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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중앙박물관] 영남 북부의 불교문화

유교의 중심지 안동 일대 영남 북부지역은 의외로 불교문화가 발달했던 곳이다. 특히 봉정사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귀족적인 불교문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불교 경전의 판각가 인출이 성행했다. 이런 문화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광흥사에는 훈민정은 해례본을 초기 한글 경전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문경 대승사에서 형성되었던 신겸을 중심으로 한 사불산화파는 불교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은 ‘대웅전관음개금현판’과 중수원문에 따르면 1199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러개의 나무를 접합한 접목조기법(接木造技法)을 만들어졌다. 이국적 풍모, 높게 땋아 올린 보계(상투), 보발의 표현, 조각기법이나 균형미 등 중국 남송 불상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12~13세기 불교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1<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고려 1199년경, 안동 봉정사, 보물>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기 드문 12세기 기년명 보살상으로, 공백으로 남아 있던 12~13세기 불교조각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은 매우 중요한 상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뺨에는 약간 살집이 있다. 눈은 가늘게 반개하였는데, 수정을 불상 안쪽에서 끼워 눈동자를 표현하였다. 보계(寶髻)는 매우 높다. 착의법은 한 장의 대의를 양어깨에 걸친 통견식이며, 대의 위로 표현된 화려한 목걸이와 영락 장식이 눈길을 끈다. 이는 교토 센뉴지(泉涌寺) 목조관음보살상(1255)과 같은 남송대 보살상의 영향으로 시대와 지역을 대표하는 보살상의 전형이 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3<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53년, 안동 봉정사>

봉정사 관음보살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원문은 1753년에 설봉 사욱 스님이 개금하며 쓴 기록이다. 보살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적혀 있지 않지만 1363년 윤3월에 개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봉정사 만세루에 걸려 있는 대웅전관음개금현판에는 관음상이 1199년에 만들어졌고 1364년과 1751년에 개금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개금원문과 현판의 개금 시기가 1,2년의 차이가 있으나 현판이 가리키는 보살상이 지금의 봉정사 관음보살좌상이라는 점에 대체로 이견이 없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은 이국적이면서 우아한 얼굴모습, 정교하면서 화려한 보관, 안정된 신체비례, 간결하지만 탄력 넘치는 옷주름의 표현이 특징이다. 조성발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13세기 전반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종 194점에 이르는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보협인다리니경’과 ‘범서총지집’은 불성 조성시기인 13세기 전반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2<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고려, 안동 보광사, 보물>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뺨에 약간 살이 오른 원만한 상호가 표현되어 있으며, 상의 착의법은 대의를 양어깨에 걸친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다르게 먼저 편삼을 입고 위에 법의를 덧입은 변형된 통견 형식이다. 보관은 조성 당시의 보관이 그대로 전하고 있는데, 여러 장의 얇은 금속판을 덧붙여 제작한 것으로 각각의 판은 연당초문을 투조하고 보관 끝에는 화려한 화염보주 장식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다양한 광물질의 장식을 새겨 넣은 고려시대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범서총지집’은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선사 사원(思遠)이 교정하여 개판한 간행기록이 있어 서지학·밀교사상·다라니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4
<범서총지집>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총지사(摠持寺)에서간행한 목판으로 인출한 것으로 당시 목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5 <보협인다라니경>

보광사 관음보살좌상은 2007년 조사 당시 대부분의 복장유물이 도난된 상태였으나 무릎과 머리 안쪽에 있는 일부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수습된 경전, 다라니, 저고리 1점 가운데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개성 총지사본(摠持寺本)으로 고려 초기 목판 인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다라니 모음짐인 <법서총지집>도 39장 152매가 발견되었다. <범서총지집>은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처음 찍어낸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범서총지집> 중 가장 빠른 시기의 자료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初雕本 佛說迦葉赴佛般涅槃經, 보물) 11세기 거란에 침입에 대응하여 판각한 초조대장경에서 인출한 것이다. 해인사 대장경에는 <가섭부불반열반경(迦葉赴佛般涅槃經)>으로 되어 있는 등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분량이 많지 않지만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을 비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물이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7<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 고려 11세기, 의성 운람사, 보물>

운람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납입되었던 복장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님의 열반을 다룬 경전으로 부처님의 제자인 마하가섭이 입멸하신 부처님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11세기에 판각된 초조대장경에서 인출한 것인데, 권수 표지와 권미 축봉 등이 완전하게 남아 있어 국내에서 발견된 초조본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3장으로 구성된 짧은 단권경임에도 불구하고 문자 간에 차이를 보여 재조대장경과의 비교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영남 북부의 불교문화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북부 지역은 유교문화의 중심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어떤 곳보다 불교문화의 정수가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고려시대의 귀족적인 불교문화가 잘 남아 있어 주목된다. 봉정사와 보광사의 두 목조관음보살좌상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불교조각이다. 불교 교학의 기반이 되는 경전의 판각과 인출 역시 크게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이 대정전(大莊殿)으로 기능하며 대장경을 봉안하였던 사실은 불교 인쇄문화가 이 지역에서 오랜 기간 꽃 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부석사의 <대방광불화엄경> 경판은 고려시대 여러 경전을 집대성하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었고, 광흥사와 봉정사의 <월인석보>와 같은 한글 경전들은 창제 초기 한글의 대중화에 이 지역 사찰이 크게 기여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영남 북부의 불교회화는 다양한 스님들이 활동하며 조성되었는데, 특히 18~19세기 사불산화파로 대표되는 퇴운 신겸 스님과 하은 응상 스님의 화업이 돋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고려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전적들이 남아 있다. 1007년 개경 총지사에서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을 비롯하여 초조대장경의 일부인 <가섭부불반열반경>, 거란본 경전을 수입하여 새긴 부석사 <대방광불화엄경> 등은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8<재조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불설방발경.불설이수경, 고려, 의성 고운사>

고려시대에 판각된 해인사 재조대장경의 일부로 현재 고운사에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불설방발경>, <불설이수경>, <자재왕보살경>, <불설이구시녀경> 등 5종이 남아 있다. 표지에 압곡이라는 묵사가 남아 있어 군위 압곡사에서 이안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불설방발경>.<불설이수경>은 합본이며,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의 첫 장은 결실되어 필사한 것이다. 영남 지역의 출판 활동과 경전 유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의미가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09<재조본 자재왕보살경, 고려, 의성 고운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0<재조본 불설이구시녀경, 고려, 의성 고운사>

부석사 고려목판(보물)은 <화엄경> 정원본 40권, 진본 60권, 주본 80권 등 3종의 대방광불화엄경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정원본(貞元本)은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40권을 가리키고, 진본(晋本)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주본(周本)은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80권을 가리킨다. 13세기 거란에서 불경을 수입하여 다신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1<대방광불화엄경 경판, 고려 12~13세기, 영주 부석사, 보물>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2<대방광불화엄경 경판, 고려 12~13세기, 영주 부석사, 보물>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3<대방광불화엄경 경판, 고려 12~13세기, 영주 부석사, 보물>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학의 근본경전으로 전래시기와 한역지에 따라 진본(晉本), 주본(周本), 정원본(貞元本)으로 구분된다. 부석사 고려목판은 <화엄경>의 세 가지 판본을 나무에 새긴 고려시대 경판으로 현재 부석사 장경각에 봉안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통된 <화엄경>이 14~17자인 것에 반해 이 부석사 경판은 34자로 이루어져 있어 거란대장경을 모본 삼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간행기록은 없으나 세 판보의 체제가 비슷하고, 시주자의 인명이 중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영남 북부의 고려시대 인쇄문화
영남 북부 지역에는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전적들이 다수 남아 있다.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에 개경 총지사에서 간행한 경전으로, 경전이 최초 간행된 중국 남송 영파(寧波)지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 영남 북부지역과의 관계를 살벼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의성 운람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가섭부불반열반경>은 11세기 고려에서 처음 판각한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의 일부이며, 부석사에 남아 있는 <대방광불화엄경> 경판은 고려 후기 거란본 경전을 수입하여 새긴 유일한 경전으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영남 북부 지역 불교 인쇄 문화 전통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4<훈민정음 목판, 재현품, 안동 광흥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5<월인석보 권7, 21, 조선 1459년.1542년, 안동 광흥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6<월인석보 권7, 21, 조선 1459년.1542년, 안동 광흥사>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며 직접 지은 찬불가이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모친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발원하여 편잔한 것으로, 두 책을 통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중세 국어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2013년 광흥사 지장전의 시왕상과 금강역사상의 복장에서 다량의 전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월인석보>는 권7, 8, 21 총4책이 발견되었다. 특히 권21의 경우 초간본으로 추정되며 1542년에 제작된 중간본도 함께 확인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보물)은 법화경의 내용을 청색 종이에 금색 글씨로 옮겨 쓴 것으로 권3과 권4가 전해지고 있다. 권3의 끝에 ‘施主權圖南(시주권도남)’이라고 적혀 있다. 고려말에 펴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7<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고려 14세기, 안동 광흥사, 보물>

감색 종이에 금으로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쓴 사경이다. 현재 권3과 권4가 남아 있는데 필체가 유사하여 동일한 인물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 권의 표지 문양이 약간 다르지만 보상화 무늬로 전면을 장식하고 1절에 6행 17자씩 배열한 경문 형식이 고려 사경의 전형을 보여준다. 권3 끝부분에 ‘시주 권도남’이라는 시주질이 확인되는데 ‘권도남’은 1366년에 제작된 <감지금니묘법연화경>에도 등장하고 있어 이를 토대로 광흥사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역시 고려 말기에 조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보물)이다. 흰종에 먹으로 글씨를 쓴 것으로 전체 7권 중 1,3권이 남아 있다. 각권의 크기와 글씨체가 달라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끝부분에 책을 만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연대를 알 수 있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8<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 고려 1398년경, 안동 광흥사, 보물>

