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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호암산성(사적), 통일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쌓은 산성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호암산성(사적)이다.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호암산(해발 347 m) 남쪽 정상부에 둘레 1,250 m 의 성벽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안양천을 따라 안양에서 한강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와 멀리 대부도와 인천 사이의 서해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쌓은 한강유역에 쌓은 산성 중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다음으로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호암산성은 현재 약 300 m 정도이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내에는 한우물이라 불리는 큰 연못과 정상부의 작은 연못, 4곳의 건물 등이 남아 있으며 우물 근처에서 개모양의 석수상이 발견되어 북문터 안쪽에 세워져 있다. 우물에서는기와, 청동숟가락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1-20191203호암산 정상부 아래 능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호암산성(사적). 그 너머로 금천구, 구로구와 경기도 광명시, 시흥시 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2-20191203호암산성 북문터. 호암산 정상에서 능선길을 따라서 내려오면 북문을 통해 산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1-20191203산성을 들어서면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개모양의 석수상을 볼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20-20191203전시해 놓은 석구상.

석구상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경기읍지』의 「시흥읍지」에 있다. ‘호암’이라는 바위가 현의 진산인 금지산(금주산, 지금의 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의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해태상이라 부르기도했으나 그 형태가 개에 가깝다고 하여 석구상이라고 부른다. 또 1990년 제1우물지 발굴조사 당시 조선시대 건축물에서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 m, 폭 0.9 m, 높이 1.0 m 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2-20191203석구상을 지나면 통일신라 때 쌓은 석축이 남아 있는 약 300 m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1-20191203남쪽 장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어지는 성벽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3-20191203호암산성 동쪽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 장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4-20191203이곳에서 보이는 호암산성 동쪽편. 관악산과 삼성산 등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주변지역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5-20191203남쪽 건물 등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길. 이 부근 성벽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6-20191203호암산성 내 건물이 있었던 곳. 정상부에 약간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8-20191203건물터임을 알려주는 안내문.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17-20191203반대쪽에는 작은 우물터가 있다.

