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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과 정약용 유적(사적 107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 유적(사적 107호)이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유서깊은 곳으로 그가 이곳에서 초가를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다산초당’이라 부른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은 후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윤두서의 손자 윤단의 정자가 있던 곳으로 정약용의 외가 해남윤씨 집안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저술활동과 후학양성을 할 수 있었다.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를 여유당전서라 부르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술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머물렀던 다산초당은 무너져서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으며, 그 양쪽에 제자들과 손님이 머물렀던 동암과 서암이 있다. 유적지에는 그가 직접깎은 ‘정석(丁石)’이라 적힌 각석이, 차를 달여 마셨던 ‘청석’과 작은 샘물인 ‘약천’, 그가 잉어를 길렀다는 작은 연못 등이 있다. 천일각이라 적힌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가 태어나 살았던 여유당 고택 뒷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 경치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고려중기 백련결사운동의 중심 사찰이었던 백련사가 초당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는 백련사를 찾아 차를 마시며 교류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정약용 유적지를 대표하는 다산초당. 원래 초가건물이 있었던 건물터에 해방 이후 전형적인 목조건물로 다시 지었다. 향후 초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다산 정약용 유적지 입구에 있는 귤동마을.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입구. 이곳에서 숲길을 따라 300 m 정도 걸으면 다산초당을 찾을 수 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약 500 m 정도 떨어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을 오르는 숲길.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다산 초당. 원래 초가건물이 있던 곳에 새로지은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암. 윤종기 등 정약용을 따르던 18명의 제자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다산초당과 서암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의 산정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암(東庵).  저술에 필요한 책을 보관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뒷편 바위에 새겨진 ‘정석’이라 적힌 각석. 유배생활동안 그가 직접 새겼다고 한다. 필체에서 단정하고 간결한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옆 작은 연못.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이 잘 구현된 연못이다.

연지석가산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하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OLYMPUS DIGITAL CAMERA약천,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촉촉히 젖어 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했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다산초당 앞 마당에 있는 청석. 그가 차를 끓여 마셨던 곳이라 한다.

옛부터 있던 돌을 부뚜막으로 삼아 청동의 화로에 약천의 물을 붓고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반석으로 저술로 침침해진 눈과 피로한 몸을 돌보던 곳.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있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 실학이 구상되던 도량이요 산실이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다산초당 근처 강진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천일각.

SANYO DIGITAL CAMERA천일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생가터가 있는 남양주 여유당 고택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고향과 가족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한 벗 혜장이 있었고 다산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서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 보자. 제자들은 스승으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자료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서각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천일각에서 백련사로 가는 약 1 km에 이르는 길. 울창한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백련사. 고려중기 불교개혁 백련결사가 일어났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정약용은 이곳을 자주 찾아 혜장선사와 차를 마시며 교류했다고 한다.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길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설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백련사 동백나무숲 입구.

SANYO DIGITAL CAMERA동백나무 숲길.

SANYO DIGITAL CAMERA울창한 동백나무숲.

SANYO DIGITAL CAMERA해남 윤선도 종택 녹우당.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일대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 불린다.  윤선도와 자화상으로 유명한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윤두서 가 살았던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해남윤씨 집안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대지주집안이었다. 다산초당에서 1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외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유배지를 강진으로 정했던 곳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의 형 정약전은 연고가 거의 없었던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크게 고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남양주 여유당 고택. 경치가 아름다운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정다산 유적, 사적 107호
강진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강진 백련사, 고려중기 불교개혁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사찰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사찰인 백련사(白蓮社)이다. 남해안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는 만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통일신라 때 처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중기 원묘국사가 크게 중창하였다. 고려중기 불교개혁운동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사찰로 수신결사를 이끌었던 지눌의 송광사와 함께 불교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찰이다. 고려중기 이후 8명의 국사를 배출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피해를 입어 거의 폐사되었다고 세종 때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다시 중건되었다.

조선후기 지역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당시 사찰을 중건하면서 세운 사적비(보물 1396호)가 경내에 남아 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웅진전, 삼성각, 만령루 등의 여러 전각들이 있는데 대부분 조선후기 이후 중건된 것들이다. 만경루를 비롯하여 경내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의 경치가 아름다우며,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산길에 조성된 동백나무숲이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에 다산초당에서 가까운 이 곳을 자주 들러 차를 마시고 백련사 주지와 교류를 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백련사. 고려중기 백련결사운동을 이끌었던 유서깊은 사찰로 강진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만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고 조성한 형태의 가람배치로 영주 부석사 등에서 볼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백련사 강당건물인 만경루. 앞면 5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누각형태로 강진만 경치를 감상하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사찰 경내에서 본 만경루.

