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January 12, 2022

경주 헌안왕릉(사적), 신라 47대 헌안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김의정)의 능이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호족세력이 세력을 키워나가던 시기 반란을 통해 집권했던 세력으로 신라 왕실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문성왕릉과 함께 진흥왕릉 비슷한 규모의 작은 봉분을 쌓아 왕릉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석물과 십이지신상 등으로 장식했던 이전 왕릉과는 달리 진흥왕릉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호족세력이 경주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에 왕릉을 조성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헌안왕릉(사적)>

헌안왕이 즉위하다 ( 857년 09월(음) )
헌안왕(憲安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이다 또는 우정(祐靖)이라고도 한다.. 신무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인데,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헌안왕이 죽다 ( 861년 01월29일(음) )
5년(861)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침상에 누워 위독해지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 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의 두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牝雞之晨]에 가까우니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덕성을 지녔으니, 그대들이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고, 과인이 죽더라도 또한 이름을 오래 남길[不朽]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달 29일에 죽으니,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있는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 앞 절터>

김양은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문성왕을 받들었다. 그뒤 헌안왕이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보고와 함께 신무왕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무열왕릉 옆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헌안왕이 문성왕릉과 김양의 무덤을 조성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 앞 김양의 무덤>

신라 헌안왕릉(新羅 憲安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김의정)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왕릉(眞興王陵)과 함께 선도산 (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지름 15.3m, 높이 4.3m 되는 이 능의 밑둘레에는 자연 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封土)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신무왕(神武王)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文聖王)의 뒤를 이은 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眞興 王陵考」에서 태종 무열왕릉 뒤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 4기의 고분을 진흥·진지(眞智)·문성(聖) ·헌안(憲安)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문성왕릉(사적), 신라 46대 문성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김경응)의 능이다. 문성왕은 신무왕의 아들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지방호족 세력을 견체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던 왕이다. 삼촌인 46대 헌안왕과 함께 신라 전성기를 마련한 진흥왕릉 능역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반란을 통해 민애왕을 몰아내고 집권했기 때문에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곳에 능을 마련한 것으로 보있다. 반란에 큰 역할을 했던 김양의 무덤은 태종무열왕릉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문성왕릉(사적)>

문성왕이 즉위하다 ( 839년 07월(음) )
문성왕(文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응(慶膺)이며, 신무왕(神武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청해진을 혁파하다 ( 851년 02월(음) )
13년(851) 봄 2월에 청해진(淸海鎭)을 혁파하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이 유조를 내리고 죽다 ( 857년 09월(음) )
19년(857) 가을 9월에 왕이 병이 들었다. ~ 생략 ~ ~ 7일이 지나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공작지(孔雀趾)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떄 <승정원일기>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같은 언덕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모여 있는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 앞에 있는 절터>

김양은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문성왕을 받들었다. 그뒤 헌안왕이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보고와 함께 신무왕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무열왕릉 옆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 무열왕릉 아래에 있는 김양의 무덤>

신라 문성왕릉(新羅 文聖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김경응)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眞興)·헌안왕릉(憲安王陵)과 함께 선도산(仙桃山)의 남쪽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능의 지름은 20.6 m, 높이는 5.5 m이다. 신무왕(神武王)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청해진(淸海鎭)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 眞興王陵考」에서 무열왕릉(武烈王陵)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진지(眞智)·문성 · 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진지왕릉(사적), 신라 25대 진지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김사륜/김금륜)의 능이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라 백제군을 격퇴하고 중국 남조 진(陳)과 외교관계를 맺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집권 4년만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국정을 문란하게 운영하고 황음에 빠져 폐위되었다고 한다. 귀족세력간의 대립에서 폐위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진지왕릉(사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다 ( 576년 08월(음) )
진지왕(眞智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하였다.이고,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태자(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眞智)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지왕이 죽다 ( 579년 07월17일(음) )
〔4년(579)〕 가을 7월 17일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에 왕위에 올라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579)라고 하였으나 오류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도화녀 비형랑,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삼국사기>에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경사는 진흥왕릉이 있다는 애공사(哀公寺)와 같은 사찰로 추정되어 진흥왕릉 아래에 있는 무덤을 진지왕릉으로 보고 있다.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 고분군에 있는 무덤 중 하나라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석탑이 있는 영경사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뒷편에 있는 4기의 왕릉>

OLYMPUS DIGITAL CAMERA<진지왕릉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서악동 고분군(사적)>

신라 진지왕릉(新羅 眞智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2
이 능은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김사륜/김금륜)이 모셔진 곳이다. 밑둘레 53m, 높이 3m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 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지왕은 법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거칠부(居朵大)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 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삼국유사 권 제1 제1 기이 도화녀 비형랑,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진흥왕릉(사적), 신라 24대 진흥왕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의 능이다. 진흥왕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으며, 대가야을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신라 최대 영토을 차지하였다. 점령된 지역을 순시하면서 척경비을 세웠다.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게 했으며, 화랑도를 창설하고 경주에 황룡사를 창건했다. 삼국시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진흥왕릉(사적)>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다 ( 540년 07월(음) )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이고,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부인(夫人) 김씨(金氏)로서 법흥왕(法興王)의 딸이며, 왕비는 박씨(朴氏)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攝政)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이곳에 있는 4기의 왕릉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높이 5.8 m, 지름 20 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바깥쪽에는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쌓았다. 왕릉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아래에 있는 3기의 왕릉도 이 능을 형식을 따라서 봉분을 작게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진흥왕릉>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세운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말하며, 단양 적성비(赤城碑)는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항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산에 순행하다 ( 555년 10월(음) )
〔16년(555)〕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히고 경계를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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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 진흥왕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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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 진흥왕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창녕 척경비(국보)>

SANYO DIGITAL CAMERA<단양 신라적성비(국보)>

왕릉 아래쪽에는 서악동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 절터가 있다. <삼국사기>에 왕릉들 앞에 애공사(哀公寺), 영경사(永敬寺), 공작지(孔雀趾)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석탑을 기준으로 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절터>

절터 뒷편에는 4기의 왕릉 외에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들이 있다.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 진흥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뒷편에 있는 4기의 왕릉>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진흥왕의 업적에 비해 무덤 규모가 작은편이고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의 무덤과 같은 장소라 기록되어 있어 태종무열왕릉 뒷편 서악동 고분군 중 위에서 2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서악동 고분군(사적)>

신라 진흥왕릉(新羅 眞興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 서북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지름 20m, 높이 5.8m되는 타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왕은 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漢江) 유역에 한산주(漢山州)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시하고 북한산비(北漢山碑), 황초령비(黃草嶺碑), , 마운령비(磨雲嶺碑) 등의 순수비를 세웠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 新羅眞興王 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眞興)· 진지(眞智)·문성(文聖)·헌안(憲安)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