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성곽

영월 정양산성(사적)

강원도 영월읍 정양리에 있는 정양산성(사적)이다.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정양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축조연대는 알 수 없지만 축성방법이나 위치, 지형 등을 고려해 볼 때 인근 온달산성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에서 충돌했던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은 외성과 내성이 있으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는데 최고 높이는 11.5m에 달한다.

영월 정양산성(사적) 01-20220822<영월 정양산성(사적)>

내성동문터(성밖에서)<산성 성벽>

영월 정양산성(사적)<영월 정양산성 공간 배치>

영월 정양산성(사적) 02-20220822<산성 오르는 길에서 보이는 남한강(상류방향)>

영월 정양산성(사적) 03-20220822<정양산성과 남한강>

영월 정양산성(사적) 05-20220822<정양산성 아래에 있는 정조 태실>

영월 정양산성(사적) 04-20220822<도로에서 보이는 정양산성>

정양산성, 사적
정양산성은 영월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4개 (태화산성, 완택산성, 대야성)의 산성중 우두무리 주성에 해당되는 고산성으로 왕검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성은 삼국이 한강유역을 다투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성벽과 문터, 곡성과 치성, 그리고 후대의 외성과 차단벽을 갖춘 유일한 산성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있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부산 수영성, 경상좌수영 군영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경상좌수영성 옛터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좌수 수군 총책임자가 머물던 진영(鎭營)이다. 원래는 부산포에 있었는데 세조 때(1459년)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직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후 인조 때 수영만 일대가 홍수로 매몰되면서 부산항 부근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고 하여 효종 때(1652년) 다시 옮겨져 구한말 군사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벽 대부문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고 남문 홍예와 성벽 남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아 있다. 1995년 수영구가 분리되면서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곰솔과 푸조나무 등 오래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 수영성  02-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하마비>

옛 수영성 성벽은 공원 남서쪽 언덕에 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석은 현재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성벽은 조선후기 숙종 때 감만이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은 당시 축성방식이 적용되어 잘다듬은 큰 돌로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약 2,785m 높이는 4m 정도이며 4개의 성문과 4개의 수구, 3곳의 옹성과 여러 치성을 두고 있었다. 동문 바깥쪽 수영만에 군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었다.

부산 수영성<경상좌수영성 공간배치>

부산 수영성  09-20211125<공원 서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

부산 수영성  10-20211125<성벽>

수영성 공원 서쪽편 입구에는 옛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성문 앞에는 성을 수호하는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부산 수영성  01-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홍예기석>

부산 수영성  03-20211125<안쪽에서 본 모습>

경상좌수영성 남문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을 지휘하는 본부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성’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이다. 이 남문은 숙종 18년(1692)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동에 있는 옛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용되었고 1962년 6월 수영초등학교가 광안동으로 이전한 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현재 앞뒤에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또한 좌우 1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해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조선개 ‘박견’을 성문 앞에 둔 것으로 보아 경상좌수영성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남문 안쪽에는 이곳에 경상좌사영 관아가 있었던 옛터였음을 보여주는 좌수영성지곰솔(천연기념물)
좌수영성지푸조나무(천연기념물) 등의 고목들이 남아 있다.

부산 수영성  21-20211125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천연기념물)>

부산 수영성  04-20211125<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공원 안쪽에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각각 하나의 건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부산 수영성  15-20211125<수영고당이 있던 자리>

부산 수영성  12-20211125<독신묘와 수영산신당>

이곳에는 2017년까지 수영고당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고당은 임진왜란 대 왜병에 항거한 송씨할매를 기리는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독신묘와 산신당을 각각 하나의 건축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공원 서쪽에 있는 25의용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저항하다 죽은 수영성 성민을 기리는 곳이다. 당시 경상좌수사는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성민 25명과 수군이 왜군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산 수영성  11-20211125<25의용단>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동래 출신 어민으로 경상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다시 침범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부산 수영성  07-20211125<안용복 장군 사당>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하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수영성이 있던 곳을 199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부산 수영성  08-20211125<수영사적공원>

부산 수영성  05-20211125<공원 내부>

부산 수영성  14-20211125<뒷편 산책로>

좌수영성지, 부산시 수영구
이 성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던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좌수영이란 서울에서 보아 낙동강의 좌측을 담당하는 수군의 주진을 말한다.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본래 감만이포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고,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3)에 사천(수영천)의 범람으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1652년(효종 3)에 이곳은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또다시 옮겨왔다. 그 후 1852년(고종 32)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될 때까지 243년간 이곳에 있었다. 경상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그 관할하에 1개의 첨사영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덜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되었으며,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좌수영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의 총책을 맡고 있었다. 이 성의 초기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것은 165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 동원된 인력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돌에 언양,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지방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 같다. 성의 둘래는 양 2,784m, 성벽의 높이는 4m였으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리소흘로 대부분 폐허화되고, 지금은 성벽과 남문, 홍예,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최근에 시립박물관에서 부분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부산 동래읍성, 동래부 읍치

