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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박물관] 담인복식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 복식과 관련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담인복식미술관이다. 이 대학 의류학교 교수를 역임한 장숙환 교수가 기증한 유물들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복식은 사대부 계층이 평상시에 입었던 심의(深衣), 관리의 복식인 단령(團領), 국가적인 행사에 입었던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을 비롯하여 궁궐 여인들이 입었던  적의(翟衣), 혼례나 진연, 진찬 등 경사스러운 날에 입었더너 원삼과 활옷, 당의 등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예복과 장신구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예치(禮治)를 지향한 국가로서, 오례에 따라 정비된 국가 전례(典禮)의 시행을 통해 정치가 이루어졋다. 이러한 국가적 의식을 행할 때에는 신분과 절차에 따라 격식을 갖추었는데, 복식은 그 예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예복은 당시 사회질서와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 관리의 예복은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되어 왔다. 조선 초기에는 명의 예복을 그대로 수용하여 왕은 대례복으로 면복(冕服)을 입고 왕비는 대수삼(大袖衫), 하피(霞帔)를, 관리는 관복으로 단령(團領)과 복두(幞頭)를 착용하였다. 그러나 청이 들어선 이후 유교문화의 정통성을 강조한 조선중화주의 의식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예복은중국과는 달리 독자성을 띄게 되었다. 또한 사대부 남성들은 평소에도 유학자로서 몸가짐을 바로하기 위해 유교 법복인 심의(深衣)를 즐겨 입었다. 한편 조선후기 왕실 여인들은 명대 여성예복을 참고하여 만든 적의(翟衣)를 대례복으로 착용하고, 혼례나 진연, 진찬 등 경사스러운 날에는 원삼과 활옷, 당의 등의 우리식으로 꾸민 예복을 갖추었다. 이러한 예복에는 착용자의 계급과 그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상과 무늬가 사용되었으며, 여기에 적절한 장신구로 의식의 권위와 화려함을 더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왕실의 의복과 관복을 비롯하여 여려 의식에 착용된 다양한 예복과 장신구를 선보인다. 복식을 통해 의례의 위엄과 의미를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나타내었던 선조들의 미감을 살펴보고, 문양과 색채 속에 유교적 가치에 기초한 이상적 인간상과 삶에 대한 통찰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0_162835-20160120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사대부 유학자들이 평소에 입고 생활했던 복식인 심의(深衣)이다. 소박하면서도 단정하고 절제된 마음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심의(深衣)
심의는 유학자들이 법복으로 유교이 철학적 의미가 담긴 옷이다. 웃옷과 치마를 허리선으로 연결한 형태로 4폭으로 된 웃옷은 사계절을, 12폭으로 된 치마는 12달을 의미한다. 깃과 수구, 도련에는 검은 선을 둘렀으며 허리에는 심의대를 하고 그 위에 조대(條帶)를 늘였으며, 머리에는 복건을 썼다. 사규삼(四揆衫)은 관례 때 입었던 예복의 하나로 맞깃에 소매는 넓고 옆선이 트여있는 포(袍)이다. 깃과 소매 끝, 옷자락 양쪽 가장자리와 아랫 자락에 검은색 선을 대었으며, 선에는 ‘仁義禮智’, ‘壽福康寧’ 등의 문자와 박쥐문양 등을 금박하기도 하였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0_162850-20160120조선시대 여자들의 예복이라 할 수 있는 당의(唐衣)이다.  ’당의’라능 이름을 볼 때 중국 당나라 복식에서 유래한것으로 보이지만 확인되지는 않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착용한 것으로 문헌에 남아 있다.

당의(唐衣)
당의는 조선전기에 예복용으로 입던 긴 저고리가 발전한 것으로 길이는 점차 길어지고 양옆의 트임이 깊어져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형태가 완성되었다. 당의는 소례복으로 궁에서는 평소에, 민간에서는 궁에 출입할 때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입었다. 일반적으로 초록색 비단에 다홍색으로 안을 받치고 자주색 고름에 소매 끝에는 흰 거들지를 달았으며, 비빈의 것에는 금박을 찍고 보(報)나 흉배를 달기도 하였다. 여름철에는 흰색 홑당의를 입었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0_162916-20160120복은공주 활옷(재현품)

