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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박물관] 도자공예

전남지방에는 한국 도자기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적들이 여러곳 있다. 남해안에 위치한 강진군에는 용운리 가마 등 고려시대 청자를 생산하였으며, 고려말 왜구가 남해안을 휩쓸자 도자기에 생산지가 내륙으로 이동하였으며 광주 충효동은 고려말, 조선초기 분청사기의 중요한 생산지가 되었다. 당시 생산된 도자기들은 조운선을 통해 중앙으로 공급되었는데 해안지역에 침몰한 선박에서 당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광주박물관에서는 가마터와 침몰선 등에서 출토된 청자와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박물관에서 입수한 다량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화넝쿨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고려시대 청자
고려(918~1392)의 청자는 고려인의 사상과 빼어나 안목이 반영되어 창조적이면서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유려한 곡선의 조화가 이루어낸 세련된 매무새, 검고 희게 수놓은 상감무늬, 비 갠 후의 맑은 하늘빛을 담아낸 비취색 유약 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고려 인종 1년(1123)에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도기의 색은 푸른데 고려인은 비색이라 부른다”라고 청자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송의 태평노인은 『수중금』에서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의 품목에 넣었다. 고려청자는 용과 기린같은 상상의 동물 형상에서부터 표주박과 참외 등 자연에서 따온 소재를 고려 특유의 단아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장식된 연꽃 넝쿨무늬 등은 불교를 숭상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또한 연못가 동자무늬, 물가풍경무늬, 구름 속 학 등은 고려인의 서정적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고려는 물론 중국에까지 우아한 멋을 떨치던 고려청자는 강진을 중심으로 생산되었고, 지금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어 전남지역은 고려청자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앵무새 무늬접시, 청자 모란 줄기 무늬 병,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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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꽃무늬 잔, 강진국 대구면 용운리 출토, 「尙」이 새겨진 청자 합,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향로, 청자 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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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포도무늬 병,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출토

강진 청자가마
고려의 청자가마가 가장 많이 발견된 강진의 청자 가마터는 사적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굴 조사된 대표적 가마인 용운리 가마는 10세기 후반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음.양각청자를 비롯한 상감청자 등 고려 최고의 청자를 만들었다. 삼흥리 가마에서는 청자와 함께 도기도 생산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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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버드나무무늬 정병,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잔과 받침,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모란무늬 주자,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버드나무 학 동자무늬 매병,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포도동자무늬 주전자와 받침,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넝쿨무늬 유병, 고려 12세기, 청자 국화넝쿨무늬 유병,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뚜껑있는 그릇,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동물모양 인장,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넝쿨무늬 그릇,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연꽃무늬 대접,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꽃모양 접시,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물가풍경과 연꽃무늬 대접,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파도무늬접시,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물가풍경과 물고기무늬 접시,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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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꽃잎무늬 병, 고려 11세기, 완도 어두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연꽃넝쿨무늬 장구, 고려 10세기, 완도 어두리 해저

