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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움직이는 공방

불상나 불화 등을 조성하는 불사는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승려 장인들은 불사가 있는 사찰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매번 작업을 위해 먼길을 떠났으며 때로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승려와 함께 모여 협업을 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서로의 개성이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다양한 표현으로 불렸는데 그림을 그리는 관직과 같은 이름인 ‘화원’이 가장 많이 쓰였다. 당시 전문적인 기술이나 예술적 소양이 높아던 승려 장인들은 불사 뿐 아니라 성곽을 축성, 다리의 건설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많은 발자취를 남겨 놓고 있다.

상주 남장사 불사 과정을 기록한 <불사성공록>에는 전국에서 초빙된 70여 명의 승려 장인들이 작업했던 내용들을 세부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3<15. 상주 남장사 불사 과정을 기록한 책, 불사성공록(佛事成功錄), 조선 1788년, 종이에 먹, 상주 남장사, 보물>

해남 대흥사의 13대 강사 중 한 사람인 영파 성규가 1788년 상주 남장사에서 있었던 불사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서울.경기 지역의 화승 상겸과 문경 대승사를 권역으로 활동하던 대승화공 홍안, 전라도 지역의 호남화공 쾌윤 등 70여 명이 함께 모여 20여 일에 걸쳐 대형 불화인 괘불과 지장보살도, 시왕도를 그리고 명부전에 빠진 상을 보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사를 기획해 실행하는 과정과 지역을 넘어선 화승의 협업, 동참한 이들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이때 절에서 의견이 하나로 모여 괘불을 만드는 큰 일을 시작해 장인 70여 명을 모아 장면을 나누어 그리게 하였다. 호탐의 쾌윤과 사불산의 홍안은 유명회(幽冥會)를, 경성의 상겸은 영산회(靈山會)를 그렸는데, 4월 초파일 우리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 붓을 들어 20일에 붓을 놓았다.” – <불사성공록>(1788) 중에서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영사 목조 전패와 불패>에는 17세기 금강산 여행을 떠났던 승려 장인들이 여행 도중 울진 불영사의 부탁을 받아 잠시 머무르면서 불사를 지원했던 내용을 기록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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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목조 불패> <16. 화승 철현이 잠시 머물며 만든 전패와 불패, 불영사 목조전패와 목조불패, 철현 등 3명, 조선 1678년, 울진 불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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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목조 전패>

포항 오어사의 화승 철현, 양산 통도사의 영현과 탁진은 함께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울진 불영사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주지인 혜능 스님이 전각에 모실 불전패(佛殿牌) 제작을 요청했습니다. 큰 전패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작은 불패는 불보살상의 이름을 새겨 법당에 새워 두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전패 뒷면에는 사찰이 만세토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며 불패 세 점과 전패 세 점을 조성했다고 적혀 있지만 지금은 두 점만 전합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매순간 처한 상황에 맞춰 불교미술품을 발원하고 제작했던 승려 장인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경상도 운제산 오어사의 철현과 영축산 통도사의 영현, 탁진 등이 함께 바닷길을 따라 풍악(楓嶽, 금강산)을 향하던 중 강원도 불영사를 방문했는데, 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자취가 성스러워 마음이 혼연히 기뻐 여름 한 철을 머물게 되었다. ~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움직이는 공방, 이동하는 승려
승려 장인에게는 요청된 상황에 따르는 ‘장인(匠人)’이라는 정체성과 전 공정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작가’라는 정체성이 함께 있습니다. 불사가 있는 사찰을 중심으로 시주자와 재료가 모이고 불사를 감독하고 증명하는 절차가 진행되었기에 승려 장인이 불사 장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승려 장인의 작업 공방은 불사가 있는 사찰에 차려졌는데, 이때 누각이나 암자를 임시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때로 근거지에서 불화나 불상을 조성한 후 봉안처로 보내기도 했고, 여정 중에 요청을 받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매번 작업 환경이 바뀌는 상황을 견뎌내며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달려갔고, 이들이 자리한 곳이 곧 부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공방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길 길위를 걷는 승려
승려 장인은 근거지가 되는 사찰과 자신이 속한 승려 문중이라는 인적관계를 기반으로 작업했기에 활동 범위가 넓었습니다. 본디 승려는 머물되 항사 떠날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을 살지만, 특히 승려 장인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불사가 있는 곳이라면 먼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승려 장인이 모여 협업하며 개성과 개성이 만나 영향을 주고받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남장사 십육나한도>는 비슷한 내용을 그렸지만 지역에 따른 화풍이 반영되어 그 차이점을 살펴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1<17.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이 함께 완성한 십육나한도, 남장사 십육나한도, 조선 1790년, 비단에 색, 상주 남장사>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2<남장사 십육나한도>

두폭의 그림은 나한을 표현했지만 서로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활동한 영수.위전과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상겸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집단이 나누어 그렸기 때문입니다. 영수와 위전이 그린 나한도에는 오색구름과 꽃으로 둘러 싸인 산을 배경으로 바위에 나한이 앉아 있는데, 강렬한 채색의 대비가 돋보입니다. 상겸 등이 그린 나한도에는 바위 사이로 자라는 소나무 옆에 섬세한 필치로 나한을 그렸습니다. <남장사 십육나한도>는 1788년 <불사성공록>에 기록된 불사 이후에도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경성화공과 문경 대승사 지역에서 활동한 대승화공이 협업한 사례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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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화승 축연이 그린 금강산을 유람하는 나한, 통도사 십육나한도(제10존자), 축연 등 2명, 1926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금강산 구룡폭포 앞에 앉아 있는 나한을 그린 특이한 그림입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불사를 따라 이동하는 승려 장인의 삶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축연은 1915년 ‘금강산 유점사의 화승’으로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금강산 관광이 유행하고 철로가 개통되면서 관광안내서와 사진첩이 간행되었습니다. 축연은 당시 유통되던 시각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습니다. 나한보다 화면 중앙의 폭포를 강조한 파격적인 구상이 흥미롭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 그들의 이름을 찾아서
조선시대 승려 장인은 ‘화원(畵員)’을 비롯해 ‘화사(畵師), ‘양공(良工, 기술이 뛰어난 장인)’, 금어(金魚,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승려)’ 등 다양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조선의 승려 장인을 일컫는 호칭으로는 ‘화원’이 가장 많이 쓰였고, 조각승과 화승을 따로 구분해서 사용한 공식 명칭은 없는 듯합니다. 다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이들을 존경하는 뜻을 담아 ‘불모(佛母)’로 부르기도했습니다. 특정 승려 장인에게는 ‘묘수장사(妙手匠師, 빼어난 솜씨의 승려장인), ‘교장(巧匠, 솜씨가 교모한 장인), ‘호선(毫仙, 붓의 신선), ‘존숙(尊宿, 본보기가 될 만한 승려)’과 같은 특별한 수식어가 붙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의 시대
조선 후기 승려 장인에는 예배 대상인 불상과 불화를 만드는 조각승과 화승 뿐만 아니라 불전을 짓는 건축승과 기와를 굽는 기와승, 범종을 만드는 주종승(鑄鐘僧), 비석과 목판에 글을 새기는 각자승과 판각승, 목재 불구(佛具)를 만드는 목공예승 등 여러 분야가 있었습니다. 일부 승려 장인은 분야를 넘나들며 사찰 곳곳에 다양한 불교미술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예배 대상을 비롯해 사찰의 상당수를 만들어 낸 승려 장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불교미술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 후기는 ‘승려 장인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선시대 승려들은 사찰 건축 등 불사를 주도했을뿐 아니라 사회에서 필요한 분야에 적극 참여하였다. 성곽의 축성이나 다리 건설 등에서 승려 장인은 많은 역할을 했으며 수원화성을 비롯하여 전국의 읍성과 산성, 돌다리 등에 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4<19. 승려, 성곽을 짓다, 화성성역의궤, 조선 1801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5<단청에 참여한 승려 장인 명단>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불교미술품 제작 외에 성곽이나 왕릉의 조성처럼 국가적인 공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정조의 꿈이 담긴 새로운 도시 수원 화성의 축성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성을 쌓는데 참여한 승려 장인 73명의 이름과 거주 지역, 참여 일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여에 참여한 여러 승려 장인 가운데 나무를 잘 다루어 편수(篇首, 책임을 맡은 기술자)가 된 강원도 김화 출신 굉흡의 활약이 주목됩니다. 그는 장안문과 방화수류정 건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은 이처럼 나라의 비중있는 건축 사업에 동원될 정도로 기술과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남북 문루는 15일 전데 단청을 시작했는데, 화공 수가 적어 분배할 수 없어서 관문을 발송한다. 경내 각 사찰에서 솜씨가 뛰어난 화승을 일일이 수색 탐방하여 오는 15일까지 공역 장소에 대기시키고, 덕사(德寺, 양주 흥국사) 화승 연흥을 도화승으로 임명하여 보내니 즉시 전교한 후 사람을 올려 보내서 지연되지 않도록 한다.” – <화성성역의궤> 권3 양주목, 1794년 9월11일(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6<20. 중흥사에서 모임에 함께 한 승려들, 금란계회도, 조선 1857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7<주요 장면>

