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성곽

경주 명활성(사적), 신라 경주를 방어하는 주요 산성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명활성(明活城, 사적)이다. 이 성은 경주 동쪽 명활산에 있는 둘레 약 6 km의 신라 산성이다.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이다. 성을 쌓은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405년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처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선덕여왕 때 비담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명활성은 경주에서 동해안 감포와 연결되는 도로와 불국사를 통해 울산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지나가는 주요 교통로에 있다. 동쪽에서 신라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았던 오래된 신라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명활성(사적)>

명활산은 신라 6촌 중 명활산고야촌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높지 않은 산이나 북쪽 악산과 함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북천이 흐르고 있다. 교통로를 지나가는 군사들을 제압하기 용이한 곳에 산성을 쌓고 있다. 동해안을 통해 경주를 공격하는 왜(倭)를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의 압력이 심했던 5세기에는 궁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주 명활성 (사적)
<경주 명활성 위치>

경주는 월성 남쪽의 남천, 서쪽의 형산강, 북쪽의 알천이 자연스럽게 해자를 형성하고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쉬운 지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과 북천(알천)>

성벽은 6세기 이전에 처음 쌓았으며 후대 여러차례 보수를 하면서 견고한 신라 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방어가 용이한 능선에는 초기 성벽 형태인 토성을 그대로 두고 계곡이나 방어에 취약한 곳을 석축으로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  계곡에 있는 성벽(복원)>

명활성은 성벽을 쌓은 석축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남아 있던 일부성벽을 보완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석축은 꽤 큰 자연석을 다듬어서 2층으로 쌓았는데, 석성과 토성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성 석축>

2012년 당시 명활성은 복원이 진행중이었는데 주변에 석축을 쌓은 많은 석재들을 볼 수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이 진행중인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옛 모습을 복하고 있는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복원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구역, 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능선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도 석축을 쌓고 있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이어지는 명활성 성벽에는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초기에 쌓았던 토축을 계속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으로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토축으로 보이는 경사진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에서 보이는 명활산>

명활성은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확장되어다. 진흥왕 때(544년) 다시 쌓았으며 진평왕 때(593년) 성벽을 확장했다. 진흥왕 때 성벽을 다시 쌓으면서 그 내역을 기록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으며 안압지에서 ‘명활산성비’로 추정되는 비석조각이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경주 명활산성비, 551년, 경주 명활산성>

551년 11월 중에 명활산성을 쌓고, 거기에 관여한 지방관, 역부를 동원한 지방의 촌주, 공사의 실무자와 공사내용, 비의 위치, 공사기간, 비문을 작성한 사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비는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나오는 최초의 것으로 군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통일기 이전 신라의 신분제와 관등제, 역역동원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삼국시대(신라) 551년, 경주 안압지>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산 334
이 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하는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토성(5km)과 석성(4.5km)이 함께 있다. 신라 실성왕(實聖王) 4년(405)에 왜병(倭兵)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산성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자비왕(慈悲王) 18년(475)에는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가 소지왕(昭知王) 1년(479)부터 월성(月城) 으로 다시 옮겼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는 비담(硏)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金碩信)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1988년 성 주변에서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만든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를 발견하여 당시의 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

 

 

경주 관문성(사적), 왜(倭)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장성

경북 경주시 외동읍, 울산 북구 범서읍 모화리 등에 있는 통일신라 성벽인 관문성(關門城, 사적)이다. 왜(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길이 12 km에 이르는 장성(長城, Wall)이다. 경주와 울산 경계를 따라 7번 국도와 14번 국도 주변에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장성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잘 다듬을 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이전에 쌓은 산성에 비해 기술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때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잘 다듬은 돌을 5단 내지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는데, 위로 쌓아 올리면서 폭을 좁혀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는 모벌군성 또는 모벌관문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에 이곳을 관문성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관문성(사적), 경주와 울산 범서읍을 연결하는 14번 국도를 막고 있는 성벽>

경주 서남쪽 치술령(해발 765 m)과 동남쪽 외동읍 모화리 삼태봉(해발 630 m) 사이를 성벽으로 막고 있다. 가운데에는 있는 순금산(해발 290 m)과 천마산(296 m)과 양쪽에는 산성형태의 성벽을 쌓고 있으며 7번 국도와 14번 국도 주변에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장성을 이루고 있다.

