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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관아, 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내아(內衙)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는 지금의 인천 부평구, 계양구, 부천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행정기관으로 읍치는 계양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는 서울 한강이남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로 15개면이 부평도호부에 속해 있었다. 지금은 부평이 인천에 속해있지만 원래는 인천과는 구분되는 지역으로 사실상 부천과 같은 생활권이었다 할 수 있다. 구한말 경인철도가 부설되면서 부평의 중심이 현재의 부평역과 부천역 부근으로 바뀌었지만 부평과 부천의 중심지는 계산구 부평초등학교가 있는 옛 부평도호부 청사 주변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부평도호부 청사가 있었던 읍치에는 객사, 동헌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아로 추정되는 건물이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일제가 구한말에 초등학교를 설치하면서 관아 건물 중 평상시 사용하지 않는 객사를 초등학교 건물로 바꾼 경우가 많은데 부평도호부는 대부분의 청사가 허물어지고, 내아 건물만 변형된 채로 학교 운동장 구석에 남아 있다. 부평도호부에서 관장하는 중등교육기관인 부평향교는 계양산 아래에 남아 있다.

부평도호부 청사
고려시대 의종 4년에 안남도호부, 고종2년에 계양도호부, 조선시대 태종 13년에는 부평도호부를 설치했다.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채의 청사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부평초등학교를 지으면서 대부분 철거하여 현재는 내아만 남아 있다. 원래 “ㄱ”자형 건물이 있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자형 건물로 바꾸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도리집이 됐다. <출처:인천시청>

SANYO DIGITAL CAMERA 조선시대 경기도 한강이남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 중 하나였던 부평도호부 청사가 있었던 부평초등학교이다. 이곳에는 객사, 동헌 등 많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내아로 쓰였던 건물만이 운동장 한쪽에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부평도호부 내아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부평초등학교 운동장 동쪽편에 있다. 운동장 입구에는 관청 부근에 많이 남아 있는 오래된 고목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부평도호부 내아 건물. 부평부사가 거처했던 살림직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원래 우리나라 건물에서는 짝수를 잘 쓰지 않는데 이 곳은 ‘ㄱ’자형 건물을 변형해서 그런지 6칸짜리 건물이 만들어졌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ㄱ’자형으로 된 살림집을 변형한 것으로 일반적인 한옥이나 관아 건물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물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 앞에는 정조대왕 잠시 들렀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욕은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역대 임금중에 공식적으로 부평을 경유해간 임금은 정조대왕 한 분이다. 정조 21년에는 김포에 있는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였다. 이때 정조는 부평에 머물며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출처:인천시청>

SANYO DIGITAL CAMERA부평도호부 내아 건물

SANYO DIGITAL CAMERA부평초등학교는 지금의 행정구역상 부평구에 있지 않고 계양구에 있다. 초등학교 건물 앞에 고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곳에 객사나 동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부평부사를 지낸 관리들의 공덕비

 

 

