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927)의 무덤이다. 54대 경명왕의 친동생으로 재위 기간동안 친고려 정책을 이어나갔다. 927년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순왕은 남산 해목령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경애왕이 즉위하다 ( 924년 08월(음) ),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위응(魏膺)이고, 경명왕(景明王)의 친동생이다.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 ( 927년 09월(음) ), 〔4년(927)〕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습격하였다. ~ 생략 ~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 가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 생략 ~ 왕은 왕비와 첩 몇 명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왕비와 첩을 간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곧 왕의 친척 동생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敬順王)이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애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봉분은 지름 12 m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경주에 있는 마지막 신라왕릉으로 당시의 국력를 말해주듯 봉분의 규모도 작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전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장사 지내다 ( 927년 11월(음) )
〔원년(927)〕 전왕(前王)의 시신을 들어 서당(西堂)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였다. 시호(諡號)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애왕릉은 배동 삼릉에서 남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배리삼릉과 경애왕릉 앞으로 형산강을 따라 경주와 언양을 이어주는 도로가 있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난 꽤 운치있는 길이다.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1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927)을 모신 곳이다. 밑 둘레 43 m, 지름 12 m, 높이 4.2 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南山)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勝川;
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石亭)에서 잔치[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
-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