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September 2019

나주 영산포, 영산강 주변 물산의 집산지였던 옛포구

전남 나주시 영산동에 있는 옛포구인 영산포이다. 조선초 영산강 수운을 이용하여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저장했던 영산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조선중기 영산창의 기능이 영광 법성창으로 옮겨지면서 조운에 이용되었던 기능을 상실했지만 주변지역의 산물의 집산지로서 기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포는 일제강점기에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전남지역 물산의 집산지로 크게 번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호남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로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도시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지금도 당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960년대까지 항구의 기능을 유지했으나 교통의 발달 등으로 항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도 국도와 철도 등 주요 육상교통로가 이곳을 지나가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호남을 대표하는 홍어의 집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 영산포. 영산강 중류에 위치한 옛 포구로 배가 드나들기 적합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역 물산의 집결지로 나주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던 중요한 포구였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와 영산포를 연결하는 옛 다리인 영산교와 그 아래를 흐르는 영산강. 지금은 수위가 낮아져 배가 드나들기 어려워 포구로서 기능을 상실했지만 1960년대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영산교 아래 배가 정박했던 영산포 옛 포구터. 홍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수산물들이 이곳까지 운송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영산강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쌀이 이곳에서 모여 목포를 통해 반출되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제방에는 이곳이 홍어로 유명한 고장임을 알려주는 글자가 적혀있다.

SANYO DIGITAL CAMERA제방너머로 일제강정기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형성되었던 도심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와 영산포를 연결하는 영산대교.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나주읍성(사적 337호), 전라도 나주목 읍치

전남 나주시 옛 나주목관아 읍치에 있는 나주읍성(사적 337호)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초 전국적으로 읍성을 정비할 때 현재의 규모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약 940 m 정도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2.7 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헐어졌으며 서문 주위에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문이 모두 있었으며 현재는 남문인 남고문과 동문인 동점문과 서문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남고문은 총루가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으며, 동점문은 옹성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성문은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나주목의 읍성으로 전주읍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옛 나주읍성 남문인 남고문. 석축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총을 사용할 수 있는 총안이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현종때 수리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남고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1-20190923남고문 석축 발굴 당시 모습. 바닥에 깔려 있던 석축이 확인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읍성 동점문. 남고문과 달리 앞쪽에 방어시설인 옹성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점문 문루. 총안을 두고 있는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옹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동점문.

나주읍성 동문터, 사적337호
나주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 성종 2년(983) 목(牧)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도시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태조의 나주경략, 현종 1년(1010) 거란의침입시 현종이 남순하여 10여 일간 머물다가 환도한 사실 등은 지방행정 중심도시로서 나주의 비중과 함께 나주읍성의 존재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김경손전이다. 고려 고종 24년(1237)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수중에 넣고 나주로 진출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하였다는 기록에 현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나주성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가 갖추어져 있었음은 정도전의 「등나주동루유무로서」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 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 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대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이 겹쳐 세조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후 나주목사 김계희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되었다. 한편 나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 7월23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나주인들이 남문의 보존을 희망하나 이미 성벽의 태반이 없어졌고 동문은 1912년에 붕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신문 1916년 10월 1일자에 도로공사 등의 영향으로 동.서.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문만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0년에 제작된 「속수나주지」에 남문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1916년 10월 ~ 1920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성벽은 잔돌끼움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재 성벽의 바깥부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이다. (동문 동점문, 서문 서성문, 남문 남고문, 북문 북망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2-20190923나주읍성 서문 부근에 남아 있는 석축. 약 100 m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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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나주목 관아(사적 483호), 객사인 금성관과 내아

전남 나주시 금계동 일대에 남아 있는 옛 나주목 관아터(사적 483호)이다. 나주시 구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관아터에는 객사인 금성관, 내아인 금학헌,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등이 남아 있다. 객사인 금성관은 조선초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에 중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청사로 사용하면서 개조되어 정청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 망화루 등이 복원되었다. 내아인 금학헌은 구한말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되면서 일부 변형이 있었으나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부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지방관아 중 비교적 큰 규모였던 나주목 관아의 옛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서깊은 유적지이다.

나주는 전남지방을 흐르는 영산강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큰 고을로 고려시대부터 큰 규모의 지방행정 조직인 나주목(牧)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주와 함께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읍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지도 등 여러 문헌에 관아 건물들의 위치와 형태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현존하는 관아건물 등과 비교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출입문인 망화루. 객사인 금성관과 함께 조선초에 처음 세워졌다. 다른 지방 객사문과는 달리 문루 형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 중삼문과 내삼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금성관 중삼문.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통 객사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삼문형식을 하고 있으며 문루에서 거친 박석으로 삼도형식이 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인 금성관. 가운데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을 두고 양쪽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군청건물로 사용하면서 정청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다시 지어 원형을 복원하였다. 동.서익헌 건물의 규모가 다른 것이 특이하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정청. ‘금성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지방관아 객사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청 내부. 넓은 마루가 깔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정은 우물천장과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 섞여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앞면 6칸의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동익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이며 오른쪽에 넓은 마루가 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벽오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헌은 앞면 5칸으로 동익헌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현 앞쪽 툇마루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나주목 객사.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객사 앞 마당. 가운데 내삼문 터가 있다. 궁궐 정전 영역처럼 마당에 박석이 깔여 있으며 가운데 통로가 있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다.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이다. 특히 정청(나주목은 금성관)에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즉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4.12 ~ 1489 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임란때 피해를 입어 김개목사가 1617년 4월 21일 중수하고 1774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 1963년 보수를 거쳐 1876년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정비 사업을 통해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서익헌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객사 마당 한쪽편에 모아 놓은 공덕비들.

