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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남원읍성(사적 298호), 정유재란 때 큰 전투가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

전북 남원시 동충동에 남아 있는 옛 남원읍성(사적 298호)이다. 통일신라 때 남원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성을 처음 쌓았다고 하나 그 흔적은 남아 있다. 현재의 읍성은 1597년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의 둘레는 2.4 km 정도이고 성벽 높이는 약 4 m 정도이다.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해서 쌓은 일반적인 조선시대 읍성과는 달리 정사각형을 하고 있으며 성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바둑판처럼 큰 길이 있다. 성벽 바깥쪽은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쪽은 흙으로 토축을 쌓고 있는 전형적인 읍성 형태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북서쪽에 일부 성벽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고쳐지은 것이지만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은 여장이 없으며 전통적인 방어시설인 치성 외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지 않고 있다. 아마도 당시 서둘러서 성벽을 수리하면서 전통적은 읍성축성 방식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1957년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양원을 비롯한 명군 3000 여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관군 1000여명이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왜군은 고니시를 중심으로 56000여명의 대병력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성으로 집결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만여명의 민.관.군이 희생되었다. 남원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를 무혈입성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했으나 명랑해전으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읍성(사적 298호). 둘레 2.5 km 규모의 읍성으로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쌓은 것이라 한다. 중국읍성을 모방하여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읍성 축성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왜군_남원성_침공_작전도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가와가미 후사쿠니(川上久國)가 그린 남원성 침공 작전도(사진출처: 위키백과). 임진왜란 당시 남원성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중국식 읍성을 모방해서 만든 사각형 형태의 읍성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가 구성되어 있고,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있다. 성곽 바깥에는 해자를 파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은 잘 다듬을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쪽에는 흙으로 토축을 쌓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 축성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조총을 처음 접했던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 석축.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전통적인 방어시설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북쪽 모퉁이. 별도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읍성 북쪽으로 보이는 교룡산성. 읍성과 상호 연계하여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다. 한반도에서의 전통적인 방어전술은 지세가 험난한 산성을 이용하는 것이 적정하나 당시 읍성에 주력부대가 주둔하여 왜군의 대병력과 맞섰기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원성, 사적 298호, 전북 남원시 동충동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조선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 따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규모는 2.5 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 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오만 육천여 왜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만 여명에 달하는 성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 남았다고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조상들의 기상을 간직해 온 남원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 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4. 위키백과, 2019년

남원 만인의총(사적 272호),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이 함께 묻힌 곳

전북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만인의총(사적 272호)이다. 이곳은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이 전투에서 만여명의 조.명연합군과 백성들이 희생되었는데 임진왜란 직후 시신을 한곳에 묻었으며 광해군 때 (1612년) 충렬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무덤은 원래 남원역 부근에 있었는데 196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성역화하였다. 유적지에는 시신을 묻은 봉분, 죽은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세운 조형물, 기념관 등이 있다.

남원전투는 1957년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였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양원을 비롯한 명군 3000 여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관군 1000여명이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왜군은 고니시를 중심으로 56000여명의 대병력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성으로 집결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만여명의 민.관.군이 희생되었다. 남원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를 무혈입성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했으나 명랑해전으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 만인의총(사적 272호). 정유재란 남원전투에서 희생된 만여명이 함께 묻힌 무덤이다. 원래 주택가에 있었는데 1964년 사당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성역화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전투에서 희생된 8충신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처음 세워졌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 내부

SANYO DIGITAL CAMERA만인의총 무덤.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만여명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SANYO DIGITAL CAMERA1964년에 세워진 ‘만인의총’ 비석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앞 기념 조형물

SANYO DIGITAL CAMERA만인의총 기념 비석

SANYO DIGITAL CAMERA전투가 벌어졌던 남원읍성(사적 298호).

만인의총, 사적 272호, 전북 남원시 향교동
이곳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을 합장한 무덤이다. 남원은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선조 30년(1597) 8월 오만 육천의 왜군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안에서는 정기원.이복남의 지휘 아래 민.관.군이 굳게 뭉쳐 성을 방어 하였다. 결국 성이 함락되어 거의 만명에 달하는 주민과 관.군이 죽음을 맞았다. 파괴 또한 극심하여 성안에는 겨우 민가 17가구만이 남았다. 난이 끝난 뛰에 순절한 이들을 한곳에 묻고 그들을 추무하는 사당을 지었다. 광해군이 이 사당을 충렬사라고 이름지었다. 근래에 무덤과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였다.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한 의로운 선조의 강직한 절개가 새삼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4. 위키백과,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