SANYO DIGITAL CAMERA만경루 옆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이 있는 사찰 경내. 만경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주불전인 대웅전이 있고 왼쪽을 여러 불전들이, 마당 양쪽으로 요사채들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백련사 주불정인 대웅전. 조선후기에 지어진 건물로 앞면 3칸에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현판. 다포계공포와 겹처마를 하고 있는 건물로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현판 양쪽에 용머리 장식을 달았다.

백련사 대웅전
백련사는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인 19세기에는 만덕사로 불려졌다. 백련사는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 1232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이곳에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켰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의 단청이 화려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건물이며, 1762년에 건립되었다. 각 추녀마다 활주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건물 전면 2개의 주두에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였다. 대웅 내부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중앙에 본존불인 여래상과 좌우에 보살상을 봉안하는데, 백련사의 경우에는 보살상 없이 여래삼존상만 봉안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옆에 있는 명부전.

OLYMPUS DIGITAL CAMERA명부전 옆에는 응진전과 천불전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삼성각.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앞 마당 왼쪽에 있는 요사채. ‘ㄱ’자 형태의 건물로 만경루와 함께 강진만 바다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련사를 찾은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요사채

SANYO DIGITAL CAMERA마당 오른쪽에 있는 소박한 모습의 요사채. 승려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백련사 사적비(보물 1396호). 고려중기에 조성된 원묘국사비를 받치고 있던 거북받침돌 위에 조선후기 지역 유력자들이 백련사를 중건한 내력을 기록한 비석을 올려 놓았다.

SANYO DIGITAL CAMERA백련사 아래 연못과 오래된 고목.

SANYO DIGITAL CAMERA백련사에서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출처>

  1.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강진 백련사 사적비(보물 139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남아 있는 사적비(보물 1396호)이다.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높의 447 cm 의 전형적 형태의 비석이다.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받침돌은 고려시대에. 비몸과 머릿돌은 조선후기 숙종 때 만들어진 특이한 내력을 가진 비석이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형태로 입체감있게 조각된 고려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몸돌과 머리돌은 조선후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거북받침돌은 고려중기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었던 원묘국사비를 받치던 것을 다시 사용하였다. 비문의 작성에는 숙종 관리 등을 지낸 지역 유력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의 내용 등이 적혀있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비석 중에는 그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 또한 뛰어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백련사 사적비(보물 1396호). 고려중기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원묘국사비에 사용되었던 거북받침돌 위에 조선후기에 사적비를 세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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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용머리를 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릿돌을 얹은 전형적인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원묘국사비에 사용되었던 것을 조선후기 사적비를 세우면서 재사용하였다. 힘찬 기상과 섬세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고려전기 거북받침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면에서 본 거북받침돌. 등에는 당초문을 조각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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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만든 몸돌과 머릿돌. 당시 지역 유력자들이 참여하여 비문을 짓고 글씨를 적었다. 내용은 백련사를 중건하게 된 경위,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에 관한 내용 등의 적혀 있다. 머릿돌에는 겹처마가 서까래가 새겨져 있는 등 조선후기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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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비몸 옆면에는 초화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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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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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2010년 비각을 세우기 전 모습.

백련사 사적비, 보물 139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백련사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비 등 여러 개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백련사 사적비만 남아 있다. 이 비는 1681년(숙종 7) 5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1631~1690)가 찬하고, 낭성군 이우(1637~1693)가 글씨를 썼으며 동생인 낭원군 이간(1640~1699)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모두 19행으로 이루어졌으며 1행은 45자로 구성되었다. 비의 앞면에는 백련사 중수, 원묘국사 행적, 백련결사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72명의 승려명과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백련사에 원래 원묘국사비가 있었으나 이수(머릿돌)와 비신(비의 몸돌)은 유실되었고 귀부(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전해졌다고 한다. 이후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면서 귀부는 옛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즉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시대의 귀부에 17세기 후반의 이수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 셈이며, 1기의 비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8년)

<출처>

  1. 안내문, 강진 백련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순천 순천왜성,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가 쌓은 왜성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이다. 광양만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쌓은 왜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호남지방 공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쌓았다. 성벽을 쌓은 석축의 형태, 돌의 크기나 모양 등이 우리나라 산성과 다르고 일본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다이묘들의 성과 비슷하다. 성벽은 내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여러단계의 성문과 성벽을 두고 있다.

