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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인양사 조성비(보물 227호), 인근 지역 사찰 조성 내력을 기록한 통일신라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에 있는 인양사 조성비(보물 227호)이다. 이 비석은 통일신라 때 인양사를 비롯하여 부근의 여러 사찰에서 일어난 범종, 탑, 금당 등의 불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인양종을 만든때부터 비석을 세운 때까지 약 40여 년동안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형태는 바닥돌과 비몸,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의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인근 사찰 조성에 큰 역할을 했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군 소재지 부근 농경지 한 가운데에 남아 있는 인양사 조성비(보물 227호)

SANYO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비석 앞면. 통일신라 때 주변지역 사찰 조성 내력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은 뒷면에는 특이하게 스님의 모습을 새겨놓고 있다. 주변 사찰 조성에 큰 역할을 했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비석에 새겨진 스님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비몸에 비해 크게 만들어 어색하게 보이는데 원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 보물 227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동
9세기 초 통일신라시대의 절의 건립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비석이다. 탑에 새겨진 글에는 인양사 등 여러 사찰의 범종, 탑, 불상, 금당, 요사 등의 조성연대와 이에 소요되었던 양식 등이 담겨 있다. 인양사 종을 주조한 771년에서 이 비석이 세워진 810년까지의 40년 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 뒷면에는 승려의 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 비석에 담긴 일과 관련된 당시의 고승을 기려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된 상은 어린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인데, 인체를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비석 위에 이례적으로 지붕과 같은 머릿돌이 얹혀 있는데, 크기가 비신에 비해 지나치게 커 원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비의 높이는 150 cm, 폭은 45 cm이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4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석빙고(보물 310호), 창녕현 관아에서 설치했던 얼음창고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에 있는 석빙고(보물 310호)이다. 창녕현 관아에서 만들어 운영했던 얼음 창고이다. 얼음은 국왕에 진상할 물품을 운송할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석빙고는 주로 안동, 현풍, 청도, 영산 등 낙동강 내륙수운에 위치한 고을에 남아 있다. 내부는 직사각형 평면이며 물이 빠지는 배수로, 공기가 드나드는 환풍구 등을 두고 있다. 석빙고 앞에는 조선후기 영조 때 창녕현감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다른 지역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영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석빙고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내부를 출입하는 출입문. 큰 장대석을 쌓아 출입문을 만들었ㄷ.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석빙고. 내부가 긴 직사각형 평면임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석빙고 앞에 세워진 비석. 조선후기 영조 때 창녕현감이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창녕 석빙고, 보물 310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석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봄.여름.가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지금의 냉장고 역할을 하는 인공적 구조물이다. 외견상 고분과 같은 형태를 띠는데, 빙실이라는 공간이 주변 지반과 비교하여 절반은 지하에 있고, 바깥 면은 보온을 위하여 흙으로 두껍게 덮여 있기 때문이다. 주로 강이나 개울 주번에 만들어지는데, 이 석빙고 역시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띠를 중간 중간에 두었다. 각 띠 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 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요철을 가진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가 드나드는 것을 조절하여 냉기가 오래 가게끔 만들었다. 창녕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에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서에 의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각 부분의 양식 또한 조선 후기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4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4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경상도 창녕현 관아, 정청 기둥과 지붕만 남아 있는 객사

창녕현(昌寧縣)은 조선시대 창녕읍과 주변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행정 조직이다. 삼국시대 비화가야의 중심지역으로 당시 지배층의 무덤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고려때까지는 창녕군이 유지되다가 조선 태종 때 종6품 현감이 고을 수령인 창녕현으로 강등되었다. 옛 창녕현 관아 건물로는 객사가 있으며, 관아에서 운영했던 석빙고(보물 310호), 창녕 현감을 지냈던 인물들을 위해 세원 송덕비, 구함말에 세원 척화비 등이 남아 있다.

창녕현 관아 중심 건물이었던 객사는 만옥정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시장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다가 1988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좌.우 익사는 없어지고 정청 건물만 남아 있다. 건물 벽면이나 창호, 마루도 없어, 누각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시장으로 옮기면서 그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객사. 시장 건물로 사용하다가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좌.우 익랑은 남아 있지 않은 정청 건물이다. 지붕과 기둥만 남아 있다. 건물을 앞면 3칸 규모로 객사 건물는 비교적 큰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객사이 있는 창녕 만옥정 공원

SANYO DIGITAL CAMERA공원 한쪽에는 창녕 현감을 역임한 인물들을 위해 세원 송덕비 등을 모아 놓았다. 다른 고을에 비해 송덕비가 많은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공원 한쪽편에 있는 척화비.

SANYO DIGITAL CAMERA창녕읍 도심 송현리에 있는 창녕 석빙고(보물 310호). 관아에서 운영했던 얼음창고 이다.

창녕 객사,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객사는 외부의 관원이나 외국 사신이 묶는 숙소이자, 임금과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객사는 왕실의 권위를 반영하는 중요 지방 공공시설의 하나였다. 창녕현 관아의 부속 건물이었던 이곳 객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300~400년 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인 1924년 시장을 세운다는 구실로 객사를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수하였다. 객사의 전형적인 건물 배치는 종묘의 건물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중앙에 주 건물이 있고, 좌우에 익사가 있는 구조이다. 주 건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벽체나 창호도 없이 기둥과 지붕 구조만 남아 있고, 또 좌우의 익사도 없어서 원래의 형태를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지붕도 일반적인 객사에 비해 매우 낮고 건물의 방위조차 원형과 달라 권위 있던 객사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척화비, 구한말 서양세력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만옥정공원 내에 있는 척화비(斥和碑)이다. 구한말 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서양세력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이다. 창녕읍내 다른 곳에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 비석을 세운지 백년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전국에 남아 있는 척화비가 많지 않아 역사적 의미는 큰 비석이다. 척화비에는 ”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져 있는 창녕 척화비. 당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
비석에 새겨진 글자.

SANYO DIGITAL CAMERA창녕 척화비가 있는 만옥정공원에는 신라 진흥왕이 창녕지역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인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가 있다.

창녕 척화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1866년(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 8) 신미양요에서 미군을 물리친 정부가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내용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원래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이 광복 후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비화가야 점령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이다. 신라가 창녕지역을 편입한 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은 자연석 앞면에 비문을 새겨두고 있다. 앞부분은 닳아서 잃을 수 없지만 뒷부분은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순수비처럼 이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통치이념 등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반부에는 수행하던 신하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문 내용중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단양 적성비와 함께 척경비로 일컫고 있으나, 비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의 순수비와 동일한 성격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척경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기 1년 전으로 대가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도심 만옥정공원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영토에 편입시킨후 이 지역을 다녀간 후 기념으로 남긴 비석이다. 원래 화왕산성 아래 산기슭에 있던 비석을 발견한 후 이곳으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은 높이 1.8 m 정도의 큰 돌에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글자를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SANYO DIGITAL CAMERA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 진흥왕을 수행했던 인물들의 관직과 이름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등을 밝혀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 창녕 만옥정공원. 화왕산 등산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심공원으로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때 만든 삼층석탑, 창녕객사, 창녕 척화비 등 문화재가 공원내에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1일 입”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이 없고 인명과 관등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 비석 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준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 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 부분은 관련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 줄은 3자이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8 cm, 폭 175 cm, 두께 약 30 cm이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 발견하였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