내의원(內醫院), 국왕과 가족들의 건강을 보살피던 궁궐내 의료기관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국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정책을 보좌하던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과 함께  국왕의 건강을 관리하던 내의원(內醫院)이 자리하고 있다. 궁궐내 병원 역할을 했던 내의원은 ‘약방(藥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각들이 밀집해 있다. 약방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건물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좁은 공간을 활용해서 많은 방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작은 행각들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왕의 말과 글을 대필하던 예문관과 함께 국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실 수 있도록 공간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내의원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의원.혜민서와 함께 삼의원이라 불렀다. 내의원에는 정1품 도제조와 정2품제조, 정3품 부제조가 있기는 하지만 영의정과 도승지가 겸임하였다고 한다. 내의원에는 관원들과 서리 등 행정실무진과 어의, 침의 등 의료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인원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궐내각사 내의원은 많은 인원들이 근무하고, 환자가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행각들을 두고 있는데, 주로 크고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성정각이 한때는 내의원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외조 중문에 해당하는 선정문 왼쪽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입구. 협문을 들어서면 내의원과 예문관이 있고, 그 안쪽에 역대국왕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선원전과 부속 건물들이 모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의원 동쪽마당과 행각. 안쪽으로 선원전과 재실들이 연결된다. 행각에서 내의원에 속했던 의원들과 실무진들이 대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최고의 의료진들이 근무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내의원. ‘약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큰 건물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각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약방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큰 건물로 앞쪽과 옆쪽으로 행각이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나 형태에서 대청마루나 툇마루가 없고 큰 출입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중요한 약재 등을 보관하고 있던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건물 서쪽편으로 대청마루와 방이 있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의 구조로 볼 때 내의원 의원들과 관원들이 근무했던 사무실 용도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건물 앞쪽에는 앞면 1칸 옆면 2칸짜리 작은 건물이 있고, 복도로 약방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중요한 약재를 보관하던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이 건물은 안쪽에서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바깥쪽에서는 서로 연결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마당 서쪽편에 있는 앞면 6칸짜리의 행각 건물. 가운데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에 방을 두고 있다. 의료진이나 관원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면서 궁궐내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던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동궁영역 성정각 마당에는 한때 내의원으로 사용된 건물을 볼 수 있다. 원래 성정각은 동궁에 속한 건물인데, 일제강점기 순종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이곳에 내의원을 두었다고 한다.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는 편액도 보이는데 정조의 어필이라고 한다. 이곳으로 내의원을 옮길 때 같이 옮겨진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내의원에 걸었던 현판.  ’조화어약’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것을 뜻한다.

SANYO DIGITAL CAMERA ’보호성궁’은 왕의 몸을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 의학을 발달
조선의 의학은 고려의 의학과 제도를 계승하고 보완해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향약을 연구하고, 자기 관찰과 실험에 의해 간행된 의석가 모두 90여종이 넘는다. 세종대 출간된 『향약집성방』과『의방유치』는 우리 풍토와 체질에 맞는 약재와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고, 선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역대 고금의 한의방의 정수를 채택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일본과 청에 번각되어 우리의 수준 높은 의학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 의서이다. 또 고종대에 이제마는 사람의 체질을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식이요법과 감정을 다스려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사상의학을 발전시켰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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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혈을 나타낸 청동 인체상(조선), 청동으로 만든 인체상에 전신에 흐르는 경혈을 선으로 새기고, 선 위에 총 354개의 경혈을 표시하였다. 궁중의 내의원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편주의학입문내집(조선), 내의원에서 중국 명나라 이천이 지은 의학입문서에 주석을 달아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의학서이다.

SANYO DIGITAL CAMERA동의보감(조선, 허준지음),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서이다. 의학 서적으로는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은 16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 기술을 자세하게 다뤄 의료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증급유방, 15세기, 보물 1577호. 의가비전의 질병 처방인 ‘의가비전수신비용가감십상방’과 ‘경험급구방’을 한데 모아 조선전기에 간행한 의서이다. 한국 의학사와 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은 희소가치가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약장(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약을 가는 기구(약연, 조선)

조선시대 의료기관
전통사회에서 최고 통치자인 왕의 건강은 정치적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 왕의 건강이 악화되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제때 내릴 수 없게 되면 국정 운영이 순조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궁궐 안에 왕실의 의료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인 내의원을 설치하고 최고의 의료진으로 하여금 국왕의 건강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왕에 대한 진료는 왕의 거처에서 이루어졌으며 내의원에서는 의원을 파견하고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였다. 조선말기 내의원에게는 고위관료, 의관, 의녀, 시종과 각종 노비를 합쳐 140명 이상의 의원이 근무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북한산성 행궁지(사적), 국왕의 임시 거처인 양주행궁 터

북한산성내 동장대가 바라 보이는 상원봉 아래에는 조선시대 행궁터가 남아 있다.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양주목 관할이었기때문에 양주행궁이라 한다. 조선시대 중요한 행궁이었던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수원 화성행궁은 관아와 행궁을 겸하고 있지만, 양주행궁은 관아와는 별도로 북한산성내에 지어졌다. 양주행궁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대에 지어졌는데, 행궁이 험한 산중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고 숙종과 영조가 잠시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행궁은 내전 정전과 외전 정전, 부속건물 등 총 124칸 규모였다고 한다. 북한산성은 그 규모가 크고 지형이 험준하여 유지.보수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했기때문에 행궁 또한 유지되지 못하고 건물은 수해로 무너진 후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이다. 행궁은 전쟁 등 국가 비상상황시 왕이 잠시 피난할 때 머물거나 지방 순시나 휴양 등을 위해 지방관아에 설치한 임시 처소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행궁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조성한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등이 있고, 왕이 온천에서 휴양을 하기 위해 설치한 온양행궁과 이천행궁, 왕이 능묘에 참배를 하기 위한 화성행궁, 전주행궁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행궁지(사적)