흰 종이에 먹으로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쓴 사경이다. 전체 7권 가운데 권1과 권3이 남아 있다. 절첩본으로 표지에는 감색 종이에 금으로 연꽃무늬와 보상화무늬를 그렸으며, 제목과 권차를 기재하였다. 권3의 앞부분에는 금으로 그린 변상도가 남아 있는데, <묘법연화경>을 설하는 부처님과 그 권속을 오른쪽에, 경전의 내용을 왼쪽에 그렸다. 끝부분에는 장씨 부인 묘우가 돌아가신 부모와 일체중생을 위해 만들었다는 제작 경위와 함께 1398년이라는 정확한 제작 연도를 밝히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광흥사본 한글 경전 <월인석보>의 판각과 유포
영남 북부지역에서 고려시대부터 축적된 목판인쇄에 대한 기술력은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이 지역에는 간경도감의 분소가 설치되었다. 지역의 마을 사람들은 광흥사를 ‘판골(板谷)’이라 부를 정도로 판각 혹은 경판의 보관소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흥사에서는 많은 경전들이 다양하게 판각되었는데, 훈민정음 창제초기의 불서인 <월인석보>가 판각되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경판은 광흥사에 남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전후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역에서의 훈민정음 관련 경전의 판각 경험을 바탕으로 <월인석보> 권 1.2는 1568년 풍기 희방사에서, 권 7.8은 1572년 풍기 비로사에서 복각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19<모운사 지장시왕도, 조선후기, 비단에 채색, 안동 모운사>

모운사 지장시왕도는 높게 마련된 대좌에 앉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지장삼존과 시왕, 판관.사자.옥졸.동자 등의 권속을 배치하였다. 지장보살은 화면 중앙에 크게 그려졌으며, 지장보살이 자리한 대좌 아래에 합장한 모습의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있다. 그 옆으로 시왕은 각각 홀을 들고 있거나 수염을 만지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윝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달리하면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배치된 안정적인 구도가 인상적이며, 유려한 필선을 사용하여 섬세하게 표현한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51
<환성당대선사지안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52
<포월당대선사초민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53
<영월당대선사응진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54
<설봉당대선사사욱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0<기신론소필삭기, 조선 1769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의 <기신론소필삭기>는 1769년 봉정사에서 판각된 <기신론소필삭기>를 인출하여 장정한 것이다. 1769년 봉정사의 경전 판각 불사 시 환성 문중의 스님들과 인근 지역 사찰에서 활동했던 스님들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판각본 또한 봉정사 뿐만 아니라 인근 사찰에서도 활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1<보살계의소 경판, 조선 1695년, 안동 봉정사>

<보살계의소>는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제십>의 하권에 대한 천태 지의(538~597) 스님의 강설을 관정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천태원교의 관점에서 해석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이다. 1769년 봉정사에서 진행된 경전 대불사 때 <보살계의소>도 반각되었다. 가흥대장경의 번각본이다. 하단에 가흥대장경의 함차인 ‘하(何)’가 적혀 있고, 봉정사에서 번각되면서 형태가 변형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2<기신론소필삭기 경판, 조선 1769년, 안동 봉정사>

<기신론소필삭기>는 송나라 자선(965~1083) 스님이 <대승기신론소>에 당나라 종밀(780~840) 스님의 주석을 달고, 자신이 기(記)를 써서 필삭한 것이다. 봉정사의 <기신론소필삭기> 경판은 가흥대장경의 번각본이다. 경판은 함월 해원 스님이 1753년에 쓴 <중간기신론필삭기서>와 권1~2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봉정사에는 337장 169판이 전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3<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 경판, 조선 1769년, 안동 봉정사>

<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은 대승의 보살이 지켜야하는 신행 규범과 실천 덕목 등이 담겨 있다. 이 경판의 말미에 있는 간기를 통해 1769년 안동 봉정사에서 판각한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말 봉정사에서는 화엄대강백 황성 지안 스님의 문중인 월암 지한 스님에 의해 다양한 불사가 이루어졌다. 1769년에는 15종의 불교 경전이 간행되는 대규모 불사가 진행되었는데, <보살계본>의 간기에도 지한 스님이 화주를 맡은 것이 확인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환성 지안 문중과 봉정사 경전 판각
봉정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환성 지안(1664~1729) 스님 문도의 결집과 경판의 판각은 조선 후기 영남 북부 지역 불교계의 중요한 불사였다. 환성 지안 스님은 편양 언기(1581~1644)의 제자로 1725년에 금산사에서 화엄법회를 개설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1,4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하였을 정도였다. 스님의 법맥을 이은 설송 연조(1676~1750), 호암 체정(1687~1748), 함월 해원, 포월 초민 스님은 봉정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제자인 월암 지한 스님은 1766년 문중 스님들의 진영을 조성하며 위상과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중의 결집은 경판의 판각으로 연결되어싿. 봉정사에서 판각한 경전 중 <기신론소필삭기>, <사분계본여석>, <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폼보사례본>은 중국 가흥대장경 일부를 번각한 것이다. 경판의 판각은 문중에서 중요시하는 교학의 됴소들을 대외적을 알릴 수 있는 사업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국 사찰과 강원에 보급되어 조선후기 불교 교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4<광흥사 아미타극락회상도, 조선 1886년, 비단에 채색, 안동 광흥사

이 그림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과 보살, 권속을 그린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붉은새과 녹색을 주로 채색하여 차분하고 안정적 분위기르 자아내고 있으며, 화면 하단 짙은 청색의 원형 안에 그려진 동자가 주목된다. 그림 하단에 남아 있는 화기를 통해 이 그림이 하은 응상 스님을 비롯한 7명의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5<봉정사 영산암 십육나한도, 조선 1888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이 불화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제자인 십육나한을 그린 것으로 총 6폭 중 2쪽이 전시되었다. 각 폭마다 2~3인의 나한을 나누어 그렸는데, 나한 옆에는 붉은 색의 방제 안에 나한의 존명이 각각 적혀져 있다. 나한은 화면에 꼭 찰 정도로 크게 그려졌으며 십육나한뿐 아니라 공양물을 들고 있는 동자들을 비롯해 원수이, 학, 호랑이 등의 다양한 동물이 함께 그려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사찰의 ㅁ여부전에 걸리는 감재사지와 직부사자도 함께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6<수정사 지장시왕도, 조선 1821년, 비단에 채색, 의성 수정사>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비롯한 시왕과 권속이 함께 그려진 불화이다. 화면 중앙에 크게 표현된 지장보살은 검은 색 두건을 착용하였으며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옆으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자리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옆에 손을 들어 관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시왕이 지장보살의 좌우에 대칭으로 표현되었다. 대좌 앞에는 작은 화분에 하늘색고 분홍색의 연꽃이 활짝 피어 있어 특징적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7<용담사 감로도, 조선 1811년, 비단에 채색, 안동 용담사>

용담사 무량전에 봉안되었던 감로도로, 하단 정면이 확대되고 다양화되는 19세기 이후의 감로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면 양 옆으로 상단 영역까지도 하단의 장면이 확장되고 있으며 전각으로 구획을 구분하는 등 비슷한 시기의 감로도와 달리 도상을 변용한 점이 주목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단의 장면마다 방제를 적어 내용을 설명하였다. 하단의 한량과 기녀, 연회 집단, 예인 등과 같은 인물이 표현되어 풍속화적인 요소 또한 살펴볼 수 있다. 하단의 화기는 절취되어 ‘가경 16년(1811)’, ‘양공 토운당’ 등 일부만 확인되지만 문경 사불산 대승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사불산화파의 퇴운 신겸 스님이 감로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8<삼화상진영, 조선 1782년, 비단에 채색, 의성 대곡사>

18세기 대곡사의 삼화상(三和尙) 추선(追善)
대곡사의 삼화상 진영은 고려말 ~ 조선초를 대표하는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을 한 폭에 그린 것이다. 지공 스님과 나옹 스님은 당대부터 부처의 화신 혹은 생불로 불렸으며, 무학 스님은 이성계의 왕사이자 나옹 스님의 적통이었다. 세 스님의 문도는 조선 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지공, 나옹, 무학 스님에 대한 추앙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세 스님의 진영이 여러 사찰에 봉안되었는데 1782년에 조성된 대곡사 삼화상 진영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대표적인 의승장으로 추앙받은 청허당 휴정 스님과 사명당 유정 스님으 진영도 같은 해 조성되었는데, 이는 세 스님에 대한 예경과 함께 의승장을 추가적으로 봉안하여 광범위한 의미의 삼화상 진영을 봉안한 것이다. <동사열전>에는 ‘금강산 백화암에 수충각을 세우매 지공.나옹.무학 세 화상과 왼편으로 서산, 오른편으로 사명의 다섯 분 영정을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진영 배치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29<봉황사 전패, 조선 1692 ~ 1694 추정, 안동 봉황사>

전패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패로, 패신 중앙 패액에는 각각 주상, 왕비 세자 삼전ㅇ르 축원하는 문구가 남아 있다. 주상 패와 왕비 패는 구름형이며, 세자 패는 화염형이다. 그러나 단순한 선각으로 세부 표현을 꾀하며 세 점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어우러지고 있다. 주상 패의 묵서를 통해 탁린 스님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응, 탁밀 스님이 봉황사 삼세불좌상을 조성하였고 제작인 탁린 스님이 불사의 대좌와 함께 전패를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0<모운사 제석천도,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안동 모운사>

모운사 제석천도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과 일부 권속을 그린 것이다. 모운사 제석천도 화면 중앙에는 정면을 향해 선 제석천이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제석천 옆으로는 여러 권소이 그려졌는데, 특히 화면 왼쪽 상단에 자리한 권속이 들고 있는 부채의 표현이 주목된다. 부채 안은 흰색 원 안에 먹선으로 수미산을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 시기 조성되는 대부분의 제석천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반해,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점도 독특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1<운림사 산신도, 조선 1872년, 삼베에 채색, 의성 운림사>

운림사 산신도는 1827년 법준 스님이 조성한 불화이다. 화면에서 산신은 검은 눈썹에 눈을 날카롭게 표현하였다. 머리에는 푸른색 관모를 쓰고 붉은 천의를 두르고 있으며, 왼손에 긴 칼을 메고 오른손에는 흰 깃털로 된 익선을 들고 호랑이를 타고 있다. 산신의 앞, 뒤로 암벽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깊은 산 속에 산신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운람사 산신도는 신겸 스님이 그린 지보암 산신도의 산신의 얼굴과 고운사 백련암 신왕도의 검의 모양이 닮아 있어 사불산 화파의 신겸 스님 영향을 받아 조성한 불화로 보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광흥사 동종(보물)은 1583년에 만들어진 종으로 한국 범종을 전통적인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높이 60cm 정도의 작은 종이지만 매끄러운 곡선과 사실적인 용의 표현 등 조각수법이 우수하다. 세부 문양은 단순하지만 4면에 표현된 보살입상이 돋보인다. 기록된 명문에 따르면 인근 수암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사장과 승장의 협업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2<광흥사 동종, 조선 1583년, 안동 광흥사, 보물>