부산시 동래구 옛 동래부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동래읍성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말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일본과 교류하는 관문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원래 규모는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1km 정도의 일반적인 읍성이었는데 조선후기 영조 때(1731년)에 현재의 규모로 크게 증축하면서 평산성 형태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치 주변 도심의 성벽과 성문은 없어졌으며 마인산 주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북문과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의 시설과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부산 동래읍성 01-20211125<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06-20211125<서장대 부근 옛 성벽>

동래읍치 주산인 마안산을 중심으로 동서쪽 구릉과 읍치가 있는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다. 전체 규모는 둘레 약 3.8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읍성으로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를, 성문으로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을 두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19-20211125<북장대가 있는 마안산>

부산 동래읍성 18-20211125<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편 구릉>

부산 동래읍성 41-20211125
<동래읍성 축성비>

성문은 현재 북문과 북장대와 동장대 사이 언덕에 있는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은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한 조선후기 성문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앞쪽과 뒷쪽에 별도로 성문이 있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부산 동래읍성 20-20211125<북문(안쪽)>

북문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성문이라기보다는 비상시 퇴각하기 위한 암문 성격이지만 옹성과 문루를 갖추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부산 동래읍성 24-20211125<북문 바깥 옹성>

부산 동래읍성 23-20211125<옹성 내부>

부산 동래읍성 25-20211125<북문 바깥쪽 길>

부산 동래읍성 22-20211125<복원된 북문 동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5-20211125<북문 문루 옆에서 보이는 북문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26-20211125<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길>

부산 동래읍성 29-20211125<북문과 북장대 사이 성벽>

부산 동래읍성 28-20211125<북장대 아래 치성>

부산 동래읍성 30-20211125<치성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31-20211125<북장대 오르는 길>

북장대는 동래읍치 주산인 마인산 정상부에 있는 군사지휘소인 장대이다. 이곳에서는 동래읍치와 주변지역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부산 동래읍성 33-20211125<북장대>

부산 동래읍성 32-20211125<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래부 읍치>

부산 동래읍성 21-20211125<북문 서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4-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6-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5-20211125<북문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02-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로 연결되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4-20211125<북문 서쪽 구릉 정상부>

부산 동래읍성 03-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 성벽과 치성>

북문 서쪽 정상부에서 서장대 사이에는 조선후기에 쌓은 복원전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산 동래읍성 07-20211125<옛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8-20211125<허물어진 모습의 치성>

부산 동래읍성 09-20211125<치성 아래 복원된 성벽>

부산 동래읍성 10-20211125<서장대와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12-20211125<서장대>

부산 동래읍성 11-20211125<서장대 아래 성벽>

동래지역에는 삼한시대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가야 고분인 복천동고분군(사적)이 북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 14-20211125<서쪽 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고분군(사적)>

동래 읍성지 (東萊 邑城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 (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 (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 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藝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둔덕기성(사적), 견내량을 지키는 통일신라 산성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둔덕기성(屯德岐城, 사적)이다. 거제도 섬의 관문이자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이 견내량이 내려다 보이는 우봉산(해발 325 m)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7세기 신라 때 처음 쌓았으며 고려 때 보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상사리(裳四里)’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때 설치된 상군(裳郡)과 경덕왕 때 거제군의 치소(治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 무신란 때 폐위된 의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폐왕성(廢王城))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 기록에 남아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를 통제하기 위해 주요 거점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1-20220221<거제 둔덕기성(사적)>

둔덕기성은 우봉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26 m 정도이다.성벽의 높이는 최고 4.95 m 정도로 중간크기의 납작한 돌을 촘촘히 쌓은 통일신라 산성의 축성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 서, 남문 3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서문은 통일신라 산성에서 볼 수 있는 현문식 산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루을 올렸던 초석들이 성문터에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사적)<둔덕기성 공간배치>

거제 둔덕기성 (사적) 03-20220221<둔덕기성 내부로 올라가는 탐방로>

거제 둔덕기성 (사적) 04-20220221<복원작업하는 과정에서 만든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성문터는 아님)>

동문과 남문 사이 성벽 일부를 복원했는데 판석 형태의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신라 산성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에는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5-20220221<복원된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6-20220221<복원된 동남쪽 성벽(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0-20220221 <복원된 성벽 끝부분>

거제 둔덕기성 (사적) 09-20220221<남문 부근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2-20220221<남문 부근>

남문은 동쪽으로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과 한산대첩이 있었던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거림리 일대에서 성안으로 출입하는 성문인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 때 성벽을 보수하면서 성문을 새로 낸 것으로 밝혀졌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석이 확인되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4-20220221<남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5-20220221<남문과 주위 성벽(바깥쪽)>

