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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오량성, 오양역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

경남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에 있는 오량성(烏良城)이다. 거제도 입구에 있는 오양역을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조선초 연산군 때(1500년)에 쌓은 성이다.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驛)을 지키기 위해 쌓았는데 일반적인 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성의 축성방법은 인근 읍성인 사등성, 고현성과 비슷하다. 오량역은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말에 폐지되었다가 조선초에 고성 읍치 부근에 있던 송도역과 거제현 읍치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편의를 위해 견내량(거제대교) 부근에 있는 현재의 위치에 역을 다시 설치하였다.

거제 오량성 01-20220221<거제 오량성>

지현사 손이순의 청에 따라 거제현의 오양역을 복구하다.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17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성의 둘레는 1,172 m, 성벽의 높이는 2.61 m, 성벽의 폭은 5 m 정도이다.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방어를 위해 모서리와 성문 옆에는 치성이 있다. 북쪽과 서쪽은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으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허물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북동쪽을 흐르는 하천을 천연해자로 하고 성벽 바깥에 해자를 파서 방어를 보완하였다.

거제 오량성<거제 오량성>

거제 오량성 31-20220221<둔덕기성(사적)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량성과 고성 앞바다>

북동쪽과 북서쪽 성벽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데 큰돌로 쌓은 석축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서리와 성문 옆에 방어를 위한 치성이 있다.

거제 오량성 03-20220221<서문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04-20220221<서문 북쪽 성벽(위)>

거제 오량성 14-20220221<서문 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02-20220221<서문 부근 치성>

거제 오량성 08-20220221<위에서 본 치성>

거제 오량성 10-20220221<치성 남쪽 성벽(위)>

거제 오량성 13-20220221<치성 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11-20220221<서문 부근 허물어진 성벽(위)>

거제 오량성 12-20220221<서문 부근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06-20220221<오량성 내부 마을>

거제 오량성 24-20220221<북서쪽 모서리 치성터와 서쪽 성벽>

거제 오량성 20-20220221<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23-20220221<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15-20220221<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19-20220221<허물어진 북문 부근 성벽>

거제 오량성 17-20220221<북문 옆 치성터>

거제 오량성 18-20220221<북문 동쪽 성벽(안쪽)>

오량성이 있는 곳은 거제도의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이 있었던 견내량(거제대교)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역(驛)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 규모의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량성 남쪽에는 견내량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통일신라 때 쌓은 둔덕기성(사적)이 있다.

거제 오량성 09-20220221<오량성에서 보이는 견내량(거제대교)>

거제 오량성
거제 오량성은 연산군 6년(1500)에 역을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만든 성이다. 처음에 보를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오량성으로 발전하였다. 오량성의 역은 고려 말에 폐지되어 고성의 송도역과 합해졌다가 세종 7년(1425)에 다시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는 1,150m, 성벽 너비는 4.5m 이며, 높이 4m 정도의 성벽이 남아있다. 성의 동서남북에는 성문이 있었고, 네모진 성벽의 모퉁이와 성문 주변에는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려고 성벽을 사각형으로 돌출되게 쌓은 치성이 8곳에 설치되었다. 성벽은 아래에 받침돌을 놓고 큰 돌을 안쪽으로 약간 들여서 세워 쌓은 다음에 그 위로 작은 돌을 눕혀 쌓는 조선 전기 읍성의 형태 이다. 성 밖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해자가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17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거제 사등성, 조선초 거제현 읍치였던 읍성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에 있는 사등성(沙等城)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육지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조선초 세종 때 돌아오고 거제현 관아가 복구되면서 읍치가 되었던 읍성이다. 사등성은 해안과 너무 가까우면서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수비하기 힘든 점이 있었으며 읍성 내부도 면적이 넓지 않아 많은 주민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문종 때 관아를 인근 고현성으로 옮기면서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조선초기에 쌓았던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거제 사등성 25-20220221<거제 사등성>

성벽의 둘레는 986 m이고 높이는 6.1 m 정도이다. 동서남북으로 성벽의 길이 250m 정도인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동.서.남.북으로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그 사이에 방어를 위해 치성을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폭 20 m 정도의 해자를 파서 수비를 강화하였다.