활옷(華衣)
활옷은 공주.옹주의 혼례복으로 사용되었던 홍장삼(紅長衫)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에서도 혼례에 한하여 착용하였다. 겉은 다홍색 비단을 쓰고 안은 남색을 대었으며 장수를 상징하는 연꽃.불로초.물결.바위 등과 부귀를 뜻하는 모란, 다산을 의미하는 아홉마리의 봉황과 동자 등 다양한 길상 문양과 二姓之合, 萬福之源 등의 문자를 화려하게 수놓아 복과 장수를 기원하였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0_162931-20160120당혜(唐鞋), 조선 19세기

20160120_162942-20160120화관(花冠), 조선 19세기

20160120_162956-20160120궁궐에서 여자들이 입었던 예복인 원삼(圓衫)이다. 신분에 따라 색상과 문양을 다르게 했는데, 대체로 화려한 색감과 장식을 하고 있다.

원삼(圓衫)
원삼은 둥근 형태의 맞깃이 달린 궁중 예복으로 신분에 따라 색상과 문양을 달리하였다. 왕비는 홍원삼, 비빈은 자적원삼, 공주.옹주는 녹원삼을 입었으며, 대한제국 성립 이후 황후는 황원삼을 착용하였다. 이중 녹원삼은 민간에서도 착용이 허락되어 활옷과 함께 혼례복으로 사용되었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관리들이 관복인 단령(團領)이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단령(團領)
단령은 둥근 깃의 포로 관복으로 입혀졌다. 색에 대한 규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공복으로 입을 때는 복두를 쓰고 손에는 홀을 들었다. 상복으로 입을 때는 사모를 쓰고 가슴과 등에 흉배를 달아 품계를 구분하였다. 조선에서 흉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단종 2년(1454)으로 명의 제도를 따라 문관은 날짐승, 무관은 길짐승 문양을 사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고종 떄에 문관은 쌍학과 단학, 무관은 쌍호와 단호로 바뀌었다. 단령은 서인은 혼례복으로도 허용되었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0_163142-20160120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릴때 입는 관복인 제복(祭服). 조복과 비슷하지만 검은색을 하고 있다.

20160120_163212-20160120조선시대 관리들의 관복이라 할 수 있는 조복(朝服). 국가 경축일에 왕에게 하례를 올릴때 근정전 앞 조정에서 품계석에 맞추어 도열하면서 입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조복(朝服).제복(祭服)
조복은 경축일에 왕에게 하례를 드릴 때나 표문을 올릴 때 관리들이 착용하였던 예복이다. 조복은 금칠한 양관과 적초의, 적초상, 백초중단, 대대, 혁대, 폐슬, 수, 패옥, 밀, 혜, 홀로 구성된다. 품계에 따라 양관의 량의 수, 허리띠와 홀의 재료, 수의 무늬, 패옥의 색상 등을 달리 하였다. 제복은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입었던 옷으로 구성은 조복과 유사하다. 그러나 제관에는 금칠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가장 겉옷인 의(衣)의 색상이 검은 색인 것, 방심곡령을 더한 것이 달랐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여자 장신구
예복을 입을 때에는 머리모양은 크고 풍성하게 보이도록 가체를 더하고, 큰 비녀와 떨잠 등을 꽂았다. 예복에 착용하는 비녀는 일상용보다 길이가 길고 장식 부위인 비녀머리가 크며 파란 장식을 많이 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말기 쪽머리가 일반화된 후에는 비녀와 함께 쪽에 꽂는 각종 뒤꽂이도 더욱 화려하게 발달하였다. 떨잠 또한 각종 보석과 떨새 장식을 달아 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호화로운 의례용 장식품이었다. 이 밖에도 옷에는 노리개를 늘어뜨리고 가락지를 끼고 귀걸이를 걸기도 하였다. 이러한 장신구에는 지조와 절개, 부귀와 장수,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길상 문양으로 복을 비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0_163236-20160120노리개,

20160120_163300-20160120노리개

20160120_163312-20160120
옥비녀, 조선 19세기, 산호비녀, 조선 19세기

20160120_163324-20160120비녀,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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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물보, 노리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3355-20160120
귀걸이, 문자삼작노리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3406-horz-20160120머리꽂이, 조선 19세기

20160120_163416-horz-20160120머리꽂이,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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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쇠 머리꽂이, 조선 19세기

