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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충남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사적)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보물)이다. 석조는 물을 담는 그릇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 사원, 사찰 입구에 놓여 있다. 석조에 담긴 물로 손을 씻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석조는 화강석 내부를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 석조 양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각 등으로 장식한 흔적이 없으며 작은 배수구마나 있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약 4톤 정도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2<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09년>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1<옆에서 본 모습>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4<반대쪽에서 본 모습>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3<석조 내부>

SANYO DIGITAL CAMERA<작은 배수구>

보원사는 화엄십찰 중 하나로 충남 서해안 일대에서 상당히 유서깊고 큰 사찰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폐사되었다.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마애여래삼존상(국보)에서 보원사 절터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북조와 백제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자 불교문화 전파 경로에 있던 유서깊은 큰 사찰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폐사되었다. 절터에는 석조(보물), 당간지주(보물), 오층석탑(보물), 법인국사탑(보물) 등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보물) 20230316_05<서산 보원사지 절터(사적)와 석조(보물)>

보원사지 석조, 보물,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간결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인해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내부에도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밑바닥은 평평하고 한쪽에 물을 내보내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989년(고려 경종 3년)에 제작된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을 비릇한 다른 석조물들과 관련시켜 볼 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불비상, 금은기, 도용 (남북조, 수, 당)

불비상은 비석형태에 돋을새김으로 불상 등이 새겨진 것으로 마을 입구, 주요 교차로, 사원 등 대외적이고 공적인 장소에 주로 세웠다. 조상의 안녕을 기리고 공덕을 쌓는 역할을 했다.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시대 초 충청도지방에서 불비상이 만들어 졌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1<중국 불비상>

조상비(造像碑)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인 조상비가 등장했다. 조상비의 기본 형태는 네모난 돌에 불상과 명문을 새긴 것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비(碑)에 종교적 숭배대상인 불상이 더해진 형식이다. 중국의 비가 지배계층을 위한 것이었다면 조상비 제작에는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발원자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상비는 마을 입구, 주요 교차로, 사원 등 대외적이고 공적인 장소에 주로 세웠으며, 조상의 안녕을 기리고 공덕을 쌓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전시된 네 점의 중국 불비상은 북위(北魏)와 당(唐)대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로 석가불이나 아미타불, 미륵불이 묘사되고 있고, 일부에는 공양자상과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조상비는 당시 유행했던 불교 도상에 발원자의 염원을 담아 이들의 신앙과 바람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나한, 보살, 신장을 비롯하여 불화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앙한 군상들이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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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佛碑像), 북제 ~ 수(隨)>

다양한 군상이 빽빽하게 묘사된 북제의 불비상이다. 앞면에는 앉아 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나한과 보살, 신장이 주위에 둘러 서 있고 상단에는 꽃줄을 든 천인과 보탑이, 불상 아래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뒷면은 2단으로 된 감실에 오존불과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다. 다양한 상들로 가득 채워져 구도가 복잡하고 세부 표현이 다소 번잡하지만, 부피감이 살아 있는 인물 묘사나 허리를 쌀짝 비튼 보살의 삼곡(三曲) 자세는 눈길을 끈다. 앞면 하단의 명문에는 재주(齋主) 등 읍의 주요 인물 명단과 공양주 등이 “부모님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부처를 모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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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북제 ~ 수>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2<윗부분 오존불>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3<아랫부분 인물상>

높이가 162cm에 이르는 비교적 큰 북제 불비상이다. 앞면은 오존불(五尊佛)을, 중단에는 역사(力士)를 새겼고, 가장 윗부분에는 보탑(寶塔)과 천인을 조각했다. 중단의 역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이다. 뒷면은 상단에 용 장식과 오존불을 새기고, 중단에는 4개의 감실에 각각 삼존불을,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을 표현했다. 가장 아래에는 불비상에 조각된 각각의 상을 공양한 사람의 이름을 새겼다. 불상은 다소 경직된 모습이지만 사자는 예스럽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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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당 현경 5년(660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4<윗부분 불상과 협시보살>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5<아랫부분 감실의 오존상>

