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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확인되는 궁궐터

전북 익산시 왕궁면과 금마면에 있는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이다. 오층석탑이 남아 있던 이곳은 마한의 도읍지설 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백제후기에서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적은 백제 무왕 때 조성은 궁성 영역과 백제말 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사찰영역이 혼재되어 있다.

궁성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남북 490 m, 동서 240 m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의 넓은 공간이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후대의 궁궐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앞쪽에는 정전과 동.서쪽 장랑으로 구성된 정전 영역을 두고 있다. 가운데에는 업무공간인 편전과 생활공간인 내전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고 았다. 오층석탑과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사찰 영역은 백제말 이후 궁궐 건물들이 사찰로 바뀌면서 그 형태가 약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찰 뒷편으로는 큰 연못과 다양한 수목들이 심어진 후원 영역이 있었으며, 서쪽 담장 안쪽으로 관청 건물과 부엌, 공방, 화장실 등 다양한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왕궁리 유적지.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조성한 궁성와 사찰 유적이 같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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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지 공간배치. 대형 건물터와 장랑 건물터가 정전 영역이 앞쪽에 있으며, 사찰영역으로 바뀐 편전, 내전 영역, 뒷편의 후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 말 또는 통일신라 때 사찰로 바뀌면서 규모가 축소되면서 건물배치도 일부 바뀐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왕궁리 유적지.

왕궁리 유적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대의 궁성지로서 남북 490여 m, 동서 240여 m의 장방형 구조를 갖고 있다. 현재 이 유적은 궁성과 사찰 유적의 두가지 성격으로 구분되는데 궁성은 백제 무왕대 축조되어 운영되다가, 백제 말경에 사찰 중심으로 성격이 변화되어 9세기 통일신라 말까지 존속되었다. 궁성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크게 보면 남과 북으로 2분하여 남편 대지는 중심거주 공간으로 활용하고 북편은 후원형태로 사용하였다. 평면 구조는 중국 도성제의 영향을 받아 장방형의 구획을 하였는데, 내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하여 경사진 면에 축대를 축조하여 계단식으로 평탄 대지를 조성한 후 그 대지 위에 건물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공간들은 남에서부터 앞마당->궁전 건물지->생활 건물지-> 뒤뜰 정원 순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서북면에는 공방지가 있어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제작하였다. 사찰은 궁성지 위에 남북 일직선상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탑->금당->강당을 배치하였다. 창건 연대는 백제 말경이며 통일신라 말기까지 운영되었다. 목탑이 소실되어 통일신라대에 새로이 축조된 것을 알려진 국보 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에서는 1965년 해체.복원과정에서 금제금강반야경판과 수정 사리병 등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제 궁성 정문. 궁성은 동서 240 m, 남북 490 m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문이 있었단 이곳에서 왕궁리 유적지의 이정표인 오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남측 담장(동쪽편). 최근에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원래 형태를 추정해서 복원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남측 궁궐 담장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으로 동서 길이가 약 240 m, 남북이 약 490 m의 직사각형이다. 담장의 폭은 3 m정도로, 잘 다듬은 석재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담장의 안팎으로 돌을 깔아 보도를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을 설치하였다. 부속시설로는 물 빠짐을 위한 수구와 배수로가 있고, 동.서.북측에 각 1개소, 남측에 3개소의 궁궐문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남측 담장(서쪽편)

