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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면천읍성, 옛 면천군 읍치

충남 당진군 면천면에 있는 면천읍성(沔川邑城)이다. 조선초 세종 때(1439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읍치에 쌓은 읍성이다. 성을 둘레는 약 1,200m 정도로 큰 돌을 다듬어 쌓았았는데 바깥쪽은 석축이고 내부는 흙으로 덮어 경사진 토축을 이루고 있다. 서쪽과 남동쪽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남쪽 성벽과 남문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성문은 4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남문과 옹성을 복원해 놓았다. 조선초 해안에서 가까운 읍치에 쌓은 평지성으로 쌓은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와 내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1<당진 면천읍성>

면천군은 홍주진관에 속했으며 종4품 동첨절제사가 파견(면천군수가 겸임?) 되었으며, 산하에 수군(선군,船軍)이 배치되었다. 조선초에는 충청지역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면천지역으로 운송하여 창고에 두었으나 성종 때 공세곶으로 창고로 옮기면서 그 기능이 약해졌다. 경기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해산물과 소금의 산지이기도 했다. 읍치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읍성이 세워졌다.

충청도 면천군<면천읍성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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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군지도, 여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년>

 면천읍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면소재지로 도시화가 덜 진전되어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동쪽은 저수지를 쌓으면서 성벽이 훼손되었으나, 서쪽 성벽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서문이 있던 자리 남쪽은 원형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으며 북쪽은 복구되기 전 모습이 남아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6<서문터와 서쪽 성벽>

성벽은 바깥쪽은 큰 돌을 다듬어 석축을 쌓았는데 높이는 3.6m 정도이다. 안쪽부분은 흙으로 경사지게 쌓아 토축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바닥의 폭은 6.8m, 윗면의 너비가 2.4m이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9<바깥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2<안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3<성벽 위>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5<정비되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서문 북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4<서문 북쪽 성벽(안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7<허물진 성벽을 볼 수 있는 서남쪽 성벽>

남쪽 성벽은 최근에 복원공사를 하여 옛 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옹성이 있는 남문과 양쪽의 치성, 성벽 등이 복원되어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2<서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0<서남쪽 성벽(안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3<서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6<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6<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7<남쪽 성벽(안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7<남문과 주변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4<남문 동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9<남문 동쪽 성벽(안쪽)>

방어시설로는 치성 3곳이 확인되었으며 원래는 7곳의 치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문은 4곳에 두고 있으며 남문은 옹성을 쌓아 방어하고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4<서남쪽 치성>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3<남쪽에서 본 모습>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8<남문 동쪽 치성>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5<남문 옹성>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3<남문 옹성 입구>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0<남문 옹성 내부>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1<남문 문루>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8<내부에서 본 모습>

당진 면천읍성(남문)
면천읍성은 세종 21년(1439)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36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왜구의 공격을 막기 쉽고, 그 옆에 수로가 있다.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 시작한 면천읍성 복원 정비 사업으로 원기루 등 누각을 비롯한 남문의 여러 시설물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으며, 2014년에 완료하였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읍성 서쪽 치성과 주변 성벽에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남아 있다. 성돌에는 ‘기미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축성연도(세종21년)를 확인해 주고 주고 있다. 면천읍성은 충청도 인근 고을의 인원들이 파견되어 축성되었는데 책임 군현, 축성구간 등의 내용이 글로 새겨져 있다. 현재 글자가 새겨진 3개의 성돌이 확인되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1<글자가 새겨진 서쪽 치성 부근 성벽>

면천읍성 각자성돌, 500여년 전에도 공사실명제가 있었다.
면천읍성에는 읍성의 축조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각자 성돌이 남겨져 있다. 각자성돌은 면천읍성 공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돌에 책임 군현의 이름을 새긴 성돌이다. 면천읍성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에는 연도, 구간 책임 군현, 축성구간 등이 새겨져 있는데, 현재의 공사실명제로 공사가 끝난 후 그 구간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해당 군현에서 보수를 책임진다는 표시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는 50여군의 장정들이 면천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면천읍성의 축성에 많은 군현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각자성돌은 총 3개이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치성에는 ‘기미년’이라는 축성연대와 옥천이라는 고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옥천현에서 축성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2<글자가 새겨진 서치성 성돌>

1. 서치성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에는 ‘기미년 옥천서면 장육십척 사촌’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기미년은 세종21년(1439)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서 확인하는 축성기록과 일치한다. 옥천은 현재 충청북도 옥천으로 해당 구간부터 옥천현이 축성한 구간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쪽 성벽에는 ‘석성종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볼 수 있다. 석성현 인원이 축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51<’석성종면’이 새겨진 성돌>