제2우물지는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2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이다. 길이 18.5 m, 너비 10 m 이상, 추정깊이 2 m 이상의 규모이다. 길이 50 cm, 너비 35 cm, 높이 25 cm 가량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ㅔ단(높이 1.75 m)까지 쌓았는데 두 번에 걸쳐 15 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된다. 바닥조성이나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등이 제1우물과 유사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에는 ‘잉벌내역지내말’이라는 글자가 새겨자 있는데 숟가락의 ‘잉벌내’는 고구려시대의 금천구 지명인 ‘잉벌노’와 유사하다.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지명은 여전히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잉벌노를 쓰던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벌내(한주 율진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금천지역)에 사는 내말, 즉 나마 벼슬을 한 역지라는 인물이 사용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7-20191203북문터 안쪽 서쪽편에는 약간 넓은 공간이 있으며 헬기착륙장이 표시되어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8-20191203헬기착륙장을 지나면 큰 우물이 있으며 그 옆에 작은 암자가 있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6-20191203호삼산성 큰 우물. 한우물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산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교적 큰 규모의 연못이다. 통일신라 때 처음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약간 증축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호암산성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한우물(제1우물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이라는 뜻으로 서울 호암산성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길이 17.8 m, 너비 13.6 m, 깊이 2.5 m의 규모로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길이 22 m, 너지 12 m, 깊이 1.2 m의 규모로 증축하였다.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통일신라 시기의 것이며, 1991년 2차 보수정비공사에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두 시기의 연지를 함께 복원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떄에는 선거이 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시대 건국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이라는 설도 있으며 가물 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벽 상단에서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5-20191203한우물 옆에 있는 작은 암자.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4-20191203암자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금천구, 구로가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호암산성 안양천을 따라 형성된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쌓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3-20191203암자에서 호암산 서쪽 성벽 아래로 이어지는 정상로.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02-20191203호암산성 서문이 있었던 자리 부근. 성벽과 성문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울 호암산성, 사적 343호, 통일신라, 서울 금천구 시흥동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해발 347 m) 정상을 둘러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 1,547 m, 면적 133,790 ㎡이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축하여 군사적 전략 거점 및 행정치소(기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서측에서 보면 소래와 남양만까지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지리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해 연안과 한강수로, 내룍 교통로의 중간 지점인 한강 이남 중심에 있어 삼국시대 양천고성.행주산성.오두산성을 잇는 거점 성곽이었으며, 당시 한강 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가운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등에 이어 네번째로 길었다. 고려시대에는 한강 수로를 통한 중국 무역의 경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가 주둔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서남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축조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을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했다. 현재 동벽의 북쪽 성벽이 잘드러나 있으며, 원형을 포함해 남아 있는 성벽은 1,016 m이다. 산성내의 시설로는 한우물(제1우물지)과 제2우물지, 건물지(터), 석구상이 있으며 많은 기와와 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서울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칠곡 가산산성(사적), 칠곡도호부 읍치가 설치되었던 큰 산성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가산산성(사적)이다. 경주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가산(902 m) 정상부 아래 계곡에 쌓은 큰 규모의 산성이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18년(1640)에 남쪽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관찰사 이명웅의 건의로 내성을 처음 쌓았으며 1700년 (숙종26)에 외성이, 1741년(영조 17)에 중성을 쌓았다. 내성 완공 후 칠곡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성내에는 읍치를 두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성안에 있던 많은 건물 등은 없어졌으며 지금은 주민들은 살지 않고 작은 사찰이 남문 안쪽에 있다. 인근에는 송림사를 비롯하여 유서깊은 사찰이 많이 있어 예로부터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내성에는 동.서.북문과 8개의 암문을 두고 있으며, 중성에는 중성문을 두었다. 외성의 둘레는 11.1 km에 이른다. 외성 남문만 두고 있으며 붕.동.남쪽에 암문이 설치되었다. 내성내에는 객사를 비롯한 관아와 부속 건물들, 장대 등이 설치되었으며 중성 안에는 인근 고을의 군량미 창고를 두었다. 성벽에는 치성, 곡성, 포루 등 다양한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남한산성처럼 방어를 위해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큰 규모의 산성을 쌓고 읍치를 두고 주민을 이주시켜 유사시 적의 공격에 대비한 조선후기 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칠곡 가산산성(사적). 가산(해발  902 m) 정상 아래 계곡에 큰 산성을 쌓고 그 안에 읍치를 두었다.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쌓은 큰 규모의 산성으로 조선후기 산성 축성방식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외성의 유일한 출입문인 남문. 해발 400 m 정도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성은 가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잘다듬은 큰 돌로 성벽을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설치한 전형적인 조선후기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옆 계곡을 막고 있는 성벽. 남문 옆에는 계곡물이 흐르는 수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에서 본 남문.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토축을 쌓은 석축성이다. 조총의 공격에 대비하여 총안이 있는 여장을 설치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사진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에서 보이는 남문 부근 바깥쪽 성벽.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공략하기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사진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일제강점기 이후 훼손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상당히 심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이 무너진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험준한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정상부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등산로처럼 이어지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치성으로 보이는 돌출된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내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주민은 거의 살지 않는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안쪽에 있는 사찰. 조선시대 산성을 지키고 보수하는 일은 승병들이 주로 맏았는데 아마도 승병들이 머물렀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주불전. 사찰은 가산산성의 규모에 걸맞게 비교적 큰 편이다.

