있다 당시 가마의 조업상황과 구조파악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발굴된 유물로는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를 비롯하여 제기, 잔받침, 고족배 등 고급 제작기술에 의한 다양한 기종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 가마터 유적에서는 최초로 분청사기 베개가 출토된 것이 매우 주목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무늬 합 뚜껑, 분청사기 베게, 15세기, 상판리 자기가마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물고기무늬 접시, 분청사기 용무늬 접시, 15세기, 상판리 가마유적

상주 상판리 자기가마 VI유적, 경북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
상주박물관이 수행한 두 번째 학술발굴 유적이다. 조사결과 자기가마 1기와 폐기장 2개소가 확인되었다. 내부에서 각종 초벌자기편, 일상용기인 대접과 접시, 베개, 향로, 화분, 돈 등의 상형자기, 명문자기가 출토되었다. 가마의 구조와 청자의 전통이 남아 있는 초기 분청사기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점을 통해 조선전기 상품자기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인수’명 분청사기대접, ‘관’명 분청사기대접, ‘예빈’명 분청사기대접, 상주출토, 조선시대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 조선시대
상주에서 출토된 명문은 크게 관청명, 장인명, 지역명, 기호 등으로 구분된다. 관청명으로는 궁중에서 쓰이는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담당했던 사선사(1372~1420년), 손님을 맞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예빈사(921~1894년), 세자부인 인수부(1400 ~ 1556년)가 있다. 이 외에 장인이름으로 쌍림, 대, 정, 세와 사찰을 의미하는 卍자 등의 글자가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사선’명 접시, 상판리 유적, 분청사기 연꽃넝쿨무늬 ‘사선’명 대접, 상주 복룡동, 분청사기 인화무늬 발, 상판리유적,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국화무늬 접시, 15세기, 상판리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상주 출토,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명기, 백자 접시, 백자 대접, 상주 출토,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병, 상주 출토,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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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보물118호, 복제품

상주의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높이 1.98 m의 석불입상으로 마멸이 심해서 세부수법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다. 불상의 머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단정한 인상이다. 체구는 단정하며, 양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 역시 많이 마모되어 가장자리에 새겨진 불꽃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단정한 체구에 다소 경직되고 현실적인 면이 강해진 특징을 가진 불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불입상의 경향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 석조천인상, 보물 661호

화강암질의 넓은 돌 2장에 높이 1.27 m의 주악상과 높이 1.23 m의 공양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주악상은 인쪽을 향하여 비파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화관을 쓴 머리는 앞 으로 숙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연주하는 자태는 약간 미소를 머금은 단아한 표정이며, 비파를 타는 두 손의 표현은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어깨에 걸친 옷은 바람에 날리듯이 좌우로 구불거리며 흩날려서 매우 율동적이다. 아랫도리에는 주름이 져 있으며, 윗도리 속에서부터 늘어지는 끈이 좌우로 바람에 날리듯 표현되었다. 공양상은 오른손으로 연꽃 봉우리를 받쳐들고 오른쪽을 향해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자연스럽고 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두 석상이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옷차림은 당시 복식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며, 만들어진 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신해명동종, 서곡동 출토, 고려 1251년, 복제품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다.
상주의 불교문화는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830년(흥덕왕5)에 진감국사가 창건한 남장사를 포함한 ‘상주 4장사’인 북장사, 갑장사, 승장사(절터)등 14개의 전통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음악인 범패의 발상지인 만큼 곳곳에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유물들이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영된 것으로 8세기 ~ 9세기의 상주 공성면 출토 금동보살입상, 증촌리 석불입상과 화달리 삼층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잇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나타난다. 복룡동석불좌상, 목가리 석불입상, 갑장사 삼층석탑, 상오리 칠층석탑 등이다. 서곡동 폐사지에서 출토된 신해명동종, 동제국지, 동제파수부용기, 동제바라 등 우수한 공예품을 통해 불교문화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불 990호)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923호), 북장사 영산회괘불(보물 1278호), 용흥사 삼불회괘불탱(보물 1374호) 등이 수작으로 꼽힌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동제바라, 서곡동 출토, 고려시OLYMPUS DIGITAL CAMERA대, 복제품. 바라는 발자, 동반, 요발이라고도 불리는데 불전에 향을 올릴 때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불교 도구입니다. 범패를 행할 때 2점 1조로, 두번 부딫쳐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입상, 공성면 효곡동 출토, 통일신라, 복제품

