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지역박물관

[충재박물관] 유물로 본 당시 사회상

충재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고문서와 전적들 중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안동지역 유지들의 모임인 우향계와 관련된 <우향계축>, 집안내 양자 입양과 관련된 문서인 <예조입안>, 자식들의 재산 분배 관련 문서인 <분재기> 등이 있다. 또한 과거제도를 엿 볼 수 있는 과거시험 답안지, 합격증, 합격자 명단을 비롯하여, 실록 편찬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는 <연산군일기 세초지도>, 왕실의 장례 준비를 보여주는 <산릉도감 제명록> 등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우향계축, 보물 896호,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자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지역 유력 가문들의 모인임 우향계 관련 문서이다. 서거정이 직접 쓴 시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13명 계원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성종 9년 1478년에 시작된 이 모임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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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향계축, 보물 896화. 이런 형태의 계모임은 순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고위관료 출신들이 낙향하여 지방행정에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게 흘러가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해서 조선시대에는 유향소가 폐지와 설립이 반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향계축>을 통해 본 500년전의 지방 자치조직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였다. 이러한 시기, 지방수령에 대해 보좌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했던 자치조직이 유향소였다. 그러나 유향소의 성격자체가 중앙집권적 형태에 반하는 성격이 있는 등의 이유로 인해 중앙에서 폐지와 설치를 거듭하게 된다. 안동의 대표적 유가의 모임인 우향계는 유향소가 폐지된 성종9년(1478년)에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서깊은 모임이다. 우향계는 자치적으로 향촌을 교화하고 상부상조했던 모임으로, 퇴임 관료와 같이 경륜있는 인물이 주축이었으므로,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라도 이들의 의견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유향소가 폐지되었을 때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오늘날의 지방의회와도 유사한 기능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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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세초지도, 보물 901호, 실록을 편찬한 후 세초를 씻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서울 평창동 세검정에서 주로 세초를 했다고 한다. 하부에 성희안 등 연산군일기에 참여한 관원 67인의 좌목이 있다. 그림으로서의 가치보다는 당시 정치.사회상을 보여주는 문서로서의 가치가 큰 그림이다.

「연산군일기세초지도」를 통해본 객관적인 서술의 역사서 편찬의 노력
『조선왕조실록』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훌륭한 역사서이다. 특히, 이 『조선왕조실록』은 그 기술에 있어 공정을 기하고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편찬과정에서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사관의 필적이 남겨진 초고를 물에 씻는 등의 방법으로 없애버려 추후 해당자에 대한 상벌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반정으로 인해 왕이 아닌 군으로 강등된 군주의 시대역사 또한 『00일기』라고 하여 똑깥이 출판했다는 점은 당시 사회적 기강과 역사적 책임이 엄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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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입안, 보물 901호, 권씨집안의 양자 입양과 관련된 문서로 양자입양은 예조에 신고한 문서이다. 가족관계를 정부에서 인정하는 문서이며, 우리나라에 여러점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산 윤선도가 양자로 입양된 것을 증명하는 예조입안이 유명하다.

SANYO DIGITAL CAMERA분재기, 조선 숙종때 만들어진 분재기로 자녀들의 재산상속을 정한 문서이다. 조선시대 재산상속은 조선중기까지는 자녀간 균등분배가 법전에서 규정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장자상속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토지가 특정인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현상이 조선후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분재기>를 통해 본 균등한 재산상속 형태
조선의 <경국대전>은 상속시, 남녀차별이 없는 철저한 평등상속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상속관행을 알 수 있는 문서가 바로 <분재기>이다. 이 분재기는 종류에 따라 <허여문기>, <화회문기>, <별급문기> 등으로 나누어진다. <허여문기>는 조상 전래의 유산이나 재주 부부의 재산을 한 묶음으로 일시에 자녀 모두에게 일정한 수량으로 나누어 준 것을 기록한 문서인데 여기에서는 자녀균분제가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하회문기>는 부모가 재산을 나누어주기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 보통 부모의 3년 상을 마친 후 나이가 어리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는 적게 분배되거나 제외되는 경우도 있었다. <별급문기>는 조부모, 부모, 외조부모, 처부모 등이 내외 혈손에게 재산을 일부 나누어 준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경우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달리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호구단자, 보물 901호, 숙종 16년(1690). 호적 작성을 위해 호주가 기록하여 관에 제출하던 문서이다. 오늘날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준호구와 동일한 내용의 효력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호패, 조선시대, 16세 상이 남성이 소지했던 신분증.

SANYO DIGITAL CAMERA복숭아 모양 은술잔, 조선시대. 은을 재료로 만들어진 복숭아 모양의 술잔. 2개 한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 닭실마을에서 전통혼례식에 사용되었던 물품이다.

SANYO DIGITAL CAMERA호패를 걸었던 고리와 호패.

SANYO DIGITAL CAMERA의관 혁대.

SANYO DIGITAL CAMERA서적을 발간했던 목판.

