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주에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향교, 서원, 서당 등이 있었다. 경상도를 대표하는 큰 고을인 상주목의 위상에 걸맞게 상주향교는 규모가 크고 교육기능이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서원은 안동이나 경주 등 다른 지역에 비해 많지 않은편이다. 상주의 유학은 조선중기 노수신이 학문적 위상이나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아 그 영향이 많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전후 상주목사를 역임했던 류성룡과 교류하면서 정경세, 조정, 이전 등 많은 인물들이 지역의 학풍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는 등 사화적으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상주의 교육기관
조선시대 상주지역이 교육기관은 서당.향교.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향교와 서원은 유교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컸다. 1580년 지역내 유림들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과 학문적 연원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유림들은 서당.향교.서원 등을 통하여 세력의 근거지를 갖추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수선서당 심원록, 수선서당록, 조선시대
1542년(중종 37) 상주목사 신잠에 의해 관내 17개의 서당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상주 최초의 서당인 수선서당이 세워졌다. 1580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은 각 면에 훈장을 두어 문풍을 크게 일으켰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황희초상, 조선시대,
조선 세종 떄의 재상인 황희의 초상화이다. 옥동서원 소장 자료에 따르면 황희 생전인 62세(1424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단에 채색된 형태이며, 초상화의 표현이나 묘사 등을 고려했을 떄 전체적으로 고식을 따르고 있다. 황희.전식.황효헌.황뉴를 모신 사액서원이자 미훼철 서원인 옥동서원(사적 532호)에는 이 밖에 황희 초상 모사본 3본이 전해져 내려온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도남서원 현판, 조선시대
창건 당시 정경세는 원호의 제정 등 제반사항을 유성룡에게 품의하여 정했는데, 그 바탕에는 상주를 영남유학이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려는 큰 뜻이 있었다. 서원 명칭인 ‘도남’은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내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도남서원 상량문, 조선시대
조선팔도서원록, 도남 강학계안 상하, 조선시대
청금록, 조선시대
시권, 조선시대
상주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서원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605년 정경세, 조정, 송량, 이전, 이준 등의 발의로 1606년 상주 최초의 서원인 도남서원이 세워졌다. 이후 옥동서원, 흥암서원 등 사액서원 3곳을 비롯한 여러 서원들이 상주에 지어졌고,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상주 유학의 융성
16세기 중반 노수신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아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관직생활과 유배생활로 인해 정작 상주에서의 활동은 미약하였다. 당대 다른 인물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해 하나의 학문적 계통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부족하였다. 16 ~ 17세기에 이르러 유성룡.김성일 등 동인 집권 세력과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유학이 크게 번성한다. 임진왜란 전후 상주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강응철.정경세.조정.이전.이준.전식 등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과 학문적 관계를 맺는다. 이들 중 정경세는 「영남인물고」에서 상주의 대표적인 학자라 소개할 만큼 이황에서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도통을 전수받았다. 17 ~ 18세기에 성리학과 예학이 주류였던 학품이 점차 실학으로 바뀐다. 이만부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앞서 연구된 실학의 체계를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상주의 학문적인 면모는 정치성향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강세응은 평소 강직한 성품 탓에 직언으로 명성이 매우 높았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기여회도,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기로서에서 베푼 기로연에 참석한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연회 참석자와 춤추는 시녀 증 부수적인 인물이 다양한 동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광산보략,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초를 잡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 노씨 집안의 족보 초본입니다.
문집본초, 조선시대, 복제품. 노수신이 직접 작성한 문집의 초본입니다. 집필연대는 명종초이며, 유배생활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청일기,정사수로그, 조선시대, 복제품.
정청일기. 의정부에 재임하면서 정청관계를 기록한 일기입니다. 상권은 노수신이 이조판서에서 좌의정에 이르는 시절을, 하권은 영의정 시절에 겪은 정청관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사수록, 노수신이 영의정과 좌의정을 재임하면서 사직을 원하는 서장과 정사가 실려 있으며, 선조 중엽에 작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노수신 증시교지, 조선시대. 노수신 사후 숙종 연간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명하고 문의였던 시호를 ‘문간’으로 고쳐 내리는 교지입니다.
