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December 2021

경주 서악서원, 김유신 장군과 설총, 최치원을 모신곳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서악서원 (西岳書院)이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과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설총과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조선 명종 때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모시기 위해 사당건립을 추진하였으며 유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이황이 사당을 세울 때 후학양성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권고하면서 ‘서악정사(西岳精舍)’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서악정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며 그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 인조대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서악서원>

현재의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이다. 앞쪽에는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뒷편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강학공간은 강당건물인 시습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앞쪽엔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는 누각인 영귀루가 있다. 뒷편에 사당을 두고 있다. ‘서악서원’이라 적힌 현판은 당대 명필인 원진해가 쓴 글씨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악서원 현판>

영귀루는 강학공간 앞쪽에 세워진 누각이다.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사방이 뚫려있는 2층 문루 형태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귀루>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악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강당>

강당 앞 양쪽에는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가 있다. 동재는 조설헌(譟雪軒), 서재는 절차헌((切嗟軒)이라 부르며 2건물 모두 앞면 5칸의 큰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설헌>

OLYMPUS DIGITAL CAMERA<절차헌>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뒷편 건물>

사당에는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 신라가 유학을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설총,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큰 업적을 남긴 최치원을 모시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내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강학공간 옆에는 서원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었던 건물들이 있으며, 마당 한쪽에는 서악서원을 처음 세운 경주부윤 이정의 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는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영귀루 옆에 세워진 비석>

OLYMPUS DIGITAL CAMERA
<비석>

서악서원이 있는 마을은 선두산 동쪽편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다. 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릉을 비롯하여 법흥왕릉, 무열왕릉, 김유신 장군묘, 문무왕의 동생으로 삼국통일에 크게 공헌한 김인문의 묘를 비롯하여 서악동 고분군 등이 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서악서원(西岳書院), 경북 경주시 서악동 615
이 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 경주부윤 이정(李貞, 1512~1571)이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당시 경주지역의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이정은 퇴계 이황과 의논 하여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하고 손수 글씨를 써서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탔고, 인조 때 다시 세워져 나라에서 서악서원이라는 이름 (願)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글씨는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을 배치하고, 영귀루를 맨 앞에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자리 배열을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다. 왼편으로 진수재(進修齋)를, 오른편으로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영귀루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김유신묘(사적)

경북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동쪽 구릉에 있는 김유신 장군 무덤(사적)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가 멸망하면서 투항했던 금관가야 지배층 후손으로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볼 때 진천지역에서 세력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과 진평왕대에 김유신 일가는 삼국간의 충돌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 김유신은 선덕왕대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군을 토벌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많은 성을 빼앗는 등 당대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여동생이 후에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결혼하여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과 그의 동생 김인문을 낳는 등 일개 귀족세력에서 신라왕실의 주축세력이 되었다.

김유신이 죽다(673년 07월01일(음))
가을 7월 1일에 이르러 사저의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삼국사기 권 제43 열전 제3 김유신 하,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김유신묘(사적)>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는 사실상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통해 주류세력에 편입됨으로써 오늘날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능역 출입문, 삼문형식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들어가는 길>

무덤은 지름 30m 정도의 큰 봉분이다. 봉분 아래에 둘레돌을 배치하고 바깥쪽에 돌난간을 둘렀다.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무덤주위에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장식하는 것을 당(唐)의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은 신라 33대 성덕왕릉 이후부터인 것으로 볼 때 후대에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9세기 흥덕왕 때 왕릉의 예를 갖추고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릉과는 달리 상석 외 문무인석을 비롯하여 특별한 석물을 두고 있지 않다. 

