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February 2022

경주 내물왕릉(사적), 신라 17대 내물왕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의 능이다. 내물왕은 김씨로서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내물왕 재위기간 동안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진한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차례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나 말년에 왜와 가야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여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나 고구려와 북조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물왕 이후 김씨에 의한 독점적인 왕위계승이 이루어 졌으며 왕의 명칭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삼국유사>에 왕릉은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내물왕릉(사적)>

나물이사금이 즉위하다 ( 356년 04월(음) )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이 즉위하였다. 성(姓)은 김(金)이고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角干) 말구(末仇)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비(妃)는 김씨(金氏)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흘해(訖解)가 죽고 아들이 없어서 나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말구와 미추이사금은 형제이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왜인을 독산에서 크게 물리치다 ( 393년 05월(음) )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였다. 〔왜인을〕 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나물이사금이 죽다 ( 402년 02월(음) )
47년(402) 봄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무덤은 높이 5.3 m, 지름 22 m의 원형봉토무덤이다. 내물왕 시기 신라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일반적이나 무덤의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어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황남대총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내물왕릉>

OLYMPUS DIGITAL CAMERA<내물왕릉이 있는 월성 아래 황남동 고분군>

신라 내물왕릉(新羅 奈勿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교동 14
이 능은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을 모신 곳으로 대릉원의 남쪽이자 월성(月城)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능은 밑둘레 68m, 높이 5.8m, 지름 22m 정도로 흙을 둥글게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조금 큰 돌이 튀어나와 있고 깎여 나간 봉토 밑으로 돌무지가 조금 드러나 있다. 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내물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외교와 국방에 힘썼으며, 고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릉이 “첨성대(星) 서남(西南)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황남동 고분군<내물왕릉이 있는 경주 황남동 고분군>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이다.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 무덤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쌍이다. 주고리, 중간식, 마감장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 귀걸이이다. 귀에 거는 부분인 주고리는 굵게 만들었으며 중간식에는 이파리 모양의 장식이 매달이 있다. 마감장식는 펜촉모양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경주식 태환이식 형태를 하고 있는데 제작기법과 조형미가 우수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1-20220215<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3-20220215
<왼쪽편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5-20220215
<옆에서 본 모습>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6-20220215
<오른편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2-20220215<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오동 고분군 52호 무덤 부근>

<출처>

  1.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3.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황오동 고분군

경북 경주시에 있는 대릉원(大陵園) 중 황오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일제강점기에 70여기의 무덤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10기 정도가 봉분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후 도로를 개설하거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많은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대릉원에 무덤에 비해 봉분의 규모는 작지만 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3~4세기부터 5세기까지 경주지역 신라 무덤들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오동 고분군을 대표하는 39호 무덤>

황오동 고분군은 대릉원 동쪽 주택가였던 쪽샘지구와 경주도심과 박물관을 연결하는 대로인 원화로 양쪽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경주 황오동고분군_<경주 대릉원 황오동 고분군>

황오동 고분군 중 발굴 조사된 무덤은 1호, 4호, 5호, 16호, 33호분 등으로 경주도심과 경주박물관을 연결하는 도로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구도심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다양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오동 고분군 3호 무덤>

3호 무덤은 경주 도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볼 수 있는 무덤으로 신라 고분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무덤 뒷편 봉분>

일제강점기에 신라고분을 조사하면서 무덤에 번호를 부여했는데 1번부터 5번까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4호 무덤과 5호 무덤은 도로를 개설하면서 발굴조사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도로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곱은옥 달린 유리 목걸이(6세기, 황오동 5호 무덤),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6세기, 황오동), 곱은옥달린 유리 장신구(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유리목걸이>

OLYMPUS DIGITAL CAMERA<금구슬(6세기, 황오동 5호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팔찌(6세기, 황오동 5호무덤), 금팔찌(5세기, 황남대총)>

쪽샘지구는 대릉원 동쪽편 일대에 있던 주택가를 말한다. 2007년 이후 국가에서 이 지역을 매입하여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고분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조사과정에서 200여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주택가였던 이곳은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무덤 안쪽으로 보이는 쪽샘지구 발굴, 조사 현장>

OLYMPUS DIGITAL CAMERA<멀리 보이는 39호 무덤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보이는 39호 무덤과 공개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4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를 진행중인 38호, 37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을 조성 중인 38호, 3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39호 무덤 옆 33호, 34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중인 44호 무덤 안쪽>