광흥사 동종은 크기는 작지만 종신의 매끄러운 곡선과 사실적인 용의 표현 등에서 완성도를 보여준다. 종신에 점으로 새겨진 주종기가 남아 있어, 1583년 하가산 수암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종의 조성은 주장 김자산과 17세기 조각승인 원오 스님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사장과 승장의 협업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사불산화파의 활동
사불산화파는 조선 후기 문경 사불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화승 집단이다. 이들은 영남 북부를 기반으로 활동하였으며, 사불산화파를 대효하는 수화승인 퇴운 신겸 스님의 활동기(18세기 후반 ~ 19세기 전반)에 이르면 이 시기를 선도하는 화승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사불산화파의 화맥은 신겸 스님에서 의운 자우 스님, 하은 응상 스님으로 계승되었으며, 전통에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였다. 신겸 스님은 활동 후반기인 1820년부터 고운사의 산내암자인 백련암의 조실로 주석하면서 고운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불화의 조성에 참여하였다. 하은 응상 스님은 19세기 후반 사불산파를 이끌던 수화승으로,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변화르 시도하였고 새로운 양식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3<궤안, 대한제국 1904년, 의성 고운사>

궤안은 어첩이나 전패를 안치하였던 것이다. 어첩은 기로소에 보관하던 임금의 입사첩으로 생년월일, 입사 연월일, 어명, 아호를 적은 것이다. 등받이 윗부분 양끝에는 용의 머리가 조각되었으며, 팔걸이 끝부분에는 봉화으이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이 두 동물은 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밀이기도 하다. 등받이에는 구름무늬와 함께 중앙의 안상무늬 안헤 ‘수(壽)’자가 적혀 있어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연수전의 성격를 잘 드러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4<연수전 사진>

기로소의 의미와 연수전의 건립 과정
기로소(耆老所)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조선시대 설치한 관서이다. 문신으로서 2품 이상의 벼슬을 가지고 70세 이상인 신료가 들어갈 수 있었다. 장수는 덕의 상징이었고,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관리의 숫자도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기로소에 입소한느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본래 신료들을 위한 관서였기 때문에 국왕은 양로의 은혜를 베풀어야 할 주체였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기로소에 입소한 고사가 있었기 때문에 국왕 역시 입소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실제 기로소에 입소한 국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뿐이었다. 국왕이 기로소에 입소하는 경우 이를 긴며하기 위하여 진연을 열었다. 행사 이후 진연의 내용은 의궤로 정리되고 계첩을 제작하였다.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는 진ㅇㄴ은 1902년 8월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본래 영조의 어첩봉안각 외에 별도의 전각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기로소의 허가가 나지 않아 어첩봉안각을 수리하영 축리전을 중건하였다. 1904년에 최종적으로 연수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판을 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5<문서함, 대한제국 1904년, 의성 고운사>

문서함은 문서 등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자로 뚜껑과 몸체가 연결된 직육면체 형태이다. 전면 중앙 원형 금속 판에는 넝쿨 문양과 수(壽)자문 두 개가 새겨져 있다. 뻗침대의 끝부분에는 팔각형 바탕에 팔괘가 새겨졌다. 전체적으로 주칠이 되어 있으며, 기로소와 관련된 무서들을 보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6<기사경회첩, 조선 1744년, 비단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기사경회첩은 영조가 51세 되는 1744년 9월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서문, 어제, 선온시 그해의 기로신(耆老臣)의 초상화, 행사도, 화원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로소 의례 과정을 묘사한 행사도 중 영수각친림도는 영조가 9월9일 어첩을 보관하는 영수각에 방문하여 기로소 의식을 행하는 장면이다. 오른편의 영수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공간에 기둥만 세워 계자난간이 둘려져 있으며, 가운데에 방 1칸 정도의 공간을 둔 특이한 형태의 건축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고운사의 연수전에서도 보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7<임인진연도병, 대한제국 1902년, 비단에 채색, 국립국악원>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8<임인진연의궤, 대한제국 1902년, 국립고궁박물관>

<임인진연의궤>는 1902년 51세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열린 진연의 전 과정을 상세히 적은 궁중 기록물이다. 총 4권으로 의식 절차, 공연 종목, 기물, 복식, 음식, 인언과 비용 등 분야별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진연의 준비부터 끝날 때까지의 과정과 반차도를 함께 수록하여 의례에 참석한 대신들의 자리 및 기물, 악기 등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이 의궤를 바탕으로 진연 장면을 10폭의 병풍에 채색하여 그린 것이 임인진연도병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39<선생안, 조선 1803년, 의성 고운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40<선생안, 조선 1803년, 의성 고운사>

<선생안>과 <금옥당상록>은 금옥청에 종사한 스님들의 명단을 적은 문서들이다. 금옥청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어첩봉안가을 관리하던 고운사의 건물 혹은 기관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통정대부, 가선대부, 승통, 총섭 등의 직책 아래 금옥청에 종사한 스님의 법명이 적혀 있다. 특히 <선생안>의 뒷부분에는 기로총섭, 기로소총섭 등의 직책이 보여 1902년 이전 어첩봉안각의 설치와 사찰 내의 봉안각 운영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서 선생안(耆老所 先生案)
선생안 조선시대 각 기관의 명단을 기록한 책으로 안책(案冊) 또는 제명록이라고도 한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기로소 선생안은 두 권으로 조선 태조부터 고종 가복까지 기로소에 입소한 605명이 명단을 적은 문서 1책과 고종이 기로소를 입소할 시기의 기로신 27명을 등재한 선생안 1책이다. 기로신 명단에는 연수전 현판을 쓴 김성근과 상량문을 지은 윤용선 등이 기록되어 있어 연수전의 건립에 기로신들이 관여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운사에는 고운사 스님들의 명단이 적힌 선생안도 한권 남아 있는데, 고운사의 금옥청(金玉廳)에 종사한 스님들의 명단을 적은 문서이다. 금옥청의 성격은 앍 수 없으나 당시 고운사에 설치되었던 어첩봉안가을 관리하는 기능을 하는 건물 혹은 기관으로 추정된다. 책의 뒷부분에는 기로총섭, 기로소총섭 등의 직책이 보여 1902년 이전 어첩봉안각의 설치와 운영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41<기로소 선생안,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42<기로소 선생안,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43<경상북도의성군등운사고운사 축리전원당중건축원문, 대한제국 1903년, 의성 고운사>

1903년 고종의 원당인 축리전을 수리하면서 작성한 축원문이다. 왕실에서 의성군을 통해 내탕금 1만냥을 지급하여 충당하도록 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44<연수전호절목추후마연, 대한제국 1904년, 의성 고운사>

기로소에서 고운사로 보낸 문서이다. 축리전을 연수전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연수전 운영의 세칙, 각 직책의 업무, 선발 원칙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45<의성군고운사신건축리전수호장정,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1902년 5월에 작성된 기로소문서에는 고운사에서 ‘스님들을 소집하여 영수각을 별도로 지어 어첩을 받들고, 앞으로 기로소 봉안각의 초석을 고치고 기둥을 바꾸고자 도모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문서에 의거하여 기로소에서 축리전을 수호하는 고운사 스님들의 직함과 업무를 적은 책이다.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기로소에 두고 1부는 고운사로 보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문서, 대한제국, 의성 고운사
기로소 문서는 연수전 건립에 관련된 문서이다. 1902년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하게 되자 고운사에서는 영조의 선례를 들며 기로소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운사는 기로소 봉안각을 중수하고 영수각을 별도로 지으려고 했으나 기로소의 반대로 인해 축전으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릭 축리전의 명칭을 영수전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연수전으로 결정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57
<기로소 문서>

영수각을 별도로 만들어 어첩을 봉안하고, 기로소 봉안각의 기둥 설치 및 초석을 고칠 것에 대하여 기로소의 허락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58
<기로소 문서>

축리전 원당 건립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59
<기로소 문서>

축리전 공사가 끝났으나 전패 봉안을 못하고 있음, 이에 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60
<기로소 문서>

축리전의 이름을 영수전으로 바꾸고자 기로소에 허락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특별전 연수전 20221116_61
<기로소 문서>

연수전 수호답의 도조를 남부하지 않는 이산운의 처벌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 20221116_01<연수전 상량문 현판, 대한제국 1903년, 의성 고운사>

연수전을 중수하며 적은 상량문을 목판에 옮긴 것이다. 매행 14~19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34행이다. 글자는 해서체로 일부 먹흔이 남아 있다. 현판의 내용인 상량문은 조선 말기의 문신 윤용선이 고종의 명을 받아 작성하였다. 연수전 상량문의 앞뒤가 잘려나가고 일부 내용만 적혀 있어 정확한 내용 파악이 어렵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 20221116_02<연수전 기문 현판,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연수전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현판이다. 현판에는 황태자의 상소로 시작된 고종의 기로소 입소 과정과 고종의 수복을 축원하는 글, 고운사에 연수전이 자리하게 된 과정을 기록하였다. 기문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한 1902년 7월이며, 찬자는 안철용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 왕실의 장수를 축원하다
고운사에는 왕실 축원을 목적으로 연수전(延壽殿)이 남아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1744년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고 기로소에 입소한 역대 왕의 이름을 적은 어첩을 봉안하기 위한 어첩봉안각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경내에 왕의 어첩이 봉안되어 있는 만큼 왕실과 관청의 보호와 지원 속에 사세가 확장되었다. 1902년에는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며 이 건물을 중수하고 기로소로부터 연수전이라는 이름을 받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연수전의 형태는 경복궁 인근에 위치한 기로소 영수각 건물(현재 소실)을 모본으로 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연수전 내.외부에는 왕의 위상과 무병장수, 부귀영화의 의미를 담은 다양한 벽화로 장엄하여 왕실을 축원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왕실의 어첩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건립 과정과 운영 현황이 기록된 자료들이 다양하게 전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3년
  2. ‘보물 광흥사 동종,’,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보물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보물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5. 보물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6. ‘보물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7. ‘보물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8. ‘보물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등운산 고운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2022년 가을 ‘등운사 고운사’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고운사(高雲寺)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최치원이 자신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통일신라말 도선이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후의 사찰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으며 조선중기 이후에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경북지역을 대표하는 5개 사찰 중 하나였다. 소장 유물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가운루, 삼층석탑, 연수전 등이 있다. 전시에는 사찰의 내력을 보여주는 주요 자료들과 함께 고운사에서 머물면서 큰 역할을 했던 고승들의 영정과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1<’등운산 고운사’ 특별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2<고운사 편액 조선말 ~ 근대,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3<대웅전 편액,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4<고금당 편액,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5
<우화루 편액, 조선 1809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6<고운사 중수기 현판, 조선 1887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7<모니극락양전불상개금기, 조선 1858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 중창기 현판, 조선 1902년 추정,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8<계원필경, 조선 1834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계원필경>은 신라 말기 고운사의 중창자인 최치원이 지은 문집으로 총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부터 14건까지는 879년 10월 이후 885년 3월 이전까지의 기록이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천능을 비롯한 중국 각 지역의 반란을 비판한 <토황소격문>이 포함된 글들이 실려 있다. 또한 15권부터 20권까지는 여러 시문 중 불교와 관련한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최치원의 불교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1
<호계첩 목판, 일제강점기 1919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2
<고운사 사적비 탁본,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09<석가불좌상, 조선 전기, 의성 고운사>