경주 관문성(사적)
<경주 관문성 일대>

관문성 남쪽으로는 경주에서 발원하여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동천으로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농경지들이 있다. 7번국도에는 높은 고개나 장애물이 없어 왜(倭)가 신라를 침범한다면 울산항에서 하루정도면 경주까지 도착할 수 있는 짧은 거리이다. 삼국통일 이후 백제와 동맹관계였던 왜(倭)에 대해서 문무왕을 비롯하여 많은 통일신라의 집권자들이 고민했던 부분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정상아래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울산 북구 동천 일대>

관문성<7번국도 동쪽 삼태봉으로 연결되는 성벽>

7번국도를 따라 흐르는 태화강 지천인 동천 주위는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관문성은 그 중 폭이 좁은 곳에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평지에 쌓은 성벽은 약  km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천 주변 성벽이 있었던 지역>

관문성은 동천 옆 위치한 순금산과 천마산을 지나 치술령까지 연결된다. 순금산 일대에는 방어에 용이하도록 테뫼식 산성처럼 성벽을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천 서쪽편 순금산 일대>

순금산 일대에는 성벽이 일부 남아 있고 주변 경치와 지형적 조건 등을 살펴볼 수 있어 관문성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관문성 탐방로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에서 전망이 좋은 지점>

OLYMPUS DIGITAL CAMERA<옛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에서 볼 수 있는 성벽의 흔적>

OLYMPUS DIGITAL CAMERA<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정상부 부근>

삼국시대 박제상의 전설이 남아 있는 치술령 아래 14번 국도 옆 마을에는 관문성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은 잘다듬은 큰돌로 아래부분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다는데 그 모습이 잘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4번국도를 막고 있던 관문성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 남아 있는 성벽을 쌓았던 큰 돌들>

관문성 성벽에서 10개의 석각이 발견되었는데, 구간별로 축성을 담당한 군현이 작업한 구역 등을 기록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글자새김돌,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글자새김돌(복제품), 경주박물관, 2012년>

관문성(關門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외
관문성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왜구를 막고자 쌓은 것이다. 이 성은 경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21 km 떨어진 외동읍 부근의 산에 축조되어 있다. 한 개의 성이 아니라 치술령(鶴述嶺)과 모화리 동편의 산 사이에 길이 12 km 정도의 장성과, 양남면 신대리의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 km 정도의 두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치술령에서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의 경계를 따라 신대리 동쪽 산까지 이른다. 관문성을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사람들은 만리성(萬里城)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터로 추측되는 석축이나 창고터, 병사터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현존하는 남산성과 관문성의 석벽을 비교해 볼 때,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서 관문성을 쌓은 기술이 훨씬 발달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문화재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

경주 남고루(사적), 고려시대에 쌓은 토루

경주에 있는 성벽으로 추정되는 유적인 남고루(南古壘)이다. 경주 대릉원 남쪽 입구에서 황오동 구분굴을 둘러싸면서 북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역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부분 없어지고 북천 부근 성동동 전랑지(사적 88호) 부근 성동동 24번지 부근에만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1936년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밑넓이 9.5m, 외벽높이 3.5m, 내벽높이 2m로 확인되었다. <고려사> 등에 경주 읍성을 축성했다는 기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경주 왕성이었던 반월성(半月城) 방어와 연계되지 않은 점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남고루(사적 17호)>

OLYMPUS DIGITAL CAMERA<남고루 안내표지판과 비석이 있는 부분>

경주 남고루 사적17호 11-20210626
<성동동 24번지 수목제거 후 투루가 노출된 상태>

OLYMPUS DIGITAL CAMERA<경작지에서 볼 수 있는 토루를 쌓았던 큰 돌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정비계획을 알려주는 현수막>

OLYMPUS DIGITAL CAMERA<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남고루 석축을 따라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OLYMPUS DIGITAL CAMERA<남고루 북쪽을 흐르는 경주 북천(알천)>

