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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가야의 왕

삼한 중 변한을 계승한 가야연맹체는 중국.한반도.일본과의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런 지리적인 잇점과 철의 생산과 가공으로 가야는 상당한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해안과 가까운 지역이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점차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5세기와 6세기에는 대가야와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와 화려한 금제품 그리고 대형봉토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 백제와 힘을 겨룰만큼 강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토기에는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가라국의 지배자를 <왕>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1<”대왕”을 새긴 긴목항아리, 5~6세기, 출토지 모름, 충남대학교 박물관>

가야의 왕
<일본서기>는 가야의 지배자를 ‘왕’과 ‘한기’라는 두가지 이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왕이라는 칭호는 가락국과 아라국의 지배자에게 사용하였는데,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규모와 출토품으로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은 가라국 왕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32개의 순장덧널에 함께 묻힌 사람은 호위무사와 마부 등 왕을 보필하는 전문 집단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런 가야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섬진강 유역의 여수와 남원 등지의 세력들도 공존이라는 가야의 가치 아래 함께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대가야의 관은 6세기 즈음에 이르러 관테에 풀과 꽃 모양의 세움장식을 세우는 것으로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다. 가야 고분에서는 여러 점의 금관과 금동관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1<금관과 금제장식, 6세기, 국보, 전 고령, 리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0<반대편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2<금제장식(국보)>

금관(국보 제138호)
가라국이 전성기일 때 만든 금관이어서 매우 안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넓은 관테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경옥제 곡옥을 매달고, 풀잎 모양 세움장식 4개을 세웠습니다. 세움장식의 끝 부분은 꽃봉우리 모양으로 마무리하여 화려함과 신비감을 더했습니다. 금관은 가라국이 왕을 정점으로하는 신분사회였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자적으로 정치적 상징물을 제작할 만큼 국력이 컸던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2<금동관, 5세기, 고령 지산동 30-2호묘, 국립대구박물관>

지산동 30호 무덤은 왕의 무덤이 있는 주능선에서 이어지는 갈래 능선의 말단부에 있습니다. 봉분의 크기는 동서로 18m이고, 으뜸 덧널(주곽)과 딸린 덧널(부곽) 그리고 3기의 순장 덧널을 갖추었습니다. 30-2호는 으뜸 덧널(주곽)의 동쪽에 있는 순장 덧널이며, 금동관의 크기로 볼 때 어린 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금동관은 띠모양의 금동판에 3개의 세움장식을 붙이고 4개의 달개를 매달았습니다. 금동판의 양끝에는 가죽끈을 연결할 수 있는 구멍을 뚫었습니다. 지산동 30호 주인공은 무덤의 위치와 규모, 3개의 순장 덧널을 갖춘 점 등에서 왕족 또는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3<금동관, 5~6세기, 보물, 고령 지산동 32호묘>

SANYO DIGITAL CAMERA<고령 지산리 32호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6<3. 금동관,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4<1. 금귀걸이,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가라국은 백제 금귀걸이의 영향을 받아 대략 5세기 후엽부터 독자적으로 귀걸이를 제작하였습니다. 가라국의 금귀걸이는 대부분 가는 고리에, 원추 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장식을 매달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5<2. 금제장식,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고령 지산리 45호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7<목걸이, 5~6세기, 4. 고령 지산동 73호묘, 대가야박물관, 5,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대가야에서 만든 칼은 백제에서 출토되는 것과 달리 용이나 봉황 같은 장식을 따로 제작하여 손잡이에 끼웠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8<고리자루 큰칼, 5~6세기, 6. 출토지 모름, 리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09<7, 고령 지산동 47호묘, 국립중앙박물관>

화합, 가야의 여러 나라는 어떻게 공존하였나요?
5세기 한반도는 삼국이 팽팽하게 대치하면서 힘의 균형이 작용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때 백제에 귀속되었던 호남 동부지역의 기문(己汶)과 대사(帶沙)가 가야와 함께 하였습니다. 남원의 운봉고원과 순천 등지에서 발견되는 가야 무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찾은 가라국은 476년에 중국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했습니다. 그리고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만들게 하여 여러 가야의 화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순장(殉葬)은 고대 왕이나 귀족 등이 죽었을 때 처자나 노비 등을 함께 매장하던 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두루 행해졌던 장례방식이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까지 순장이 일부 이루어졌으나 순장이 금지되면서 점차 진시황릉 병마용처럼 나무나 흙으로 만들어 넣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에 순장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가야의 창녕 교동 고분과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그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 때(502년) 순장을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고 하며, 그 이후 고분에서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대신 묻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9<으뜸방- 화려한 금관을 쓴 왕, 방의 길이 9.4m, 너비 1.75m>

