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May 2022

통영 세병관(국보), 삼도수군통제영 객사

경남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세병관(洗兵館, 국보)이다. 조선후기 해군본부격인 삼도수군통제영 객사 건물이다. 건물 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60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수군 선박이 정박했던 통영항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건물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有大)가 쓴 글씨이다. 경복궁 경회루(국보), 여수 진남관(국보)와 함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로 역사성과 건축적인 측면에는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통영 세병관 (국보) 03-20220221<통영 세병관(국보)>

건물은 앞면 9칸, 옆면 5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단층건물이다. 궐패를 모시는 정청과 좌우 익랑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관아 객사와는 달리 전체가 개방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통제영 휘하 장수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수군훈련을 지휘하기 위한 용도인 것으로 보인다.

통영 세병관 (국보) 02-20220221<정면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04-20220221<옆쪽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01-20220221<남서쪽 모서리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26-20220221<세병관 현판>

건물 자체가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기단 2단으로 높지 않은편이다.  기단 윗편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자연석 주춧돌 위에 민흘림 기둥을 올려 놓고 있다. 기둥 위에 올려진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익공계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18-20220221<건물 기단>

통영 세병관 (국보) 12-20220221<기둥을 올려 놓은 주춧돌>

통영 세병관 (국보) 14-20220221<아래쪽을 굵게 하여 만든 민흘림기둥>

통영 세병관 (국보) 10-20220221<지붕을 받치는 공포>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면이 없이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뒷편에는 높은 단을 설치하여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앞뒤쪽 1칸씩 폭을 좁게 하여 통로로 사용되는 퇴간역할을 하고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21-20220221<세병관 내부>

통영 세병관 (국보) 05-20220221<앞쪽에서 본 건물 내부>

통영 세병관 (국보) 20-20220221<내부 천장>

통영 세병관 (국보) 07-20220221<뒷편 통로 역할을 하는 퇴간>

통영 세병관 (국보) 09-20220221<내부 공간을 분리해 주는 벽면역할을 하는 분합문>

가운데에는 45 cm 정도로 단을 높게 만들어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했다. 일반적인 객사의 정청에 해당하는 공이다. 위쪽에 홍살을 세우고 분합문을 두어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천장은 다른 곳과는 달리 소란반자를 설치했다. 뒷편에는 문인도가 그려져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25-20220221<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공간>

통영 세병관 (국보) 24-20220221<천장에 설치된 소란반자>

 통영 세병관 (국보) 08-20220221<뒷편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06-20220221<옆에서 본 모습>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웅장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19-20220222<남쪽편 언덕에서 본 삼도수군통제영과 세병관>

통영 세병관 (국보) 16-20220221<세병관 출입문>

통영 세병관 (국보) 17-20220221<세병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통영 앞바다>

세병관(洗兵館), 국보, 경남 통영시 세병로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客舍)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곳에 통제영을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제35대 통제사 김응해(金應海)가 1646년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지었으며, 제194대 통제사 채동건(蔡東健)이 1872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 단층 팔작집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 기둥, 2익공 양식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시설한 것이나, 안쪽의 중앙 3칸만은 한 단을 올려 전패단(殿牌壇)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로 꾸민 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하였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세병관(洗兵館)>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有大)가 쓴 글씨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_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이다. 조선후기 정조 때(1782년) 국왕의 명으로 창덕궁 규장각 부속 건물인 이문원 앞에서 설치되었던 측우대 이다.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남아 있는 측우대 중 외형이나 새겨진 글씨 등이 매우 뛰어나다. 바깥에는 비를 기원하는 뜻으로 세종 때 예를 본받아 창덕궁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정조 6년(1782), 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측우대에 새겨진 글자>