북한산성 동장대가 있는 상원봉 아래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행궁터이다. 양주행궁이라 불렸던 이곳은 숙종대에 한양 도성 중심의 방위전략을 보완하기 위해 북한산 계곡에 산성을 쌓고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허물어지기 전 양주행궁 사진. 구한말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서문.

은평구 일대에서 계곡을 따라 북한산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다. 북한산에는 대동문, 대성문, 보국문, 대남문, 대서문을 비롯한 많은 출입문이 있으며, 계곡이 흘러 내려가는 대서문이 주 출입문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북한산성 중성문. 북한산성은 험준한 산과 계곡을 막아 조성한 산성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하는 주출입문인 서쪽방향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상대적으로 방어에 취약한 지점이었기때문에 대서문 안쪽 행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벽을 쌓고 중성문을 두고 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
이곳의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의 최고 책임자가 재임할 당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로, 현재 26기 정도 남아 있다. 비석을 세워 비문을 기록한 선정비가 대부분이며, 따로 비석을 세우지 않고 암벽에 비문을 새긴 선정비도 있다. 이들 선정비의 건립시기는 모두 19세기인데, 이 시기 북한산성의 관리는 총융청과 무위소가 맡고 있었다. 이에 비문에는 해당 관청의 관리책임자였던 총융사와 무위소 제조, 경리사의 선정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산성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행궁터 부근 북한산성을 관리들의 선정비들을 볼 수 있다. 주로 19세기에 이곳을 거처간 관리들의 공덕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비 부근 북한산성 계곡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곳에 세워졌던 ‘산영루’라는 누각이 있던 자리이다.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누각이 떠내라간 이후 복원되지 않고누각을 받치고 있던 초석들만 남아 있다. 이 누각은 북한산성을 쌓기 이전부터 중흥사 아래 경치좋은 명소로 많은 명사들이 다녀갔던 유서깊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 산영루의 옛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산영루 아래 북한산 계곡

OLYMPUS DIGITAL CAMERA 북한산성내 승병들을 지휘하던 승병대장인 총섭과 승병들이 머물던 큰 절인 중흥사 절터.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떠내려간 이후 최근에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중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원증국사가 머물때 크게 중수하면서 사찰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행궁 아래 계곡. 행궁은 대서문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내 가장 큰 절이었던 중흥사를 지나 상원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 계곡에서 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산성에서 가장 큰 식량창고였던 경리청 상창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에 창고가 있었던 흔적으로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계곡 주변으로 행궁 건물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돌로 쌓은 축대.

OLYMPUS DIGITAL CAMERA북한산성 행궁터는 최근에 다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변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작업 현장 출입을 막고 있는 표식.

OLYMPUS DIGITAL CAMERA등산로 주변에 볼 수 있는 옛 건물터. 기와를 비롯한 건축자재들이 건물터 주변에 흩어져 있다. 행궁에는 내전 정전과 외전 정전을 비롯한 총 124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행궁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터에서 수습한 기왓장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 행궁에서 보이는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와 주변 봉우리들

북한산성 행궁권역
북한산성 행궁을 중심으로 경리청 상창과 관성소, 호조창 등이 있었던 곳이다. 행궁은 전란시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고, 관성소는 산성 관리를 총괄하는 주관 부서인 경리청의 산성 내 현지 현청이며, 상창과 호조창은 산성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식량창고였다. 이런 주요 시설이 조성된 ‘행궁권역’은 북한산성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였으며, 위치상으로도 산성의 중심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출처:고양시청>

