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성곽

거제 옥산성, 거제현 읍치를 지키는 작은 산성

경남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옥산성(玉山城)이다. 거제현 관아가 있는 동상리 뒷편 수정봉(141m) 정상부에 쌓은 산성으로 둘레 778.5 m이다. 외형상 삼국시대에 쌓은 작은 산성처럼 보이지만 구한말 고종 때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곳에 있는 비석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1873년) 거제부사가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한 읍치를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쌓으려 했으나 조정의 허락을 받지 못해 관아 뒷편 수정봉에 산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했다고 한다. 성안에는 큰 우물과 군사업무 목적으로 지은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었던 구한말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거제 옥산성 13-20220221<거제 옥산성>

성문은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과 서문의 규모가 크고 형태도 잘 보존되어 있다. 서문은 관아가 있는 읍치와 연결되는데 약 700 m 정도 떨어져 있다.

거제 옥산성<거제 옥산성>

거제 옥산성 3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3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12-20220221<서문 내부>

동문을 들어서면 옥산성 정상부에 세워진 작은 정자가 보인다. 원래 사방을 감시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약간의 평지와 내성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낮은 성벽이 남아 있다.

거제 옥산성 01-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2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서문>

거제 옥산성 03-20220221<옥산성 내부에 있는 낮은 성벽>

거제 옥산성 02-20220221<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남쪽 성벽에는 작은 암문으로 보이는 성문이 보인다.

거제 옥산성 05-20220221<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5-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4-20220221<남쪽 성벽 아래 지역>

옥산성 동쪽편에 약간의 공간이 있으며, 군사업무를 위한 건물이나 창고 등은 동문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거제 옥산성 1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1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08-20220221<동문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06-20220221<동문 안쪽 건물터가 있는 곳>

거제 옥산성 0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동문>

거제 옥산성 14-20220221<동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옥산성 내부>

거제 옥산성 16-20220221<건물터>

2019년 도지정문화재 보수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돌로 쌓은 기단과 계단을 갖춘 초석이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높이가 약 1m정도인 기단은 처음 축조된 기단석에 덧붙여 한차례 증축한 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계단은 기단부 앞쪽에 3개가 설치되었다. 확인된 초석으로 보아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지로 규모는 길이 17.5m 너비 5.6m, 면적 98m2이다. 건물지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고, 벽의 기초부에 회백색의 점토를 발라서 미장하였으며,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출토된 기와로 보아 건물지의 축조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판단되며, 이 건물지 왼쪽에 세워져 있는 ‘옥산금성축성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 건물은 벽에 회를 발라 미장한 점, 바닥에 박석을 깐 점, 그리고 난방시설인 온돌 시설이 없는 점으로 보아 주거시설이라기 보다는 행정 또는 사무 등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옥산성 15-20220221<옥산성 정상부로 오르는 길>

옥산성 정상부에는 장대 역할을 했던 자리에 작은 정자가 있다. 정자 동쪽로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우물과 건물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옥산성 18-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17-20220221<우물>

거제 옥산성 19-20220221<발굴  현장>

거제 옥산성 23-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거제현 읍치>

거제 옥산성 26-20220221<옥산성 북쪽>

거제 옥산성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28-20220221<북쪽 성벽>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경주 읍성(사적), 경주부 읍치

경북 경주시 북부동에 있는 경주 읍성(사적)이다. 조선시대 경주부 읍치가 있던 읍성으로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나 고려말 우왕 떄(1378)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해 해안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빼앗긴 경주읍성을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다시 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경주읍성은 조선초부터 여러차례 수리를 했으며 그 내용이 기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향일문(동문) 남쪽 성벽 일부와 치성 2곳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일부 복원되어 읍성을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읍성 (사적)>

<문종실록>에 따르면 읍성은 둘레 1,904 m, 높이 약 5.4 m 정도였다고 한다. 읍성 성문으로는 징례문(남문), 향일문(동문), 망미문(서문), 공진문(북문)이 있었으며 징례문 문루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벽 앞으로 돌출되어 성문을 호위할 수 있는 치성(雉城)과 성벽 바깥에는 물이 있는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 남쪽 약 50 m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쪽 성벽과 향일문을 복원하였다.