거제 사등성<거제 사등성>

현재 사등성은 북문 주변 성벽을 발굴,조사과정을 거치면서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으며 나머지 성벽은 복원하기 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거제 사등성 24-20220221<북문 동쪽편 복원된 치성>

사등성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쪽 성벽은 당시 규정에 따라 성벽 안쪽에 낮은 계단을 두고 있으며, 서쪽 성벽은 계단 위에 다시 석축을 쌓아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복원된 성벽은  발굴조사 때 확인된 축성방식에 따라 복원하였다.

거제 사등성 23-20220221<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7-20220221<서쪽 성벽(위)>

거제 사등성 18-20220221<서쪽 성벽 (안쪽)>

거제 사등성 26-20220221<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9-20220221<북쪽 성벽(안쪽)>

사등성지의 정비.복원과 관련하여 2012년과 2014년 북쪽 성벽을 조사한 결과 계단식 내벽이 조사되었고, 2015년 서쪽 성벽 조사에서는 무너진 기존 성벽 상부에 수직에 가까운 내벽을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세종 20년(1438년)의 <축성신도>의 규정에 따라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사실과 세종 이후 내벽을 수직되게 축조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원형 보존 차원에서 구간별 발굴조사 된 수법대로 정비.복원하였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사등성은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성문 앞에 ‘ㄱ’자 형태로 옹성을 두어 방어를 보완하고 있다. 성문 사이에는 앞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두고 있다. 사등성은 조선초 쌓은 규정에 따라 제대로 쌓은 읍성으로 옹성이 조선 초기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제 사등성 04-20220221<북문 옹성>

거제 사등성 06-20220221<옹성 출입문>

거제 사등성 08-20220221<옹성에서 읍성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거제 사등성 14-20220221<성벽 위에서 본 옹성>

거제 사등성 10-20220221<옹성에서 본 서쪽 성벽>

북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성벽은 아직 보원되지 않아 복원하기 전 읍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성벽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거제 사등성 07-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2-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위)>

거제 사등성 13-20220221<북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치성>

사등성지,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이 성은 삼한시대 변진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의 왕성이었다고 하나, 증명할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조선의 <문종실록>에 의하면 고려 말엽 왜구의 침략을 당해 거창으로 피난을 갔던 거제도민이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자, 섬안의 수월리라는 곳으로 들어와 나무로 방책을 쌓고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26년(세종 8)에 거제현의 관아가 수월리에서 사등리로 옮겨지면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1448년(세종 30)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성은 거제현의 관아를 고현으로 옮길 때까지 거제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쌓은 이 성은 둘레 986 m, 높이 5 m, 폭 5 m의 규모이다. 사방에 성문을 두었는데, 이 성문에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성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완전히 엄폐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卍’형을 이루며, 성 주위에 폭 20 m의 방어용 도량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성안에 학교와 마을이 있고, 성밖은 농경지이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시대 성곽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1980년대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고 주위를 정화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고현성, 옛 거제현 읍치에 쌓았던 읍성

경남 거제시 고현동에 있는 고현성(古縣城)이다. 조선초 세종 때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육지로 피난했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거제현 관아를 복구하면서 쌓은 읍성이다. 처음에는 인근 사등면 사등리에 읍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나 사등성이 평지에 위치하고 읍치 인구를 수용하기에 좁고 식수가 부족해 현재의 위치에 다시 읍성을 쌓고 읍치를 옮겼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점령되었으며 조선후기 현종 때 읍치를 통제영과 가까운 거제면으로 옮기면 그 기능을 잃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읍성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성벽이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거제 고현성 09-20220221<거제 고현성>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둘레 921 m, 성벽 높이 4 m 규모였다고 한다. 동, 서, 남의 3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두었으며, 모서리를 비롯하여 방어에 치약한 지점에 치성을 쌓다. 읍성은 동서 600 m, 남북 300 m 정도로 배모양의 형태로 동쪽 독봉산과 서쪽 계룡산 사이를 남북으로 흐르는 고현천 주변 골짜기를 막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거제 고현성1<거제 고현성>