건물지
왕궁리유적에서 건물지는 지금까지 백제시대 건물지 14기, 통일신라 건물지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 등 총 21기가 조사되었다. 백제시대 건물지는 기단의 축조 재료에 의해 석축기단 건물과 와적기단 건물로 구분되며, 초석의 유무에 따라 초석건물과 굴립주건물, 적심의 조성방법에 따라 적심건물과 토심적심건물로 구분할 수 있다. 중요 건물지는 대부분 초석을 사용한 기단 건물지와 와적기단건물지, 굴립주건물지도 확인되고 있다. 건물지의 위치를 보면 정전 건물지는 중문의 중심축과 같은 선상에 있으나 나머지 건물은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어 금당지와 강당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심에서 벗어나 동편에 치우쳐 있다. 정전 건물지는 왕궁리 유적의 중문에서 들어가면 접할 수 있는 첫번째 건물이며, 유적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서 주변에서 수부명 기와가 출토되고 토심적심의 특이한 기초공법이 확인됨에 따라 정사를 돌보던 곳이나 의례, 의식을 행하던 정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정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대형건물터. 앞면 7칸, 옆면 4칸의 대형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왕궁 중심축에 위치하고 있다. 공식 행사가 열렸던 정전과 비슷한 성격의 건물로 보인다.  그런데, 궁궐 정전 영역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넓은 마당과 회랑을 두고 있지 않다. 백제의 궁궐 건물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형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왕궁리 유적 건물터 중 가장 크다. 건물은 정면 7칸(31 m), 측면 4칸(15 m)의 크기로 남문과 같이 왕궁의 남북 중심축에 있다. 규모나 건축 기법, 위치로 볼 때 대규모 집회나 연회 등에 사용한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터에는 대형 건물의 기둥을 받치기 위한 독특한 건축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점토를 단단히 다져 넣고 기둥을 세운 토심 구조를 말한다. 부여 관북리 백제 유적에서도 이와 규모와 건축 기법이 비슷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담장 안쪽 발굴 현장.

OLYMPUS DIGITAL CAMERA대형 건물터 뒷편 서쪽편에 있는 작은 건물터이다. 석축을 넘어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루와 비슷한 성격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위치와 구조로 보아 석축을 넘나들기 위한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건물터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튀어 나와서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8 m, 남북이 약 7 m, 높이 0.6 m 정도가 남아 있다. 석축의 동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건물터
왼쪽 건물터는 위치와 구조로 볼 때, 석축을 넘나들기 위한 출입시설로 추정된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튀어나와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6 m, 남북이 약 4 m 가량 남아 있다. 석축의 서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오른쪽 건물터는 원형 추춧돌 3개와 기초시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앞쪽 대형 건물터가 있는 공간과 업무.생활 공간이 있는 영역은 석축으로 분리되어 있다. 동.서방향으로 길이 95 m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

석축
석축은 왕궁 안에서 동서 방향으로 4개, 남북 방향으로 2개가 발견되었다. 비탈진 땅을 평평하게 다지려고 석축을 쌓았는데, 잘 다듬어진 돌을 먼저 쌓고 막돌과 점토로 뒤채움을 하였다. 동서 방향의 첫번째 석축을 길이 95 m, 높이 0.9 m인데, 원래 높이는 2 m 정도로 추정된다. 석축 근처에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중국 청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왕궁 내 생활상과 대외교류, 왕궁의 축조시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높이 9 m의 거대한 석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부가 낮아 균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오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구(국보 123호, 7세기 전반), 함께 출토된 불상과 함께 제작연대가 9기말 ~10세기 초로 알려졌으나, 미륵사지 사리구가 발견되면서 백제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289호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 m인 이 석탑은 단층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의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1966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엄구(국보123호),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 m, 세로 12.7 m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 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되었다. 지금도 이 탑의 축조 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오층석탑 뒷편에 있는 건물터. 금당터와 오층석탑 사이에 있는 건물터이다. 일반적인 경우 목탑이 있는 위치이다. 사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건물터
궁궐조성을 위한 기초시설로 보이는 동서방향 석축의 중간에 들어서 있다. 땅을 판 후 잘 다듬은 석재를 1~2단으로 쌓아 터를 만들었다. 한 변의 길이가 12 m인 정사각형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터 주변으로 기와를 잇댄 토관을 설치하여 배수처리를 하였다. 위치와 구조로 보아 사찰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동쪽편에 있는 건물터와 남북방향 석축

건물터
왕궁리 유저지의 건물터는 대개 동서 방향의 석축들 앞에 있다. 건물터는 사찰 이전의 왕궁 건물터와 사찰 건물터에서 45곳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땅을 파서 다지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토심 구조, 나무와 흙으로 단을 올린 토축 기단 구조,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서 지은 굴립주 건물 구조를 볼 수 있다. 이 세 유형의 건물터는 당시 건축 기술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북방향 석축. 사찰내 금당이 있는 중심 영역을 조성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북방향 석축
석축은 경사면에 돌을 쌓아 대지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한 시설이다. 현재는 길이 약 30 m, 높이 0.55 m 정도가 남아 있다. 궁궐 관련 건물에서 사용된 석부재가 포함되어 있어 금당을 비롯한 사찰의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북방향 석축 바깥쪽에 있는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기와를 굽던 가마터. 삼국통일 이후 이곳에 사찰이 있던 시기에 사용되었던 가마터이다.