바다에서 건진 청자
고려시대에는 내륙엣 거두어들인 세금을 해안 부근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다시 배를 싣고 연안 항로를 따라 수도인 개경까지 운반하였다. 이러한 배를 조운선이라 부르는데, 당시 조운선들은 풍랑에 휩쓸리거나 해적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최근 완도 어두리와 무안 도리포, 군산의 비안도, 태안 대섬 등의 앞바다에서 수많은 고려청자를 실은 채로 침몰한 조운선이 발견되었다. 완도 어두리에서 발견된 침몰선 안에서는 도자기 3만여 점을 비롯하여 선상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재질의 제품이 발굴되었다. 도자기는 녹청색 혹은 녹갈색을 띠는 조질청자로 대접, 접시가 대부분이고 이 가운데 철화안료를 사용한 병과 장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부안 도리포에서는 대접과 접시가 주로 발견되었는데, 간지가 있는 다른 청자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고려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연꽃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조선시대 분청사기
‘분청사기’란 옛 기록에는 없는 용어이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미술사학자인 고유섭(1905~1944)선생이 회청색 바탕흙에 흰흙을 바르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어 구워낸 조선 초기의 도자기를 ‘분장회청사기’라 짓고 이를 줄인 말이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분청사기는 고려말 상감청자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으나 세종 연간(1418~1450)을 전후하여 그 질이나 형태,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 등이 크게 발전하여 절정을 이룬다. 특히 그릇에 흰 눈꽃이 핀 듯한 문양를 찍어 넣은 인화기법에서 세련된 멋과 셈세한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분청사기도 제작되었다. 특히 광주 충효동 가마터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넓고 시원한 붓질과 장인의 손맛대로 선을 새기거나 면을 깎아 만든 해학적인 표현으로 조선인의 감성을 느끼게 한다. 분청사기는 1466년과 1469년 사이 왕실과 중앙관청에 백자를 공급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부터 주요 소비층이 점차 지방 관아 및 민간으로 바뀌면서 질도 떨어지게 된다. 결국 백자의 수요 증가로 인하여 15세기 말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16세기 후반에는 소멸하게 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내섬’이 새겨진 대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잔,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뚜껑있는 그릇,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연적,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세잎무늬 병, 분청사기 풀무늬 병, 조선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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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덤벙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덤벙무늬는 분장문이라고도 하는데, 초벌한 사기를 백토물에 담글 때 나는 ‘덤벙’소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백토물의 흔적이 색다른 장식효과를 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모란무늬 자라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제기, 분청사기 꽃무늬 장군,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광」이 새겨진 분청사기, 「광별」이 새겨진 분청사기, 「광정사」가 새겨진 분청사기,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광주 충효동가마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효동 가마는 경사를 이용한 오름가마로 사적 제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자가 제작되었다. 인화분청사기는 주로 중앙 관청에 공납하는 것들이다. 충효동 가마에서는 그릇 뿐만 아니라 벼루.제기.묘지 등도 생산하였다. 한편 모란.불고기.게 등을 활달한 필치에 해학적으로 표현한 분청사기 박지무늬는 충효동 가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조선시대 백자
백자는 분청사기와 더불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제작되었다. 아무런 문양장식 없이 절제미가 돋보이는 순백색 백자는 유교 이념 구현을 이상향으로 하는 신 왕조와 사대부층의 사상을 담아내기에 가장 알맞은 그릇이었다. 이러한 백자는 전국에서 제작되었는데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백자는 왕실과 중앙 관청에 납품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무늬에 자토를 넣어 검게 장식한 상감백자가 일시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순백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푸른색 문양이 화려한 청화백자는 초기에는 중국적인 화풍으로 표현되었으나, 곧 한국의 정취와 격조를 보여주는 회화적인 문양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백자의 색과 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대부분 회백색을 띠었다. 그림이 그려진 백자에는 값비싼 청화안료를 대신하여 값이 싸고 구하기 쉬운 철화안료가 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전반부터는 백자의 색이 순백색으로 다시 밝아지며,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청화백자의 제작도 새롭게 증가한다. 조선 후기에는 청화, 동화, 철화, 음각, 양각, 투각 등 여러가지 장식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하였으며, 제기와 문방구류 등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항아리, 조선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연꽃넝쿨무늬 그릇,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병, 조선 15~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발,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뚜껑있는 항아리,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천’이 새겨진 접시,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뚜껑있는 그릇, 조선 15세기, 경기도 광주 관요

OLYMPUS DIGITAL CAMERA태항아리와 태지, 조선 1624~1625년, 광주 중흥동 발굴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묘지명 접시, 조선 1708년경,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명기, 조선 1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풀무늬병, 백자 풀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연꽃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꽃나비무늬 병,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산수무늬 삼층합,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구름 학무늬 접시,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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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풍경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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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무늬 사발,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대나무모양 병,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매화무늬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사자모양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넝쿨무늬 연적, 산수무늬 연적, 부채모양 산수무늬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복숭아모양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용무늬 필통, 백자 매화무늬 필통, 조선 19세기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광주박물관] 전남지역 불교문화

전남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불교 역사에 큰 흔적들을 남겨 놓고 있다. 통일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화엄종을 대표하는 구례 화엄사를 비롯하여 수행을 중시하는선종 구산선문 중 사찰들이 지리산과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를 비롯하여 화순 쌍봉사, 구례 연곡사 등이 전남 지역에 자리잡았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개혁 수선결사를 이끌었던 송광사,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백련사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큰 역할을 했던 해남 대흥사, 여수 흥국사 등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주 신룡동 오층석탑 사리갖춤, 고려, 광주 신룡동 오층석탑

광주 신룡동 옛 절터에는 고려 전기로 추정되는 오층석탑과 돌부처가 남아 있다. 1981년 오층석탑의 기단부 헤체.보수 중 1층 몸돌 위쪽의 사리 봉안장소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직사각형의 금동사리함 속에 연꽃장식을 넣고, 그 위에 금동사리병을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나무탑은 통일신라시대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전통에 따라 상징적으로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함꼐 출토된 대나무편은 다른 출토 예가 없어 아직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사리엄장구
사리는 범어의 ‘Sarira’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으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말한다. 사리를 부처의 상징으로 여겨 여러 가지 장엄으로 꾸미고 탑속에 봉안한 것을 사리장엄구라 한다. 사라장엄구의 가장 안쪽에는 사리를 담는 사리병이 놓이는데, 사리병은 다시 귀금속으로 만든 여러 겹의 상자 속에 봉안된다. 사리장엄구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과 사자를 비롯하여 극락정토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 보살과 스님 등이 표현되어 장엄의 극치를 이룬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려한 가마에 보장이나 영장이라고 부르는 장막을 씌운 사리장엄구가 유행하였다. 사리신앙이 유행하면서 부처의 말씀을 적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같은 법사리와 탑을 만들어 공덕을 쌓는 신앙의 유행으로 소형 탑을 사리와 함께 봉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승의 사리는 승사리라고 부른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화려한 사리장엄보다는 부처의 상징성을 강조하여 집모양 사리장엄구에 아미타삼존불상이 안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함께 봉안된 불상의 몸 속에 경전이나 발원과 관련된 기록물을 넣는 복장도 유행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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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사’ 종, 여수시 쌍봉동, 고려 10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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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종, 강진군 사당리,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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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병,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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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병, 곡성군 설옥리,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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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령, 고려,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금강저, 광주 산정동 출토, 고려,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향로, 고려,

