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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거제현 관아(사적)

경남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거제현 관아(사적)이다. 거제현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섬을 비웠다가 조선 초 세종 때(1423년) 피난갔던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사등면에 사등성을 쌓고 관아를 설치하였다다. 이후 지형적인 조건 등으로 읍치를 고현성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고현성이 함락되고 주요 관아건물들이 사라졌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영 겸 경사좌수영이 통영으로 옮기면서 통영과 가까우면서 방어에 유리한 현재의 위치로 관아를 옮겼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거제시의 중심이 고현성이 있는 신현읍으로 옮기면서 작은 시골 면소재지가 되었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1-20220221<거제 거제현 관아(사적)>

거제현 관아터에는 객사였던 기성관(보물)과 하급 실무자들의 업무공간인 질청이 남아 있으며, 동헌과 내아가 있던 자리에는 면사무소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객사는 구한말 이후 초등학교로, 질청은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거제현 관아는 ‘진입로-관아 건물-계룡산(수정봉)’이 남서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동헌이 객사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거제현 관아<거제현 관아 공간 배치>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2-20220221<객사 출입문>

객사인 기성관(보물)은 조선후기 현종 때 관아가 있던 고현성을 폐쇄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1665년) 지어졌다. 이후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1909년까지 관아 건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초등학교 교시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76년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해체수리과정에서 상량묵서와 상량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내력 등의 내용이 잘 남아 있다. 관아객사이지만 내부는 전체가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어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국보)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4-20220221<거제 기성관(보물)>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5-20220221<기성관 내부>

객사 마당에는 조선후기 이후 거제현에 흩어져 있는 역대 고을 수령들의 송덕비들을 모아 놓고 있다. 모두 14기의 비(碑)가 있는데 그중 6기는 철비(鐵碑)이며, 8기는 석비(石碑)이다. 다른 고을에 비해 송덕비는 많지 않은 편이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3-20220221<거제현 관아 송덕비군>

거제현 관아 송덕비군 (巨濟縣 官衙 頌德碑群)
현재의 거제면은 거제구읍(巨濟舊邑)으로, 옛 거제현의 치소(治所)가 자리하였던 곳이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조선초 거제 현민들은 거창, 진주, 영선 등지로 피난을 갔었는데 1422년(세종 4) 돌아와 사등성(沙等城)을 수축하였으나 협소하고 물이 귀해 이듬해 고현으로 옮겨 9년 만에 고현성(古縣城)을 낙성하여 거제 현아(縣衙)를 두었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되고, 1664년(현종5) 현재의 거제면으로 현아를 옮겨 조선말까지 거제부의 치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현재 거제현 관아지에 남아있는 기성관(岐城館), 질청(秩廳), 향교 유적 등은 모두 고현에서 이건한 것이다. 원 거제현 관아에는 다수의 송덕비가 있었으나 세월의 변천에 따라 대부분 산실되었고, 현존하는 14기는 향교 입구와 동상리, 서정리 등에 있던 것을 1970년 거제유림과 거제면민이 합심하여 옮겨 모은 것이다. 비들은 1974~1976년 기성관 해체 복원 작업 시 기성관 안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6기는 철비(鐵碑)이며, 8기는 석비(石碑)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 거제의 역사를 반영하는 기념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객사인 기성관 앞쪽에는 하급 실무자들이 사용했던 관아 건물이 질청(秩廳)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건물은  ‘ㄷ’자형인데 27칸으로 지방관아 건물 중에는 큰 편이다. 건물은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ㅉ고에 작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가 넓은 것으로 볼 때 회의 등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6-20220221<질청 출입문>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ㄷ’ 형태를 하고 있는데 원래는 ‘ㅁ’자형 이었다고 한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8-20220221<질청>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9-20220221<대청마루>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07-20220221<작은 마루와 온돌방이 있는 왼쪽 날개채>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10-20220221<오른쪽 날개채>

질청(秩廳)
거제현 관아는 조선시대 거제현의 일반 행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기 위한 지방 행정기구이다. 그 중에서 질청(株廳)은 하급 관리들의 사무실이나 서재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1926년부터는 등기소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4년에 해제 복원한 것이다. 질청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해도 27칸이 넘는 대규모의 건물이며, 전체가 ‘ㄷ’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거제현 지도에는 ‘ㅁ’자형으로 나와 있어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화 과정에서 도로와 맞닿은 앞부분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질청 건물의 중앙부에는 사무를 보는 큰 대청이 있고 양쪽에는 주거용 방이 있다. 기성관처럼 화려한 장식이 없지만 검소하면서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거제현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던 질청은 기성관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의 전형적인 기능적, 구조적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동헌과 내아가 있던 자리는 현재 면사무소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그 앞에 크고 오래된 고목이 남아 있어 이곳이 관아터였음을 알 수 있다.