경주 남고루(慶州 南古壘), 사적 17호
원래 남고루는 대릉원 입구에서 북동쪽으로 황오동 고분군을 감싸면서 북천(北川)까지 이르렀으나, 지금은 황오동 일대에서만 남북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담장같은 이 터는 언제 무엇을 하려고 만든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고려 현종(顯宗) 3년(1012)에 전라·충청·경상 3도의 군졸을 동원하여 경주 북쪽에 돌로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남고루는 그 때 만들어져 북천의 범람을 막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시안 시안성벽(西安城墙),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 성곽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시안 성벽(西安 城墻)이다. 한(漢)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중국 역대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시안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도성(都城)이다. 수(隋) 때 현재의 위치에 도성을 처음 쌓았으며 당나말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의 성곽은 명(明) 때 주원장 둘째 아들이 진왕으로 봉해지면서 다시 쌓았는 당나라 황성 터의 성을 연장하여 다시 쌓았으며 그 후 여러차례 수리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1년 중국 최초로 중점보호문물 및 AAAA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체 둘레 13.74 km로 남북으로 2.6 km, 동서로 3.5 km 정도의 직사각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높이이 12 m 정도이며, 상부 너비 12 ~ 14 m이다. 성벽 바깥에는 땅을 파서 만든 호성하(护城河,해자), 성벽 위에는 갑루, 전루, 성루 등의 누각과 여인장, 타구 등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인 장락문, 안정문, 영녕문, 안원문을 비롯하여 18곳의 성문을 두고 있다. 현재의 성벽은 구운벽돌로 성벽을 쌓은 것으로 명.청대 중국 도성(都城)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시안 성벽, 명.청대 중국 도성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녕문(永宁门)은 장안성 남문으로 명나라 초 장안성을 다시 쌓을 때 “영녕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옹성 형태의 도성 정문으로 갑루(闸楼), 전루(箭楼), 정루(正楼)를 갖추고 있으며 앞쪽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인 조교(弔橋)가 있었다. 성문 양쪽에는 성문을 호위하기 위한 돌출된 형태의 치성(雉城)과 적루(敌楼)를 두고 있다. 도성 정문 형태가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한양 도성 숭례문(국보 1호)과 같은 성격의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영녕문.

영녕문 정루(正楼)는 성문 위에 세워진 벽돌로 쌓은 3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천안문처럼 방어적 성격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문루이다. 명나라 초(1378년) 장안성을 다시 세울 때 지어졌으며 청대(1526년) 이후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다. 숭례문 문루처럼 중국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정루

영녕문 앞은 옹성이 있으며 방어시설인 전루(箭楼)가 옹성 위에 세워져 있다. 옹성은 명나라 말(1636년) 이자성의 난 때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루(箭楼)는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벽돌로 쌓은 큰 누각 건물이다. 건물은 4층으로 앞쪽 각층에는 12개의 창을 두고 있다. 옆쪽에는 1층을 제외하고 각층에 창을 두어 총 64개의 창이 있다. 내부는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양쪽에도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옹성과 전루.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전루와 갑루

갑루(闸楼)는 옹성 바깥쪽 해자를 건너는 현수교 다리인 조교(弔橋)를 통제하기 위한 출입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작은 규모의 2층 건물로 바깥쪽을 향해 적을 공격하기 위한 창문을 두고 있다. 전루와 갑루 사이에도 옹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갑루와 옹성. 그 앞에 해자를 건너는 다리가 있고 도성 출입문을 상징하는 패방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옆을 지나는 도로.

장안성 바깥에는 성을 둘러싸는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다. 호성하(护城河)라 불리는 해자는 둘레 14.6 km 정도이다. 수당 시기에 처음 건설되었는데 방어시설이면서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며 홍수 때 물을 임시로 배출하는 배수시설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수.당시기에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명.청대에 여러차례에 걸쳐 땅을 깊게 파고 폭을 넓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해자는 남문 주위 주작문에서 건국문까지 약 2.84 km 정도이며 깊이는 4.5 ~ 6 m 이다. 지금은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동쪽 건국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에서 서쪽 주작문으로 이어지는 해자