SANYO DIGITAL CAMERA<고령 지산리 44호 무덤>

고령 지산동 44호 왕의 무덤
여기는 가라국을 전성기로 이끈 왕의 무덤을 실제 크기를 느껴볼 수 있도록 재현한 곳입니다. 가라국의 왕은 수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주산의 언덕에 잠들었으며, 44호 무덤은 길게 뻗은 언덕의 중앙이면서 우뚝 솟은 곳에 있습니다. 왕의 무덤은 직경이 27m 높이 6m이고, 사방에 32기의 순장 방이 있습니다. 순장자는 호위무사, 마부, 옷감관리인 등 왕을 모시는 신하들과 그의 가족이 보입니다. 35명이 넘는 순장자가 따로 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부장품은 도굴로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무덤 자체만으로도 가라국을 전성기를 이끈 왕의 위용이 느껴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0<1. 투구>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1< 2. 청동그릇, 3. 토제등잔,>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2<4. 쇠투겁창>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3<5.숫돌, 6. 구슬,>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4 <7. 큰칼>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5<8. 제사토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6 <9. 널못>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7<10. 꺾쇠>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8<11. 쇠화살촉>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29<12. 제사토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30<13. 말띠드리개>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31< 14. 말띠꾸미개>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32<15. 말안장 장식>

으뜸방- 화려한 금관을 쓴 왕, 방의 길이 9.4m, 너비 1.75m>
화려한 금관을 쓰고 큰칼을 찬 왕이 잠들었습니다. 왕이 가진 보물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머리맡과 발치에는 가까이서 왕을 모시던 신하가 같이 잠들었습니다. 왕의 주위에는 부장품을 가득 넣은 방 2개와 순장된 사람들이 잠든 방 32개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3<마부, 고령 지산동 44호묘 25호 순장곽, 5세기, 국립경주박물관, 1. 제사토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41
<2.발걸이>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42
<3. 말 띠고리, 4. 말방울>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4<5. 재갈>

25호 방, 왕의 말을 부린 사람, 방의 길이 2.48m, 너비 0.6m
바닥이 편평하고 둥근 손잡이가 붙은 뚜껑을 덮은 단지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요? 꿀단지는 아니었을까요? 머리맡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 소중하게 두었습니다. 여기에는 말을 탈 때 쓰는 발걸이와 재갈도 함께 있습니다. 말을 부려서 왕을 모셔야 하니까요.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5<무사, 고령 지산동 44호묘 11호 순장곽, 5세기, 국립경주박물관, 1. 제사토기>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6<2. 금귀걸이>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7 <3. 손칼,  5. 쇠화살촉>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가야의왕 20200212_18<4. 큰칼>

11호 방, 허리에 칼을 찬 남자, 방의 길이 1.8m, 너비 0.41m
왕에 가까운 방에 누운 이 남자,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호위무사입니다. 나이가 40대로 지긋학, 화려한 금귀걸이를 하고 있으니 신하 중에서도 꽤 높은 호위대장이었나 봅니다. 머리 쪽에 놓인 굽다리접시에는 닭고기가 들었습니다. 평소에 닭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겠지만, 고기를 먹어줘야 칼을 제대로 썼겠지요.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라국(대가야)의 순장
순장은 죽은 실력자들을 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묻는 행위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관습처럼 보이지만, 문헌 기록에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순장할 사람을 결정하고 있어 지금과는 다른 시각으로 순장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야에서는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함께 순장하였습니다. 순장은 죽은 왕이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처럼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결국 저승에서도 이승에서 처럼 삶을 살아간다는 사후 관념이 순장을 행하게 하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대외 교류

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풍부한 철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가야 유적지에서는 당시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중 지리적,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국 북조와 남조를 비롯하여 멀리 서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도 보인다. 청동솥, 거울, 방패꾸미개, 적갈색토기 등은 가야와 주변국가와의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들이다. 또한 신라, 백제, 고구려와는 정치, 외교적 상황에 따라 적절히 교류했는 백제로부터 받은 금동관모와 쇠자루솥, 신라로부터 받은 유리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31
<갑옷과 투구, 5세기, 지산동 30호 주변 1~3호묘, 함양 상백리고분, 국립대구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가야연맹체가 있었던 경남지역은 고대 이래 한,중,일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삼한시대 이전부터 왜(倭)의 대외교류 창구이기도 했다. 삼한시대 이후 교류는 김해지역 금관가야가 주도했으며 백제가 왜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 광개토대왕의 정벌 이후 급격히 약해졌다. 이후에는 고성 지역의 소가야와  섬진강유역을 장악했던 대가야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남해안 일대 주요 거점에서는 왜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2<녹각장식 철검, 5세기, 4. 함안 말이산 3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32
<유리구슬, 5세기, 거제 장목고분,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3<왜의 청동거울, 6세기, 6. 산청 생초 9호묘, 진주 중안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5<뚜껑접시(스에키계 토기), 5세기, 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7<왜계토기(스에키계 토기), 6세기, 9. 산청 생초 9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6<왜계토기(스에키계 토기), 6세기, 9. 산청 생초 9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왜
가야와 왜의 교류는 지리적인 이유로 일찍부터 있었지만, 4세기 이후 백제가 급부상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왜와의 교류를 주도하던 가락국은 366년 왜가 백제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 400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남쪽을 정벌한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가락국이 연결한 왜와의 교류는 5세기 이후, 남해의 해상왕국 고자국과 섬진강 일대를 다스리던 가라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남해안 일대 연안항로의 요충지를 따라서 왜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가라국의 귀걸이가 여러곳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백제는 왜와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가야를 적절히 지원하면서 신라를 견제했다. 대가야 고분에서는 백제 금동관모과 귀걸이가 출토되었으며, 여러 지역에서는 백제와 관계를 보여주는 큰칼과 청동그릇 등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8<금동모관, 4~5세기, 1. 경기도 화성 요리1호묘(비교자료), 화성시 향토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09<금동모관, 4~5세기, 2.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0<금동모관, 4~5세기, 3. 합천 옥전23호묘(복제품), 경상대학교 박물관>