고운사 나한전에 봉안된 불상이다. 고운사 나한전은 원래 모니전(牟尼殿)이였으나 1990년대 현재의 대웅보전이 건립되며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참잠한 상호나, 무릎이 낮고 상체가 긴 상의 비례 등으로 보아 조선 전기인 15~16세기 사이에 조성된 상으로 보인다. 석조불좌상과 삼층석탑을 제외하고 17세기 이전의 성보를 찾아보기 힘든 고운사에서 나한전의 석가불좌상은 조선 전기 사찰의 연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찰령 개정에 따른 고운사 재산대장>에는 높이 3자(약 90cm)로 1482년의 제작시기가 남아 있는 석가불좌상 1구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나한전 상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0<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선 1695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 좌상의 주존이다. 신유한의 고운사사적비(1729)에는 1695년(숙종21)에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각승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상의 형식적 특징, 팔각 대좌 내부 천인상의 표 현으로 보아 탁밀 스님의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추정된다.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던 시기의 상이기 때문에 조각승의선정 및 불사 전반에 깊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2<우순풍조만민함락 원패,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이 패는 방형의 패좌에 3엽의 연꽃을 조각하였고, 패두와 패신은 단청으로 채색하였다. 크기가 작고 장엄과 구조면에서 간략화되며, 하나의 나무로 패두와 패신을 제작하고 패좌로 결합하는 형태는 조선 후기 특징을 잘 보여준다. 덧칠된 패액의 붉은 바탕 아래로 ‘세자저하수만세’의 명문이 보이는 부분이 있어 본래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1<왕비전하수제년 전패, 조선 후기, 의성 고운사>

불전 내 불단 위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한 삼전패 중 하나이다. 패두는 왕실을 상징하는 용과 그름무늬를 깊게 새기고 금색.청색.적생 등 화려한 단청으로 마감하였다. 패신은 꽃무늬와 잎사귀문양을 새겼으며, 중앙에는 ‘왕비전하수제년’ 문구를 넣은 후 금칠로 마무리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3<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조선 1670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4<지장보살>

신유한의 고운사중수기(1729)에는 1670년(현종11)에 명부전과 존상들이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장보살상이 두 손을 낮게 두고 있는 점, 정방형의 얼굴에 기다란 귀와 매부리코로 대표되는 상호 표현 등에서 단응 스님의 특징을 보여 조각승을 추정해 볼 수 있다.이 시기는 소영 신경 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며 불사를 관장하던 시기로 명부존상의 조성과 신경 스님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시왕상의 착의나 의습선 표현이 화려하며, 의복과 의자 내부에 다양한 인물상이 표현되어 있어 독특하다. 최근 이운 과정에서 지장보살좌상 대좌 하단 좌복의 명문에 1725년(영조1) 지장보살을 중수한 기록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3
<아미타불회도, 조선 1701년, 삼베에 채색,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5<아미타불>

고운사 극락전 아미타불회도로 소영 신경 스님이 증명하고 혜명 스님과 도문 스님이 조성하였다. 이 그림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6위의 보살이 시립해 있고, 두광 주변에는 2위의 타방불,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포함한 19대 제자, 북방다문천왕와 서방광목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고운사의 아미타불회도를 조성한 혜명스님과 도문스님은 17세말부터 18세기 초까지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소용돌이 형태의 금니문양과 오색화문의 표현은 같은 시기에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해웅, 상린, 의균 스님의 특징으로 화풍의 굘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6<사십이수관음보살도, 조선 1828년,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천수천안관음보살은 모든 병과 악업, 중죄를 없애주고 안락과 수명, 부귀를 주는 관음으로 널리 신앙된다. 경전에서는 ‘서수천안’의 형상에 대해 규정하지 않았으나 42개의손으로 표현되며 각 손마다 한 개의 눈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 앞의 손으 ㄴ수인을 결하고 있고, 18쌍의 손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각각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의 양쪽 허리 부근에는 촉지인과 설법인을 취한 화불이 표현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퇴운 신겸 스님은 경상북도 문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불산화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하였다. 활동 후반기에는 고운사에 주석하며 고운사의 불화 전반을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7<쌍수암 영산회상도, 조선 1887년,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쌍수암 영산회상도는 기존 영산회상도와는 다르게 난간을 두른 넓은 육각형의 단 안에 사각형의 대좌를 놓고 석가모니불과 보살, 십육나한을 비롯한 여러 존상들을 배치하였다. 난간 아래에는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을 표현하였다. 화면 전체적으로 적색과 군청색 계통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화기이 기록을 통해 하은 응상 스님을 비롯하여 한규, 범임, 서휘, 소현, 봉화 스님이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사불산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응상 스님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8<불영패, 조선 1696년, 의성 고운사>

불영패는 둥근 놋쇄거울과 불꽃무늬 장식, 대좌의 요소를 갖춘 경대의전형적인 형식을 하고 있으나, 명문에 ‘불영패(佛影牌)’라는 명칭이 있어 부처님의 모습이 어린 패, 즉 불성이 비치는 명경로 볼 수 있다. 이 패의 명문을 통해 업경대와 다른 명경대가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패의 바닥면에는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조각승 탁밀 스님과 보웅 스님이 조성에 참여한 기록이 있어, 불교 의식구와 공양구 제작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운사의 역사와 성보
의성 등운산 고운사(孤雲寺)는 사찰을 관통하는 계곡이 여러 전각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681년 창건된 이후 오랜 기간 법등을 이어 가면서 계곡을 따라 지금의 권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계곡은 현재 일부 복개하였으나, 가운루 아래로 계곡의 모습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고운사의 석조불좌상과 삼층석탑은 사찰의 창건 시기와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17세기부터는 고운사의 확장되는 사세를 살펴볼 수 있다. 1670년 명부전 건립, 1695년 극락전 아미타불좌상, 1701년 아미타불회도 등 고운사를 대표하는 성보들이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고운사는 1835년 큰 화재를 입고 여러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이를 중수하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이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본사로 영남 북주 지역의 사찰을 이끌고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19<각항등록, 조선 1802년, 의성 고운사>

<각항등록>은 1802년 고운사와 고운사의 말사가 조선 왕실과 관아에 다양한 물품을 진상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책의 본문에는 본사인 고운사를 시작으로 수정사, 운람사, 지보사, 주월사 등의 사찰에서 다양한 물품을 관납한 것을 차례로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통해 19세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고운사가 여러 사찰을 관할한 사실과 조선 후기 사원 경제에서 사찰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 파악할 수 있어 의미가큰 자료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0<어회계안, 조선 1895년 추정, 의성 고운사>

범패, 범음, 범무 등 불교 의식 작법을 어산(魚山)이라 칭한다. 어회계는 어장 스님들의 모임으로, <어회계안>은 모임원의 명단을 적어놓은 것이다. 서문에 어산은 공덕을 비롯하여 흥기를 기원하는 발원이 담겨 있으며, 좌목을 두어 스님들의 이름을 적었다. 여러 해에 걸쳐 기록된 듯 첫 좌목에 기입된 스님의 이름 아래에는 열반을 뜻하는 ‘적’이나 탈퇴를 뜻하는 ‘퇴’가 적혀 있으며, 새로 가입한 경우에는 가입한 해와 가입한 스님들의 이름을 적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1<추원록, 조선 1888년, 의성 고운사>

<추원록>은 재(齋)나 불공 시에 명복을 빌기 위한 영기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고운사 운수암에서 사용된 것이다. ‘영각 좌목’이라는 제를 보아 영각(影閣_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사명 유정 스님부터 함흥 치능 스님까지 추원을 비는 선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뒷부분에는 명복을 비는 소를 적어 의례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월 영민 스님
수월 영민(1817~1893) 스님은 함홍 치능 스님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고운사의 고승이다. 영민 스님은 편양 언기 스님의 4세손인 기성 쾌선 스님의 법맥을 이은 스님이다. 스님의 비명에는 수행자로서의 모습이 주로 확인되는데, 남암에서 결사를 조직하여 수행하고, 10년간 면벽수행을 진행하여 생전에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고운사의 산내 암자인 쌍수암에 주석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근현대 고승인 용성(1864~1940) 스님에게 지도한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2<수월대사영찬 현판, 대한제국 1898년, 의성 고운사>

영찬은 진영에 기록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수월대사영찬의 경우 별도로 현판을 제작하여 진영화 함께 봉안하였다. 영찬에는 64과의 사리가 출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리학자 방산거사 허훈이 글을 지었으며, 수월당영민대사비 음기에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현판의 뒷면에 1898년 4월에 새겼다는 묵서가 남아 있어 영민 스님이 입적하신 후에 현판이 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4
<수월당대선사영민진영, 근대,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수월 영민 스님의 진영이다. 수월 영민스님은 깨달음의 상징적 결정체인 사리가 생전에 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은 1833년 17세에 의성 고운사로 출가하였다. 10년 동안 면벽 수도를 수행했고,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스승들을 찾아 정진하였다. 끝없는 수행으로 약 64과의 사리가 출현했으며 1893년 세납 71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3<화엄경도,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화엄경도는 80권본 <대방광불화엄경>의 내용을 간략하게 도해한 그림이다. 화면의 중하단부에는 일곱 개의 원 내부에 <화엄경>을 설한 일곱 곳과 37품의 품제, 설주보살이 명기되어 화엄경과 관련된 불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의 외곽부에는 호법신중이, 내부에는 불보살의 명호가 확인되는데, 이는 <화엄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화엄성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운사 소장 화엄경도는 예천 용문사의 화장찰해도(1869)와 같이 19세기 영남 북부지역에 유행했던 화엄 신앙을 반영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5
<함홍당대선사치능진영, 조선후기,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진영에 묘사된 함홍 치능 스님은 먹색 장삼과 홍가사를 수하고 화면 왼편을 바라보며 돗자리 위에 단정히 앉아 있다. 왼손은 주장자를 쥐고 염주를 건 오른손은 여러 경전을 쌓은 경상 위에 올려두었다. 펼쳐진 경전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이다. 영제 바로 옆에는 찬(讚)도 남아 있다. 치능 스님이 직접 지은 찬으로, 찬에는 ‘불자를 든 모습이 7할 쯤 비슷하다.’라고 하였으나 진영 속 스님은 주장자를 쥐고 있어 상이하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6
<차사 창건주의상조사진영, 일제강점기 1915년, 비단에 채색, 의성 고운사>