불교의식구
범종은 사찰에서 시간으 ㄹ알리거나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종이다. 범은 우주만물과 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범종의 소리른 불교의 진리를 의미한다. 금강령과 금강저는 밀교의식에서 사용되는 의식구이다. 금강령은 의식 때 여러 불.보살들을 기쁘게 해주고, 중생들을 성불의 길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금강령은 손잡이 윗부분이 금강저 모양이며, 몸체는 종의 형태로 불법을 수호하는 범천.제석천, 사천왕, 불부종과 같은 호법신장상 등이 표현된다. 금강저는 원래 제석천이 아수라를 물리치는 무기이다. 불교에서는 금강과 같은 지혜로 번뇌를 없애기 위해 수행자가 금강저를 휴대한다. 발우는 승려의 그릇을 말한다. 스님들은 공양을 하기 전에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꺠달음을 얻고자 합니다.”라는 오관계를 외운다. 공양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하고 음식을 먹으며,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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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탑, 장흥군 연지리,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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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여래, 고려 12~13세기

이 불상은 서방의 극락정토에 계시는 아미타여래의 모습을 금동으로 만든 것이다.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붙인 채 오른손은 가슴 앞에, 왼손은 가슴 아래 둔 손갖춤을 하여싿. 이는 모든 중생을 사후에 극락세계로 맞아들이는 아미타여래의 손갖춤 중 하품중생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죽음 뒤의 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는 수많은 부처 가운데에서도 특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처럼 값비싼 재료인 동을 충분히 사용해야 하는 커다란 크기의 불상도 제작 가능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무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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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고려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맺은 여래의 모습을 철로 만든 것이다. 항마촉지인이란 무릎 위의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갖춤으로, 석가모니가 오랜 수행 끝에 꺠달음을 얻으려 하였을 때 이를 방해하려는 악마들을 물리치고, 깨달음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땅을 눌러 지신을 불러낸 순간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는 금동불상을 많이 만들었으나,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 동의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이와같은 철불의 제작이 늘어났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고려시대 불교문화
통일신라 말 전남지역에는 훌륭한 고승이 많았다. 태안사 적인대사 혜철(785~861), 쌍봉사 철감선사 도윤(798~868), 보림사 보조선사 체징(804~880), 도갑사 선각국사 도선(827~898), 무위사 선각대사 형미(864~917), 태안사 광자대사 윤다 (864~945), 옥룡사 동진대사 경보(869~948)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우리 고장의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건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외에도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 개성에서 활동한 전남 출신의 승려들이 많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이로 화엄사를 근거지로 활동한 대각국가 의천(1055~1101)과 그의 제자 정인왕사를 들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불교계의 모순과 타락을 비판한 결사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전남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지금의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선결사, 그리고 강진 백련사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 등, 당시 가장 큰 규모의 결사가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송광사와 백련사의 결사 운동은 지방의 향리층과 백성들의 지원을 받았고, 이후 두 사찰은 불교 개혁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며 여러 대에 걸쳐 국사를 배출하여 고려의 불교문화를 선도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발원문, 복제품, 순천 대곡동 석탑, 조선 1468년

OLYMPUS DIGITAL CAMERA보림사 삼층석탑의 내력을 새긴 돌(북탑),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870년*1478년 중수)

OLYMPUS DIGITAL CAMERA보림사 삼층석탑의 내력을 새긴 돌(남탑),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870년(1684년 중수)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있는 그릇, 보림사 삼층석탑 사리구,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후반

OLYMPUS DIGITAL CAMERA사리단지, 보림사 삼층석탑 사리구,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후반, 납석

OLYMPUS DIGITAL CAMERA명문이 새겨진 기와, 화순 쌍봉사 출토, 조선 17361795년 입수

OLYMPUS DIGITAL CAMERA수막새, 화순 쌍봉사 출토, 조선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명문이 새겨진 기와, 화순 쌍봉사 출토, 조선 1727년

OLYMPUS DIGITAL CAMERA수막새, 영암 천황사 출토,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수막새, 영암 천황사 출토,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여래좌상, 석조보살좌상, 석조나한좌상, 담양 서봉사터,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나한상