SANYO DIGITAL CAMERA충재 권벌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충재박물관.

<출처>

  1.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2. 문화재청, 201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충재박물관] 충재 권벌의 생애 – 충재일기(보물261호), 권벌 종가 고문서(보물901호) 외

충재 권벌 종가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많은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충재일기(보물 216호)는  그가 승정원 등 중앙관직에 재직할 때 쓴 일기로 임진왜란 이전 역사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종가에서 소장한 고문서(보물 901호), 전적(보물 896호)에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각종 문서들로 과거시험지, 과거합격자 명단, 합격증, 각종 사령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종가에는 전국 여러 종가들 중에서도 많은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박물관에 이를 잘 정리하여 공개하고 있어, 후손들이나 방문객들에게 그의 삶을 잘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충재 권벌은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로 사관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기묘사화에 화를 입기도 했으며 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평안도 삭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중기 사림의 등장시기를 대표하는 문신 중의 한명으로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봉화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SANYO DIGITAL CAMERA충재일기, 보물 261호, 중종 2년(1507) ~중종 13년(1518). 충재 권벌이 예문관, 승정원 등의 관직에 있을 때 쓴 자필일기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쓴 승정원 일기등 주요 문서가 소실되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중종조의 학자이며 관료인 충재 권벌(1478∼1548)이 직접 손으로 쓴 일기이다. 권벌은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파면당하기도 했다. 후에 다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일기의 내용은 권벌의 문집인『충재집』에도 실려있으며,『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도 기초자료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이와같이 당시 관료로서 생활의 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는『승정원일기』가 남아있어 그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선조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유희춘의『미암일기』, 이이의『석담일기』와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더구나 뛰어난 권벌의 필체와 문장만으로도 매우 소중히 여겨지는 기록이다. (문화재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충재일기, 보물 896호, 중종 9년(1514) ~ 중종 10년(1515). 충재 권벌이 영천군수로 재직할 때 쓴 쓴 자필일기로 개인 생활과 지방관직으로 근무할 때의 사회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충재일기, 관직에 근물할 때나 재야에 있을 때 쓴 것으로, 그 높은 중요도로 인해 실록편찬시 참고되었던 것들이다.

충재선생과 사화
충재선생은 관직에 재직하면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라는 두번의 큰 사화를 겪게된다. 두번의 사화시기 충재선생은 결코 특정세력에 얽매이거나 이익을 위해 의를 버리지 않았으며, 올바른 시각으로 정국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 사화에 휘말리게 되었고, 을사사화 때는 소윤일파의 불순한 전횡에 대해 비판하고,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대신들을 구명하기 위해 애쓰다 다시 화를 입게 된 것이다. 을사사화로 인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마침내 올바른 재평가와 함께 복권 및 증직이 연이어지게 되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정덕2년 3월 문무잡과 방목, 보물 896호, 중종2년(1507). 문과.무과.잡과 세 개과의 합격자 명단을 적은 것이다. 을해자본으로 인쇄된 서적 중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판본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시권, 보물 901호, 당시 충재선생이 과거시험에 제출했던 답안지라고 하며, 당시에는 과거응시자에게 답안지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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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패, 보물 901호, 중종 2년(1507), 과거의 최종합격자에게 내어주던 증서, 충재선생이 조선 중종 2년 별시문과에 병과 제이등으로 합격한 하사받음.

SANYO DIGITAL CAMERA교지, 보물 901호,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던 사행문서.충재선생 관직 이동시 받은 사령장이다.

SANYO DIGITAL CAMERA 교지, 보물 901호,

SANYO DIGITAL CAMERA유서, 보믈 901호, 중종33년(1538), 관찰사, 절도사 등의 부임시, 징병할 수 있는 밀부를 내리는 국왕의 명령서, 중종이 경상감사인 충재선생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내린 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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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 보물 901호, 중종 34년(1539). 승정원을 통해 발급된 왕의 명령서이다. 중종34년 충재 권벌이 개종계주청사(사신)로 명나라를 방문할 때 받은 유지이다.

SANYO DIGITAL CAMERA광국원종공신녹권, 보물 896호, 선조 24년(1591). 나라에서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증서. 선조 24년(1591) 국가에 이바지한 공으로 인해 충재선생에게 내린 녹권. 충재선생 사후 43년만의 일이다.

SANYO DIGITAL CAMERA교지, 보물 901호, 선조 24년(1591), 그의 사후 선조때 영의정에 추증한다는 왕의 명령서인 교지이다.

SANYO DIGITAL CAMERA교지, 보물901호, 선조 1년(1568). 그의 사후 부인인 최씨에게 남편의 직에 따라 정경부인으로 증직하는 교지이다.