“측우기는 세종24년(1442)에 시작되었다. 구리로 만들고 높이가 1차5치이며 지름이 7치이다. 서운관과 각 도의 고을에 두어 비올 때마다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였다. 선왕이신 영조 46년(1770)에 옛날 제도를 본떠서 창덕궁, 경희궁과 팔도와 한성부, 개성부에 만들어 두었다. …. 정조6년(1782)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가물어서 임금께서 예복을 갖추고 저녁이 지나도록 찬 곳에서 제사를 올리시고, 날이 샌 뒤에 옥문 밖에 대가를 머무르고 경한 범죄자를 모두 석방하였다. 이에 도성 안 선비와 부인들이 우러러 보고 감격해 하였다. 해가 지기도 전에 큰 비가 밤까지 내렸으니 우리 성상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 비의 양이 미흡하다 여기셔 내각에 분부하여 측우기를 창덕궁 이문원 뜰에 설치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이내 내리는 비에 흡족해 하시고 신에게 이 글을 쓰라 하시니 그 기쁨을 기념한 것이다. ….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들의 걱정과 기쁨이 얽혀 있으니 신 등이 감히 공손하게 지키고 삼가 기다리지 않으랴…” 심염조 지음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이문원(摛文院)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 어필 등을 보관하는 기관이다. 정조는 창덕궁 금호문 안쪽에 규장각 건물을 짓고 정청에 ‘摛文之院(이문지원)’을 써서 붙였다. 이 측우기는 이문원 앞 마당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국보) 06-20220504<이문원 측우대 위치>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규장간 정청 건물>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네 측면에는 가뭄이 극심해지자 정조임금이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대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 창덕궁에 두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황동 측우기는 보물561호 금영측우기를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통영 해저터널

경남 통영시 당동에 있는 통영 해저터널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건설된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 통영 도심과 미륵도를 연결하는 터널이다. 일제강점기에 선박을 통행을 위해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지협에 통영운하를 개설하면서 같이 건설되었다.  터널은 길이 483 m, 폭 5 m로 해수면 아래 10 m 정도의 깊이에 있다. 광복 이후 통영운하를 연결하는 다리가 개설되면서 지금은 보행자 통행만 가능하며 사실상 관광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통영 해저터널 08-20220220<통영 해저터널>

터널 입구에는 용문달양(龍門達陽)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통영군수가 지은 것이라 한다. 터널 입구에는 일제강점기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왕대공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진 복도형태로 구조물로 연결되어 있다.

통영 해저터널 01-20220220<통영 도심 터널 입구>

통영 해저터널 16-20220220<터널로 연결되는 통로>

통영 해저터널 13-20220220<안쪽에서 본 통로>

터널은 통영운하를 개설할 때 양쪽에 방파제를 막고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터널을 만든뒤 방파제를 철거하여 바닷물을 통과시켜 해저터널을 완공하였다. 해방 이후 통로 양쪽에 상수도관 등을 묻은 구조물이 추가되면서 폭이 좁아졌다.

통영 해저터널 14-20220220<터널 입구>

통영 해저터널 12-20220220<터널 내부>

해저터널이 보행자 공간으로 바뀌면서 관광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터널 중간에는 해저터널과 통영을 소개하는 공간이 있다.

통영 해저터널 10-20220220<터널 중간>

통영 해저터널 09-20220220<미륵도로 이어지는 터널>

통영 해저터널 07-20220220<미륵도 출구 부근>

통영 해저터널 06-20220220<미륵도 출구>

통영 해저터널 05-20220220<나가는 길>

통영 해저터널 03-20220220<일제강점기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목조구조물>

통영 해저터널 02-20220220<미륵도 방면 출구>

통영 운하는 일제가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 지협을 준설하여 건설한 것으로 길이 1,420 m, 너비 42 ~ 55 m, 간조수심 3.1 m 규모이다. 해저터널과 함께 1932년에 완공되어 부산과 여수 사이 연안항로에 이용되고 있다. 원래는 너비 10 m 정도의 좁은 물길로 간조시에는 걸어서 지나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선들이 이곳 물길을 더 크게 내어 도망치려 했다고 하여 ‘판데목’이라 불렀다.