OLYMPUS DIGITAL CAMERA나한상

나한은 산스크리트어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존재를 뜻하는 ‘Arhat’을 한자로 옮긴 ‘아라한’의 줄임말로, ‘웅진’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십육나한, 오백나한 등으로 표현한 나한상은 나한전이나 응진전에 모신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나한 신앙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편안암을 비는 나한재가 자주 열렸다. 조선시대에는 나한의 신통력에 기대어 죽은 자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빌기도 하였다. 전시된 상은 조선시대 교종의 수사찰인 담양 서봉사 터에서 나온 것이다. 여래와 보살의 상을 포함한 나한상들은 모두 흰색을 띠는 무른 돌에 새겼다. 나한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거나 눈을 반쯤 감아 명상에 잠겨 있는 승려의 모습이다. 옷은 대부분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는데 일부 붉은 선이 남아 있어 채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조선시대 불교문화
조선은 성리학에 바탕을 든 유교국가로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칙되었다. 태종 1407년 불교 정비작업으로 광주 전남의 사찰 중에 7개 종파, 17개 사찰이 왕실의 명복과 고을의 안녕을 비는 자복사로 지정되었다. 세종 1424년 불교의 통합에 따라 전라도의 선종은 구례 화엄사를 수사찰로 하고, 교종은 창평의 서봉사를 수사찰로 지정하였다. 세조는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로 하여금 도갑사를 중창케 하고 약사여래상을 안치하였다. 1457년에는 화순 쌍봉사를 원당으로 삼고 5결의 토지를 지금하고 조세를 면제하기도 하였다. 1550년에는 인종의 비인 공의왕대비가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자실로 하여금 『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을 그리게 하여 도갑사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에는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의 흥국사를 비롯하여 내륙 경략의 거점인 순천의 송광사와 구례 화엄사 등을 중심으로 의승병이 일어나 왜군을 물리친다. 특히 흥국사의 의승 수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설군으로 편제되어 훗날 병자호란 등에 나아가 활약하였다. 선산대사 휴정(1520~1604)의 의발을 보관한 대흥사는 13명의 대종사를 배출하며 불교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광주박물관] 광주 신창동유적, 농경의례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동시대 한반도 다른 지역 유적과 마찬가지로 의례를 행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점을 치던 행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점뼈를 비롯하여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토제품 등을 비롯하여 한반도에서는 그 연대가 가장 오래된 악기들이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당시에 사용된 악기로는 나무로 만든 현악기와 토기로 만든 북 등이 있는 고대 역사서에 기록된 악기들을 실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점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고대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점을 치는 방법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동물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농사의 풍요, 집단의 단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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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기검집, 초기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집은 검을 넣어 보관하는 것으로 석검을 비롯한 모든 검의 부속구로 딸려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나무껍질 등을 이용하다가 차츰 가죽이나 나무, 칠제품 등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북,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한반도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이다.

바닥면이 좁고 아가리가 넓은 대접과 비슷한 형태로 북으로 추정된다. 아가리를 따라 가죽을 덮고, 구멍을 통해 가죽을 고정하였다고 판단되며 장고의 한쪽 부분과 유사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북,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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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현을 타거나 켜서 소리를 내는 현악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경산 임당 무덤에서 유사한 형태의 칠흔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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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음악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마찰봉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긴 나무막대의 한쪽 부분은 손잡이로 하고 다른 쪽은 여러 개의 홈을 판 형태로 만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찰음악기, 복원품

농경의례와 악기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악기는 유럽의 구석기시대 뼈로 만든 피리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뼈피리가 최초의 실물 악기에 해당된다. 악기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나 뼈를 이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쉽게 부식되어 많이 확인되지 않지만, 청동제 악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청동방울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청동방울로 령과 탁의 종류가 있으며, 타악기인 북과 현악기인 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방울은 여러 유적에 확인되었지만, 슬과 같은 현악기와 북은 신창동 유적에서 처음 실물로 확인되었으며, 이와 함꼐 찰음악기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악기는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파종과 수확을 비롯한 다양한 의례활동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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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집,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집은 검을 넣어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나무껍질 등을 이용하다가 차츰 가죽이나, 나무, 칠제품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목검과 부속구, 초기 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검 제품은 검집과 목검검 손잡이검 손잡이 끝장식 등으로 구성된다. 결합된 전체 형태는 청동검의 형태를 닮아 있는데, 이는 청동검을 대신하여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원판모양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토기편을 갈아 둥글게 만든 것이다. 정확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 이래 제사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의례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멧돼지모양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멧돼지의 형상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주둥이 일부만 남아 있다. 유아의 장난감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적의 성격, 점뼈와 함께 출토되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소형토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굽다리접시, 뚜껑, 국자 등의 형태로 작게 만든 토제품이다. 저습지 주변에서 다양한 의례 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물을 대신하여 신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농경의례
“해마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으로 계속한다.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 섰다가 하면서 손발로는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이 마치 탁무와 같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면 또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고 국읍에 한사람씩을 받들어 천신의 제사를 주재토록 하였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각국에는 각각 별읍이 있는데 소도라 부른다. 방울과 북이 매달린 큰 나무를 세우고 귀신을 섬긴다. 그 가운데로 도망 오는 사람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븐 점은 다르다. ”
이 기록은 파종시기와 수확시기에 농경의례를 행하고, 농경의례와 관련된 소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도는 농경의례의 하나인 제천의식을 의미하거나 농경의례를 행하던 장소로 보기도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모양방울,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흙으로 만든 작은 크기의 방울과 그 위에 얼굴모양을 새긴 유물이다. 다양한 의례행위가 이루어질 때, 청동방울을 대신하여 신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점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동물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농사의 풍요, 집단의 단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바람개비문양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앞면 중앙에 회전하는 바람개비 문양, 가장자리를 따라 톱니날 문양을 배치하였다. 앞면에 옻칠을 한 뒤 문양 이외의 부분을 파내어 문양이 돋보이게 하는 박지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새모양목제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나무를 깎아 새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저습지 주변의 농업과 관련된 의례 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농경의례
농경의례는 농작물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거나 수확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는 행위이다. 마을을 형성하게 되고,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작업이 반드시 요구되었기에 농경의례는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통합하는 주요 수단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농경의례는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이 시기 전국으로 확산되는 도작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농경의례 모습의 구체적인 유물로는 농경문청동기가 대표적이다. 이왜에 새문양청동기, 손잡이에 새가 장식된 청동검 등 농경의례 관련 자료에는 새가 많이 보인다. 초기 농경 단계에서 새는 지상계와 천상계를 넘나들며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의례와 관련된 유물로 새모양목제품과 바람개비문양칠기, 점뼈와 소형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새모양목제품과 바람개비문양칠기는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새와 태양을 표현한 것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000년 전 동북아시아 교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대방에서 왜로 가는 길은 한반도 서해안의 연안물길로서 한의 나라를 경유하며 혹은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에 있는 구사한국(김해)에 도착한다. 여기까지가 칠천여리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과 대방에서 서해와 남해의 연안을 따라 김해에 이르고 다시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규슈에 이르는 당시 동방교역로를 알려주는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동방교역로상에 위치한 영산강 하구와 영산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이어진 신창동 일대는 낙랑 및 중국, 한반도, 왜를 연결하는 중요 기착지로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남해안 도서 및 해안을 면한 지역에 분포하는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왜래유물들은 기록에서 보이는 중국(대방)-한-왜를 잇는 동방교역로를 실증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광주박물관] 광주 신창동유적, 집과 생활용품