기와 가마터
기와를 굽던 두 기의 가마가 동서로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다. 모두 소성실의 천장이 무너진 상태로, 아궁이와 연소실 내부에서 숯과 불에 탄 흙, 기왓조각이 발견되었다. 앞쪽의 가마터는 소성실의 크기가 너비 1.7 m, 길이 2.6 m 정도로 반 지하식 가마이다. 이 두 기의 가마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된 것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서쪽편에 있는 건물터. 왕궁에 속한 관청건물 2동이 있던 건물터이다. 건물의 규모가 크고 원형 주춧돌을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석쪽편 바깥쪽에 있는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복원도.

건물터
건물의 규모와 원형 주춧돌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왕궁의 행정 업무를 보던 정청으로 추정된다. 한 건물에 방 두 개가 있는 건물 두 채가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서 있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한 변의 길이가 6 m인 방이 두 개 있다. 건물 주위에서 백제 시대의 유물인 뚜껑이 있는 접시인 개배와 토기, 기와 파편 등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뒷편 금당터. 앞면 4칸 규모의 건물이 있던 곳이다. 백제말 또는 통일신라 때 이곳이 사찰로 바뀌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왕궁리의 사찰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궁궐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터의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북 축에 오층석탑, 금당터, 강당터가 있어 ’1탑 1금당’이라는 사찰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를 모시는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통간 구조이다. 그 밖의 사찰 유적으로는 오층석탑 동편의 기와 가마터와 강당터 서편의 건물터 두 자리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사찰영역 뒷편에 있는 강당터. 앞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1탑1금당식 가람배치의 형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강당터
금당터 뒤에 있는 강당터는 승려들이 설법과 강연을 하던 건물터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된 통간 형식의 건물이다. 강당터 남쪽 약 10 m 지점에서 계단 흔적이 세 군데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 자리에는 지금 강당터가 있던 시기보다 더 앞선 시기에도 강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처에서 부정형의 공방 폐기지도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동쪽편에 있는 와적기와 건물터이다. 기와로 기단을 쌓은 백제의 건축양식이 적용된 왕궁 부속 건물터이다.

와적기단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와적기단이 사용된 왕궁부속건물지이다. 와적이단은 기단 외부에 기와를 쌓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비시대에 부여와 익산지역에서 유행하다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는 백제 건축기술과 그 전개 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구이다. 부여 관북리 유적, 정림사지에서도 와적기단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와적기단 건물터 바깥쪽에 있는 큰 건물터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궁궐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사방 16 m 길이의 석렬시설로 건물터를 만들었다. 잘 다듬어진 면석을 0.8 ~0.9 m 폭으로 세운 후, 내부를 진흙으로 단단하게 다졌다. 주변에선 길쭉하거나 둥근 형태의 폐기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는데, 6세기 중반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파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위치나 출토유물로 보아 궁궐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와적기와 건물터 앞쪽에 있는 길이 16 m의 큰 건물터이다.

건물터
오른쪽의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건물터에는 둥근 형태의 적심이 1.5 m 내지 2.8 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의 건물터는 한 건물 내에 너비 약 3 m, 길이 약 5 m 크기의 두 개의 방을 가진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뒤편에 있는 와적기단 건물터를 비롯하여 익산 미륵사지, 부여 능산리사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백제 고대 건축양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강당터 서쪽에 있는 큰 건물터.

건물터
강당터 서쪽에서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건물터다. 앞쪽의 큰 건물터에는 강 자갈돌을 둥글게 쌓은 적심이 동서로 1칸, 남북으로 7칸 남아 있고, 뒤쪽의 건물터는 적심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다. 앞쪽 건물터에서 대형항아리를 땅속에 묻었던 시설이 발견되었다. 건물터의 위치나 구조로 보아 승방과 같은 사찰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이 왕궁으로 조성한 영역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 양쪽에 회랑과 비슷한 장랑 형식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와 비슷한 형식의 건물 배치는 일본에서도 여러곳 발견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
백제 궁성 양식의 일본 전파(익산 왕궁성과 일본 아스카 오카모토노미야 장랑형 건물배치도)
익산 왕궁성의 정전 건물 좌우에 장랑 형식의 건물지가 확인됨. 이런 형식의 건물지는 일본에서 기원후 645년에 조성된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 656년의 아토아스카오카모토노미야, 667년의 오오미오오쓰노미야에서 이미 발견된 바가 있음. 이에 익산 왕궁성과 일본의 궁성에 대해 궁장 및 부속시설, 건물에 대한 세부적인 비교 및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장랑형 건물지 주변 발굴.조사 모습.