거제 거제현 관아 (사적) 12-20220221<동헌이 있던 자리>

거제현 관아는 남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 있기는 하나 왜구가 없었던 임진왜란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기때문에 읍성을 쌓지 않았다. 구한말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방어를 읍성 축성을 추진했으나 승인받지 못하고 읍치 뒷편에 산성을 쌓아 이를 보완하였다.

거제 옥산성 30-20220221<거제 옥산성>

거제현 관아(巨濟縣 官衙), 사적 제484호
거제현 관아는 조선시대 거제현의 일반 행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기 위한 지방행정기구이다. 주요 건물은 객사인 ‘기성관’,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헌’, 하급 관리가 업무를 보던 ‘질청’ 등이 있다. 현재는 기성관과 질청이 남아 있으며, 지금 거제면 사무소가 있는 곳에는 당시 동헌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 말 왜구침략으로 인한 공도정책으로 행정상 공백지였던 거제에 조선시대 세종 4년(1422) 피난 갔던 거제백성들이 돌아오면서 거제현관아가 설치되었다. 최초로 현재 수월동에 설치 되었으며, 사등성을 거쳐 단종 1년(1453)에 고현성으로 거제현관아가 이전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고현성이 함락되어 관아의 주요 건물이 사라짐에 따라 현종 5년(1664)에 지금의 위치에 새로 지었다. 거제현 관아는 ‘진입로-관아 건물-계룡산(수정봉)’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서울의 ‘광화문-경복궁-백악산’과 유사한 지형적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 관아의 전형적인 건물 구조와 배치 등을 보여주는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기성관(보물), 거제현 관아 객사

경남 거제시 거제면 읍내로에 있는 기성관(보물)이다. 조선시대 거제현 및 거제도호부 관아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조선후기 현종 때 관아가 있던 고현성을 폐쇄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1665년) 지어졌다. 이후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1909년까지 관아 건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초등학교 교시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76년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해체수리과정에서 상량묵서와 상량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내력 등의 내용이 잘 남아 있다. 관아객사이지만 내부는 전체가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어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국보)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영 세병관(국보), 밀양 영남루(보물), 진주 촉석루와 함께 경남지역을 대표하는 관아 건축물로 손꼽힌다.

거제 기성관 (보물) 01-20220221<거제 기성관(보물)>

건물은 앞면 9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궐패를 모시는 정청이며 양쪽에 좌우 익실을 두고 있다. 가운데 정청 지붕으로 좌우 익실보다 약간 높게 지어 전체적으로 솟을 지붕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거제 기성관 (보물) 15-20220221<가운데 정청>

거제 기성관 (보물) 16-20220221<왼쪽 익실>

거제 기성관 (보물) 17-20220221<오른쪽 익실>

거제 기성관 (보물) 05-20220221<기성관 현판>

거제 기성관 (보물) 04-20220221<지붕을 받치는 공포와 겹처마>

거제 기성관 (보물) 07-20220221<내부 천장>

궐패를 모시는 공간도 주위와 같은 높이의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내부가 누각처럼 내부가 개방되어 있다.

거제 기성관 (보물) 06-20220221<정청 내부>

거제 기성관 (보물) 12-20220221<뒷편에서 본 정청>

거제 기성관 (보물) 08-20220221<객사 내부>

거제 기성관 (보물) 09-20220221<앞쪽 통로>

거제 기성관 (보물) 10-20220221<뒷쪽 통로>

거제 기성관 (보물) 14-20220221<정면에서 본 모습>

거제 기성관 (보물) 03-20220221<옆쪽에서 본 모습>

거제 기성관 (보물) 11-20220221<뒷편에서 본 기성관>

기성관(岐城館), 보물, 경남 거제시 읍내로
기성관은 거제현 관아의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객사는 왕과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봉안하고 지방의 관청에서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한 의식을 행하는 곳이며, 왕이 지방 군현에 보낸 사신이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기성관 가운데에는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진 사방이 탁 트인 마루로 된 웅대한 구조이다. 현종 5년(1664) 거제현 관아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지금의 위치에 지어졌으며, 1976년 건물 전체를 해체, 복원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해방 당시에는 거제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기성관은 거제현 관아의 다른 건물과 달리 팔작지붕 및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이는 객사가 임금의 전패가 안치되어 있던 곳이라는 점에서 임금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성관은 통영 세병관(국보), 밀양 영남루(보물), 진주 촉석루와 함께 경상남도의 조선시대 4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통영 충렬사(사적), 충무공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