신창동 유적에서는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과 삼베의 흔적이 출토되었으며, 후대에 사용되었던 베짜는 도구들과 비슷한 형태의 도구들도 출토되었다. 토기는 동시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발달된 모습의 검은간토기와 점토대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토기를 굽던 가마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집은 전통적인 움집과 창고 등으로 사용된 고상가옥이 확인되어 동시대 다른 지역과 비슷한 생활형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실감개,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에서 출토된 실감개이다. 工자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두 개의 직사각형 나무판을 가는 나무막대로 연결하였다. 가락바퀴 등으로 뽑은 실의 탄력을 높이기 위해 감아두는 도구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실감개,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바디,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바디는 베틀 부속구의 하나로, 날줄 사이를 가로지르는 씨줄을 넣고 양쪽 끝 부분을 당겨 날줄과 씨줄이 치밀하고 고르게 짜여지도록 하는 도구이다. 실제 사용 중 날줄에 의해 긁힌 자국이 남아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삼베붙은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삼씨, 뼈바늘,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가락바퀴,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과 삼베
의복은 인간의 생활필수품 가운데 으뜸에 해당된다. 의복을 만드는 옷감의 출현은 신석기시대로 알려지고 있지만,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직물 관련 자료는 가락바퀴와 유물에 부착된 직물의 흔적이 전부였다. 신창동에서는 천과 실을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인 바디, 실감개, 뼈바늘, 가락바퀴 등이 확인되어 이곳에서 직접 실과 천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직물 종류는 분명하지 않으나 삼한에서는 일찍이 양잠을 하여 면포와 겸포 같은 견직물을 짜고 폭이 넓은 세포를 생산하였다는 기록과 신창동에서 삼베를 만드는 식물인 삼의 종자가 혹인된 것으로 볼 때, 비단과 삼베가 주요 직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최근 신창동에서 출토된 천 조각을 분석한 결과, 견직물과 마직물로 확인되었다. 이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삼한의 직물종류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검은간토기, 점토대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점토대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이외에도 검은간토기, 굽다리접시, 완, 바리, 손잡이 달린 호형토기, 접시, 뚜껑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뚜껑, 접시, 검은간토기, 점토대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접시, 완,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완, 귀때토기, 굽다리접시,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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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호형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토기의 생산
저습지 유적의 서쪽 구릉 서사면에서는 길이 8 m인 도랑형태의 가마 1기가 확인되었다. 가마의 바닥은 특별한 시설이 없는 점토바닥 그대로이며, 검은색 재가 깔려 있었다. 내부는 소토와 재로 이루어진 퇴적층이 두껍게 쌓여 있으며, 많은 토기편이 함께 확인되었다. 이후 이 토기가마에 인접하여 다른 형태의 토기가마 1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평면형태는 긴 지름이 4 m 가량인 타원형이다. 역시 내부에는 별다른 시설이 확인되지 않고 검게 그을린 토기편과 함께 숯과 소토가 확인되어 한데가마로 판단되었다. 신창동 저습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점토대토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 외에 항아리, 검은간토기, 바리, 시루, 굽다리접시, 뚜껑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확인되었다. 저습지의 제2기층에서 토기가마의 부산물로 보이는 다량의 소토와 재, 숯 등이 확인되었고 토기의 기종과 형태에 있어 토기가마 출토품과 저습지 출토품이 동일한 것으로 볼 때 저습지가 형성된 시기의 토기가마로 판단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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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짝,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느티나무로 만든 문짝으로, 두 개로 구성된 문의 한쪽에 해당한다. 직경 40 cm 내외의 나무를 파내어 일체형으로 만들었는데, 앞면에는 빗장 고정부가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발화도구, 복원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발화막대, 발화대,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말화막대집,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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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솔,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옹이 부분을 이용하여 막대 형태로 만든 것이다. 송진이 많아 불이 잘 붙고 오래 탈 수 있어 전통시대에는 물론 최근까지도 불의 보관 및 이동에 많이 사용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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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로 만든 검,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뼈를 갈아 양날을 세운 짧은 칼의 형태로 만들었다. 날 부분은 정교하게 마연하여 날카로우며, 칼 끝은 뾰족하게 마무리하였다. 손잡이에 끼울 수 있도록 삽입부를 만든 것도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나무집게,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단단한 참나무 2조각을 위아래로 겹치고 바깥 면의 홈에 끈을 묶은 뒤, 한쪽에서 쐐기를 박아 물체를 단단하게 고정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다양한 쐐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원통모양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얇은 판재로 재단한 나무를 높은 열과 증기로 구부려 몸통을 만들고 둥근 바닥판을 결합하여 완성하였다. 몸통에는 옻칠로 접착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나무갈고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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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0.4 cm 내외의 가는 싸리나무 묶음의 한쪽 끝을 묶어 자루로 만들었다. 현재 농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싸리나무 빗자루와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나무갈고리,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J'모양으로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손쉽게 만들었다. 생활용품.씨앗 등을 걸어두거나 짚단을 찍어 나르는 등 생활에서 다양하게 사용하였던 도구로 추정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집과 생활용품, 신창동 사람들의 일상생활