경주읍성<경주 읍성>

OLYMPUS DIGITAL CAMERA<50 m 정도 남은 동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 2번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치성과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주택가로 바뀐 2번째 치성 남쪽편 성벽터>

DCIM103MEDIADJI_0914.JPG<복원된 동문과 동쪽 성벽>

경주읍성
이 성은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축읍성으로 둘레는 2,409 m이며, 현재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이래 역대 고려왕들은 경주를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하고 994년에는 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성은 고려 현종 3년(1012년) 축성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3.6 m 정도이나 시가지 확장에 따라 대부분이 헐리고 90 m 가량의 성벽만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월성(사적),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경주 월성(月城, 사적)이다. 삼국시대 신라 5대 파사왕이 110년에 성을 쌓고 도성을 옮긴 이래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궁성 역할을 했던 곳이다. 남천 북쪽 초승달처럼 생긴 지형에 성을 쌓았다. 동,서,북쪽에는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았으며, 남천이 흐르는 남쪽은 자연지형을 활용했다. 북쪽과 동,서쪽 성벽 아래에는 방어시설로 해자를 만들었다. 성곽의 입지요건이나 축성방법 등에서 대구 달성,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삼국시대 이전 삼한시대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월성(사적)>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 57년 11월(음) )
탈해(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功)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 아래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南解王) 5년(8)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년(10)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寡人)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탈해(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을 쌓다 ( 101년 02월(음) )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 101년 07월(음) )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월성은 둘레 2,400 m, 동서길이 900 m, 남북길이 260 m 규모로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半月城), 신월성(新月城)이라 불렀으며 궁궐이 있어 재성(在城)으로도 불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왕 때 성을 쌓고 궁성을 옮겼으며 문무왕 때 동궁과 월지, 첨성대 일대가 궁성에 편입되면서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원래는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었는데 후대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특유의 석축성으로 형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경주 반월성<경주 월성(사적)>

경주 시가지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을 따라 쌓은 삼한시대 토성(土城)이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월성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흘러 형산강과 합류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경주 월성(동쪽)>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에서 본 월성(서쪽)>

OLYMPUS DIGITAL CAMERA<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과 남쪽 성벽>

월성에는 많은 성문이 있었는데 현재는 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와 월정교와 연결되는 서문터가 확인되고 있다. 동문터 발굴조사 결과 앞면 1칸, 옆면 3칸의 성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 출입문으로는 작은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동궁과 월지로 연결되는 동문터>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신라와 백제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성벽은 너비 40 m, 높이 10 m 이상의 상당히 큰 규모이다. 성벽의 재료는 볏집, 점토, 건물벽체 등 다양하나 재료를 사용했으며 윗쪽에는 자연석을 견고히 쌓고 있다.  월성은 4세기 소지왕 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고구려 산성 축성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문 옆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동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부근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으로 옮겨 놓은 석빙고>

SANYO DIGITAL CAMERA<작은 성문처럼 보이는 북쪽 성벽>

월성 북쪽에서 계림과 대릉원으로 출입하는 성문처럼 보이는 출입문을 볼 수 있는데 설명자료 등에는 성문터였다는 내용은 없다

SANYO DIGITAL CAMERA<북쪽 성문 부근 성벽>

SANYO DIGITAL CAMERA<월성 안쪽에서 본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북쪽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북쪽 출입문 서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성벽과 해자>

성안에는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 옮겨온 석빙고(보물)도 있다. 건물로는 월상루, 망덕루등의 누각과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과 내성 등이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성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월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동문 안쪽 성벽에 위치한 석빙고(보물)>

SANYO DIGITAL CAMERA<월성 내부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으로 연결되는 성문 부근 건물터>

월성은 남쪽을 흐르는 남천이 해자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쪽, 북쪽,ㅡ 서쪽으로는 인공적으로 도랑을 파서 해자를 조성했다. 해자는 월성을 크게 수리한 소지왕 때(5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월성이 동궁과 첨성대 일대로 확장되면서 조경적인 역할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남쪽, 복원이 완료된 석축해자>

월성해자는 1980년대 이후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람을 묻은 인골을 비롯하여 목간, 토기, 기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해자는 약 500년 동안 땅을 파서 만든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음이 확인되었다. 월성 부변에는 해자가 10개 이상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연못이 여러 개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문 북쪽 성벽 아래 발굴과 복원이 진행중인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아래 5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에서 본 모습>

북쪽 성벽 아래 4호 해자는 동서의 길이가 약 80 m, 남북 약 40 m에 달하는 장타원형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둥근 형태의 강돌들을 이용하여 석축 해자를 조성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그 안쪽으로 쌓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비가 완료된 4호 해자>