통영 해저터널 15-20220220<해저터널 위 통영운하>

통영 해저터널 11-20220220<통영운하>

통영 해저터널, 국가등록문화재
통영 해저터널은 1932년 만들어진 동양 최초의 해저 구조물로서,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는 터널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의 이주가 본격화됨에 따라 두 지역 간 거리 단축을 위해 만들어 졌으며,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해수면 아래 최대 10m 깊이 규모의 철근콘크리트조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공사의 시행이 일제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의 인력과 자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위키백과, 2022년

관상감 측우대 (보물)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관상감 측우대(보물)이다.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으로 조선시대 천문관측 기관이었던 관상감에 있었다. 높이 87.6 cm의 직육면체를 하고 있으며 위에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직경 16.5 cm, 깊이 4.7 cm의 구멍이 있다. 조성내력을 적은 글자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측우제도가 시행된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복궁 내 옛 관상감터에 남아 있던 것을 매동초등학교를 이전할 때 같이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관상감 측우대 (보물) 01-20220504<관상감측우대, 보물, 세종 23년(1441)>

관상감 측우대 (보물) 02-20220504<옆에서 본 모습>

관상감 측우대는 강우량을 측정하던 대석(臺石)으로, 현재 측우기는 남아있지 않다. 세종 23년(1441) 서운관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에 따라 제작 시기를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으나, 명문이 없어 제작시기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동궐도의 수강재에 놓인 허리가 들어간 직육면체 측우대와 흡사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측우대 윗면에 측우기를 놓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리가 직경 17.2cm 깊이 6cm의 규모로 파여 있다. 1970년대 서울매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되었고, 1978년 기상청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매동초등학교는 1934년까지 경복궁 내 대루원(待漏院) 금부직방(禁府直房) 터에 위치하였는데, 이곳은 고종초에 경복궁을 재건한 이후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던 관상감이 이전한 곳이다. 이후 학교를 현재 위치로 이전할 때 교정에 있던 측우대 유물도 함께 가져왔다고 전한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이다. 조선후기 영조 때 측우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전국 감영에 설치된 측우대 중 하나이다. 높이 46 cm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상감영 선화당 앞 마당에 있던 것을 총독부관측소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강수량을 측정하던 측우기는 남아 있지 않으나 공주 충청감영에 있던 측우기와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1-20220504<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영조 46년(1770)>

‘측우대건륭경인오월조(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글자를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2-20220504<옆에서 본 모습>

영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이 유물은 실록의 규격를 따르고 있어 당시 제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3-20220504<측우기 설치에 관한 기록이 있는 영조실록>

팔도와 양도에 측우기를 만들어 우수의 다소를 살필 것 등을 명하다.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치계(馳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곧 옛날에 일풍 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측우기는 석대(石臺)를 만들어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宮闕)과 두 서운관(書雲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이며, 석대(石臺)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126) 의 신제척(新製尺)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規式)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4-20220504
<조선후기 헌종 때(1837년)에 제작되어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

OLYMPUS DIGITAL CAMERA<측우기가 설치되었던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건물 앞에 측우대(복제품)을 볼 수 있다.>

대구경상감영측우대
후면에 ‘측우대,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듦(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기상학자였던 와다 유지의 기록에 따르면, 본 측우대는 경상감영 선화당 뜰에 있다가 총독부 관측소로 옮겨졌다고 하며 이후 기상청에서 소장해왔다.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영조의 대에 다시 실행되었는데, 본 측우대는 이때 재건된 측우 제도를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의의가 있다. 영조는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자, 너비는 8치, 석대 위 둥그런 구멍의 깊이는 1치로 정했다. 포백척의 1자가 약 46cm인데 현재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높이가 46cm이다. 이를 통해 본 측우기는 영조 대의 측우제도가 반영되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