의상 스님은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국내에 10여개의 화엄종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 사상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러한 의상 스님은 681년 등운산 골짜기에 고운사를 창건하였다 전한다. 그림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의상 스님은 먹색 장삼을 입고 왼손에는 붉은색의 주장자를 들고 있다. 스님은 파란 바탕을 배경으로 화문석 위에 가부좌의 자세이며, 가는 필치로 날카로우며 강직한 얼굴이 묘사되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57
<송운당사명대사진영, 조선 1768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사명 유정 스님의 진영이다. 유정 스님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인 휴정 스님에 이어 승병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정 스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 고운사를 식량비축을 비롯해 부상병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승병들의 기지 역할로 이용했다고 전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4<대방광불화엄경소초>

소영 신경 스님
소영 신경(미상~1706) 스님은 환적 의천 스님의 법맥을 이었으며, 문도인 단응, 탁밀 스님 등과 함께 다양한 불사를 진행하였다. 이 스님들은 예천 용문사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84)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보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성보 중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1670), 극락전의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대세지보살상(1695), 아미타불회도(1701)는 신경 스님과 문도들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다. 또한 선종소영대사비가 고운사 승탑원에 남아 있어 신경스님이 고운사에 주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경 스님은 불사의 후원자로서 대곡사, 운람사, 광흥사 등 주변 사찰의 성보를 새롭게 조성하거나 중수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6<경복오본산고금기요, 일제강점기 1937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경북오본산고금기요>는 1937년 경북불교협회에서 발행한 책으로, 경상북도 5개 본산인 의성 고운사, 영천 은해사, 대구 동화사, 문경 김룡사, 경주 기림사의 주요 사건을 수록하였다. 각 사찰의 연포.문서.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개 본산의 창건과 중수, 각 사찰에서 입적한 고승들이 비문, 탑.불화.불상의 조성을 시간순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고운사 목에는 사찰의 창건부터 조선후기까지의 역사 자료를 집성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고운사의 연혁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7<청천집 권5, 조선 1770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조선 후기의 문인인 청천 신유한(1681~1752)의 문집이다. <청천집>에는 1729년 고운사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고운사사적비의 비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851년 의상대사가 고운사를 창건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려 초 운주화상과 천우조사의 중수, 1668년 가허루의 중수, 1670년 명부전 건립, 1695년 극락전 보수 등의 내용이 있어 고운사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8<대곡사 소조십육나한상, 조선 1694년, 의성 대곡사>

대곡사 나한전에 봉안된 나한상과 범천상이다. 대곡사 나한전에는 본래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의 삼존과 십육나한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55년 이후 전각이 해체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나한전의 존상배치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대곡사 나한전의 존상 배치와 제작 시기르 추정한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연구에 의하면 나한전의 존상들은 1964년에 소영 신경 스님의 증명으로 탁밀스님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조각승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29<운람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유물, 의성 운람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0<뒷편>

운람사 보광전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로,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11세기)과 더불어 총 27종 165점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중수기는 총 3매가 이어져 있는데, 각각 1602년.1704년.1741년에 불상을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의 중수 가운데 1704년에 거행된 불사에는 증명법사 신경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데, 이는 소영 신경 스님 법명의 다른 한자 표기이다. 신경 스님이 고운사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에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1<한글서간,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신민 스님이 응화원, 밀화원, 웅화원에게 쓴 편지이다. 응화원, 밀화원, 웅화원은 시왕상 발원문에 등장하는 단응, 탁밀, 보웅 스님으로 추정되는데 각 명칭은 친근한 의미로 부르는 호칭이다. 서간인 편지글은 사찰을 혼란스럽게 한 죄인에 대해 죄를 묻고 이를 추궁해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2<광흥사 시왕상 발원문,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광흥사 시왕상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이다. 발원문은 총 2점이 발견되었는데, 시주질에서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같다. 강희 31년(1692) 7월에 광흥사 시왕을 조성하였음을 밝히고 여러 물건의 목록, 시주한 시주자들과 상을 조성한 스님들을 밝혔다. 소영 신경스님을 증명으로 하여 단응, 탁밀 덕륜, 보웅 스님 등이 시왕상을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3<광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조선 1692년, 안동 광흥사>

광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 명부 존상들은 발원문이 남아 있어, 1692년 7월 그믐날에 안동 학가산 광흥사에서 증명법사 소영 신경 스님과 단용, 탁밀 스님 등 15명의 스님들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운사 명부 존상과 비교하면 세부적인 표현에서 고운사 상의 특징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머리의 크기가 작아지고, 하체 부분이 세장하게 표현되어 신체 비례가 확연하게 변화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함홍 치능 스님
함홍 치능(1805~1878) 스님은 환성 지안 스님과 포월 초민 스님의 법맥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치능 스님은 산내암자인 운수암에 주석하였는데, 고운사에 강원을 열었으며 강백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화엄경도나 <대방광불화엄경소초> 등은 스님이 개설하였던 강원과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4<함홍당집, 조선 1897년,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함홍당집>은 함홍 치능 스님의 시문을 엮은 문집이다. 문집에 수록된 <행장>에 따르면, 스님은 안동에서 태어나 13세에 고운사에 주석하던 숙부이자 환성 지안 스님의 8세손인 송암 의탄 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스님은 출가 이후에도 유학자에게 경사자집을 수학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문집에는 사대부와도 두루 교유하며 주고받은 서정적인 내용의 시가 다수 남아 있는데, 유불(儒佛)에 통달하였던 스님의 넓은 견문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5<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선사함홍하상헌토기 현판, 조선 1880년, 의성 고운사>

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치능 스님이 지은 시를 현판에 새겼다. 역대 고승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고운사의 영각을 새로 지었는데 이떄의 소회를 밝힌 시이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근차판상운 시판,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치능 스님이 우회루 현판의 운을 따라 지은 시이다. 우회루의 이름에서 착안한 듯 이에서는 도교와 관련된 제재도 있어 눈길을 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6<선사함홍하상헌토기 현판, 조선 1880년, 의성 고운사>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7<운우삼영각상량문, 1868년, 의성 고운사>

함홍 치능 스님은 고운사으 산내 암자인 운수암과도 인연이 깊었다. <함홍당집>의 <행장>에 따르면 1835년에 소실했던 운수암을 몸소 재건하며 사찰으 기강을 엄숙히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만년을 보낸 만성이라 편액한 전각은 운암 옆이었다고 하였는데, 운암은 운수암으로 추정된다. 운수암영각상량문은 세로로 긴 한 장의 종이에 진한 먹으로 상량을 축원하는 글과 본암질 등을 가지런하게 적어 내렸다. 1868년 3월에 28일에 영각의 기둥을 세우고 4월 2일에 상량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치능 스님이 편찬한 사실도 잘 남아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교박물관특별전 의성고운사 20221116_38<고운사 운수암 등촉, 조선후기, 의성 고운사>

서문에는 부처님 앞에 등 또는 초를 밝히는 공덕을 설명하고 갑진 12월 환허 지한 스님이 서문을 지은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밖에 성암 우민, 만승 의홍 스님 등 역대 큰스님에게 헌재한 사실과 더불어 두천, 경묵 스님과 재가자인 권영주의 이름이 함께 남아있다. 등촉 공양의 공덕은 물론, 고운사의 법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운사의 고승
고운사는 여러 스님들이 주석하시며 오랜 기간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비롯한 스님들의 기록은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고운사의 사격이 확립되는 17세기 이후의 스님들을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소영 신경 스님은 고운사의 불사를 주관하며 여러 전각을 중수하고 존상을 봉안하였으며, 주변 지역 사찰까지 다양한 불사를 주관하였다. 함흥 치능 스님은 19세기 고운사를 대표하는 강백이자 문장가로 스님께 배움을 청하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수월 영민 스님은 수행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생전에 몸에서 난 사리가 나온 이적이 알려져 있다. (안내문, 불교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2022년
  2. ‘고운사 (孤雲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고운사’, 위키백과,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강원감영(사적)에 있는 강원감영 사료관이다. 전시내용은 강원감영의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구성과 모습, 관찰사의 임무 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원주 도심에 있는 강원 감영 건물들은 원래 위치에 원형에 가까운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며, 전시유물이 많지 않지만 관찰사가 근하던 감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사가 어떤 일을 했는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1<강원감영 사료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료관 내부>

강원감영 사료관
강원감영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간(1395~1895)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원주에 강원도를 관할하던 감영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실제 일하던 구성원들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일제시기 사진자료에 실려 있는 감영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일제시기 사진자료에 실려 있는 감영의 옛 모습, 그리고 1887년 4월 오횡묵 정선군수가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의 감영 전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또한 2000년 감영터를 발굴할 당시 출토된 많은 유물들 중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평통보, 비녀와 수저, 나막신과 쌍육 및 기와류, 백자접시와 토기향로를 비롯한 자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사료관은 옛 감영의 건축물 중 행각 건물에 해당한다. 행각은 일반적으로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 건물로 감영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나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포정사문루 20230511_01<강원감영 포정루>

강원감영
강원감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방관청입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여덟개의 도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8도 아래에는 더욱 작은 지역으로 오늘에의 ‘시’나 ‘군’과 같은 ‘목’과 ‘군’, ‘현’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각 도의 관찰사는 왕을 대신하여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현재 서있는 이곳 강원도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과 함께 전국 팔도의 한 행정구역이며, 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 전체를 다스렸던 관찰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강원감영은 1665년(현종 6) 선화당이 세워지면서 많은 관리들이 일하는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1895년 당시에는 총 57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감영에는 관찰사가 일했던 선화당,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거쳐가야 했던 중삼문과 내삼문, 관찰사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행각과 내아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2<강원감영 모형>