북한산 중흥사 인근 야외에서 안시윤이 벗들과 가진 모임을 그린 것입니다. 중흥사는 조선 후기에 북한 산성을 쌓은 후 승군을 총괄하는 총사령관격인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 머물던 사찰입니다. 19세기에는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 등 많은 문인이 중흥사를 방문하여 시를 지으며 승려들과 교유했습니다. 그림에는 안시윤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승려들이 무리를 지어 편하게 앉아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구고 있습니다. 고깔을 쓰고 염주 목걸이를 한 스님 세명은 중흥사 승려 태월, 수월, 한파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문인 모임에 승려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렸음을 잘 보여주는 기록화이자 풍속화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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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승 의인이 그린 선비들의모임, 을축갑회도, 의인, 조선 1686년, 비단에 색, 서울역사발물관>

청주 보살사의 화승 의인이 을축년(1625년)에 청주 지역에서 출생한 동년배 모임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모임을 그림으로 남기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붉은색을 사용한 얼굴묘사와 길게 늘어진 옷 주름선 등은 고승의 초상화인 진영(眞影)의 표현방식과 유사합니다. 이 작품으로 불화뿐만 아니라 일반 회화까지도 승려 장인이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화승은 동실대를 살아간 다른 신부의 사람들 모임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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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화승 혜호가 그린 삿갓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소동파입극도, 혜호,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화승 혜호가 그린 북송대 문인 소식의 모습입니다. 소식은 소동파라는 호로 더 유명합니다. 혜호는 19세기 경기.강원 지역에서 활동하며 금강산 일대 사찰 불사를 주로 담당했고, 다른 화승들이 잘 그리지 않는 유배 중인 소동파 그림을 모사했습니다. 아마도 김정희 제자인 허련의 그림을 옮겨 그렸을 것입니다. 당시 문예계를 이끌던 김정희는 혜호의 스승인 화담 경화 문중의 승려들과 긴밀하게 교류했고, 혜호도 김정희나 그의 제자들과 관계를 쌓았습니다. 당대 문인과의 폭넓게 교류했던 승려 장인의 작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시대와 함께한 승려 장인
승려 장인은 출가한 수행자였지만 사회의 한 일원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해냈습니다. 승려 장인이 남긴 결과물은 불상과 불화를 비롯한 사찰과 관련된 것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관청의 부름을 받아 궁궐과 도성을 짓거나 심지어 마을에 다리를 놓는 일까지 크고 작은 일에 동원되어 전문성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당대 문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하며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내용을 표현했습니다. 속세를 떠났지만 그들은 대중과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제작하는 기술자이나 예술가 역할 뿐 아니라 불사를 위한 모금활동, 전문 기술자의 초빙 및 역할 분배 등 제작자로서의 역할도 하면서 사찰건축이나 불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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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화승 혜식 등이 그린 영취산에서의 석가모니부처 설법 장면, 영취사 영산회상도, 혜식, 조선 1742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혜식을 비롯한 화승 일곱명이 그린 영산회상도입니다. 조선 후기 승려 추파 홍유가 쓴 <안음영취사기>에 따르면 당시 사찰의 주지였던 보안의 주도로 쇠락한 영취사를 7년에 걸쳐 재건한 후 대웅전에 봉안할 불화 네점을 조성했습니다. 새로 그린 대웅전 불화 가운데 이 불화만이 전합니다. 하단부에는 붉은 화기란을 마련해 불화를 제작한 일자와 화승, 영취사의 승려들과 시주자의 이름을 금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불사의 성대함을 반영하듯 ‘대영산’을 그려 봉안했다고 했으며, 불화를 그린 화스의 모임을 비수갈마천의 모임이라는 뜻인 ‘비수회’ 로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수갈마천에 빗대어 종교적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21<24. 혜식의 평생 소원이 담긴 발원문,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40년, 종이에 먹, 대구 파계사, 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20<뒷부분>

파계사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의 발원문으로, 관음보살상의 개금뿐만 아니라 인근 사찰과 소속 암자의 불사를 진행한 내역이 기록되었습니다. 1740년에 있었던 영조대 왕실 불사의 총감독은 도화원 혜식이었습니다. 혜식은 불보살을 그려 각각 존상을 갖추는 것이 자신의 평생 소원임을 밝히고 밀기, 명준, 위순, 성청 등 열세 명과 거의 2년에 걸쳐 인근 지역과 암자의 불상을 개금하고 불화 세트를 그렸습니다. 단순한 제작자를 넘어 평생의 소원으로 불사를 기획한 승려 장인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발원문입니다. ”도화원 혜식의 평생 소원인 불보살을 그리고 존상을 갖춘 일과 횟수를 가려 적은 기록”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22<25.화승 철유가 자신을 그린 그림, 자화상, 철유, 20세기 초, 비단에 엷은색, 간송미술문화재단>