OLYMPUS DIGITAL CAMERA동제국자, 서곡동 출토, 고려시대, 복제품

고려시대의 상주
995년(성종 14) 오늘날의 도제를 최초로 실시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지방장관인 절도사를 파견한다. 상주는 영남도라 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12주 48현을 관할하는 절도사가 배치되었다. 절도사는 지방관리의 행정을 사찰하고 승진과 면직을 정하는 권한을 지녔으며, 후에 안찰사, 안림사, 도관찰출석사 등으로 바뀌었다. 990년(성종 9)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낙동강’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1022년(헌종 3) 상주에 안동대도호부를 설치해 경주와 진주를 관할하고, 1014년(현종 5) 안동대도호부를 경주로 옮긴 후 안무사를 배치하였다. 함창은 964년(광종 15) 고령군에서 힘령군으로 고쳤다. 고려시대 왕명 및 공문서 전달, 지방관 및 관원의 파견, 특수물자 수송 등을 위하여 전국에 525개소의 역침을 정비하였고, 중요 간선도로를 주요 지명을 따 22도로 나누었다. 이중 상주를 거쳐 가는 상주도의 속역은 모두 25역이다. 1017년(현종 9)에 상주에 목사가 설치되었고, 관내 7군 18현 2지사부를 지휘 감독하는 계수관을 두었다. 함창은 1018년(현종 9) 함창군으로 바뀌었고,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254년(고종 14) 몽고군의 6차 침입시 몽고장수 차라대가충주산성.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은척 황령사 승려 홍지의 반격으로 물러갔다. 1314년(충숙왕 1)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로 바꾼 후 오늘에 이른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상주박물관] 사벌국과 신라

사벌국(沙伐國)은 초기 역사시대 경북 상주지역에 있었던 작은 소국이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신라 첨해이사금 대(249년)에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법흥왕 때 상주를 설치하고 군주를 파견하면서 신라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주에는 병성동, 지천동, 함창읍 신흥리, 사벌면 화달리 등 여러곳에 고분군이 있는데 그 중 4세기 대 조성된 고분도 확인되고 있어 신라가 진출하기 이전 지방세력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출토유물로는 각종 토기류, 말갖춤 등이 있는데 지역적인 특색을 보이다 점차 신라의 영향을 받은 형태로 바뀐다.

사벌국의 성립과 강성
원삼국시대 상주지역에는 사벌국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 아래에 있다”는 기록이나 삼국사기 첨해이사금 3년(249)조에 신라가 사벌국을 정복했다는 기록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사벌국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원삼국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 역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원삼국시대의 상주 문화 내지는 사벌국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사벌면 금흔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토광묘유적과 그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이부곡토성을 통해 어느 정도 접근해 볼 수 있다. 이부곡토성은 하천변의 나지막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인데, 출토 유몰로 볼 때 1차 축성의 하한 연대는 적어도 5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또한 병성동, 지천동, 함창읍 신흥리, 사벌면 화달리 등의 지역에는 대형분이 포함된 광범위한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주지역에도 강력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흥리유적과 성동리유적에서는 4세기 대의 무덤이 조사된 바 있는데, 이들 유구는 신라가 상주지역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조영된 것으로 보여 앞으로의 추가 조사에 따라 사벌국의 실제가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마형대구, 성동리고분군.청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옹, 바리, 양범리 유적, 초기철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잛은목항아리, 성동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손잡이잔, 성동리고분군.청리고분군,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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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성동리고분군.상주출토, 삼국시대

사벌국과 고분
사벌국과 관련된 상주지역의 유적은 공성면에서 청리면을 연결하는 병성천을 따라 양안에 분포하는 고분군과 상주분지를 중심으로 동쪽의 능선상에 형성된 고분군, 그리고 함창분지의 이안천을 끼고 형성된 고분군, 낙동강 양안의 고분군, 금강 수계의 모서.화동고분군 등이 있다. 고분은 대체로 수계를 가까이 하면서 넓은 들이 펼쳐진 구릉이나 산의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상주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그 성격의 일단이 밝혀진 고분군은 상주분지의 입구에 해당되는 청리고분군과 상주분지의 성동리고분군, 병성동.헌신동고분군, 신상리고분군, 유곡리고분군 및 함창분지의 신흥리고분군, 가장리고분군 등이 있는데, 이들 고분군은 구조와 출토유물에 있어서 각 지역별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 병성동 14호 돌덧널무덤