작은 도성, 감영(監營)
강원감영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포정루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감영 외곽에 세워져 있는 4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에 세워져 있는 4대문은 각각 수명문(壽命門, 동문), 취적문(翠滴門, 서문), 진남문(鎭南門, 남문), 공북문(拱北門, 북문)이라 했는데, 이 4대문의 경게가 곧 강원감영에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이 되고, 여기를 지나 관찰사가 일하는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에 도창하게 됩니다. ‘포정(布政)’이란 원래 중국 명나라에서 각 지방을 통치하는 기구였던 포정사(布政司)에서 연유한 말이지만 여기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관찰사가 강원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좋은 일을 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어려워지면 도와주는 등 뭇 사람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포정루 건립과 함께 17세기 후반부터 강원감영에는 선화당과 관풍각, 감사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집무실, 창고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감영의 규모는 점차 늘어나 1750년에는 31동 509칸, 1870년에는 33동 454칸, 1875년에는 43동 459칸, 1891년에는 55동 670칸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감영 내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은 각기 고유한 기능과 용도가 있었는데, 각건물은 당(堂).사(舍).각(閣).누(樓).청(廳).방(房).창(倉).고(庫) 등의 명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왕을 상징한는 전궐패를 모시고, 손님이 묶었던 객사(客舍), 관찰사의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내아(內衙), 후원에 있던 봉래각과 부평각, 관풍각, 환선정, 군사시설인 중영(中營), 화약고(火藥庫), 군기고(軍器庫), 군향고(軍餉庫) 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羅將)이 일하는 군뇌방(軍牢房),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司倉)이 있었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22<관찰사 신완의 편지, 조선시대(1646~1707)>

OLYMPUS DIGITAL CAMERA<관찰사 서명선의 편지, 조선시대 1728~1791년>

관찰사
조선의 왕이 각 도의 책임자로 보낸 관리를 당시에는 관찰사(觀察使) 또는 감사(監司)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한 행정권과 서법권, 군대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고, 1년에서 2년 정도에 걸쳐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목, 군, 현을 다스리는 수령이 어떻게 백성들을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관찰사가 여러 곳을 살펴보 돌아다니는 일을 순력(巡歷)이라고 합니다. 여름에는 주로 영동지역인 강릉과 삼척에 머물렀고, 봄.가을.겨울에는 춘천과 원주에 있었답니다. 17세기 중반부터는 관찰사는 원주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감사의 임기도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는데, 이때 선화당을 비롯하여 감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건축됩니다. 관찰사는 주로 원주의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때때로 순력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留營)이라고 부릅니다. 관찰사는 높은 지위와 그만큼의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품계라고 하는데, 종2품 이상의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다른 부서에 있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또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관찰사로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9<휴대용업무편람, 조선시대>

비장과 중군
조선의 중앙정부에서는 관찰사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을 함께 파견하였습니다. 정6품이나 종5품의 도사(都事), 정3품(무관)의 중군(中軍), 종4품의 경력(經歷), 판관(判官) 등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관찰사의 참모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을 비장(裨將) 또는 막료(幕僚)라고 불럿습니다. 비장은 거두어들인 곡식 장부를 감시하거나, 관찰사를 대신해서 강원도 내의 농사 형편을 살피기도 했고, 식량이 모자라는 봄철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도 했답니다. 비장청은 8명에서 1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됩니다. 중군은 관찰사의 안전을 담당하거나 군사업무를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 중군은 2년의 임기동안 관찰사를 보좌하고 감영에 있는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또 중군을 보좌하는 군관이 2사람, 그 외 29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업무를 도왔는데 이들은 군대와 관련된 업무와 더불어 치안을 담당한 오늘의 경찰이나 검찰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심약과 검율
심약(審藥)은 관찰사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종9품관인 심약은 주치의처럼 감사의 건강과 질환을 살펴보았고, 관찰사의 순력에 동행하면서 짋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바치던 삼(蔘)을 책임지기도 했고, 매년 1월부터 10월까지 여러 지역의 약재를 모아 중앙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원감영의 옛 건물 중에는 심약이 머무는 심약당, 약재를 모으는 채약방(採藥房), 인삼을 보관하는 보삼고(補蔘庫) 등이 있습니다. 재판을 하는 관찰사에게 법률적인 조언과 자문을 해주는 검율(檢律)도 있었습니다. 종9품관인 검율은 관찰사의 법률 보좌관으로 법률의 해석과 적용, 집행에 대한 사무를 책임지며, 법규와 형벌 집행을 도왔습니다. 즉 관찰사가 범죄사건을 처리할 때 사건내용을 잘 살펴서 처리하는 방법을 자문하는 역할을 했답니다. 감영 내에서 검율이 머무는 곳은 검율당(檢律堂)이라 합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영아전과 무임, 기술직 장인
감영에는 감사와 중군 및 영리를 보조해주는 비서격의 업무를 보던 영아전(營衙前), 각종 군사 및 경찰업무를 담당했던 무임(武任),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장인(匠人) 등의 사람들이 함께 일했습니다. 영리(營吏)는 감영의 6방(房) 행정사무를 담당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내 26개 군현 중 14개 군현에서 뽑힌 120명의 영리가 감영에서 교대로 일했다고 합니다. 영아전은 영리와 비슷한 사무를 담당한 이들로 감영이 소재한 곳, 즉 원주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충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영 내에서 각종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무임이나 장교, 관노비도 대부분 감영 소재지에 거주하였습니다. 강원감영에는 군관(軍官) 3명, 화사(畵師) 1명, 사자관(寫字官) 1명, 집사(執事) 16명, 지인(知印) 51명, 사령(使令) 28명, 군뢰(軍牢) 27명, 세악수(細樂手) 10명, 관노(官奴) 42명, 관기(官妓) 19명, 영비(營婢) 9명 등이 있었고, 이 사람들은 집사청(執事廳)이나 관노청(官奴廳), 비장청(裨將廳), 영노청(營奴廳) 등에서 각기 배정된 역할과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영리와 영노비
감영에는 오늘날 도청의 공무원과 같이 강원도에 사는 백성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각종 문서와 서류, 세금업무 등을 처리하던 영리(營吏)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원도 각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지방의 향리들 중 한 사람씩을 뽑아 임명하였습니다. 영리는 감영의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로 관찰사의 명령을 받아 각 지방 수령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얼마나 잘 살피고 있는지를 감시했고, 관찰사가 순력할 때는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실질적인 감영의 업무는 6조(六曹)가 있는 것처럼 6방(六房)으로 나누어 영리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방(吏房)에서는 주로 인사와 비서의 업무를, 호방(戶房)에서는 세금과 농사 등에 관한 업무를, 예방(禮房)에서는 제사와 예절, 손님접대 등에 관한 업무를, 병방(兵房)에서는 군사 및 병선에 관한 업무를, 형방(刑房)에서는 재판과 죄인, 감옥에 관한 업무를, 끝으로 공방(工房)에서는 수공업과 건물의 건축과 수리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방에는 비장(裨將)이라고 하는 수장을 두었으며 호방과 이방, 형방의 우두머리를 삼공형(三公兄)이라고 불렸습니다. 영노비(營奴婢)는 감영과 병영에 소속된 노비로 건물을 새로 짓고 수리하는 일, 창고를 지키는 일, 군량을 운반하는 일 등을 맡아 하였고, 대략 31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21<조선시대, 과거시험 우등답지 묶음, 조선시대>

감영 향시(監試) 주관
조선시대에 지방에 사는 지식인이나 양반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먼저 향시(鄕試: 문과향시, 무과향시, 생원진사시 초시)를 거쳐야 했습니다. 즉 강원도내의 응시자들은 과거를 보려면 감영이 있는 원주로 모여야 했고, 감영에서는 향시를 준비하고 시행하였습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감사는 도회소(都會所)라는 ‘과거시험준비-시행위원호’를 설치하여 과거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도회소 주관 아래 경시관, 도사 등이 감사가 지정한 문신 수령인 참사관 2인과 함께 과거를 준비하고 채점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시험을 치르기 전 녹명소를 통해 응시자 본인에 대한 확인 및 증명서 발급의 업무가 있었습니다. 녹명소는 별도 기관이 아닌 임시기구였으며, 행정자료인 호적을 함께 대조해야했기 때문에 감영이 이를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의 예비시험인 조흘강(照訖講)도 감영에서 시행되었는데, 감사는 생원진사시 초시, 문과 초시, 무과 초시 등의 향시를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속업무 또한 관장하였습니다. 응시자와 합격자의 성명 및 인적사항의 보고, 과거 시험의 과정인 초장-중장-종장이 실제로 어떻게 시행되고 몇명이 몇장의 시험지를 제출하였는가와 관련한 보고 우수 답안지의 편집 및 보고 등은 모두 감사가 담당하였습니다. 감영에서 이루어진 과거시험(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등을 상세하게 적은 명단을 <사마방목(司馬榜目)>이라 하는데 태조 때부터 1894년까지 치러진 총 230회의 시험결과를 보면 전체 47,997명의 합격자 가운데 원주에 거주한 사람이 57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전국에서 네번째로 많은 합격자수를 보여주고 있는 내용인ㄷ, 그만큼 우너주의 향학열이 높고 지역에 우수한 인재가 많았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OLYMPUS DIGITAL CAMERA<강원도 각읍무변이력성책, 조선시대, 원주역사박물관>

군사훈련과 재판
관찰사는 나라의 정책을 시행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역할과 함께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군사 훈련에도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래서 매월 군사 훈련을 시행한 결과를 중앙에 있는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군사훈련을 당시의 표현으로 조점(操點).합조(合操)라고도 해쓴데, 원주에서는 치악산을 무대로 산성에서 훈련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강원감영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에는 군사훈련에 사용된 무기를 보관한 군기고(軍器庫), 화약을 보관한 화약고(火藥庫), 군인들의 식량을 보관한 군향고(軍餉庫) 등 군대와 관련된 건물이 확인됩니다. 오늘날 법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논쟁하는 가운데 판사의 결정으로 옳고 그름이 가려지는 것처럼 관찰사는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도둑질을 하거나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조정하고 판결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감영에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고, 관찰사의 판결과 심문에 따라 곤장을 맞기도 하고, 금전으로 배상을 하기도 했으며, 무거운 죄를 짓거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옥살이를 했답니다.(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20<강원감영중기, 1891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강원감영에서 산하 10개 창고의 각종 재물 상황을 기록한 것>