한 승려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고요히 앉아 있습니다. 먼 곳을 응시하는 눈매는 수행자의 내적 경지를 드러내는 듯 합니다. 이 그림은 근대 화승인 철유의 자화상입니다. 철유는 불화 뿐 아니라 산수화, 신선이나 불교 고승을 그린 그림에도 뛰어나 명성을 얻었고, 근대 최고 화승으로 당시 신문에도 몇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전하는 유일한 화승의 자화상입니다. 철유는 법식을 갖춘 노승 혹은 화승의 모습이 아닌 편안한 노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담담히 표현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 철유(1851~1971년)는 어떤 인물일까요?
속세의 성은 김씨이고 섭호는 석용입니다. 건봉사 화승으로 알려진 혜호에게 가르침을 받아 약 40년간 불화를 제작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 수화승으로 활약하며 30점 가량의 불화를 남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축연과 함께 당대 최고의 화승으로 불렸습니다. 금강산화파의 대표 화승으로서 불화와 산수화에 모두 뛰어났다고 합니다. 철유는 금강산 표훈사, 신계사, 유점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의 불화를 그리고 불상을 개금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제작자에서 기획자로
승려 장인은 제작자뿐만 아니라 시주자나 화주로도 참여하는 등 하나의 불사에서 두가지 이상의 소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여러 불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불교 교리와 도상을 깊이 이해했기에 불상이나 불화의 내용이 맞는 지 살펴보는 증명으로도 초빙되었습니다. 옛 불화와 불상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수행하던 이들이 어느새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어 후배와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또한 점차 제작자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기획자가 되어 후원을 하고 사원 중수에도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사의 소임, 인연을 맺은 사람들
소임은 맡은 직책이나 임무를 뜻합니다. 사찰 내에서 위계에 따라 혹은 불사가 있을 때마다 승려는 그에 적합한 다양한 역할, 즉 소임을 다했습니다. 불상과 불화를 만드는 것 역시 승려 소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교리를 잘 아는 경험 많은 승려는 법식대로 바르게 진행되는지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어떤 승려는 속세를 다니며 시주를 유도하고 동참자를 모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불사를 위해 젓가락을 준비하는 사소한 일부터 전각을 관리하는 일까지 모두 소임의 하나입니다. 크고 작은 역할의 구분 없이 정성스럽게 임한 이들의 마음은 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부처의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화원으로 불린 승려들

불교에서 신앙활동과 장엄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불교예술품들은 대부분 승려 장신들이 만든 것이다. 승려 장인은 출가한 승려이자 전문기술과 예술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들은는 수행자로서의 깨달음과 예술가로서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이들은 활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활동해 왔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솔거와 담징, 황룡사 목탑을 건축한 아비지, 석가탑을 만든 석공 아사달,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조각승 양지 등 뛰어난 승려장인들의 흔적이 유물 또는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 공동체를 이루어 사찰에 필요한 기물 대부분을 만들었으며 계보를 이루어 전승이 이루어지면서 표준화된 조성양식 위에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였다.

조각승 연희가 <금강경(金剛經)>을 새긴 목판이다. 석가모니부처가 제자 수보리를 위해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1<1. 각수승 연희가 금강경 내용을 새긴 목판, 금강경변상도 목판, 연희, 조선 1679년, 통도사 성보박물관>

연희는 울산 운흥사에서 약 20년간 15종류의 불교 경전 간행에 참여하며 직접 경전을 새기며 진행 과정을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다잇 사찰을 유람하며 연희와 만났던 문인 정시한은 그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11년째 경전 수천 매를 새기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승려 장인에게는 매 순간 반복된 작업 역시 수행의 일환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 화련인 그린 밑그림이다. 정제된 선으로 다섯 조사와 동자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2<2. 화련이 그린 서른세 명의 높은 경지에 이른 스님, 쌍봉사 삼십조사 밑그림, 조선 1768년, 종이에 먹, 통도사성보박물관>

부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구도자로서 귀감을 보인 조사(祖師) 서른세 명을 그린 밑그림의 일부입니다. 부처와 보살 외에 조사나 나한 같은 수행자도 불교미술의 주된 소재였습니다. 화련은 강약을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굵고 힘 있는 선으로 암석과 나무의 질감을 살리고, 정제된 선으로 부처의 말씀을 이어온 다섯 조사와 동자를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밑그림이지만 완성본을 보는 듯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우리나라 승려 장인의 역사
승려 장인은 시대에 따라 처한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성격과 위상이 바뀌었습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장인은 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을 갖춘 전문가 또는 지식인으로 우대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하면서 승려 장인의 활동도 세분화, 전문화되었습니다. 유교가 국가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조선시대에는 승려 장인의 지위가 이전보다 낮아졌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활동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은 전국의 사찰을 승려 장인이 중심이 되어 재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사찰으 중심으로 전문화된 직능을 갖춘 승려 장인 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조선 후기에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불상과 불화를 조성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은 부처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존재로 불교 12천인 중 한명이다. 인도 신화에서 기술과 공예, 건축의 신이다. 그림에서는 망치와 정을 들고 불상을 조각하는 비수갈마천이 표현되어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3<3. 최초의 불상을 만든 이야기가 실린 책, 석씨원류응화사적 권2, 조선 1673년, 종이에 먹, 동국대하교>

석가모니부처 일대기와 제자들의 행적을 정리한 <석씨원류응화사적>에는 기술과 창조의 신 ‘비수갈마천’이 최초의 불상을 만든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가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잠시 하늘의 천궁에 오르자 지상의 우전왕은 그를 그리워하여 그 모습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때 비수갈마천이 장인으로 변하여 석가모니부처의 초상 조각, 즉 최초의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비수갈마천은 성스러운 부처의 모습을 구현하는 조선시대 승려 장인의 자의식과 정체성 형성에 영감을 주었습니다.<금강경(金剛經)>은 석가모니부처가 제자 수보리를 위해 전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연희는 그 가르침을 오래 이어가고자 단단한 나무에 부처가 가르침을 펼치는 장면을 새겼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우리는 비수갈마천이다.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은 최초로 불상을 만들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천상과 지상의 호화로운 궁전과 성곽 등을 짓는 건축의 달인이자 신통력을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술과 창조의 신이었습니다. 조선의 승려 장인은 자신들이 제작하는 불상과 불화에도 비수갈마천이 만든 부처의 첫 초상처럼 초월적인 생명력과 성스러움이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수갈마천의 모임’이라는 뜻의 ‘비수회’라고 부르며 종교적 위상을 높였고,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약사십이신장도>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조성한 불화이다. 정교한 필선, 화려한 채색, 회화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문정왕후가 후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5<4. 나라의 안녕을 위해 대비가 발원한 불화, 약사십이신장도, 조선 16세기 후반, 비단에 색, 미국 보스턴미술관>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대비가 솜씨 좋은 장인에게 명하여 조성한 불화 다섯 폭 중 하나입니다. 발원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전기에 불교를 후원한 대표적 왕실 여성인 문정왕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작자는 16세기 왕실 불화를 주도했던 화원 이자실 또는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다른 화원일 수도 있으나 확실치 않습니다. 이 불화는 조선 후기와 달리 시주와 제작에 관련한 이들의 이름이 화기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정교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 풍부한 회화적 묘사가 돋보이는 16세기 왕실 발원 불화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발원기록이나 제작자 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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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밀지 정수사에서 조성한 아미타불상,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조선 1482년, 국립중앙박물관>