20160120_163445-horz-20160120
머리꽂이, 봉황 머리꽂이, 조선 19세기

20160120_163458-20160120첩지,조선 19세기

남자 장신구
조선시대 사재부 남성들은 알맞은 크기로 상투를 틀어 고정시키는 동곳, 상투를 품위있게 가려주는 상투관, 신분을 나타내 주는 관자와 같은 장식품으로 멋을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머리장신구는 남성들이 관모를 써서 위엄있고 엄숙한 의례복식을 갖추는데 기본이 되었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0_163518-20160120부채집, 나침반 선추, 조선 19세기

20160120_163522-20160120상투관, 조선 19세기

20160120_163528-20160120동곳집, 동곳, 풍잠, 조선 19세기

20160120_163534-20160120관자, 조선 19세기

 담인복식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 담인복식미술관은 1999년 5월 31일 본교 의류학과 장숙환 교수의 개인 소장품 5,000여 점을 기증받아 개관하였다. 기증품은 장숙환 교수의 어머니 담인 장부덕(1908~1967)님의 유품이 기초가 되었고 이후 장교수에 의해 40여년 동안 수집된 것으로 그 모친의 뜻을 기리고자 ‘담인복식미술관’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기증품은 조선시대의 남녀의 장신구가 주를 이루며 이밖에 의복.수예품.목공소품.가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유물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 계층에서 사용되었던 것이 대부분으로 그 당시 상류 사회의 세련되고 우아한 미의식이 배어 있어 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출처>
1. 이화여대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후기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유럽까지 수출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반영되어 조선후기 백자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장식기법이나 문양들이 반영된다. 도자기 표면을 도드라지게 장식하는 기법은 중국에서 만든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까지도 널리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도안들이 길상문으로 조선백자에 받아 들여진다. 도자기 문양을 통해서도 당시 동아시의 문화교류와 흐름을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0160120_165307_HDR-20160120백자양각 무국문 병, 조선 19세기

조선후기 백자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후기 백자에는 중국과 일본 등에서 동시대적으로 발달한 문양들이 새로운 장식 소재로 활용되었다. 기면이 도드라지게 장식하는 양각기법으로 나뭇가에 여러 송이의 만개한 꽃을 표현한 매화문은 중국 명.청대 제작품에도 나타나며, 중국과 조선을 넘어 유럽에서도 애호되었다. 영지초화문이나 보상화당초문, 율문 등 중국 청대와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도안들은 조선에서도 길상문의 일종으로 선호되며 여러 기종에 장식되었고, 다른 길상 문양들과도 섞이며 다채로운 구성을 보인다. 국내 유적에서는 분원 제작품과 함께 중국산과 일본산이 모두 출토되어, 당시의 선호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지역에서 보이는 문양의 유사성은 기법적 특징을 부각하거나 길상적 의미를 담아내는 가운데 도자기 문양의 광범위한 교류와 유행의 흐름을 드러내며, 조형적으로 한층 풍성해진 조선후기 백자의 발달상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326-20160120백자청화 칠보화훼문 사각 병, 조선 19세기

조선후기에 주로 제작된 정사각형 병으로, 바각면에는 ‘무신 경슈궁三’의 점각 명문이 있다. 경수궁은 정조의 두번째 후궁인 화빈 윤씨의 궁으로, 1780년 화빈 책봉과 함께 궁호가 내려졌다. ‘戊申’의 간지 및 병의 양식적 특징으로부터 제작 시기는 1848년으로 추정된다. 옆면에는 소나무 껍질과 비슷하다고 하여 ‘송피릉(松皮菱)’이라고 불리는 창을 넣었다. 2면씩 각기 다른 문양을 구성하여, 한 면에는 송피릉 내부에 칠보문, 외부에 매죽문을 넣었고, 다른 면에는 내부에 화훼문, 외부에는 물 위에 꽃이 떠가는 모양의 ‘화류수문(花流水紋)’을 시문했다. 송피릉과 화류수문은 일본의 에도시대에 걸쳐 유행한 문양들로, 조선후기 백자에 활용된 예는 드물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350-20160120백자청화 화문 화형 잔대, 조선 19세기