SANYO DIGITAL CAMERA<2호 해자, 3호 해자, 정비되기 이전 모습>

SANYO DIGITAL CAMERA<계림 뒷편 1호 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때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동궁(東宮)을 처음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궁궐이 월성 밖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월성 해자 북쪽에서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첨성대는 궁궐에서 창경궁 관천대와 비슷한 역할과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 679년 08월(음) )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SANYO DIGITAL CAMERA<1호 해자와 계림 사이 계림 남편 건물터>

월성 북쪽편에는 계림 남쪽과 북쪽, 첨성대 남쪽에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내물왕릉과 계림 부근, 첨성대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제의시설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림에서 보이는 계림 북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월성에서 대릉원으로 연결되는 길>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계림 북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첨성대 남쪽편 건물터>

 

경주 월성(慶州 月城), 사적, 경북 경주시 인왕동 387-1
이 곳은 신라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 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月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른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 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후 파사왕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 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 시설이 되었고, 동쪽 · 북쪽 ·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도랑인 해자(子)를 팠다. 남문, 북문, 인화문 등과 임해전(臨海殿)으로 통하던 임해문이 있었으며, 그 밖에 많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 얼음창고인 석빙고가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명활성(사적), 신라 경주를 방어하는 주요 산성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명활성(明活城, 사적)이다. 이 성은 경주 동쪽 명활산에 있는 둘레 약 6 km의 신라 산성이다.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이다. 성을 쌓은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405년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처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선덕여왕 때 비담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명활성은 경주에서 동해안 감포와 연결되는 도로와 불국사를 통해 울산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지나가는 주요 교통로에 있다. 동쪽에서 신라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았던 오래된 신라 산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명활성(사적)>

명활산은 신라 6촌 중 명활산고야촌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높지 않은 산이나 북쪽 악산과 함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북천이 흐르고 있다. 교통로를 지나가는 군사들을 제압하기 용이한 곳에 산성을 쌓고 있다. 동해안을 통해 경주를 공격하는 왜(倭)를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방어시설이다.  고구려의 압력이 심했던 5세기에는 궁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주 명활성 (사적)
<경주 명활성 위치>

명활성을 수리하다 ( 473년 07월(음) ), [16년(473)〕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였다.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 475년 01월(음) ), 18년(475) 봄 정월에 왕이 명활성(明活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자비 마립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명활성, 또 신월성(新月城)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6보였다.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제3 지리- 신라 명활성,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는 월성 남쪽의 남천, 서쪽의 형산강, 북쪽의 알천이 자연스럽게 해자를 형성하고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쉬운 지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과 북천(알천)>

성벽은 6세기 이전에 처음 쌓았으며 후대 여러차례 보수를 하면서 견고한 신라 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방어가 용이한 능선에는 초기 성벽 형태인 토성을 그대로 두고 계곡이나 방어에 취약한 곳을 석축으로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산  계곡에 있는 성벽(복원)>

명활성은 성벽을 쌓은 석축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는 남아 있던 일부성벽을 보완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석축은 꽤 큰 자연석을 다듬어서 2층으로 쌓았는데, 석성과 토성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활성 석축>

2012년 당시 명활성은 복원이 진행중이었는데 주변에 석축을 쌓은 많은 석재들을 볼 수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이 진행중인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옛 모습을 복원하고 있는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복원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구역, 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능선에서 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도 석축을 쌓고 있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이어지는 명활성 성벽에는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초기에 쌓았던 토축을 계속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으로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토축으로 보이는 경사진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능선에서 보이는 명활산>

명활성은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확장되어다. 진흥왕 때(544년) 다시 쌓았으며 진평왕 때(593년) 성벽을 확장했다. 진흥왕 때 성벽을 다시 쌓으면서 그 내역을 기록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었으며 안압지에서 ‘명활산성비’로 추정되는 비석조각이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경주 명활산성비, 551년, 경주 명활산성>

551년 11월 중에 명활산성을 쌓고, 거기에 관여한 지방관, 역부를 동원한 지방의 촌주, 공사의 실무자와 공사내용, 비의 위치, 공사기간, 비문을 작성한 사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비는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나오는 최초의 것으로 군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통일기 이전 신라의 신분제와 관등제, 역역동원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명활산성비, 삼국시대(신라) 551년, 경주 안압지>