1482년 오늘날 경상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다밀지(多密地) 정수사(正水寺)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1910년 경상북도 칠곡 천주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좁은 어깨와 긴 허리, 머리에 솟아오른 육계와 그 위에 볼록한 구슬 모양 계주는 15세기 왕실 발원으로 조성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년)과 유사합니다. 조선 전기 왕실 불사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 소속 화원과 관아 소속 장인들이 함께 참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고려 후기 조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중국 명나라와 교류하며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왕실 발원 기록이나 제작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전기 불상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국보)>는 1945년 중건된 영주 흑석사 대웅전에 있는 불상이다. 복장유물과 함께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1458년) 법천사 삼존불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복장 유물 중에는 조성내력과 시주자 명단이 있는 <불상조성권고문>, 불교 서적 등이 있어 당시 불상 조성 내력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6<6. 불상 조성을 위해 시주를 권하는 글, 아미타여래삼존상 조성 보권문, 조선 1457년,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지금부터 5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책입니다. 쉽게 구겨지지 않는 딱딱한 장지를 썼고 표지는 초록색 비단을 덮어 공들여 만들었습니다. ‘대공덕소’라는 제목이 있는 면은 아코디언처럼 펼쳐집니다. 제목이 있는 앞표지를 넘기면 불상을 조성하게 된 연유와 공양.보시.채색.칠 등의 시주 항목이 차례로 나옵니다. 1457년 정암산 법천사에 봉안할 불상 제작에 시주를 권하기 위해 만든 이 책에는 시주자로 참여한 의빈 권씨, 명빈 김씨, 효령대군 등 내명부와 왕실 종친 명단, 불상 조성을 주도한 승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상은 이 글이 작성된 후 1년 8개월 뒤에 완성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7<7. 불상 제작에 뜻을 모으고 참여한 사람들 명단, 아미타여래삼존상 조성 복장기, 조선 1458년, 명주와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와 명빈 김씨, 효령대군, 세종의 부마 등 왕실인사와 장인, 시주자까지 불상의 발원과 제작 과정에 관여한 인물 275명을 187행에 걸쳐 상세히 기록한 3.8미터 길이의 명단입니다. 이 명단은 명주와 백지를 이어 붙여 만들었습니다. 화원을 비롯한 부금(付金), 금박(金箔), 칠, 각수(刻手), 마조(磨造), 소목(小木) 등 일련의 목조불상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업무 분야가 적혀 있는 보기 드문 자료입니다. 당시 관아에 소속된 장인들이 이 일을 했을 것이며, 여기에 언급된 업무 분야는 <경국대전>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원으로 불린 승려들
승려 장인에게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던 듯하나 불상의 발원문이나 불화의 화기에는 ‘화원’으로 기록된 사례가 많습니다. 본래 화원은 조선시대에 그림에 관한 일을 도맡아 하는 도화서 소속 관원을 이르는 호칭입니다. 승려 장인은 조선 전기에는 도화서 화원과 함께 왕실 불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관영 수공업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궁궐과 성곽 건축을 비롯한 국가의 토목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승려 장인 이름 앞에 어떤 까닭으로 화원이라는 호칭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화원이라는 호칭은 승려 장인이 국가의 공식적인 일에 참여하여 ‘화공승(畵工僧)’, ‘국화승’, ‘화승’ 등으로 불렸던 일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석조지장보살좌상(보물)이다. 높이 33.4cm의 작은 불상으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을 깍아 만든 석조불상으로 몸체는 뚜껍에 도금하였으며 대좌에는 붉은 빛 칠을 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목은 짧으며 다리와 양손을 작게 표현하고 있다. 바위형태 대좌 뒷면에는 불상의 조성경위, 시주자, 제작연대를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09<8. 절학 등 승려 장인이 만든 지장보살, ‘정덕십년’이 새겨진 석조지장보살좌상, 절학 등 2명, 조선 1515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조선 전기인 1515년 승려 장인으로 추정되는 화원 ‘절학’과 산인 ‘신일’이 함께 만든 지장보살상입니다. 한 덩어리 돌을 깎아 울퉁불퉁한 암석 모양 대좌 위에 앉은 지장보살을 표현했고 뒷면에 조성기록을 새겼습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은 조선 전기 지장보살상의 특징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사찰에 필요한 상당수의 것들을 승려 장인이 만들었는데, 조선 전기부터 승려 장인들이 활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의 해체.수리과정에서 탑신,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발견된 묵서에 따르면 성종 때 처음 발원하여 불상들이 조성되었으며 인조 6년 인목대비가 발원하여 조성한 불상이 추가로 납입되어었다고 한다. 탑이 중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0< 9. 수종사 석탑에 봉안된 서로 다른 시대의 불상,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서 나온 금동불좌상, 조선 15세기 1628년, 불교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 금동석가여래삼존좌상,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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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동불.보살좌상, 성인, 1628년>

이 작은 금동불들은 1483년과 1628년에 왕실 여인들이 발원하여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안에 봉안했습니다. 1583년에 봉안된 석가여래삼존좌상은 제작자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의 후궁이 시주하고 성종의 후궁이 발원했습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글에는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금동석가여래좌상을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1628년의 불상들은 인목대비가 발원하고 조각승 성인이 제작했습니다. 조각승 성인은 1622년 광해군 비인 장렬왕후가 발원한 왕실 불사에도 참여했습니다. 둥글고 통통한 얼굴과 미소 띤 표정, 목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구부려 웅크린 자세가 앞서 봉안되었던 석가여래삼존좌상과 다릅니다. 같은 탑에서 나온 불상이지만 서로 다른 시기의 불상양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은 종로구 창신동 지장암 대웅전에 있던 불상이다. 높이 117.6cm의 중형 목조불상이다. 광해군의 비 장렬왕후를 비롯하여 왕실 여인들이 발원.시주하여 조성한 불상이다. 조성내력이 적힌 발원문 등에 따르면 당대의 고승과 승려 장인들이 참여한 걸작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2<10. 왕비의 부름으로 현진을 비롯한 전국의 승려 장인이 만든 불상,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현진 등 17명, 조선 1622년,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광해군 비인 장렬왕후가 발원하여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히기 위해 제작한 불상 열한 구 중 하나입니다. 자수사와 인수사는 왕실 여인들의 말년 출가 수행처로, 권래에 있던 내불당과 달리 궐 밖에 있었습니다. 이 불사를 위해 현진, 응원, 수연, 법령을 비롯한 조각승 열세 명과 철을 다루는 승려장인 네 명이 모여 공동작업을 펼쳤습니다. 이 가운데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평가받는 현진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로 남은 조각가 영장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현진, 응원, 수연 등 조각승 집단을 이끄는 거장들이 협업하여 왕실 사찰의 존상을 만든 사례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왕실의 부름을 받다.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지만 왕실은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세의 평안을 빌기 위해 불교에 의지했습니다. 조선 전기 왕실 불사(佛事)는 도화서 화원과 관청 소속 장인, 주지나 대선사(大禪師)를 지낸 비중 있는 승려 장인이 참여한 것이 특징입니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승려들은 점차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고 경제력을 키워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승려 장인은 왕실 발원 불사를 도맡게 되었습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17세기 전반에는 승려들의 총대장이었던 벽암 각성(1575~1660년)이 왕실의 부름을 받아 전국에서 모인 승려 장인을 이끌고 광해군의 비 장렬왕후가 발원한 자수사와 인수사 불사를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왕실 불사를 맡아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한편 조선의 사찰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가꾸어 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3<11. 불상을 만드는 바람이 담긴글,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조성 발원문, 조선 1622년, 비단에 붉은 먹,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왕실 여인들의 말년 출가 수행처였던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할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며 남긴 바람이 담긴 글(발원문)입니다. 이 글에 따르면 불사의 재원은 왕실 재산인 내탕금으로 마련했고, 뛰어난 장인을 모집해 불상 열한 구와 불화 일곱 폭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발원문 마지막 부분 상단에는 불사가 교리에 맞춰 진행됐는지를 확인하는 증명 역할에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존경받언 고한 희언과 벽암 각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불상을 조각한 화원 13명과 철을 다루는 승려 장인 4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4<불상 안에서 나온 신성한 물건들,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복장물, 조선 1622년 무렵, 국립중앙박물관, 보물><1. 후령통과 오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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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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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6<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7<3. 오천오백물명신주재장밀죄경>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19<4. 대방광불화엄경소>