윗면의 모양이 옆으로 긴 능화형(菱花形)을 이루는 잔받침이다. 안쪽 면에는 청화로 여러개의 작은 원을 그리고, 원 안에는 꽃을 중심으로 다양한 도안을 구성했다. 일명 ‘환문(丸紋)’으로도 불리는 여러 종류의 원형 도안은 일본에서 에도시대에 걸쳐 의복과 직물 문양으로 유행했다. 각종 공예품에도 장식되었고, 일본 뿐 아니라 명말 청초 중국 경덕진에서 일본의 기호에 맞춰 수출한 숀즈이(祥瑞)자기 등 중국산 백자에도 시문되었다. 이 잔대는 조선후기 백자에 이러한 문양이 차용된 예로 주목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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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연화빙렬문 접시, 백자청화 망목문 접시.잔대, 조선 19세기

빙렬무늬, 그물무늬
구획면 안쪽으로 ‘ㄱ’자 테두리를 두르고 간략한 화문을 넣은 문양 구성은 중국 명대 후기 경덕진과 남방의 민요에서 대량 생산, 수출되던 ‘크락자기’에 연원이 있다. 크락자기는 일본, 동남아, 유럽 등지로 수출된 이래 각지에서 모방, 변형되었고, 조선에서는 주로 19세기경의 제작품에서 동시대 변형 양식의 영향이 보인다. 하나의 밤송이에 3개의 밤알이 놓여 자손번창의 의미를 내포하는 율문은 17세기 중반경 일본의 이마리(離万里) 자기에서 보이며, 국내에도 18세기 후반에 유입되었다. 19세기 분원에서 제작된 발, 접시, 합 등 여러 기종에 시문되었으며, 일본산 백자 역시 국내 유적에서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그물망이 펼쳐져 있는 듯한 문양은 ‘망목문(網目文)’으로도 불린다. 일본의 에도시대에 걸쳐 의복과 염직의 도안으로 애호되며 도자기를 비롯한 공예품의 배경 문양으로도 즐겨 활용되었다. 빙렬문(氷裂文) 또는 빙죽문(氷竹文)으로 불리는 문양은 얼음과도 같이 날카로운 대나무 폭죽이 터지는 모습으로, 귀신을 쫓고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 각종 공예품의 장식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426-20160120백자청화 율문 합, 조선 19세기

20160120_165436-20160120백자청화 율문 접시.발.잔, 조선 19세기

20160120_165447-20160120백자청화 화문 접시, 조선 19세기 서울 종로구 송현동 유적 출토, 백자청화 율문 접시, 일본 19세기~20세기 초, 서울 종로구 송현동 유적 출토, 백자청화 율문 접시, 일본 19세기~20세기초, 서울 종로구 청진동 유적 출토

20160120_165515-20160120조선후기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문양.

20160120_165524-20160120
백자청화 화문 발.잔, 백자청화 화문 접시, 백자청화 만자문 매화문 사각 연적, 백자청화 화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536-20160120백자청화 화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554-20160120청화백자 영지.초화무늬 접시, 발, 조선 19세기

영지.초화무늬
중국 청대 경덕진 민요에서 유행한 보상당초문과 영지초화문은 조선에서도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시문되었다. 보상당초문은 오랜 기간 공예품과 건축물에 장식되었는데, 외곽선을 살려 도안화한 문양의 청화백자가 중국 청대 경덕진 민요에서 대량생산되며 조선에서도 분원의 19세기경 제작품에 나타났다. 염지초화문 역시 중국 청대 경덕진 및 남방의 민요에서 유행한 이래 조선과 일본에서도 모방되었고, 근대기 일본에서는 스텐실 기법으로 대량 시문되며 지속적으로 유행했다. 이들 문양이 시문된 분원 제작품에는 굽 안에 왕실내 사용처를 청화 명문으로 표시한 예도 있어 고급품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여러 유적에서는 분원산 및 중국산과 일본산이 모두 출토되어 광범위한 유행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문양이 된 문자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후기 백자에는 일반인들이 선호했던 십장생같은 길상의 의미를 갖는 다양한 문양들과 함께 문자들도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壽’와 ‘福’이 장식된 청화백자가 관요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져서 궁궐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경향은 명청대에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비석이나 제기 등에 새겨진 글자에 대한 연구와 골동품을 수집하는 상류계층의 취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글자가 새겨진 그릇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20160120_165227-20160120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