2. 읍성의 서벽에는 ‘석성종면’이라고 새겨진 성돌이 확인된다. 석성은 현재 충남 부여군 석성면으로 해당 군현의 축성 흔적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치성 끝 부분에는 ‘기미년’이라는 글자와 함께 ‘옥천’, ‘결성’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옥천현과 결성현 인원이 담당한 부분의 경계로 보인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52<’옥천’과 ‘결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

3. 서치성 끝 지점에서 확인된 각자성돌은 ‘기미년 옥천 종말’과 ‘기미년 결성수공 사십육척 팔촌 시면’이라 새겨져 있는데 각각 옥천의 끝 지점과 결성(충남 홍성군 결성면)의 첫 지점을 알려주는 성돌이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면천군(沔川郡)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허물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2007년 옛 동헌 출입문인 풍락루를 복원했으며, 면천초등학교가 사용했던 객사터는 2016년 학교가 이전하면서 객사건물을 복원하였다.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 성벽과 객사터에 남아 있는 수령 1,100년의 면천 은행나무, 객사터 앞 오래된 낡은 주택들과 상점들이 읍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1<면천읍치>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9<면천군 객사>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7<동헌 출입문인 풍락루>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0<객사 마당에 남아 있는 수령 1,100년 은행나무>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8<읍치 마을>

당진 면천읍성,
이 읍성은 1439년(세종21)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36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바깥면에 옥천.진잠.석성 등 충청도 관내의 군현 명칭이 새겨진 성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읍성을 쌓는데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성을 쌓은 규정이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해안지역 읍성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당진군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면천군(沔川郡)”, sillokwiki, 2023년

서산 해미읍성(사적), 충청병영이 있었던 읍성

충남 서신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해안지역을 침입하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 중 하나이다. 조선 태종 때(1471년)에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옮기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종 때 (1421년)에 완공하였다. 조선후기 효종 때(1652년)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지역 군사 거점이었다. 이후에도 무관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인근지역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70년대 이후 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등 유적지를 재정비하여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과 성문 등 주요 시설들이 잘 남아 있어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읍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1<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해미읍성(사적), 2009년>

해미읍성은 북동쪽의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넓은 평지에 성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1,5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다. 읍성은 서산 천수만 바다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있다. 남쪽으로 해미천, 동쪽으로는 황락천, 서쪽으로는 반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북쪽을 통해 가야산(해발 678m) 주변 산맥과 연결된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 주변 위성사진, 2023년>

 성벽의 높이는 4.9m이며 상부의 폭은 약 2.1m정도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큰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위쪽는 작은 돌을 사용했으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팠으며 주위에 탱자를 돌려 심어 방어를 보완하였다. 성벽 위에 조총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6<해미읍성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6<아래쪽 큰 돌로 쌓은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8<안쪽 흙으로 쌓은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 위>

해미읍성<성벽 바깥 해자>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천수만 바다가 있는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초에 쌓은 읍성의 성문으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옹성은 없다. 출입문은 돌로 쌓은 홍예가 있으며 그 위에 문루를 두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2<진남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7<안쪽에서 본 모습>

진남문은 마차 1대정도가 지나갈 정도이다. 읍성 성문의 평균적인 도로폭으로 보인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5<홍예>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4<성문 앞에 세워진 공덕비>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2009년>

성문 안쪽에는  1491년(홍치 4년)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축성연대를 기록해 놓은 글씨>

해미읍성은 조선초에 쌓은 읍성으로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천수만 바다를 향하고 있는 서남쪽에 2곳에 치성을 두고 있다. 규모는 약간 큰 편으로 포대를 설치할 수 있는 규모이나 이를 위한 방어시설은 없고 누각만 올려져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3<진남문 서쪽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문루 옆 성벽과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진남문과 성벽>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성벽과 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과 주변 성벽>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안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옆 성벽에서 보이는 관아와 청허정이 있는 동산>

SANYO DIGITAL CAMERA<서남쪽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문루>

서문은 1974년 읍성을 정비할 때 복원되었다. 서문에는 지성루(枳城樓)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었던 사실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에 옹성이나 치성 등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문>

SANYO DIGITAL CAMERA<서문 남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4<서문과 주변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0<안쪽에서 본 서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1<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9<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2<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3<북서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8<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0<북동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2<동문>

SANYO DIGITAL CAMERA<동문 문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3<동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5<동문 남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4<동문 남쪽 성벽>