남문지
둔덕기성의 남문지는 동쪽으로는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 일대가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지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밝혀 졌다. 둔덕기성 남문의 경우, 고려시대에 삼국시대 성벽 바깥쪽으로 성벽 일부를 확장하면서 새로 문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문지는 허튼층쌓기하여 삼국시대 문지에 비해 정교함은 떨어 진다. 통로부 내측에 전면 1칸, 측면 1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작은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지와 서문지 사이의 간문(間門)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 남문지 안쪽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성벽은 바른층쌓기 하였으며, 하부에는 성벽 보강시설인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6-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3-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안쪽)>

서문은 서쪽 견내량과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고려 때 성을 수리하면서 성문을 크게 하고 문루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큰 문루가 있었던 초석이 남아 있다. 견내량과 통영 방향에서 성안을 출입할 때 사용된 성문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8-20220221<서문 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9-20220221<서문과 문루 건물 초석>

거제 둔덕기성 (사적) 17-20220221<서문 남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0-20220221<서문 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1-20220221<서문과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6-20220221<서문 북쪽 성벽(안쪽)>

서문지(西門址)
둔덕기성 서문지는 서쪽으로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서문지는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 (1170년)를 전후하여 동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부의 고려시대 계단시설 아래에 삼국시대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서문지도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고려시대에 수축하여 사용 하였는데, 출입이 용이한 평문식으로 조사되었다. 문지는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 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웅장한 문루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서문 북쪽으로는 주위를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장대역할을 정상부가 있다. 정상부에는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몽돌을 모아 놓은 석환군과 식량 등을 저장했던 저장고가 있다. 정상부 전망대에 북쪽으로 고성 앞바다와 견내량 해협, 서쪽으로는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한산대첩 당시 견내량을 지나는 배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5-20220221<정상부 전망대>

거제 둔덕기성 (사적) 28-20220221<북쪽 고성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9-20220221<견내량과 통영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4-20220221<석환군>

석환군(石丸群)
석환은 인근 바닷가의 몽돌을 투석용 무기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성내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대부분 직경 10~20cm 크기의 원형 및 타원형 몽돌로서 성내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특히, 성내 정상부 암반의 남쪽에 연접한 장타원형의 넓은 범위에서 약 2,000여 개 정도로 추산되는 석환군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삼국 ~ 조선시대 성곽에서 성내 농성시 방어용 투석자로 사용된 석환이 흔히 발견되는데 이와 같이 대량으로 확인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남해 임진산성에서 석환군이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우리나라 산성 중 성내에 성황당을 짓고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사례도 있어 둔덕기성의 제사장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주변에서 출토된 기와 및 도기편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30-20220221<저장고 터>

저장고
둔덕기성의 성내 최북단에 위치하는 저장고는 성내에서 소요되는 여러 가지 식품류와 경작 등을 위한 씨앗류 등의 지장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장고는 먼저 고려시대 북쪽 성벽 하부의 자연암반층 및 기존 대지조성 층을 1~1.7m 깊이까지 방형으로 굴착한 후, 굴착면에 덧대어 방형석축을 조성하였다. 그 후 바닥과 사방에는 0.6~0.7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방온、방습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내부 에는 정방형으로 ‘田’자 형태의 목곽을 설치하고, 내부에 ‘十’ 자상으로 구획된 4개 의 공간에는 평평한 할석을 깔아 바닥면을 조성하였다. 저장고는 크게 1회 이상 수리, 보수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기와류 등으로 보아 삼국 ~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둔덕기성 저장고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인근의 고령 주산성 의 저장고(목곽고)와도 동일한 구조 및 성격을 보이고 있어 삼국시대 산성의 성내 저장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동문은 조선시대 오양역이 설치되었던 북쪽의 오량성과 남쪽 거림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안으로 들오은 출입문이다. 동문은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출입하는 현문식 성문 구조가 남아 있다. 성문 안쪽에는 고려 때 문루를 설치했던 초석들이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31-20220221<동문과 남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6-20220221<동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41-20220221<현문식 성문>

거제 둔덕기성 (사적) 35-20220221<동문 북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7-20220221<동문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2-20220221<동문 남쪽 성벽(바깥쪽)>

동문지
둔덕기성 동문지는 북쪽의 오량리와 남동쪽의 거림리에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종착지로서, 삼국 ~ 고려시대의 거제 치소지가 위치하는 거림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주요 통로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 되었 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 거제도 (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서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문지 아래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동문지는 사다리 등을 통해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현문(懸門, 일명 다락문) 구조이다. 통로부 너비는 약 8.8m에 이르며, 문지의 성벽 두께도 7~9m로 주변 성벽보다 훨씬 두껍게 축조하였다. 외벽은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축조 하였으며, 기저부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기단보축시설로 보강하였다. 고려시대의 동문지는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수축하여 현문식으로 사용하였다. 문지 성벽은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상당히 웅장한 문루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둔덕기성은 통일신라때 거제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내부에는 통일신라와 고려 때 치소역할을 했던 건물터가 있으며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모아 두었던 연못 형태의 집수조가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1-20220221<둔덕기성 내부>