이곳은 왜장 고니시가 이끈 왜병이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 마지막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본성 정상부에서 동쪽 광양만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협이 어렴풋이 보이며, 광양제철소의 웅장한 모습도 같이 볼 수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주둔했던 울산왜성과 함께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왜성이다.천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곽 중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곳으로 일본인들은 순천성이라 불렸으며 한때는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은 광양만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다. 선박이 정박할 수 있으며, 주위를 감시하기 좋은 곳으로 전형적인 일본성곽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성 첫번째 출입문. 순천왜성 내성은 2중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그 중 첫번째 성벽으로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는데 최근 일부를 복원해 놓았다.

문지
이 문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출입문이다. 문지 옆으로는 해자를 만들고, 바다 물을 끌어들여 섬처럼 만들어 방어에 치중하였던 건물지로 여겨진다. 만조 때 멀리서 이곳 출입로가 다리처럼 보인다 하여 왜교 또는 예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문지 공사는 2007년 이루어 졌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성 축조방식을 자문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문지를 쌓는 방식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바깥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본환이라 불리는 정상부로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정상부 본환 성벽. 일본성은 정상부 본환에 지휘부가 머무는 천수각이라는 불리는 건물을 세워둔다.

SANYO DIGITAL CAMERA본환이라 불리는 정상부 성벽.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성벽. 큰 돌을 잘 다듬어 촘촘히 쌓았으며, 약간 경사를 두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성 축성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성문은 양쪽에 높은 성벽을 쌓아 적을 제압하기 좋은 형태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조선의 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둥근 형태의 옹성과 같은 역할이나 그 형태가 다르다. 포루투갈의 영향을 받은 축성방법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정상부에 위치한 본환에 남아 있는 천수기단. 이곳에 천수각이라 불리는 5층으로 추정되는 목조건축물을 세워 놓았다.

천수기단
천수 건물이 세워졌던 단으로 천수기단 앞에는 부속된 낮은 단이 있다. 천수는 성을 대표하는 권위와 상징의 건물이. 『정왜기공도권』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나 천수각 1층 아래에 오층망해루라고 쓰여져 있어 오층 건물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수기단은 오랜 세월 동안에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 200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축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다. 모서리 돌은 쐐기질하여 쪼갠 돌을 사용하였고, 쐐기질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위아래를 교차되게 쌓았다. 천수기단의 상부는 남아 있던 초석은 그대로 보존하고 기존 초석위에 새로운 초석을 놓아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정성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광양항. 그 너머로 고니시 군대와 조.명연합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렸던 노량해협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아래는 원래 바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어 공단으로 바뀌었다.

순천 순천왜성 16순천왜성은 노량해협을 마주보고 있는 여수반도 입구에 세워졌다. 연안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 여수항에 자리잡았던 전라좌수영 본영과는 달리 호남 내륙을 장악하기 용이한 지점에 요새를 구축해 놓았다.

순천왜성, 
이성은 전라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 1597년(정유년) 9월에 왜군은 경기도 부군 전쟁에서 패한 뒤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각 지역의 요충지를 찾아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성을 축조하였던 것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에ㅐ 걸쳐 이곳에서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전투이며, 이는 조.명 연합군과 왜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기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였다. 당시 전재의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2겹으로 축조되어 있고, 외성은 1겹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곽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 축조 당시의 성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성곽내 주요 건물지에 관한 내용은 전쟁의 모습이 그려진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전라좌수영 본영

전남 여수시 군자동 일대에 있었던 전라좌수영 본영이다.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남해안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본영을 각각 2곳을 두었는데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서쪽을 담당하는 수영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조선초 성종 때(1479) 순천 오동포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수영에는 둘레 1.13 km의 수영성이 설치되었는데 현재는 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80여동의 건물, 2024호의 민가 등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객사 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만이 남아 있다.

전라좌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수군을 이끌면서 왜군을 상대로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면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되기도 하였다.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에는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사적392호), 충무공을 추모하며 세운 타루비(보물 1288호), 사당인 충민사(사적381호), 전라좌수영을 지원했던 승병들의 머물렀던 흥국사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구도심에 남아 있는 옛 전라좌수영. 객사였던 진남관(국보 304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전라좌수영성 모형(유물전시관 내 전시). 여수 구항 일대 둘레 1.3 km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정문 앞에는 함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내부에는 80여 동의 관아 건물과 2,000여 호의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앞 바다에서 보이는 전라좌수영성 일대. 객사건물인 진남관이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진남관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전라좌수영성의 규모
전라좌수영성의 설치 당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21년 10월에 전라좌수영성을 수축하였는데, 당시의 규모를 둘레 3,634자라 했다. 또 1847년 기록인 『호좌수영지』에서는 성주위가 3,158포척이라 했다. 성종년간의 규모를 당시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 km가 되는데, 현재 성곽의 터로 실측된 1.74 km와 약간의 차이만 있다. 이는 이후 설치되는 치나 오성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방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관아 문루인 망해루.