소재 노수신(1515 ~ 1590년)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 호는 소재이다. 그의 장인인 탄수 이연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3년(중종 38) 대과에 급제하여 3장의 장원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이후 이조좌랑의 자리에 올랐다. 1545년(명종 1) 을사사화로 인해 파직당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다시 유배됨으로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도 이황, 김인후 등 유학자들과 끊임없이 학문을 논하였다. 1567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교리로 서용되어 대사간.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거쳤다. 1573년에 우의정, 1585년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라 동서붕당의 분쟁으로 시끄러울 때 중립을 지키며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현재 상주 도남서원과 봉산서원, 충주의 팔봉서원, 괴산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임오사마방회지도, 조선시대, 복제품
선조 15년(1582)의 사마시 합격자들이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이준을 전별하기 위해 동방회를 가진 다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성한 계첩입니다. 계회 개최와 작성 시기는 인조 8년(1630)이고 계회도 부분은 견본채색이고 나머지는 견본묵서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우복당수간, 조선시대, 복제품
정경세가 여러 아우를 비롯하여 아들, 사위, 손자 등 가족에게 보낸 서간을 모은 첩, 수신자는 아우 경열.경식.경화, 아들 정심.정학.정력, 손자 정도응, 생질 노직 등이다. 안부늘 묻고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주인데, 부형으로서 근엄함과 자애로움이 물씬 풍겨나다. 정경세의 큰아들 심과 작은 아들 학의 이름에는 심학을 강조하던 우복가의 학문적 지향이 담겨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정의묵 금관, 조선시대
정경세의 11세손인 정의묵(1847 ~ 1906년)이 조복을 입을 때 썼던 금관입니다. 금관은 국가의 대사.경축일.원단.동지 및 조칙을 반포할 때 조복과 함께 착용하며 품계에 따라 형태와 재질이 구분됩니다. 이 금관은 1품관이 사용하는 오량관인데, 앞뒤 외관을 꽃,넝쿨,쌍학 무늬로 꾸며 금박을 입혔습니다. ‘랑’은 말종으로 만든 검은 내관의 앞쪽에서 뒤쪽까지 걸쳐 있는 세로 대를 말하는데, 개수에 따라 품위를 구별합니다. 각부의 형식과 문양, 술끈 등이 조선 말기 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정경세 증시교지, 조선시대

정경세 벼루, 명. 정경세가 광해군 1년 중국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우복선생문집, 조선시대
우산서원에서 발행한 정경세의 시문집 중간본이다. 1657년 초간본과 판식이 다를 뿐 내용과 편차는 같다. 초간본은 합천의 심장에 의해 산정되었는데 적은 분량만 취했기 때문에 사위 송준길과 손자 정도응 등이 증보하여 편찬하였다. 그뒤 1821년 별집 8권 4책이 초간되고 1899년 12권 6책으로 중간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우복 정경세(1563 ~ 1633년)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 호는 우복이다. 유성룡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춘추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군의 소모관으로 활약해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정언.교리.정랑.사간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어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지춘추관사로서 「광해군일기」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에 있어 이황의 설을 계승하고 이이의 설을 수용하였다.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김장생 등과 함께 예학파로 불렸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이다. 상주의 도남서원, 대구의 연경서원, 강릉의 퇴곡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분재기, 조선시대. 명종 9년(1544) 11월 27일에 재주인 고 찰방 홍윤최의 처 홍씨가 집안 전래의 노비와 논 일부를 외손자 물단개(조정_에게 별급하는 문서입니다.
남행록, 조선시대, 보물 1003호. 1592년 8월25일부터 9월23일까지 28일간의 일기로써 검간 조정이 당시 거창에 주재한 순찰사 김성일에게 토적 등에 관한 것들을 논의하기 위해 왕래하면서 기록한 일기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검간 조정의 임난일기, 조선 1592년, 보물 1003호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임진년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어 임진일기로도 불립니다. 상권에는 1592년 4월 14일부터 6월 6일까지 52일간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권은 1592년 6월 7일에서 12월 27일까지 190간의 일기입니다. 모두 242일간의 기록으로 6월7일에서 6월 16일까지 10일간의 기록은 누락되었습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조정 문과급제교지, 조선시대
풍양조씨세보, 조선시대
검간 조정(1555 ~ 1636년)
본관은 풍양, 자는 안중, 호는 검간이다. 정구와 김성일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 떄 은척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며, 1596년에는 왜군과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정유재란 떄는 두 아들을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후 1599년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싱 합격했다. 1609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청도군수, 형조정랑, 춘추관편수관, 사섬시정, 봉상시정을 거쳐 정묘호란 때 강도로 호종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술과 문장에 뛰어났다. 1642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의성 속수서원과 상주 장천서원에 봉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월간창석형제급난도, 조선 1604년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 형제의 우애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형제가 머물던 항병소에 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곽란으로 몸이 불편한 이준이 형에게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으로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1604년 주청사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간 이준에기 이 이야기를 들은 어느 중국인이 감동하여 명나라 화공에게 시켜 그린 그림입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독서록, 조선시대. 월간 이전이 스승인 서애 유성룡에게 전수받은 「주자서절요」에서 잊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명언을 엮어 만든 책이다.
이준 벼루, 조선시대
이준 증시교지, 조선시대, 창석 이준을 정2품 자헌대부 문간공으로 시호를 내리는 증시교지입니다.
이준 추증교지, 조선시대, 창석 이준을 종2품 가선대부 이조참판에서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입니다.