수원부(水原府) 관아, 화성행궁(사적) 봉수당과 장락당

화성행궁은 국왕이 국방을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던 행궁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이곳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참배할 때 머물던 곳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읍치였던 화산 주변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치에 읍치에 있던 관아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수원화성을 축성하게 된다. 화성행궁은 수원유수가 업무를 보는 관아건물이지만 그 규모가 562칸으로 궁궐의 절반 정도이다. 정조는 화성행궁을 크게 지은 것은 왕위를 순조에게 양위하고 이곳에서 노후를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는 상왕이 머무는 창덕궁과 같은 이궁(離宮)의 성격을 갖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행궁내에는 국왕이 머무는 공간이자 동헌이자 정전(正殿) 성격을 갖는 봉수당과 침전 성격을 갖는 장락당, 수원유수가 거처하는 내아에 해당하는 복내당과 유여택, 관아에서 연회가 열리는 공간인 낙남헌, 실무관헌들이 근무하는 공간인 외정리소, 집사청, 비장청, 서리청과 장용영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인 남.북군영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화성행궁의 중심인 정전에 해당하는 봉수당. 수원유수부 동헌으로 지어졌지만 일반적인 관아와는 달리 추녀마루 잡상, 박석을 깔아 놓은 삼도, 월대 등 궁궐 전각에서 볼 수 있는 국왕을 상징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원 화성행궁 모형

봉수당(奉壽堂), 화성행궁의 정전역할을 하는 공간이자 수원유수부 동헌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수원유수부 동헌건물로 원래의 이름은 정남헌이었다 한다. 정조는 화성행차시 이 곳에 머무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정조가 순조에 양위한 후 상왕으로 이곳에 머물 생각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 8칸의 대형 건물이지만, 월대는 궁궐건물 전각보다 낮고, 지붕 귀마루에 잡상을 올려놓음으로써 궁궐건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화성행궁은 관아건물로 지어졌고, 봉수당은 공식적으로는 수원유수가 근무하는 동헌이지만 실제로는 국왕을 상징하는 봉수당은 비워놓고 내아에 있는 유여택을 동헌 건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부터 있던 화성행궁 건물은 아니고 1997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봉수당에서 정조대왕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비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렸다고하며 이 곳에 그 모습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원래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다.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으며 정조가 수원행차시 머물렀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수원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의 역할을 하였으며, 현대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으로써 유수(현대의 도지사급)가 집무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789년(정조13) 9월25일 완공되었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규모로 증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출처:수원시청>

SANYO DIGITAL CAMERA봉수당 출입문인 중양문(中陽門). 가운데 정문과 좌.우에 협문을 두고 있는 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중양문을 들어서면 국왕이 잠시 머무는 행궁 정전답게 박석을 깔아 놓은 삼도가 봉수당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는 다른 관아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이다.

SANYO DIGITAL CAMERA화성행궁 정전격인 봉수당. 앞면 8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침전 건물로 지어진 장락당과는 건물 앞.뒤로 복도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다른 관아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건물 가운데 2칸은 국왕이 머물거나 수원유수가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며,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수원유수부 동헌이지만 실제로는 국왕을 위한 공간이었다.

SANYO DIGITAL CAMERA봉수당 가운데 대청마루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는 편전 공간을 연출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봉수당 오른쪽 온돌방에는 정조가 집무를 보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봉수당 왼쪽편 방에는 을묘원행시 진찬연이 열렸을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을묘원행시 이곳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정조는 ‘만년의 수를 받들어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면서부터 이 건물이 봉수당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 앞에는 궁궐건물처럼 넓은 월대를 마련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 앞쪽에 반칸 정도 복도를 마련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전각을 상징하는 추녀마루 잡상

SANYO DIGITAL CAMERA봉수당 마당 행각에 전시해 놓은 진찬 모형. 1795년 화성행궁에서 열렸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진찬 모형 설명
1795년(정조19) 윤 2월13일 화성행궁에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서울의 궁궐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하고도 기품있는 궁중 연회가 이때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연행되었다. 현선도, 몽금척, 하황은, 포구락, 무고, 아박, 향발, 학무, 연화대, 수연장, 처용무, 첨수무, 검무, 선유락 등의 궁중 연회 종목들이 회갑잔치의 화려함을 장식하였다. 앞에 연출된 것은 이때 연행된 궁중연회 중에서 무고와 선유락 연행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선유락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채색을 꾸민 배를 가운데 놓고 여러 기녀들이 닻줄을 끌고, 배를 감으며 추는 춤이다. 봉수당 앞 오른쪽에 정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앞뜰엔 혜경궁의 친척들인 의빈과 척신들이 앉아 있다. 봉수당의 섬돌에 놓인 헌선도를 비롯해 앞뜰에 놓이 화려한 소품들이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과 품격을 한껏 나타낸다. <출처:수원시청>

