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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대동세상을 꿈꾸며

조선사회에서 전라도는 변혁을 추구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 조선중기 율곡의 제자였던 정여립은 당쟁에 휘말려 낙향하여 대동계를 만들어 변화를 추구하다 반역으로 몰려 많은 희생을 내었다. 이후 구한말에는 동학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변화를 꿈꾸는 많은 신흥종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반면 임진왜란에는 국가적인 위기에 맞서 적극적으로 의병활동 등에 참여했으며, 일제강점기 직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최익현과 전라도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외세에 대항하였다.

대동세상을 꿈꾸며
조선은 윤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이에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제도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사회 속에서 중국의 『예기』에 등장하는 이상사회인 대동세상의 실현을 꿈꾸는 이가 전라도에서 등장하였습니다. 대동의 의미는 해석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신분질서를 부정하였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전라도는 ‘반역향’의 이미지를 버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예기, 예기집설대전,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기축록, 조선후기. 『대동야승』에 실린 「기축록」을 참고하여 필사한 책으로, 기축옥사 및 이와 관련된 일려는 사건을 기록하여 광해군에서 인조 연간에 이르는 당쟁 분열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송강 정철 청화백자묘지, 1706년

송시열이 지은 정철의 청화백자 묘지명이다. 고인을 애도하고 공덕을 기리는 것 이외에 정여립의 모반으로 인해 일어난 기축옥사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철의 일생뿐만 아니라 16세기 말 사림 붕당 간의 갈등 양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세보중,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송강집,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송강집 목판,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송강서원 현판, 1706년

정여립과 기축옥사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1546~1589)은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 벼슬길에 나섰으나 갖은 당파의 분쟁에 휘말려 결국은 낙향하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진안의 죽도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얽매이지 않는 모임인 대동계를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여기에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한 것이 모반으로 여겨져 반역자로 쫓기다 자결하였습니다. 그의 모반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인 기축옥사를 불러왔고, 3년 넘는 세월 동안 1000여 명이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사발통문, 1893년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군
1894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에는 전봉준 외에도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 각지의 접주들이 이끄는 무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나열할 때, 누구의 이름도 앞서지 않도록 사발을 대고 원을 그려 둥글게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책임자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었겠지만, 그들 누구도 다른 이의 위에 서지 않는, 평등한 사람들의 무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천안 전씨 세보, 1862년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이고 본명은 명숙인데 1862년에 간행된 『천안전씨세보』에는 ‘철로’로 명기되어 있다. 사진은 1895년 2월 27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후 서울로 압송될 때, 일본의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밀양손씨 세보

손화중(1861~1895)은 본관은 밀양이고 본명은 정식이다. 그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에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의 배꼽에서 신라 검단대사의 비밀 문서를 꺼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어서 그의 밑으로 더욱 많은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도강김씨 족보

김개남(1853~1894)은 전봉준과 함께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로, 본관은 도강이고 본명은 영주이며 태인 출신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함평갈동 명록, 1894년, 명록, 1893년,

OLYMPUS DIGITAL CAMERA나주명록, 1894년

OLYMPUS DIGITAL CAMERA천일권 집강 임명장, 1894년

OLYMPUS DIGITAL CAMERA김창모 교수 임명장, 1894년

다시 사람이 하늘인 세상
물산에 부족함이 없던 비옥한 땅, 전라도는 예로부터 지배층의 수탈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습니다. 19세기말, 외세의 침입이 잦아지며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자 전라도에 대한 수탈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폐악에 불만을 품은 전라도 농민들은, 1894년 동학의 접주 전봉준의 깃발 아래 모여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인내천’, 즉 사람이 하늘인 세상에서 살고자 꿈꾼 전라도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인종어제, 인종(재위 1544~1545),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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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대왕묵죽도, 인종, 1543년

조선전기 호남사림과 하서 김인후
하서 긴인후(1510~1560)는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유학자입니다. 그는 인종의 세자시절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한 필암서원의 많은 문서가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반계수록, 유형원, 1770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세유표, 정약용,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목민심서, 정약용,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하피첩, 정약용, 조선, 보물 제1683-2호,