충재 권벌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허, 호는 추쟁.환정, 시호는 충정이다. 연산군2년(147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과 삼사 및 승정원과 각 조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 관직에 재직할 때는 대의를 위해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화를 연이어 입었다. 특히 을사사화 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을 위시한 소윤 일파의 전횡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삼대신을 구하는 논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당시 올린 ‘충순당입대계사’와 ‘논구삼신계’는 그 내용이 너무도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출처>

  1.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2. 문화재청, 201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충재박물관] 당대 문인들과 교류 – 근사록(보물262호), 권벌 종가 전적(보물896호), 권벌 종가 유묵(보물902호)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충재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중 권벌이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한 흔적을 보여 주는 유물들이다. 수진근사록 (보물262호)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중종과 관련된 고사가 있으며, 정조의 어제서문이 있다. 권벌 종가 전적(보물 896호)는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적으로 약 3,000책이 소장되어 있다. 권벌 종가 유묵(보물 902호)는 권벌이 살았을 때 써 둔 필적을 모아둔 것으로 명필 김구의 초서체 족자, 퇴계 이황의 서첩, 미수 허목의 글씨 등이 있다. 이외에 당대 문인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로 퇴계 이황이 쓴 청암정 현판에 걸린 시, 명나라에서 가서 당대의 명필로부터 받은 글씨 등 다양한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볼 수 이다.

SANYO DIGITAL CAMERA전서체의 대가인 미암 허목이 쓴 ‘청암수석’ 현판 글씨(보물 902호). 청암정 마루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이다.

SANYO DIGITAL CAMERA청암정제영시, 퇴계 이황이 청암정을 주제로 지은 시를 적은 현판. 원래 청암정 내부에 걸려 있던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석천정사제영시, 충재선생의 장남인 권동보의 시로 석천정사를 주제로 읊었다. 석천정사 내부에 있던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석천정사현판

SANYO DIGITAL CAMERA수진근사록, 보물 262호, 고려때 제작되었으며, 충재선생의 수택본 근사록이다. 중종임금과 관련된 유명한 고사가있는 책이며, 정조의 어제서문이 있다.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요약해 놓은 문서로 초기 성리학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근사록』은 송나라 유학자인 섭채가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주돈이의『태극도설』과 장재의『서명』등 중요한 문헌만을 골라 만든 성리학의 독본이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당시 뛰어난 성리학자인 박상충이 진주목사로 부임하는 이인민에게 선사한 것이다. 이 책은 판식이나 자체로 보아 원판을 보고 다시 새긴 것으로 보인다. 권발이 애독하던 것으로 늘 소매에 넣고 다녔으며, 중종 때에는 경연에서 강의까지 하던 것이다. 고려본이 희귀한 상황에서 중국판을 따라 다시 새긴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조선시대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반드시 정독해야 할 도서이다. 특히 정조가 친히 머리글을 지어서 붙였다는 것만으로도 더욱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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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진묵(보물 902호). 조선전기 4대 명필 김구의 친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예조참판에서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가는 충재선생에게 써서 준 글이다.

SANYO DIGITAL CAMERA장필진묵, 보물 902호, 중국 명 홍치년간(1465~1504). 중국 명나라 문장가이며 초서의 대가로 불리던 장동해가 직접 쓴 글씨이다. 권벌이 개종계주청사(사신)로 명나라 연경에 갔을 때 구해온 진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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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자 족자, 충자선생께서 중국 사신으로 다녀올 때 받아온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권벌수적, 보물 902호, 태종 ~현종, 충재 권벌의 자필간찰 및 황보인, 이수광 등의 필적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원장고적, 보물 902호, 선조 ~ 현종. 삼계서원과 관련된 자료, 현종의 사제문, 김성일, 정구의 간찰, 정탁의 제문 등 4편으로 구성됨

SANYO DIGITAL CAMERA유향설원, 보물 896호, 성종 24년(1493). 충재선생이 가정 신묘(1531)에 감사 임사균에게 받은 것으로 한나라 유향이 중국 고금의 기문과 일화들을 20편으로 엮은 책이다.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룰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이 책은 중종 26년(1531)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지 뒷면에는 그 해에 감사 임사균이 권벌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권머리의 첫장 하단에 소장자의 도장이 찍혀 있다. 하지만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판독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주자대전, 보물 896호, 중종 38년(1543년).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희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 충재선생이 좌참찬으로 재직할 때 받은 내사본이다.

이 책은 중종 38년(1543)에 왕이 당시 좌참찬 권벌에게 하사한 것이다. 표지 뒷면에는 내사기(內賜記:임금이 신하들에게 책을 주면서 쓴 언제 누구에게 무슨 책을 주었다는 기록)가 있고, 첫장 상단에 내사인이, 하단에는 ‘권두인’이란 소장자의 도장이 찍혀 있다. 현재는 전질 가운데 5책이 빠져있다.  (문화재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근사록, 보물 896호, 숙종조. 송나라의 학자 주희 등이 주무숙, 정명도, 정이천, 장제 등의 저서나 어록에서 일상 수양에 긴요한 장구를 모아 엮은 책이다. 영조가 충재선생의 6세손 권만을 통해 충재종택에 하사한 책이다.