이 디자인패널은 본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는 청화백자에 시문되 다양한 서체의 수복자를 조합하여 백수백복도 병풍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백수백복도 병풍은 장수와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壽’, ‘福’ 두 글자를 완전한 수를 의미하는 백자만큼 그려 넣어 8폭 내지 10폭으로 만든 것으로 주로 조선후기 궁중이나 세도가의 잔치에 사용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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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복자문 화형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접시
수복자문을 시문할 때는 내저면의 가운데 글자를 써 넣거나 단선 내지 이중의 원권을 두르고 시문하는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중에서도 원권 안에 글씨를 쓰는 유형은 조선전기에 중국 명대 민요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왕실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조선말기까지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제작되었다. 서체는 초서나 예서 등이 사용되다가 점차 도안화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815-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화형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827_HDR-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유개발.완.접시.종자,
발이나 완, 접시 등 각종 기명의 외면에 수복자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단을 이루도록 배열 장식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명대에 범어를 이와 같이 시문했던 예가 있고, 청대에는 이러한 구성의 ‘喜’자문이 칠기 장식문양으로 유행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다른 글자보다 특히 수복자를 애호한 점이 특징이며 조선후기에는 청화백자 뿐 아니라 양각백자로도 제작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833-20160120백자청화 수자문 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문수무강자문 발
수복자문 외에 ‘萬壽無疆’ 네 자도 길상문자로 시문되었다. 이 발의 외면에는 나뭇가지 형태로 문양화한 글자를 사방에 배치하였다. 각각의 글라로부터 불수감과 매화, 모란, 배꽃이 자라나 생동감을 준다. 이러한 꽃나무와 길상문자의 조합은 조선후기 문자도(文字圖)에서도 발견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843-20160120백자양각 수복자문 주자, 백자양각 수복자문 뚜껑, 조선 19세기

20160120_164852-20160120백자양각 매죽문 사각 병, 조선 19세기

20160120_164908_HDR-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930-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유개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017-20160120백자청화 편복문 합, 조선 19세기말~20세기초

20160120_164944-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026-20160120백차청화 수복자문 유개발, 백자청화 수자문 육각 병, 조선 19세기

20160120_165035_HDR-20160120백자청화 수자문 사각 연적.통형 병

문자문은 전서체를 변형시켜 원형 혹은 장방형으로 도안화되어 그려지기도 하였다. 그 중 원형도안 수자문은 중국 청대자기류와 금속기에도 많이 사용되었던 문양으로 조선말기에는 특히 단독으로도 자주 시문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010-20160120
백자청화 수자문 화형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자문 화형 접시,
틀을 이용해 형태를 만들고 원형도안수자문으로 장식한 국화형 접시는 기형상 칠기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명말에서 청대에 걸쳐 유행하였다.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졌는데 조선의 것은 형태와 질의 면에서 일본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여 영향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다른 문양과 조화를 이룬 수복문자

20160120_165054_HDR-20160120백자청화 초화문 호,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초충.초화문 접시
문자와 초화문이 복합 시문된 접시이다. 그릇의 중심에 장방형으로 도안호된 수복자를 원권 안에 그리고 그 주위로 국화나 난초, 패랭이와 같은 초화를 괴석이나 풀벌레와 함께 그려 화려함을 더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102-20160120백자청화 초충.초화문 접시, 조선 19세기말 ~20세기초

20160120_165113_HDR-20160120백자청화 초화수복자문 사각 주자, 조선 19세기

20160120_165123_HDR-20160120백자청화 만자문 이층 찬합, 조선 20세기 전반, 백자청화양각 화문 양이 향로, 조선 19세기말~20세기초, 백자청화투각 만자문 잔대, 조선 19세기

20160120_165131-20160120백자청화 만수무강자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139_HDR-20160120백자청화 복국화문 합,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백자청화 문자문 합, 조선 19세기말 ~20세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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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칠보수복강녕문 합, 조선 19세기

