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January 9, 2022

경주 태종무열왕릉(사적),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45 ~661, 김춘추)의 무덤이다. 신라 29대왕인 태종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이며,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연개소문을 만났으며, 당나라에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얻어 삼국토대의 기초를 이루었다. 654년 진덕여왕을 이어서 진골의 신분으로 최초로 왕이 되었으며,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에 김유신 등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료체제와 군사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다. 재위기간 동안에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문무왕대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사적)>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오르다 ( 654년 03월(음)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眞智王)註 002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 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 『당서(唐書)』에는 “진덕(眞德)의 동생”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眞平王)의 딸이고, 왕비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湌) 서현(舒玄)의 딸이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뛰어나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왕을 섬겨서 지위는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의 황제가 특진(特進)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요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德行)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 만한 이가 없는데,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춘추는 세 번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태종무열왕이 죽다 ( 661년 06월(음) )
〔8년(661) 6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무열왕의〕 부고를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비교적 큰 규모의 원형봉토분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발굴이 되지는 않았지만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봉분에 비해서 장식이 소박한 편이고 무덤주위에 자연석을 돌렸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OLYMPUS DIGITAL CAMERA<반대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주위에 심어진 소나무>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뒷편 서악동고분군(사적)과 선도산>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능역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이 있는 능역>

무덤 앞에 국보 25호로 지정된 무열왕릉비가 있어 신라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정확하게 왕릉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이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석비는 글자가 적혀진 몸들은 없어지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화강석을 세련되게 조각하여 만든 이 석비은 후대에 세워진 많은 석비에 큰 영향을 주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입구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가 있는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비(국보)>

신라 무열왕릉(武烈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884-1
이 능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45 ~661, 김춘추)을 안치한 곳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中代)의 첫 진골(眞骨) 출신의 왕으로 삼국 통일을 이룩하려고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 m, 높이 8.7 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과 머릿돌이 나왔는데 무열왕이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 太宗武烈大王址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인 최초의 석비

경북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비(국보)이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져 있는 석비(石碑)이다.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중국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인 최초의 석비이다. 현재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으며 글자가 새겨진 조각이 조금 발굴되었다. 머릿돌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址碑)’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어 무덤과 석비의 주인이 확인되었다. 비몸은 없지만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의 장식은 아주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어 동양권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조각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비(국보)>

OLYMPUS DIGITAL CAMERA<반대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뒤에서 본 모습>

거북받침돌은 거북의 모습을 아주 생동감있게 화강석으로 조각했다. 거북은 목들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게 뻗으며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을 새겼으며 몸돌을 올리는 비좌 주위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앞으로 솟아 오르려는 거북 얼굴>

OLYMPUS DIGITAL CAMERA<등판에 새겨진 육각형 무늬>

OLYMPUS DIGITAL CAMERA<생동감 넘치게 조각된 발>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글이 새겨진 비몸돌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부근에서 출토된 글자가 새겨진 비석파편이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에 새겨진 글씨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비 조각, 경주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비 조각,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1년>

머릿돌은 높이가 110 cm이며, 좌우에 여섯마리의 용이 세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석비와 왕릉 주인이 태종무열왕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머릿돌 앞면>

OLYMPUS DIGITAL CAMERA<옆면>

OLYMPUS DIGITAL CAMERA<뒷면>

OLYMPUS DIGITAL CAMERA<석비가 모셔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사적)>

신라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국보),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
이 비석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비는 무열왕릉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빗돌[碑身]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龜趺)과 용을 새긴 머릿돌(螭首)만 남았다. 길이 333 cm, 너비 254 cm, 높이 86 cm이며, 거기에 조각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높이가 110 cm인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있는 모습이다. 앞면 중앙에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비의 주인공을 밝혀 주고 있다. 이 비는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경북 경주시 율동에 있는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이다. 벽도산 서쪽 바위를 깎아 만든 마애불상이다. 서방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하고, 왼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이 있는 삼존불상이다. 후대에 조성된 마애불상에 비해 돋을새김이 입체적이고 표현이 사실적이다.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과 조각수법이나 양식의 거의 비슷하다.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자연석에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조각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거치면서도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 불상을 새기던 장인들의 바위재질에 대한 지식과 뛰어난 조각기술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본존불 얼굴과 광배>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는 연꽃 모양의 받침에 서 있으며, 머리는 크고 입체감있게 돋을새김을 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광배를 새겨놓고 있다. 양어깨를 감싸는 옷은 얇게 표현되어 있으며 몸의 굴곡을 잘 드러낸다.

OLYMPUS DIGITAL CAMERA
<가운데 아마타여래>

왼쪽편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꺠 위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알려진 보살로,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민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왼쪽 관세음보살>

오른편에는 대세지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다. 협시보살이라고 불리는 대세지 보살을 지혜와 광명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불상 뒤에 머리광배가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오른쪽 대세지보살>

OLYMPUS DIGITAL CAMERA<왼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에서 본 모습>

경주와 대구를 연결해주는 옛 도로에서 부근 두대리 마을을 지나서 산길로 조금 들어오면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 올라 올 수 있다. 불상 앞에는 작은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에서 들어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

OLYMPUS DIGITAL CAMERA<불전 겸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산신각>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