장랑형 건물지 및 주변 유구 배치도
장량형 건물지는 고대 동아시아 궁성에서는 대형 전각 건물의 좌우 양쪽으로 남북으로 긴 형태의 건물임. 기단석 1매, 기둥과 관련된 판형 석재 3매를 통하여 볼 때, 건물의 규모는 정면(남북) 10칸(27.5 m), 남북 1칸(2.75 m)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서쪽편 모퉁이에는 장량형 건물터가, 그 안쪽으로는 다양한 양식과 용도의 궁궐 부속 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서쪽 담장 안쪽에 있는 초석 건물지. 서쪽편 담장 아

OLYMPUS DIGITAL CAMERA원형 초석이 확인된 건물터 발굴 당시 모습.

초석 건물지
서측 궁장 안쪽의 석축시설 남서편에서 원형 초석 3매가 1.5 m 간격으로 남아 있는 건물지 39가 확인됨. 토층단면으로 보아, 원형 초석은 기단과 함께 기초를 조성하면서 만든 것으로 확인됨. 초석에서 약 50 cm 떨어진 지점에서 기단 석재가 빠진 흔적도 확인됨. 건물지39는 통일신라시대 와요지가 들어서면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굴립주 방식의 건물터. 여러 동의 크고 작은 부속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굴립주 건물지
궁성 내 서남편 지역에서 서측 궁장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긴 건물지 1기(건물지 37)와 남북 방향으로 긴 형태의 건물지 5기(건물지 38, 건물지 40~42, 건물지 44)가 발견되었음. 원형 혹은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세워 만들었음. 특히 건물지 37은 다른 건물과 달리 동서방향으로 긴 형태를 하고 있음. 규모는 정면 5칸(520 cm), 측면 4칸(주칸거리 100 cm)임. 특히 북쪽 중앙에서 180 cm 떨어진 지점에 출입과 관련된 주공이 210 cm 간격으로 확인됨. 건물 주변에는 석축배수로도 확인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부엌터 발굴 모습.

왕궁의 부엌터 및 출토유물
왕궁 내의 부엌 및 창고등을 가리켜 수라간 혹은 어주(御廚) 등으로 불림. 부엌 내에서 조리와 관련된 물건이나 불을 땐 흔적 등이 확인됨. 특히 부엌터 내의 타원형 수혈에서 철제솥 2점, 직구단경호 1점, 광견호 2점, 단경병 2점, 철제가래날 1점, 철부 1점, 숫돌 3점이 출토되었다. 건물의 축조 및 사용시기, 출토유물을 통하여 존손 기간은 백제말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사찰영역 뒷편 구릉에는 다른 왕궁과 마찬가지로 휴식공간으로 큰 연못이 있는 정원과 다양한 수목들이 심어졌던 후원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뒷편에는 연못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후대 궁궐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 공간배치이다.

정원
궁성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구분하는 동서석축4의 우측 말단부에 축대의 높낮이를 활용하여 네모난 못(방지, 方池) 스타일의 화려한 정원이 확인되었음. 정원의 중심공간은 괴석과 판석을 사용하여 장방형의 못을 만든 후에 조경석과 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들었음. 이외에 물을 보관하는 장방형의 수조시설, 물의 양을 조절하는 ‘ㄱ’자 형태의 암거시설, 정원 중심공간에서 나온 물을 모아 두는 방형계의 집수시설도 있음. 또한 넓적하면서도 둥근 자갈돌을 깐 보도시설과 함께 건물지도 있음. 정원은 백제 궁성에서 전모가 밝혀진 최초의 사례로 자연 친화적인 기법으로 만든 백제 조경기술의 정수를 밝힐 수 있음.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낮은 구릉에 조성된 후원 발굴.조사 모습.