문양이 된 문자: 수복자문(壽福字文)의 유행
길상의 의미를 가진 글자들은 문양으로서 백자의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수복자가 시문된 청화백자는 관요와 지방요에서 모두 생산되어 궁궐과 관청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애용되었다. 이것은 각종 공예품에 길상문자를 장식하던 중국 명청대의 풍조가 유입되어 처음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것이 분원의 민영화 등으로 민간에까지 확산되고 성행했기 때문이다. 수복자문이 시문된 기종은 반상기명(飯床器銘), 즉 식기류에 많이 나타나 복을 누리며 장수하기를 염원한 기복적 성격을 보여준다. 수복자를 써 넣을 때는 다양한 서체를 사용하였는데 초서와 해서로 쓰인 것이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방식은 원권을 두르고 그 안에 글자를 쓴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명대 민요에서 전해져 조선전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원권이 없는 글자는 여러 단을 이루며 청화로 반쪽 시문되거나 백니필화암각(白泥筆畵陽刻)기법으로 제작된 고급기종의 문양이 되었다. 조선말기에 이르면 전서체를 변형시켜 만든 원형 혹은 장방형의 도안 수복자문이 많이 나타나 박쥐문이나 초화문 등과 함께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시대 백자는 왕실과 지배계층이 사용했던 귀한 물품으로 왕실과 관련된 용과 같은 특정문양이나 문인들의 선호했던 여러 의미를 담은 문양들로 장식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백자가 널리 보급되면서 일반인들이 선호했던 길상을 상징하는 다양한 문양들로 장식하게 된다. 대표적인 길상의 소재로는 불로장생의 염원을 담은 십장생과 복숭아, 거북 등이 있으며, 복을 의미하는 칠보무늬, 다산을 의미하는 불수감, 석류문, 포도문,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문,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서수(瑞獸) 무늬 등이 선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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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포도문 호, 국보 107호, 조선 18세기, 포도넝쿨을 대형 항아리 겉면에 그림처럼 그려 놓고 있다. 구도와 세부표현 등에서 18세기 화가들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
조선전기부터 백자에는 왕실의례에 사용된 특정문양이나 문인적인 취향이 담긴 문양들을 넣어 장식했다. 문양표현에는 청화나 철화, 동화와 같은 안료를 사용하였는데, 이 가운데 값비싼 청화안료는 왕실에서도 귀하게 여겨졌으며 전문적인 화원이 주로 작업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사회경제적으로 성장한 도시민의 계층이 늘어나고 중국 북경에서 값싼 청화가 수입되면서 일상용기까지 장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중에 길상의 상징을 갖는 문양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로 시문된 길상문은 장수를 희구하는 장생문(長生紋)이나 도가 신선의 법기(法器)인 팔보(八寶)를 도상화한 암팔선(暗八仙), 부귀를 상징하는 화려한 모란, 박쥐와 불수감(佛手柑)처럼 중국어 발음상 ‘福’과 동음인 상징물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포도, 상서로운 동물들로서 길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용, 봉황, 해태 등 뿐 아니라 산신이나 닭, 개, 사자, 호랑이와 같이 우리의 원시종교나 세화풍속과 연관된 소재들이었다. 시문된 문양들은 당대의 회화풍으로 그려졌으며, 상형물로도 구현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십장생문
십장생류는 소나무, 구름, 산(돌), 물, 해, 학, 거북이, 사슴, 영지, 복숭아 등으로 불로장생에 대한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길상소재이다. 그림 뿐 아니라 도자의 문양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기면의 한계로 인해 10가지 소재가 전부 시문된 경우는 매우 드물며 2~8개의 소재가 부분적으로 표현되었다. 송죽과 구름을 배경으로 사슴과 학 등을 청화로 그리거나, 양각으로 표현하고 바탕을 청화나 철화로 채색하여 문양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소나무에 비해 학이나 사슴을 크게 표현하여 상호비례가 무시된 점, 소재의 대칭적 배치 등에서 민화장생도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155-20160120백자청화 운학문 접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208-20160120백자철채 양각 매죽운학문 병, 조선 19세기, 백자청화양각 십장생문 합,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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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쌍록송문 호, 조선 19세기, 백자투각 송학문 원형 필통, 조선 19세기

복숭아
복숭아 문양은 조선전기나 중기보다는 후기에 주로 나타나며 반도(蟠桃)로 대표되는 서왕모 신앙의 발달과 함께 시문되었다. 복숭아는 일상기명의 문양으로 활발히 시문되었을 뿐 아니라 연적, 잔, 투각필통 등과 같은 상형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청화, 철화, 진사 등 여러 안료를 이용하여 가지와 잎을 표현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244-20160120백자청화철화 화문 도형 잔, 조선 19세기