OLYMPUS DIGITAL CAMERA하피첩, 정약용, 조선, 보물 제1683-2호,

OLYMPUS DIGITAL CAMERA하피첩, 정약용, 조선, 보물 제1683-2호,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중이던 1810년에 부인 홍혜완이 보내온 붉은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전할 글귀를 적어 서첩으로 만든 것으로, 본래 4첩이었으나 지금은 3첩만 전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흠흠신서, 정약용, 조선 19ㅔ기

OLYMPUS DIGITAL CAMERA자승차도해, 하백원, 1810년

OLYMPUS DIGITAL CAMERA운해(초고본), 개합사장(초고본), 신경준, 1750년 이전

OLYMPUS DIGITAL CAMERA이재난고, 황윤석,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환영지, 위백규, 1822년

다산 정약용과 호남의 실학자들
16세기 두번의 큰 전쟁이 끝나고 나자 대의명분과 절의는 유학자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돌볼 수 있는 실용적인 사상, 실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라도에서 활약한 실학자로는 강진에 오랫동안 유배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 이전에 반계 유형원(1622~1836)과 호남 4대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 존재 위백규(1729~1798), 이재 황윤석(1729~1791), 규남 하백원(1781~1844) 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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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초상

OLYMPUS DIGITAL CAMERA동경대전, 최제우, 1883년, 동학의 교주인 최제우가 저술하기 시작하여 2대 최시형이 1880년에 완성.간행한 한문경전이다. 동학은 이밖에도 한글경전인 용담유사를 기본 경전으로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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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 최제우, 1883년

OLYMPUS DIGITAL CAMERA보천교 교포, 1950년, 대순전경, 1929년, 이사전선, 1885년

OLYMPUS DIGITAL CAMERA대도지남

OLYMPUS DIGITAL CAMERA불교정전 권 1~3,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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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순 초상

신종교의 창시자들
동학농민운동은 본래 1894년 새로운 종교의 교조였던 최제우(1824~1864)의 신원운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종교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이어 혁명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동학이 그러하였듯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 많았던 전라도에서는 그만큼 새로운 종교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동학에서 파생한 손병희의 천도교, 강일순의 증산교, 그리고 지금도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박중빈의 원불교 등이 대표적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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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초상

OLYMPUS DIGITAL CAMERA면암집, 최익현, 1908년, 면암 최익현의 시문집으로 최익현이 일본 쓰시마 섬에서 순국한 뒤에 간행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돈헌유고, 임병찬, 1957년

최익현과 임병찬(1851~1916)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체결과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태인에서 1천여 명 규모의 의병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대마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순절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그들의 깃발 아래로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든 1천여 명의 전라도 사람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결국 이땅을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결집된 전라도 사람들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의병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특히 최익현 등이 전라도 유생들을 이끌고 항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의병들은 이제 독립군이 되어 싸웠습니다. 농민혁명군에서 의병으로, 다시 독립군으로 변하는 동안, 그들이 지켜낸 것은 결국 그들의 삶의 터전인 이 땅 전라도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심춘순례, 최남선, 유서석록, 고경명(1533~1592)

OLYMPUS DIGITAL CAMERA금산사도

OLYMPUS DIGITAL CAMERA매월당시사유록, 조선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사람들
전라도 천년의 역사동안 이 땅을 지켜왔던 사람들은 지난 세기 동안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로서, 혹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민주주의를 위한 열사로서 살아왔습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거친 전장으로 나아간 이들이지만, ‘기쁘게 늙은 매화.서끈 대나무.아름다운 난초가 있고, 귤과 유자가 익는 가을, 비자나무와 동백이 푸른 겨울’이 장관인 전라도에서 살아온 그들은 이땅을 닮아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부처의 가르침을 새롭게