경남 통영시 여황로에 있는 통영 충렬사(사적)이다.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선조 때(1606년) 왕명에 의해 7대 통제사 이운용이 창건했으며 현종 때(1663년)에 남해 충렬사와 함께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직접 운영했던 곳으로 교육중심의 서원과는 달리 제사를 올리는 제향 중심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산 현충사,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무공을 모시는 대표적인 사당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 때 폐지되지 않았던 사당이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명조팔사품’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내리면서 직접 지어내린 제문 등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당이다.

통영 충렬사 (사적) 18-20220221<통영 충렬사>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사적
통영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조 39년(1606)왕의 명령에 따라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세웠다. 현종 4년(1663)에 임금으로부터 ‘충렬사’ 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사당이 된 이래로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렬사는 정당, 내삼문, 동재, 서재, 중문, 숭무당, 경충재, 외삼문, 강한루, 유물전시관, 정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 졌다. 경내에는 숙종 7년(1681)에 세워진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와 충무공 후손 통제사 비각이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에는 정조의 명에 의해 발간한 <충무공전서>와 정조가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 8년 (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오고 있는 이충무공 사당으로는 통영충렬사가 유일하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으로 제사를 모시는 제향 중심의 공간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누각인 강한루, 외삼문, 제사를 준비하는 강당 성격의 숭무당과 경충재가 공간, 중문과 동,서재가 있는 공간, 내삼과 위패를 모신 정당이 있는 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과는 달리 동,서재와 강당 건물의 규모가 크지 않아 교육기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1-20220221<강한루와 충렬사 들어가는 길>

통영 충렬사 (사적) 02-20220221<강한루에어 내려다 보이는 모습>

외삼문 양쪽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항복이 비문을 지은 충렬공비이며 충무공 후손으로 통제사를 지낸 인물들을 기리는 비석 등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3-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05-20220221<오른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04-20220221<왼쪽 비각>

통영 충렬사 (사적) 19-20220221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
통영 충렬묘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문은 광해군 6년(1614)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고, 비석의 위쪽에 ‘통제사 충무이공 충렬묘비명(統制使忠武李公忠烈廟碑銘’이라고 되어 있는 전서체의 글씨는 김수향이 썼다. 비문의 끝부분에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송시열이 기록한 것이다. 이후 숙종 7년(1581)에 제60대 통제사 민섬이 머릿돌과 거북받침대를 갖추어 세웠다고 한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공훈에 대한 칭송과 그에 대한 존경과 사몽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5-20220221<외삼문과 비각들>

외삼문을 들어서면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 있는 일반적인 서원이나 사당과는 달리 양쪽에 강당 성격 건물인 숭무당과 경충재가 자리잡고 있다. 통영 앞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경관을 고려한 공간배치인 것으로 보인다.

통영 충렬사 (사적) 07-20220221<경충재>

통영 충렬사 (사적) 08-20220221<숭무당>

강당 건물들이 있는 공간을 지나면 안쪽에 일반적인 서원과 마찬가지로 양쪽에 기숙사 건물이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6-20220221<중문>

통영 충렬사 (사적) 10-20220221<동재>

통영 충렬사 (사적) 11-20220221<서재>

위패를 모신 정당은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같이 모신 인물은 없다. 국가 주도로 세워진 충렬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당 내부에는 충무공 영정과 팔사품을 그린 병풍이 있다.