중국 송(宋)나라의 주희·여조겸 등이 함께 편찬한 것으로, 주돈이·정호·정이·장재 등의 말에서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을 뽑아 편찬한 것이다. 책 표지 안쪽면에 영조 22년(1746) 남태온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쓴 「내사식기(內賜識記:임금이 신하들에게 책을 주면서 쓴 누구에게 무슨 책을 언제 주었는가에 대한 기록)」가 있고, 권 머리에 정조 18년(1794) 서영축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쓴『어제충정공권벌수진근사록(御製忠定公權벌袖珍近思錄)』과, 영조가 권벌의 옛집에 내린 『근사록』을 가져다 보고 감회를 적은 것으로 서영보를 시켜 책머리에 붙여 권벌이 예전에 살던 집에 되돌려 보낸 것이다. (문화재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심경, 보물 896호, 경종조. 정조가 근사록과 함께 충재종택에 하사한 책이다.

중국 송(宋)나라 영종 때의 문신 진덕수(眞德秀)가 심(心)에 대해 논한 성현들의 격언을 모으고, 또 여러 선비들의 섬세하면서도 주요한 의논을 모아 주석으로 삼은 책으로,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정조(正祖)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수정한 『수진심경』을 구현한 바가 있었다. 정조는『심경(心經)』과『근사록(近思錄)』은 의례(依例)가 서로 반대되는 책이고, 권벌과 이황의 수진사적(袖珍事蹟) 또한 서로 비슷하다 하여 특별히 『심경(心經)』도 아울러 충재(沖齋)가 예전에 살던 집에 내린다고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문화재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충재선생문집, 조선시대, 목판본. 충재선생의 글과 교류했던 유명인사 및 후대의 명사들의 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1.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2. 문화재청, 201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영주 무섬마을, 무섬자료전시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에 있는 자료전시관이다. 조선후기에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내력을 설명해 주고 있는 곳이다. 마을은 삼면이 내성천에 접해 있어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의미로 무섬마을이라 불린다. 마을에는 해우당고택을 비롯하여 규모가 큰 저택을 비롯하여 까치구멍집, 겹집 등 다양한 형태의 한옥들이 남아 있다. 전시물들은 마을이 배출한 주요 인문들이 남긴 글,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집에 걸었던 현판 원본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섬마을 남쪽 끝에 위치한 자료전시관. 마을의 오랜 내력과 각 집안에서 소장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휘도는 물길 위에 쓰여진 무섬의 역사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1642~1793년)가 이 마을에 들어와 만죽재를 건립하고 터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무섬의 서편 건너 마을인 머럼에 거주하던 박수가 현종 7년(1666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후, 그의 증손서인 선성김씨 김대(1732~1809년)가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두 집안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인구가 늘면서 구한말에는 120여가구에 주민 500명이 살았을 만큼 번성했지만,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주민들의 이농이 늘면서 마을의 규모가 점차 줄어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시행한 ‘영남 북부 유교문화권사업 정책’으로 전통마을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되찼았다. 현재 마을에는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하여 총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100년이 넘는 고택도 16동이나 남아 있어 조상들의 자치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무섬마을 모형. 내성천이 3면을 휘감아 돌아가고 있어 작은 섬이나 반도같은 형세를 하고 있다. 마을 집들은 내성천을 향한 서남향을 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 무섬마을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아 흐르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학 상으로는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습의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 형국이라 하여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힌다. 무섬마을은 태백산 줄기인 학가산의 수려한 구릉에 안겨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 서쪽 앞을 지나는 내성천이 주된 경관을 이뤄 대부분의 주택이 강을 향하여 배치된 서남향 집이다. 강과 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해서다. 또 무섬마을에는 우물이 없다. 풍수리학 상 우물을 뚫으면 마을이 가라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식수는 빗물을 모아두거나 강에서 얻었다고 한다. 자연지리적인 길지를 최대한 활용하되,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자연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던 무섬 사람들, 이처럼 무섬마을은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마을을 조성했던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길지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만죽재 행장, 1900년대 초, 김동진

OLYMPUS DIGITAL CAMERA박제연 시지, 1840년

OLYMPUS DIGITAL CAMERA만죽재 문방사우

선비의 삶을 살았던 무섬 사람들
무섬마을을 개척한 반남박씨 박수와 증손서인 선성김씨 김대는 고아한 선비로서, 관계에 나아가지 않고 천혜의 고장인 무섬마을을 개척하여 후손들을 위해 터전을 마련하였고, 그 후손들 또한 선대의 유훈을 이어받아 유학에 정진하면서도 부지런히 땅을 개척하며 벼슬길에 초연하였기 때문에 자손들이 번성하고 부를 축적하며 명실공이 지역 내에서 으뜸가는 집성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양성의 입향조들의 사상이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심성을 길러 도리를 다하며 수신제가에 힘썼다. 자손들 또한 벼슬길을 마다하고 오직 향리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학문에만 정진하며 시끄러운 세상을 멀리하고 살아왔기에 크게 출세하거나 세상에 명성을 떨친 사람이 드물었다. 이와 같은 선비 정신이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비록 쇠퇴하기는 하였지만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품격 높은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김담 문과중시교지, 1445년