12. 불상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복장물은 불상 조성의 역사도 보여주는 소중한 타임캡슐입니다. 불복장의 핵심인 노란 보자기에 싸인 후령통과 경전을 비롯한 다라니 수백 장으로 이 불상의 내부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5,500명의 부처 이름과 신비한 주문으로 죄를 없애게 한다는 <오천오백불명주제장멸죄경>은 고려대장경을 다시 인출하여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화엄경> 주석서인 <대방광불화엄경소>는 불상 조성 이후인 1629 ~1631년에 연천 용복사에서 만든 목판을 그대로 찍은 것으로, 불상을 만든 다음에 다시 넣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름무늬가 있는 감색 비단으로 표지를 감싸고 다섯개의 구멍을 뚫어 붉은 실로 묶었습니다. 이외에도 <묘법연화경>과 그 주석서인 <묘법연화경요해서>와 같은 경전이 불상 안에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의 타입캡슐: 화기와 발원문
수천 명이 넘는 승려 장인의 흔적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불화 화면 아래에 적은 ‘화기(畵記)’와 불상 안에 넣어 둔 ‘발원문’에는 제작자인 승려 장인을 비롯한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 그리고 그들의 바람이 적혀 있습니다. 화기와 발원문은 보통 불사에 재정 지원을 한 사람들의 명단인 시주질(施主秩)과 승려 장인을 포함하여 제작 실무를 담당한 사람 명단인 연화질(緣化秩) 등으로 구분해서 기록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직접 손으로 만든 작품 속에 이름 두 자로 삶의 흔적을 남겼고, 마치 타임캡슐처럼 조선 역사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이 불사를 주도했던 조선과는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문 장인이 제작하였다. 이들 출가한 수행자가 아니고 혈연관계나 사제관곌르 통해 기술과 명성을 이어온 장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오늘날까지 이런 장인집단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불화는 화려한 색채감이나 섬세한 세부표현이 돋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31<명나라 황실에서 조성한 영혼을 위로하는 불사, 수화, 중국 명 1454년, 비단에 색,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13. 수륙화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영혼을 구원하는 불교 의식인 수륙회(水陸會)에 사용한 불화입니다. 각 폭에는 부처와 보살, 나한, 명왕, 천중(天衆)과 신중(神衆)을 비롯해 옛 제왕과 문무관, 민가의 여러 영혼이 구름을 타고 의식 공간에 강림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수륙화는 1454년에 중국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황제 전용 가구를 제작하던 여용감의 태감(환관) 상의와 왕근 등이 감독하고 조성했습니다. 명나라 황실 내부에 공식적인 궁정 화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인지전이나 무영전 등에 궁정화가를 두고 황실과 조정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이 그림은 불법을 지키는 여러 수호신을 그린 것입니다. 밝고 화사한 색감과 더불어 황실 발원 불화답게 섬세한 인물묘사가 돋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가마쿠라 시대(13세기) 가이케이파 양식을 따르고 이는 목조아미타여래 입상은 경주 백율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8세기)와 크기나 형태 등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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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가이케이(快慶)’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 목조아미타여래입상, 일본 가마쿠라시대, 13세기, 일본 도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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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백률사 약사여래입상(국보), 8세기>

일본 카마쿠라 시대 게이파(慶派) 불사의 계보를 잇는 가이케이의 ’3척 아미타’양식을 충실히 따른 목조아미타여래 입상입니다. 가이케이는 자신이 만든 1미터 남짓의 아마타여래입상에 법명인 ‘안아미타불(安阿彌陀佛)’을 마치 서명처럼 사용하여, “교장안아미타불 가이케이(솜씨가 교묘한 장인 안아미타불 가이케이)”라는 묵서를 남겼습니다. 이 상도 왼쪽 발 아래, 상을 대좌에 고정하는 부분에 흐릿한 묵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케이가 만든 다른 상보다 크기가 약간 작으면서, 둥글고 사실감이 떨어지는 얼굴 표현 등으로 보아 가이케이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게이 파의 다른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이웃 나라의 불교미술 제작자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존속한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황실이나 민간 발원 구분없이 화사 혹은 화공이라 불리는 전문화가가 불화를 그렸습니다. 불상도 주로 전문 장인이 제작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예부터 불상을 제작하는 장인을 ‘불사(佛師)’라고 불렀고 최고의 불사에게 승려 직위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불사는 혈연과 사제 관계를 바탕으로 기술과 명성을 이어간 장인에 가까웠고 조선의 승려 장인처럼 출가한 수행자는 아니었습니다. 사찰에 필요한 상당수의 기물을 승려 장인이 직접 만든 문화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자적인 문화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화원 20220125_20<중앙박물관 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조선의 승려장인
1. 승려장인은 누구인가?
승려 장인은 불교의 신앙 대상을 비롯하여 건축, 불구(佛具) 또는 장엄물 등 사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전문 기술을 갖춘 출가 수행승을 말합니다. 승려 장인의 전통은 성스러운 존재를 형상화하여 스스로 수행함과 동시에 중생 구제를 추구하는 불교 특유의 사상과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승려 장인의 활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가에는 승려 장인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찰에 필요한 기물 대부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승려 장인은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그중에서도 예배의 중심인 불상을 조성하는 ‘조각승’과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 법맥을 이어 가듯 자신들의 계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승려 장인들은 선배들이 일구어 낸 표준화된 조형 양식의 기반 위에서 각자 개성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의 색채가 뚜렷한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수행승이자 예술가
승려 장인은 깨달음의 길을 걷는 출가 수행승인 동시에 사찰에 필요한 기물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라는 서로 다른 두가지 정체성을 지닙니다. 승려 장인 중에는 사찰의 주지로 있거나 대선사(大禪師)의 위치까지 올라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이도 있었습니다.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할 때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 증명의 역할도 겸하며 높은 경지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불상과 불화의 상징성을 극대화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종교적 위엄을 갖춘 이상적 모습의 불상과 불화를 만들지 고민하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사찰에 필요한 불사에 임하는 정성 어린 태도와 숙련 과정은 수행자로 하여금 장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중앙박물관 서화관] 행려풍속도, 김홍도가 바라본 세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이다. 1778년 김홍도의 강희언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린 것으로 선비가 세상을 유람하면서 마주치는 풍경을 8폭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장관에서 쇠를 두드리는 장면과 주막에서 밥을 먹는 나그네의 모습,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광경이, 포구에서 항아리와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 들녁에서 목화 따는 아낙들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 당나귀와 물새가 서로 놀라는 돌발적인 상황, 벼타작 풍경, 거리에서 판결하는 태수 행렬 등을 표현하고 있다. 인물의 자세와 표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복식이나 소품 또한 정밀하게 묘사했다. 산과 강, 논밭 등의 산수 배경과 인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세황이 감상평을 글로 적어놓고 있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09<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그림 김홍도 글 강세황, 조선 1778년, 비단에 엷은 색>