당 현경 5년(660년)에 고만해 일가족이 발원한 불비상이다. 육감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불상과, 보살상은 전형적인 7세기 당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 상단에는 의자에 앉은 자세의 불상과 협시보살이 있고 그 위로는 보탑과 천인이 있으며, 중단에는 2개의 감실에 오존상을 묘사했다. 뒷면 상단에는 용 장식이, 중단에는 삼존불과 나무를 새겼다. 명문은 앞면의 하단과 중단의 감실 사이에 새겨져 있는데, 고만해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형수와 처, 조카, 아들, 딸 등 일가친척이 힘을 모아 불비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앞쪽에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 서로 얽혀 있는 용으로 장식했다. 아래쪽에 발원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00여명 넘는 발원자가 참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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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북위 영안 2년(529년)>

북위 영안 2년(529년)에 조성된 불비상이다. 꼭대기 부분은 서로 얽혀 있는 용 4마리로 장식했고 상단에는 삼존불과 발원자의 관직명이, 중단에는 공양자상, 그리고 하단에는 함께 발원한 이들의 이름을 새겼다. 공양자상 사이에 명문이 있는데, 영안 2년에 국왕과 칠세부모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불비상은 마을의 신앙 공동체인 읍의 구성원인 개씨와 양씨, 왕씨 등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발원자가 함께 조성한 것이며 10여 명의 주요 공양자는 말을 타거나 일산(日傘)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금속으로 만든 실생활 기물이 많아졌고, 진한대에 이르면 금은입사(金銀入絲), 감옥(嵌玉), 누금세공 등을 이용한 화려하고 세밀한 금속기가 만들어졌다. 당대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으로부터 금속제 그릇들이 수입되었으며, 그들로 부터영향을 받아 상당히 수준높은 금속제 그릇이 만들어졌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9<금은기>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4<금은기>

당(唐)대의 금은기(金銀器)
당대에는 수준 높은 금속 제조 기법으로 완, 합, 배, 반, 호 등 다양한 금은기를 생산하였으며, 궁정과 귀족 계층에서 널리 사용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아시아 문화가 유입되어 당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이국풍이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형태의 금은제 그릇이 제작되었다. 손잡이가 있는 잔, 굽다리 은잔 등은 서아시아 그릇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들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6<1. 사자 꽃무늬 은접시,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7<2. 원앙무늬 합,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8<3. 사자 보상화무늬 합,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0<1. 상자,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1<2. 포도 국화 넝쿨무늬 병,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2
<3. 당초문이 새겨진 잔, 당><4. 손잡이가 달린 잔,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3<5. 꽃 새 넝쿨무늬가 새겨진 은제 가위,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5<1. 상자,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6
<2. 동자무늬 주자, 요(遼, 916~11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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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꽃모양 잔, 요>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8
<4. 귀때잔, 요>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9
<5. 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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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굽다리잔, 요>

굽과 몸통이 모두 밖으로 벌어진 굽다리잔이다. 굽 하단은 작은 금 알갱이를 붙이는 누금세공 기법으로 장식했다. 몸통 바같 면에는 큰 보상화(寶相華) 무늬와 활짝 핀 꽃무늬를 번갈아 새겼다. 그릇 안쪽 바닥 중앙에는 두들겨서 표현하는 타출(打出)기법으로 거북이를 표현하였고, 그 주변에는 8개의 보상화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몸통 외면에도 보상화 무늬 12개를 음각했고 문양 사이사이에 꽃잎이 4개인 꽃무늬를 장식했다. 굽 주변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1026년에 제기용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도용(陶俑)은 중국에서 죽은이와 함께 묻는 인물.동물의 상을 말하며 명기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는 현실의 사람이나 가축 등을 본 떠 만들어 죽은이를 저승으로 호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전국시대 순장제도가 사라지면서 예기(禮器)제도가 무의미해지고 껴묻거리의 종류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대 이전에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기, 마구류가 주로 매장되었지만, 한대 이후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실감나게 표현한 인물과 동물도용 제작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매장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2<도용>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3<도용>