무섬마을이 배출한 선비들
무섬 사람들은 입신양명과는 거리가 먼 유교적인 삶을 살았지만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다. 헌종 6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역임한 박제연과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락풍, 고종 2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지낸 김휘병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음보(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을 하는 것)로 직함을 가진 사람이 선공가감역을 지낸 김영종 외에 몇 명이 있으며, 실제 행직으 ㄹ수행한 사람은 구한말 궁내부주사를 지낸 김휘돈과 판임관을 지낸 김광규 두 명이었다. 또한 향리에서 실시하는 초시(생원 진사과)에 합격하여 진사를 역임한 사람이 4명이고, 문행이 뛰어나 후학을 양성했던 섬계 박제익, 만죽 박승훈, 동계 김휘택, 수촌 김승학은 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문절공 김담에 대한 완문, 1955~1881년

OLYMPUS DIGITAL CAMERA섬계회화록, 1700년대 말, 박세인

박제익(1806 ~ 1841년)
자 학중, 호는 섬계이다. 박수의 5대 주손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사서삼경을 소년의 나이에 완성하였다. 영주시에서 복원한 만죽재 내에 있는 섬계초당은 당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서당으로 만죽재의 이전 당호는 섬계초당이었다. 섬계 박제익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섬계회를 주최하여 계회에 참석한 선비들과 시문을 나누었다. 일찍 돌아가셔서 후학의 계보는 잇지 못하였으나 후대에 미친 글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문장이 영남일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벼슬보다는 바는 선비로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집경루관련 홍의호의 글, 1797년, 홍의호

OLYMPUS DIGITAL CAMERA만죽재 현판 원본, 1800년대, 박기양

OLYMPUS DIGITAL CAMERA박제연 병조참판교지, 1886년

OLYMPUS DIGITAL CAMERA박제연 시지, 1840년

OLYMPUS DIGITAL CAMERA오헌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김홍규 진사백패, 1888년

OLYMPUS DIGITAL CAMERA김홍규 과지, 1888년

OLYMPUS DIGITAL CAMERA해우당 현판 원본, 1865~1879년 사이, 흥선대원군

OLYMPUS DIGITAL CAMERA4언절구시집, 1940년대, 박찬상

OLYMPUS DIGITAL CAMERA반남박씨 종택인 만죽재 뒷편에 있는 섬계초당.

선비문화와 계회
무섬마을은 예로부터 지역의 선비들과 계회를 통해 교류하며 친목을 도모하고 학풍을 진작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임활동을 했다. 그 대표적인 계회는 섬계회가 있다. 만죽재(구 섬계초당)에서 시작한 섬계회는 300년을 지난 현재도 그 후손들이 매년 입하일에 모임을 가지며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9개 문중으로 구성된 섬계회 회원들은 선대가 만든 섬계회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기로 최근에 결의하였다. 섬계회 계원은 양반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아들이 회원자격을 이어받아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용추계도 아름다운 용추폭포 등지에 모여 춘추로 회합하여 시문작성 등의 활동을 하였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규방가사, 1800년대

무섬마을의 규방가사
18세기 이후 영남지방 양반가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다가 6.25전쟁 이후 거의 사라진 가사로 내방가사.규중가도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남도 일대에서 많이 지어졌으며, 영남대가 내방가사에서 온 말이다. 조선후기 부녀자들에 의해 지어져 전해진 가사의 총칭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예술성이 잘 표현되어진 조선 여류문학의 한 전형이다. 작자와 연대가 미상이 작품이 대부분이나, 조선시대의 문헌에 있으며, 특히 영남지방에서 성행하였다. 부녀자가 주로 창작하고 영창했던 한글로 된 가사체 시가로서 주제와 소재는 부녀자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여 풍류가류(아름다운 경관이나 기쁨을 노래하는 글), 기행가류(여행하면서 글을 지음), 계녀가류(시집가는 달에게 당부하는 글) 등의 유형이 있었다. 무섬마을에는 유교적인 덕목에 따라 살며 친지간의 우애, 삶의 희로애락 등을 표현하는 규방가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북쪽에  일제강점기 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아도서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역독립운동가의 산실, 아도서숙
충절의 고장 무섬마을에서 가장 이름을 빛낸 것은 애국지사들의 활동거점이던 ‘아도서숙’이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반도 내의 수도리의 줄인 말이고 ‘서숙’은 옛날 서당을 가리키는 말로, 1928년 10월에 열어 1933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을 때까지 무섬마을의 교육기관이자 지역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에 갔던 김화진은 취학을 하지 않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약 중 영주 청년동지들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 공회당인 서숙은 교황 등지에서 청년운동 중인 김성규, 김용한, 김광진, 김계진 등이 모의하여 9명의 운영위원을 선출하여 공회당을 건축하고 ‘모임의 장소, 배움의 장소, 단결의 장소’로 ‘아도서숙’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 이후 문맹퇴치,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여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쳐나갔다. 아도서숙 운영위원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검거와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무섬마을의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아도서숙’은 아쉽게도 현재 빈터만 남아 있으나 복원 예정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무섬마을 반남박씨 입향조가 살았던 만죽재고택. 전형적인 ‘ㅁ’자형 공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의 특징

