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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95호)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옛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보물 95호)이다. 불상이 모셔진 석굴사원 앞에 석등과 일렬로 세워져 있다. 석탑은 원래 있던 바윗돌 위에 돌을 올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튀어 나온 부분이 적고 경사가 심해 벽돌로 쌓은 전탑처럼 보인다. 상륜부에는 복발, 찰주 등이 남아 있는데 머리장식 받침을 크게 만들어 6층 지붕돌처럼 보인다.  특별한 장식은 거의 없으며 조각수법이나 조형미는 통일신라 석탑에 비해 떨어지는 편으로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95호). 1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등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는 원래 있던 바위 위에 돌을 올렸다.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몸돌과 지붕돌. 1층 지붕돌만 2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좁게 기둥을 새겨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2~5층 몸돌과 지붕돌.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튀어나온 부분이 적어 전탑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불상을 모신 석굴 앞에 석등과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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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석굴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보물95호
높이 6 m의 오층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탑신석을 올려 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옥개석의 너비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 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며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광주박물관특별전, 전라천년] 임진왜란의 극복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은 전라도 방어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충무공과 함께 전라도 사람들 다양한 방식으로 국난극복을 위해 힘썼다. 전주 경기전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올 수 있도록 한 안의와 손흥록의 업적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고경명을 비롯하여 많은 의병들이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남원성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많은 관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승려들 또한 의승군을 조직하여 많은 역할을 했으며 이후 여수 흥국사는 전라좌수영을 도와 남해안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승군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의명분을 따라
1592년 4월, 왜적은 부산 동래로 상륙하여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로질러 바로 한양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라도 방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충무공 이순신은 전라도 해안선 수호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전라도의 수많은 유생들은 왕을 지키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왜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당장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지키고자 하는 대의가 있었기에 스스로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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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어진

안의와 손흥록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전주 경기전에는, 조선 왕조의 모든 역사를 기록한 실록과 역대 왕들의 초상인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의 관리였던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00)은 실록과 어진이 불에 타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모두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기고 매일 불침번을 서며 지켰습니다. 조선 왕조의 역사와 기록을 전쟁의 피해로부터 지켜낸 것은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간 것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실록상자, 조선, 선조실록(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조선 국보 51-3호

OLYMPUS DIGITAL CAMERA흑장통, 19세기말 ~ 20세기초, 흑장통은 유사시에 어진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유사시에 어깨 등에 매고 이동할 수 있는 헝겊 게이스가 별도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계기사, 1592~1593년, 임진년(1592) 왜적이 침입하자 전주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과 어진을 내장산으로 피난시켜 보관한 안의와 손홍록 등의 당직 보고 기록이다. 기사는 이듬해인 계사년 1월까지 이어진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충무공 이순신과 호남방어
1593년 7월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의 관리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는 바다에 접하고 물길이 좋은 전라도 땅이 왜적에게 넘어갈 경우 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호남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이순신 장군은 옥포, 한산, 노량, 명량 등 수많은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여 전라도를 지켜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이순신 유서, 1594년, 보물 제1564-6호

1594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받은 사부유서이다. 유서란 군사지휘권을 가진 이가 함부로 군대를 움직여 역모를 꾀할 수 없도록 국왕이 직접 내리는 군사명령서이다. 함께 발급되는 밀부의 절반은 조정에 남겨두고 나머지 절반은 군사 책임자가 항상 소지해야 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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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순신 초상, 조선

화면 우측에 ‘충무공 이순신의 상’이라 적혀 있으나 앞섶으로 이어지는 둥근 깃이 달린 웃옷은 16세기 말 조선의 복식이 아니고, 매서운 눈매와 수염은 북방 유목민족의 무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화제가 달린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용맹한 무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서간첩, 이순신, 1598년, 복제품

OLYMPUS DIGITAL CAMERA선무공신교서, 1604년, 보물 1564-1호. 선조37년(1604) 임진왜란에서 무공을 세운 이들 중 총 18명을 ‘선무공신’으로 포상하였는데, 이순신은 권율, 원균과 함께 가장 높은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이충무공전서, 1795년