후원
궁성내의 북동편 구릉에 위치함. 후원은 구릉 사면에서 크게 휘어지는 ‘U’자형의 환수구에 의하여 돌려져 있음. 후원의 남.서편에서는 구불구불한 수로(曲水路)가 단독 혹은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고, 다시 이 수로에 또 다른 수로가 연결되어 있음. 후원의 남동편 모서리 지점은 궁성 전각 구역에서 후원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뚫려 있음. 후원 내부의 남편에서는 동서 방향의 보도용 석렬시설, 중앙에서는 정면 4칸 × 측면 4칸의 건물(건물지 36)이 확인되었음. 이외에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집수시설도 있음. 이런 수로시설은 배수 뿐만 아니라 궁성 중심 공간에서 필요한 물을 저장하여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도 활용되었음. 궁성 내부에서 그 실체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음.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후원 서쪽편 영역. 화장실, 공방시설 등 다양한 부속시설 등이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형화장실 발굴.조사 모습과 출토 유물.

화장실
궁성 후반부에서 지대가 낮은 서편의 저지대에서 화장실과 공방이 확인됨. 화장실을 동서 방향으로 크기가 다른 3기가 나란하게 위치하고 있는데, 오수를 저장하여 정화하였다가 긴 수로를 통과하면서 정화를 시켜 동서석축배수로-서벽 암거를 통하여 서측 궁궐 담장으로 빠져나가는 오늘날의 정화조와 같은 과학적 구조를 하고 있음. 3기의 화장실 중에서 가장 큰 대형화장실1의 규모는 너비 10.8 m, 너비 1.8 m, 깊이 3.4 m임. 내부에서 뒤처리용 나무막대를 비롯하여 건축 부재로 추정되는 목제품, 나무방망이, 백제 짚신, 목제 칠기 뚜껑 등이 출토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공방 지역 발굴.조사 모습과 출토 유물.

공방은 동서석축배수로 북편에 위치함. 남북으로 긴 2동의 공방 관련 건물이 자리하고, 이 좌측에 공방 관련 원려, 재료, 도구들을 버리는 폐기지가 확인됨. 특히 공방 작업면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독특한 지하 시설이 확인됨. 공방 관련 시설에서는 금.유리제품 및 반제품, 금속.유리제작용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원재료, 소토덩어리, 벽체편 등 다양한 종류의 공방 관련 유물이 다량 출토됨.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생산시설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유적지 사찰영역

익산 왕궁리유적, 사적 408호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 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600~641년)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규모가 동서 약 240 m, 남북 약 490 m이다. 궁장을 쌓고 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 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어 왕궁리 유적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평이 열리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왕궁리 유적전시관

경운궁(덕수궁) 양이재, 구한말 황족 교육을 전담한 수학원 건물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회 뒷편에 남아 있는 덕수궁(경운궁) 전각 중 하나인 양이재이다. 구한말인 1905년 덕수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지은 건물로 앞면 7칸 규모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함희당이라는 부속건물과 행각들이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외형상 삼군부 총무당처럼 조선시대 한양의 관아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이곳은 황족과 귀족자제 교육을 전담하기 위해 궁궐 안에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조선이 지은 마지막 관아 건물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부터 대한성공회에서 건물을 임대해 사용다가 사들여 사무실로 사용해 왔다. 덕수궁과 담장을 경계로 하고 있는 이곳은 구한말 당시 세계정세를 이끌던 초강대국 영국 대사관과 영국에서 건너온 성공회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경운궁 양이재, 등록문화재 267호, 서울 중구 정동,
이 전각은 경운궁을 고쳐 지을 때인 1905년(광무9)에 세운 것이다. 경운궁 공사보고서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한 주요 건물 11채만 따로 도면을 그렸는데 양이재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양이재는 함희당(咸喜堂)이란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행각과 꽃담으로 에워 싼 일곽은 홍원(紅園)이라 불렀다. 원래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이었으며, 내부에는 온돌방과 마루, 누마루가 있었다. 건물의 지붕에는 양성바름에 용두를 써서, 격조를 높였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쓰인다. 홍원 일대는 1906~1910년까지 황족과 귀족의 자제 교육을 전담한 수학원(修學院)으로 쓰였다. 대한성공회는 1912년부터 이곳을 임대해 쓰다가, 1920년 이곳을 사들인 후 건물을 옮겼다. 함희당은 1960년대에 헐렸으나 양이재 뒷편에 복도각 일부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성당 뒷편에 남아 있는 양이재. 앞면 7칸 규모로 온돌방, 대청마루, 누마루로 구성된 전형적인 조선시대 관아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구한말 황족과 귀족자제의 교육을 위해 궁궐에 지은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양쪽에 누마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성공회에서 사용해 오면서 건물을 잘 보존해왔기때문에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이재에 딸린 부속건물.

