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November 25, 2019

[광주박물관] 회화와 서예

광주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조선후기 전남지방을 대표하는 문인화가들의 그림과 서예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와 진도출신 문인화가 허련, 화순 출신 송수면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작품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예작품으로는 선조대왕의 글씨와 조선후기 문인 임장원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먹으로 그리다
현대의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의 기기를 손에서 놓지 않듯이, 옛 문인들은 붓과 먹, 벼루와 종이의 문방사우를 늘 주위에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우리 전통예술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물을 더해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그린 수묵화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고요하고 단정한 그림입니다. 남도의 전통회화를 대표하는 해남 윤씨 가문의 윤덕희(1685~1766), 조선후기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문인화의 맥을 이어간 소치 허련(1808~1893) 등도 먹으로 마음을 그린 그림, 수묵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의 수묵화는 현대미술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르로 남아 있습니다. 화려한 색과 현란한 기교 없이도 우리의 내면을 보여주는 ‘수묵’의 현대적 의미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지금, 남도의 전통회화 속에서 수묵화의 정수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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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림, 윤덕희, 조선 1742년, 종이에 먹

윤덕희는 해남윤씨 가문 어초은공파의 8대손으로, 국보 240호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장남이다. 갑술환국으로 정치계의 판도가 바뀌자 윤덕희는 일찍부터 벼슬을 포기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그림을 그렸다. 그 화업은 아들인 윤용에게까지 이어져 3대에 걸쳐 문인화로 일가를 이루었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용트림하는 소나무와 언덕을 배경으로 한 필의 살찐 말이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다. 소나무는 문인의 절개와 장수를 상징하며, 준마는 재사의 인품과 등용을 뜻한다. 윤덕희는 다양한 주제에 능하였지만 특히 이러한 말 그림을 자주 그렸다. 18세기의 한 기록에 의하면, 윤두서는 마르고 날쌔 보이는 말을 그리고 그의 아들은 살찌고 둔해 보이는 말을 그렸는데, 중국인들은 살이 올라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아들의 말그림을 선호하여 비단을 주고 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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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산의 아홉굽이 경치, 허련, 조선 1878년

허련은 19세기 호남이 배출한 주요 화가 중의 한명이다. 진도에서 태어난 그는 늦은 나이에 추사 김정희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헌종을 모시고 그림을 그려 보이는 영예를 누렸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당하였을 때에는 그를 따라 제주도에 머무르며 그림과 글씨를 익히기도 하였다. 추사의 사후에는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경영하였다. 이 병풍은 무이구곡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무이구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노닐던 중국 무이산 구곡계를 가리킨다. 주자는 그 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무이구곡시를 남겼다. 성리학을 숭상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현인이 거주할 만한 이상향으로 무이구곡을 꼽았고, 그림으로나마 그려 갈 수 없는 그 곳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였다. 각 폭 상단에는 주자의 무이구곡시가 적혀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여덟 군자의 모습, 허련 (1808 ~ 1893),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조선후기 문인화가 소치 허련이 그린 팔군자를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팔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의 상징성을 의인화하여 그린 사군자를 변형, 확대시킨 것으로 연꽃, 소나무, 모란, 파초, 비자 등을 더한다. 이른 봄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는 난초, 늦은 가을 추위를 견디는 국화, 그리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하는 대나무는 절개와 덕, 학식을 갖춘 군자의 정신세계를 함축하여 상징하지만, 여기에 다시 더해진 네 가지 식물은 길상적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 특히 모란에는 부귀와 행운, 소나무에는 장수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허련이 그린 팔군자에는 오동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말기에 이르면 길상적 의미가 담긴 팔군자를 일반 서민들까지 애호하게 되어 그 그림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대나무, 송수면(1847~1916), 19세기말 ~ 20세기초, 종이에 먹

사호 송수면은 조선말기 문인화가이다.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서 나고 자란 송수면은 사평리 앞에 흐르는 천에서 그의 호 ‘사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을 사평에 머물렀지만 집안 일가들이 벼슬을 하며 거주하던 한양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현재도 서울에 전하며, 생존 당시 이미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될 만큼 이름이 있었다. 송수면의 그림 중 묵매와 함께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묵죽이다. 오세황의 『근역서화징』에도 대 그림을 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수면은 조선중기의 대나무 그림을 충실히 따라 그리면서 연습하였다. 그의 대나무 그림이 예스러운 방식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까닭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다양한 형체의 대나무를 그린 6폭 병풍이다. 각 폭에 두 그루의 대나무를 앞뒤로 배치하였으며, 먹의 농담을 달리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곧게 뻗거나 바람에 흔들려 휘어진 모습, 또는 굵고 가는 줄기를 대비시키는 등 대나무의 형태에 변화를 주어 그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먹으로 쓰다.
먹으로 쓴 글씨를 소재로 하는 ‘서예’는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한 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뿐입니다. 한자는 의미에 따라 수없이 많은 형태의 글자가 존재하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양의 ‘미술’ 속에는 ‘글씨’를 예술로 하는 장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미술공모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본래 동양화, 서양화에 이어 제3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서예’는 오랜 논쟁 끝에 동양화 부문에 흡수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한 글씨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 특히 한자를 사용해 온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때 부정되었던 서예가 추상미술의 한 부분으로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은 본래 먹으로 쓴 글씨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선조대왕의 글씨, 조선 1632년