힘이 넘치는 사실성이 돋보이는 도용이다. 서역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서역지방을 통해서 외국말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인 남북조시대까지는 다리가 짧은 중국 토종말 형태로 만들어지진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6<도용>

도용(陶俑)
진.한대에는 많은 부장품을 함께 묻는 후장(厚葬)제도가 유행하면서 지배층 무덤의 부장품 종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대 이전 무덤에서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禮器)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기, 마구류들이 출토된 반면, 한대 이후 무덤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표현한 인물과 동물 도용이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당대에는 무덤을 지키는 용도로 채색이 화려한 삼채 진묘수, 말, 낙타 등을 함께 매장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1<2. 문관과 무사, 남북조>

죽은 자를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무덤에 부장되는 문관과 무사 모습의 도용이다. 복장은 모두 호복(胡服) 차림이다. 호복은 전국시대에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궁술과 함께 기마에 편한 복장이 북방 유목문화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바지와 길이가 짧은 웃옷을 의미한다. 북조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평상복과 조복으로 입을 만큼 정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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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 탄 여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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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호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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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를 든 인물, 당>

손에 매를 들고 사냥하는 인물 모습의 도용이다. 북방 민족의 옷인 호복을 입고 복두를 쓴 남장한 여성으로, 당대에 매사냥은 여성들의 대표적인 야외 오락이었다. 인물은 옷깃을 양쪽으로 열어젖힌 번령포(飜領袍)를 입었고 허리에는 호풍의 여러 물품을 드리운 첩섭대(䩞鞢帶)를 둘렀는데, 이는 돌궐의 복제에서 유래된 것이다.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던 당대에는 호풍이 이국 양식의 대명사로 여겨져 민간 및 여성들에게까지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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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성과 여성, 서한>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4<1. 무덤을 지키는 괴수, 남북조>

외부의 나쁜 기운으로부터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에 매장하는 괴수 모양 도용이다. 진묘수는 날카로운 사슴의 뿔 또는 사자의 갈기, 긴 혀, 괴기스럽게 포효하는 괴수의 얼굴 등이 특징인데, 이것은 보는 이를 위협하여 감히 무덤 내부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 진묘수는 네 발 짐승의 몸에 눈을 부릅 뜬 무서운 사람의 얼굴을 하였고 등의 갈기는 위로 곤두섰다. 이지러진 얼굴 표정에 보이는 생동감과 안정적인 자세는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39
<2. 무덤을 지키는 괴수(鎭墓獸),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5
<4. 소,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40
<1. 당삼채말,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41
<2. 말, 남북조>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42
<3. 낙타, 당>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2.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하,상,주,춘추전국,진,한)

기원전 3,000 ~ 5,000 년 전 황하 유역에 번성했던 신석기 앙소문화(仰韶文化)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섰던 선사문화로 여겨진다. 중국에서 확인된 앙소문화유적의 2/5 정도인 2,000 여개의 유적이 섬서성에 분포하고 있는데, 바닥이 뾰족한 항아리와 도기가 유명하다. 섬서지역은 앙소문화의 중심지에 있었으며 인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상호 작용을 통해 지역 간의 통일을 촉진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1<채색항아리(彩陶), 신석기시대 앙소문화>