지리산 일대와 전남 남해안 등 호남지방에는 유서깊은 사찰이 많이 남아 있다. 지방호족세력을 바탕을 불교개혁을 이끌었던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사찰 중 남원 실상사(실상산문), 곡성 태안사(동리산문), 장흥 보림사(가지산문)이 호남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중기 무인집권기에 기존 불교에 대한 비판과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국사 지눌이 순천 송광사에서 수선결사 운동을 이끌었으며, 원묘국사 요세가 강진 백련사에서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었다. 수선결사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조계종이 주류세력을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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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의 초상, 1780년, 비단에 채색, 순천 송광사

부처의 가르침을 새롭게
통일신라에 이어 고려에서도 불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이자 지배층의 신앙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고려의 지배층이 귀족에서 무인으로 바뀌면서 불교의 위상도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의 전통이 살아있는 전라도 땅에서 지눌과 요세는 기존 불교에 대한 비판과 개혁을 위한 불교결사운동을 일으켜 부처의 가르침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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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신발, 고려, 종려나무 껍질, 순천 송광사

OLYMPUS DIGITAL CAMERA권수정혜결사문, 보조국사 지눌, 1608년, 순천 송광사

OLYMPUS DIGITAL CAMERA계초심학인문, 1608년, 순천 송광사.

OLYMPUS DIGITAL CAMERA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488년, 불교천태중앙박물관, 보물 1222-2호,

보조국사 지눌이 당나라 종밀 『법집별행록』을 요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제자인 혜심이 간행한 초판본은 전하지 않고, 성종 17년(1486) 광주 무등산 규봉암에서 간행한 이 판본이 가장 이른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수선사형지기, 1221~1226년, 순천 송광사, 보물 572호, 13세기 전반 수선사의 실태를 조사 기록한 것이다. 수선사의 가람 배치 등 사찰의 규모를 자세히 적고, 보조국사 지눌의 비명과 수선사중창기를 함께 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보조국사 지눌과 수선사
본래 개경에서 수행하던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1190년 팔공산에서 법회를 열고,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정혜결사문』에 담아 널리 퍼뜨렸습니다. 이에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자 순천 송광산 길상사(지금의 송광사)로 옮겨와 수선사를 열었는데, 이때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 각지의 사람들이 시주하여 도움을 준 것이 수선사중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눌의 새로운 생각은 그의 제작인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더욱 발전시켜, 이후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인 무인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동문선(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 조선후기,

OLYMPUS DIGITAL CAMERA만덕사지, 조선후기 19세기, 19세기 강진으로 유배온 정약용이 『동문선』에 실린 고려시대 백련사 결사운동에 관한 고려 국사들의 기록을 인용하여 편찬한 대둔사(만덕사)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원묘국사 요세와 백련사
원묘국사 요세(1163~1245)는 본래 지눌의 수선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지눌의 수행 방식에 동의하지 못하여 스스로 강진 만덕산에서 백련사 결사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지눌은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지향하며 정혜쌍수의 실천적 수행을 강조하였는데, 요세는 법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참회를 중시하였습니다. 요세는 대중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였고, 백련사도 전라도 지방 향리층의 지지를 받아 성장하였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진각국사비편, 고려,

OLYMPUS DIGITAL CAMERA진각국사비편, 고려,

1250년 강진 월남사에 세워졌던 지눌의 제자 진각국사 혜심의 비편이다. 1235년 이규보가 지은 비문 내용은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동국이상국집(진각국사혜심비명), 이규보, 조선

조선 전기 전라도의 불교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억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조선전기의 불교는 여전히 왕실과 민중의 정서적 의지처로 종교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라도 송광사에서는 대규모 불서 간행 사업이 이어져 불교 사상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맥도 끊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안목, 1529년, 순천 송광사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안목 목판, 1529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1호

송광사에서는 1529~1531년 사이에 4종류의 목판을 제작하여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판본은 그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다. 『인천안목』은 중국 송나라의 선종 승려 지소가 저술한 것으로, ‘인간과 천상의 일체가 중생의 안목이 된다’는 의미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종경촬요, 1529년, 순천 송광사

OLYMPUS DIGITAL CAMERA종경촬요 목판, 1529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2호

