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성곽

시안 시안성벽(西安城墙),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 성곽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시안 성벽(西安 城墻)이다. 한(漢)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중국 역대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시안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도성(都城)이다. 수(隋) 때 현재의 위치에 도성을 처음 쌓았으며 당나말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의 성곽은 명(明) 때 주원장 둘째 아들이 진왕으로 봉해지면서 다시 쌓았는 당나라 황성 터의 성을 연장하여 다시 쌓았으며 그 후 여러차례 수리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1년 중국 최초로 중점보호문물 및 AAAA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체 둘레 13.74 km로 남북으로 2.6 km, 동서로 3.5 km 정도의 직사각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높이이 12 m 정도이며, 상부 너비 12 ~ 14 m이다. 성벽 바깥에는 땅을 파서 만든 호성하(护城河,해자), 성벽 위에는 갑루, 전루, 성루 등의 누각과 여인장, 타구 등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인 장락문, 안정문, 영녕문, 안원문을 비롯하여 18곳의 성문을 두고 있다. 현재의 성벽은 구운벽돌로 성벽을 쌓은 것으로 명.청대 중국 도성(都城)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성벽, 명.청대 중국 도성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녕문(永宁门)은 장안성 남문으로 명나라 초 장안성을 다시 쌓을 때 “영녕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옹성 형태의 도성 정문으로 갑루(闸楼), 전루(箭楼), 정루(正楼)를 갖추고 있으며 앞쪽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인 조교(弔橋)가 있었다. 성문 양쪽에는 성문을 호위하기 위한 돌출된 형태의 치성(雉城)과 적루(敌楼)를 두고 있다. 도성 정문 형태가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한양 도성 숭례문(국보 1호)과 같은 성격의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영녕문.

영녕문 정루(正楼)는 성문 위에 세워진 벽돌로 쌓은 3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천안문처럼 방어적 성격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문루이다. 명나라 초(1378년) 장안성을 다시 세울 때 지어졌으며 청대(1526년) 이후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다. 숭례문 문루처럼 중국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정루

영녕문 앞은 옹성이 있으며 방어시설인 전루(箭楼)가 옹성 위에 세워져 있다. 옹성은 명나라 말(1636년) 이자성의 난 때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루(箭楼)는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벽돌로 쌓은 큰 누각 건물이다. 건물은 4층으로 앞쪽 각층에는 12개의 창을 두고 있다. 옆쪽에는 1층을 제외하고 각층에 창을 두어 총 64개의 창이 있다. 내부는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양쪽에도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옹성과 전루.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전루와 갑루

갑루(闸楼)는 옹성 바깥쪽 해자를 건너는 현수교 다리인 조교(弔橋)를 통제하기 위한 출입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작은 규모의 2층 건물로 바깥쪽을 향해 적을 공격하기 위한 창문을 두고 있다. 전루와 갑루 사이에도 옹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갑루와 옹성. 그 앞에 해자를 건너는 다리가 있고 도성 출입문을 상징하는 패방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옆을 지나는 도로.

장안성 바깥에는 성을 둘러싸는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다. 호성하(护城河)라 불리는 해자는 둘레 14.6 km 정도이다. 수당 시기에 처음 건설되었는데 방어시설이면서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며 홍수 때 물을 임시로 배출하는 배수시설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수.당시기에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명.청대에 여러차례에 걸쳐 땅을 깊게 파고 폭을 넓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해자는 남문 주위 주작문에서 건국문까지 약 2.84 km 정도이며 깊이는 4.5 ~ 6 m 이다. 지금은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동쪽 건국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서쪽 주작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시안성벽(西安城墙).비림역사문화경구(碑林历史文化景区) 호성하(护城河) 소개
수당 시기에 건설된 서안해자는 성을 에둘러 총 길이는 14.6 km이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방어체제라고 할수 있다. 고대의 “외호”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2가지 작용이 있다. 하나는 해자밖에서 적을 막아 서안성 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물저장, 그리고 황수가 배수에 사용되어 도시 기후를 개선하는 것이다. 역사상 서안 해자를 처음으로 판 것은 당나라말기였고 명나라초기 배수로를 넓혀서 확대하는데 서안해자의 중요한 두시기라고 할수있다. 그후 청나라 시기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넓힌 재자를 여러차례에 걸쳐서 더욱 깊게파고, 넓혔으며, 준설하여 근대시기의 서안해자를 형성하였다. 2013년부터 정식 시범구역으로 된 해자의 길이는 2.84 km, 물깊이는 4.5 ~ 6 m이며, 주작문부터 건국문으로 향하는 수역을 주선으로 해자연안의 경치에 대하 종합적인 개조를 진행하였습니다. 수로청소, 오수의 흐름을 막고, 물속의 생물을 다스리며, 물양을 증가하는 등 방식으로 해자수역에 대해 기본적인 처리를 진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시안 성벽 바깥쪽으로는 해자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성벽을 따라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성벽을 성문, 적루, 성벽, 여인장, 타구 등 다양한 방어시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에 조성된 공원