앙소문화(仰韶文化)는 황하 중상류에서 발생한 신석기 문화이며, 이 토기는 앙소문화권에서 생산된 것이다. 토기 표면에 흑색의 굵은 선으로 그린 반원형과 격자무늬, 그물무늬가 있고 허리 부분에는 양쪽으로 손잡이가 달려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갑골문(甲骨文)은 “계문(契文)”, “복사(卜辭), “라고도 부른다. 중국 상(商)말에서 주(周)초(기원전 1,300~1,100년경)까지 왕실에서 점복(占卜)의 결과를 거북껍질이나 동물뼈에 기록한 문자이다. 상나라 은허 유척에서 발견된 초기의 갑골문은 물체의 형상에 표현한 상형문자로 약 4,500여자 정도이다. 갑골문에서 발견된 문자는 내용이 확대되어 지사자(指事字, 상형자를 응용해서 만든 글자),상형자.회의자(여러개 문자를 합쳐 뜻을 만듬)뿐만 아리자 일부 형성자도 발견된다. 갑골문에 적힌 내용은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천문, 지리, 국방, 인물, 정벌, 교통, 의복, 목축, 종교 등 다양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2<갑골문(甲骨文), 상 기원전 16~11세기>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3 <갑골문(甲骨文), 상 기원전 16~11세기>

갑골문은 중국의 고대 문자로 거북이 배와 짐승 뼈에 새겨진 상형문자이다. 중국 상나라 유적에서 발견된 이후 중국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연대는 기원전 1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까지 십여 만 편에 4,600자 정도가 발견되었고, 그중 1,700여 자가 해독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고대 중국인들은 신체의 아홉개의 구멍을 금옥(金玉)으로 막으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하여 시신에 옥을 부장했는데, 이를 장옥(葬玉)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옥이 신령스러운 힘을 지녔다고 믿었는데, 매미는 부활, 돼지는 먹을 거리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4<1. 옥함, 2. 옥벽, 한>

옥편(玉片)은 시신이 입는 옥의(玉衣)의 일부로 네 모서리에는 끈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을 뚫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5<3. 색옥, 4. 옥돈, 5. 옥편(玉片), 한>

장옥(葬玉, Funerary Jades)
고대 중국인들은 옥이 시신을 보호하고 죽은 이를 선계(仙界)로 인도라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신체의 아홉 구멍을 금옥(金玉)으로 막으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하여 시신에 옥을 부장했는데, 이를 장옥(葬玉)이라고 한다. 한대의 장옥은 용도에 따라 입믈 막는 함옥(含玉), 신체의 구멍을 막는 색옥(塞玉), 손에 쥐는 옥돈(玉豚), 가슴에 얹는 옥벽(玉璧) 등으로 구분된다. 매미모양의 함옥은 부활을 의미하고, 색옥은 유체의 정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며, 손에 쥔 돼지모양의 옥돈은 내세에서 먹을 양식을 상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국의 고대 청동기는 하(夏)나라때부터 만들기었으며, 지금도 그 광택이 수려하여 당시의 수준 높았던 주조 기술을 알 수 있다. 상(商).주(周)대에는 예기로써 신분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사용되었으며, 진한대 이후 점점 쇠퇴하였다. 그릇 안쪽에 새겨진 금문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제작자의 이름 등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6<청동예기>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35
<1. 청동호(靑銅壺), 상 기원전 16~11세기>

청동기로 만든 술 담는 의례용 그릇이다. 몸체는 타원형이고 그릇 표면에는 용과 새 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양쪽에 귀가 달려 있다. 전형적인 상대 말기의 청동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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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동호, 상>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37
<3. 청동고(靑銅觚),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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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동고, 상>

고(觚)는 술을 담아 마셨던 잔이다. 나팔모양의 고는 오래된 청동 예기(禮器)로 상 말기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술잔 표면에는 상상 속의 괴수 도철(饕餮)무늬를 새겼고 잔 아래 바닥 안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7<5. 청동정(靑銅鼎), 상>

정(鼎)은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다리가 3개 또는 4개 달린 솥이다. 제사와 연회에서 육류를 담아 끓이는 데 사용했다. 지배층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물로 정의 앞, 뒷면을 상상 속의 괴수 도철무늬로 장식하였다. 정 안에는 ‘子’ 모양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8<6. 청동궤(靑銅簋), 서주 기원전 11세기 ~ 771년>

