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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청도군 관아, 객사인 도주관과 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청도군 관아 건물들이다. 청도군 읍치였던 청도읍성내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도주관, 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얼음창고인 석빙고(보물 323호)가 남아 있다. “도주관(道州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객사는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가운데 정청과 우익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좌익헌을 다시 지어 옛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동헌은 객사 뒷편 초동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데 학교건물로 사용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최근에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읍치였던 화양읍 일대가 원래 청도군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청도역이 있는 청도읍이 중심지로 바뀌었다.

청도군은 대구 남쪽, 경주 서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던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을이었다. 경주로 가는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가 건국하면서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지금의 청도군을 형성하였다. 고려초 현급인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고려 충햬왕 때 청도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말 이후 큰 성씨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졌으며 김일손, 김대유 등 사림파 문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주변에 운문산, 가지산, 천왕산 등 큰 산들이 많으며, 동창천.청도천 등 큰 하천이 밀양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청도군 관아 중심건물이었던 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궐패를 두고 양쪽에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동.서익헌을 두고 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7-20200106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 “도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도주는 청도의 다른 이름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5-20200106정청 내부. 일제강점기 이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청도 청도군 관아 21-20200106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동익헌. 앞면 6칸 규모로 상당히 큰 편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2-20200106옆에서 본 모습.

청도 청도군 관아 20-20200106서익헌. 앞면 6칸 규모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청도 청도군 관아 06-20200106서익헌 앞 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03-20200106객사 뒷편.

청도 청도군 관아 19-20200106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청도 청도군 관아 08-20200106객사 마당 한쪽편에 남아 있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

도주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조주는 청도의 옛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어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동.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는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 38년(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집이며, 동.서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하여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준다. 도주관 앞에는 고종 8년(1871) 병인.신미양요를 치른 뒤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옮겨져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3-20200106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동헌. 앞면 7칸 규모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16-20200106청도군수가 공식 업무를 보던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15-20200106동헌 뒷편으로 2칸 정도 누마루를 달아내어 정자처럼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4-20200106옆에서 본 청도동헌.

청도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관찰사.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1917년 군 청사를 고수동으로 신축 이전함에 따라 동헌건물은 도주학원 및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앞쪽 칸은 퇴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역사성과 관아건축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1-20200106읍성 동문 안쪽에 복원해 놓은 옛 관아 건물인 고마청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ㅇㄹ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도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군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 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0

청도 청도군 관아 10-20200106청도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청도 청도군 관아 09-20200106읍성 동문 밖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전국에 남아 있는 6곳의 석빙고 중 하나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31-20200106읍성 앞에 모아놓은 청도군수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청도 청도군 관아 18-20200106객사 앞으로 옮겨 놓은 구한말에 세운 척화비

청도 청도군 관아 12-20200106옛지도에 나타난 청도군

청도군의 연혁
청도군은 선시시대 유적 중 바위그늘과 지석묘, 석관묘 등의 유적이 각지에서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 12국 중 우유국의 위치가 청도라고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이서국이 청도에 존재했던 초기국가이다. 이서국은 유리왕 19년(42)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나, 유례왕 14년(297) 이서국이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지배체제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솔이산성, 오도산성, 가산성으로 신라에 편입되었고 경덕왕 16년(757) 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으로 개명하고 밀성군(지금의 밀양)의 속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이 되고 – 일명 도주 – 직급이 낮은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곳이었다. 1342년(충혜왕 3) 이곳 출신인 김선장의 공로에 의해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다음해 강등되었으나 김한귀의 청원으로 1366(공민왕 15) 다시 지군사가 되어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의 읍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왔다. 1896년 도제의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고 1900년대 초 대구에 속했던 풍각, 각북, 각초면이 청도군에 편입되고, 외서면은 밀양군에 속하게 되는 등 여러 번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2읍 7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청도 척화비, 구한말 서양세력을 배척하고자 전국적으로 세운 비석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에 있는 척화비이다.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이를 경고하고자 서울과 전국 중요 도로변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 중 하나이다. 긴 직육면체를 하고 있는 단순한 형태의 비석에 글을 새겨놓고 있다. 척화비는 1871년 전국적으로 동시에 많이 세워졌는데 대부분 철거되고 몇기만 남아있다. 시대상황과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청도 척화비 01-20200106청도군 관아 객사 앞에 세워져 있는 청도 척화비. 화강석 기둥에 글씨를 새져 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청도 척화비 02-20200106척화비가 세워져 있는 청도군 객사 도주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청도 척화비,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이 비는 조선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화 고종 8년(1871)의 신미양요를 겪은 후 서양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들에게 경고하고자 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세운 척화비이다. 이 비는 당시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웠던 척화비 중에 하나인데 도로변에 세워져 있던 것을 도주관 내로 올며 놓은 것이다. 비신의 높이는 155 cm이고 폭은 45 cm이며 두꼐가 25 cm인 작은 비석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고 쓰여 있다. 이 비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한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는 역사자료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청도 석빙고(보물 323호),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청도읍성 동문 바깥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이다. 조선후기 숙종 때(1713년)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이다. 천정을 받쳐주던 홍예를 제외하고는 지붕은 남아 있지 않다. 동.서로 길이 14.5 m, 폭 5 m 정도의 규모를 하고 있는데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서쪽에 출입문과 계단을 두고 있으며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동쪽 구멍으로 물이 빠져 나갈 수 있록 하고 있다. 서쪽 입구에 공사 이력을 새겨놓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석빙고는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지은 얼음창고이다. 조선은 건국초기 부터 징빙제도가 있어 빙고(氷庫)라는 직제를 두어 관원들이 관리하였다. 대체로 성 바깥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에도 한강변에 동.서빙고를 두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경주석빙고(보물 66호)를 비롯하여 6곳의 석빙고가 남아 있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1-20200106청도읍성 동문 밖 언덕에 있는 청도 석빙고(보물 323호). 지붕을 흙으로 덮어 봉분처럼 보이는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지붕을 받치고 있던 석조구조물 만 남아 있어 석빙고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8-20200106석빙구 서쪽 입구. 큰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로 지붕을 하중을 받치고 있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6-20200106석빙고 지붕을 받치는 아치형 구조물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5-20200106아치 사이의 공간에 넓은 판석을 올려놓고 그 위에 흙으로 덮고 잔듸를 심어 봉분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경주 석빙고처럼 환기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4-20200106옆쪽에서 본 모습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7-20200106동쪽에서 본 석빙고 내부. 동.서방향으로 경사지게 바닥을 만들어 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서쪽 입구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3-20200106서쪽에서 본 석빙고 내부. 동쪽에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배수구를 두었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2-20200106언덕에서 내려다 본 석빙고. 물이 잘 빠질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석빙고를 만들었다.