적루(敌楼)는 성벽 위에 세워진 누각을 말한다. 시안 성벽 위에는 적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나 성문 주위 등에 다양한 형태의 적루가 세워져 있다. 성문 양쪽에 성문을 호위하기 위해 세워진 치성 위에 세워져 있는 적루가 대표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동쪽에 세워진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모습. 벽돌로 지은 2층 누각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에 위치한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각루

OLYMPUS DIGITAL CAMERA적루가 없는 치성

장안성 남문 안쪽 문묘였던 비림박물관 앞 성벽 위에 있는 괴성루(魁星楼, Kuixing Tower)이다. 괴성루(魁星楼)는 장안성 남문 동쪽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학의 신으로 추앙받는 괴성(魁星)을 상징한다. 한자 “魁”는 “乚”이 “斗”를 들어올리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를 통과할 후보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나라 때 (1618년) 서안을 다스렸던 지방관이 이 지방 출신이 과거를 통과하지 못한것을 애석하게 생각해 문묘(文廟) 앞 성벽위에 세웠다고 한다. 근대에 파괴되었던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비림박물관 앞  괴성루

괴성루는 2층 목조건축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으로 명.청대 이전 누각 건물 형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괴성루.

성벽은 높이 12 m이며, 바닥너비 15 ~ 18 m이다. 성벽 내부에는 황토흙을 다져 쌓았으며 바깥쪽과 상부에는 구운 벽돌로 쌓았다. 성벽 상부는 너비 12 ~ 14 m로 마차 2대가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규모이다. 바깥쪽을 향해서는 방어시설인 여장과 타구가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벽돌로 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마차 2대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넓은 성벽 상부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에서 내려 보이는 비림박물관 부근 도심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 도로

장안성 북쪽 성벽은 당나라 황성 성벽 자리에 다시 명나라 때 다시 쌓은 것이다. 황성에 있던 대안궁을 비롯하여 궁궐 등은 남아 있지 않고 시안 기차역을 비롯하여 도시의 중심기능을 하고 있는 지역이다. 북쪽 성벽은 동서로 약 4.13 km이며 북문인 안원문(安远门)문을 중심으로 상무문 등 6개의 성문이 있다.

해방문(解放门)은 원래 중정문(中正门)이었는데 1934년에 이름이 바뀌었다. 1952년 시안역 광장이 확장되면서 철거되었다가 최근에 현재의 모습으로 성벽이 연결되었다. 시안 기차역은 해방문(解放门)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뒷편에 당 대명궁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서쪽에 위치한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안쪽).

해방문 동쪽으로는 상검문(尚俭门), 상근문(尚勤门)이 있는데 최근에 성벽을 연결하면서 도로가 지나가던 곳에 성문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상검문.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상검문 동쪽 상근문(尚勤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쪽 성벽