중국 고대의 청동 예기인 궤(簋)와 정(鼎)은 소유자의 신분이 높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그릇으로, 여기에 곡식을 담았다. 이 궤는 안쪽 바닥 가운데에 상형문자로 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국 고대문화
중국 고대 문명은 신석기시대의 채도(彩陶)와 옥기(玉器), 청동기시대의 갑골문과 청동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채도는 정착 생활과 농경이 시작되면서 생산되었으며, 도기 표면에는 동물무늬나 기하학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옥기는 지배계급의 상징물로서 주술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장신구 구실을 했다. 청동기는 고대국가 형성과 함께 제작되기 시작하여 주로 상나라와 주나라 때 제기와 식기, 무기 등으로 제작되었다. 왕과 제후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매장된 다양한 청동기가 발견되는데 신분계급에 따라 청동기의 매장 수량이 달랐다. 또한 청동그릇에는 사람이름과 관직명,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금문(金文)이 새겨져 있어서 당시의 사회 상황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껴묻거리로 만들어진 누각 모형이다. 4층 건물 형태로 주택, 부엌 등과는 달리 실제 생활하는 용도는 아니다. 사후세계에서 신선처럼 살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망루 형태의 궐(闕)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조시대 이후 불교의 목탑과 석탑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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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모형, 동한(東漢, 25~220년), 녹유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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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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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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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쪽 옆에서 본 모습>

한대(漢代)에는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 풍속이 유행하여 무덤에도 다양한 껴묻거리를 함께 묻었는데, 그 가운데는 집, 부엌, 축사, 방앗간, 화장실 등 망자를 위한 건축 모형도 있다. 이 망루 모형은 4층이며 층마다 난간을 만들어 인물상을 배치하고, 지붕 처마 끝에는 4개의 꽃잎이 달린 꽃모양 장식을 부착했다. 누각 모형의 양식은 한대의 실제 건축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신선 사상과 관련하여 망자의 사후 영생을 기원하는 관념적 건축이하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한(漢)대 막새기와에 새겨진 내용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1~12 개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4자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 의미는 상서로운 단어, 공직, 궁궐, 능원, 관역(關驛)의 이름 등 다양하다.  주제는 사회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으며 인장 글씨 스타일로 서예적인 가치를 보여준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9<1. ‘부귀만세(富貴萬歲)’가 적힌 수막새, 한><2. 구름과 나무무늬 수막새,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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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철무늬 막새,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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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꽃무늬 수막새, 전국시대><5. 도철무늬 막새,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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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물무니 수막새,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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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무 동물무늬 반원막새,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건죽의 미- 기와
기와는 비바람으로부터 지붕을 보호하고 동시에 건축을 장식하는 기능을 한다. 중국은 주나라 때부터 왕실을 주임으로 기와를 사용했으며, 전국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기와에는 시대와 출토 지역에 따라 귀신, 사슴, 나무 등 다양한 무늬가 표현되어 있으며, 이외에 좋은 글귀를 새겨 넣기도 했다. 수.당대 이후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연꽃무늬 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송.원대 이후에는 청색과 황색 유약을 발라 구워 독특한 색깔을 띠는 다양한 기와들이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청동거울은 제사장이나 부족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주술적인 용도였으나, 점차적으로 화장을 위한 일상용품으로 그 용도가 변한다. 주술적의미나 장식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그림이나 글자를 새겨 놓고 있으며, 조형미가 우수하며, 보존상태가 좋은 유물들이 많은 편이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14<청동거울>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15<1. 신선 동물무늬 거울(神獸鏡), 동한 25~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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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의자손(長宜子孫)’명 거울, 동한 25~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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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무늬 거울(龍文鏡), 한 기원전 206년 ~ 기원후 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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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용무늬 거울(龍文鏡),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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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령스러운 동물무늬 거울(獸帶鏡), 동한 25~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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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네개의 ‘산(山)’자가 새겨진 거울(四山鏡),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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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네모난 청동거울,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화장 도구 – 청동거울
고대에 주술적인 성격을 지녔던 청동거울이 점차 화장 도구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되면서,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 이르면 정교하고 수준 높은 청동거울이 만들어진다. 동판의 표면을 잘 다듬어 얼굴을 비쳐볼 수 있는 청동거울은 뒷면에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서, 거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후대에 와서도 수준 높은 주조 기법과 장식 기법을 보여주는 금속공예로 주목을 받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등잔과 마찬가지로 향을 피우는 향로는 주나라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나라 때에는 박산향로가 크게 유행하였다. 향로는 인도에 성행했는데 불교의 전래와 함께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22<1. 박산향로, 동한 25~220년, 황갈유도기>