김홍도는 길을 떠난 나그네가 조선을 유람하며 보았던 장면을 8폭으로 제작했다. 병풍의 제일 오른쪽의 1폭부터 8폭까지 각각은 <거리의 판결>, <길가대장간>, <나루터>, <어물장수>, <놀란 나그네>, <타작>, <길위의 풍경>, <훔쳐보기>이다. 김홍도는 인물의 자세와 표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복식이나 소품 또한 정밀하게 묘사했다. 비단에 섬세하게 그려진 8폭의 병풍은 작은 종이에 핵심 장면만을 간략하게 묘사한 <단원풍속도첩>과는 달리, 산과 강, 논밭 등의 산수 배경과 인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각 폭마다 표암 강세황의 평이 적혀 있어 격조와 흥취를 높여 준다. 8폭에는 관서가 있어 1778년 초여름에 김홍도가 34세 중인 화가인 강희언의 집, 담졸헌에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01
<1폭 거리의 판결, 취중송사(醉中訟事)>

술이 취한채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1<주요장면>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각각 물건을 들고 견여의 앞에서 쫓아가니 태수의 행색이 초라하지 않네. 촌민이 다가와 항소하니 형리가 문서에 적네. 취기에 올라 부르고 적으니 어찌하면 오판이 없을 것인가!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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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폭 길가의 대장간, 노변야로(路邊冶爐)>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장면이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2<주요 장면>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첩 중에는 비슷한 장면들이다. 있다. 배경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장면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사전 준비였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단원-풍속도첩보물20210512_02<풍속화첩(보물) 중 주막>

단원-풍속도첩보물20210512_03<대장간>

논에는 해오라기가 날고 높은 버드나무에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풀무간에서는 쇠를 두드리고 나그네는 밥을 사먹는다. 시골주막의 쓸쓸한 광경이지만 오히려 한가로운 맛이 있네.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03
<3폭 나루터, 진두대주(津頭待舟)>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광경을 그렸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3<주요 장면>

백사장 머리에 나귀를 세워놓고 사공을 부르네. 나그네 두 세 사람도 같이 서서 기다리네. 강가의 풍경이 눈앞에 완연하다.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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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폭 어물장수, 매염파행(賣塩婆行)>

  포구에서 항아리와 광주리를 맨 아낙네를 표현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4<주요 장면>

방게, 새우, 소금으로 광주리와 항아리를 가득 채워 포구에서 새벽에 출발한다. 해오라기가 놀라서 날아가기에 한번 펼쳐보니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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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폭 놀란 나그네, 과교경객(過橋驚客)>

당나귀와 물새가 서로 만나 놀라는 장면을 그렸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5<주요 장면>

다리 아래 물새는 노새의 발굽 소리에 놀라고, 노새는 날아오르는 물새에 놀라고, 길가는 사람은 놀라는 노새에 놀란다. 놀라는 모양새가 입신의 경지이다.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06
<6폭 타작, 타도락취(打稻樂趣)>

 벼타작을 하는 장면을 그렸다. 신분 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보여준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6<주요 장면>

벼타작 소리 들리는데 탁주는 항아리에 가득하고 수확을 지켜보는 이 또한 즐거워 보이네.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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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폭 길가의 풍경, 노상풍정(路上風情)>

소를 타고 가는 아낙네를 살펴보는 나그네를 쳐다보고 있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7<주요 장면>

소를 타고 가는 시골 노파가 무슨 보잘 것이 있어서 나그네가 말고삐를 느슨히 하고 뚫어져라 보고 있는가? 일시의 광경이 사람을 웃긴다.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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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첩(보물) 중 노상파안(路上破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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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폭 훔쳐보기, 파안흥취(破鞍興趣)>

들녁에서 목화 따는 아낙을 바라보는 선비를 그렸다.

중앙박물관 행려풍속도 20211013_18<주요 장면>

헤진 안장에 여윈 말을 타고 가는 나그네 행색이 몹시 피곤하다. 무슨 흥취 있어 목화 따는 시골처녀에게 얼굴을 돌리는가. 표암 강세황이 평하다. 무술년(1778) 초여름 사능(김홍도)이 담졸헌에서 그리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김홍도가 바라본 세상
18세기 대표적인 화가인 김홍도가 바라본 조선은 어떠했을까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병풍(行旅風俗圖屛)은 나그네가 유람을 하면서 보았던 세상살이를 그린 8폭의 그림입니다. 날씨 좋은 어느 날,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난 선비는 거리에서 판결을 하는 태수 행렬, 대장간의 대장장이,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소를 타고 이동하는 아낙 등을 만나고, 때로는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은 김홍도의 탁월한 묘사와 재치에 감탄하여 각 폭마다 평을 적었습니다. 그림과 글을 번갈아 보며 조선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재미있게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서화관] 신선을 만나다.

신선도(神仙圖)는 신선들의 모습과 설화를 표현한 그림이다. 도교의 신선사상과 함께 발전하였다. 장수(長壽)와 무병(無病)과 같은 생에 대한 애착과 기복적인 바램을 위해 그려졌다. 그림에는 많은 신선들이 등장하지만 그중에 팔선(八仙)으로 불렸던 종리권, 여동빈, 장과로, 한상자, 이철괴, 조국구, 남채화, 하선고가 많이 그려졌으며 노자, 황초평, 마고선년, 하마선인, 동방삭, 서왕보, 장지화 등도 많이 보인다. 그림에 등창하는 신선들은 각자 관련된 설화에서 묘사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국에서 신도는 남북조시대에 등장하여 당대까지는 인물화로, 북송때에는 불교와 도교를 주제로 한 그림(도석인물화)으로 분류되었다. 남송대 선종(禪宗) 인물화법이 더해지면서 꾸준히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에도 신선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여 조선후기 17세기에 성행하였다. 선비화가인 심사정과 직업화가인 김홍도를 많은 화가들이 작품들을 남겨 놓고 있다.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1
<종리권과 여동빈,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2
<하선고와 이철괴,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3
<한상자와 조국구,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4
<남채화와 장과로, 여덟 명의 신선들(八仙圖), 맹영광, 중국 명 1640년대, 비단에 먹>

도교에서 숭상되는 여덟명의 신선인 팔선을 한 폭에 두명씩 그린 4폭의 족자이다. 오른쪽 첫번째 폭부터 죽은 자를 살리는 부채를 든 종리권과 그의 제자 여동빈, 팔선 가운데 유일한 여선인 하선고, 자신의 몸을 찾지 못하고 걸인의 몸으로 살아간 이철괴, 퉁소를 잘부는 한상자, 하늘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한 조국구,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남채화, 불로장생의 비법을 깨달은 장과로를 그렸다. 섬세하면서도 개성적인 얼굴 묘사와 신선마다 특징적인 지물 표현, 예리하고 날카로운 철선묘(鐵線描)의 옷주름 표현은 당시 중국 화원화가들이 그리는 방식이다. 맹영광은 명말청초에 활동한 중국인 화가로, 병자호란 후 볼모로 잡혀있던 소현세자 일행이 1645년 심양에서 귀국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가 1648년 청으로 돌아갔다.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이징, 이명욱과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심사정(1707~1769년)은 조선중기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증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지만 과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그림을 그렸다. 어려서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진경산수뿐 아니라 중국 절파화풍과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강상야박도>, <파교심매도>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1<용을 마주한 여동빈, 전 심사정,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두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인물이 동굴 앞 벼랑에 앉아 상서로운 구름 속에서 나온 용과 마주하고 있다. 인물 뒤쪽 동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칼과 용으로 미루어 팔선 중 검사인 여동빈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동빈은 평화롭게 방석에 앉은 채 용을 바라볼 뿐 싸울 생각은 없어 보이며 한 쌍의 학과 동자의 모습에서도 별다른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에 심사정의 호 ‘현재玄齋’가 쓰여지고 인장 2과가 찍혔지만, 심사정의 인물화에 비해 공간 배치가 어색하고 인물의 자연스러운 멋이 덜하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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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리권, 작가 모름, 중국 명 15세기, 비단에 색>