읍성 내부에는 해미읍성이 폐지된 후 관아와 많은 민가들이 모여 있다. 객사는 초등학교로, 동헌은 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1970년대 읍성 복원공사를 하면서 민가들은 읍성 바깥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민가 몇채가 복원되어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9<진남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읍성 내부>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6<읍성 내부>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0<해미현 관아>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1<동헌>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2<객사>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4<동문에서 본 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5<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읍치>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7<청허정>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6<청허정에서 멀리 보이는 천수만 바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에서 보이는 민가>

SANYO DIGITAL CAMERA<민가>

서산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시대 충청도의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를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 한다. 이곳은1652년(효종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김해 김해읍성, 옛 김해도호부 읍치에 쌓은 읍성

경남 김해시 동상동 옛 김해도호부 읍치에 남아 있는 김해읍성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이다. 일본과 가까운 까닭 지리적인 상황으로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던 읍성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김해읍성은 둘레 4,418척(약 1.3km) 정도이다.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 두고 있었다. 왜구 대응하기 위해 쌓은 전형적인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읍성북쪽에는 산성인 분산성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과 성문은 대부분 철거되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008년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던 북문(공진문)을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읍성 북문(공진문)>

병조에서 각 지역의 성 쌓는 공사와 관련하여 아뢰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금년 안으로 충청·전라·경상 3도의 각년(各年)에 시작해 쌓는 성(城)의 마치지 못한 것을 금년 안으로 마쳐 쌓게 하옵시며, 그리고, 남해에 쌓는 성은 일찍이 선군(船軍)을 부리어 쌓게 하였사오니, 극심한 추위와 장맛비와 더위와 방어하기에 가장 긴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쌓게 하고, 또 해문(海門)의 요충(要衝)인 김해의 읍성(邑城)도 금년에 시작하여 쌓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1일 을사 1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김해시 구도심에 있던 성벽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을 찾아 보기는 힘들다. 북문은 성벽과 옹성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읍성 고지도>

김해읍성<김해읍성 위성지도>

옛 김해읍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공진문은 2008년에 복원되었다. 성문은 옹성 형태를 하고 있있는데 조선후기에 읍성을 중건하면서, 당시의 축성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문루에는 조총을 방어하기 위해 총구를 설치해 놓는 판문을 달아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과 문루>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문과 문루>

옹성은 성문 바깥쪽에 반달모양의 장애물 형태의 옹성을 쌓아서,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조선후기 중국 성곽의 사례를 참조하여 많이 축성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옹성 성벽(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옹성 성벽(안쪽)>

OLYMPUS DIGITAL CAMERA<옹성 출입로>

읍성 성벽은 일제강점기 대부분 허물어지면서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수로왕릉 부근에서는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서문터 부근>

김해읍성 북문, 김해시 동상동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16년(1434)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문종 원년(1451)에는 둘레 4,418척, 높이 13척, 여장 931개소, 적대, 20개소, 옹성을 갖춘 문 4개소, 냇물 한곳, 우물 28곳, 해자는 둘레 4,683척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김해읍지>에 나타난 읍성 4대문의 명칭은 각각 해동문, 해서문, 진남문, 공진문으로서 북문인 공진문은 현종7년(1666)에 부사 이화악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읍성은 일제강점기에 읍성철거정책으로 철거되고 고종 32년(1895) 이후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현재의 김해읍성 북문은 동상동 현 위치에 성벽과 옹성일부가 잔존하던 것을 2006년부터 2년간 전면 발굴을 하여 하부구조 및 축성기법을 조사, 분석하고 <김해부내지도> 등의 고지도류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2008년 3월 복원하였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조선왕조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영월 정양산성(사적)

강원도 영월읍 정양리에 있는 정양산성(사적)이다.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정양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축조연대는 알 수 없지만 축성방법이나 위치, 지형 등을 고려해 볼 때 인근 온달산성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에서 충돌했던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은 외성과 내성이 있으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는데 최고 높이는 11.5m에 달한다.