통영 충렬사 (사적) 09-20220221<내삼문>

내삼문(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 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神門)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향이 시작되기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 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唱:제 향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2-20220221<위패를 모신 정당>

통영 충렬사 (사적) 13-20220221<정당 내부>

정당(正當)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 (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단법인 통영충렬 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 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 여운형 · 신익희 등 많은 광복 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驚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 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麟:천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 천지공(浴日補天之功):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 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충렬사 (사적) 14-20220221<내삼문>

통영 충렬사 (사적) 16-20220221<충렬사 동백나무>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
동백나무는 열대 및 아열대에서 자라는 차나뭇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일본, 중국, 한국 등지에서도 따뜻한 지역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꽃은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매우 아름답다. 대게 이른 봄에 피지만 가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므로 개화시기에 따라 동백꽃을 춘백, 추백, 동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열매는 늦가을에 붉게 익는다. 열매의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머리에 바르거나 등잔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약으로도 쓰였다. 이 동백나무들은 충렬사 입구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나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본래 네 그루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이 나무들은 키와 둘레가 각각 6.3 m, 1m 이다. 또 사방으로 넓게 퍼진 가지는 지름이 7 m나 될 만큼 큰 나무이다. 나이는 4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곳 통영에서는 음력 3월이면 거세 바닷바람을 달래기 위해 풍신제인 ‘할만네’를 지냈다. 그때 동네 아낙들이 정한수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우는 풍습이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통영 두룡포기사비

경남 통영시 세병로 삼도수군통제영 유적에 남아 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이다.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건설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비를 세운 경위,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긴 이유, 이경준의 행적 등이 적혀 있다. 인조 때(1625년) 19대 통제사 구인후가 세운 것으로 원래는 남문 밖 바닷가에 있었는데 190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통영 두룡포기사비 01-20220221<통영 두룡포기사비>

통영 두룡포기사비 04-20220221
<비석>

머릿돌에는 구름과 두미리의 용을 조각해 놓고 있다. 일반적인 공덕비에 비해 화려하게 장식해 놓고 있다.

통영 두룡포기사비 02-20220221<머릿돌>

이경준은 선조 때 6대, 광해군 떄 9대 통제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산군수로 재직하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당시 호종하였으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통제사를 역임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통영 두룡포기사비 03-20220221<비몸에 새겨진 글자>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한 제6대, 제9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사적비’로 인조 3년(1625년)에 제19대, 제25대 구인후(具仁) 통제사가 세웠다. 두룡포는 원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경준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옴으로써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이 비석은 받침대 없이 비신(碑身)과 머릿돌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비문은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의 부사(府使)였던 박홍미가 지었다. 비문은 아랫부분이 마멸되어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그 내용은 확인된다.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함께 통제사 이경준의 약력(略歷)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하늘을 오르며 하나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 비석은 원래 통제영의 영문(營門) 자리에 세웠던 것을 190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사적)

경남 통영시 세병로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사적)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조선후기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수군을 통할하던 통제가 있던 본진을 말한다. 통제영은 이순신 장군이 1대 통제사를 맡으면서 한산도 수군 진영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그 후 전란으로 여러곳으로 옮겨다니다 임진왜란 직후 통제사 이경준의 지휘로 고성현 두룡포로 옮겨졌다. 이경준은 이곳에 객사에 해당하는 세병관을 비롯하여 백화당, 정해정 등의 건물을 세웠다. 통제영은 고종 때 갑오경장(1895년)으로 폐영될 때까지 303년간 유지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 졌으나,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1998년 이후 운주당을 비롯한 여러 관아건물들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을 ‘통제영’으로 줄여 부르던 데에서 통영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01-20220220<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입구>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72-20220221<통제영에서 내려다 보이는 통영항>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83-20220221<통제영 들어가는 길>

통영 세병관 (국보) 19-20220222<통영항 남망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07-20220221<통제영 공간배치>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사적
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에 설치되어 1895년에 폐영될 때까지 전라 충청 경상의 3도 수군을 지휘하던 본부였다. 임진왜란 때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떠난 정유재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져 지금의 통영시 두룡포에 자리를 정했다.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부임한 뒤, 제209대 통제사 홍남주(洪南周)까지, 무려 290년간 왜적에 대비하는 조선수군의 총본부로서 오늘날의 해군사령부와 같은 곳이었다. 1998년 2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사라진 건물들에 대한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운주당, 백화당, 병고, 중영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본영군은 의전을 치러는 중심영으로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객사인 세병관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문루인 망일루와 하급관리와 군사들을 위한 공간이, 서쪽에는 통제영을 운영하기 위한 물자를 제작, 공급하는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1-20220221<객사인 세병관 들어가는 길>