백제에서 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귀걸이가 다라국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 묻혔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1<금귀걸이, 4~6세기, 4.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5. 합천 옥전 M1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허리띠고리, 6세기, 6. 합천 옥전 M1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청동그릇은 여러 가야가 백제와 각기 자율적으로 추진한 외교의 결과로 추정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3<쇠자루솥, 5~6세기, 1. 서산부장리 5호묘, 국립공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4<쇠자루솥, 5~6세기, 2. 남원 월산리 M5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2<청동그릇, 5~6세기, 3. 합천 옥전 M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4. 의령 경산리 2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5<청동 굽다리접시, 6세기, 5. 고성 송학동 1C호묘, 고성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6<고리자루 큰칼, 4~6세기, 1. 봉황장식, 고령 지산동 73호묘,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7
<2. 상감장식, 함안 마갑총, 국립김해박물관, 4. 봉황장식, 산청 중촌리 3호묘 북토광, 신라대학교 박물관, 5. 천안 용원리 1호묘, 국립공주박물관, 비교자료>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8<3. 상감장식, 남원 월산리 M1-A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19<6. 은장식, 함천 옥전 28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백제
4세기 무렵 백제와 고구려 같은 강대국의 출현은 가야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백제는 가야를 적절히 지원하여 신라의 팽창을 억제하기도 하고, 여러 가야 중 어느 한 나라가 커지는 것도 경계하였습니다. 4세기 후엽 백제는 강성한 가락국보다는 가라국과 다라국을 돕기도 합니다. 고령 지산동 73호 무덤에서는 백제에서 만든 금동관모와 귀걸이가 출토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아라국과 고자국 등 여러 가야의 지배자가 소유한 큰칼과 청동그릇 등은 제작기 백제와 정치적 관계를 맺었음을 말해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경남 창녕지역에 있었던 비화가야는 비교적 이른시기부터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 교동 등 주요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공품이나 마구, 칼 등은 신라식이 많지만 토기문화는 여전히 지역색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으로 보이는 큰칼이나 토기, 유리잔 등이 출토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0<세잎장식 큰칼, 1. 의성 학미리 1호묘(비교자료), 국립대구박물관, 3. 용장식 큰칼, 6세기, 경주 호우총,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1<세잎장식 큰칼, 2.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세잎장식 큰칼은 신라가 제작하여 가라국에 전해 준 것으로, 가라국과 신라 왕실이 맺은 정치적 관계를 보여준다. 용머리장식 큰칼은 가라국이 신라 왕실에 선물한 장식대도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2<말띠드리개, 6세기, 1.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3
<유리그릇, 5세기, 2. 옥전 M1호분, 경상대학교 박물관>

다라국의 지배자가 가진 유리잔은 신라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인 대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허리띠는 신라나 백제로부터 받은 허리띠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4<관꾸미개, 5세기, 3. 경산 임당 7A호묘(비교자료), 영남대학교 박물관,허리띠, 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5<관꾸미개, 5세기, 4. 고령 지산동 73호묘 서순장관,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6<신라토기, 1. 고성 송학동 1B-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합천 옥전 3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7<신라토기, 2. 고성 내산리 8호묘, 국립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본성 대외관계 20200212_28
<신라토기, 4. 김해 대성동 73호묘, 성동고분박물관, 5.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가야와 신라
가야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가야를 포섭하거나 회유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습니다. 가령 합천 옥전 M1호 무덤에서 나온 다라국의 지배자가 가진 유리잔은 신라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인 대가였을 것입니다.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 무덤의 주인공이 가진 큰칼은 가라국과 신라 왕실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한편 고성 송학동 고분군에서 나온 신라 토기는 고자국의 지배자가 사망했을 때, 정치적 협력관계를 이끌어내기 위해 신라의 조문 사절단이 들고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 독자외교 – 자율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독자적으로 대외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듯 가야의 고분군에서는 중국을 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왜, 신라, 백제, 고구려 등과 교류한 증거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다라국이 백제로부터 받은 금동관모, 신라로부터 받은 유리그릇, 고자국이 받은 왜와 신라의 토기, 기문(己汶)이 받은 백제의 쇠자루솥과 가라국의 귀걸이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대로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 풍납토성에서는 고자국의 토기가, 신라의 식리총에서는 가라국의 큰칼이 출토되었습니다. 왜에서는 가라국의 귀걸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야의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여러 가야들은 각기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주변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외교적 관계를 맺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