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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한개마을 월곡댁, 20세기에 지어진 고택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 있는 월곡댁이다. 마을 제일 안쪽 높은 곳에 위치한 고택으로 20세기에 지어졌다. 건물은 대문채, 안채, 사랑채, 중문채, 별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는 ‘ㄱ’자형을 하고 있다. 안채와 별채가 담장과 중문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20세기에 지어진 집이지만 마을에 있는 기존 고택들의 공간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한개마을은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들어온 이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성산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주종택, 교리댁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택들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 등이 남아 있다. 나즈막한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주고, 앞으로는 큰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마을앞 들판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 한개마을 안쪽에 위치한 월곡댁. 20세기에 지은 집으로 바깥쪽에 사랑채, 안쪽에 안채가 있는 마을 고택들의 공간배치를 잘 따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대문채. 문간방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는 ‘-’자형 건물로 마을 높은 곳에 있으며, 넓은 사랑마루를 두고 있어 정자같은 느낌을 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옆에 안채가 있고, 그 앞에 담장과 중문채를 두어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그 앞에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별채가 있다.

성주 한개마을 월곡댁 07-20180110사랑채는 ‘ㄱ’자형이며 안마당이 꽤 넓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 한개마을 전경.

대산동 월곡댁,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이 건물은 1911년 이진희가 처음 건립하였으며 1930년에는 사당을, 1940년 경에는 별당채를 새로 추가하여 증축하였다. 가옥은 안채, 사랑채, 별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문채와 중문채가 각각 사랑채와 안채 앞에 놓여 있다.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만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별채는 안채 앞쪽에 세웠는데 사방이 담으로 막혀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하며 중문채 앞의 작은 협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사당은 가장 뒤쪽에 독립된 구역을 이루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지은 건물이면서도 각 건물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채도 ‘튼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마을의 공통된 특징을 잘 지니고 있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성주 한개마을 응와종택, 마을 입향조가 살았던 종택터에 있는 고택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 있는 응와종택이다. 마을 입향조가 살았던 종택이었는데, 조선후기 후손인 이이신이 매입하였으며, 그의 아들이자 사도사자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이 세자를 추모하여 북쪽으로 문을 내고 살았다고 하여 북비고택으로도 불렸다. 후손들이 여러차례 증축하여 대저택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서쪽에 대문이 있고,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형태이다. 안채는 아랫채, 행랑채 등과 함께 넓은 ‘ㅁ’자형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다. 지역적인 특색이 반영된 공간배치를 하면서도 구한말 유행했던 건축양식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한개마을은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들어온 이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성산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주종택, 교리댁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택들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 등이 남아 있다. 나즈막한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주고, 앞으로는 큰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마을앞 들판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한개마을 입향조가 살았던 종택이 있던 곳에 위치한 응와종택. 구한말에 지은 솟을대문을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마굿간과 문간방이 있는 문간채

OLYMPUS DIGITAL CAMERA저택은 바깥쪽에 사랑채가, 안쪽에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응와종택 사랑채. 19세기에 유행한 누마루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사랑채의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누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앞쪽으로는 사도세자 호위무사로 그를 추모하여 북쪽에 문을 내고 은거하면서 살았다는 옛 북비고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앞면 4칸의 작은 규모을 하고 있는 북비채. 마당 한쪽에 장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와 사랑채 사이 공간을 분리해 주고 있는 행랑채.

OLYMPUS DIGITAL CAMERA앞면 6칸의 ‘-’자형 건물을 하고 있는 안채. 맞은편  중문채와 서쪽의 아랫채와 함께 넓은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맞은편 중문채가 있던 자리는 정원으로 꾸며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 한개마을 전경.