OLYMPUS DIGITAL CAMERA현자총통, 승자총통,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우수영전진도첩,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수군조련도, 조선, 종이에 채색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채 한 달이 못되어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왕은 북쪽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7월에 묘향산에 있던 휴정을 불러 승려를 모집하여 군사를 꾸리도록 명하였습니다. 당시 서산대사 휴정은 이미 73세의 노인이었기에 전국의 제자들을 불러 중대한 임무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관동지방의 사명당 유정이 있었고, 전라도의 뇌묵당 처영이 있었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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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당 휴정의 초상화, 조선 18세기,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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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이 서산대사에 하사한 교지

OLYMPUS DIGITAL CAMERA선조대왕이 서산대사에 하사한 신발, 조선, 베

OLYMPUS DIGITAL CAMERA선조대왕이 하사한 숟가락, 조선, 청동, 선조대왕이 하사한 발우, 조선, 옥

청허당 휴정
서산(묘향산)에 오래 주석하여 ‘서산대사’로 익숙한 청허당 휴정(1520~1604)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승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이후 조선의 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당대 최고의 선(禪)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초상을 보아도 승장보다는 일생을 선 수행에 힘쓴 선사의 이미지가 보입니다. 그러한 선사 휴정이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불교의 기본적이 ㄴ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빠진 나라와 불교계를 구하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설 떄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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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묵당 처영의 초상화, 조선, 영인본. 처영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과 함께 유명한 행주대첩에도 참전하였던 승장이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행주대첩 이후 다시 남원산성으로 내려와 교룡산성을 지어 주변을 정비하는데 힘쓰며 전라도 땅에서 활동하였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전장에 나서 불살계를 법하였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누구보다 충실히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전라도를 지켜낸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임진왜란 이후 전라도 의승군
임진왜란 때 휴정과 처영이 조직한 전라도의 의승군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요역과 경비를 담당하여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승군의 전통은 조선후기 승군제도의 상설화로 연결되어 전라도 각지에 의승군의 주둔지가 생겨났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고려 명종 26년(1196)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여수 흥국사입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완문 흥국사, 1890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게 내린 완문을 현판으로 만든 것으로 승군에 대한 기본 권리와 처우가 적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순천부영취산흥국사봉황대루중창상량문, 1729년. 임진왜란 때 불탄 흥국사 봉황대루 중창 당시의 상량문이다. 연화질에서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 일원, 도승통 겸 승대장 찬민 등 직위별 승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순천부영취산흥국사심검당중건상량문,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순천부영취산흥국사선당수집상량기, 1780년. 수군절도사 이문혁과 함께 승군 300명이 시주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문혁은 정조 2년(1778)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내려와 곧 흥국사 선당 중창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호남절의록 속 의병들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이어진 정유재란과 두 번의 호란을 겪는 동안, 전라도에서는 수 많은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고경명의 7대손 고정헌이 1800년에 간행한 『호남절의록』 속에는 무려 1470여 명의 의병들이 등장합니다. 전라도의 선비들은 벼슬에서 물러난 이들이 많았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나아갔습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호남절의록, 1799년 이후

OLYMPUS DIGITAL CAMERA호남창의록,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호남병자창의록,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양대사마실기, 양대박(1544~1592), 1799년

OLYMPUS DIGITAL CAMERA선무원종공신녹권, 1605년

1604년 이순신을 비롯한 18명을 선무공신으로 포상한 이듬해, 다시 약 9000여명에게 선무원종공신의 칭호를 내렸다. 선조는 선무공신도감을 설치하고, 임진왜란 때 직접 전장에 나아가거나 병사들에게 식량을 대어주는 등 군수물자의 보급에 기여한 인물들의 공을 치하하여 선무원종공신녹권을 간행하여 하사하였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쇄미록(임진남행일록), 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영광임진수성록, 1753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영광에서 읍성을 수호한 향촌민들의 기록이다. 1592년 10월 영광군수 남궁견이 부재한 상황에서 지역의 선비들이 읍성방위 및 행정업무를 자치적으로 수행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