영월 정양산성(사적) 01-20220822<영월 정양산성(사적)>

내성동문터(성밖에서)<산성 성벽>

영월 정양산성(사적)<영월 정양산성 공간 배치>

영월 정양산성(사적) 02-20220822<산성 오르는 길에서 보이는 남한강(상류방향)>

영월 정양산성(사적) 03-20220822<정양산성과 남한강>

영월 정양산성(사적) 05-20220822<정양산성 아래에 있는 정조 태실>

영월 정양산성(사적) 04-20220822<도로에서 보이는 정양산성>

정양산성, 사적
정양산성은 영월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4개 (태화산성, 완택산성, 대야성)의 산성중 우두무리 주성에 해당되는 고산성으로 왕검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성은 삼국이 한강유역을 다투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성벽과 문터, 곡성과 치성, 그리고 후대의 외성과 차단벽을 갖춘 유일한 산성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있다.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영월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부산 수영성, 경상좌수영 군영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경상좌수영성 옛터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좌수 수군 총책임자가 머물던 진영(鎭營)이다. 원래는 부산포에 있었는데 세조 때(1459년)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직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후 인조 때 수영만 일대가 홍수로 매몰되면서 부산항 부근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고 하여 효종 때(1652년) 다시 옮겨져 구한말 군사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벽 대부분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고 남문 홍예와 성벽 남서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아 있다. 1995년 수영구가 분리되면서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곰솔과 푸조나무 등 오래된 고목들이 남아 있어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 수영성  02-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하마비>

옛 수영성 성벽은 공원 남서쪽 언덕에 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석은 현재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성벽은 조선후기 숙종 때 감만이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은 당시 축성방식이 적용되어 잘다듬은 큰 돌로 쌓은 석성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약 2,785m 높이는 4m 정도이며 4개의 성문과 4개의 수구, 3곳의 옹성과 여러 치성을 두고 있었다. 동문 바깥쪽 수영만에 군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었다.

부산 수영성<경상좌수영성 공간배치>

부산 수영성  09-20211125<공원 서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

부산 수영성  10-20211125<성벽>

수영성 공원 서쪽편 입구에는 옛 남문에 사용되었던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성문 앞에는 성을 수호하는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부산 수영성  01-20211125<수영성 남문 홍예와 홍예기석>

부산 수영성  03-20211125<안쪽에서 본 모습>

경상좌수영성 남문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을 지휘하는 본부인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성’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이다. 이 남문은 숙종 18년(1692)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동에 있는 옛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용되었고 1962년 6월 수영초등학교가 광안동으로 이전한 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현재 앞뒤에 홍예와 홍예기석이 남아 있다. 또한 좌우 1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해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조선개 ‘박견’을 성문 앞에 둔 것으로 보아 경상좌수영성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남문 안쪽에는 이곳에 경상좌사영 관아가 있었던 옛터였음을 보여주는 좌수영성지곰솔(천연기념물)
좌수영성지푸조나무(천연기념물) 등의 고목들이 남아 있다.

부산 수영성  21-20211125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천연기념물)>

부산 수영성  04-20211125<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공원 안쪽에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각각 하나의 건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부산 수영성  15-20211125<수영고당이 있던 자리>

부산 수영성  12-20211125<독신묘와 수영산신당>

이곳에는 2017년까지 수영고당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고당은 임진왜란 대 왜병에 항거한 송씨할매를 기리는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경상좌수영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하나의 건물에 있었는데 최근에 독신묘와 산신당을 각각 하나의 건축물로 다시 지어 이전하였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공원 서쪽에 있는 25의용단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저항하다 죽은 수영성 성민을 기리는 곳이다. 당시 경상좌수사는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성민 25명과 수군이 왜군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산 수영성  11-20211125<25의용단>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동래 출신 어민으로 경상좌수영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다시 침범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부산 수영성  07-20211125<안용복 장군 사당>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동남해안을 관할하던 수군 군영인 경상좌수영성이 있던 곳을 199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수영성과 관련된 문화재를 정비 복원하여 공원을 조성하였다.

부산 수영성  08-20211125<수영사적공원>

부산 수영성  05-20211125<공원 내부>

부산 수영성  14-20211125<뒷편 산책로>

좌수영성지, 부산시 수영구
이 성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곳에 설치되었던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좌수영이란 서울에서 보아 낙동강의 좌측을 담당하는 수군의 주진을 말한다.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본래 감만이포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고,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3)에 사천(수영천)의 범람으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1652년(효종 3)에 이곳은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또다시 옮겨왔다. 그 후 1852년(고종 32)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될 때까지 243년간 이곳에 있었다. 경상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가 주재하고, 그 관할하에 1개의 첨사영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덜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되었으며,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좌수영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의 총책을 맡고 있었다. 이 성의 초기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것은 165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 동원된 인력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돌에 언양,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지방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 같다. 성의 둘래는 양 2,784m, 성벽의 높이는 4m였으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 치성, 보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리소흘로 대부분 폐허화되고, 지금은 성벽과 남문, 홍예,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최근에 시립박물관에서 부분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