OLYMPUS DIGITAL CAMERA경운궁 양이재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경기도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관아, 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내아(內衙)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는 지금의 인천 부평구, 계양구, 부천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행정기관으로 읍치는 계양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는 서울 한강이남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로 15개면이 부평도호부에 속해 있었다. 지금은 부평이 인천에 속해있지만 원래는 인천과는 구분되는 지역으로 사실상 부천과 같은 생활권이었다 할 수 있다. 구한말 경인철도가 부설되면서 부평의 중심이 현재의 부평역과 부천역 부근으로 바뀌었지만 부평과 부천의 중심지는 계산구 부평초등학교가 있는 옛 부평도호부 청사 주변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부평도호부 청사가 있었던 읍치에는 객사, 동헌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아로 추정되는 건물이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일제가 구한말에 초등학교를 설치하면서 관아 건물 중 평상시 사용하지 않는 객사를 초등학교 건물로 바꾼 경우가 많은데 부평도호부는 대부분의 청사가 허물어지고, 내아 건물만 변형된 채로 학교 운동장 구석에 남아 있다. 부평도호부에서 관장하는 중등교육기관인 부평향교는 계양산 아래에 남아 있다.

부평도호부 청사
고려시대 의종 4년에 안남도호부, 고종2년에 계양도호부, 조선시대 태종 13년에는 부평도호부를 설치했다.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채의 청사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부평초등학교를 지으면서 대부분 철거하여 현재는 내아만 남아 있다. 원래 “ㄱ”자형 건물이 있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자형 건물로 바꾸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도리집이 됐다. <출처:인천시청>

SANYO DIGITAL CAMERA 조선시대 경기도 한강이남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 중 하나였던 부평도호부 청사가 있었던 부평초등학교이다. 이곳에는 객사, 동헌 등 많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내아로 쓰였던 건물만이 운동장 한쪽에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부평도호부 내아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부평초등학교 운동장 동쪽편에 있다. 운동장 입구에는 관청 부근에 많이 남아 있는 오래된 고목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부평도호부 내아 건물. 부평부사가 거처했던 살림직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원래 우리나라 건물에서는 짝수를 잘 쓰지 않는데 이 곳은 ‘ㄱ’자형 건물을 변형해서 그런지 6칸짜리 건물이 만들어졌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ㄱ’자형으로 된 살림집을 변형한 것으로 일반적인 한옥이나 관아 건물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물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 앞에는 정조대왕 잠시 들렀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욕은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역대 임금중에 공식적으로 부평을 경유해간 임금은 정조대왕 한 분이다. 정조 21년에는 김포에 있는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였다. 이때 정조는 부평에 머물며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출처:인천시청>

SANYO DIGITAL CAMERA부평도호부 내아 건물

SANYO DIGITAL CAMERA부평초등학교는 지금의 행정구역상 부평구에 있지 않고 계양구에 있다. 초등학교 건물 앞에 고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곳에 객사나 동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부평부사를 지낸 관리들의 공덕비

 

 