『종경촬요』는 대승불교의 여러 경론과 중국, 인도 성현과 선사의 저서 등을 모은 책인 『종경록』의 요약본이다. 13세기 이전에 이미 고려에 들어와 있었으나 당시의 판본은 남아있지 않고, 송광사 은적암에서 다시 찍은 이 판본이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계초심학인문(언해), 조선, 순천 송광사

OLYMPUS DIGITAL CAMERA계초심학인문(언해) 목판, 1577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0호

보조국사 지눌이 불교수행의 초보자들이 경계해야 하는 내용을 담아 서술한 책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언해본(한글본) 등 다양한 판본이 유행하였다. 송광사에서 간행한 언해본은 전라도 지방 언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 전기 국어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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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명양수륙잡문, 조선, 순천 송광사

OLYMPUS DIGITAL CAMERA천지명양수륙잡문 목판, 1531년, 순천 송광사, 보물 1914호

『천지명양수륙잡문』은 여러 불교의식과 관련된 내용을 수록한 책이다. 목판은 1531년 5월 송광사에서 간행한 것이지만 이 책은 조선후기에 다시 찍은 것이다. 이 목판을 제작한 이들은 『종경촬요』와 『천지명양수륙잡문』의 제작에도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전라도에서 새 세상을 꿈꾼 사람들
천년 전라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라도에는 왕조의 수도가 자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이 땅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보조국사 지눌과 원묘국사 요세가 타락한 정치계와 결탁한 기존 불교의 개혁을 외치며 순천과 강진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예기』에 등장하는 ‘대동’사상에 주목하여 새로운 신분 질서의 정립을 꿈꾸는 전주의 유학자도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정읍의 녹두장군은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전라도’ 이전의 전라도를 일군 사람들

후백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기 전까지 호남지방을 수도로 삼은 국가는 없었지만, 삼한 중 마한이 이 지방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위만에 쫓겨난 고조선 준왕의 세력이 내려왔으며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익산에 별궁을 세우는 등 호남지방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 후삼국시대 견훤이 호남지방에 자리를 잡고 삼국이 세력을 다투면서 지역이 결집하고 정체성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사리외호,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전라도’ 이전의 전라도를 일군 사람들
전라도에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동기.초기철기 시대에 들어서면 삼한 중 마한의 세력이 이 지역까지 미쳤고, 같은 시기 고조선의 준왕이 내려와 새로운 문명을 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백제의 무왕이 전라도 경영에 관심을 가지면서 또 한번 새로운 문명이 유입되어 이 지역 문화는 더욱 다채로워졌습니다. 오랜 세월 왕조의 수도가 번창한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10세기 초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이 지역에도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문화적 공동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인골, 기원전 1세기경, 광주 신창동

가장 오래된 전라도 사람
천년전, 이 땅이 ‘전라도’라 불리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전라도’를 일구어 왔습니다. 전라도 각지의 발굴 현장에서 종종 발견되는 인골들이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여수 안도패총에서 출토된 부부의 인골, 기원전 1세기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출토된 여성의 인골 등은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전라도 사람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식 동검,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OLYMPUS DIGITAL CAMERA전한경,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익산 평장리의 널무덤에서 한국식동검 2점과 청동꺾창 1점 청동투겁창 1점과 함께 발견되었다. 거울은 초엽문과 반리문이 중심이 된 ‘운문지사엽사리문경’으로 전국말에서 한나라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꺾창,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식 투겁창,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익산 평장리

OLYMPUS DIGITAL CAMERA중국식 동검,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완주 상림리

OLYMPUS DIGITAL CAMERA옹관, 3세기 후반 ~ 6세기 전반, 전남 영암

OLYMPUS DIGITAL CAMERA금제사리봉영기,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 가운데, 기해년(639)에 백제 왕실의 후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내용이 기록된 금제사리봉영기이다. 백제 무왕의 세력이 전북 익산까지 남하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금제판,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OLYMPUS DIGITAL CAMERA금제구슬, 유리구슬, 금제 꽃모양구슬,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서탑

OLYMPUS DIGITAL CAMERA청동합,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OLYMPUS DIGITAL CAMERA은제관꾸미개,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OLYMPUS DIGITAL CAMERA금제사리내호, 백제 익산미륵사지 서탑, 보물 1991호