‘ㅁ’자형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
무섬마을의 전통가옥은 ‘ㅁ’자형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를 띤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이 사방을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어 대문 밖에서는 집안의 생활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고, 안채를 사랑채보다 높게 지어 햇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게 하는 것이 특징인데, 유교적 격식을 엄격하게 거주환경에도 적용한 결과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집주인 신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 사랑채 기둥과 서남향 고가
안채와는 달리 사랑채는 밖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무섬마을 전통가옥들은 그 집 주인의 신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사랑채의 기둥을 차별화했는데, 같은 양반이라도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벼슬을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집주인의 신분에 따라 사랑채 모양을 달리한 무섬마을의고가는 대부분 서남향이다.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산맥의 정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기 위해 가옥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옛 강원감영(사적 439호)에 있는 강원감영 사료관이다. 이곳에는 강원감영의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구성과 모습, 관찰사의 임무 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원주 도심에 있는 강원 감영 건물들은 원래 위치에 원형에 가까운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며, 사료관에는 전시유물이 많지 않지만 관찰사가 근하던 감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사가 어떤 일을 했는 잘 정리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원감영 행각건물에 있는 강원감영 사료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료관 내부. 전시유물이 많지 않지만 강원감영 역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강원감영 사료관
강원감영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간 (1395~1895)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원주에 강원도를 관할하던 감영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실제 일하던 구성원들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일제시기 사진자료에 실려 있는 감영의 옛 모습, 그리고 1887년 4월 오횡묵 정선군사가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의 감영 전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또한 2000년 감영터를 발굴할 당시 출토된 많은 유물들 중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평통보, 비녀와 수저, 나막신과 쌍육 및 기와류, 백자접시와 토기향로를 비롯한 자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사료관 옛 감영의 건축물 중 행각 건물에 해당한다. 행각은 일반적으로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건물로 감영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나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강원감영 모형, 관찰사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궐패를 모신 객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작은 도성 감영
강원감영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포정루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감영 외곽에 세워져 있는 4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에 세워져 있는 4대문은 각각 수명면(동문), 취적문(서문), 진남문(남문), 공북문(북문)이라 했는데, 이 4대문의 경계가 곧 강원감영에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이 되고, 여기를 지나 관찰사가 일하는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에 도착하게 됩니다. ‘포정’이란 원래 중국 명나라에서 각 지방을 통치하는 기구였던 포정사에서 연유한 말이지만 여기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관찰사가 강원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좋은 일을 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어려워지면 도와주는 등 뭇 사람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포정루 건립과 함께 17세기 후반부터 강원감영에는 선화당과 관풍각, 감사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집무실, 창고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750년에는 31동 509칸, 1870년에는 33동 454칸, 1875년에는 43동 459칸, 1891년에는 55동 670칸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감영 내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은 각기 고유한 기능과 용도가 있었는데, 각 건물은 당.사.각.누.청.방.문.창.고 등의 명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전궐패를 모시고, 손님이 묶었던 객사, 관찰사의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내아, 후원에 있던 봉래각과 부평각, 관풍각, 환선정, 군사시설인 중영, 화약고, 군기고, 구냥고 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이 일하는 군뇌방,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이 있었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역대 강원도 관찰사 명단.

OLYMPUS DIGITAL CAMERA관찰사 신완의 편지, 조선시대 1646~1707년

OLYMPUS DIGITAL CAMERA관찰사 서명선의 편지, 조선시대 1728~1791년

관찰사
조선의 왕이 각 도의 책임자로 보낸 관리를 당시에는 관찰사 또는 감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한 행정권과 사법권, 군대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고, 1년에서 2년 정도에 걸쳐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목, 군, 현을 다스리는 수령이 어떻게 백성들을 돌보고 있는지 살려보았습니다. 이렇게 관찰사가 여러 곳을 살펴보며 돌아다니는 일을 순력이라고 합니다. 여름에는 주로 용동지역인 강릉과 삼척에 머물렀고, 봄.여름.가을.겨울에는 춘천과 원주에 있었답니다.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는 원주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감사의 임기도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는데, 이때 선화당을 비롯하여 감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건축됩니다. 관찰사는 주로 원주의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때때로 순력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이라고 부릅니다. 관찰사는 높은 지위와 그만큼의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품계라고 하는데, 종2품 이상의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다른 부서에 있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또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관찰사로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강원도 각읍무변이력성책, 조선시대, 원주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글씨 새긴 암키와, 조선시대 1760년, 강원감영 내아터, 내아상량기, 조선시대, 강원감영 내아