병성동.헌신동 일대의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구제 발굴 조사 시에 확인된 6세기 경의 삼국시대 고분으로 지하에 깊은 움을 파고 할석 등으로 직사각형의 덧널을 짠 형태의 돌덧널무덤이다. 이 고분에서는 짧은목항아리, 굽다리접시, 금귀걸이 등 총 25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특징은 일반적인 돌덧널무덤이 한 사람의 시신을 묻는 것과는 달리 한쪽 단벽을 제거하고 달아내어 덧널을 연장한 후 2차로 시신을 묻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분의 형태는 우리나라에서 경북 북부지방에서만 현재까지 확인되어 경북 북부 지방의 고분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세잎무늬 고리칼, 환두대도, 상주지역,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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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상주출토), 화살촉(신흥리고분군), 투겁창(신흥리고분군),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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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목가리개.팔가리개, 신흥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발걸이, 신흥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발걸이.병성.헌신동고분군, 편자, 성동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말안장장식, 신흥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재갈, 신흥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말띠드리개, 신흥리고분군, 삼국시대

사벌국의 말갖춤과 무기
말갖춤은 말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것으로 말에 올라타기 위한 발걸이나 말 등에 얹는 안장, 말을 제어하는 재갈 등이 있다. 초기에는 실용적인 말갖춤이 주류를 이루다가 점차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말갖춤이 등장하게 되어었다. 상주지역의 고분에서는 다량의 말갖춤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당시의 말갖춤 문화의 수용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무덤에서는 말갖춤과 함께 화살촉, 큰칼, 쇠창, 도끼 등 당시의 무기들도 함께 출토되는데 이는 신분에 따라 그 부장량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말갖춤과 무기를 통하여 당시의 전쟁 방식이나 무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관, 전 상주출토, 삼국시대, 복제품

신라 금동관의 전형적인 형태는 경주의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금관인데 대륜 위에 3개의 출자형 세움장식이 세워지고 그 양쪽에 녹각형 장식이 1쌍씩 세워진 형태입니다. 상주 출토로 전하여지는 이 금동관은 녹각형 장식이 없고 대신 출자형 세움장식 5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6세기대이 유물로 추정되는데, 신라 금동관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허리띠고리, 청리 출토,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 긴목항아리(오대동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긴목항아리(신흥리고분군), 뚜껑굽다리접시(병성.헌신동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그릇받침, 긴목항아리.그릇받침, 병성.헌신동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성동리고분군), 뚜껑손잡이굽다리그릇(병성동고분군), 새모양손잡이잔(청리고분군),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오리모양 토기, 청리 출토, 삼국시대

신라 세력의 확장과 상주
경주에서 발흥한 신라는 서서히 낙동강 서안의 가야를 정벌하는 한편 주변 지역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AD 400년 고구려의 남정 이후 고구려에 정치적인 수모를 당했던 신라는 눌지왕 대부터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433년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나제 동맹을 결성하면서 고구려와는 적대적인 관계로 급변하였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여 신라는 소백산맥의 계립령로와 죽령로 곳곳에 삼년산성, 굴산성 등 산성을 쌓았다. 그리고 이찬 실죽으로 하여금 신라 서북 방면의 방어를 담당케 하였다. 6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금의 상주정을 두어 서북 지방 경영의 거점으로 삼아 소백산맥에서 한강유역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상주는 신라가 고구려이 남하를 효과적으로 막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였다. 진흥왕 18년(557년) 남쪽의 가야를 공략하기 위해 상주정이 감문주(지금의 김천 개령)로 잠시 이동한 경우를 제외하면 상주는 줄곧 신라 북방 개척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로도 대략 5세기 이후가 되면 토기와 장신구 등의 유물에서 신라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와 같은 일면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