OLYMPUS DIGITAL CAMERA금제사리함, 백제, 익산 왕궁리 석탑, 국보 123호

백제 무왕(재위 600~ 640)의 궁궐터로 알려진 왕궁리 유적의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함이다. 이외에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긴 은제도금금강경판이 함께 발견되었다. (안내문,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소조상편, 백제, 익산 왕궁리

OLYMPUS DIGITAL CAMERA흙으로 만든 손, 흙으로 만든 악귀 머리, 백제, 익산 제석사지,

OLYMPUS DIGITAL CAMERA흙으로 만든 천부상 머리, 백제, 익산 제석사지, 백제 무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 제석사 터에서 발견된 소조천부상의 머리 부분이다. 절반정도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마한의 진왕, 고조선의 준왕 그리고 백제의 무왕
넓은 물길이 바다로 이어지고, 낮은 언덕과 평야가 펼쳐져 농사 짓기에 적합한 전라도에는, 다양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북쪽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던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도 전라도 땅이었습니다. 또한 영산강 주변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는 진왕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이 세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옹관고분이라는 독특한 매장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제의 초기 정치 권력은 한강 유역과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 영역까지의 확장을 노렸던 무왕은 전라도로 눈을 돌려 익산에 별도를 경영하였습니다. (앤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봉림사지 출토 기와와 청자편, 9세기말 ~ 10세기초

봉림사지에서는 전주 동고산성 등 후백제 유적지로 알려진 곳과 유사한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10세기 초 선해무리굽청자완과 중국식해무리굽완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진안 도통리 출토 청자편, 9세기말 ~ 10세기초,

진안 도통리 가마는 봉림사지에서 출토된 자기면과 유사한 자기의 생산이 확인되어 후백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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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해룡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미륵사지 「금마저」명 기와, 9세기말 ~ 10세기 초, 후백제는 ‘금마저’와 같은 백제의 옛 지명을 사용하여 백제 계층의식을 나타내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전주 동고산성 「전주성」명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900년 견훤이 후백제의 새로운 도읍으로 삼은 전주 동고산성에서 발견된 기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전주 동고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나주 자미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나주 자미산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광주 무진고성 기와, 9세기말 ~ 10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부처, 9세기말 ~ 10세기 초, 익산 왕궁리 석탑, 국보 123호

OLYMPUS DIGITAL CAMERA봉림사지 삼존불 중 협시보살상, 10세기, 석재.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의 좌.우협시보살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불입상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거나, 6세기 후반 보살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x자 천의를 걸치는 등 복고적 요소가 눈에 띄어 ‘의자왕의 숙분을 풀겠다’고 천명한 후백제 정권의 제작이라 판단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후백제의 견훤
7세기 중반 이후 전라도는 통일신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통일신라의 세력이 완전히 기운 9세기 말, 반란 세력을 일으킨 견훤은 광주에서 스스로 후백제의 왕을 칭하고 이어 효공왕 4년(900)에는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이처럼 견훤은 매우 짧은 기간에 백제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이는 오랜 세월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전라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을 것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땅, 전라도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2018년 가을 전라도 정도 1000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고대 이래로 전라도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와 역사시대 전라도를 이끌었단 인물들을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엄선하여 전시를 구성하였다. 첫번째는 역사속에 ‘전라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보여주는 조선시대 고지도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려사 권57, 조선 17세기 전반(광해연간, 1608~1623), 계명대학교 도서관

조선 세종대에 완성된 기전체의 역사서, 세가 46권, 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의 총 139권으로 구성되며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도 함께 편찬되었다. 전시된 책은 광해 연간에 간행된 목판본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땅, 전라도
『고려사』에 의하면, 1018년에 본래 백제의 영역이었던 강남도와 해양도 일대가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전주를 도청소재지로 한 전라북도와 광주광역시.나주 일대의 전라남도를 합쳐 부르는 ‘전라도’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의 기록입니다. ‘전주’와 ‘나주’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군과 현을 묶어 ‘전라’도라 부르는 행정적 명칭은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 생겨났지만, 이 지역은 이미 온갖 물산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온화하며 아름다운, 글자 그대로 ‘온전하고’, ‘비단결 같은’ 땅이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호남지도, 조선 18세기 중엽,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보물 1588호