시안성벽(西安城墙).비림역사문화경구(碑林历史文化景区) 호성하(护城河) 소개
수당 시기에 건설된 서안해자는 성을 에둘러 총 길이는 14.6 km이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방어체제라고 할수 있다. 고대의 “외호”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2가지 작용이 있다. 하나는 해자밖에서 적을 막아 서안성 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물저장, 그리고 황수가 배수에 사용되어 도시 기후를 개선하는 것이다. 역사상 서안 해자를 처음으로 판 것은 당나라말기였고 명나라초기 배수로를 넓혀서 확대하는데 서안해자의 중요한 두시기라고 할수있다. 그후 청나라 시기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넓힌 재자를 여러차례에 걸쳐서 더욱 깊게파고, 넓혔으며, 준설하여 근대시기의 서안해자를 형성하였다. 2013년부터 정식 시범구역으로 된 해자의 길이는 2.84 km, 물깊이는 4.5 ~ 6 m이며, 주작문부터 건국문으로 향하는 수역을 주선으로 해자연안의 경치에 대하 종합적인 개조를 진행하였습니다. 수로청소, 오수의 흐름을 막고, 물속의 생물을 다스리며, 물양을 증가하는 등 방식으로 해자수역에 대해 기본적인 처리를 진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시안 성벽 바깥쪽으로는 해자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산책할 수 있는 성벽을 따라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성벽을 성문, 적루, 성벽, 여인장, 타구 등 다양한 방어시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에 조성된 공원

적루(敌楼)는 성벽 위에 세워진 누각을 말한다. 시안 성벽 위에는 적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나 성문 주위 등에 다양한 형태의 적루가 세워져 있다. 성문 양쪽에 성문을 호위하기 위해 세워진 치성 위에 세워져 있는 적루가 대표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동쪽에 세워진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모습. 벽돌로 지은 2층 누각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문 서쪽에 위치한 치성과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각루

OLYMPUS DIGITAL CAMERA적루가 없는 치성

장안성 남문 안쪽 문묘였던 비림박물관 앞 성벽 위에 있는 괴성루(魁星楼, Kuixing Tower)이다. 괴성루(魁星楼)는 장안성 남문 동쪽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학의 신으로 추앙받는 괴성(魁星)을 상징한다. 한자 “魁”는 “乚”이 “斗”를 들어올리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를 통과할 후보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나라 때 (1618년) 서안을 다스렸던 지방관이 이 지방 출신이 과거를 통과하지 못한것을 애석하게 생각해 문묘(文廟) 앞 성벽위에 세웠다고 한다. 근대에 파괴되었던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비림박물관 앞  괴성루

괴성루는 2층 목조건축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으로 명.청대 이전 누각 건물 형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본 괴성루.

성벽은 높이 12 m이며, 바닥너비 15 ~ 18 m이다. 성벽 내부에는 황토흙을 다져 쌓았으며 바깥쪽과 상부에는 구운 벽돌로 쌓았다. 성벽 상부는 너비 12 ~ 14 m로 마차 2대가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규모이다. 바깥쪽을 향해서는 방어시설인 여장과 타구가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벽돌로 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마차 2대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넓은 성벽 상부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에서 내려 보이는 비림박물관 부근 도심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 도로

장안성 북쪽 성벽은 당나라 황성 성벽 자리에 다시 명나라 때 다시 쌓은 것이다. 황성에 있던 대안궁을 비롯하여 궁궐 등은 남아 있지 않고 시안 기차역을 비롯하여 도시의 중심기능을 하고 있는 지역이다. 북쪽 성벽은 동서로 약 4.13 km이며 북문인 안원문(安远门)문을 중심으로 상무문 등 6개의 성문이 있다.

해방문(解放门)은 원래 중정문(中正门)이었는데 1934년에 이름이 바뀌었다. 1952년 시안역 광장이 확장되면서 철거되었다가 최근에 현재의 모습으로 성벽이 연결되었다. 시안 기차역은 해방문(解放门)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뒷편에 당 대명궁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서쪽에 위치한 적루.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안쪽).

해방문 동쪽으로는 상검문(尚俭门), 상근문(尚勤门)이 있는데 최근에 성벽을 연결하면서 도로가 지나가던 곳에 성문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상검문.

OLYMPUS DIGITAL CAMERA해방문 동쪽 성벽(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상검문 동쪽 상근문(尚勤门)