이 시기의 집은 크게 움집과 고상가옥의 두가지 형태가 있었다. 움집은 땅을 파낸 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의 틀을 만든 다음 풀로 지붕을 완성한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풀로 덮은 지붕이 무덤처럼 생긴 흙집을 만들어 산다”는 기록에 보이는 형태의 집으로 볼 수 있다. 고상가옥은 기둥을 세우고 바닥면을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 사다리를 통해 출입하는 마치 원두막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로 창고 또는 공방으로 사용되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문짝과 건축부재, 나무기둥 등이 확인되어싿. 한편 불을 피우는데 사용한 발화구, 청소와 정리에 사용하던 빗자루, 물건을 담아 나르는데 사용된 삼태기와 소쿠리, 볏짚이나 삼으로 만든 끈 등 다양한 생활용구가 출토되었다. 발화구는 발화막대, 발화막대집, 발화대로 구성되며 회전시켜 생기는 마찰열을 이용하여 불을 피우는 도구이다. 또 불과 관련된 것으로 관솔이 있다. 송진이 많이 함유된 관솔이 불이 잘 붙고 오래 타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불의 보관과 이동, 등불 등으로 이용되었다. 빗자루는 나뭇가지를 묶어 만든 것으로 현재 농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와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이와 함께 다양한 생활용구는 신창동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어떤 것은 현대 농촌에서 사용하거나 근래 민속품에 보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는 당시 생활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귀장식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귀장식품은 흙이나 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마연을 하거나 옻칠을 하여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것도 있다. 귓볼을 뚫고 장착하는 귀걸이의 일종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부채자루,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크기가작고 손잡이가 중앙에 위치한 부채의 자루이다. 단선은 고대 사회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고깔,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길이 25 cm 내외의 이등변 삼각형 형태인 부채살 모양을 한 목제품이다. 상하에 뚫린 구멍을 통해 같은 모양의 목제품과 좌우로 연결할 수 있는데 머리에 쓰는 모자로 추정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빗,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빗은날의 형태가 가늘고 촘촘한 참빗과 성긴 얼레빗으로 나눌 수 있다. 신창동 출토품은 활 모양의 빗머리에 21~38개의 빗살을 새겨 만든 얼레빗이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신발골,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가죽신을 만들 때 사용하는 틀로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된 것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발 모양과 흡사하며 바닥을 평탄하게 깎았지만 앞과 뒤가 약간 들려있고 뒤쪽은 경사지게 만들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꾸밈과 장식, 부채들고 고깔 쓰고
신창동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빗, 부채자루, 유리구슬, 귀장식품, 신발골, 고깔 등 몸을 꾸미고 치장하는데 사용된 생활용품이 있다. 이 시기 모자와 관련된 실물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신창동유적엣 출토된 부채살모양으로 다듬어진 목제품이 고깔모양의 모자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갈모와 비슷하다. 부채는 다호리 1호묘에서 출토된 흑칠 부채와 유사하나 부채살이 끼워지는 구멍이 없는 미완성품이며 칠은 바르지 않았다. 빗은 날의 형태상 가늘고 촘촘한 참빗과 성긴 얼래빗으로 구분되는데, 신창동에서 출토된 빗은 21~38개의 빗살을 새겨 만든 얼래빗에 해당된다. 신발골은 가죽신을 만들 때 모양을 잡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이 시기 유일한 자료이다. 귀장식품은 흙,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신석기시대 동삼동패총 출토품이나 일본 죠몽의 이전과 비슷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귀장식품을 사용하고 있다. 귀장식품과 함께 장신구로 유리구슬도 출토되었다.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유리구슬은 목걸이를 하거나 옷에 장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낙랑계 옹편,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에서 출토된 낙랑계로 추정되는 옹형토기 조각으로 모래가 섞인 백색의 점토를 사용하여 두껍게 제작되었다. 신창동에서 확인되는 토기의 아가리 모양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야요이계토기편,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에서 출토된 야요이계토기로, 사천 늑도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다. 일본 야요이시대에 주로 제작된 토기로 부산 조도, 김해 회현리 등에서도 출토되어 일본과의 교류의 증거로 이야기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나무껍질 가공품,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자작나무속 나무의 껍질로 만든 긴 타원형의 목제품이다. 가장자리를 따라서 작은 구멍 20개를 뚫었으며, 이 구멍을 통해 다른 수피가공품과 연결하여 용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무암,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동북아시아 무역루트와 신창동
영산강은 수운교통의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강유역의 비옥한 농경지에서 생산되는 물산과 강으로 유입되는 선진문물에 의해 일찍부터 교역의 중심지로서 발달해 왔다. 신창동 유적이 형성되던 시기 서북한지역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또한 서남해안 지역 유적에서는 중국 및 낙랑, 그리고 왜와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확인되고 이싿. 대표적인 유물로 중국과 관련된 청동유물과 중국.일본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토기가 있다. 특히 신창동에서 출토된 철경부동촉은 낙랑계토기와 함께 낙랑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와 유사한 동촉이 제주 삼양동과 사천 늑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옥류는 해남 군곡리.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유리제 관옥이 출토되었고, 제주 삼양동 유적에서도 중국제로 보이는 환옥이 확인되었다. 토기류는 낙랑계토기, 야요이계토기가 광주 신창동.해남 군곡리 유적 등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연대추정이 가능한 중국의 진.한대의 반량전과 ㅇ수전, 신랄 화천과 같은 동전이 서남해안지역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서남해안지역과 낙랑 및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광주박물관] 광주 신창동유적, 목기와 칠기