성주 응와종택,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성주 응와종택은 한개마을 성산이씨의 발상지이다. 성산이씨가 한개에 입향할 당시의 종택이었던 대초당을 경종 1년(1721)에 처사 이이신이 매입하여 응와종택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이이신의 아들 돈재 이석문이 북쪽으로 문을 내어 북비고택으로도 불린다. 돈재의 아들 사미당 이민겸이 규모를 확장하였고, 사미당의 아들 농서 이규진이 순조 21년(1821)에 정침을 신축하였으며, 농서의 아들 응와 이원조가 현종 11년(1845)에 사랑채인 사미당을 낙성하여 현재의 규모를 이루었다. 고종 36년(1899)에 솟을대문을 증축하여 대감댁의 면모를 갖추었고, 순종 4년(1910)에 사당을 증축하였다. 돈재는 무신으로서 사도세자에게 충의를 다하였고, 농서는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은율현감을 지냈다. 응와는 한성판윤.공조판서.판의금부사를 지낸 문신이며, 조선 주리학의 학통선상에 있는 학자이다. 충절과 학문을 면면히 이어 온 이 가옥은 안채.사랑채.안사랑채.사당.북비채.대문채 등 6채로 구성되어 있고, 북비채에 있었던 장판각과 안대문채.아랫채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소실된 안대문채는 중문간채.방앗간.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6칸으로 안채 맞은편 남쪽에 있었으며, 아랫채는 안채의 동쪽에 지금의 안사랑채와 마주 보며 있었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성주 한개마을, 교리댁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 있는 교리댁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영조 때 처음 지어졌으며 19세기에 사랑채 등을 다시 고쳐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집은 서재, 사랑채, 안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서쪽을 향하고 있는 대문 왼쪽에 서재가 보이고, 대문 안쪽에 사랑채가 있는 마당이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의 ‘-’자형 건물이며, 그 안쪽에 ‘ㄱ’자형 안채가 있다. 건물이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담장과 출입문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독특한 공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개마을은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들어온 이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성산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주종택, 교리댁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택들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 등이 남아 있다. 나즈막한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주고, 앞으로는 큰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마을앞 들판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한개마을 교리댁 사랑채.  이 집은 대문과 서재, 사랑채, 안채가 동.서로 나란히 있는 독특한 건물배치를 보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교리댁 대문. 경사진 골목길 안쪽에 대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문 옆에 있는 서재. 서쪽을 향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사랑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마당 안쪽에 있는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성주 한개마을 교리댁 06-20180110중문 안쪽에 있는 안채. 경북지역 ‘ㅁ’자형 한옥과는 달리 남부지방의 개방한 한옥형태를 보면서도 당장과 중문으로 외부와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독특한 공간배치를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 한개마을 전경.

대산동 교리댁, 경북 월항면 대산리
이 건물은 조선 영조 36년(1760)에,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한 이석구가 건립한 가옥이다. 그 후 사랑채, 사당, 서재는 1870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집의 이름은 이석구의 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데서 비롯된다. 넓은 대지 위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인 사랑채를 비롯하여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이 서로 떨어져서 배치되어 있다. ‘-’자형의 정침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음은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는 태백산맥 일대의 ‘ㅁ’자형과 남부 ‘-’자형 민가를 섞어 놓은 배치 형식으로 생각되며 민가 유형의 지역간 전파.교류.절충 등의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성주 회연서원, 조선중기 유학자 정구를 모신 서원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이다. 조선중기 유학자이자 문신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선후기 인조 때 그가 후학을 양성하던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처음 세워졌으며, 숙종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구한말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7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서원은 강학공간을 동쪽에, 제향공간인 사당을 서쪽에 두고 있는 동학서묘(東學西廟)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중기 성리학을 이끌었던 그의 위상을 보여주듯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공간이 강조되고 있다.