서안 성벽
서안 성벽은 중국에 남아있는 성벽 중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고대 성벽건축물로, 고도 장안의 모든 역사를 한데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문화재입니다. 또한 그 독특한 매력으로 인하이 새인들에게 웅장하고 장대한 모습을 뽐내며 전 세계에 고대 중국인들의 깊은 지혜를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안 성벽은 기원후 582 년 (수나라 개황 2 년)에 건설되었고 오대, 송, 금,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홍무부년에 당나라 시대 당장안성 황성을 기초로 확대 및 복원하였습니다. 서한 성벽 둘레 길이는 13.74 km, 상부 너비 12 ~ 14 m, 하부 너비 15 ~ 18 m 입니다. 성벽에는 성보호 하천(包括护城河,해자), 조교(弔橋), 갑루(闸楼), 전루(箭楼), 성루(城樓), 각루(角樓), 적루(敌楼), 여인장(女儿墙), 타구(垛口) 등의 고대 군사 시설이 갖추이지 있습니다. 현재 중국 최초 중점보호문물 및 AAAA 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 성벽 도시 및 시안 시민들의 무한한 협력과 공동노력으로 양호하게 보호되고 있으며, 오랜 고도의 신비로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세월의 변천과 역사의 흔적, 문화 정수의 축적, 풍부한 인류문화 체험을 제공하며 현대인의 생활에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고있습니다. 성벽, 환성 공원 숲, 성보호 하천, 성 보호 하천 외부 도로, 순성항 등이 “벽림하로항”(성벽, 숲, 하천, 도로, 나루터)가 5위일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어, 서안의 역사 및 문화적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국제화된 대도시로서의 중요한 지표이자 정신적인 정원과도 같은 공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고적 보호 계승에 있어서 모범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시,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청도 청도읍성,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있는 옛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쌓은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방어시설을 정비할 때 다시 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부분만 남고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고 있다.

성은 둘레 1.88 km 정도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7 m이며 북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동.서.북쪽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며, 고종 때 남문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문과 모서리부분에 치성을 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었다.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는 남원성이나 인근 언양읍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17-20200106청도군 읍치에 남아 있는 청도읍성.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읍성으로 둘레 1.8 km의 사각형을 평면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1-20200106청도읍성 동쪽 성벽. 약 340 m 정도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성벽에는 동문, 동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등 방어시설을 하고 이다.

청도 청도읍성 05-20200106읍성 동문터. 읍성 내부를 들어오는 주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위가 훼손되었다.

청도 청도읍성 03-20200106동문 남쪽에 있는 치성. 바깥으로 길게 나와 있어 동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2-20200106동쪽 성벽 바깥쪽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동쪽 바깥은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되어 있어 적을 방어하기 쉽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청도 청도읍성 07-20200106동문 안쪽 성벽. 바깥쪽은 큰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쪾은 토성처럼 흙으로 쌓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읍성 21-20200205복원하기 전 모습. 성벽은 무너지고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청도읍성 동쪽 성벽
청도읍성 동쪽 성벽은 읍성 동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 m이다. 성벽 구간은 2005년 지표조사에서 성 터 위에 집 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 폐문루, 치성 3곳이 확인되었다. 문헌에 동문루는 임진왜란 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 35년(1709)에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 22년(1798) 옛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벽 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 터, 2007년에 동문루 옆 치성, 2016 ~ 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다. 성벽 조사에서기초와 몸체(체성+내탁)가 확인되었다. 기초는 정리한 터 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마주보게 다진 3층이다. 기초 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다. 몸체는 기초 위에 약 5 m 너비로 성돌을 마주보게 내.왜벽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틈새에는 잔돌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몸체 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내탁했다. 동문루 터는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훼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폐문루 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 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성벽과 함께 쌓은 치성은 동문루 옆과 성벽 남.북쪽 모서리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정비사항은 2008년에 주차장, 관광안내소, 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2009 ~ 2010년에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에 동문루 남쪽의 성벽을 남은 성벽 위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대로 쌓았다. 성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읍성 04-20200106동문 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3-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새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5-20200106치성 아래에서 본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4-20200106청도읍성 남쪽 성벽.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해자처럼 연못이 있다.

청도 청도읍성 08-20200106북동쪽 성벽 위. 토성처럼 흙으로 쌓은 성벽길이 있으며 조총공격에 대비해 여장을 설치하였다.

청도 청도읍성 09-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1-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동문 부근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2-20200106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0-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북쪽 성벽. 멀리 치성과 북문이 보인다. 양쪽 치성에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청도 청도읍성 16-20200106고지도에 표현된 청도읍성. 평지에 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는 인근 언양읍성이나 남원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읍성내 있는 옛 청도군 관아 객사.