후일 흥덕대왕이 공[김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3 열전 제3> 김유신 하,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OLYMPUS DIGITAL CAMERA<당의 능묘제도가 반영된 봉분>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놓여진 상석, 서구 신전의 제단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봉분 둘레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세밀하게 잘 새겨진 부조상으로 우리나라 십이지신상을 대표하는 부조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바깥 난간석>

OLYMPUS DIGITAL CAMERA< 쥐(子), 소,(丑), 호랑이(寅)>

OLYMPUS DIGITAL CAMERA<토끼(卯), 용(辰), 뱀(巳)>

OLYMPUS DIGITAL CAMERA<말(午), 양(未),원숭이(申)>

OLYMPUS DIGITAL CAMERA<닭(酉), 개(戌), 돼지(亥)>

무덤 앞에는 조선시대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태대각간비>

OLYMPUS DIGITAL CAMERA
<흥무대왕비>

능역 입구에는 김유신장군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966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비문은 1933년에 정인보가 지었으며 이를 이세호가 1956년에 써서 후손인 김형배가 새겼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도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열 흥무대왕 김유신 신도비>

김유신장군 묘(사적),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 7-10
이 무덤에는 김유신(595~673) 장군이 모셔져 있다. 충효동 송화산(松花山)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에 위치해 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모양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金官伽倻)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에 나당 연합군(羅唐 聯合軍)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병합하였고, 이어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으며,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당나라 군사도 물리쳤다. 문무왕 때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작(官爵)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興德王) 때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 으로 추봉되었다. 능은 밑둘레가 50m, 지름이 18m, 높이는 5.3m인데 아래쪽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경주 영묘사, 신라 칠처가람 사천미

영묘사(靈廟寺)는 신라 칠처가람 중 사천미(沙川尾)에 세워진 사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창건되었다. 이절에서 개구리가 3,4일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있었음 감지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유명한 예술가인 양지스님이 작품이 많았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삼존불, 천왕상과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출토유물 중 도깨비얼굴기와에서 화려한 조각수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를 대표하는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이곳에서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국보)을 이곳에 옮겨 왔었다고 전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륜사지(사적)>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지(사적)에서는  ‘흥’자가 적힌 기와와 ‘영묘사’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에 있던 사찰이 ‘영묘사’인지 ‘흥륜사’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묘사’가 새겨진 암키와, 8~9세기, 경주박물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만(万)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즉위하여 나라 다스리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 생략 ~ 둘째는 영묘사(靈廟寺)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은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角干 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삼국유사 권 제1 > 제1기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얼굴무늬 수막새는 경주 영묘사 터 출토된 기와에 사용된 수막새로 사람얼굴을 하고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신라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이 수막새는 경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무늬수막새, 경주 영묘사터, 신라 7세기 전반>

용무늬 얼굴을 하고 있는 기와. 신라 최고 조각가였던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적이고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용얼굴무늬 기와, 경주 영묘사터, 통일신라 8~9세기>

양지사석 (良志使錫 )
석(釋) 양지(良志)의 조상과 고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덕왕(善德王) 때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놓으면 석장(錫杖)은 저절로 날아가 단월(檀越)의 집에 이르러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머무는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그의 신이함을 헤아리기 어려움이 모두 이와 같은 것들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또한 [그는]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의 장륙삼존상(丈六三尊)과 천왕상(天王像)과 전탑의 기와, 천왕사(天王寺) 탑 밑의 8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들이다. 영묘, 법림 두 절의 현판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3천 불상을 만들어 그 탑에 모시어 절 안에 두고 공경하였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는 스스로 입정(入定)하여 정수(正受)의 태도로 대하는 것을 법식(揉式)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성 안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삼국유사 권 제4 > 제5의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수막새, 경주 영묘사터, 중앙박물관>

성덕대왕신종(국보)은 조선 세조 때(1460년) 봉덕사에서 영묘사로 옮겨와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덕대왕신종(국보), 통일신라, 경주박물관>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흥륜사지(사적), 경주에서 처음 세워진 사찰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지(興輪寺址, 사적)이다.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경주 오릉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추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 (天鏡林)에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법흥왕 때(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면서 절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때(533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흥륜사는 이차돈 순교 이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대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진흥왕이 말년이 스스로 주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사찰이다. 흥륜사 금당에는 선덕여왕때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졌으며 벽에는 아도, 이차돈 등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경주를 대표하는 큰 절이었으며,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화재로 소실된뒤 폐사되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석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륜사지(사적)>

