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January 4, 2022

경주 배동 삼릉(사적) 경명왕릉, 신라 54대 경명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재위)의 무덤이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신덕왕광 경명왕 재위 기간 신라는 경주 주변 지역만 다스리는데 그쳤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죽은 후 황복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뿌렸다고 한다. 신덕왕릉과 함께 조선후기 이후 왕릉으로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경명왕릉>

경명왕이 즉위하다 ( 917년 07월(음) ),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승영(昇英)으로 신덕왕(神德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왕이 죽다 ( 924년 08월(음) ), 〔8년(924)〕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삼릉(사적) 신덕왕릉, 신라 53대 신덕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의 무덤이다. 52대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 자격으로 왕에 추대되었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신덕왕릉이라 전하는 무덤은 1953년과 1963년데 도굴되어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장하여 뼈를 잠현 남쪽에 묻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경명왕릉과 함께 조선후기 이후 이곳을 왕릉으로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경주 배동 삼릉(사적) 신덕왕릉>

신덕왕이 즉위하다 ( 912년 04월(음) ), 신덕왕(神德王)이 즉위하였다.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경휘(景暉)로 아달라왕(阿達羅王)註 002의 먼 자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으로 정강대왕(定康大王)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며, 왕비 김씨는 헌강대왕(憲康大王)의 딸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국인(國人)이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왕이 죽다 ( 917년 07월(음) ), 〔6년(917)〕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신덕왕,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삼릉(사적) 아달라왕릉, 신라 8대 아달라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재위)의 무덤이다. 아달라왕은 7대 일성왕의 장남이다.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출전했으며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봉분은 지름 18 m, 높이 5.4 m 규모이다. 현재의 무덤은 조선후기 이후 전승된 내용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인된 것은 아니다. 봉분 형태로 볼 때 통일신라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아달라왕릉>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아달라이사금이 즉위하다 ( 154년 02월(음) ),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의 장남이다. 키가 7척이며 코가 매우 커 외모가 특별하였다. 어머니 박씨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왕비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은 지마왕(祇摩王)의 딸이다.
백제에 반격하여 이기자 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 167년 08월(음) ), 〔14년(167)〕 8월에 일길찬(一吉湌) 흥선(興宣)에게 명령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이 또한 직접 기병 8,000명을 통솔하여 한강[漢水]을 따라 나아가 〔두 성에〕 이르렀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해할 것을 요청하였다.
아달라이사금이 죽다 ( 184년 03월(음) ), 31년(184) 봄 3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아달라 이사금,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배동 삼릉(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삼릉 주변 소나무숲>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지마왕릉(사적), 신라 6대 지마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6대 지마왕(祗摩王, 재위 112~134)의 무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마왕은 신라 5대 파사왕(婆賢王)의 아들로 태어나 23년 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능은 포석정에 200 m 떨어진 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밑둘레 38 m로 크지 않은 규모로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의 입지조건이나 봉분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때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지마왕릉(사적)>

지마이사금이 즉위하다 ( 112년 10월(음) )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혹은 지미(祗味)라고도 한다. 파사왕(婆娑王)의 적자이며, 어머니는 사성(史省) 부인이다. 왕비는 김(金)씨인 애례(愛禮) 부인인데,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의 딸이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지마이사금,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지마이사금이 죽다 ( 134년 08월(음) )
〔23년(134)〕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아들이 없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지마이사금,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OLYMPUS DIGITAL CAMERA<지마왕릉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지마왕릉 봉분>

OLYMPUS DIGITAL CAMERA<지마왕릉 소나무숲>

박씨로서 왕위를 계승한 초기 왕들은 대부분 박혁거세 왕릉이 있는 경주 오릉에, 6대 지마왕 이후 일성왕, 아달라왕과 통일신라 말 3명의 왕들의 무덤은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남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지마왕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형산강 주변 들판>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뒷편으로 보이는 경주 남산>

지마왕릉 (祗摩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30
이 능은 신라 제6대 지마왕(摩王, 재위 112~134)을 모신 곳으로 남산의 서쪽 하단에 위치해 있다. 능은 밑둘레 38 m, 높이 3.4 m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이며 별다른 특징은 없다. 왕은 파사왕(婆賢王)의 아들로 태어나 23년 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