청도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km), 높이는 5자 5촌(약 1.65 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 (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를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경산 병영유적(사적 218호), 삼국시대 신라의 군사훈련장

경북 경산시 압량읍 일대에 있는 병영유적(사적 218호)이다. 삼국시대 김유신이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유적은 압량리, 내리, 진량읍 선화리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데 1~ 3 km 정도 떨어져 있다. 3곳 모두 나즈막한 구릉에 흙으로 토축을 쌓아 넓은 광장을 만들고 한쪽편에 군사훈련을 지휘할 수 있는 고대를 두고 있다. 훈련장은 직경 100 m 이내의 타원형을 하고 있다. 외관상 토성처럼 보이지만 그 규모가 작고 내부가 평탄하여 군사훈련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훈련장이 있는 3곳 모두 두룩산이라 부르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인근에 있는 임당토성과 비슷한 입지조건과 형태를 갖추고 있어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산 병영유적(사적 218호) 중 압량면 압량리에 소재한 훈련장. 금호강 남쪽 압량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령장은 구릉에 높이 7 m 정도이 토축을 쌓았는데 외견상 토성과 비슷해 보인다. 인근에 있는 신라 지방세력 압독국 근거지였던 임당토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원래 토성이었던 곳을 훈련장으로 바꾸었다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축. 외형이나 입지조건 등으로 볼 때 토성과 비슷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 내부. 둘레 300 m 정도의 타원형 형태의 넓은 광장이 있고 남쪽끝에 지휘소 역할을 하는 장대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장 남쪽 끝에 있는 장대.

OLYMPUS DIGITAL CAMERA장대에 올라서 내려다 본 모습. 이곳에서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지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축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장대와 토축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에 내려다 보은 북쪽 들판. 멀리 팔공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훈련장 남쪽편.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이곳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압량읍 내리 훈련장이 있으며,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진량읍 선화리 훈련장이 있다.

경산 병영유적 사적218호21-20200129국가문화유산포탈에 있는 병영유적 옛 사진. 넓은 들판에 병영유적이 우뚝 솟아 있다. 지금은 주변이 공장으로 바뀌었다.

경산 병영유적, 사적218호, 경북 경산시 압량읍 압량리
김유신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당시 백제를 공략하고 나아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초기지이자 군사를 모아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훈련시키던 군사훈련장이었다는 구전을 전하고 있는 3곳의 토성모양 축조물을 합하여 압량유적이라 한다. 이들은 각각 경산시 압량면 압량리와 내리, 그리고 진량읍 선화리에 위치하는데, 서로 1.2 ~ 3.2 km 떨어져 삼각형의 배치상을 보이고 있다. 압량유적은 금호강 이남의 넓은 압량벌 중심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각각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 선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압량리유적은 얕은 구릉 위에 높이 7 m로 토축하고 윗면을 평탄하게 하여 원형 광장을 축조한 것으로 둘레가 300 m 가량되며 동남쪽에 치우쳐 높이 10 m의 토루가 있다. 내리 유적은 구릉 자연면에 약간의 보축을 지름 80 m, 둘레 270 m 광장을 마련하였으며,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 15 m 가량의 토루를 쌓았는데, 토루의 동남부분이 크게 파괴되어 토루의 모습을 잃고 있다. 선화리유적은 구릉 말단부에 높이 10 m 토축의 원형광장(지름 80 m)을 구축하고 그 북쪽에 치우쳐 높이 2 m, 윗면지름 13 m의 토루를 쌓았다. 이 유적은 자연구릉상에 얼마간 토축이 이루어져 외견상 토성처럼 보이지만 토성으로 보기에는 소규모이고, 윗면이 평탄하여 광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광장 한쪽에 치우쳐 도루가 있다는 점에서 장대가 있는 군사훈련장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경산 임당토성과 저습지 유적, 신라 지방세력 압독국 생활유적