향상지결, 조선시대, 월간 이전이 스승인 서애 유성룡에게 전수받은 「주자서절요」에서 함양, 거경, 궁리, 성찰에 연관이 깊은 일을 발췌하여 엮어 만든 책이다.
월간 이전(1558 ~ 1648년)
본관은 흥양, 자는 숙재, 호는 월간이다.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제학 이준의 형이며, 1580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유성룡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에 참여하여 구국 운동에 동참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전이 왜적을 피해 병든 아우 이준을 업고 화를 면한 일화를 담은 그림 「형제급난도」는 이들 형제의 지극한 우애를 엿볼 수 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지례현감에 나아가 백성들의 폐해를 덜어 주었으며, 이후 고향 상주로 돌아와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 아우 이준과 함꼐 상주의 옥성서원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창석 이준(1560 ~ 1635년)
본관은 흥양, 자는 숙평, 호는 창석이다. 형 이전과 함께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고, 이후 단양군수, 수찬,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17년 상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인 「상산지」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시호는 문간이며, 상주의 도남서원과 옥성서원, 풍기의 우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전식 영정, 조선시대
사서집, 조선시대
사서 전식(1563 ~ 1642년)
본관은 옥천, 자는 정원, 호는 사서이다.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603년 식년시 문과.병과에 급제해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에 전라도 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경세, 이준과 함께 학문 연구에 힘썼다. 1623년 (인조1) 인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며, 1625년 조경사가 되어 바닷길을 통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대치로 인해 국제 정세가 매우 예민한 상황에서도 사신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아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이다. 상주 옥동서원과 옥천 목담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0
식산시필, 18세기, 흑지에 금니로 기록한 식산 이만부의 친필 시첩이다.
선조식산선생 독서법, 조선시대, 복제품. 이만부가 정주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소개한 독서법을 후손이 편찬하였습니다.
성호 이익 간찰, 조선시대, 이익이 이만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대학과 중용의 성경에 관한 의문점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만부 호적단자, 조선시대, 호적단자는 3년마다 호구식에 따라 작성하여 호적색에게 제출하던 서류입니다. 이만부 호적단자는 식산 세계, 가족, 노비의 명단 등을 적은 것입니다.
성호 이익 간찰, 조선시대, 이익이 이만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지난해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뒤의 소감을 밝히고 있습니다.
낙강주창지서첩, 조선시대, 이만부의 부친인 박천 이옥의 서첩입니다. 이옥과 이만부를 포함한 형제들이 낙동강 경치를 읊은 시를 묶은 것인데, 특히 박천의 자천대(현 경천대)에 대한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도동편, 조선시대, 이만부의 성리학에 관한 저술입니다. 1권은 퇴계의 천명도설.성학십도설을 논변하고, 2~3권은 동방성현, 10 ~ 12권은 학문, 13 ~ 15권은 치도, 16권은 중국인물론, 17권은 한국인물론, 18권은 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산 이만부(1664 ~ 1732년)
본관은 연안, 자는 중서, 호는 식산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697년 상주에서 노곡으로 이주하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18세기 때 남인이지만 북인.소론.노론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학문적 자유를 고수한 학자이다. 이기론에서는 이황과 이이의 이론을 절충하고 중국과 동국 제가의 설에서 미진함을 보완하여 자가설을 수립하였다. 실학관에서는 물질적인 이용후생에 앞서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실심실학을 강조함으로서 윤휴와 박세당에서 싹튼 실학의 체계를 잡아 이익을 거쳐 정약용으로 이어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강세응 문과급제교지, 조선시대, 진주 강씨 강세응의 문과급제교지이다. 1780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호패, 조선시대, 강세응, 강춘희, 강인영, 강희영, 강문형, 강충영, 강명희의 호패이다.
어정육주약선, 1852년, 정조 21년에 왕명으로 간행한 것으로 당나라 떄 육지가 지은 주의 중에서 내용이 뛰어난 29편을 발췌하여 수록한 책이다. 강문형이 21세 때 향시에 차상으로 합격하여 부상으로 받은 것이다.
강세응 상소문, 조선시대
강세응 고신, 1808년, 고신은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이다. 강세응을 경성도호부판관에 임명하는 칙첩이다.
강세응 고신, 1800년, 고신은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이다. 강세응을 사헌부장령에 임명하는 칙첩이다.
서애선생 문집, 조선후기
뇌암 강세응(1746 ~ 1821년)
본관은 진주, 자는 양로, 호는 뇌암이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평소 성품이 엄준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 하였으며 직언으로 명성이 매우 높았다. 1788년부터 1821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감찰, 지평, 장령, 정언, 사간과 이조좌랑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등조한지 10년 만인 1797년 성환도찰방에 임명되어 우정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8조목의 성환찰방소를 올려 종조의 비답이 내려졌으며, 또한 1809년 경성도호부판관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경성지방에서 일어난 12조목의 민폐를 조리있게 열겨한 구폐소를 올림으로서 조정과 민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출처>
-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