한나라때 유행했던 박산(중첩된 산악모양) 형 뚜껑으로 바다에서 3개의 산이 용솟음치는 형상이다. 몸체의 외벽에 신선,파도,구름, 풀과 나무 등의 무늬를 새겨넣었고 술을 담던 그릇이다. 앞선 시기에는 동물모양 그릇이 많았으나 한대에는 자연을 형상하여 만든 그릇이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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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산단지, 한, 황유도기>

박산향로와 박산준(博山樽)
한대에는 신선 사상이 유행하여 불사영생(不死永生)하는 신선이 산다는 선계의 산, 즉 박산(博山)을 표현한 향로와 술잔을 많이 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박산향로에 향을 피우면서 신선을 불러내 불사약(不死藥)을 얻고자 했고, 박산준에 술을 담아 신산(神山)의 불사수(不死水)처러머 생명의 술로 변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래에 전시된 박산향로는 뾰족한 산모양 뚜껑과 형태만 남은 가는 기둥으로 보아 단순화된 후대의 작품으로 보이며, 박산준은 세속화된 도교 신앙의 영향으로 틀을 이용해 많은 수량을 찍어 낸 제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24<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황화에서 꽃핀 예술>

황하(黃河)에서 꽃핀 예술
중국은 황하 문명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광할한 영토에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거듭되면서 다채로운 문화가 전개되었다. 하나라(夏, 기원전 21~16세기)를 시작으로 상나라(商, 기원전 16~11세기)와 주나라(周, 기원전 11세기~256년)에 이르러 국가의 틀이 마련되었고, 정치적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 기원전770~221년)에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제시하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등장으로 사상과 학문이 꽃을 피운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秦, 기원전 221~206년)와 그 뒤를 이은 한나라(漢, 기원전206~기원후220년)는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고 정치사회제도를 재정비하며 통합을 이루었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 221~589년)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융성하여 중국 전역에 사찰과 석굴사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불교 사상과 미술 양식은 아시아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대(唐, 618~907년)에는 외래문화가 적극 수용되어 국제적인 성격의 문화가 융성하며 금속공예품과 삼채 도자기가 특히 발달하였다. 송대(宋, 960~1279년)에 이르면 전국의 가마에서 각기 개성을 살린 도자기들이 다양하게 생산되어 중국 도자문화가 크게 발전한다. 한편 자연의 위대함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산수화와 함께 시서화(詩書畵)의 예술이라 부르는 문인화(文人畵)가 태동하여 원대(元, 1271~1368년)에는 복고적 문인화풍으로 이어진다. 명대(明, 1368~1644년)에는 고상한 취향의 문인화가 유행하고 궁정화원 소속 직업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청대(淸, 1644~1911년)에는 서양화풍이 유행하면서 더욱 다채롭고 개성 있는 회화 세계가 펼쳐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2. 위키백과, 2023년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보물)이다. 이 당간지주는 절터 동쪽 개울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2개의 기둥이 70cm 정도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다. 기둥 안쪽에는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 윗부분은 둥글께 깎았아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위부분 꼭대기에는 네모난 홈을 팠으며 아랫부분에도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게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지만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웅장한 멋을 지니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0316_01<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09년>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0316_02<새로 보강한 기단부>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0316_15<당간을 세우는 홈>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0316_05
<옆에서 본 모습>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0316_07
<옆에서 본 모습>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0316_08
<안쪽에서 본 모습>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20230316_03<서산 보원사지 절터(사적)>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물, 높이 4.2m
당간(幢竿)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를 가진 당(幢)이라는 깃발ㅇ르 다는 깃대이다.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에 놓여 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지주는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바깥쪽에는 양측 가장자리를 따라 돌대(突帶)가 돋을 새김되어 있다.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화강암으로 새로 보강하였는데,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가지 석재들로 보아 원래는 직사각형의 기단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서산 해미읍성(사적), 충청병영이 있었던 읍성