OLYMPUS DIGITAL CAMERA장안성 북쪽 성벽

서안 성벽
서안 성벽은 중국에 남아있는 성벽 중에서 가장 크고 완벽한 고대 성벽건축물로, 고도 장안의 모든 역사를 한데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문화재입니다. 또한 그 독특한 매력으로 인하이 새인들에게 웅장하고 장대한 모습을 뽐내며 전 세계에 고대 중국인들의 깊은 지혜를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안 성벽은 기원후 582 년 (수나라 개황 2 년)에 건설되었고 오대, 송, 금,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홍무부년에 당나라 시대 당장안성 황성을 기초로 확대 및 복원하였습니다. 서한 성벽 둘레 길이는 13.74 km, 상부 너비 12 ~ 14 m, 하부 너비 15 ~ 18 m 입니다. 성벽에는 성보호 하천(包括护城河,해자), 조교(弔橋), 갑루(闸楼), 전루(箭楼), 성루(城樓), 각루(角樓), 적루(敌楼), 여인장(女儿墙), 타구(垛口) 등의 고대 군사 시설이 갖추이지 있습니다. 현재 중국 최초 중점보호문물 및 AAAA 급 관광경관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 성벽 도시 및 시안 시민들의 무한한 협력과 공동노력으로 양호하게 보호되고 있으며, 오랜 고도의 신비로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세월의 변천과 역사의 흔적, 문화 정수의 축적, 풍부한 인류문화 체험을 제공하며 현대인의 생활에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고있습니다. 성벽, 환성 공원 숲, 성보호 하천, 성 보호 하천 외부 도로, 순성항 등이 “벽림하로항”(성벽, 숲, 하천, 도로, 나루터)가 5위일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어, 서안의 역사 및 문화적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국제화된 대도시로서의 중요한 지표이자 정신적인 정원과도 같은 공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고적 보호 계승에 있어서 모범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시안시,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시,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청도 청도읍성,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있는 옛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쌓은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방어시설을 정비할 때 다시 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부분만 남고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고 있다.

성은 둘레 1.88 km 정도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7 m이며 북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동.서.북쪽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며, 고종 때 남문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문과 모서리부분에 치성을 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었다.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는 남원성이나 인근 언양읍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17-20200106청도군 읍치에 남아 있는 청도읍성.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읍성으로 둘레 1.8 km의 사각형을 평면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1-20200106청도읍성 동쪽 성벽. 약 340 m 정도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성벽에는 동문, 동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등 방어시설을 하고 이다.

청도 청도읍성 05-20200106읍성 동문터. 읍성 내부를 들어오는 주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위가 훼손되었다.

청도 청도읍성 03-20200106동문 남쪽에 있는 치성. 바깥으로 길게 나와 있어 동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2-20200106동쪽 성벽 바깥쪽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동쪽 바깥은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되어 있어 적을 방어하기 쉽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청도 청도읍성 07-20200106동문 안쪽 성벽. 바깥쪽은 큰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쪾은 토성처럼 흙으로 쌓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읍성 21-20200205복원하기 전 모습. 성벽은 무너지고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청도읍성 동쪽 성벽
청도읍성 동쪽 성벽은 읍성 동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 m이다. 성벽 구간은 2005년 지표조사에서 성 터 위에 집 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 폐문루, 치성 3곳이 확인되었다. 문헌에 동문루는 임진왜란 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 35년(1709)에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 22년(1798) 옛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벽 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 터, 2007년에 동문루 옆 치성, 2016 ~ 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다. 성벽 조사에서기초와 몸체(체성+내탁)가 확인되었다. 기초는 정리한 터 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마주보게 다진 3층이다. 기초 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다. 몸체는 기초 위에 약 5 m 너비로 성돌을 마주보게 내.왜벽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틈새에는 잔돌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몸체 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내탁했다. 동문루 터는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훼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폐문루 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 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성벽과 함께 쌓은 치성은 동문루 옆과 성벽 남.북쪽 모서리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정비사항은 2008년에 주차장, 관광안내소, 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2009 ~ 2010년에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에 동문루 남쪽의 성벽을 남은 성벽 위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대로 쌓았다. 성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읍성 04-20200106동문 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3-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새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5-20200106치성 아래에서 본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4-20200106청도읍성 남쪽 성벽.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해자처럼 연못이 있다.

청도 청도읍성 08-20200106북동쪽 성벽 위. 토성처럼 흙으로 쌓은 성벽길이 있으며 조총공격에 대비해 여장을 설치하였다.

청도 청도읍성 09-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1-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동문 부근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2-20200106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0-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북쪽 성벽. 멀리 치성과 북문이 보인다. 양쪽 치성에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청도 청도읍성 16-20200106고지도에 표현된 청도읍성. 평지에 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는 인근 언양읍성이나 남원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읍성내 있는 옛 청도군 관아 객사.

청도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km), 높이는 5자 5촌(약 1.65 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 (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를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