SANYO DIGITAL CAMERA관아 동헌 마당에 해당하는 봉수당 마당. 국왕이 머누는 공간에 해당되어서 그런지 마당에는 실무 관헌들이 집무를 공간인 행각이 많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마당 북쪽편에는 서적이나 문서 등을 보관하는 다락들이 배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마당 남쪽에도 작은 창고 건물들만 있으며, 동쪽편 행각들은 마당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에서 수원유수가 실제로 근무했던 공간인 유여택과 연결되는 작은 협문

OLYMPUS DIGITAL CAMERA2014년 가을 화성행궁에서는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 마당에 마련된 무대

OLYMPUS DIGITAL CAMERA무대에서 펼쳐지는 전통 공연

장락당(長樂堂), 왕비의 침전으로 준비된 공간

화성행궁 장락당은 행궁의 침전으로 쓰였던 건물로, 봉수당 남쪽에 세워졌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할 때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정전이자 편전건물인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으며, 행궁으로써 많은 방을 두고 있지는 않다. 정조가 행차할때는 혜경궁 홍씨가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왕비가 머무는 공간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장락당은 수원유수의 처소로 마련한 내아 건물인 복락당과 인접해 있다. 복락당에 왕비를 수행했던 상궁,나인들이 머물면서 행사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1794년(정조18) 화성축성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장락당과 봉수당의 두 건물을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에는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출처:수원시청>

SANYO DIGITAL CAMERA경룡관은 장락당을 출입하는 바깥문으로 2층누각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2층에는 누마루가 있고 그 아래로 출입하는데 지락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룡관 누마루 아래 출입문. 지락문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 화성행궁 장락당은 앞면 5칸 규모의 크지 않은 건물로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다.장락궁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장락궁이라는 이름을 짓고 직접 편액을 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락당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침소에 들기 전 혜경궁 홍씨, 장락당이 지어진 다음해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실제로 이곳에서 머물렀다. 침소가 차려진 혜경궁 홍씨 방을 연출한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침전인 장락당과 편전이자 동헌인 봉수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편전과 침전이 직접연결되는 것은 화성행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락당 앞 마당은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원유수 살림집인 내아인 복내당과는 협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의 중심건물인 봉수당과 장락당 뒷편으로는 넓은 마당과 행각들이 준비되어 있다. 국왕 행차시 수행했던 내시를 비롯한 실무 수행원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환관이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장면과 환관이 서책을 보고 있는 장면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마당에서 본 장락당.

OLYMPUS DIGITAL CAMERA뒷마당에서 본 봉수당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 북쪽편 실무관헌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보이는 행각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 뒷편으로 나오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은 국왕을 수행하는 관헌들을 위해 뒷쪽에 행각을 많이 준비해 놓고 있다.

 

 

광주 남한산성 행궁(사적), 광주부 관아에 설치된 국왕의 임시 거처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行宮)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대에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할때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다. 여러곳에 남아 있는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여러차례 증축,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행궁(行宮)은 국왕이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를 순행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를 말하며 행재소(行在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은 궁궐 밖에 머무는 경우는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순행하는 경우와 전란을 피해 머무는 경우, 능행이나 신변치료를 위히 명승지를 찾는 경우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국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은 많았겠지만, 행궁으로 규모를 갖추었던 곳으로는 세종이 치료를 위치 찾았던 온양 행궁,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의 이유로 설치했던 강화와 남산산성의 행궁, 정조가 능행과 정치적인 이유로 세웠던 화성행궁이 잘 알려져 있다.