한강 정구는 조선중기 성리학을 이끌었던 유학자로 김굉필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다. 성리학뿐 아니라 병학, 역사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관직은 주로 외직을 맡으며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외증조부인 김굉필을 모시는 달성 도동서원에 함께 모셔져 있어 구한말 서원훼철령 때 회연서원이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 앞에는 그를 기리는 신도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 회연서원. 조선중기 유학자 한강 정구를 모신 서원으로 그가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구한말 철폐되었던 것으로 1970년데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출입문 문루인 현도루.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대가천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학공간 중심건물인 강당. 화려하지는 않지만 앞면 5칸 규모의 큰 건물이다. 후학양성을 중시하는 회연서원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대청마루. ‘경회당’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옆 작은 온돌방. 앞쪽에도 툇마루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마루에서 보이는 강학공간 마당. 작은 협문을 사용하고 있어 개방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앞면 3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맞은편 서재.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뒷편에 있는 옛 사당. 작은 규모의 사당으로 원래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육기능을 강조했던 회연서원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서쪽으로 옮긴 사당. 서원의 교육기능이 없어지면서 협소했던 사당을 확장하여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새로 지은 사당.

OLYMPUS DIGITAL CAMERA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이 사당 앞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살림집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바깥에 있는 사당인 향연사.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이 모셔져 있다. 일반적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에 세워져 있는 ‘한강 정구 신도비’.

OLYMPUS DIGITAL CAMERA대구 달성 도동서원(사적 488호). 조선중기 유학자 김굉필을 모시는 서원으로 그의 학품을 계승한 유학자로 이곳에 같이 모셔져 있다.

회연서원,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 정구(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그의 사후인 1627년(인조 5)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1583년(선조 16) 정구가 회연초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1690년(숙종 16) 현판.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국가로부터 서원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0년 대에 복원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의 주향인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 김굉필이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였다.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에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 우승지, 공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문목의 시호가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구 사당, 강당, 동.서재, 신 사당, 전사청, 견도루 등이 있으며, 정구가 직접 조성한 서원 앞 뜰의 백매원에는 신도비가 서 있다. 그 밖에 한강 정구와 관련된 유물.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전시관과 향현사, 관리사가 있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 석담 이윤우를 종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현사에는 신연, 송사이, 용재 이홍기, 육일헌 이홍량, 모재 이홍우, 동호 이서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보물 1565호), 가야산 고갯길 입구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

경북 성주군 수류면 백운리 법수사(法手寺)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1656호)이다. 높이 6 m로 비교적 큰 규모로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새겼으며, 위층 기단과 탑신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일반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에 비해 1층 기단이 높게 만들었다. 해인사 부근 월광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한 양식이다. 전체적으로 약간 불안정하게 보이며 전체적인 조형미는 약간 떨어지는 편이다.

법수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때(802년)에 창건된 사찰로 성주에서 해인사로 넘어가는 서성재 고갯길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500 m 정도의 가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산지 사찰로 전망이 좋은 곳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전각들이 있는 큰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었다. 주위에 형성된 마을 규모로 당시 사찰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큰 금당터가 남아 있는데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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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보물 1656호). 높이 6 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삼층석탑이 가야산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 아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으며, 위층 기단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아래층 기단을 높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탑신부.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져놓고 있다. 지붕돌은 얇게 만들어졌으며 모서리를 치켜올려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앞에 놓여진 석물. 연꽃모양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석등받침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설명이 없다. 석탑과 너무 가까이 있어 원래 위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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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절터는 가야산 중턱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탑이 있는 주불전 영역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빼어나다. 사찰을 조성할 때 해가 떠는 동쪽을 향해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영주 부석사, 구례 화엄사, 합천 영암사지 등에서 볼 수 있는 공간배치로 화엄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석탑 옆쪽에 남아 있는 큰 규모의 금당터.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에 모아 놓은 절터에 남아 있던 석재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입구에서 본 모습. 경남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을 경계짓는 가야산 줄기가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에서 본 모습. 주위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법수사의 옛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법수사지삼층석탑, 보물 1656호, 경북 성주군 수류면 백운리
이 탑은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사찰인 법수사에 조성된 높이 6 m의 3층석탑이다. 대가람으로 전해지는 법수사(法手寺)는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고 석탑과 금당터의 거대한 석축,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제자인 김황(나주김씨의 비조)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또한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에 1,000여 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대가람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석탑은 이중의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는 파손되었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옥개석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높은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양식상의 변화를 볼 때 신라 말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성주군성,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