OLYMPUS DIGITAL CAMERA여러무늬 수키와 조선시다, 강원감영 포정루

강원감영
강원감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방관청입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여덟 개의 도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8도 아래에는 더욱 작은 지역으로 오늘의 ‘시’나 ‘군’과 같은 ‘목’과 ‘군’, ‘현’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각 도의 관찰사는 왕을 대신하여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이 곳 강원도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과 함께 전국 팔도의 한 행정구역이며, 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 전체를 다스렸던 관찰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강원감영은 1665년(현종 6) 선화당이 세워지면서 많은 관리들이 일하는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1895년 당시에는 총 57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감영에는 관찰사가 일했던 선화당,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거쳐가야 했던 중삼문과 내삼문, 관찰사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행각과 내아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신분증명패, 조선시대

관찰사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한해의 농사
관찰사가 순력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무었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풍년일 때는 사람들의 경제생활에 여유가 있게되고,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울수록 나라의 살림 또한 풍족해지기 때문입니다. 풍년일 때는 사람들의 경제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고,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울수록 나라의 살림 또한 풍족해지기 때문입니다. 흉년일 때는 반대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고, 나라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쳐야 했습니다. 실제 관찰사가 매달 왕이 있는 중앙에 보고하는 문서에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강우량, 즉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에 대한 측정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작물의 생산량응 얼마나 되는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예전보다 더 넓어지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조사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농경과 함꼐 전국 각 지방의 관청에서는 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물에 대해서도 매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가거나 오는 전입.전출 현황, 주소지 변경과 출생.사망 신고 등 인구의 증감 사항에 대한 통계도 주기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휴대용업무편람, 조선시대

영아전과 무임, 기술직 장인
감영에는 감사와 중군 및 영리를 보조해 주는 비서격의 업무를 보던 영아전, 각종 군사 및 경찰업무를 담당했던 무임,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장인 등의 사람들이 함께 일했습니다. 영리는 감영의 6방 행정사무를 담당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내 26개 군현중 14개 군현에서 뽑힌 120명의 영리가 감영에서 교대로 일했다고 합니다. 영아전은 영리와 비슷한 사무를 담당한 이들로 감영이 소재한 곳, 즉 원주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충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영 내에서 각종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무임이나 장교, 관노비도 대부분 감영 소재지에 거주하였습니다. 강원감영에는 군관 3명, 화사 1명, 사자관 1명, 집사 16명, 지인 51명, 사령 26명, 군뢰 27명, 세악수 10명, 관노 42명, 관기 19명, 영비 9명 등이 있었고, 이 사람들은 집사청이나 관노청, 비장청, 영노청 등에서 각기 배정된 역할과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심약과 검율
심약은 관찰사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종9품관인 심약은 주치의처럼 감사의 건강과 질환을 살펴보았고, 관찰사의 순력에 동행하면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바치던 삼을 책임지기도 했고, 매년 1원부터 10월까지 여러지역의 약재를 모아 중앙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원감영의 옛 건물 중에는 심약이 머무는 심약당, 약재를 모으는 채약방, 인삼을 보관하는 보살고 등이 있습니다. 재판을 하는 관찰사에게 법률적인 조언과 자문을 해주는 검율도 있었습니다. 종9품관인 검율은 관찰사의 법률 보좌관으로 법률의 해석과 적용, 집행에 대한 사무를 책임지며, 법규와 형벌 집행을 도왔습니다. 즉 관찰사가 범죄사건을 처리할 때 사건내용을 잘 살펴서 처리하는 방법을 자문하는 역할을 했답니다. 감영 내에서 검율이 머무는 곳은 검율당이라 합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비장과 중군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는 관찰사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을 함께 파견하였습니다. 정6품이나 종5품의 도사, 정 3품(무관)의 중군, 종4품의 경력, 판관 등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관찰사의 참모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을 비장 또는 막료라고 불렀습니다. 비장은 거두어들인 곡식 장부를 감시하거나, 관찰사를 대신해서 강원도 내의 농사 형편을 살피기도 했고, 식량이 모자라는 봄철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도 했답니다. 비장청은 8명에서 1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됩니다. 중군은 관찰사의 안전을 담당하거나 군사업무를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 중군은 2년의 임기동안 관찰사를 보좌하고 감영에 있는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또 중군을 보좌하는 군관이 2사람, 그 외 29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업무를 도왔는데 이들은 군대와 관련한 업무와 더불어 치안을 담당한 오늘의 경찰이나 검찰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영리와 영노비
감영에는 오늘날 도청의 공무원과 같이 강원도에 사는 백성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각종 문서와 서류, 세금업무 등을 처리하던 영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원도 각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지방의 향리들 중 한 사람씩을 뽑아 임명하였습니다. 영리는 감영의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로 관찰사의 명령을 받아 각 지방 수령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얼마나 잘 살피고 있는지를 감시했고, 관찰사가 순력할 때는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실질적인 감영의 업무는 중앙의 6조가 있는 것처럼 6방으로 나누어 영리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방에서는 주로 인사와 비서의 업무를, 호방에서는 세금과 농사 등에 관한 업무를, 형방에서는 재판과 죄인, 감옥에 관한 업무를, 끝으로 공방에서는 수공업과 건물의 건축 수리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방에는 비장이라고 하는 수장을 두었으며 호방과 이방, 형방의 우두머리를 삼공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영노니븐 감영과 병영에 소속된 노비로 건물을 새로 짓고 수리하는 일, 창고를 지키는 일, 군량을 운반하는 일 등을 맡아 하였고, 대략 31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군사훈련과 재판
관찰사는 나라의 정책을 시행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역할과 함께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군사 훈련에도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래서 매월 군사훈련을 시행한 결과를 중앙에 있는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군사훈련을 당시의 표현으로 조점.합조라고도 했는데, 원주에서 치악산을 무대로 산성에서 훈련을 실시했다고 하니다. 강원감영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에는 군사훈련에 사용된 무기를 보관한 군기고, 화약을 보관한 화약고, 군인들의 식량을 보관한 군향고 등 군대와 관련한 건물이 확인됩니다. 오늘날 법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논쟁하는 가운데 판사의 결정으로 옳고 그름이 가려지는 것처럼 관찰사는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도둑질을 하거나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조정하고 판결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감영에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고, 관찰사의 판결과 심문에 따라 곤장을 맞기도 하고, 금전으로 배상을 하기도 했으며, 무거운 죄를 짓거나 자신이 저지를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옥살이를 했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 과거시험 우등답지 묶음, 조선시대 1844년, 원주역사박물관