경북 경산시 임당동에 있는 임당토성이다. 삼국시대 신라 지방세력 무덤인 임당동고분군(사적 516호) 뒷편에 있는 토성이다. 해발 60 m 정도의 낮은 구릉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데 둘레는 950 m 정도이다. 흙을 다져서 쌓는 평편다짐기법으로 토축을 쌓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 m 정도이다. 토성은 4세기에 처음 쌓은 후 6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임당동고분군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압독국 관련 내용 등으로 볼 때 지방세력의 근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성의 입지조건이나 쌓은 방식 등은 삼국초기에 쌓은 토성인 대구 달성이나 경주 반월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같은 문화권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토성 북쪽과 금호강 사이 임당저습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다양한 생활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토기, 목기, 골각기, 철제유물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신라 지방세력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산 임당토성. 영천과 대구사이를 흐르는 금호강 일대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쌓은 토성으로 대구 달성, 경주 반월성과 비슷한 입지조건 등을 갖추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앞에는 10여기의 무덤이 있는 임당동고분군(사적 516호)가 자리잡고 이다. 이곳에서 금동관,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어 신라초기 압독국이라 불렸던 지방세력의 근거지임을 알 수 이다. 남쪽으로 경산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흙을 인공적으로 다져서 토축을 쌓은 토성으로 현재 높이 1.5 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고, 바깥쪽은 자연지형을 활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안쪽 구릉 정상부에는 평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어 지배세력 생활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서쪽편 성벽. 그 위로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은 북쪽으로 금호강과 1 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그 주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토성 바깥쪽에는 주민들 살았던 주거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북쪽 저습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생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당동 유적 발굴.조사 현황도. 토성 북쪽 낮은 저습지 일대에서 생활유물들이 발굴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동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토성 동남쪽 성벽 안 생활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임당토성 남쪽 성벽.

임당토성
임당토성은 임당동 고분군 북쪽에 있는 방어시설로 1995년에 발굴되었다. 토성은 임당 유적 중 가장 높은 곳(해발 59 ~ 65 m)에 있으며, 주변에 있는 임당 뜰과 금호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외부의 침입을 막기에 유리한 입지를 갖추었다. 토성의 동쪽과 서쪽 부분 250 m 정도가 발굴되었다. 토성의 성벽은 순수하게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지름 30 ~ 50 cm의 기둥구멍에 나무 기둥인 영정주를 1 m 간격으로 두 줄을 세운 후, 양 기둥 사이 4.5 m 정도의 공간을 평편다짐기법으로 쌓아 올렸다. 그 다음 성벽 바깥 부분도 흙으로 덧붙여 쌓아 완성하였다. 남아 있는 토성의 높이는 1.5 m인데, 이러한 시설을 바탕으로 본래 토성의 전체적인 규모는 동서 길이 120 m, 남북길이 350 m, 둘레 950 m 정도의 타원형이었으며, 토성의 벽은 아래쪽 너비 8.5 ~ 9.5 m, 위쪽 너비 4.5 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토기를 분석한 결과, 토성은 기원후 4세기 전반에 처음으로 만들어져 6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간은 임당 유적에서 신라에 편입된 과거 압독국 유력자들의 무덤인 고총을 만든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토성은 신라에 통합되었으나 세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이 지역 유력자들의 생활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토성의 근처에 있는 임당 저습지 유적에서는 토성과 같은 시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일상생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이로써 당시의 마을을 확인할 수 있어 토성과 주변 마을의 모습과 생활상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2. 경산 임당 저습지유적 발굴조사, 영남문화재연구원, 1997년

서울 호암산성(사적 343호), 통일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쌓은 산성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호암산성(사적 343호)이다.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호암산(해발 347 m) 남쪽 정상부에 둘레 1,250 m 의 성벽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안양천을 따라 안양에서 한강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와 멀리 대부도와 인천 사이의 서해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쌓은 한강유역에 쌓은 산성 중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다음으로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호암산성은 현재 약 300 m 정도이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내에는 한우물이라 불리는 큰 연못과 정상부의 작은 연못, 4곳의 건물 등이 남아 있으며 우물 근처에서 개모양의 석수상이 발견되어 북문터 안쪽에 세워져 있다. 우물에서는기와, 청동숟가락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1-20191203호암산 정상부 아래 능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호암산성(사적 343호). 그 너머로 금천구, 구로구와 경기도 광명시, 시흥시 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2-20191203호암산성 북문터. 호암산 정상에서 능선길을 따라서 내려오면 북문을 통해 산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1-20191203산성을 들어서면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개모양의 석수상을 볼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0-20191203전시해 놓은 석구상.