본영군
통제사가 제반 의전을 치르던 중심영역으로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세병관은 통영시의 언덕 위에서 남해를 바라보며 있다. 그 거대한 규모에서 보여주는 위압과 권위는 이 건물이 승전에 대한 기념성과 군사적 기능이 동시에 추구되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구성을 살펴보면 전면에 내삼문인 지과문, 외삼문인 망일루가 있었다. 백화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뜰 안에는 석인, 기삽석통이 있다. 좌측에는 백화당과 잉번청이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망일루(望日樓)는 통제영 관아를 출입하는문루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통제영이 설치된 직후 광해군 때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통제영 유적지를 복원하면서 다시 지었다. 시간을 알려주는 큰 종이 걸려 있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02-20220221<망일루>

망일루(望日樓)
광해군 3년(1611년) 제10대 우치적 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45년(1759년) 제128대 이국현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 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있어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되었던 것을 200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망일루 옆에는 수량루라는 2층 누각건물이 있다. 원래는 통영 선착장에서 훈련 등을 위헤 숙종 때(1677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매립 등으로 옛 선착장이 없어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08-20220221<수향루>

수항루(受降樓)
수항루는 2층 누각으로 통영성 남문 밖에 위치하였는데, 임진왜란의 승전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3년(1677년) 제58대 윤천뢰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수항루는 봄가을 군점(수조)때에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 받는 행사를 거행해 왔다. 해안매립으로 인해 선착장 원래의 모습을 잃어 버려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망일루 안쪽에는 하급관리나 군사들을 위한 2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좌청은 군관과 사병들이 대기하던 건물이며 산성청은 통제영이 있는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들이 근무했던 공간이다. 건물들은 통제영 유적지가 정비되면서 새로 지어졌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09-20220221<좌청>

좌청(左廳)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건물로 대변좌청(待變左廳)이라 고도 하며, 제54대 신여철 통제사가 1689년에 좌청과 우청으로 분청(分廳)했다고 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0-20220221<산성청>

산성청(山城廳)
통영성(城)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 44년(1718년) 제83대 오중주 통제사 때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던 것을 발굴 유구와 문헌에 의하여 최근에 중건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3-20220221<망일루>

세병관(洗兵館, 국보)은 조선후기 해군본부격인 삼도수군통제영 객사 건물이다. 건물 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60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수군 선박이 정박했던 통영항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건물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有大)가 쓴 글씨이다. 경복궁 경회루(국보), 여수 진남관(국보)와 함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로 역사성과 건축적인 측면에는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2-20220221<객사 출입문인 지과문(止戈門)>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21-20220221<세병관에서 보이는 지과문>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20-20220221<통제영 객사 건물인 세병관(국보)>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8-20220221<세병관 내부>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9-20220221<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공간>

세병관 앞뜰에는 영기와 장군기를 거는 깃대를 고정하는 돌기둥이 기삽석통(旗颯石桶)이 남아 있다. 사찰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와 기능을 하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7-20220221<기삽석통>

기삽석통(旗颯石桶)
세병관 앞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년) 제 142대 류진항 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세병관 뜰앞 좌우 양편으로 2기가 있었으나, 현재 세병관 앞뜰 담장 부근에 서쪽 1기만 남아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74-20220221<세병관 마당에 있는 석인>

석인
숙종 27년(1701) 제 77대 류성추 통제사 떄 세병관 들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객사인 세병관 동쪽에는 일반적인 관아 동헌과 마찬가지로 통제사 집무공간인 내아군이 있다. 내아군에는 동헌에 해당하는 건물이 운주당을 중심으로 작은 집무공간인 경무당, 살림집인 내아, 병무를 관장하던 사무공긴인 병고(兵庫)가 배치되어 있다. 내아 뒷편으로는 통제영에서 직접 상평통보를 제작했던 공방인 주전소가 자리잡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54-20220221<통제영 내아군>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53-20220221<동헌 출입문과 행랑채>

내아군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영역이다.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하며 세병관 동쪽에 위치한다. 내아군에는 운주당과 이순신 장군의 영당이자 관사인 경무당이 자리하고 그 우측으로 살림채인 내아가 자리한다. 중앙의 관아와 달리 지방의 관아에서는 관리의 식구들이 살림하는 내아가 있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공존하는 특징이 있는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운주당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수영을 세울 때 집무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휘하 장수와 병졸에 이르기까지 작전은 논하던 소통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인조 때(1645년) 경무당과 함께 창건되면서 동헌건물을 운주당이라 이름지었다.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일반적인 감영 집무공간인 선화당에 비해 규모가 적은편이다. 통제영에서 객사인 세병관이 중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55-20220221<운주당>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57-20220221<운주당 내부>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58-20220221<운주당 온돌방>