20160120_164301-20160120백자 도형 연적, 조선 19세기, 백자투각 도문 원형 필통, 조선 19세기

거북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로서 수파 위에서 왼쪽 앞을 응시한 채 서 있는 형태와 앞으로 전진하면서 고개는 뒤를 돌아보는 형태 등이 시문되는데, 이는 조선후기 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뒤를 돌아보는 형태와 입으로부터 기운이 묘사는 산릉도감의궤의 현무 표현과도 상통하여 주목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317-20160120백자청화청재 구형 연적, 조선 19세기

20160120_164328-20160120백자청화 학구문 호, 조선 19세기

20160120_164336-20160120백자청화 구문 접시, 조선 19세기

칠보문
칠보(七寶)란 전륜성왕만이 지닌다는 일곱가지 귀한 보물에서 유래하였으며, 보(寶)는 복(福)자와 비슷한 음이 나기때문에 복을 뜻하였다. 7가지는 엽전모양의 전보(錢寶), 무소뿔을 묘사한 서각보(犀角寶), 경사스런 보자기의 네귀에 다는 금종이 장식품인 방승보(方勝寶), 화첩과 책의 모양을 도안화시킨 화보(畵寶), 한약재로 쓰였던 약쑥의 잎사귀인 애엽보(艾葉寶), 거울을 묘사한 경보(鏡寶),고대 악기의 하나인 특경보(特磬寶)이다. 칠보와 유사한 문양 형식으로 도가 신선의 법기인 팔보(八寶)나 팔음(八音)의 문양도 즐겨 시문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409-20160120백자청화투각 칠보문 필통,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칠보초화문 표형 병,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칠보문 사각 연적, 조선 19세기

불수감(佛手柑)
감귤나무의 변종인 불수감은 ‘佛’과 ‘福’의 중국어 발음이 같아 길상의 의미를 지니며, 다수(多壽), 다자손(多子孫)을 의미하는 복숭아.석류와 함께 삼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19세기의 대접, 접시, 병, 호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절지문의 형태에 박쥐가 곁들여 시문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432-20160120백자청화 불수감문 병,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불수감문 발, 조선 19세기,

석류문
석류문은 다산을 상징하며, 복(福)과 발음이 같은 박쥐와 함께 시문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세필을 이용하여 석류나무 전체를 묘사하였는데, 특히 19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나무 기둥과 꽃을 생략한채 씨가 드러난 열매를 위주로 한 절지문의 형태로 시문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19세기 이후 과실이 있는 화조문에서도 보이는 공통된 특징이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432-crop-20160120백자청화 석류문 접시, 조선 19세기

모란문
모란은 부귀, 아름다운 여인, 백화왕(百花王) 등 다양한 상징이 있었으나 송대부터 부귀를 대표적으로 상징하게 되었다. 회화에서는 대개 토파나 괴석을 배경으로 모란이 그려진 반면 백자에서는 커다란 모란 꽃송이를 정지형태로 시문하거나 기면을 따라 돌아가는 줄기선상에 배치하였다. 이는 원대 오채자기나 청대 강희기의 법랑채자기 등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모란문을 백자에 시문한 것은 주로 19세기 이후에 본격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450-20160120백자청화동화 모란문 호.병,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모란문 유개발.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모란조문 병, 조선 19세기, 백자 모란형 연적, 조선 19세기, 백자투각 모란문 원형 필통, 조선 19세기

포도문
포도문양은 대개 19세기 이후 호(壺)의 표면에 청화로 시문되거나 필통과 같은 문방구에 투각되었다. 중국에서는 만명기(晩明期) 이후 출현하여 광서 연간(1875~1908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애호되었다. 촘촘히 붙은 포도알맹이는 일의 성과와 다산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조선의 백자에 시문된 포도문은 중국에 비해 포도알이 크며 여백을 두어 시원한 공간감을 보여준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512_HDR-20160120백자청화 초화편복문 주자, 백자청화 포도문 잔, 백자청화 포도문 발, 백자청화 포도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757_HDR-20160120백자청화 포도문 발, 조선 19세기