SANYO DIGITAL CAMERA객사 서쪽편에는 나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와 내아인 금학헌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SANYO DIGITAL CAMERA정수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내아였던 금학헌이 남아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사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ㄷ’자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구한말 상류층 저택의 형태가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행랑채에 해당하는 부속건물

나주목사 내아. 금학헌
이곳은 조선시대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살림집을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안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객사 금성관과 동헌의 출입문 정수수와 함께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내아가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으나 안채 상량문에 1825년(순조 25) 7월 1일 주춧돌을 놓고 7월 20일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문간채는 1892년(고종 29)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9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최근에 모두 충실하게 복원하였다. 목사내아는 주변에 객사, 정수루가 함께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 양식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내아 부근에 남아 있는 의열각

나주목 관아.나주읍성
이곳은 천여년 동안 나주의 중심공간으로 금성관을 중심으로 하는 객사공간과 나주목사가 직접 정무를 보았던 나주목 동헌(정수루, 목사내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을 정점으로 동문(동점문), 서문(서성문), 남문(남고문), 북문(북망문)의 사대성문과 성벽을 쌓아 도시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현재 규모는 김계희목사(1457.811 ~ 1459.11.21 재임)가 완성하였다. 나주읍성은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 이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동부면(16개리) 서부면(24개리)이 편재되어 1,361호 4,662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이 378명이 많았다. 또한 남문밖에는 전라우영(현 나주초등학교)이, 서문밖에는 나주향교가 자리하고 동문밖에는 석장(석당간, 보물 49호)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읍성을 중심으로 석당간, 나주향교, 목사내아, 정수루, 주사청 등의 건물이 있다. 좌측의 나주목고지도는 영.정조 때 비변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지도로 나주읍성과 관아의 각 건물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주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나주향교(사적 483호), 교육기능을 제대로 갖춘 큰 규모의 향교

전남 나주시 교동에 있는 옛 나주목 중등교육기관이었던 나주향교(사적 483호)이다. 나주향교는 조선초 태종 7년(1407)에 처음 창건되었다. 조선시대 설치된 향교 중 전주향교, 강릉향교 등과 함께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공자 아버지 위치를 봉안한 계성사가 있어 앞쪽에 제향공간이, 뒷편에 강학공간이 있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제향공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 송조 4현, 우리나라 18현을 모시고 있는데 대성전과 동.서무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대성전(보물 394호)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규모은 건축물로 대표적인 문묘 건축물로 손꼽힌다. 강학공간은 좌.우익랑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서재를 두고 있다. 전체적인 규모나 공간배치에 있어 서울 성균관과 거의 유사하며 교육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대표적인 향교이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향교(사적 483호). 나주목 관아에서 운영했던 중등교육기관으로 전묘후학의 공간배치, 좌.우익랑을 갖춘 큰 규모의 대성전과 동.서재 등 성균관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춘 대표적인 향교이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향교 외삼문. 입구에 표지석과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강학공간으로는 문묘 옆 골목길을 통해 들어갈 수 이다.

SANYO DIGITAL CAMERA외삼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문묘 출입문인 내삼문까지 바닥돌이 깔린 신도가 연결되어 있다. 내삼문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삼문형식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공자와 선현들을 모시는 제향공간인 문묘. 대성전(보물 394호)를 중심으로 동.서무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호). 앞면 5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우리나라 문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서무.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향교 외삼문 오른쪽 강학공간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정면에 전사청 등에 해당하는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중심건물인 명륜당.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강당을, 양쪽에 협실을 두고 있다. 성균관 명륜당과 같은 규모와 형태를 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명륜당 현판이 걸려 있는 가운데 강당 건물. 앞쪽에 월대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왼쪽편 협실. 앞면 3칸 규모로 넓은 대청마루 2칸과 온돌방 1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오른쪽 협실. 최근에 크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명륜당 앞 마당 방향으로 회랑형식의 툇간을 두고 있다. 성균관 동.서재와 같은 형식으로 다른 향교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반대편에는 비교적 넓은 마루를 두고 있어 유생들이 일상적으로 공부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맞은편 서재. 동재와 같은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명륜당 월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학공간 마당과 대성전. 마당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동쪽편 전사청 등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공간으로 출입하는 출입문. 성균관과 같은 공간배치이다.

SANYO DIGITAL CAMERA출입문을 들어서면 동재 앞 마당과 부속 건물들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 도서관에 해당하는 건물.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