종리권은 중국 동한 무장 출신으로 대장군을 지냈다.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풍채가 당당했으며 푸른 눈에 긴 수염을 길렀다. 전쟁에서 패해 종남산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동화제군을 만나 도술을 전수받고 신선이 되었다. 그림에서 종리권은 파도 위에 서 있는데 왼손의 호리병을 가리키고 있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부채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 종리권의 신령스런 면모를 강조한 이 그림은 종교화일 가능성이 커서 단동상 혹은 팔선을 그린 여러 폭 중 한 점으로 생각된다. 15세기 명나라 궁중 화원인 유준은 이러한 단독 신선상을 많이 제작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최명룡(1567~1621년)은 조선중기에 활동한 문인화가이다. 역학에 깊고 수항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취로 그림을 그렸는데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는 그의 대표작인데 신선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화풍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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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 학과 함께 춤을 추는 네명의 선인, 최명룡, 조선 17세기 전반, 비단에 색>

깊은 산 속 커다란 바위 아래 네 명의 선인이 학을 둘러싸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고 있다. 네 사람 중 퉁소를 지닌 인물은 한상자, 박을 치는 인물은 조국구일 가능성이 있다. 오래 살아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함께 어우러진 선인들은 부드러우면서도 흥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흑백 대비가 심한 절벽 표현, 거칠게 그린 나뭇가지와 나뭇잎 처리, 인물을 강조한 구성, 굵고 진하게 표현한 옷 윤곽선 등은 당시 유행하던 절파 화풍의 영향이다. 오른쪽 위에 적힌 ‘석계 石溪’는 문인화 최명룡의 호인데 그는 역학, 음양학, 불교학 등에 능통했고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정선(1676~1759년)은 당시 인기였던 금강산, 관동팔경 등의 명승과 서울 주변 명소들, 지방관으로 근무했던 지역의 경치 등을 많이 그렸다. 초기에는 실경산수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으며 점차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재구성하여 독창적인 진경산수화로 발전시켰다. 산수화 뿐 아니라 신선을 그린 그림들도 작품으로 남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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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는 선인(仙人渡海圖), 정선, 조선 18세기 중반, 종이에 먹>

석장을 잡고 있는 선인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위로 구름에 살짝 가린 둥근 달이 떠 있어 서정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힘찬 필선으로 표현한 옷자락의 생동감, 선인의 인자한 표정, 흐르는 구름과 출렁이는 물결의 유연한 처리 등에서 정선의 뛰어난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의 시구는 중국 명대 철학자 왕수인(1472~1528)의 시 <범해 泛海>의 일부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2<하지장도(賀知章圖), 김홍도, 조선 1804년, 종이에 엷은 색>

당나라 시인 하지장(659~744)이 술에 취해 나귀를 탄 채로 졸고 있다. 그는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풍류를 즐겨 두보는 <음중팔선가 飮中八仙歌>에서 하지장을 술취한 팔선 중 첫번째 인물로 묘사했다. 앞쪽에서 시중드는 인물은 주인이 나귀에서 떨어질까 몸을 붙들고, 나귀는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다. 술동이를 메고 뒤따르는 이는 그 모습이 우스운지 미소를 머금고 앞사람과 눈빛을 주고 받는다. 김홍도는 물기 없는 간단한 붓질로 인물을 표현하고 두보의 시 중 하지장 부분을 행초서(行草書)로 썼는데 그림과 글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3<세발 두꺼비와 노는 유해섬, 심사정(1707~1769년),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유해섬(劉海蟾)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설적인 선인이다. 그는 재상 자리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 초월자이자 내단술(內丹術)인 연금술의 대가였다. 세발 달린 두꺼비는 유해섬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영물인데 특히 돈을 좋아해 유해섬이 종종 엽전으로 그를 꾀어 내곤 했다. 역적 가문의 자손으로 벼슬길이 막힌 심사정은 평생 그림 제작에 몰두했고 다양한 화목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그림은 붓 대신 손가락이나 손톱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로 누더기 옷을 걸치고 두꺼비와 천진하게 놀고 있는 유해섬의 거친 느낌을 잘 살렸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4<해금감, 전 정선,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가파른 바위 절벽이 절경인 해금강의 뱃놀이를 그렸다. 동해의 기기묘묘한 절벽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출렁이는 파도와 암석에 부딪치는 물결을 표현했다. 금강산 근처의 해금강은 18세기 이후 유람의 명소가 되어 많은 이들이 방문했고, 신비로운 대자연을 신선처럼 유람한 경험과 감흥은 시와 그림 제작으로 이어졌다. 절벽을 각지게 표현하고 죽죽 내려긋는 수직준과 파도 표현 등은 정선의 화법과 유사하지만 필세가 다소 떨어져 진작 여부를 검토하게 한다. 정선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바탕에 두고 남종화법을 써서 우리나라의 산천을 특징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를 확립했고, 이는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5<뱃놀이, 심사정, 조선 1764년, 종이에 엷은 색>

쪽배 한척이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유유히 가로지르고 있다. 온 힘을 다해 노를 젓고 있는 뱃사공과 달리 두 선비는 뱃머리에 몸을 기대어 휘몰아치는 풍랑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세상 모든 이치를 통달한 듯 느긋한 모습이다. 좁은 배 위에 놓인 서안과 책, 붉은 매화 가지를 꽂은 꽃병, 고목에 살포시 앉은 학은 이 그림이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신선들의 우아한 뱃놀이임을 암시한다. 58세의 심사정은 만년에 완성한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법으로 거친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결한 존재를 표현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8
<번개의 신(雷公圓), 김덕성, 조선 18세기 후반, 종이에 색>

천둥소리를 내는 북과 망치를 짊어지고 칼을 쥔 번개의 신, 뇌공이다. 입을 쩍 벌리고 한쪽 다리를 길게 내려 뻗은 포즈는 마치 악인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순간을 보는 듯하다. 뇌신은 조선시대 불화에서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작게 등장하는데 이를 독립시켜 단독상으로 그린 점이 특이하다. 김덕성은 정조 대에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신장상(神將像)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뇌신의 우락부락한 근육과 송숭한 체모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강화하고, 근육에 표현된 음영은 조선 후기 서양화법의 수용을 보여준다. 화면 상단의 제발문은 여항문인이자 송석원시사(松石園試社)의 일원이었던 엄계응이 1804년에 쓴 것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19
<약초 캐고 사슴과 벗하기, 전 김홍도, 조선 18세기 말 ~ 19세기 초, 종이에 엷은 색>

지팡이를 든 선인이 뒷짐을 지고 아래쪽의 사슴 한 쌍을 가만히 굽어보고 있다. 곁에 선 동자의 바구니에는 영지와 약초가 가득하다. 험난한 계곡으로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그 위로 홀연히 나타난 인물에게서는 신선과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림 상단에는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도술에 능했던 귀곡자(鬼谷子)의 은둔 생활을 예찬한 당나라 시인 진자앙(661~701)의 <감우시(感遇詩)> 중 일부가 적혀 있다. 김홍도는 말년에 고사인물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귀곡자 혹은 속세를 피해 은거한 선인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20
<남극노인, 조석진, 20세기 초, 종이에 색>

