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Archives: February 27, 2022

경주 내물왕릉(사적), 신라 17대 내물왕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의 능이다. 내물왕은 김씨로서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내물왕 재위기간 동안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진한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차례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나 말년에 왜와 가야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여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나 고구려와 북조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물왕 이후 김씨에 의한 독점적인 왕위계승이 이루어 졌으며 왕의 명칭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삼국유사>에 왕릉은 첨성대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내물왕릉(사적)>

나물이사금이 즉위하다 ( 356년 04월(음) )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이 즉위하였다. 성(姓)은 김(金)이고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角干) 말구(末仇)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비(妃)는 김씨(金氏)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흘해(訖解)가 죽고 아들이 없어서 나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말구와 미추이사금은 형제이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왜인을 독산에서 크게 물리치다 ( 393년 05월(음) )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였다. 〔왜인을〕 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나물이사금이 죽다 ( 402년 02월(음) )
47년(402) 봄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무덤은 높이 5.3 m, 지름 22 m의 원형봉토무덤이다. 내물왕 시기 신라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일반적이나 무덤의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어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황남대총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내물왕릉>

OLYMPUS DIGITAL CAMERA<내물왕릉이 있는 월성 아래 황남동 고분군>

신라 내물왕릉(新羅 奈勿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교동 14
이 능은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을 모신 곳으로 대릉원의 남쪽이자 월성(月城)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능은 밑둘레 68m, 높이 5.8m, 지름 22m 정도로 흙을 둥글게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조금 큰 돌이 튀어나와 있고 깎여 나간 봉토 밑으로 돌무지가 조금 드러나 있다. 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내물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외교와 국방에 힘썼으며, 고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릉이 “첨성대(星) 서남(西南)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황남동 고분군<내물왕릉이 있는 경주 황남동 고분군>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이다.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 무덤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쌍이다. 주고리, 중간식, 마감장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 귀걸이이다. 귀에 거는 부분인 주고리는 굵게 만들었으며 중간식에는 이파리 모양의 장식이 매달이 있다. 마감장식는 펜촉모양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경주식 태환이식 형태를 하고 있는데 제작기법과 조형미가 우수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1-20220215<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보물)>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3-20220215
<왼쪽편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5-20220215
<옆에서 본 모습>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6-20220215
<오른편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물) 02-20220215<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오동 고분군 52호 무덤 부근>

<출처>

  1.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3.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대릉원(사적) 황오동 고분군

경북 경주시에 있는 대릉원(大陵園) 중 황오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일제강점기에 70여기의 무덤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10기 정도가 봉분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후 도로를 개설하거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많은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대릉원에 무덤에 비해 봉분의 규모는 작지만 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3~4세기부터 5세기까지 경주지역 신라 무덤들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오동 고분군을 대표하는 39호 무덤>

황오동 고분군은 대릉원 동쪽 주택가였던 쪽샘지구와 경주도심과 박물관을 연결하는 대로인 원화로 양쪽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경주 황오동고분군_<경주 대릉원 황오동 고분군>

황오동 고분군 중 발굴 조사된 무덤은 1호, 4호, 5호, 16호, 33호분 등으로 경주도심과 경주박물관을 연결하는 도로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구도심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다양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황오동 고분군 3호 무덤>

3호 무덤은 경주 도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볼 수 있는 무덤으로 신라 고분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무덤 뒷편 봉분>

일제강점기에 신라고분을 조사하면서 무덤에 번호를 부여했는데 1번부터 5번까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4호 무덤과 5호 무덤은 도로를 개설하면서 발굴조사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도로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곱은옥 달린 유리 목걸이(6세기, 황오동 5호 무덤),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6세기, 황오동), 곱은옥달린 유리 장신구(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유리목걸이>

OLYMPUS DIGITAL CAMERA<금구슬(6세기, 황오동 5호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팔찌(6세기, 황오동 5호무덤), 금팔찌(5세기, 황남대총)>

쪽샘지구는 대릉원 동쪽편 일대에 있던 주택가를 말한다. 2007년 이후 국가에서 이 지역을 매입하여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고분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조사과정에서 200여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주택가였던 이곳은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무덤 안쪽으로 보이는 쪽샘지구 발굴, 조사 현장>

OLYMPUS DIGITAL CAMERA<멀리 보이는 39호 무덤과 황남대총>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보이는 39호 무덤과 공개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4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를 진행중인 38호, 37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을 조성 중인 38호, 3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39호 무덤 옆 33호, 34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중인 44호 무덤 안쪽>

OLYMPUS DIGITAL CAMERA<51호, 52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으로 보이는 언덕>

황오동 52호 무덤은 194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는데  금장식 작은칼, 금도금 은팔찌,  금귀걸이(보물), 금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1-20220215
<황오동 52호 무덤 출토 유물, 1.금장식 작은칼, 2. 금도금 은팔찌, 3. 금귀걸이 4. 금귀걸이>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4-20220215<황오동 금귀걸이(보물)>

OLYMPUS DIGITAL CAMERA<14호, 15호 무덤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 <금귀걸이, 5세기, 황오동 1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뒷편 45호, 46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에 있던 주택들, 15호 무덤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골목길>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옛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쪽샘지구 가운데서 본 대릉원 입구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대릉원 입구 계림로에서 쪽샘지구로 들어가는 골목길>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2-20220215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1932년 발굴, 신라 5세기>

경주 대릉원 황오동고분군 03-20220215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1962년 발굴, 신라 5세기>

 월성로 고분군은 1985년 도로 주변 하도도 정비공사 중 발견된 삼국시대 무덤이다. 4 ~ 6세기 신라 왕족 및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대릉원 동쪽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56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덧덜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 형태가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걸이(4~5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4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4세기, 월성로 가-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6세기, 노서동 138호 무덤), 금귀걸이(6세기, 월성로 가-5-1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금제드리개(4~6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금목걸이>

경주 황오리 고분군, 사적, 경북 경주시 황오동 325
이 곳 황오동에는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고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10여 기에 이른다. 이 무덤들은 인접 지역에서 발굴된 무덤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주로 4~5세기경의 왕족 또는 귀족을 묻은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20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특별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6.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