거제 둔덕기성 (사적) 32-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3-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9-20220221<복원된 집수조>

성내 건물지
성내 건물지는 둔덕기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로서 둔덕기성 운용 당시의 정치, 행정, 생활, 제의 등과 관련된 시설로 구분된다. 특히, 성내 중심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기성의 핵심시설이 위치할 것으로 추정되어 2016년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국 ~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건물지의 기단석열, 초석 및 적심, 수혈 등의 유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40-20220221<둔덕기성 남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거제 둔덕기성(屯德崎城)은 7세기 신라 시대 축조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懸門式) 구조인 동문지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 시대에 보수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 인화문 토기, ‘상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청자 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이 성은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및 경덕왕대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는 등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등면과 둔덕면의 경계가 되는 우봉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526 m이고 최고 높이가 4.85 m이다. 성 안에는 여러 곳에 건물터와 연못 터가 남아 있고, 북쪽에는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던 수로 변에는 아직도 ‘전하도목(殿下渡目)’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으며 ‘고려골’이라 부는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왕을 받들어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둔덕면에 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오량성, 오양역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

경남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에 있는 오량성(烏良城)이다. 거제도 입구에 있는 오양역을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조선초 연산군 때(1500년)에 쌓은 성이다.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驛)을 지키기 위해 쌓았는데 일반적인 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성의 축성방법은 인근 읍성인 사등성, 고현성과 비슷하다. 오량역은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말에 폐지되었다가 조선초에 고성 읍치 부근에 있던 송도역과 거제현 읍치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편의를 위해 견내량(거제대교) 부근에 있는 현재의 위치에 역을 다시 설치하였다.

거제 오량성 01-20220221<거제 오량성>

지현사 손이순의 청에 따라 거제현의 오양역을 복구하다.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17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성의 둘레는 1,172 m, 성벽의 높이는 2.61 m, 성벽의 폭은 5 m 정도이다.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방어를 위해 모서리와 성문 옆에는 치성이 있다. 북쪽과 서쪽은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으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허물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북동쪽을 흐르는 하천을 천연해자로 하고 성벽 바깥에 해자를 파서 방어를 보완하였다.

거제 오량성<거제 오량성>

거제 오량성 31-20220221<둔덕기성(사적)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량성과 고성 앞바다>

북동쪽과 북서쪽 성벽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데 큰돌로 쌓은 석축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서리와 성문 옆에 방어를 위한 치성이 있다.

거제 오량성 03-20220221<서문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04-20220221<서문 북쪽 성벽(위)>

거제 오량성 14-20220221<서문 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02-20220221<서문 부근 치성>

거제 오량성 08-20220221<위에서 본 치성>

거제 오량성 10-20220221<치성 남쪽 성벽(위)>

거제 오량성 13-20220221<치성 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11-20220221<서문 부근 허물어진 성벽(위)>

거제 오량성 12-20220221<서문 부근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06-20220221<오량성 내부 마을>

거제 오량성 24-20220221<북서쪽 모서리 치성터와 서쪽 성벽>

거제 오량성 20-20220221<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23-20220221<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15-20220221<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19-20220221<허물어진 북문 부근 성벽>

거제 오량성 17-20220221<북문 옆 치성터>

거제 오량성 18-20220221<북문 동쪽 성벽(안쪽)>

오량성이 있는 곳은 거제도의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이 있었던 견내량(거제대교)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역(驛)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 규모의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량성 남쪽에는 견내량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통일신라 때 쌓은 둔덕기성(사적)이 있다.

거제 오량성 09-20220221<오량성에서 보이는 견내량(거제대교)>

거제 오량성
거제 오량성은 연산군 6년(1500)에 역을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만든 성이다. 처음에 보를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오량성으로 발전하였다. 오량성의 역은 고려 말에 폐지되어 고성의 송도역과 합해졌다가 세종 7년(1425)에 다시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는 1,150m, 성벽 너비는 4.5m 이며, 높이 4m 정도의 성벽이 남아있다. 성의 동서남북에는 성문이 있었고, 네모진 성벽의 모퉁이와 성문 주변에는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려고 성벽을 사각형으로 돌출되게 쌓은 치성이 8곳에 설치되었다. 성벽은 아래에 받침돌을 놓고 큰 돌을 안쪽으로 약간 들여서 세워 쌓은 다음에 그 위로 작은 돌을 눕혀 쌓는 조선 전기 읍성의 형태 이다. 성 밖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해자가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17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