내의원(內醫院), 국왕과 가족들의 건강을 보살피던 궁궐내 의료기관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국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정책을 보좌하던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과 함께  국왕의 건강을 관리하던 내의원(內醫院)이 자리하고 있다. 궁궐내 병원 역할을 했던 내의원은 ‘약방(藥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각들이 밀집해 있다. 약방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건물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좁은 공간을 활용해서 많은 방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작은 행각들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왕의 말과 글을 대필하던 예문관과 함께 국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실 수 있도록 공간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내의원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의원.혜민서와 함께 삼의원이라 불렀다. 내의원에는 정1품 도제조와 정2품제조, 정3품 부제조가 있기는 하지만 영의정과 도승지가 겸임하였다고 한다. 내의원에는 관원들과 서리 등 행정실무진과 어의, 침의 등 의료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인원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궐내각사 내의원은 많은 인원들이 근무하고, 환자가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행각들을 두고 있는데, 주로 크고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성정각이 한때는 내의원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의료기관
전통사회에서 최고 통치자인 왕의 건강은 정치적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 왕의 건강이 악화되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제때 내릴 수 없게 되면 국정 운영이 순조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궁궐 안에 왕실의 의료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인 내의원을 설치하고 최고의 의료진으로 하여금 국왕의 건강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왕에 대한 진료는 왕의 거처에서 이루어졌으며 내의원에서는 의원을 파견하고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였다. 조선말기 내의원에게는 고위관료, 의관, 의녀, 시종과 각종 노비를 합쳐 140명 이상의 의원이 근무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외조 중문에 해당하는 선정문 왼쪽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입구. 협문을 들어서면 내의원과 예문관이 있고, 그 안쪽에 역대국왕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선원전과 부속 건물들이 모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의원 동쪽마당과 행각. 안쪽으로 선원전과 재실들이 연결된다. 행각에서 내의원에 속했던 의원들과 실무진들이 대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최고의 의료진들이 근무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내의원. ‘약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큰 건물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각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약방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큰 건물로 앞쪽과 옆쪽으로 행각이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나 형태에서 대청마루나 툇마루가 없고 큰 출입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중요한 약재 등을 보관하고 있던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건물 서쪽편으로 대청마루와 방이 있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의 구조로 볼 때 내의원 의원들과 관원들이 근무했던 사무실 용도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건물 앞쪽에는 앞면 1칸 옆면 2칸짜리 작은 건물이 있고, 복도로 약방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중요한 약재를 보관하던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이 건물은 안쪽에서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바깥쪽에서는 서로 연결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마당 서쪽편에 있는 앞면 6칸짜리의 행각 건물. 가운데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에 방을 두고 있다. 의료진이나 관원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면서 궁궐내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던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동궁영역 성정각 마당에는 한때 내의원으로 사용된 건물을 볼 수 있다. 원래 성정각은 동궁에 속한 건물인데, 일제강점기 순종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이곳에 내의원을 두었다고 한다.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는 편액도 보이는데 정조의 어필이라고 한다. 이곳으로 내의원을 옮길 때 같이 옮겨진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내의원에 걸었던 현판.  ’조화어약’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것을 뜻한다.

SANYO DIGITAL CAMERA ’보호성궁’은 왕의 몸을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 의학을 발달
조선의 의학은 고려의 의학과 제도를 계승하고 보완해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향약을 연구하고, 자기 관찰과 실험에 의해 간행된 의석가 모두 90여종이 넘는다. 세종대 출간된 『향약집성방』과『의방유치』는 우리 풍토와 체질에 맞는 약재와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고, 선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역대 고금의 한의방의 정수를 채택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일본과 청에 번각되어 우리의 수준 높은 의학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 의서이다. 또 고종대에 이제마는 사람의 체질을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식이요법과 감정을 다스려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사상의학을 발전시켰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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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혈을 나타낸 청동 인체상(조선), 청동으로 만든 인체상에 전신에 흐르는 경혈을 선으로 새기고, 선 위에 총 354개의 경혈을 표시하였다. 궁중의 내의원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편주의학입문내집(조선), 내의원에서 중국 명나라 이천이 지은 의학입문서에 주석을 달아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의학서이다.

SANYO DIGITAL CAMERA동의보감(조선, 허준지음),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서이다. 의학 서적으로는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은 16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 기술을 자세하게 다뤄 의료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증급유방, 15세기, 보물 1577호. 의가비전의 질병 처방인 ‘의가비전수신비용가감십상방’과 ‘경험급구방’을 한데 모아 조선전기에 간행한 의서이다. 한국 의학사와 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은 희소가치가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약장(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약을 가는 기구(약연, 조선)