석구상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경기읍지』의 「시흥읍지」에 있다. ‘호암’이라는 바위가 현의 진산인 금지산(금주산, 지금의 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의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해태상이라 부르기도했으나 그 형태가 개에 가깝다고 하여 석구상이라고 부른다. 또 1990년 제1우물지 발굴조사 당시 조선시대 건축물에서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 m, 폭 0.9 m, 높이 1.0 m 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2-20191203석구상을 지나면 통일신라 때 쌓은 석축이 남아 있는 약 300 m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1-20191203남쪽 장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어지는 성벽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3-20191203호암산성 동쪽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 장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4-20191203이곳에서 보이는 호암산성 동쪽편. 관악산과 삼성산 등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주변지역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5-20191203남쪽 건물 등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길. 이 부근 성벽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6-20191203호암산성 내 건물이 있었던 곳. 정상부에 약간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8-20191203건물터임을 알려주는 안내문.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7-20191203반대쪽에는 작은 우물터가 있다.

제2우물지는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2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이다. 길이 18.5 m, 너비 10 m 이상, 추정깊이 2 m 이상의 규모이다. 길이 50 cm, 너비 35 cm, 높이 25 cm 가량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ㅔ단(높이 1.75 m)까지 쌓았는데 두 번에 걸쳐 15 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된다. 바닥조성이나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등이 제1우물과 유사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에는 ‘잉벌내역지내말’이라는 글자가 새겨자 있는데 숟가락의 ‘잉벌내’는 고구려시대의 금천구 지명인 ‘잉벌노’와 유사하다.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지명은 여전히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잉벌노를 쓰던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벌내(한주 율진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금천지역)에 사는 내말, 즉 나마 벼슬을 한 역지라는 인물이 사용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7-20191203북문터 안쪽 서쪽편에는 약간 넓은 공간이 있으며 헬기착륙장이 표시되어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8-20191203헬기착륙장을 지나면 큰 우물이 있으며 그 옆에 작은 암자가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6-20191203호삼산성 큰 우물. 한우물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산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교적 큰 규모의 연못이다. 통일신라 때 처음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약간 증축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호암산성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한우물(제1우물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이라는 뜻으로 서울 호암산성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길이 17.8 m, 너비 13.6 m, 깊이 2.5 m의 규모로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길이 22 m, 너지 12 m, 깊이 1.2 m의 규모로 증축하였다.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통일신라 시기의 것이며, 1991년 2차 보수정비공사에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두 시기의 연지를 함께 복원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떄에는 선거이 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시대 건국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이라는 설도 있으며 가물 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벽 상단에서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5-20191203한우물 옆에 있는 작은 암자.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4-20191203암자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금천구, 구로가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호암산성 안양천을 따라 형성된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쌓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3-20191203암자에서 호암산 서쪽 성벽 아래로 이어지는 정상로.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2-20191203호암산성 서문이 있었던 자리 부근. 성벽과 성문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통일신라, 서울 금천구 시흥동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해발 347 m) 정상을 둘러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 1,547 m, 면적 133,790 ㎡이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축하여 군사적 전략 거점 및 행정치소(기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서측에서 보면 소래와 남양만까지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지리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해 연안과 한강수로, 내룍 교통로의 중간 지점인 한강 이남 중심에 있어 삼국시대 양천고성.행주산성.오두산성을 잇는 거점 성곽이었으며, 당시 한강 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가운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등에 이어 네번째로 길었다. 고려시대에는 한강 수로를 통한 중국 무역의 경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가 주둔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서남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축조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을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했다. 현재 동벽의 북쪽 성벽이 잘드러나 있으며, 원형을 포함해 남아 있는 성벽은 1,016 m이다. 산성내의 시설로는 한우물(제1우물지)과 제2우물지, 건물지(터), 석구상이 있으며 많은 기와와 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