거제 고현셩(古縣城)
고현성은 당시 사등면 사등리에 있던 읍성(거제 사등성)에 인구가 늘어나자 문종 1년(1451)부터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단종 1년(1453) 완공한 읍성이다. 당시 성의 둘레는 921m, 높이 4m이며, 동·서·남쪽 세 방향에 성문이 설치 하였다. 성문 앞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만들어 적으로부터 성문을 완전히 둘러싸 보호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성곽 구조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이다. 고현성은 임진왜란 으로 함락되어 현종 5년(1664) 거제면으로 거제현 관아를 옮길 때까지 약 210년간 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1950~1953) 이전까지 성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고현 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지금은 600m 정도의 성벽만 남아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현재는 읍성 남서쪽 거제시청을 둘러싸고 있는 약 600 m 정도의 성벽만 남아 있다. 방어시설 중에는 옹성이 있는 북문과 4곳의 치성이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쌓은 석축성으로 조선초 쌓은 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제 고현성 03-20220221<북쪽 성벽 (바깥쪽)>

거제 고현성 32-20220221<북쪽 성벽이 시작되는 지점>

거제 고현성 04-20220221<성벽 안쪽>

거제 고현성 02-20220221<북문 옹성>

거제 고현성 05-20220221<옹성 출입문>

거제 고현성 07-20220221<옹성 내부>

거제 고현성 06-20220221<복원한 북문 문루(바깥쪽)>

거제 고현성 01-20220221<북문 문루(안쪽)>

북문을 지나면 치성이 있는 북서쪽 모서리까지 경사진 지형을 따라 성벽이 이어진다. 돌로 쌓은 석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아래쪽 성벽과는 달리 내부는 흙으로 쌓은 석축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거제 고현성 08-20220221<북쪽 성벽>

거제 고현성 12-20220221<북서쪽 모서리에 쌓은 치성>

높은 곳에 위치한 서쪽 성벽은 높이가 낮은 편이며 가운데에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두고 있다.

거제 고현성 11-20220221<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고현성 13-20220221 <서쪽 성벽 (안쪽)>

거제 고현성 16-20220221<남쪽에서 본 모습>

거제 고현성 15-20220221<북쪽 성벽에 있는 치성>

남서쪽 모서리에도 치성을 두고 있으며 남쪽 성벽에서 치성 1곳이 남아 있다.

거제 고현성 21-20220221<남서쪽 모서리 치성>

거제 고현성 22-20220221<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고현성 25-20220221<남쪽 성벽(안쪽)>

거제 고현성 26-20220221<남쪽 성벽 치성>

거제 고현성 29-20220221<남쪽 성벽 끝 부분>

거제 고현성 30-20220221<남쪽 성벽 끝 부분>

거제 고현성 31-20220221<치성>

거제현의 읍성을 가을에 고정리에 옮겨 쌓도록 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 지구(持久)하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모름지기 올 가을에 서둘러 옮겨 설치해야 하는가? 아직 2, 3년 멈추었다가 점차로 옮겨 설치해야 할 것인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거제는 바다 가운데 섬으로 바로 적이 들어오는 길에서 처음으로 대면(對面)하는 곳에 해당하여 아주 긴요하니, 올 가을에 옮겨 쌓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5월 6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옥산성, 거제현 읍치를 지키는 작은 산성

경남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옥산성(玉山城)이다. 거제현 관아가 있는 동상리 뒷편 수정봉(141m) 정상부에 쌓은 산성으로 둘레 778.5 m이다. 외형상 삼국시대에 쌓은 작은 산성처럼 보이지만 구한말 고종 때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곳에 있는 비석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1873년) 거제부사가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한 읍치를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쌓으려 했으나 조정의 허락을 받지 못해 관아 뒷편 수정봉에 산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했다고 한다. 성안에는 큰 우물과 군사업무 목적으로 지은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었던 구한말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거제 옥산성 13-20220221<거제 옥산성>

성문은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과 서문의 규모가 크고 형태도 잘 보존되어 있다. 서문은 관아가 있는 읍치와 연결되는데 약 700 m 정도 떨어져 있다.