운주당(運籌堂)
인조 23년(1645) 제21대 이왕 통제사 때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 운주는 ‘운주유약지(運籌喩幄之)’ 중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것을 말함이니, 즉 통제사가 통제영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운주당 옆에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건물이다. 통제사가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62-20220221<경무당>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63-20220221<경무당 내부>

경무당(景武堂)
인조 23년(1645) 이완 통제사 때 지은 통제사의 작은 집무실인데, 경무당이라 한 것은 이충무공의 뜻을 크게 우러러본다는 의미에서 연유한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병고는 행랑채와 함께 하나의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다. 통제영 병무를 관장하던 공간으로 하급관리들의 집무공간인 것으로 보인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61-20220221<병고와 행랑채>

병고(兵庫)
선조 37년(1604) 제6대 이경준 통제사 때 통제영 설치와 함께 세워졌다. 통제영 병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현재 대포, 창, 검 무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56-20220221<운주당 마당에 남아 있는 고목>

내아는 통제사가 거처하는 살림집이다. 통제사는 종2품에 해당하는 고위관직으로 가족없이 단신부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때문에 직위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65-20220221<내아 출입문과 행랑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64-20220221<내아>

내아(內衙)
통제사가 거처했던 곳으로 지방관청의 안채에 해당한다. 현재 안방, 대청, 건넛방, 부엌, 찬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내아 뒷편에는 조선시대 동전을 만들던 공방인 주전소 터가 남아 있다. 상평통보와 도가니, 화로 등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등 주요 군사기관에서 화폐를 주조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통제영도 같은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물품을 만들던 공방과는 달리 통제사 집무공간 뒷편에 따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엄격히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69-20220221<주전소 터>

주전소 북측
현재 남아 있는 형태로 추정해 보면 기단과 덤벙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벽체는 만들지 않았거나 거적 등으로 임시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초가 내지는 거적 등을 사용하여 만든 임시 건물 형태이다. 내부는 5~6기 정도의 용해로와 연접하여 송풍시설을 두어 주전작업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70-20220221<동전을 제작하는 모습>

주전소
통제영 주전소 유구는 조선시대 동전을 만들던 곳으로, 국내 최초로 조선시대 화폐인 상평통보와 도가니, 화로 등이 출토되었다. 통제영 내 공방지와는 별개로 통제사가 집무를 관장하는 운주당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것은 특별한 관리, 감독을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주전소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뿐인 점을 참고해 볼 때, 통제영에서도 화폐를 주조했다는 새로운 실체가 확인된 것으로서 화폐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66-20220221<주전소 뒷편 정자가 있는 공간>

세병관 서쪽으로는 통제사를 보좌하는 참모인 비장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건물이자 손님들을 접견했던 공간이 백화당을 중심으로 통제영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했던 공방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통제영에서는 수군에 필요한 선박, 무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용품 등을 직접 제작했다. 전시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제작하는 인력들을 활용해 평상시에는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영을 대표하는 공예품인 나전칠기도 이곳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공방이 있는 공간 입구에는 관아를 상징하는 큰 느티나무를 볼 있다. 느티나무는 둘레는 5 m로서 수령은 400년 이상 추정되며, 통제영 창건 당시 심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4-20220221<느티나무>

통제사를 보좌하는 참모들의 업무공간이자 손님들의 접대하는 공간인 백화당이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52-20220221<백화당>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48-20220221<백화당에 전시된 통영연>

백화당(百和堂)
선조 36년(1603) 제 6대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裨將)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 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도 맡았으며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백화당 안쪽으로는 통제영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는 12공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통제영에서는 전시를 대비하기 위해 많은 인원들을 두고 있었으며, 무기류를 비롯한 군수품은 물론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제작하였다. 철제 무기를 제작했던 야장방, 귀금속을 다루는 은방과 석방, 가구를 만드는 소목방, 장식화 등을 그렸던 화원방, 나전제품을 만들던 패부방, 버들고리 제품을 만들던 상자방, 망건 등을 만들던 총방과 입자방, 부채를 제작하던 선자방, 화살통을 만들던 동개방, 가죽제품을 다루는 화자방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제조업 대부분을 통제영에서 운영했다. 통제영이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16-20220221<백화당과 12공방이 있던 공간>