신창동 유적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영산강 유역 저습지에서 확인된 초기 철기시대 생활유적이다. 습지라는 자연적 특성으로 이곳에서는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목재용품들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에서 당시 중국과의 교류 등을 통해 상당히 발달된 수준의 목재 가공기술과 생활수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칠기제품이 다양한 형태로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목재를 가공해서 만든 수레바퀴(재현품). 당시 중국과 낙랑 등에서 사용하던 바퀴와 비슷한 형태이다.

경이로운 목기와 칠기의 메카
청동기시대는 경작지 확대와 벌목을 위한 대형의 돌도끼가 등장하고 끌, 자귀, 대팻날의 목공구세트가 완성되었다. 이는 주거건축 기술이 발달하는데 영향을 주고, 다양한 목기의 제작이 이루어져 생활용구의 다양화를 촉진하는 듯 역동적인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청동기와 철기의 유입으로 공구의 재질이 금속으로 바뀌게 되면서 기술혁신과 생산력이 증대되는 등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목제유물을 용도별로 분류해 보면 무길, 농공구류, 용기류, 제의구류, 방직구, 악기류, 거여구, 건축부재, 생활용구가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생산관련 자료는 철기가 남부지방으로 보급된 시기의 생산기술적인 측면과 함께 변화된 사회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농경과 함께 목기와 칠기의 생산이 있다. 신창동 유적은 생활, 생산, 무덤 등 다양한 성격의 유구와 유물이 조사되어 당시 문화를 총제척으로 규명할 수 있는 복합유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중 저습지와 주변에서 확인되는 목기, 철기, 천, 토기 등 다양한 생산관련 자료는 초기 철기시대 경제활동과 기술의 발달정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칠용기, 칠주걱, 마연용 천, 칠기 등 철기 생산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어 신창동 유적이 한국 칠기의 메카임이 드러났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자귀자루, 도끼자루,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자귀자루, 본 줄기에서 뻗은 가지를 손잡이로 하고 본 줄와 만나는 부분을 깎아 자귀를 결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질기고 단단한 성질의 참나무를 자용하였다. 도끼자루, 나무를 베거나 분리하는 작업에 사용하는 도끼의 자루이다. 1자 형태의 자루는 네모는 구멍에 도끼를 관통하여 장착하고, ㄱ자형태는 꺾인 부분에 도끼의 공부를 끼워 장착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목제용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굽다리접시.원통모양칠기.칸막이고배.사각용기.완.접시 등이 있다. 칠기로 제작된 목제용기는 제작과정이 복잡하고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어 의례 등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OLYMPUS DIGITAL CAMERA사각용기, 접시, 손잡이 달린 사각용기, 국자, 뚜껑,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벚나무와 참나무.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목제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수종들이다.