여덟 폭 폭으로 이루어진 이 병풍은 선조의 글씨를 새겨 찍어낸 판본을 보고 다시 찍은 것이다. 각 폭은 선조가 당시 가운데 좋아하던 시구를 적어 놓은 것으로, 위응물, 맹호연, 장적, 한악 등이 지은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초서의 각 글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서 쓰는 연면초로 쓰여져 있다. 마지막 폭에는 의장군의 집에 보관되었던 어필의 판본을 다시 찍어내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스스로를 훈계하고 맹세하는 글, 임장원(1734~1804), 조선 1800년, 종이에 먹

1800년에 임장원이 지은 잠을 행초로 쓴 여덟 폭 병풍이다. 잠이란 한문 문체의 하나로, 경계하는 뜻을 서술한 글이다. 이는 임장원이 자신을 반성하고 후손에게 교훈을 전하기 위하여 쓴 글을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규암 임장원은 전라남도 보성 옥평 출신으로 40세에 이르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지방에서 급제하는 선비들이 드물었던 사실과 이후 그가 몸담았던 중요 직책을 감안하면 그의 학식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20년 가까이 직접 임금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간관으로 활동하면서 정조를 보필하였다. 이 병풍을 포함하여 그의 기개와 철학이 담긴 <규암집>, <규암만경>, <삼도선생행장> 등은 장흥 임씨 문중에 의해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광주박물관] 도자공예

전남지방에는 한국 도자기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적들이 여러곳 있다. 남해안에 위치한 강진군에는 용운리 가마 등 고려시대 청자를 생산하였으며, 고려말 왜구가 남해안을 휩쓸자 도자기에 생산지가 내륙으로 이동하였으며 광주 충효동은 고려말, 조선초기 분청사기의 중요한 생산지가 되었다. 당시 생산된 도자기들은 조운선을 통해 중앙으로 공급되었는데 해안지역에 침몰한 선박에서 당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광주박물관에서는 가마터와 침몰선 등에서 출토된 청자와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박물관에서 입수한 다량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화넝쿨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고려시대 청자
고려(918~1392)의 청자는 고려인의 사상과 빼어나 안목이 반영되어 창조적이면서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유려한 곡선의 조화가 이루어낸 세련된 매무새, 검고 희게 수놓은 상감무늬, 비 갠 후의 맑은 하늘빛을 담아낸 비취색 유약 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고려 인종 1년(1123)에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도기의 색은 푸른데 고려인은 비색이라 부른다”라고 청자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송의 태평노인은 『수중금』에서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의 품목에 넣었다. 고려청자는 용과 기린같은 상상의 동물 형상에서부터 표주박과 참외 등 자연에서 따온 소재를 고려 특유의 단아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장식된 연꽃 넝쿨무늬 등은 불교를 숭상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또한 연못가 동자무늬, 물가풍경무늬, 구름 속 학 등은 고려인의 서정적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고려는 물론 중국에까지 우아한 멋을 떨치던 고려청자는 강진을 중심으로 생산되었고, 지금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어 전남지역은 고려청자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앵무새 무늬접시, 청자 모란 줄기 무늬 병,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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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꽃무늬 잔, 강진국 대구면 용운리 출토, 「尙」이 새겨진 청자 합,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향로, 청자 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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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포도무늬 병,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출토

강진 청자가마
고려의 청자가마가 가장 많이 발견된 강진의 청자 가마터는 사적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굴 조사된 대표적 가마인 용운리 가마는 10세기 후반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음.양각청자를 비롯한 상감청자 등 고려 최고의 청자를 만들었다. 삼흥리 가마에서는 청자와 함께 도기도 생산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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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버드나무무늬 정병,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잔과 받침,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모란무늬 주자,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버드나무 학 동자무늬 매병,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포도동자무늬 주전자와 받침,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넝쿨무늬 유병, 고려 12세기, 청자 국화넝쿨무늬 유병,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무늬 뚜껑있는 그릇, 고려 13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동물모양 인장,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국화넝쿨무늬 그릇,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연꽃무늬 대접,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꽃모양 접시, 고려 12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물가풍경과 연꽃무늬 대접,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파도무늬접시,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물가풍경과 물고기무늬 접시, 고려 14세기, 무안 도리포 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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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꽃잎무늬 병, 고려 11세기, 완도 어두리 해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연꽃넝쿨무늬 장구, 고려 10세기, 완도 어두리 해저