한강이남 일대를 다스렸던 큰 규모의 지방관청이 광주부 관아는 원래 남한산성 아래 하남시 일대에 있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한 거점인 이곳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조선초기 광주부에는 다른 지방과 같이 목사를 수령으로 두었으나 선조대에 부윤으로 승격되고, 정조대에는 정2품의 높은 직급인 광주유수를 수령으로 두었다. 광주유수는 관할 지역을 다스리는 일반적인 업무 이외에도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사조직을 지휘하는 수장의 역할도 겸했다고 하며, 남한산성에 약 4천명의 주민들과 산성을 지키는 병사 천여명, 산성을 축성하고 관리하는 승병들을 위한 7개의 사찰이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도시를 형성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 정문인 한남루(漢南樓). 행궁은 원래 지역을 다스리던 관아에 국왕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 정문 또한 일반적인 관아 아문(衙門)과 마찬가지로 문루(門樓)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은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서 조성해 놓고 있다. 문루인 한남루를 들어서면 행궁의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외삼문과 주위에 행각들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피신할 것을 전제로 지은 행궁이기때문에 많은 수행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행각에 많은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아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행각은 배치되어 있지 않고 작은 연못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최근에 복원했기때문에 옛관아의 고풍스러운 멋은 없는 편이지만, 행궁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높은 곳이다. 일반적으로 관아 아문을 들어서면 동헌, 객사, 내아가 좌.우에 나란히 배치되는데 반해 행궁은 앞쪽에 지방관이 근무하는 동헌을, 뒷쪽에 국왕과 가족들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문을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이 있고, 양쪽에 실무관원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마련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면 광주유수가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하궐로 들어가게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중문 양쪽에 마련된 행각. 비상시 국왕을 수행하는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주유수가 근무하는 동헌인 외행전을 출입하는 중문. 외행전은 행궁으로 사용시 국왕이 집무를 보는 공간으로 출입문은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의 중심건물인 하궐 외행전 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건물이다. 다른 행궁의 예로 볼 때 평상시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공간인 동헌의 역할을 하며, 국왕이 행궁에 머물때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과 편전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외행전 내부.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관아의 동헌과 비슷한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마당에 해당하는 외행전 마당. 다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중문에서 외행전까지 국왕이 지나가는 삼도가 깔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외행전 마당 한쪽편에 위치한 창고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창고 윗쪽에는 길게 늘어선 행각 건물이 있다. 평상시에는 광주유수부 관리들의 집무공간으로, 비상시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관리들이 머문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외행전을 지나 국왕의 침전인 내행전이 있는 상궐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국왕과 가족들이 머무는 침전 역할을 하는 내행전. 얖면 7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에는 없는 행궁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로 된 가운데 3칸은 국왕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거나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어좌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왼쪽편 온돌방. 행궁 건물로 침실 겸 서재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오른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앞에는 공식행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큰 마당을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상궐 내행전 왼쪽으로는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머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왼쪽편 수행원들이 머물렀던 공간인 작은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오른편에도 수행인원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다. 행각으로 보이는 건물로 직급이 낮은 내시 등의 수행원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각은 방과 마루,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서쪽편 담장 너머로는 광주부유수의 집무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좌승당이 있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3칸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주유수는 동헌인 외행전 대신 이 건물을 일상적인 업무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좌승당에서 종묘와 사직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좌승당 아래쪽으로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건물인 일장각이 있다. 일반적인 관아 건물의 성격으로 볼 때 광주유수가 머무는 숙소인 내아에 해당되는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은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살림집으로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고위 관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단심 부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아의 규모 또한 작은 편이다. 마찬가지로 각도 감영 관아의 내아 또한 건물규모가 작은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 대청마루. 광주유수가 머물던 공간임을 보여주는 가구배치를 하고 있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상당히 직위가 높은 인물로 대체로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상궐 뒷편에 있는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숙종대에 세웠다는 재덕당 건물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가 남아 있는 남한산성 행궁 후원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행궁은 산성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는데, 동.서로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으로 가려진 곳에 위치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둔 두 영역인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뒤에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설치했다. 이는 전국의 행궁 중에서 유일한 사례로 남한산서의 국가와 왕실의 보장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궁 뒤 언덕에는 숙동대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는 광주유수의 집무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성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면서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재덕당 뒷편 언덕에 세워진 정자. 국왕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광주유수가 손님을 접견하기 위해 세운 작은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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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남아 있는 고목

OLYMPUS DIGITAL CAMERA행궁 바깥쪽에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과 우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