OLYMPUS DIGITAL CAMERA<51호, 52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으로 보이는 언덕>

황오동 52호 무덤은 194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는데  금장식 작은칼, 금도금 은팔찌,  금귀걸이(보물), 금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1-20220215
<황오동 52호 무덤 출토 유물, 1.금장식 작은칼, 2. 금도금 은팔찌, 3. 금귀걸이 4. 금귀걸이>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4-20220215<황오동 금귀걸이(보물)>

OLYMPUS DIGITAL CAMERA<14호, 15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 <금귀걸이, 5세기, 황오동 1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뒷편 45호, 46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에 있던 주택들, 15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골목길>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옛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가운데서 본 대릉원 입구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 입구 계림로에서 쪽샘지구로 들어가는 골목길>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2-20220215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1932년 발굴, 신라 5세기>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3-20220215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1962년 발굴, 신라 5세기>

 월성로 고분군은 1985년 도로 주변 하도도 정비공사 중 발견된 삼국시대 무덤이다. 4 ~ 6세기 신라 왕족 및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대릉원 동쪽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56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덧덜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 형태가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걸이(4~5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4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4세기, 월성로 가-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6세기, 노서동 138호 무덤), 금귀걸이(6세기, 월성로 가-5-1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제드리개(4~6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금목걸이>

경주 황오리 고분군, 사적, 경북 경주시 황오동 325
이 곳 황오동에는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고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10여 기에 이른다. 이 무덤들은 인접 지역에서 발굴된 무덤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주로 4~5세기경의 왕족 또는 귀족을 묻은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20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특별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미추왕릉 지구

경북 경주시에 있는 대릉원(大陵園) 중 미추왕릉 주변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의 무덤이 대릉(大陵)에 있다고 하여 대릉원(大陵園)이라 불렸으며 1973년에 공원으로 조성된 지역이다. 이곳에는 신라 고분을 대표하는 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20여기의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이 있으며 봉분이 남아 있는 많은 무덤들이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신라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 대부분이지만 구덩식돌덧널무덤과 독무덤 등 여러 형식의 무덤이 섞여 있다. 주변 황오동, 노동동, 노서동, 인왕동 고분들과 시기적, 지리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어 대릉원으로 통합하여 재지정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을 대표하는  황남대총과 주변 무덤들>

경주 대릉원에 있는 무덤들은 월성 아래에 있는 내물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노서동까지 연결되어 조성되었으며 이후 왕릉은 서악동으로 옮겨 조성된다. 도심이었던 주변지역과는 달리 대릉원 일대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국가 공원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주민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지구_<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지구>

1973년 대릉원을 공원으로 조성할 때 담장부지에서 많은 무덤들이 발굴, 조사되었다. 무덤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었으며 구덩식돌덧널무덤과 독널무덤들도 섞여 있었다. 도기 서수형 명기(보물), 상감 유리구슬(보물), 뿔잔과 잔받침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입구>

대릉원 입구에서 미추왕릉 사이의 담장을 따라 이어진 숲길 주변은 많은 무덤들이 발굴, 조사된 곳으로 미추왕릉지구 C, D구역으로 분류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지구 C, D 구역>

미추왕릉 부근 무덤에서 출토된 도기로 만든 명기(明器)이다.  거북모양의 몸을 하고 있으며, 머리와 꼬리는 용모양이다. 머리는 S자형으로 높이 들고 있고 목덜미, 등, 꼬레 뿔이 붙어 있다. 몸통은 비어있고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있고 엉덩이에 밥그릇 모양의 주입구(注入口)가 있어 주전자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도기 서수형 명기(보물)>

미추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길이 24 cm, 상감유리옥 지름 1.8 cm의 옥 목걸이다. 구슬에는 물속을 헤엄치는 오리 16마리와 두 사람의 얼굴이 아주 세밀하게 상감되어 있다. 상감유리구슬은 서아시아나 지중해에서 유행했던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신라의 상감유리구슬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직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
<상감유리목걸이(보물), 경주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뿔잔과 잔받침대, 5~6세기, 미추왕릉 C지구 7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사적)>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 ~ 284년)은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후예로 김씨 중 처음 왕위에 올랐다. 경주 대릉원에 있는 왕릉 중 큰 규모의 무덤으로 높이 12.4 m, 지름 15.7 m 정도이다. 경주 김씨 시조에 준하는 위상을 갖고 있는 무덤을 조선시대 이후 성역화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숭혜전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미추왕릉>