청도 석빙고, 보물 323호,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이 석빙고는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얼음 저장고였다. 석빙고의 입구 좌측에는 숙종 39년(1713)에 세운 비가 있어 축조연대 및 인력과 공정 기간 등을 알 수 있다. 빙실 바닥은 길이 14.75 m, 폭 5 m의 장방형 구조인데 내부는 계단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차 경사졌고 중앙에는 배수구가 있어 경사를 따라 물이 외부로 배출되게 되어 있다. 다듬은 돌로 윗부분을 반원형인 홍예로 들어 올리고 잡석으로 벽을 쌓았다. 현재 전국적으로 6기의 석빙고가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이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677호)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장연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동.서삼층석탑(보물 677호)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으로 2층 기단위에 삼층 탑신을 올려놓고 있다. 기단과 탑신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둔 것 외에는 특별한 장식은 없다. 전체적인 조형미나 세부조각수법은 양호한 편으로 높이 4,8 m 정도 높지 않은 편으로 정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9세기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79년 원래 자리로 복원해 놓았는데 기단부는 새로 석재를 보충하였다. 동탑은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석탑이 있는 장연사지 절터는 운문사에서 육로로 1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동강 지류인 동창천에서 가까운 계곡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동창천을 따라 형성된 밀양과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있으며, 주위에 농토는 적지 않은 편이다. 2개의 탑을 세웠을 정도로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요 교통로에 있던 사찰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 01-20200106청도 장연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동.서삼층석탑. 통일신라 주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경주 감은사지와 비슷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 07-20200106뒷쪽에서 본 동.서삼층석탑. 장연사지 절터는 들판이 내려다 보일 정도 높이에 절터가 자리잡고 있다. 동창천과 주위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동해와 주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경주 감은사지와 비슷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11-20200106두개의 탑 중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동탑. 높이 4.6 m 로 2층 기단 위에 3층탑신을 올려 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동탑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 05-20200106동탑 기단부. 몸돌 모서리에 가운데에 기둥을 새겨 놓고 있다.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 06-202001063층 탑신. 몸돌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 놓고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네귀퉁이를 살짝 치켜 올렸는데, 평이하면서 단순한 느낌을 준다. 머리장식은 남아 있지 않았는데 서탑 머리장식을 모방해 다시 만들어 올렸다.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 08-20200106옆에서 본 모습.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 02-20200106서탑은 동탑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무너져 인근 개천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복구해 놓은 것으로 기단 1층은 새로 보충한 석재로 복원하였다.

청도 장연사지 동서삼층석탑 보물677호 03-20200106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던 동탑.

청도 장연사지 삼층석탑, 보물 677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높이는 동탑 4.6 m, 서탑 4.84 m이다. 서탑은 일찍이 무너져서 개천가에 버려져 있었으나 1980년 2월 동탑 옆에 복원되었다. 몸돌과 지붕돌에 크고 작은 손상이 있으며 하층기단은 대부분이 보충한 석재로 이루어졌다. 동탑에서는 1984년 해체.보수 공사 때 몸돌 일단 내부에서 특이한 목재 사리합과 그 안에 장치했던 푸른색 사리병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쌍탑 기단부는 이중기단이며 각 면에 모서리 기둥 두 깨씩을 본떠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는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