칠곡 가산산성 사적216호 20200120-21
가산 정상부 부근 성벽

칠곡 가산산성, 사적 216호
칠곡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은 후 국방수호의 절실함을 인식하고 1639년(인조 17) 9월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장정 10만여 명을 동원해 내성을 쌓기 시작하여 1640년(인조 18) 4월에 완공하였다. 그 후로 1649년(인조 27) 관찰사 이만과 부사 이지형이 내성을 보수.정비하였으며, 1701년(숙종 27)에 관찰사 이세재가 외성을 완공하였고, 1741년(영조 17)에 관찰사 정익하가 내성 가운데 중성벽을 쌓으면서 전체적으로 삼중곽 형태의 산성이 완성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가산산성 내성 완공 후 이곳은 성주목 팔거현에서 칠곡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성내에 읍치를 두었으며, 군사적으로 의성.군위.의흥.신녕.하양.경산 지역을 관할하였다. 1985년(고종 32) 폐성 뒤 한국전쟁과 1954년 대홍수로 성내의 많은 건물 및 성벽이 무너졌으나 아직 그 원형이 잘 남아 있다. 가산산성 둘레는 11.1 km, 면적은 2.2 ㎢로 대규모 산성에 속한다. 성벽을 따라가며 성문.암문.수문.곡성.치성.포루 등 100여 개의 시설이 잔존하며, 관아.군영.빙고.창고.사찰.마을유적이 성내 곳곳에 남아 있다. 또 가암.삼층암.외성암괴류.복수초 군락지 등 자연유산이 산성과 잘 어우러져 있다. (안내문, 칠곡군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칠곡군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문경 고모산성, 계립령 고갯길을 지키기 위해 신라가 쌓은 산성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고모산성이다. 삼국시대 영남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고갯길 계립령로를 지키는 관문성 성격의 산성을 5세기경 신라가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쪽 오정산(810 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백두대간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 어룡산(617 m)이 길을 막고 있어, 그 사이를 흐르는 영강 주변만이 남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영남대로 조령 관문(문경새재)에서 12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영남대로를 통제하기 위해 조령 관문을 설치할 때 이곳에도 고모산성 아래 교통로에 관문성인 석현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모산(165 m) 정상부 둘레를 성벽으로 쌓고 있는 전체 1.3 km에 이르며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이다. 성벽의 높이는 외벽 10 ~ 20 m 정도이며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쌓았다.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돌로 석축을 쌓고, 경사가 심한 곳에는 바깥쪽에만 석축을 쌓았다. 허물어진 성벽을 살펴보면 작은 돌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 신라의 축성방법을 보이고 있다. 성문터는 네곳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남문과 서문이 옛모습을 일부 복원해 놓고 있다. 성문은  사다리를 이용해서 출입하는 현가식성문으로 신라가 쌓은 산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최근 지역 관광명소로 성곽시설들이 복원되고 있는데, 남문터주변을 보은 삼년산성 축성방법을 참조하여 신라 산성 형태로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경 고모산성. 삼국시대 신라가 한강유역과 연결되는 계립령로를 통제하기 위해 세운 일종의 관문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영남대로 옛길인 토끼비리가 시작되는 석현성 앞에서 올려다 보이는 고모산성.