한해의 농사
관찰사 순력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무엇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울수록 나라의 살림 또한 풍족해지기 때문입니다. 흉년일 때는 반대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고, 나라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쳐야 했습니다. 실제 관찰사가 매달 왕이 있는 중앙에 보고하는 문서에는 농사에 필요한 강우량, 즉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에 대한 측정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작물의 생산량은 얼마나 되는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예전보다 더 넓어지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조사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농경과 함께 전국 각 지방의 관청에서는 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물에 대해서도 매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가거나 오는 전입.전출 현황, 주소지 변경과 출생. 사망 신고 등 인구의 증감 사항에 대한 통계도 주기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보물) 20230511_01<강원감영 선화당(보물)>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3<글씨 새긴 암키와, 조선시대 1760년, 내아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4<내아 상량기, 조선시대, 내아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5<여러무늬 수키와, 조선시대, 포정루>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6<쌍륙말, 조선시대, 연못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7<나막신, 조선시대, 연못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8<잔, 조선시대, 연못 석축>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09<백자접시, 조선시대, 연못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0<백자제기, 조선시대, 연못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1<토기향로, 조선시대, 내아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2<분청사기음각문병, 백자병, 조선시대, 연못터, 내삼문옆 담장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3<갈유병, 조선시대, 연못 석축>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4<동전(상평통보), 조선시대, 공방고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5<금동허리띠고리, 조선시대, 선화당 남동 담장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6<숟가락, 조선시대, 연못터>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7<비녀, 조선시대, 연못 석축>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18<신분증명패(호패), 조선시대>

선화당과 후원
선화당은 관찰사가 일하던 곳으로 강원감영의 중심건물입니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올라온 행정과 농사, 세금을 거두거나 재판하는 등에 대한 첩보를 상세하게 읽어보았고, 문제가 되는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선화당 뒤편 후원에는 관찰사가 휴식을 하거나 사람들과 중요한 회의를 할 때, 손님을 맞이하여 음악을 듣거나 춤을 감상하는 연회를 열었던 관풍각(觀風閣)과 환선정, 봉래각이라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옛 선비들이 남긴 시에는 연못에 떠있는 누각과 정자를 오가는 조각배 두척이 연못을 가로지른 다리 밑에 매여 있었는데, 감영의 아름다운 후원 풍경과 노를 저으며 아담한 누각과 정자를 드나드는 사람들 모습이 마치 신선이 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수백년 전에 있었던 많은 건물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무너지긷, 다시 세워지기도 하였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건물의 위치가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현재 강원감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옛 건물은 바로 포정루와 선화당입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20230511_23<홍만조 시고, 18세기>

강원도의 중심 도시 원주
원주에 강원도 전체를 다스리는 강원감영이 설치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첫째로 원주는 중앙에 있는 왕의 명령을 다른 각 지방으로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지리적 조 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원주지역이 강원도에서 인구와 토지면적이 가장 풍부한 지역으로 도시의 규모가 그만큼 컸기 때문에 강원도 곳곳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기 편리한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편했습니다. 이례로 육로와 함께 남한강 물길이 서울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강원도 각 지방에서 거두는 대부분의 세금을 이곳 원주에서 모아 서울로 옮겼습니다. 이곳 원주에 강원감영이 자리잡은 이유는 바로 서울과 강원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으며, 강원도 전체를 책임진 강원감영이라는 국가 기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주지방은 강원도 행정의 중심으로 기능한 동시에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는 물론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 행정권역과 군사 배치 권역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원주는 고구려 때에 신라와의 대치 관계 속에서 국원성(國原城)을 지키는 주요한 중심지역으로 평원군(平原郡)이라 불렸고, 통일신라시대에는 5소경의 하나인 북원경(北原京)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5도양계(五道兩界)의 지방제도에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하는 영군(領郡) 중 하나로 수령이 파견된 원주(原州)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래 전부터 국가의 지방통치제도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원주가 변함없는 행정적.군사적 요지로 주목받아왔던 사실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원주감영 사료관, 2023년)

<출처>

  1. 안내문, 원주 강원감영사료관, 2023년

 

[상주박물관] 상주의 근대

조선시대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 중심지에 위치했던 상주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로에서 소외되면서 지방 소도시로 바뀌었다. 구한말 동학에서 분리된 경천교과 상주 지역에 자리잡기도 했으며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근대 농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근.현대사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평등 존중의 정신을 알리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 부패한 정치와 봉건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자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 실패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이후 3대 교주 손병희는 천도교로 개칭하여 교세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남.북접의 내부적 갈등으로 공주에서 활동하던 김주희는 보은에서 경천교라 하고 1915년에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동학교라 개칭하였다. 1918년 상주 은척면에 동학교당을 창건하고 1922년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받아 동학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하였다. 또한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여 교세가 경북을 중심으로 충청도까지 미쳤으나,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상주 동학교당은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자주적인 발전을 하여 동학 본래의 취지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동학교당 전시관에는 동학가사 및 책판, 생활용품, 인쇄도구 등 2,000여 점에 달하는 기록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동경대전,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궁을경, 근대, 상주 동학교주인 김주희가 궁을과 동학의 의미, 천도 회복의 원리, 유도와의 관계, 포덕천하 보국안민 등에 대해 문답식으로 풀이한 동학 경전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행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내기

OLYMPUS DIGITAL CAMERA오룡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외기

OLYMPUS DIGITAL CAMERA동학가사, 근대

근대의 상주
1895년 상주목은 상주군, 함창현은 함창군으로 바뀌어 안동부에 속하였다. 1905년 전국을 8도로 정비하였는데, 상주군은 31면에서 22면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31면에서 의성군에 4면, 문경시에 5면을 넘겨주면서 21면이 되었다. 1914년 상주와 함창이 통합되었으며, 1917년 상주역이 설치되어 여객 및 화물운송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상주장터 만세운동에서부터 3월 29일 이안면 소암리 만세운동, 4월 9일 화북면 운흥리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전후 4회에 걸쳐 일어났다. 이후 민족실력양성운동인 청년운동은 물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였다.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잠업 등 근대 농업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1931년 읍면제 실시에 따라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이후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다른 지역으로 나게 된다. 1980년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상주시와 군이 분리된다. 1995년 상주시와 군이 합하여 도농통합의 상주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중심, 갖지로 연결되는 편리한 도로망은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상주를 잇는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호적부, 상주군 외서면의 1960년 호적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식산은행 상주지점 문서, 1921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농잠학교 졸업증서, 1940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보통학교 가정통신문,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농잠학교 1회 졸업사진첩, 1924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상주박물관] 상주의 유학

조선시대 상주에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향교, 서원, 서당 등이 있었다. 경상도를 대표하는 큰 고을인 상주목의 위상에 걸맞게 상주향교는 규모가 크고 교육기능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서원은 안동이나 경주 등 다른 지역에 비해 많지 않은편이다. 상주의 유학은 조선중기 노수신이 학문적 위상이나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아 그 영향이 많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전후 상주목사를 역임했던 류성룡과 교류하면서 정경세, 조정, 이전 등 많은 인물들이 지역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는 등 사화적으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상주의 교육기관
조선시대 상주지역이 교육기관은 서당.향교.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향교와 서원은 유교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컸다. 1580년 지역내 유림들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과 학문적 연원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유림들은 서당.향교.서원 등을 통하여 세력의 근거지를 갖추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수선서당 심원록, 수선서당록, 조선시대

1542년(중종 37) 상주목사 신잠에 의해 관내 17개의 서당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상주 최초의 서당인 수선서당이 세워졌다. 1580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은 각 면에 훈장을 두어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황희초상, 조선시대,

조선 세종 떄의 재상인 황희의 초상화이다. 옥동서원 소장 자료에 따르면 황희 생전인 62세(1424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단에 채색된 형태이며, 초상화의 표현이나 묘사 등을 고려했을 떄 전체적으로 고식을 따르고 있다. 황희.전식.황효헌.황뉴를 모신 사액서원이자 미훼철 서원인 옥동서원(사적 532호)에는 이 밖에 황희 초상 모사본 3본이 전해져 내려온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현판, 조선시대

창건 당시 정경세는 원호의 제정 등 제반사항을 유성룡에게 품의하여 정했는데, 그 바탕에는 상주를 영남유학이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려는 큰 뜻이 있었다. 서원 명칭인 ‘도남’은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내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도남서원 상량문,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팔도서원록, 도남 강학계안 상하,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금록,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시권, 조선시대

상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서원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605년 정경세, 조정, 송량, 이전, 이준 등의 발의로 1606년 상주 최초의 서원인 도남서원이 세워졌다. 이후 옥동서원, 흥암서원 등 사액서원 3곳을 비롯한 여러 서원들이 상주에 지어졌고,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 유학의 융성
16세기 중반 노수신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아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관직생활과 유배생활로 인해 정작 상주에서의 활동은 미약하였다. 당대 다른 인물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해 하나의 학문적 계통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부족하였다. 16 ~ 17세기에 이르러 유성룡.김성일 등 동인 집권 세력과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유학이 크게 번성한다. 임진왜란 전후 상주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강응철.정경세.조정.이전.이준.전식 등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과 학문적 관계를 맺는다. 이들 중 정경세는 「영남인물고」에서 상주의 대표적인 학자라 소개할 만큼 이황에서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도통을 전수받았다. 17 ~ 18세기에 성리학과 예학이 주류였던 학품이 점차 실학으로 바뀐다. 이만부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앞서 연구된 실학의 체계를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상주의 학문적인 면모는 정치성향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강세응은 평소 강직한 성품 탓에 직언으로 명성이 매우 높았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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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회도,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기로서에서 베푼 기로연에 참석한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연회 참석자와 춤추는 시녀 증 부수적인 인물이 다양한 동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산보략,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초를 잡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 노씨 집안의 족보 초본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집본초,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직접 작성한 문집의 초본입니다. 집필연대는 명종초이며, 유배생활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청일기,정사수로그, 조선시대, 복제품. 