미추왕릉을 지나면 길 옆 양쪽에 큰 규모의 무덤 5기를 볼 수 있으며 미추왕릉 뒷편에 작은 무덤들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서쪽편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연결되는 길>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옆 105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옆 103호, 105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3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1호 무덤>

101호 무덤을 지나면 중간 규모의 무덤인 99호 무덤이 있고 안쪽에 황남대총을 비롯한 무덤들이 모여 있다. 황남대총 서쪽편 모서리에 천마총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마총 앞 99호 무덤>

경주 대릉원 155호 무덤인 천마총(天馬塚)은 1973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가 파악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금관과 관장식, 금제허리띠,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天馬)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라 부른다. 무덤은 높이 12 m, 바닥지름 47 m으로 대릉원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무덤이다.

SANYO DIGITAL CAMERA<155호 무덤인 천마총>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천마총>

천마총 장니 천마도(障泥 天馬圖,국보)는 1973년 황남동고분 155호분에서 출토되었다. 그림은 말의 안장 안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이다. 가운데에는 흰색으로 천마가 그려져 있으며, 테두리에는 여러색의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5~5세기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신라에서 그려진 그림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말다래(天馬塚障泥), 6세기, 경주 천마총, 복제품>

천마총금관
<천마총 금관(국보)>

천마총_금제_허리띠
<천마총 금제허리띠(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천마총 관모(국보)>

OLYMPUS DIGITAL CAMERA<새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 금제관식(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천마총 금제관식(보물)>

천마총 목걸이(보물)는 내부 관(棺)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 있던 것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화려한 장식구이다. 목걸이는 6줄로 이어져 있는데 좌우와 가운데에는 큰 굽은 옥이 매달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마총 목걸이(보물)>

OLYMPUS DIGITAL CAMERA<봉황장식 큰칼(보물621호)과 큰칼(6세기, 천마총)>

SANYO DIGITAL CAMERA<천마총 앞에서 보이는 황남대총>

경주 대릉원 98호 무덤인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길이 120 m의 거대한 쌍분이다. 먼저 조성된 남분이 왕의 무덤이며, 나중에 덧붙여진 북분은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목재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조가구를 먼저 설치하고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북분에서는 금관, 남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한 수많은 껴묻거리들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고분 중에서 그 수량이 많으면서 수준도 높다.

SANYO DIGITAL CAMERA<98호 무덤인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은  높이 17.2 cm, 지름 16.6 cm 크기로 머리띠 위에 3개의 가지가 있는 장식이 있다. 가운데에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은판을 붙였으며 좌우에는 깃털이 있는 반달모양의 은판을 붙였다. 신라 관모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보물631호-01-20200212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은제관모, 5세기,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관꾸미개, 금, 삼국시대 5세기, 황남대총, 보물>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보물)>

OLYMPUS DIGITAL CAMERA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꾸미개, 5세기, 경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보물),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큰칼, 황남대총 남분>

SANYO DIGITAL CAMERA<은제말안장꾸미개와 목심, 황남대총 남분>

국보193호-01-20200212
<봉황모양유리병, 경주 황남대총 남분,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은 높이 27.5 cm이며, 드리개는 길이 13~ 30.3 cm이다.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삼단으로 쌓아 올린 나무모양을 3개 두고 있으며, 뒷쪽에는 사슴뿔모양을 하고 있는 장식 2개을 두고 있다.

국보191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은제관식(보물)>

국보192호01-20200212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국보)>

보물623호-01-20200212<팔찌(보물)>

보물623호-02-20200212<반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황남대총 북분), 금제 드리개(황남대총 북분)>

보물624호-02-20200212<유리잔, 경주 황남대총 북분, 삼국시대(신라) 6세기, 보물>

보물627호-01-20200212<황남대총 북분 은잔(보물)>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보물)>

OLYMPUS DIGITAL CAMERA<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토기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뒷편 연못>