OLYMPUS DIGITAL CAMERA옛모습을 복원해 놓은 남측 성벽.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벽의 발굴.조사 결과 신라가 쌓은 산성이 확인되어 보은 삼년산성과 비슷한 축성방식으로 복원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남대로 옛길과 연결되는 남동쪽에 위치한 남문. 발굴조사 결과 문루가 없는 현문식 성문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그 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고모산성 남문
이곳은 고모산성의 남문(산성에 출입하가 위하여 설치한 남쪽에 위치한 성문)이다. 2004년 (재)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발굴 조사 결과 남문터와 성내 용벽시설, 투석용 몽돌무지(싸움을 할 때 던지기 위한 주먹크기의 냇자갈돌 무지), 성외 보축성벽(체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바닥부분에 덧대여 쌓은 또 다른 벽체) 등이 확인되었다. 남문의 규모는 길이 16 m, 너비 5 ~ 5,8 m이며 주향은 남동향이다. 남문의 구조는 성벽을 쌓아 올려 성벽의 높이가 증단부 이상 높아진 다음 성문을 축조하기 위해 개구부를 내고 성벽과 직교하는 통로부 측벽을 축조한 현문 형태의 성문이다. 산성 바깥에서 성문을 바라볼 때 입면 凹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문에는 문루가 있으나, 발굴조사 결과 고모산성은 축성기법에서 삼국시대 축조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문터에서 건물과 관련된 유구 및 유물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상단부에 문루 시설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경시청, 2013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옆 성벽. 외벽은 10 ~ 20 m 정도 높이로 바깥쪽 경사면과 함께 공략하기 어려운 상당히 견고한 모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위에서 본 모습. 성벽 안쪽에도 돌을 촘촘히 쌓아 올렸다. 성벽위 폭은 2 ~3 m 정도로 그 위에 목책을 설치해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옆 정상부 성벽에 있는 돌출된 치성 형태의 성벽. 남문을 엄호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남문 주위 복원해 놓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부근 복원되지 않은 성벽. 마치 돌무지를 쌓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되지 않은 동쪽 성벽. 일정한 크기의 돌로 촘촘히 성벽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 북쪽 고모사 정상부(231 m). 그리 높지 않은 작은 산이지만 북쪽으로 문경새재 고갯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 북쪽 정상 부근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고문산성 북쪽에서 서문으로 내려는 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성벽 안쪽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성벽 바깥쪽 모습. 상당 부분 허물어져 있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이곳이 성벽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 안쪽에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작은 연못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서문. 사다리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현가식 성문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있던 성벽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신라의 축성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 안쪽에 있는 연못. 식수로 사용할 물을 보관하는 연못이면서 비가 올 때 빗물 속도를 낮추어 성벽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못 앞쪽 성벽에 있는 배수구. 신라 산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서문에서 남문까지 남쪽 성벽을 신라 축성방식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아래쪽으로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를 휘감으면서 흐르는 영강이 내려다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정상부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성벽 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영강 동쪽 절벽을 따라 형성된 토끼비리 옛길과 그 아래로 흐르는 영강이 보인다.  3번국도가 토끼비리 절벽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3번국도 옛길, 옛 철도가 지나고 있다. 절벽 너머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남쪽은 어룡산이 막고 있고, 동쪽으로는 해발 810 m의 오정산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들이 백두대간과 연결되어 있어 조령(문경새재)과 계립령을 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날 수 밖에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상 아래를 흐르는 영강과 사쪽 문경시 가은읍 일대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 아래 영남대로를 막고 있는 석현성. 고모산성에서 토끼비리 옛길 절벽까지 약 400여 m를 막고 있는 조선시대 관문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 아래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

고모산성,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성은 삼국시대 초기인 2세기경 신라에서 계립령로(문경-충주 미륵사지)를 개설하던 시기에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주주흘산 이남이 한 눈에 보이며 남쪽으로는 불정지역 외의 다른 곳으로 길을 만들 수 없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동학농민운동, 한말 운강 이강년 선생의 의병항쟁시 전략적 요충지로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할미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의 둘레는 1,270 m로 장방형을 이루며 성의 높이는 낮은 곳이 1 m, 높은 곳이 11 m로 폭이 2~3 m이며 동쪽에 암문 1개가 남아 있고 남쪽 1 km 위치에 옛길인 토끼비리가 있다. 고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마고산성, 고부산성, 희양산성 등 많은 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안내문, 문경시청)

<출처>

  1. 안내문, 문경시청,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문경 석현성, 영남대로 토끼비리 옛길을 지키는 조선시대 관문성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석현성이다. 조선시대 영남대로 옛길일 토끼비리가 출발하는지점으로 고모산성 남문에서 토끼비리 옛길 입구까지 약 400 m 정도로 성벽을 쌓았다. 군대가 주둔하기 위해 쌓은 산성과는 달리 주요 교통로를 막고 있는 관문성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령 고갯길 방어를 위해 쌓은 조령 관문과 비슷한 시기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석현성이 있는 이곳은 조령에서 발원하는 조령천과 문경 가은읍에서 흘러내려오는 영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이 길 밖에 없다. 영남대로 주요 고갯길인 문경새재를 넘기 위해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고모산성과 고분, 조선시대 관문성인 석현성을 비롯하여 영남대로 토끼비리 옛길이 남아 있다. 지금도 옛 영남대로를 따라서 연결되는 3번국도, 서울.부산간 가장 가까운 고속도로인 중부내륙고속도로, 옛 문경선 철도까지 이곳을 지나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경 석현성. 임진왜란 이후 주요 교통로인 영남대로를 통제하기 위해 쌓은 관문성으로 험준한 지형에 있는 토끼비리 입구에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현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고모산성을 확장하여 교통로 양쪽을 성벽을 쌓았다. 전형적인 조선후기 관문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현성 남문인 진남문.