절터에는 높이 1.77 m, 너비 3.92 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석조가 남아 있었다.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규모나 조형미가 상당히 뛰어난 유물이다. 바깥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흥륜사 절터에 있던 것을 경주읍성 안 금학헌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석조유물이 많았던 경주에서도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흥륜사지 출토 석조, 8~9세기, 흥륜사지>

OLYMPUS DIGITAL CAMERA<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3년이 지났을 때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의(巫醫)도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의원을 구하게 하였다. 스님이 급히 대궐로 들어가서 마침내 그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소원을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빈도(貧道)는 백에 [하나도] 구할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일 뿐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를 착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지붕을 이었는데, [아도는 여기에] 머물면서 강연하니 가끔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절 이름을 흥륜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3 > 제3흥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절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이 곳에서 ‘흥’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흥륜사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이 곳은 선덕여왕때 세운 영묘사 절터이고 실제 흥륜사는 영흥사가 있었던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무늬 수막새, ‘사(寺)’가 새겨진 암키와, ‘흥(興)’이 새겨진 수키와, 연꽃무늬 수막새, 경주 흥륜사터, 통일신라,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연꽃무늬 수막새, 경주 흥륜사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냥무늬전돌, 경주 전 흥륜사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8~9세기, 토제, 중앙박물관>

흥륜사는 신라왕실과 관계가 깊은 아주 큰 절이었지만, 지금은 절터 일부만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는 흥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동경 흥륜사 금당십성
동쪽 벽에 앉아 경방(庚方)을 향한 진흙상은 아도(我道), 염촉(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이고 서쪽 벽에 앉아 갑방(甲方)을 향한 진흙상은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다. (삼국유사 권 제3 > 제3흥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OLYMPUS DIGITAL CAMERA<흥륜사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

이 곳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뒤 544년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흥륜사의 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온 고구려의 승려 아도 (阿道)가 미추왕의 딸인 성국공주의 병을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낫게 하고자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 (天鏡林)에 이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절의 금당(金堂)에 선덕여왕때의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타삼존상과 아도를 비롯한 신라 십성(新羅十聖)의 상을 흙으로 빚어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 때 처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를 흥륜 사터로 보기도 한다. 절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와 배례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경주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이다. 고려중기 명종 때(1182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유교적 사회체제를 보여주는 정려비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유물이다. 당시 동경유수가 손시양의 효행을 국왕께 보고하여 마을 정문에 정려비를 세우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비석은 글자가 새겨진 비몸만 있고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다. 사각기둥형태의 화강석 돌기둥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고 크게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손시양의 효행내용과 비석을 세운 경위를 글자로 새겨놓았다. 비문은 당시 동경유수였던 채정이 지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효자리(孝子里)’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앞면>

경주황남리효자손시양정려비
<효행 내력과 비를 세운 경위를 적은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세워진 황남동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골목길>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 (孝子孫時揚族間磚, 보물), 경북 경주시 황남동 240-3번지
정려비란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 명종 12년 (1182)에 세워진 정려비이다. 화강암을 네모기둥 모양으로 치석한 것인데, 비몸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은 없다.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 쓰고, 뒷면에는 5행 130자로 손시양(孫時揚)의 효행 내용과 비를 세운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손시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돌아 가시자 3년씩 초막을 짓고 묘소를 지킴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사실을 동경유수(東京留守)가 국가에 보고하자, 왕이 그 효행을 기쁘게 여겨 정문(雄門)을 만들어 주고 포상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 달리 네모기둥 모양으로, 고려시대에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