벚나무,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두 번째로 많은 수종이다. 현악기, 바디, 검집, 부채자루, 고깔, 칸막이고배, 완, 뚜껑 등에 사용되었다. 특히 오리나무류와 함께 칠제품에 선택적으로 사용된 용재이다. 참나무,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가장 많은 수종이다.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등이 이에 속한다. 괭이와 따비, 방망이 등의 농공구와 수레 부속구, 말뚝 등에 사용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대팻날도끼, 조갯날 도끼, 홈자귀

농구와 공구의 자루
농구는 괭이, 따비, 낫자루, 절구공이 등이며 절구공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날과 자루부분을 결합하여 사용하게 된다. 낫은 쇠로 만들어진 날이 나무로 만든 자루에 장착되지만, 괭이와 따비는 날과 자루를 모두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자루는 대부분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를 사용하였는데, 괭이와 자루의 장착은 자루의 끝부분을 쪼개고 쇄기를 박아 결합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낫자루의 경우에도 쇠로 만들어진 날 부분을 홈에 삽입한 뒤 쐐기 등으로 고정하였다. 공구는 도끼와 자귀자루가 대표적이다. 도끼와 자귀는 장착된 날의 방향에 있어 차이가 있는데, 보통 도끼날은 작업시 팔의 운동방향과 평행하게 장착되고 자귀는 직교한다. 도끼와 자귀자루는 장착방법에 있어 두 가지로 나뉜다. ㄱ자 형태의 도끼와 자귀자루는 줄기에서 뻗은 가지를 자루로 하고, 줄기부분을 사용하여 도끼 등을 장착할 수 있도록 가공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신창동 공방에서 만들어졌던 목재도구들. 조선시대 농기구 등을 만들었던 대장간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신창동 공방
목공구는 도끼, 자귀, 대팻날, 끌, 새기개, 송곳, 손칼 등이 있다. 이러한 목공구는 대부분 나무나 뿔로 만들어진 자루에 결합하여 사용하는데, 신창동에서는 도끼와 자귀자루, 손칼손잡이가 출토되었다. 목기의 제작과정은 적합한 나무의 선정과 벌체에서 시작하며, 각 과정에 적합한 도구를 사용하였다. 농공구 자루는 참나무류로 만들어졌다. 목제용기와 칠기는 벚나무, 단풍나무, 오리나무를 사용하였으며, 북은 버드나무로 만들어졌다. 농공구 자루는 거친 작업에 사용되는 것으로 쉽게 파손되지 않도록 단단하고 질긴 성실을 가진 참나무류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현재도 전통 북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버드나무는 악기를 만드는데 적합한 나무이다. 이처럼 신창동 사람들은 나무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용도에 맞는 적절한 나무를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제품은 말뚝과 같이 도끼로 가공하여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칸막이고배처럼 옻칠로 마무리되는 것까지 제작과정과 사용도구에 있어 매우 다양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원통모양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원통모양칠기는 통나무나 얇은 판재를 원통모양으로 가공하여 만든 몸체에 바닥판을 결합시켜 완성하였다. 내외면 모두에 두꺼운 옻칠을 한 고급용기이다.

칠기란?
칠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천연도장재료이다. 칠은 옻나무 수액을 1차적으로 가공한 생칠, 2차 가공된 정제칠로 구분된다. 생칠은 모아진 옻나무 수액 속의 불순물을 걸러낸 것으로 칠하는 목적보다는 광택을 내거나 접착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정제칠은 생칠에 열을 가하면서 수분을 증발시키고 여과하여 얻어진 것으로 투명칠이라고도 한다. 투명칠에 여러가지 안료를 첨가하여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다. 또 칠기는 칠하는 물건의 재료에 따라 나무에 칠하는 목태, 금속에 칠하는 금태, 토기에 칠하는 도태 등으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칠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방부, 방수, 방충의 기능과 내구성을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또, 아름답게 장식하여 미적인 감각을 표현하고 강력한 접착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칠기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오랫동안 만들어지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칠주걱,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아랫부분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들어 전면에서 보면 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옻칠의 채취 및 가공, 칠기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칠이 담긴 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내부에 칠이 담겨 있는 것이 있다. 옻칠 재료인 옻나무 수액을 보관하거나, 정제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원통모양칠기 몸체,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원통모양칠기 저판,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OLYMPUS DIGITAL CAMERA옻칠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토기에 칠을 하여 표면을 매끄럽고 광택이 나게하여 아름답게 하며, 수분의 침투를 방지하였다. 옻칠토기는 흑칠을 하여 표면이 검은 것과 생칠 후 마연하여 투명한 것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옻칠토기, 초기철기시대, 광주 신창동

신창동의 칠기
신창동의 칠기 제작기술은 용기제작에 있어 접합 뿐 아니라 다양한 재질에 적용되었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칠기는 대부분 목태이며 장식문양이 없는 흑칠이 기본이다. 금태는 녹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칠한 것인데 검집의 연결금구에 유일하게 보인다. 도태는 토기의 안과 밖을 칠한 것으로 표면을 매끄럽게 하고 습기의 침투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신창동에서는 칠주걱과 내부에 칠이 담겨 있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또, 내면 바닥에 칠이 묻어 있는 천 조각이 부착된 토기도 있다. 천 조각은 토기 내면을 칠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창동 유적에서는 완성된 칠기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칠기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는 2,000년 전 신창동은 고도의 칠기제작기술을 소유한 생산 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적 주변의 영산강을 칠천이라 칭하였던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