북한산성 행궁지(사적479호), 국왕의 임시 거처인 양주행궁 터

북한산성내 동장대가 바라 보이는 상원봉 아래에는 조선시대 행궁터가 남아 있다.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양주목 관할이었기때문에 양주행궁이라 한다. 조선시대 중요한 행궁이었던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수원 화성행궁은 관아와 행궁을 겸하고 있지만, 양주행궁은 관아와는 별도로 북한산성내에 지어졌다. 양주행궁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대에 지어졌는데, 행궁이 험한 산중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고 숙종과 영조가 잠시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행궁은 내전 정전과 외전 정전, 부속건물 등 총 124칸 규모였다고 한다. 북한산성은 그 규모가 크고 지형이 험준하여 유지.보수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했기때문에 행궁 또한 유지되지 못하고 건물은 수해로 무너진 후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이다. 행궁은 전쟁 등 국가 비상상황시 왕이 잠시 피난할 때 머물거나 지방 순시나 휴양 등을 위해 지방관아에 설치한 임시 처소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행궁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조성한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등이 있고, 왕이 온천에서 휴양을 하기 위해 설치한 온양행궁과 이천행궁, 왕이 능묘에 참배를 하기 위한 화성행궁, 전주행궁 등이 있다.

북한산성 행궁권역
북한산성 행궁을 중심으로 경리청 상창과 관성소, 호조창 등이 있었던 곳이다. 행궁은 전란시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고, 관성소는 산성 관리를 총괄하는 주관 부서인 경리청의 산성 내 현지 현청이며, 상창과 호조창은 산성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식량창고였다. 이런 주요 시설이 조성된 ‘행궁권역’은 북한산성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였으며, 위치상으로도 산성의 중심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출처:고양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행궁지(사적479호). 북한산성 동장대가 있는 상원봉 아래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행궁터이다. 양주행궁이라 불렸던 이곳은 숙종대에 한양 도성 중심의 방위전략을 보완하기 위해 북한산 계곡에 산성을 쌓고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허물어지기 전 양주행궁 사진. 구한말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서문. 은평구 일대에서 계곡을 따라 북한산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다. 북한산에는 대동문, 대성문, 보국문, 대남문, 대서문을 비롯한 많은 출입문이 있으며, 계곡이 흘러 내려가는 대서문이 주 출입문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북한산성 중성문. 북한산성은 험준한 산과 계곡을 막아 조성한 산성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하는 주출입문인 서쪽방향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상대적으로 방어에 취약한 지점이었기때문에 대서문 안쪽 행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벽을 쌓고 중성문을 두고 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
이곳의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의 최고 책임자가 재임할 당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로, 현재 26기 정도 남아 있다. 비석을 세워 비문을 기록한 선정비가 대부분이며, 따로 비석을 세우지 않고 암벽에 비문을 새긴 선정비도 있다. 이들 선정비의 건립시기는 모두 19세기인데, 이 시기 북한산성의 관리는 총융청과 무위소가 맡고 있었다. 이에 비문에는 해당 관청의 관리책임자였던 총융사와 무위소 제조, 경리사의 선정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행궁터 부근 북한산성을 관리들의 선정비들을 볼 수 있다. 주로 19세기에 이곳을 거처간 관리들의 공덕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비 부근 북한산성 계곡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곳에 세워졌던 ‘산영루’라는 누각이 있던 자리이다.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누각이 떠내라간 이후 복원되지 않고누각을 받치고 있던 초석들만 남아 있다. 이 누각은 북한산성을 쌓기 이전부터 중흥사 아래 경치좋은 명소로 많은 명사들이 다녀갔던 유서깊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 산영루의 옛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산영루 아래 북한산 계곡

OLYMPUS DIGITAL CAMERA 북한산성내 승병들을 지휘하던 승병대장인 총섭과 승병들이 머물던 큰 절인 중흥사 절터.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떠내려간 이후 최근에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중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원증국사가 머물때 크게 중수하면서 사찰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행궁 아래 계곡. 행궁은 대서문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내 가장 큰 절이었던 중흥사를 지나 상원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 계곡에서 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산성에서 가장 큰 식량창고였던 경리청 상창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 창고가 있었던 흔적으로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계곡 주변으로 행궁 건물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돌로 쌓은 축대.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행궁터는 최근에 다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변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작업 현장 출입을 막고 있는 표식.

OLYMPUS DIGITAL CAMERA등산로 주변에 볼 수 있는 옛 건물터. 기와를 비롯한 건축자재들이 건물터 주변에 흩어져 있다. 행궁에는 내전 정전과 외전 정전을 비롯한 총 124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행궁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터에서 수습한 기왓장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 행궁에서 보이는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와 주변 봉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