OLYMPUS DIGITAL CAMERA망해루에서 옛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길. 망해루에서 바다까지는 250 여 m 정도의 짧은 거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객사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 앞면 15칸, 옆면 5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궐패를 모시는 객사이지만 전라좌수영 소속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수군훈련을 지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가운데 정청부분. 다른 지방 관아 객사와는 달리 좌.우익랑을 두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내부. 벽체를 두지 않고 내부는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수 앞바다. 지금은 건물로 막혀 있지만 선박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579년(성종 10) 순천 내례포의 수군 만호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해남의 수영을 ‘전라우도수영’, 순천의 신설 수영을 ‘전라좌도수영’이라고 하면서 부터다.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했던 여수는 조선시대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구국의 성지로 전승의 사명을 다한 곳이며, 지금까지 이순신장군의 기백과 충정 정신이 도도히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아래 전라좌수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난중일기(국보 76호, 복제품), 난중일기는 이순신장군이 임진란(1592~1598) 7년 동안 싸움터에서 손수 쓴 진중일기로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간첩(국보 76호, 복제품), 이순신장군이 친척들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를 수집하여 만든 책이다. 크기는 세로 33 cm, 가로 44 cm로 글씨는 한문 초서로 쓰여 있다.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이곳 여수에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여수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정시킨 곳인데, 1593년(선조 26) 8월부터 1601년(선조 34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거둔 승리는 조선이 왜적에게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수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곳곳에 문화유적으로 남아 있다.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 공의 공적을 새긴 통제이공수군대첩비, 공을 추모하여 세운 눈물의 비석 ‘타루비’, 국내 최초로 세워진 이순신 사당 ‘충민사’가 있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 선 승려들의 흥국사도 있으며, 송현마을에는 효성이 지극했던 공이 전쟁중에 어머니 변씨를 모셔와 보살핀 곳도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글을 되새기게 하는 이곳 여수는 임진왜란 때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임명장,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부하장교에게 직책을 수여하는 명령서

OLYMPUS DIGITAL CAMERA좌수영 수군의 서본, 전라좌도 수군이 쓰던 글씨교본

전라좌수영 여수와 임진왜란 
여수는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왜구의 침략경로에 노출되어 있어 왜구가 침략하기 시작한 고려 말부터 수군기지화 되다가 진례만호와 내례만호를 거쳐 성종 10년(1479)에 드디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1895) 혁파되기까지 417년 동안 남해안 방어의 주력기지로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다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여수의 좌수영수군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바다의 모든 왜적을 격파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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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소의 톱

여수 전라좌수영 31-20100911여수 선소 유적(사적 392호),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전라좌수영 조선소 유적이다. 이곳에서 거북선을 비롯한 함선들을 건조하였다.

여수와 거북선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하여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는 한편 갖가지 병기를 시험하는 등 마치 왜적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는 듯 대비하였다.
난중일기: 인전년 3월 27일 <일찍 조반을 먹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여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 전라좌수영 동쪽과 돌산도 사이의 해협에 선박의 통행을 막기 위해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이 설치되었던 여수 종포와 돌산도 사이의 해협. 광양만을 통해 남해 노량해협으로 연결되는 연안항로의 주요 지점으로 지금은 거북선대교가 세워져 있다.

철쇄방비시설
이 방비시설은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통행을 막는 시설이었다. 우선 긴 쇠사슬의 중간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로 사용하고, 이 쇠사슬을 바다에 가로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수면에 큰 돌을 달아매어 닻으로 사용했다. 『난중일기』에 ‘돌은 신생포(지금의 율촌)에서 떠왔고, 나무는 두산도(지금의 돌산)에서 베어 왔으며, 공은 거의 날마다 이 쇠사슬을 건너 매는 일을 감독했다’고 적혀 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전라좌수영.삼도수군통제영.진남관
전라좌수영- 조선시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 1479년(성종10)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32)에 없앴다. 현재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라좌수영 성안에는 건물 80여 동,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 봄이면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여 매영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해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1593년(선조 26)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진남관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수군의 중심기지였다. 여수지역에서 목재를 조달하여 건축하였으며,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