충남 서신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해안지역을 침입하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 중 하나이다. 조선 태종 때(1471년)에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옮기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종 때 (1421년)에 완공하였다. 조선후기 효종 때(1652년)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지역 군사 거점이었다. 이후에도 무관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인근지역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70년대 이후 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등 유적지를 재정비하여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과 성문 등 주요 시설들이 잘 남아 있어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읍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1<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해미읍성(사적), 2009년>

해미읍성은 북동쪽의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넓은 평지에 성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1,5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다. 읍성은 서산 천수만 바다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있다. 남쪽으로 해미천, 동쪽으로는 황락천, 서쪽으로는 반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북쪽을 통해 가야산(해발 678m) 주변 산맥과 연결된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 주변 위성사진, 2023년>

 성벽의 높이는 4.9m이며 상부의 폭은 약 2.1m정도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큰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위쪽는 작은 돌을 사용했으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팠으며 주위에 탱자를 돌려 심어 방어를 보완하였다. 성벽 위에 조총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6<해미읍성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6<아래쪽 큰 돌로 쌓은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8<안쪽 흙으로 쌓은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 위>

해미읍성<성벽 바깥 해자>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천수만 바다가 있는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초에 쌓은 읍성의 성문으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옹성은 없다. 출입문은 돌로 쌓은 홍예가 있으며 그 위에 문루를 두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2<진남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7<안쪽에서 본 모습>

진남문은 마차 1대정도가 지나갈 정도이다. 읍성 성문의 평균적인 도로폭으로 보인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5<홍예>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4<성문 앞에 세워진 공덕비>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2009년>

성문 안쪽에는  1491년(홍치 4년)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축성연대를 기록해 놓은 글씨>

해미읍성은 조선초에 쌓은 읍성으로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천수만 바다를 향하고 있는 서남쪽에 2곳에 치성을 두고 있다. 규모는 약간 큰 편으로 포대를 설치할 수 있는 규모이나 이를 위한 방어시설은 없고 누각만 올려져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3<진남문 서쪽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문루 옆 성벽과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진남문과 성벽>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성벽과 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과 주변 성벽>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안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옆 성벽에서 보이는 관아와 청허정이 있는 동산>

SANYO DIGITAL CAMERA<서남쪽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문루>

서문은 1974년 읍성을 정비할 때 복원되었다. 서문에는 지성루(枳城樓)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었던 사실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에 옹성이나 치성 등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문>

SANYO DIGITAL CAMERA<서문 남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4<서문과 주변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0<안쪽에서 본 서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1<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9<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2<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3<북서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8<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0<북동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2<동문>

SANYO DIGITAL CAMERA<동문 문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3<동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5<동문 남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4<동문 남쪽 성벽>

읍성 내부에는 해미읍성이 폐지된 후 관아와 많은 민가들이 모여 있다. 객사는 초등학교로, 동헌은 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1970년대 읍성 복원공사를 하면서 민가들은 읍성 바깥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민가 몇채가 복원되어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9<진남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읍성 내부>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6<읍성 내부>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0<해미현 관아>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1<동헌>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2<객사>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4<동문에서 본 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5<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읍치>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7<청허정>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6<청허정에서 멀리 보이는 천수만 바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에서 보이는 민가>

SANYO DIGITAL CAMERA<민가>

서산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시대 충청도의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를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 한다. 이곳은1652년(효종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