영조 연간의 1739년부터 1759년까지 잠시 사용된 남원의 명칭인 ‘일신’이 보여 제작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비변사에서 제작한 지도로, 총 7책 중 마지막 전라전도 부분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해동지도, 조선 19세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상기(1678~1752)가 제작한 <동국지도>를 해동 정씨 가문에서 1803년 이후 팔사한 것 중 전라도 부분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전라남북도여지도, 조선 18세기 후반, 영남대학교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전라남북도여지도 중 진산현. 진산현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에 있던 옛 지명으로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진산현이었다.

“전라천년”, 전라도 천년을 지켜온 사람들
국립광주박물관은 전라도 정도 1000년을 기념하여 특별전 <전라천년-전라도 천년을 지켜온 사람들>을 개최합니다.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사용된 행정구역 명칭으로 『고려사』 속 현종 9년(1018)의 기록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라도에는 ‘전라도’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을 일구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개방적이며 진보적이어서 다른 문명을 흡수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우리 역사를 뒤흔든 여러 개혁 사상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위기 때마다 충의의 저력을 발휘하여 이 땅을 넘어 한반도를 수호하였습니다. 이제,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라도에서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광주박물관] 회화와 서예

광주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조선후기 전남지방을 대표하는 문인화가들의 그림과 서예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와 진도출신 문인화가 허련, 화순 출신 송수면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작품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예작품으로는 선조대왕의 글씨와 조선후기 문인 임장원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먹으로 그리다
현대의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의 기기를 손에서 놓지 않듯이, 옛 문인들은 붓과 먹, 벼루와 종이의 문방사우를 늘 주위에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우리 전통예술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물을 더해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그린 수묵화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고요하고 단정한 그림입니다. 남도의 전통회화를 대표하는 해남 윤씨 가문의 윤덕희(1685~1766), 조선후기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문인화의 맥을 이어간 소치 허련(1808~1893) 등도 먹으로 마음을 그린 그림, 수묵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의 수묵화는 현대미술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르로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색과 현란한 기교 없이도 우리의 내면을 보여주는 ‘수묵’의 현대적 의미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지금, 남도의 전통회화 속에서 수묵화의 정수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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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림, 윤덕희, 조선 1742년, 종이에 먹

윤덕희는 해남윤씨 가문 어초은공파의 8대손으로, 국보 240호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장남이다. 갑술환국으로 정치계의 판도가 바뀌자 윤덕희는 일찍부터 벼슬을 포기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그림을 그렸다. 그 화업은 아들인 윤용에게까지 이어져 3대에 걸쳐 문인화로 일가를 이루었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용트림하는 소나무와 언덕을 배경으로 한 필의 살찐 말이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다. 소나무는 문인의 절개와 장수를 상징하며, 준마는 재사의 인품과 등용을 뜻한다. 윤덕희는 다양한 주제에 능하였지만 특히 이러한 말 그림을 자주 그렸다. 18세기의 한 기록에 의하면, 윤두서는 마르고 날쌔 보이는 말을 그리고 그의 아들은 살찌고 둔해 보이는 말을 그렸는데, 중국인들은 살이 올라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아들의 말그림을 선호하여 비단을 주고 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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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산의 아홉굽이 경치, 허련, 조선 1878년