12공방
제반 국기와 진상품을 생산하였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군수품 생산과 민생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조정에 진공품과 때로는 중국 가는 사신의 헌상품까지도 조달하는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 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변방에서 각종 군수품을 자체 조달목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한산진에서 시작하였으나 (1593년) 임진란 이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생산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24-20220221<잉번청>

잉번청(仍番廳)
숙종 14년(1688) 제66대 이세선 통제사가 건립하였으며, 통제영 공방의 건물이나 물건 등을 지키는 사람이 근무하던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26-20220221<야장방>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28-20220221<무기를 만드는 모습>

야장방(冶匠房)
쇠를 녹여 화살촉, 칼 등 병기 및 각종 철물을 주조하던 곳으로 19세기 초기에는 연마장, 도자장(刀子匠) 등으로 구성된 연마방이 별도로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29-20220221<은방, 석방>

은방(銀房) 석방(錫房), 은방: 금과 은을 세공하여 각종 장신구 제품을 만들던 곳, 석방: 주석과 백동으로 각종 장석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1-20220221<소목방>

소목방(小木房), 나무로 가구 및 문방구 등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0-20220221<화원방>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2-20220221<화원방 내부>

화원방(畵員房), 각종 지도 및 군사적 목적의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던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5-20220221<패부방>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4-20220221<패부방 내부>

패부방(貝付房), 자개를 붙여 나전제품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6-20220221<상자방>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7-20220221<상자방 내부>

상자방(箱子房), 버들가지 등을 엮어 상자를 만들던 곳이나 현재는 염장(대발) 공방으로 사용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8-20220221<총방, 입자방>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39-20220221<총방, 입자방 내부>

총방(驄房) 입자방(笠子房), 총방: 말총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들던 곳. 입자방: 흑립이나 벙거지, 삿간, 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40-20220221<선자방>

선자방(扇子房)
단오절에 임금이 하사하던 부채를 제작하였던 공방으로 부채의 형태에 따라 단선과 접선 그리고 별선으로 구분하였다. 1894년 <통영지>에 진공품(진귀한 공물) 중 부채가 88개로 기록되어 있어 통영에서 대규모로 부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41-20220221<공내헌>

공내헌(工內軒), 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42-20220221<동개방>

동개방(茼箇房), 활과 화살을 함께 꽂아 넣어 등에 지는 가죽주머니인 동개와 활을 허리에 꽂는 궁대(弓袋)를 만들던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46-20220221<공록당>

 

공록당(工綠堂), 공고(工庫)에 딸린 집무공간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43-20220221<화자방>

화자방(華字房), 가죽을 사용하여 군화와 말안장을 만들던 곳으로 화자는 벼슬아치들이 관복 아래에 신는 가죽으로 만든 긴 장화 모양의 목화를 말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45-20220221<석수조>

석수조(石水槽), 물을 저장하여 자개 등을 갈고 닦는 등의 작업을 하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제영 앞쪽에는 통제사 참모장에 해당하는 우후(虞候)가 집무를 보던 공간이 우후군이 자리잡고 있다. 우후는 정3품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 통제사 밑에서 군령을 주로 담당하였다. 우후군은 집무공간인 동헌과 거처인 내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객사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관아와 비슷한 규모를 하고 있다. 통제사가 있는 운주당과는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78-20220221<통제영 아래 우후군>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80-20220221<출입문>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82-20220221<우후군>

우후군
우후군은 통제사 참모장인 우후가 업무를 보며 기거하던 곳으로 중영 및 내아로 이루어져 있다. 우후군은 군사관계의 시설들로서 통제영의 직할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격상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고 위계상 중간적인 위치에 놓인다. 또한, 수군으로서 선창에 있는 군선을 관리하므로 통제영과 선창과의 관계에도 중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전면에 자리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제영 동헌 앞 마당에는 역대 통제사들의 업적을 비리는 공덕비들을 모아 놓고 있다. 비석들은 통영시내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 58기를 모아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이외에 역대 통제사 중 전의 이씨 문중에서 배출한 통제사 4명 중 9명의 비석이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2013년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73-20220221<통제사비군>

통제사비군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관.민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인데 표제도 숭덕비.추사비.거사비.사적비.불망비.타루비.유예비.선정비 등으로 다양하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76-20220221<두룡포기사비, 6대와 9대 통제사를 역임한 이경준의 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77-20220221<2014년 발굴된 땅속에 묻혀있던 비석>