감영 향시 주관
조선시대에 지방에 사는 지식인이나 양반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향시(문과향시, 무과향시, 생원지사시 초시)를 거쳐야 했습니다. 즉 강원도내의 응시자들이 과거를 보려면 감영이 있는 원주로 모여야 했고, 감영에서는 향시를 준비하고 시행하였습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감사는 도회소라는 ‘과거시험준비-시행위원회’를 설치하여 과거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도회소 주관 아래 경시관, 도사 등이 감사가 지정한 문신 수령인 참시관 2인과 함께 과거를 준비하고 채첨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시험을 치르기 전 녹영소를 통해 응시자 본인에 대한 확인 및 증명서 발급의 업무가 있었습니다. 녹영소는 별도 기관이 아닌 임시기구였으며, 행정자료인 호적을 함꼐 대조해야 했기 때문에 감영이 이를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의 예비시험인 조흘강도 감영에서 시행되었는데, 감사는 생원지사시 초시, 문과 초시, 무과 초시 등의 향시를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속업무 또한 관장하였습니다. 응시자와 합격자의 성명 및 인적사항의 보고, 과거 시험으리 과정인 초장-중장-종장이 실제로 어떻게 시행되고 몇명이 몇 장의 시험지를 제출하였는가와 관련한 보고, 우수 답안지의 편집 및 보고 등은 무도 감사가 담당하였습니다. 감영에서 이루어진 과거시험(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등을 상세하게 적은 명단을 ‘사마방목’이라 하는데, 태조 때부터 1894년까지 치러진 총 230회의 시험결과늘 보면 전체 47,997명의 합격자 가운데 원주에 거주한 사람이 57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전국에서 네번째로 많은 합격자수를 보여주는 내용인데, 그마큼 원주의 향학열이 높고 지역에 우수한 인재가 많았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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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중심도시 원주
원주에 강원도 전체를 다스리는 강원감영이 설치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첫째로 원주는 중앙에 있는 왕의 명령이 가장 신속하게 전달되고 또 그 명령을 강원도에 속해 있는 다른 각 지방으로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원주지역이 강원도에서 인구와 토지면적이 가장 풍부한 지역으로 도시의 규모가 그만큼 컸기 때문에 강원도 곳곳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기 편리한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편했습니다. 일례로 육로와 함께 남한강 물길이 서울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강원도 각지방에서 거두는 대부분의 세금을 이곳 원주에서 모아 서울로 옮겼습니다. 이곳 원주에 강원감영이 자리잡은 이유는 바로 서울과 강원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고, 또한 강원도 내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오는 물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으며, 강원도 전체를 책임진 강원감영이라는 국가 기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주지방은 강원도 행정의 중심으로 기능한 동시에 역사적을 조선시대 이전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는 물론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 권역과 군사 배치 권역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원주는 고구려 때에 신라와의 대치 관계 속에서 국원성을 지키는 주요한 중심지역으로 평원군이라 불렸고, 통일신라시대에는 5소경의 하나인 북원경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5도양계의 지방제도에서 양광도에 속하는 영군 중 하나로 수령이 펴건된 원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래 전부터 국가의 지방통치제도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원주가 변함없는 행정적.군사적 요지로 주목받아왔던 사실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