허련은 19세기 호남이 배출한 주요 화가 중의 한명이다. 진도에서 태어난 그는 늦은 나이에 추사 김정희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헌종을 모시고 그림을 그려 보이는 영예를 누렸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당하였을 때에는 그를 따라 제주도에 머무르며 그림과 글씨를 익히기도 하였다. 추사의 사후에는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경영하였다. 이 병풍은 무이구곡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무이구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노닐던 중국 무이산 구곡계를 가리킨다. 주자는 그 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무이구곡시를 남겼다. 성리학을 숭상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현인이 거주할 만한 이상향으로 무이구곡을 꼽았고, 그림으로나마 그려 갈 수 없는 그 곳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였다. 각 폭 상단에는 주자의 무이구곡시가 적혀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여덟 군자의 모습, 허련 (1808 ~ 1893),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조선후기 문인화가 소치 허련이 그린 팔군자를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팔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의 상징성을 의인화하여 그린 사군자를 변형, 확대시킨 것으로 연꽃, 소나무, 모란, 파초, 비자 등을 더한다. 이른 봄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는 난초, 늦은 가을 추위를 견디는 국화, 그리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하는 대나무는 절개와 덕, 학식을 갖춘 군자의 정신세계를 함축하여 상징하지만, 여기에 다시 더해진 네 가지 식물은 길상적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 특히 모란에는 부귀와 행운, 소나무에는 장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허련이 그린 팔군자에는 오동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말기에 이르면 길상적 의미가 담긴 팔군자를 일반 서민들까지 애호하게 되어 그 그림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대나무, 송수면(1847~1916), 19세기말 ~ 20세기초, 종이에 먹

사호 송수면은 조선말기 문인화가이다.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서 나고 자란 송수면은 사평리 앞에 흐르는 천에서 그의 호 ‘사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을 사평에 머물렀지만 집안 일가들이 벼슬을 하며 거주하던 한양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현재도 서울에 전하며, 생존 당시 이미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될 만큼 이름이 있었다. 송수면의 그림 중 묵매와 함께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묵죽이다. 오세황의 『근역서화징』에도 대 그림을 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수면은 조선중기의 대나무 그림을 충실히 따라 그리면서 연습하였다. 그의 대나무 그림이 예스러운 방식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까닭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다양한 형체의 대나무를 그린 6폭 병풍이다. 각 폭에 두 그루의 대나무를 앞뒤로 배치하였으며, 먹의 농담을 달리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곧게 뻗거나 바람에 흔들려 휘어진 모습, 또는 굵고 가는 줄기를 대비시키는 등 대나무의 형태에 변화를 주어 그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먹으로 쓰다.
먹으로 쓴 글씨를 소재로 하는 ‘서예’는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한 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뿐입니다. 한자는 의미에 따라 수없이 많은 형태의 글자가 존재하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양의 ‘미술’ 속에는 ‘글씨’를 예술로 하는 장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미술공모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본래 동양화, 서양화에 이어 제3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서예’는 오랜 논쟁 끝에 동양화 부문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한 글씨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 특히 한자를 사용해 온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때 부정되었던 서예가 추상미술의 한 부분으로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본래 먹으로 쓴 글씨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선조대왕의 글씨, 조선 1632년

여덟 폭 폭으로 이루어진 이 병풍은 선조의 글씨를 새겨 찍어낸 판본을 보고 다시 찍은 것이다. 각 폭은 선조가 당시 가운데 좋아하던 시구를 적어 놓은 것으로, 위응물, 맹호연, 장적, 한악 등이 지은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초서의 각 글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서 쓰는 연면초로 쓰여져 있다. 마지막 폭에는 의장군의 집에 보관되었던 어필의 판본을 다시 찍어내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스스로를 훈계하고 맹세하는 글, 임장원(1734~1804), 조선 1800년, 종이에 먹

1800년에 임장원이 지은 잠을 행초로 쓴 여덟 폭 병풍이다. 잠이란 한문 문체의 하나로, 경계하는 뜻을 서술한 글이다. 이는 임장원이 자신을 반성하고 후손에게 교훈을 전하기 위하여 쓴 글을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규암 임장원은 전라남도 보성 옥평 출신으로 40세에 이르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지방에서 급제하는 선비들이 드물었던 사실과 이후 그가 몸담았던 중요 직책을 감안하면 그의 학식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20년 가까이 직접 임금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간관으로 활동하면서 정조를 보필하였다. 이 병풍을 포함하여 그의 기개와 철학이 담긴 <규암집>, <규암만경>, <삼도선생행장> 등은 장흥 임씨 문중에 의해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