명활산성(明活山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산 334
이 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하는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토성(5km)과 석성(4.5km)이 함께 있다. 신라 실성왕(實聖王) 4년(405)에 왜병(倭兵)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산성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자비왕(慈悲王) 18년(475)에는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가 소지왕(昭知王) 1년(479)부터 월성(月城) 으로 다시 옮겼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는 비담(硏)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金碩信)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1988년 성 주변에서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만든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를 발견하여 당시의 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

 

 

경주 관문성(사적), 왜(倭)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장성

경북 경주시 외동읍, 울산 북구 범서읍 모화리 등에 있는 통일신라 성벽인 관문성(關門城, 사적)이다. 왜(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길이 12 km에 이르는 장성(長城, Wall)이다. 경주와 울산 경계를 따라 7번 국도와 14번 국도 주변에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장성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잘 다듬을 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이전에 쌓은 산성에 비해 기술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때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잘 다듬은 돌을 5단 내지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는데, 위로 쌓아 올리면서 폭을 좁혀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는 모벌군성 또는 모벌관문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에 이곳을 관문성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관문성(사적), 경주와 울산 범서읍을 연결하는 14번 국도를 막고 있는 성벽>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慶州)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日本)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 5자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掌員)은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개원 21년 계유(癸酉)(733년)에 당나라 사람들이 북쪽 오랑캐(北狄)를 치려고 신라에 청병하여 사신 6백 4명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효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022년)

경주 서남쪽 치술령(해발 765 m)과 동남쪽 외동읍 모화리 삼태봉(해발 630 m) 사이를 성벽으로 막고 있다. 가운데에는 있는 순금산(해발 290 m)과 천마산(296 m)과 양쪽에는 산성형태의 성벽을 쌓고 있으며 7번 국도와 14번 국도 주변에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장성을 이루고 있다.

경주 관문성(사적)
<경주 관문성 일대>

관문성 남쪽으로는 경주에서 발원하여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동천으로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농경지들이 있다. 7번국도에는 높은 고개나 장애물이 없어 왜(倭)가 신라를 침범한다면 울산항에서 하루정도면 경주까지 도착할 수 있는 짧은 거리이다. 삼국통일 이후 백제와 동맹관계였던 왜(倭)에 대해서 문무왕을 비롯하여 많은 통일신라의 집권자들이 고민했던 부분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정상아래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울산 북구 동천 일대>

관문성<7번국도 동쪽 삼태봉으로 연결되는 성벽>

7번국도를 따라 흐르는 태화강 지천인 동천 주위는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관문성은 그 중 폭이 좁은 곳에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평지에 쌓은 성벽은 약  km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천 주변 성벽이 있었던 지역>

관문성은 동천 옆 위치한 순금산과 천마산을 지나 치술령까지 연결된다. 순금산 일대에는 방어에 용이하도록 테뫼식 산성처럼 성벽을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천 서쪽편 순금산 일대>

순금산 일대에는 성벽이 일부 남아 있고 주변 경치와 지형적 조건 등을 살펴볼 수 있어 관문성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관문성 탐방로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에서 전망이 좋은 지점>

OLYMPUS DIGITAL CAMERA<옛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에서 볼 수 있는 성벽의 흔적>

OLYMPUS DIGITAL CAMERA<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순금산 정상부 부근>

삼국시대 박제상의 전설이 남아 있는 치술령 아래 14번 국도 옆 마을에는 관문성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은 잘다듬은 큰돌로 아래부분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다는데 그 모습이 잘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4번국도를 막고 있던 관문성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 남아 있는 성벽을 쌓았던 큰 돌들>

관문성 성벽에서 10개의 석각이 발견되었는데, 구간별로 축성을 담당한 군현이 작업한 구역 등을 기록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글자새김돌,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관문성 글자새김돌(복제품), 경주박물관, 2012년>

관문성(關門城,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외
관문성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왜구를 막고자 쌓은 것이다. 이 성은 경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21 km 떨어진 외동읍 부근의 산에 축조되어 있다. 한 개의 성이 아니라 치술령(鶴述嶺)과 모화리 동편의 산 사이에 길이 12 km 정도의 장성과, 양남면 신대리의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 km 정도의 두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치술령에서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의 경계를 따라 신대리 동쪽 산까지 이른다. 관문성을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사람들은 만리성(萬里城)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터로 추측되는 석축이나 창고터, 병사터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현존하는 남산성과 관문성의 석벽을 비교해 볼 때,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서 관문성을 쌓은 기술이 훨씬 발달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문화재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5.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