황남대총 앞으로는 쌍분 형태인 97호 무덤과 95호 무덤이 있고 동쪽편에 중간 규모의 93호, 92호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97호, 95호 무덤과 미추왕릉 사이는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앞 97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과 98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97호 무덤, 쌍분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95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황남대총 동쪽편에 있는 93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97호 무덤 앞 광장과 100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광장 서쪽편에 있는 100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3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미추왕릉>

SANYO DIGITAL CAMERA<미추왕릉 뒷편 108호 무덤>

SANYO DIGITAL CAMERA<108호 무덤>

1973년 대릉원 미추왕릉지구를 유적 공원화하는 공사를 하면 옛 경주시청에서 계림으로 연결되는 도로 바깥에 있던 90호 무덤이 공원에 포함되면서 계림로 도로공사가 있었는데 이때 많은 무덤들이 확인되었으며 14호 무덤에서 계림로보검(보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90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계림로>

계림로 보검(보물)은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출토된 길이 36 cm의 칼이다. 철제 칼집과 칼은 녹슬어 남아 있지 않고 금으로 된 장식만 남아 있다. 자루 끝부분은 골무처럼 생겼는데 가운데 붉은 마노를 박았다. 가운데에는 있는 반원형 돌출부는 칼을 허리에 매달기 위한 장치이다. 금알갱이를 붙인 금판의 내부에 붉은 석류석과 유리를 넣었다. 이런 형태의 칼은 동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유럽이나 중동지방에서 발견되는 형태로 당시 동,서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림로 보검, 보물,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5세기>

미추왕릉지구 계림호 30호 무덤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신라 토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높이 34 cm, 윗부분 지름 22.4 cm로 큰 편이며, 위에서 아래로 한번에 5개의 선을 그었고 그 선 사이에 동심원을 새기고 개구리.새.거북이.사람 등의 토우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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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장식항아리 (국보), 5세기, 경주 미추왕릉지구>

경주 황남리 고분군, 사적, 경북 경주시 황남동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 m, 높이 12.7 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 m, 동서길이 80 m, 높이 23 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20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특별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미추왕릉(사적), 신라 13대 미추왕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에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 ~ 284))의 능이다. 미추왕은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후예로 김씨 중 처음 왕위에 올랐다. 12대 첨해왕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했다. 경주 대릉원에 있는 왕릉 중 큰 규모의 무덤으로 높이 12.4 m, 지름 15.7 m 정도이다. 경주 김씨 시조에 준하는 위상을 갖고 있는 무덤을 조선시대 이후 성역화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숭혜전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미추왕릉(사적)>

미추이사금이 즉위하다 ( 262년 01월(음) )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어떤 글에서는 미조(味照)라 하였다. 성은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박씨는 이칠갈문왕(伊柒葛文王)의 딸이고, 왕비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은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는 계림(鷄林)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脫解王)이 거두어 궁중에서 기르다가, 나중에 대보(大輔)에 임명하였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바로 미추의 아버지이다. 〔전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미추이사금이 죽다 ( 284년 10월(음) )
〔23년(284)〕 겨울 10월에 왕이 돌아가셔서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이서고국이 쳐들어왔으나 신비한 군사들의 도움으로 물리치다 ( 297년 01월(음) )
14년(297) 봄 정월에 지량(智良)을 이찬(伊湌)에 임명하고, 장흔(長昕)을 일길찬(一吉湌)에 임명하고, 순선(順宣)을 사찬(沙湌)에 임명하였다.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우리나라가 많은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하였다. 문득 신비한 병사들이 〔도와주러〕 왔는데,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해 물리쳤는데, 그 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사람들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음병(陰兵)을 보내 싸움을 도와주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봉분>

미추왕은 경주 김씨 중 처음 왕위에 올라 시조에 준하는 위상을 갖는다. 무덤 앞에는 유교식 제사를 올리기 위한 혼유석이 놓여 있으며 왕릉 주위에 담장이 둘러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왕릉 앞에 놓여진 혼유석과 담장>

숭혜전은 경주 김씨 중 처음으로 왕이된 13대 미추왕과 삼국통일을 이룬 30대 문무무왕과 마지막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모신 사당이었으나 구한말 고종 때 사당을 크게 짓고 미추왕과 문무왕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숭혜전>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지구<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지구>

신라 미추왕릉(味鄒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황남동
이 능은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 ~ 284)을 모신 곳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높이 12.4 m, 지름 56.7 m로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이며,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陵)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무는 혼유선(魂遊石)이 있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