정청일기. 의정부에 재임하면서 정청관계를 기록한 일기입니다. 상권은 노수신이 이조판서에서 좌의정에 이르는 시절을, 하권은 영의정 시절에 겪은 정청관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사수록, 노수신이 영의정과 좌의정을 재임하면서 사직을 원하는 서장과 정사가 실려 있으며, 선조 중엽에 작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노수신 증시교지, 조선시대. 노수신 사후 숙종 연간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명하고 문의였던 시호를 ‘문간’으로 고쳐 내리는 교지입니다.

소재 노수신(1515 ~ 1590년)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 호는 소재이다. 그의 장인인 탄수 이연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3년(중종 38) 대과에 급제하여 3장의 장원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이후 이조좌랑의 자리에 올랐다. 1545년(명종 1) 을사사화로 인해 파직당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다시 유배됨으로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도 이황, 김인후 등 유학자들과 끊임없이 학문을 논하였다. 1567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교리로 서용되어 대사간.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거쳤다. 1573년에 우의정, 1585년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라 동서붕당의 분쟁으로 시끄러울 때 중립을 지키며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현재 상주 도남서원과 봉산서원, 충주의 팔봉서원, 괴산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임오사마방회지도, 조선시대, 복제품

선조 15년(1582)의 사마시 합격자들이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이준을 전별하기 위해 동방회를 가진 다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성한 계첩입니다. 계회 개최와 작성 시기는 인조 8년(1630)이고 계회도 부분은 견본채색이고 나머지는 견본묵서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우복당수간, 조선시대, 복제품

정경세가 여러 아우를 비롯하여 아들, 사위, 손자 등 가족에게 보낸 서간을 모은 첩, 수신자는 아우 경열.경식.경화, 아들 정심.정학.정력, 손자 정도응, 생질 노직 등이다. 안부늘 묻고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주인데, 부형으로서 근엄함과 자애로움이 물씬 풍겨나다. 정경세의 큰아들 심과 작은 아들 학의 이름에는 심학을 강조하던 우복가의 학문적 지향이 담겨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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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묵 금관, 조선시대

정경세의 11세손인 정의묵(1847 ~ 1906년)이 조복을 입을 때 썼던 금관입니다. 금관은 국가의 대사.경축일.원단.동지 및 조칙을 반포할 때 조복과 함께 착용하며 품계에 따라 형태와 재질이 구분됩니다. 이 금관은 1품관이 사용하는 오량관인데, 앞뒤 외관을 꽃,넝쿨,쌍학 무늬로 꾸며 금박을 입혔습니다. ‘랑’은 말종으로 만든 검은 내관의 앞쪽에서 뒤쪽까지 걸쳐 있는 세로 대를 말하는데, 개수에 따라 품위를 구별합니다. 각부의 형식과 문양, 술끈 등이 조선 말기 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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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 증시교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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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 벼루, 명. 정경세가 광해군 1년 중국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복선생문집, 조선시대

우산서원에서 발행한 정경세의 시문집 중간본이다. 1657년 초간본과 판식이 다를 뿐 내용과 편차는 같다. 초간본은 합천의 심장에 의해 산정되었는데 적은 분량만 취했기 때문에 사위 송준길과 손자 정도응 등이 증보하여 편찬하였다. 그뒤 1821년 별집 8권 4책이 초간되고 1899년 12권 6책으로 중간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우복 정경세(1563 ~ 1633년)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 호는 우복이다. 유성룡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춘추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군의 소모관으로 활약해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정언.교리.정랑.사간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어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지춘추관사로서 「광해군일기」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에 있어 이황의 설을 계승하고 이이의 설을 수용하였다.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김장생 등과 함께 예학파로 불렸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이다. 상주의 도남서원, 대구의 연경서원, 강릉의 퇴곡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재기, 조선시대. 명종 9년(1544) 11월 27일에 재주인 고 찰방 홍윤최의 처 홍씨가 집안 전래의 노비와 논 일부를 외손자 물단개(조정_에게 별급하는 문서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행록, 조선시대, 보물 1003호. 1592년 8월25일부터 9월23일까지 28일간의 일기로써 검간 조정이 당시 거창에 주재한 순찰사 김성일에게 토적 등에 관한 것들을 논의하기 위해 왕래하면서 기록한 일기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검간 조정의 임난일기, 조선 1592년, 보물 1003호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임진년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어 임진일기로도 불립니다. 상권에는 1592년 4월 14일부터 6월 6일까지 52일간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권은 1592년 6월 7일에서 12월 27일까지 190간의 일기입니다. 모두 242일간의 기록으로 6월7일에서 6월 16일까지 10일간의 기록은 누락되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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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문과급제교지,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풍양조씨세보, 조선시대

검간 조정(1555 ~ 1636년)
본관은 풍양, 자는 안중, 호는 검간이다. 정구와 김성일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 떄 은척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며, 1596년에는 왜군과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정유재란 떄는 두 아들을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후 1599년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싱 합격했다. 1609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청도군수, 형조정랑, 춘추관편수관, 사섬시정, 봉상시정을 거쳐 정묘호란 때 강도로 호종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술과 문장에 뛰어났다. 1642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의성 속수서원과 상주 장천서원에 봉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월간창석형제급난도, 조선 1604년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 형제의 우애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형제가 머물던 항병소에 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곽란으로 몸이 불편한 이준이 형에게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으로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1604년 주청사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간 이준에기 이 이야기를 들은 어느 중국인이 감동하여 명나라 화공에게 시켜 그린 그림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독서록, 조선시대. 월간 이전이 스승인 서애 유성룡에게 전수받은 「주자서절요」에서 잊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명언을 엮어 만든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이준 벼루,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이준 증시교지, 조선시대, 창석 이준을 정2품 자헌대부 문간공으로 시호를 내리는 증시교지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준 추증교지, 조선시대, 창석 이준을 종2품 가선대부 이조참판에서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향상지결, 조선시대, 월간 이전이 스승인 서애 유성룡에게 전수받은 「주자서절요」에서 함양, 거경, 궁리, 성찰에 연관이 깊은 일을 발췌하여 엮어 만든 책이다.

월간 이전(1558 ~ 1648년)
본관은 흥양, 자는 숙재, 호는 월간이다.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제학 이준의 형이며, 1580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에 참여하여 구국 운동에 동참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전이 왜적을 피해 병든 아우 이준을 업고 화를 면한 일화를 담은 그림 「형제급난도」는 이들 형제의 지극한 우애를 엿볼 수 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지례현감에 나아가 백성들의 폐해를 덜어 주었으며, 이후 고향 상주로 돌아와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 아우 이준과 함꼐 상주의 옥성서원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창석 이준(1560 ~ 1635년)
본관은 흥양, 자는 숙평, 호는 창석이다. 형 이전과 함께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고, 이후 단양군수, 수찬,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17년 상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인 「상산지」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시호는 문간이며, 상주의 도남서원과 옥성서원, 풍기의 우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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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식 영정,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사서집, 조선시대

사서 전식(1563 ~ 1642년)
본관은 옥천, 자는 정원, 호는 사서이다.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603년 식년시 문과.병과에 급제해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에 전라도 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경세, 이준과 함께 학문 연구에 힘썼다. 1623년 (인조1) 인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며, 1625년 조경사가 되어 바닷길을 통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대치로 인해 국제 정세가 매우 예민한 상황에서도 사신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아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이다. 상주 옥동서원과 옥천 목담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0

OLYMPUS DIGITAL CAMERA식산시필, 18세기, 흑지에 금니로 기록한 식산 이만부의 친필 시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조식산선생 독서법, 조선시대, 복제품. 이만부가 정주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소개한 독서법을 후손이 편찬하였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호 이익 간찰, 조선시대, 이익이 이만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대학과 중용의 성경에 관한 의문점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만부 호적단자, 조선시대, 호적단자는 3년마다 호구식에 따라 작성하여 호적색에게 제출하던 서류입니다. 이만부 호적단자는 식산 세계, 가족, 노비의 명단 등을 적은 것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호 이익 간찰, 조선시대, 이익이 이만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지난해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뒤의 소감을 밝히고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강주창지서첩, 조선시대, 이만부의 부친인 박천 이옥의 서첩입니다. 이옥과 이만부를 포함한 형제들이 낙동강 경치를 읊은 시를 묶은 것인데, 특히 박천의 자천대(현 경천대)에 대한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동편, 조선시대, 이만부의 성리학에 관한 저술입니다. 1권은 퇴계의 천명도설.성학십도설을 논변하고, 2~3권은 동방성현, 10 ~ 12권은 학문, 13 ~ 15권은 치도, 16권은 중국인물론, 17권은 한국인물론, 18권은 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산 이만부(1664 ~ 1732년)
본관은 연안, 자는 중서, 호는 식산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697년 상주에서 노곡으로 이주하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18세기 때 남인이지만 북인.소론.노론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학문적 자유를 고수한 학자이다. 이기론에서는 이황과 이이의 이론을 절충하고 중국과 동국 제가의 설에서 미진함을 보완하여 자가설을 수립하였다. 실학관에서는 물질적인 이용후생에 앞서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실심실학을 강조함으로서 윤휴와 박세당에서 싹튼 실학의 체계를 잡아 이익을 거쳐 정약용으로 이어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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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응 문과급제교지, 조선시대, 진주 강씨 강세응의 문과급제교지이다. 1780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호패, 조선시대, 강세응, 강춘희, 강인영, 강희영, 강문형, 강충영, 강명희의 호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어정육주약선, 1852년, 정조 21년에 왕명으로 간행한 것으로 당나라 떄 육지가 지은 주의 중에서 내용이 뛰어난 29편을 발췌하여 수록한 책이다. 강문형이 21세 때 향시에 차상으로 합격하여 부상으로 받은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세응 상소문,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강세응 고신, 1808년, 고신은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이다. 강세응을 경성도호부판관에 임명하는 칙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세응 고신, 1800년, 고신은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이다. 강세응을 사헌부장령에 임명하는 칙첩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애선생 문집, 조선후기

뇌암 강세응(1746 ~ 1821년)
본관은 진주, 자는 양로, 호는 뇌암이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평소 성품이 엄준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 하였으며 직언으로 명성이 매우 높았다. 1788년부터 1821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감찰, 지평, 장령, 정언, 사간과 이조좌랑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등조한지 10년 만인 1797년 성환도찰방에 임명되어 우정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8조목의 성환찰방소를 올려 종조의 비답이 내려졌으며, 또한 1809년 경성도호부판관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경성지방에서 일어난 12조목의 민폐를 조리있게 열겨한 구폐소를 올림으로서 조정과 민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