OLYMPUS DIGITAL CAMERA남문에서 고모산성으로 연결되는 동쪽편 성벽. 잘다듬은 큰 돌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조총공격에 대비하여 성문 주위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위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 동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에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길로 알려져 있는 토끼비리 옛길이 남 아 있다. 1~2명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토끼비리 옛길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벼랑을 깎아 잔도 형태로 만든 길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성벽의 길이는 400 m 정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문과 문루. 아치를 사용하지 않은 단순한 개거식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문 안쪽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 안쪽 옛길. 사람들이 거주하는 읍성이 아니라 관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오가는 행인들을 위한 주막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진남문과 주변 성벽. 교통로를 막고 있는 전형적인 관문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끼비리 주변 풍경. 낙동강 지류인 영강이 고모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토끼비리가 있는 영강 주변 풍경, 동쪽 오정산(810 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백두대간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 어룡산(617 m)이 길을 막고 있어, 그 사이를 흐르는 영강 주변만이 남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에 삼국시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았던 신라는 이곳에 고모산성을 쌓고 영남대로 교통로를 통제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3번 국도변에서 본 석현성.

<출처>

  1. 안내문, 문경시청, 201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문경 조령 관문(사적), 백두대간 고갯길에 쌓은 관문성

경북 문경사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조령 관문(사적)이다. 조선시대 영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문경새재라 불리는 조령길에 쌓은 관문성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주력부대였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가 이곳에서 합류하여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조령의 험한 지형을 활용하지 못하고 넓은 평야지대에 충주에서 왜군을 맞아 전멸하면서 이 곳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임진왜란때 충주 출신 신충원이 처음 성을 쌓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관문성을 쌓을 것을 논의만 하다가 숙종 때 전국적으로 산성을 강화할 때 이곳에 3개의 관문을 쌓았다. 고갯길 입구에 첫번째 관문 주흘관을, 임진왜란 때 성을 쌓았던 곳에 2번째 관문 조곡관을, 조령 고개 부근에 3번째 관문 조령관을 쌓았다. 군사가 주둔할 목적으로 쌓은 일반적인 산성과는 달리 교통로 주변에만 성벽을 쌓고 출입문을 둔 전형적인 관문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경 조령 관문(사적),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막고 있는 대표적인 관문성이다. 조선 숙종 때 쌓았던 성벽은 크게 훼손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다. 인근에 드라마세트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전투장면을 많이 찍어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첫번째 관문인 주흘관.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성벽을 쌓고 홍예로 불리는 아치형 성문과 문루를 두고 있으며 성벽 위에는 여장이 있는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모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위 문루. ‘주휼관’이라 적인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안 천장에 그려진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잘다듬은 큰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이다. 성벽 위에는 조총 공격에 대비하여 여장을 설치하였다. 숙종 때 전국적으로 크게 보강한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양쪽으로 계곡을 성벽으로 막았다.  계곡 양쪽은 경사가 심한 지형으로 성벽의 필요성은 많지 않으나 일정부분까지는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물이 흐르는 수문.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문경새재를 오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영남제일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인해 남쪽이 관문성 바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 성벽.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주훌관 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주휼관에서 약 2.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 중성의 개념으로 지은 관문으로 평탄한 지형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처음 성을 쌓았던 곳으로 실질적으로 문경새재길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곡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교적 수량이 많은 계곡이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두번째 관문인 조곡관 성문.

OLYMPUS DIGITAL CAMERA조곡관 문루. ’조곡관’이라 적현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동쪽편 성벽. 비교적 큰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성벽 위에 여장을 설치했다. 성벽을 앞으로 돌출시켜 성문을 엄호하는 치성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영남제이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사적 147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문경 조령관문 사적147호 20191216-31문경새재 고개에 세워진 3번째 관문인 조령관.

문경관문, 사적 147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숭행차 고사갈이성를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도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이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물을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이름한다.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문경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