소나무 아래에서 한 손에 복숭아를 든 수노인(壽老人, 남극노인)이 뿔이 길게 자란 흰 사슴 위에 걸터 앉아 있다. 수성(壽星), 즉 남극성(南極星)은 본래 도교에서 중시되는 별자리로, 장수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에 따라 의인화되어 노인으로 시각화되었다. 화면에 남극노인과 함께 등장하는 소나무, 복숭아, 사슴 역시 장수를 상징한다. 조석진의 고사인물화는 스승인 장승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동일한 도상을 반복적으로 활용해 많은 수의 작품을 제작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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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로, 작가모름, 조선 19세기, 비단에 엷은색>

장과로는 중국 당나라 7 ~8세기 무렵에 활동한 도사로, 호흡을 조절하는 내단(內丹) 수련을 쌓아 장수했다고 한다. 원나라 때부터 팔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팔선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다. 장과로는 종이 나귀를 타고 하루에 수만리를 갔다고 하는데 나귀를 거꾸로 타고 책을 읽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과로도기도>(보물)와 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여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가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6<바다를 건너는 신선들(海上群仙圖), 작가모름, 조선 18~ 19세기, 종이에 엷은색>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07<뒷부분>

여러 신선들이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바다를 건너는 환상적인 그림이다. 가장 오른쪽에는 악을 물리치는 보검을 등에 멘 여동빈, 그와 함께 다니는 버드나무 정령 유자선, 죽은 이를 살리는 부채를 든 종리권이 그려졌다. 술에 취해 나무 아래에 앉아 졸고 있는 이는 당나라의 은자 장지화이고, 약초가 담긴 소쿠리를 든 여성은 수명의 신 마고(麻姑)이다. 왼쪽 끝의 인물들은 방향을 달리하여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붓을 쥐고 있는 학문의 신 문창(文昌)과 그를 호종하며 두루마리를 든 시동들이다.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와 옷깃을 휘날리는 바람에도 개의치 않는 신선들의 못븡이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묘사되었다. 장수와 행복, 성공을 바랐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소망을 엿볼 수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1<꿈을 꾸는 여동빈, 백은백, 조선 1863년, 종이에 색>

검사(劍士)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눈을 감은 채 비스듬히 앉아 있다. 오른손에 쥔 칼과 도복으로 미루어 팔선 중 여동빈으로 생각된다. 당나라 사람인 여동빈은 질병이나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며 공덕을 쌓았다. 일반적으로 여동빈은 늠름한 관료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처럼 느슨하게 쉬고 있는 모습은 드물다. 이는 여동빈이 꿈을 꾸고 이생무상을 깨달은 뒤 종리권을 스승으로 모시는 황량몽(黃粱夢) 고사와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임당 백은배는 화원 가문 출신의 화원으로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하며 초상화, 고사인물화 등을 그렸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최북(1712~1760)은 조선 영조 때 활동환 화원출신 화가이다.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훼(花卉), 괴석(怪石), 고목(枯木)을 두루 잘 그렸다.  성질이 괴팍하여 기행이 많았으며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미법산수도>, <의룡도>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2<나무그늘에 누워, 최북,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13면 서화첩 중 제4면>

나무 그늘 아래에 노인이 팔을 괴고 편안하게 누워있다. 붉은 매화 나무 아래의 돌 탁자 위에는 술병과 술잔이 그려져 술을 마신 후 산바람과 계곡물 소리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선의 삶을 갈구했던 옛사람들은 잠시 세상일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명상을 하곤 했다. 최북은 18세기에 활동한 직업화가로, 붓으로 먹고 산다는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사용했다. 이 화첩은 심사정의 모란, 석류 그림 2점과 함께 최북의 소, 게, 파도, 꽃, 인물 그림 9점이 섞여 있는데 모두 대중들이 선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3<나무 그늘에서의 휴식, 최북, 조선 18세기>

중앙박물관   신선도20211013_44<나무 그늘에서의 휴식, 최북, 조선 18세기>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인물을 그렸다. 왼쪽 그림에서는 암석 위에 앉아 쉬고 있는 늙은 승려를 그렸다. 가사를 입고 염주 목걸이를 한 그는 대나무 지팡이에 팔을 걸친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그림에는 초립을 쓴 인물이 긴 지팡이를 쥐고 소나무 뿌리 근처에 앉아 있다. 운모가루를 바른 종이 위에 나무와 바위 등을 간략학게 그리고,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로 옆에 전시된 화첩 그림처럼,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는 인물 그림은 이해하기 쉬었다. 직업화가인 최북은 수용에 맞추어 이러한 그림을 다수 그렸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신선을 만나다.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인간의 오랜 소망입니다. 신선은 초월적인 신과는 달리, 역사적 인물로 수련이나 단약 복용을 통해 불로장생했습니다. 중국 원나라 때 대표적인 여덟명의 신선인 팔선(八仙)이 형성된 이후, 신선은 점점 많아지고 세속화되면서 사람들이 장수와 복을 비는 친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속세를 떠니지 못하지만 신선을 동경해 산수유람이나 명상을 하며 신선과 같은 풍류나 아취를 즐기고자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신령스럽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신선들을 그림으로 만나보시는 것은 어떨까요.(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위키백과, 2023년

 

한호 필적 – 석봉진적첩(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호 필적 – 석봉진적첩(보물)>이다. 선조 때 활동한 명필 석봉 한호(1543~ 1605년)이 쓴 노년 필적을 모은 것이다. 1, 2첩은 1602년에서 1604년 사이에 쓴 필적이 실려 있다. 내용은 가까운 친구들에게 지어준 시문, 본인의 자작시, 애호하던 중국 시문이다. 흑지나 감지에 금니로 해서,행서,초서로 다양하게 썼다. 3첩은 도교경전을 필사한 것이다. 18세기 유명한 서화수장가 김곽이 수장했던 것으로 각 첩의 이면에는 인장이 찍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호의 필적 가운대 최고로 여겨지는 유물이다.

중앙박물관 서화의 즐거움 20211013_03<석봉진적첩, 한호, 조선 1602 ~ 1604년, 감지에 금니, 보물>

중앙박물관 서화의 즐거움 20211013_04<석봉진적첩, 한호, 조선 1602 ~ 1604년, 감지에 금니, 보물>

중앙박물관 서화의 즐거움 20211013_05<3첩,  도교 경전읠 필사한 것>

석봉 한호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이다. 한호는 왕실 문서에 글씨를 쓰는 사자관(寫字官)으로 활약하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한호 이전에는 원나라 조맹부(1254~1608년)의 부드럽고 장식적인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했다. 한호는 왕희지의 고전적 서풍으로 회기하여 소박하면서 힘있는 글씨를 완성하였다. 한호의 글씨를 새긴 목판본 <천자문>이 유포되면서 그의 석봉체(石峯體)는 조선후기 서예에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이 서첩은 한호 만년의 글씨를 모은 것으로, 의관이자 서화 수장가로 이름 높았던 석종 김광국이 소장했던 작품이다. 금가루를 개어 써 내려간 유려하고 원숙한 필치가 돋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