용.봉황.해태
성군이 출현하고 왕도가 실현되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신비의 서조(瑞鳥)인 봉황, 왕권의 상징이었던 용, 요순시대에 등장했으며 선악을 판별한다는 해태 등은 모두 궁중을 장식하던 상서로운 동물이다. 그러나 좋은 운세가 펼쳐지기를 기원하며 길상화되어 백자에 시문되었다.(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540-20160120 백자청화 운룡문 촉대, 백자청채 용형 연적, 백자청화 운룡문 병, 조선 19세기

20160120_164556-20160120
백자청화 운룡문 접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606-crop-20160120백자청화 운룡문 접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606_1-20160120백자청화 운봉문 접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616-20160120백자청화동화 봉황문 호, 조선 19세기

20160120_164624-20160120백자청화 운봉문 호, 조선 19세기

20160120_164631-20160120백자청화.청채 해태형 연적, 조선 19세기

20160120_164651-20160120백자청화 잉어형.계형 연적, 조선 19세기

20160120_164701-20160120
백자청화 잉어문 발.접시, 조선 19세기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백자의 제작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백자는 조선초기에는 전국 136개의 자기소에서 진상품으로 백자를 만들어 왕실에 납품했다고 하는데 이때 조선백자 제조기술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 임진왜란때까지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원료공급 등의 문제로 백자의 질 떨어져 회백색 백자가 만들어졌으며, 안료가 구하기 쉬운 철화백자가 유행하기도 했다. 17세기말부터 백자의 질이 좋아지면서 흰백자와 한국적인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60120_163859_HDR-20160120경기도 광주 분원리 가마터 출토품

조선백자의 색
백자는 고령토로 만들며, 1,250~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 치밀하고 단단하게 완성된 도자기이다. 15세기경에는 우윳빛과 같은 유백색, 16세기에는 겨울눈과 같은 설백색, 17세기에는 회백색, 18~19세기에는 약간 푸른색이 도는 청백색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태토와 유약의 성분은 백자색에 영향을 미치는데 백토의 품질은 산지별로 달라, 조선시대 관요에서는 여러 지역의 백토를 선별 사용했다. 관요 이외 가마에서는 주변 지역에서 채취 가능한 백토를 사용하여 어둡고 회색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002-20160120경기도 광주시 분원리 가마터 수습품

20160120_163910-20160120경기도 광주 번천리 가마터 출토품

20160120_163951-20160120경기도 광주군 번천리 9호 가마터 수습품

20160120_163920-20160120경기도 광주 선동리 가마터 출토품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철화 운용문호, 조선 17세기, 보물 645호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관요가 있던 경기도 광주의 선동리 지역을 조사하고, 2호로 이름 붙인 가마터에서 3,500여 점의 도자기 파편을 발굴했다. 조사를 통해 원래 왕실에서만 쓰던 용 문양이 그려진 철화백자 항아리 편을 찾을 수 있었고, 일부 도자기에는 1640~1649년간의 제작연도가 새겨져 있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나라가 어려워져 본래 청화백자로 제작하던 용항아리(용준)를 철화백자로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문양의 철화백자 편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645호 “백자철화 운룡문호”는 완전한 항아리 모양이 남아 있는 용문양 철화백자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는데, 선동리 가마터 출토품은 이 항아리가 언제 어디에서 제작되었는지를 추정하는데에도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3957-20160120경기도 일대 가마터 수습품.

조선백자의 번조방법
가마 안에서 그릇을 구울 때는 생산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도구를 활용하여 채임했다. 바닥에는 도침을 놓고 그릇의 굽에는 받침을 고이며, 적재는 그릇의 품질에 따라 달라 고급품은 단독으로 갑발을 넣어,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여러 개를 포개어 번조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3814-20160120갑발, 도침 포개구이,

조선백자의 굽받침
굽받침은 굽 접지면에 붙여 그릇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한다. 조선시대에는 시기와 백자의 품질에 따라 다양한 받침이 사용되었다. 고급품은 굽 접지면에 고운 모래를 받치고, 포개구이할 경우에는 태토빚음받침이나 굵은 모래, 또는 모래와 흙을 섞어 만든 모래빚음받침이 사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굽 접지면에 흙물을 바르기도 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3837-crop-20160120태토빚음받침,

20160120_163837-20160120가는 모래받침

20160120_163845-crop-20160120모래빋음받침,

20160120_163845-20160120흙물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