이곳에 있는 비석 24기는 전의 이씨(全義 李氏) 문중 배출 삼도수군통제사 14명 중 9명의 것이다. 2014년 통영시 무전동 873번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로 매몰 이유도 불명확하다. 내용적으로는 사적비.청덕선정비.영세불망비가 각각 5기, 거사비.선정비.유예비.유애거사비가 각각 2기, 불망비가 1기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도, 전라도, 경사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조선시대 해군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종2품의 고위칙이다, 3도에는 충청수영, 전라우수영,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경상좌수영이 설치되었으며 통제사는 경상우수영 절도사를 겸임했다. 임진왜란 직후 이순신 장군이 1대, 2대 통제사를 역임했으며 이후 고종 때 갑오경장(1895년)으로 폐영될 때까지 303년간 209대 195명의 통제사를 배출하였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84-20220220<초상화가 남아 있는 역대 통제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통제사의 정식 명칭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충청·전라·경상 삼도 수군을 총괄하는 조선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통사(統使), 통수(統帥), 통곤(統閫)으로 부르기도 했다. 1593년(선조26년)부터 1895년(고종32년) 폐영 될 때까지 303 년간 209대, 재임 14명으로 195명의 통제사를 배출하였다. 제1, 3대 통제사 이순신, 제2대 원균이다.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는 각 도(道)의 수장인 관찰사(군권 , 행정권, 사법권을 가진 종2품)와 대등한 관계였으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권한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 전체 병력의 1/4 이상에 해당하는 조선수군 80% 가량의 삼도수군을 통솔하는 막강한 군권, 사법권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통제영 운영을 위한 군액(軍額, 세금) 징수, 통영곡(統營穀, 군량미) 운영, 소속 전선(배)을 이용한 물류업과 지역별 창고업, 상평통보 자체 제작과 사용, 12 공방 운영 등을 통한 든든한 재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23-20220221<삼도수군통제영 고지도>

삼도수군통제영 고지도, 통영지도 1872,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통영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문화동, 태평동 일원에 있었던 수군통제사영으로 조선후기 수군의 총본영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시 이순신 장군이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이끌고 왜구를 물리쳐 통제사를 제수받은 것이 시초이다. 초대 통제사였던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는데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전란 후 여러 곳을 옮겨다녔는데,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를 거치다가 1601년(선조 34) 체찰사(體察使) 이덕형의 장계로 1604년(선조 37) 통제사 이경준의 지휘 아래 고성현 두룡포(頭龍浦)로 옮기게 되었다. 그후 1678년(숙종 4) 윤천뢰 통제사 때에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 지도는 1872년 제작된 경상도 지도첩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삼천진지도(三千鎭地圖)와 함께 따로 분리되어 있던 것이지만 표현 양식, 내용 등을 통해 볼 때 1872년 군현지도 제작사업 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영을 중심으로 주변의 거제, 고성, 사천, 남해에 이르는 지역을 회화식으로 그렸는데 특히 조감도식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역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밀하게 그린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교한 솜씨로 보아 전문 화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 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통영에서는 화사군관(畵師軍官) 한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지도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의 내용을 보면 우선 산천, 바다, 도서 등의 자연적인 지형이 산수화풍으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후기 회화식 지도에서 나타나는 방위의 혼란이 이 지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즉, 산의 봉우리를 지도의 상단인 북쪽을 향하게 그리고 조감도식으로 위에서 사선적으로 투시함으로써 일관된 방위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축척에 있어서 중심부와 주변부에 차별적인 축척을 적용함으로 써 중심 공간인 통영이 상당히 부각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도 강한 집중력을 유발시키고 있다. 통제사영이 있는 성곽 내부 공간은 다양한 관아 건물들을 상세히 그렸는데 객사인 세병관(洗兵館)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안과 성밖에는 지붕 모양을 빽빽하게 그려 넣음으로써 촌락의 밀도를 표현하고 있다. 바다의 포구에는 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각종의 전선과 더불어 거북선의 모습도 보이고 있으며, 미전이 들어선 해안가에는 범선(帆船)도 그려져 있다. 이 시기 통영이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상업 활동의 요지로도 부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파수가 있는 해구(海口)에는 책문(柵門)과 같은 것이 그려진 점도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통영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잘 보여주는 지도이다. (안내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22년)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안내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2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