바다에서 건진 청자
고려시대에는 내륙엣 거두어들인 세금을 해안 부근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다시 배를 싣고 연안 항로를 따라 수도인 개경까지 운반하였다. 이러한 배를 조운선이라 부르는데, 당시 조운선들은 풍랑에 휩쓸리거나 해적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최근 완도 어두리와 무안 도리포, 군산의 비안도, 태안 대섬 등의 앞바다에서 수많은 고려청자를 실은 채로 침몰한 조운선이 발견되었다. 완도 어두리에서 발견된 침몰선 안에서는 도자기 3만여 점을 비롯하여 선상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재질의 제품이 발굴되었다. 도자기는 녹청색 혹은 녹갈색을 띠는 조질청자로 대접, 접시가 대부분이고 이 가운데 철화안료를 사용한 병과 장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부안 도리포에서는 대접과 접시가 주로 발견되었는데, 간지가 있는 다른 청자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고려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연꽃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조선시대 분청사기
‘분청사기’란 옛 기록에는 없는 용어이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미술사학자인 고유섭(1905~1944)선생이 회청색 바탕흙에 흰흙을 바르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어 구워낸 조선 초기의 도자기를 ‘분장회청사기’라 짓고 이를 줄인 말이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분청사기는 고려말 상감청자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으나 세종 연간(1418~1450)을 전후하여 그 질이나 형태,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 등이 크게 발전하여 절정을 이룬다. 특히 그릇에 흰 눈꽃이 핀 듯한 문양를 찍어 넣은 인화기법에서 세련된 멋과 셈세한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분청사기도 제작되었다. 특히 광주 충효동 가마터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넓고 시원한 붓질과 장인의 손맛대로 선을 새기거나 면을 깎아 만든 해학적인 표현으로 조선인의 감성을 느끼게 한다. 분청사기는 1466년과 1469년 사이 왕실과 중앙관청에 백자를 공급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부터 주요 소비층이 점차 지방 관아 및 민간으로 바뀌면서 질도 떨어지게 된다. 결국 백자의 수요 증가로 인하여 15세기 말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16세기 후반에는 소멸하게 된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내섬’이 새겨진 대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잔,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뚜껑있는 그릇,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나무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연적,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세잎무늬 병, 분청사기 풀무늬 병, 조선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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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덤벙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덤벙무늬는 분장문이라고도 하는데, 초벌한 사기를 백토물에 담글 때 나는 ‘덤벙’소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백토물의 흔적이 색다른 장식효과를 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0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모란무늬 자라병,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제기, 분청사기 꽃무늬 장군,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광」이 새겨진 분청사기, 「광별」이 새겨진 분청사기, 「광정사」가 새겨진 분청사기,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광주시 북구 충효동 출토

광주 충효동가마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효동 가마는 경사를 이용한 오름가마로 사적 제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자가 제작되었다. 인화분청사기는 주로 중앙 관청에 공납하는 것들이다. 충효동 가마에서는 그릇 뿐만 아니라 벼루.제기.묘지 등도 생산하였다. 한편 모란.불고기.게 등을 활달한 필치에 해학적으로 표현한 분청사기 박지무늬는 충효동 가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구름용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조선시대 백자
백자는 분청사기와 더불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제작되었다. 아무런 문양장식 없이 절제미가 돋보이는 순백색 백자는 유교 이념 구현을 이상향으로 하는 신 왕조와 사대부층의 사상을 담아내기에 가장 알맞은 그릇이었다. 이러한 백자는 전국에서 제작되었는데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백자는 왕실과 중앙 관청에 납품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무늬에 자토를 넣어 검게 장식한 상감백자가 일시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순백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푸른색 문양이 화려한 청화백자는 초기에는 중국적인 화풍으로 표현되었으나, 곧 한국의 정취와 격조를 보여주는 회화적인 문양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백자의 색과 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대부분 회백색을 띠었다. 그림이 그려진 백자에는 값비싼 청화안료를 대신하여 값이 싸고 구하기 쉬운 철화안료가 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전반부터는 백자의 색이 순백색으로 다시 밝아지며,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청화백자의 제작도 새롭게 증가한다. 조선 후기에는 청화, 동화, 철화, 음각, 양각, 투각 등 여러가지 장식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하였으며, 제기와 문방구류 등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항아리, 조선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연꽃넝쿨무늬 그릇,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병, 조선 15~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발, 조선 1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뚜껑있는 항아리,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천’이 새겨진 접시, 조선 1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뚜껑있는 그릇, 조선 15세기, 경기도 광주 관요

OLYMPUS DIGITAL CAMERA태항아리와 태지, 조선 1624~1625년, 광주 중흥동 발굴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묘지명 접시, 조선 1708년경,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명기, 조선 1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풀무늬병, 백자 풀무늬 항아리, 조선 1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연꽃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꽃나비무늬 병,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산수무늬 삼층합,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구름 학무늬 접시,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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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풍경무늬 항아리, 조선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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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무늬 사발,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대나무모양 병,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매화무늬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사자모양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넝쿨무늬 연적, 산수무늬 연적, 부채모양 산수무늬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복숭아모양 연적, 조선 1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용무늬 필통, 백자 매화무늬 필통, 조선 19세기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