거제 옥산성<거제 옥산성>

거제 옥산성 3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3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12-20220221<서문 내부>

동문을 들어서면 옥산성 정상부에 세워진 작은 정자가 보인다. 원래 사방을 감시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약간의 평지와 내성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낮은 성벽이 남아 있다.

거제 옥산성 01-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2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서문>

거제 옥산성 03-20220221<옥산성 내부에 있는 낮은 성벽>

거제 옥산성 02-20220221<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남쪽 성벽에는 작은 암문으로 보이는 성문이 보인다.

거제 옥산성 05-20220221<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5-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4-20220221<남쪽 성벽 아래 지역>

옥산성 동쪽편에 약간의 공간이 있으며, 군사업무를 위한 건물이나 창고 등은 동문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거제 옥산성 1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1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08-20220221<동문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06-20220221<동문 안쪽 건물터가 있는 곳>

거제 옥산성 0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동문>

거제 옥산성 14-20220221<동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옥산성 내부>

거제 옥산성 16-20220221<건물터>

2019년 도지정문화재 보수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돌로 쌓은 기단과 계단을 갖춘 초석이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높이가 약 1m정도인 기단은 처음 축조된 기단석에 덧붙여 한차례 증축한 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계단은 기단부 앞쪽에 3개가 설치되었다. 확인된 초석으로 보아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지로 규모는 길이 17.5m 너비 5.6m, 면적 98m2이다. 건물지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고, 벽의 기초부에 회백색의 점토를 발라서 미장하였으며,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출토된 기와로 보아 건물지의 축조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판단되며, 이 건물지 왼쪽에 세워져 있는 ‘옥산금성축성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 건물은 벽에 회를 발라 미장한 점, 바닥에 박석을 깐 점, 그리고 난방시설인 온돌 시설이 없는 점으로 보아 주거시설이라기 보다는 행정 또는 사무 등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옥산성 15-20220221<옥산성 정상부로 오르는 길>

옥산성 정상부에는 장대 역할을 했던 자리에 작은 정자가 있다. 정자 동쪽로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우물과 건물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옥산성 18-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17-20220221<우물>

거제 옥산성 19-20220221<발굴  현장>

거제 옥산성 23-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거제현 읍치>

거제 옥산성 26-20220221<옥산성 북쪽>

거제 옥산성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28-20220221<북쪽 성벽>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거제 반곡서원

경남 거세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반곡서원이다. 우암 송시열을 모시기 위해 조선후기 숙종 때(1705년) 창건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문인이자 대표적인 노론 학자인 김진규, 김창집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거제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거제현 관아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성격이 강한 서원인 것으로 보인다.

거제 반곡서원 01-20220221<거제 반곡서원>

반곡서원은 거제현 관아 뒷편 옥산성 중턱 경사진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외삼문, 강학공간, 제향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거제 반곡서원 09-20220221<외삼문>

거제 반곡서원 05-20220221<강당>

거제 반곡서원 02-20220221<서재>

거제 반곡서원 03-20220221<동재>

거제 반곡서원 07-20220221<내삼문>

거제 반곡서원 08-20220221<사당>

거제 반곡서원 06-20220221<고직사>

반곡서원(盤谷書院)
이 서원은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헌, 김일채, 윤명한, 허유일, 신수오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에 창건하였다. 그 후 문청공 죽천 김진규, 충헌공 몽와 김창집, 부제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 정문공 김수근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06년 거제 유림에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반곡서원유허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에 단제를 치렀다. 1971년 거제 향교의 책임자 윤병재가 서원의 복원을 발의하고 유림총회의 찬성으로 1974년 우암사를 중건하였다. 또한 인접 지역 고택 세 채를 철거하여 나온 부재로 강당을 개축하는 과정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의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록당은 추사 김정희가 군자라 칭송했던 동록 정혼성을 배향한 곳이다. 반곡서원은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